All Chapters of 폭군이 뻐꾸기 황녀에게 집착한다: Chapter 1 - Chapter 10

19 Chapters

2. 황제의 제안

그 말에 엘로라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숨통을 옥죄는 그 그림자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붉은 눈동자가, 마치 먹잇감을 지켜보는 포식자처럼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이미 뼛속 깊이 알 수 있었다. ‘하필이면 왜 지금 그가…?’ 쿠웅-. 마치 거대한 성문이 닫히는 듯한 소리가 귓가를 짓눌렀다. 보자마자 덜컥 하고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엘로라는 공포에 젖은 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둠을 집어삼킨 듯한 새카만 머리카락 아래, 핏빛보다 붉은 눈동자가 허공에서 기이하게 도드라졌다. 그가 평소 걸칠 법한 화려한 황제의 예복이 아닌, 어둠에 녹아드는 검은 연미복 차림이었음에도 그에게서 압도적인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황궁의 공기를 갈기갈기 찢어놓는 듯했다. 칼리안이었다. “황태자… 아니, 폐하?” “그게 언제 적 칭호인데.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보군.” “제,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엘로라는 다급히 바닥에 무릎을 굽히고 머리를 조아렸다. 시야가 아찔하게 흔들렸다. 당장이라도 그의 검이 목을 겨누며 생명의 줄을 끊어버릴 것만 같았다. 칼리안의 시선은 엘로라의 정수리를 지나, 그녀의 뒤에서 떨고 있는 유모 로웰에게로 뱀처럼 스르르 옮겨갔다. “그딴 쓸데없는 인사는 집어치우고. 말해봐, 어디로 기어 나가려고 했지?” “그, 그게…” “말 하나 제대로 못 하나?” 엘로라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칼리안이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숨이 턱 막히는 압박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그는 마치 사냥감을 몰아넣는 포식자처럼 천천히, 그리고 아주 즐겁게 그녀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하하, 사과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되는 줄 아나 보군. 지금 황궁의 법도를 어기고 야반도주를 시도했다. 반역의 죄를 물어 이 자리에서 즉결처형해도 할 말이 없을 텐데.” 칼리안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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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황제의 애완동물이 되다

“내 곁에서 사라지지 마라.” 그 정도면 별로 어려울 것도 없었다. 허나 다음으로 이어진 말에 엘로라는 입을 크게 벌리며 뜨악했다. “단 한순간도. 이제부터 넌 내 곁에서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마. 잠을 자든, 식사를 하든, 어디를 가든 내 시야 안에 있어.” 황제의 서슬 퍼런 명령이 좁고 어두운 지하 통로를 메웠다. 그 목소리는 손톱을 세워 칠판을 긁는 것처럼 엘로라의 고막을 날카롭게 긁고 지나갔다. 그것은 단순히 거처를 옮기라는 통보가 아니었다. ‘나를 어디까지 감시할 셈이지?’ 엘로라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갔다. 유모의 손을 잡고 세상의 끝이라도 닿을 듯이 달렸던 그간의 시간이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이제 도망은커녕, 감금되어 살아가라는 말인가?’ 황궁이라는 거대하고 화려한 새장 속에 평생 박제된 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그녀의 온몸을 짓눌렀다. “왜, 왜 저에게 이렇게까지 하시는 건가요? 저 같은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떨리는 입술을 겨우 떼어 낸 엘로라의 물음은 허공에서 힘없이 흩어졌다. 그녀의 눈동자는 공포로 인해 잘게 흔들리고 있었고, 그 너머로 보이는 칼리안의 눈빛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깊고 어두웠다. ‘그토록 원하던 황제가 되었는데도, 왜 하필이면 아무것도 아닌 나한테 이렇게 집착을 하는 거지? ’ 칼리안은 대답 대신 느릿하게 한 걸음씩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구둣굽이 차가운 돌바닥을 울리는 소리가 엘로라의 심장 박동과 겹쳐지며 불규칙한 리듬을 만들어냈다. 그는 이내 엘로라의 턱을 거칠게 낚아채어, 강제로 눈을 맞추게 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일말의 온기도 서려 있지 않았다. 차갑게 내려앉은 시선 속에는 엘로라를 갈기갈기 찢어놓을 수도, 혹은 더 깊은 심연으로 밀어 넣을 수도 있는 오만함이 가득했다. 엘로라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의 손길을 받아냈다. 칼리안의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낮은 온도가 오히려 엘로라의 피부를 화상 입히듯 뜨겁게 달구었다. 그의 입가에 맺힌 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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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황제의 괴롭힘

