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폭군이 뻐꾸기 황녀에게 집착한다: Chapter 81 - Chapter 90

115 Chapters

80. 쓰러진 엘로라

푸른 빛의 폭풍이 잦아들고, 북부의 설원에는 비정상적일 정도의 고요가 찾아왔다.대지를 뒤흔들던 마수들의 비명도, 귀를 찢을 듯 몰아치던 눈보라도 일순간에 박제가 된 듯 멈추어 섰다.어머니 헬레네의 유산이자 대마법사의 권능을 온전히 쏟아부은 결과였다.하지만 그 대가는 가혹했다.“……엘로라?”칼리안의 목소리가 갈라진 틈새로 비집고 나왔다.그의 품 안으로 쓰러진 엘로라의 몸은 마치 갓 태어난 새끼 새처럼 가냘프고 위태로웠다.조금 전까지 찬란한 푸른 빛을 내뿜던 그녀의 눈동자는 감겨 있었고, 핏기 하나 없는 입술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엘로라! 정신 차려! 눈을 뜨란 말이다!”칼리안이 그녀를 으스러지도록 껴안으며 울부짖었다.제국을 공포로 몰아넣던 폭군의 위엄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그의 거친 손이 엘로라의 차가운 뺨을 감싸 쥐었으나, 돌아오는 것은 죽음 같은 정적뿐이었다.그는 난생처음으로 자신의 심장이 발밑으로 꺼져 내려가는 듯한 추락감을 느꼈다.자신의 둥지에 억지로 데려다 놓은 이 작은 새가, 자신을 구하고 영원히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의원! 당장 의원을 불러와라! 못 살려내면 네놈들의 목을 가장 먼저 칠 것이다!”피 냄새가 진동하는 제단 위로 칼리안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요새의 가장 깊숙하고 따뜻한 침실.벽난로에서는 장작이 타오르며 붉은 불꽃을 튕겼으나, 방 안의 공기는 얼음장보다 더 시렸다.칼리안은 자신의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와 옷을 적시는 것도 잊은 채 침대 곁을 지켰다.그의 시선은 오직 엘로라의 가슴팍이 미세하게 오르내리는 움직임에 고정되어 있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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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검은 그림자

네가 이대로 잠든다면 나는 네가 지킨 이 제국을 내 손으로 멸망시킬 것이다.” 그것은 협박이자 애원이었다. “네가 사랑하던 백성들, 네가 아끼던 유모, 그리고 너를 이렇게 만든 이 북부의 요새까지 전부 피로 씻어내 버릴 거야.” 그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그러니 제발…… 나를 혼자 두지 마라. 이 지옥 같은 세상에 나를 버리고 가지 마.” 그때였다. 칼리안의 손안에 있던 엘로라의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게 경련했다.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엘로라?” 감겨 있던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마침내 그 안의 투명한 벽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초점이 맞지 않는 흐릿한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여 칼리안의 얼굴을 찾았다. “……칼리안?”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칼리안의 세계가 다시 조립되기 시작했다. 그는 무너지듯 그녀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살아있군. 살아있어.” 그의 어깨가 떨리는 것을 느끼며, 엘로라는 힘겹게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피 냄새와 땀 냄새, 그리고 지독한 집착의 향기가 그녀의 감각을 메웠다. “울어요……? 폐하가?” “시끄럽다. 죽었다 살아난 주제에 말이 많군.” 칼리안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광기가 서려 있었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형언할 수 없는 안도감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거칠게 입을 맞추며 낮게 읊조렸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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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다가오는 위험

그러나 그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밤이 되자, 엘로라는 품속의 편지를 다시 꺼내 보았다. [별궁으로 오시오.] ‘꼭 가야 할까.’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진실을 향한 갈증이 더 컸다. ‘칼리안한테 말할까.’ 엘로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엔 나 혼자.’ 낮에 정원에서 함께 걸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 평온함을 다시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괜히 걱정만 시킬 거야.’ 로웰이 오늘 밤 할 얘기가 있다고 한 것도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별궁의 편지가 주는 절박함이 그 걸림마저 눌러버렸다. ‘유모 얘기든 뭐든, 오늘은 별궁이 먼저야.’ 몇 번이고 망설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지금껏 아무도 자신에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마음을 다잡게 했다. ‘이번엔 내가 직접 알아낼 거야.’ 결심을 굳힌 그녀는 조용히 겉옷을 챙겨 입었다. * 창밖, 달빛조차 흐린 밤이었다. -아하하! 어디선가 낮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누구 있어요?”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분명,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서늘한 느낌만은 지울 수 없었다. 등불을 챙겨 들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방문으로 향했다. 복도는 유난히 고요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심장이 점점 더 빠르게 뛰었다. 멀리서 야간 순찰을 도는 기사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재빨리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조금만 더 조심해야 해.’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궁을 벗어나는 길은 생각보다 훨씬 멀게 느껴졌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조금만 더 가면 돼.’ 스스로를 다독이며, 그녀는 계속해서 어둠 속을 걸었다. 멀리 별궁의 낡은 지붕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까지 남은 거리를 가늠하며, 그녀는 걸음을 재촉했다. 달빛 한 줌 없는 밤이었다. 오직 그녀의 각오만이, 그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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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수상한 이의 정체는