밤이 되자 칼리안은 태연하게 그녀를 자신의 침실로 데려갔다. “저, 저는 제 방에서 자겠습니다.” “오늘부터 여기서 자.” “싫습니다!” “싫든 좋든 상관없어.” 엘로라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었다. 기사 하나가 그녀의 짐을 이미 침실로 옮겨놓은 뒤였다. 결국 두 사람은 같은 침대에서, 서로 등을 돌린 채 어색한 첫 밤을 맞이했다. 천장을 바라보며 엘로라는 생각했다. ‘선대 황제 폐하께서 살아 계셨더라면…’ 선대 황제는 결코 다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녀에게 최소한의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몇 번의 위기 속에서도 결정적인 순간엔 그녀 편을 들어주었던 그 사람이, 이제는 세상에 없었다. 그 울타리가 사라진 지금, 그녀를 막아설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았다. 오직 옆에 누운 이 남자의 기분에 따라 자신의 목숨이 결정될 것이었다. “잠이 안 오나.”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엘로라는 흠칫 놀랐다. “…네.” “긴장 풀어. 오늘 밤은 아무것도 안 해.” 그 말이 오히려 더 무섭게 들렸다. ‘오늘 밤은’이라는 말속에, 언젠가는 다를 수도 있다는 여지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엘로라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잠들 수 있을 리 없었지만, 잠든 척이라도 해야 이 어색한 침묵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젯밤의 긴박했던 도주 소동이 거짓말인 것처럼, 황궁의 아침은 기묘할 정도로 고요하게 밝아왔다. 처분을 기다리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엘로라에게 전해진 소식은 파격적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엘로라는 잠에서 깨자마자 어젯밤의 일이 꿈이 아니었음을 실감했다. 방문 앞에 낯선 기사 둘이 지키고 서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정원에도 평소보다 많은 병사들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설마 벌써…’ 처분이 내려진 걸까.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어젯밤 살려주겠다던 그 말이, 아침이 되니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황녀님,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그때 들려오는 시녀의 목소리에 엘로라는 겨우 정신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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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부탁 아닌 명령

엘로라는 공포와 수치심으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 겨우 입을 열어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폐하께서 현명하게 판단하시리라 믿습니다.” 그 말에 칼리안은 기분 나쁠 정도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꽉 쥐었다. “하하, 역시 넌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구나. 역시 내가 없으면 안되겠어, 그렇지?” 그 손길은 단순한 애정 행각이 아니라, 엘로라를 자신의 소유물로 옭아매려는 노골적인 과시였다. 신하들은 황제가 황녀를 곁에 끼고 다니는 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속으로 술렁였지만, 그 누구도 입 밖으로 내어 폭군의 비위를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못 하는 내가 한심해. 칼리안 말대로 난 아무것도 못 하는 바보일지도 몰라…’ 그날의 회의가 끝날 때까지 엘로라는 바닥만 보며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도했다. 폭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집착의 밧줄을 더 단단히 조여진 채, 엘로라의 비참한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 “…” “……” 그렇게 몇 시간 후, 회의장은 무거운 침묵으로 짓눌려 있었다. 대신들의 시선이 여전히 엘로라의 등 뒤에 따갑게 박혀 있었지만, 칼리안은 태연하게 서류를 정리하며 펜을 내려놓았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엘로라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공간, 칼리안의 곁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폐하, 이제 회의도 끝났으니… 저는 이만 유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더는 이렇게 폐하를 따라다니고 싶지 않습니다." 엘로라의 말에 집무실로 향하던 칼리안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붉은 눈동자에 비친 엘로라의 얼굴에는 필사적인 거부감이 서려 있었다. 칼리안은 마치 재미있는 광대라도 보는 듯한, 기묘하고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돌아가고 싶다라. 너한테 그런 선택권이 있었나?" 그가 엘로라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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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또 같은 침대에서

그의 말에 침실 안은 짙은 남색 휘장과 압도적인 위압감이 흐르고 있었다. 칼리안은 겉옷을 툭 던져두고는, 위압적인 자세로 침대 한가운데에 앉았다. 그의 붉은 눈빛이 엘로라를 꿰뚫듯 응시했다. 엘로라는 침대 가장자리에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그와 최대한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 두 사람은 서로 등을 돌린 채, 숨 막히는 긴장이 흐르는 둘쨋날 밤을 맞이했다. 이제 벌써 두 번째라서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전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으려 노력했지만, 귓가에 닿는 칼리안의 낮고 고른 숨소리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방 안의 공기는 몸에 열이 많아 더위를 잘 타는 황제 때문에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그가 내뿜는 온기만이 등 뒤에서 낯설게 느껴졌다.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먼 거리로 마주 앉은 밤이었다. 엘로라는 자신의 자유가 서서히, 하지만 완벽하게 파괴되고 있음을 느끼며 지옥 같은 시간을 견뎌냈다. "…잠이 안 오나?" 잠결인지 깨어있는지 모를 칼리안의 낮은 음성이 엘로라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 엘로라는 숨을 죽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향해 몸을 돌리려는 찰나였다. 대앵, 댕- 침실의 거대한 시계가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를 울렸다. 그의 손이 서서히 엘로라의 어깨를 향해 뻗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엘로라의 어깨가 크게 떨렸다. ‘뭘 또 요구하려고, 나한테…’ 그녀의 귓가로 낮고 위험한 그의 숨소리가 다시 한번 더 깊고 진하게 스며들었다. “안 자는 거 다 알고 있어.” “…?“ ”눈꺼풀이 이렇게 움찔거리는데 그 누가 자는 줄 알겠어. 바보도 아니고 말이야.“ “두 번 다시 떠나면 그땐 진짜 죽을 줄 알아…” 이제 슬슬 잠기가 도는 듯, 엘로라의 등 뒤에서 그녀를 꼭 껴안은 칼리안이 그리 말했다. “…” “얼른 대답이나 해.” “……” 하지만 쉽사리 그가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서.” 칼리안의 독촉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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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유모의 오래된 펜던트