궁 밖은 조용했다. 엘로라는 그림자를 따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조금만 더.’ 별궁은 오래전부터 비어 있던 곳이었다. 인적 없는 그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멀리서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괜찮아, 그냥 새소리일 뿐이야.’ 엘로라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낡은 담벼락을 넘어서자, 잡초가 무성한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 있어요?” 대답은 없었다. 낡은 문을 밀자, 끼익 소리와 함께 어둠이 입을 벌렸다. “…들어가야겠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돌아설 수는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발밑에서 뭔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뭐지.” 낡은 액자 조각이었다. 오래전 이곳에 살았을 누군가의 흔적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액자를 집어 들었다. 빛바랜 그림 속엔, 다정하게 웃고 있는 여인과 아이의 모습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누구지.” 가슴 한구석이 이상하게 저릿했다.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이 스쳤다. 더 안으로 들어가자, 부서진 가구들 사이로 낡은 촛대 하나가 눈에 띄었다. 누군가 최근에 이곳을 다녀간 흔적처럼, 촛농이 아직 마르지 않은 채였다. ‘누군가 미리 와 있었나.’ 긴장한 채로, 그녀는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오셨군요.” 익숙한 목소리가 어둠 저편에서 들려왔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그녀는 천천히 등불을 들어 올렸다. “…누구세요.” “설마 벌써 잊으신 겁니까. 서운한데요.” 목소리의 주인이 서서히 어둠 밖으로 걸어 나왔다. 촛불 빛에 드러난 얼굴은, 낯설지 않았다. “당신…” “예, 접니다. 정원에서 뵈었던.” “진짜 여기 있었네요.” “약속은 지키는 성격이라서요.” 엘로라는 떨리는 손으로 등불을 고쳐 쥐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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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에녹과의 재회

“기다렸습니다.” 에녹이 촛불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진실이 뭔데요.” “성급하시네요. 차 한잔 정도는 하고 얘기해도 될 텐데.” “필요 없어요. 빨리 말해요.” 에녹이 어깨를 으쓱였다. “매정하시네요. 그래도 여기까지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고마울 이유 없어요. 그냥 진실이 궁금할 뿐이니까.” “좋습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 “당신, 선대 황제의 딸이 아닙니다.” 엘로라의 숨이 멎었다. “그게 무슨…” “근친이라는 소문,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얘기라는 뜻이죠.” “증거 있어요? 그냥 하는 말 아니고요.” “증거는 이미 폐하께서도 갖고 계실 텐데요.” “그럼 저는…” “누구겠습니까. 힌트는 이미 드렸을 텐데요. 그레이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엘로라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레이스…”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언젠가 서고에서 보았던 초상화 속 문양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 이름, 어디서 나온 건데요.” “당신도 이미 어렴풋이 알고 계실 텐데요. 서고에서 뭔가 보시지 않았습니까?” 엘로라의 눈이 커졌다. “그걸 어떻게…” “제가 아는 게 많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믿을 수가 없어요.” “믿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진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엘로라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겨우 버텼다. “…그럼 저는 어디서 태어난 거예요.” “그레이스령입니다. 지금은 폐허가 되었지만, 한때는 마법으로 유명했던 영지였죠.” “그럼 제 부모님은…” “어머니는 대마법사였고,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들었습니다.” “근데 왜 저는 그동안 이런 얘기 하나 못 들어본 거예요. 그레이스라는 이름조차도요.” “지워졌으니까요. 철저하게, 의도적으로.” “누가요.” “그건 후작에게 직접 물어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후작이 관련 있어요?” “깊게요. 아마 형님보다도 먼저 진실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대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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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진실의 조각