칼리안의 침실에서 보낸 첫날밤 이후, 엘로라의 일상은 더욱 숨 막히는 감시의 연속이었다. 그는 엘로라를 자신의 집무실이나 침실, 어디든 자신의 시야가 닿는 곳에 두었다. 뻐꾸기 황녀라는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날까 두려운 엘로라에게, 황제의 이런 집착은 매 순간이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았다. 그렇게 며칠째였을까, 엘로라가 칼리안의 계속되는 행동에 치를 떨었다. 또 한 번의 회의가 끝난 뒤, 엘로라는 참지 못하고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폐하, 더는 이렇게 따라다니고 싶지 않습니다.” 칼리안이 서류를 넘기던 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웰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 잊었나?” 협박 한 마디에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 더 이상은 이러고 못 살겠어.’ 그녀는 굳게 결심했다. ‘역시 탈출해야겠다!’ 그때였다. 황제의 침실, 어느 날 갑자기 방안으로 경비병들이 유모인 로웰을 끌고 왔다. 로웰은 바닥에 털썩 널부러지듯이 쓰러져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으윽…” 로웰이 신음했다. 며칠째 안 본 사이 지하실 감옥에 감금되어 있었던 그녀는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그때 앞서 들어온 황제가 눈앞에서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왜 이렇게 벙쪄 있어? 감사 인사라도 하지 그래.” “어… 가, 감사합니다!” 칼리안과 함께 움직일 때가 아니면 방 안에 감금되다시피 살다가 오래간만에 아는 이를 만났다. 그러자 그게 아주 큰 은혜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만큼은 엘로라가 모든 걸 잊고 그저 기쁨에 잔뜩 취해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결국은 이렇게 만든 것도 자기면서…‘ 하지만 엘로라는 고개를 휘휘 저어 배은망덕한 생각을 날려 버렸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로웰을 다시 만날 수가 있다니…’ 엘로라는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로 여겼다. * 다음 날 아침,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일어난 칼리안이 입을 뗐다. “오늘은 내가 바쁜 일이 있어서 정무에 널 데려가지 못할 것 같군. 산책은 무리지만 그 대신 유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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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나?

한편, 집무실로 돌아온 엘로라의 귓가에는 아까 보았던 펜던트의 문양이 자꾸만 잔상처럼 남았다. 그것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었다. 어쩌면 자신의 정체와, 로웰이 평생을 바쳐 지켜온 비밀의 열쇠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때, 집무실 문을 열고 칼리안이 들어왔다. 그는 마치 엘로라의 머릿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엘로라, 표정이 왜 그렇지? 유모를 보고 온 것치고는 꽤나 심각해 보이는군." 칼리안의 다가오는 발소리에 엘로라는 본능적으로 몸을 굳혔다. 펜던트에 대한 의문은 가슴 깊은 곳으로 감춘 채, 엘로라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를 마주했다. 황궁이라는 거대한 감옥 안에서, 그녀를 둘러싼 비밀의 실타래가 조금씩 엉키기 시작하고 있었다. * 며칠 후, 엘로라는 곧장 칼리안을 찾아갔다. 웅장하다 못해 으리으리한 황제의 집무실이었다. 하얀 대리석 바닥과 그 위에 화려하게 깔린 붉은 카펫이 그녀를 반겼다. 칼리안이 자꾸만 저도 모르게 끌어올려지는 입꼬리를 간신히 내리면서 물었다.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지? 평소에는 잘 찾아오지도 않았으면서.” “그냥, 보고 싶어져서요.” “하하, 날 꾀어내려는 속셈이면 성공했어.” “그런 게 아니에요.” “응, 그래.” “진짜라니까요.” “그래, 그렇다고 치자.” “왜 안 믿으세요?” “믿으면 재미없잖아.” 아니라고 말해도 그는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엘로라는 벌써 속내를 들킨 기분이 들었다. ‘…벌써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도.’ 요즘 들어 흉흉할 정도로 안 좋던 사이에 갑작스레 부탁을 하려니 입이 바싹바싹 말라왔다. 그때 칼리안이 어련하다는 듯 물었다.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지? 아니면 뭐 갖고 싶은 거라도 있나?” “…그게.” “말해봐.” “음, 그러니까…” “왜 이렇게 뜸을 들여.” “생각 정리 중이에요.” “그럼 빨리 정리해.” “재촉하지 마세요, 더 안 나오니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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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절 좋아하시나요?