“그레이스 대공가가…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 “당신의 진짜 성이죠.” “그건 저도 알아요. 하지만 그레이스 제국에 대공가는 없지 않나요?” “하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엘로라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믿기 싫으시겠지만, 사실입니다.” “증거라도 있어요?” “곧 나올 겁니다. 이미 사방에서 조각들이 모이고 있으니까요.” 에녹이 천천히 다가왔다. “당신 어머니는 대마법사였고, 아버지는 황가의 먼 친척인 대공이었습니다. 한 8촌쯤 될까요? 그런데 어느 날, 전부 죽거나 사라졌죠.” “왜죠?” “그거야 귀족들의 견제 때문에요. 강력한 힘을 가진 가문은 늘 위험하니까. 그게 물리적인 힘이든, 권력이든 말이죠.” 엘로라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럼 저는 버려진 게 아니라…” “지켜지고 있었던 거죠, 다만 아무도 그걸 말해주지 않았을 뿐.” “그럼 왜 지금 저한테 말해주는 건데요.” “진실이 밝혀져야, 저도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으니까요.” “그게 뭔데요.” 에녹이 옅게 웃었다. “그건 나중에 알게 되실 겁니다.” “지금 말해요.” “조급해하지 마세요. 오늘은 여기까지가 딱 좋습니다.” “치사해요. 여기까지 불러놓고 반만 말해주는 게 어딨어요.” “욕심이 과하시네요. 오늘 하루 만에 다 알려드리면, 앞으로 제가 쓸모없어지지 않겠습니까.” “…결국 이용하려는 거네요.” “서로 필요한 걸 주고받는 거죠.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세요.” 엘로라는 주먹을 꽉 쥐었다. 화가 났지만, 지금은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럼 다음엔 언제 만날 건데요?” “제가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알겠어요.” 에녹이 촛불을 끄자, 방 안이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 그때 엘로라가 그를 불러세웠다. “잠깐만요! 하나만 더 물을게요.” “뭐죠.” “당신은 대체 왜 이렇게까지 저를 도와주는 거예요?” 에녹이 어둠 속에서 낮게 웃었다. “도와준다기보다는, 그저 진실이 밝혀지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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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칼리안의 추격

“에녹, 너 이 자식이...!” 칼리안의 입에서 새어 나온 목소리는 짐승의 으르렁거림에 가까웠다. 촛불이 은은하게 번지는 좁은 방 안, 에녹이 태평하게 와인 잔을 돌리고 있었다. 유배보낸 폐위된 2황자 에녹. 황가의 골칫덩이가 어떻게 이 깊은 별궁 한복판에 처박혀 있는 것인가. “오랜만입니다, 형님. 잘 지내셨습니까?” 에녹은 칼리안의 시선에 서린 살기를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실실 웃으며 빈 잔을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았다. 맑은 울리는 유리잔 소리를 뒤로 하고, 칼리안의 검끝이 퍼뜩 빛났다. “죽고 싶어 환장한 모양이군.” “환장한 건 제가 아니라 형님 같은데요? 황녀님이 또 도망갈까 봐 아주 눈이 뒤집혀서 여기까지 뛰어오셨잖습니까.” 에녹의 시선이 칼리안의 뒤에 선 엘로라를 향해 끈적하게 닿았다. “…잠깐, 둘 다 그만 좀 하세요.” 엘로라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칼리안의 옷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칼리안은 에녹을 향하던 눈을 황급히 거두어 엘로라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떨리는 손을 제 거칠고 커다란 손으로 덥석 감싸 쥐며, 목소리를 최대한 짓누르며 물었다. “이 자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어? 협박이라도 한 거야?” “협박이라니요, 형님. 서운하게.” 에녹이 피식 실소를 터뜨리며 팔짱을 꼈다. “저는 단지 황녀 전하께 흥미로운 진실을 속삭여 드렸을 뿐입니다. 오 년 전, 불타버린 그 영지의 비극이 누구의 손에서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아주 낭만적인 동화 말이죠.” 쿵. 칼리안의 심장이 바닥으로 처박히는 것 같은 끔찍한 충격이 덮쳤다. “…입 다물어.” “왜요? 형님이 숨기려 안간힘을 썼던 그날의 비밀을, 이제 와서 이 아이가 알게 된 게 그렇게 두렵습니까? 자신이 누구의 품에 안겨 개처럼 떨고 있는지 똑바로 알아야 할 거 아니야, 엘로라.” “에녹!” 칼리안이 이성을 잃고 검을 치켜들었다. 스윽-! 날카로운 검광이 촛불의 불꽃을 반으로 갈라치며 에녹의 목덜미를 향해 무자비하게 뻗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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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지독한 재회