“…죄송해요.” 그걸 본 엘로라가 뒤늦게 사과했다. 칼리안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사과할 거면 부탁도 하지 마.” “그, 그래도 부탁은 하고 싶은데요.” “모순적이잖아, 그거.” “원래 사람 마음이 다 모순적이에요.” ”하, 정말이지…“ 칼리안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그래, 뭐. 네 부탁이라면… 고려해 보지.” 엘로라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칼리안은 그런 그녀를 보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정말요?” “단, 조건이 있어. 이제부터 내 곁에서 단 한 순간도 떨어지지 마.” “그, 그건 지금도 그러고 있잖아요.” “더 확실하게.” “얼마나 더 확실하게요?” “네가 내 눈앞에서 사라지는 순간, 그 벌레들은 한 마리도 남김없이 죽게 될 거야.” “그건 협박이잖아요!” “부탁을 협박으로 갚는 것뿐이야.”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여기 있잖아, 지금.” 엘로라는 말문이 막혔다. 이것은 타협이 아니라 명백한 협박이었다. 자신의 말이 그를 더 단단히 옭아매는 결과를 낳았음을 깨닫자, 그녀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대답해, 엘로라. 할 수 있겠어?” “…선택권이 있기는 한가요?” “없지.”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럼 대답은?” 어차피 선택권은 없었다. 그녀는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 알겠어요.” 칼리안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를 바라보는 엘로라의 가슴은 오히려 답답하게 조여들었다. * 그날 이후 황궁의 피바람은 눈에 띄게 잦아들었다. 그러나 엘로라가 갈망하던 자유는 그와 함께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속으로 비명을 지르면서도, 겉으로는 최대한 부드러운 얼굴을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흐음…” 칼리안이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척 턱을 괴고 소리를 냈다. 공간에 숨 막히는 긴장감이 잠겼다. “왜 그렇게 심각하세요?” “그냥, 오늘 저녁은 뭘 먹을까 고민 중이야.” “…뭐가 그렇게 심각한 고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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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좋아하는 이가 있나?

“그냥요.” “…아니, 전혀. 좀 흥미가 가는 거라면 몰라도.” 딱히 그에게서 사랑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이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 ‘역시 난 갖고 놀기 좋은 장난감일 뿐이야. 장난감한테 누가 마음을 주겠어.’ 칼리안의 흥미가 떨어지는 순간, 엘로라는 자신이 버려질 운명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했다. 그때 칼리안이 물었다. “있잖아, 내가 사람을 죽이는 게 그렇게 싫어?” “적어도 제 눈앞에서 죽이지만 않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아.” 칼리안은 정말 몰랐다는 듯이 탄성을 내뱉었다. “약속할게, 앞으로는 주의하지.” 그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 덧붙였다. “혹시 몰라, 나한테 뽀뽀라도 해주면 안 죽일지.” 애초에 그가 제시한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엘로라는 자신의 비루한 처지가 원망스러웠다. 칼리안의 품 안에서 엘로라는 자신이 개미지옥에 빠진 일개 개미처럼 느껴졌다. ‘칼리안은 이런 제 마음을 알고는 있을까.’ 엘로라가 픽 웃었다. ‘아마 모를 게 분명해.’ 어쩔 수 없이 엘로라는 칼리안에게 가까이 갔다. 그리고는 눈을 질끈 감고 그의 볼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쪽- 고작해야 찰나의 접촉이었다. 그러자 칼리안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조금 더 커졌다. 정말 그녀가 할 줄은 몰랐다는 듯, 그는 자신의 볼을 손으로 가리고 토끼눈을 한 채 엘로라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가 닫혔다. “…진심이야? 진짜 할 줄은 몰랐는데.” 칼리안의 붉은 눈동자 속에는 기묘한 열기와 함께 파도치는 듯한 혼란이 일렁였다. 그는 방금 자신이 받은 짧은 입맞춤의 온기를 확인이라도 하듯, 천천히 손을 내려 볼을 쓸어내렸다. “그동안 내가 널 어떻게 대했는지 기억할 텐데. 도망치려 발악하던 네가, 제 발로 다가와서… 이렇게?” 칼리안이 한 걸음 더 다가오자, 엘로라는 뒷걸음질 치다 어느새 집무실의 차가운 벽에 등 뒤를 부딪치고 말았다. “윽!” 벽에 부딪힌 엘로라가 짧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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