“엘로라!” 칼리안이 문을 벌컥 박차고 들어왔다. 그런 그의 눈에 에녹과 마주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이 곧바로 박혀 들었다. “…폐하?” 엘로라가 당황한 기색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괜찮아? 다친 데는 없는 거지?” “네, 다치진 않았어요.” 칼리안의 서늘한 시선이 곧장 에녹을 향했다. 방금 전까지의 다정함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온몸에서 살기가 뚝뚝 묻어났다. “감히 내 영역에.” “오셨습니까, 형님.” 에녹은 칼리안의 기세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은 채였다. 그는 그저 느긋한 태도로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칼리안이 물었다. “네놈이 여기서 무슨 짓을 벌인 거지.” “그냥 뭐… 진실을 조금 일찍 전해드렸을 뿐인데요. 그렇게 노려보실 것까지야.”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칼리안의 검이 맹렬한 기세로 순식간에 에녹의 목덜미 바로 앞에 닿았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그럼 뼈도 못 추릴 테니까.” “글쎄요, 이미 너무 늦은 것 같은데.” 에녹이 가소롭다는 듯 씩 웃었다. “이미 자기가 누구인지 다 알아버렸으니까요.” 칼리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엘로라를 바라보았다. “…엘로라, 저자가 뭐라고 지껄인 거지.” 엘로라는 잠시 숨을 고르며 망설이다가, 이내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제 뿌리에 대한 얘기요. 이미 다 알고 계셨던 거죠?” 칼리안의 굳건하던 표정이 거짓말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미안해. 더 일찍, 내 입으로 직접 말해줬어야 했는데.” “그것보다, 이 사람이 더 빨리 말해준 건데요? 이미 다 알고 계셨으면서… 왜 저만 바보처럼 속이고 계셨던 거예요?” “확신이 서기 전까진 함부로 말할 수가 없었어.” “제 얘긴데, 왜 당사자인 제 말은 듣지 않고서요?” “상처받을까 봐 그랬어. 어설픈 진실은 가짜 희망보다 더 독이 될 수 있으니까.” “결국 제 입으로 직접 진실을 알기도 전에, 이 사람 입을 통해서 먼저 듣게 만들었잖아요.” 칼리안은 더 이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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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위태로운 협상

“무슨 뜻이지.” 칼리안의 서늘한 목소리가 어두운 공간을 가르며 내려앉았다. 그 서슬 퍼런 살기 속에서도 에녹은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비틀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진실은 이미 이 궁궐 안팎으로 퍼지기 시작했으니까요. 형님도, 그리고 저 여인도 이제는 절대 돌이킬 수 없습니다.” “죽고 싶나.” “절 죽인다고 진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까?” 칼리안의 하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검자루를 쥔 손마디에 핏기가 가시며 팽팽한 힘이 들어갔다. 당장이라도 그의 목을 베어버릴 듯한 기세였다. “폐하.” 그 순간, 엘로라가 그의 단단한 팔을 두 손으로 꽉 붙잡았다. “죽이지 마세요, 제발요.” “…엘로라.” “이 사람을 여기서 죽이면, 우리가 찾으려던 진실도 같이 묻혀버려요. 그리고… 저는 이 사람이 굳이 말해주지 않았어도, 이미 다 알아버렸는걸요.” 칼리안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잠시 갈등했다. 하지만 그녀의 간절한 눈빛을 바라보며, 그는 결국 천천히 검을 거두어 칼집에 밀어 넣었다. “다음은 없다.” “기억해두죠, 형님.” “그리고 에녹.” “…또 무슨 말씀이신가요.” “이 여자, 정말 소중히 여기신다면… 앞으로는 더 이상 숨기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게 더 독이 되어 상처를 키우니까요.” 에녹은 제국을 뒤흔들 듯 의외의 말을 남겼다. 그리고 여유로운 웃음을 흘리며 짙은 어둠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칼리안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에녹의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엘로라는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괜찮아?” 칼리안이 서둘러 그녀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품에 감싸 안았다. “…다리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요.” “오늘 하루 종일 쉴 틈도 없이 몰아쳤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냥 모든 게 다 실감이 안 나요.” “천천히 얘기해도 돼.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엘로라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단단한 손을 꼭 붙잡았다. 뱃속을 짓누르던 두려움의 떨림이 그의 온기를 통해 조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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