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서천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은 지독하게 길었다.
차창 밖으로 흐르는 야경은 혜연과 함께 보았던 그 찬란한 노을과는 달리 차갑고 건조했다.
형제의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상수는 무거운 여행가방을 거실 한복판에 내팽개치듯 내려놓았다.
텅 빈 집안에는 정적만이 가득했다.
늘 수다스러운 농담으로 공기를 데워놓던 형 재현이 부재한 공간은 상수의 처지와 닮아 있었다.
상수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소파에 깊숙이 등을 기대고 앉았다.
어둠 속에서 상수는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수백 번의 실험과 수천 번의 조향 끝에 남은 건, 향기조차 잃어버린 듯한 무취의 고독뿐이었다.
‘혜연 씨의 세상은 이제 평온해졌을까.&r
현관문이 닫히기도 전, 엄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복도를 쨍하게 울렸다."그나저나 혜연아, 너 아직도 그 놈이랑 연락하니? 소영이 전 남친, 그 강상수인지 뭔지 하는 놈!""아니! 프로젝트 다 끝났어. 그런 놈팽이랑 왜 연락해? 안 해!"혜연은 제 발 저린 도둑처럼 소리를 버럭 질렀다.문밖 벽 뒤에 붙어있던 상수는 '놈팽이'라는 단어가 고막을 때리자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이 나왔다.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준 조향사로 대접받던 그가 졸지에 오피스텔 복도에서 놈팽이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엄마의 독설은 멈추지 않았다."그래, 잘했다! 그 놈 아주 질이 안 좋다더만. 냄새로 여자들 홀리고 다니는 바람둥이라며?소영이가 그 놈팽이 때문에 흘린 눈물이 몇 리터야.그런 뱀 같은 놈이랑 엮이면 인생 종치는 거야. 얼른 들어와, 엄마가 갈비찜 해왔어."상수는 문밖에서 혜연에게 문자를 보냈다.[나 그냥 갈게요. 장 봐온 건 문 앞에 둘 테니 나중에 들여놔요. 어머니랑 맛있게 먹어요, '놈팽이'는 이만 물러갑니다.]혜연은 문자를 확인하며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별수 없었다.복도에서 들리는 상수의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혜연은 찝찝한 마음이었다."자고 갈 거니까 걱정 마라. 내일 아침까지 해 먹이고 갈게."엄마의 선포에 혜연은 가슴이 철렁했다.오늘 밤 상수와의 연락은 물 건너간 것인가 싶어 앞이 캄캄했다.
전날 상수의 작업실에서 입었던 낡은 허물을 벗어던지고,그가 준비해준 새 옷을 걸치고 나서는 아침은 생경하다 못해 비현실적이었다.몸을 감싸는 실크 블라우스의 매끄러운 감촉은마치 상수의 손길이 하루 종일 자신의 살결을 붙들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혜연은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상수가 쥐여준 '인비저블' 오일을 귀 뒤에 아주 살짝 찍어 발랐다.손끝에 닿는 오일의 농축된 향기가 코끝을 스치자,어제 지하 작업실에서의 그 지독하고도 뜨거웠던 기억이 선명한 영상처럼 망막을 스쳤다.이것은 이제 그녀의 비밀스러운 문장이자,도덕적 비난으로 가득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격리하는 유일한 보호막이었다.직장인 박혜연의 유니폼이었던 낡은 정장 대신,상수가 선택한 이 고급스러운 질감은 그녀의 신분마저 조향사가 설계한 대로 재구성하는 듯했다.회사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혜연은 멀리서 걸어오는 민지를 발견하고는 우뚝 멈춰 섰다.민지 역시 혜연을 보자마자 입을 벌린 채 제자리에 얼어붙었다.두 사람의 옷이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브랜드도, 소재도, 심지어 전체적인 실루엣까지.혜연이 화이트 블라우스에 네이비 슬랙스로 냉철함을 강조했다면,민지는 베이지 톤의 블라우스에 차콜 슬랙스를 매치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세련된 비즈니스 룩을 완성하고 있었다."야, 박혜연. 너 뭐야? 그 옷... 설마 강상수 작가가 사준 거야?"
격정의 파고가 지나간 뒤에도 혜연은 상수를 놓아주지 않았다.그녀는 상수의 품에 매달려 그의 땀에 젖은 어깨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흐느꼈다.그것은 슬픔이라기보다, 너무나도 거대한 안도감이 가져온 발작에 가까웠다.상수는 아무 말 없이 혜연의 등을 쓸어내리며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혜연의 흐느낌이 잦아들 무렵, 상수는 그녀를 안아 일으켜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혜연은 상수의 품이 주는 온기 덕분에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상수는 혜연의 젖은 속눈썹을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그의 눈빛은 아까의 거친 광기는 간데없이, 오직 혜연만을 담아내는 깊고 투명한 호수 같았다.상수는 혜연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이제 괜찮아요. 여기서는 아무도 당신을 해칠 수 없어요. 소영이도, 그 누구도.”그 ‘괜찮다’는 말 한마디가 혜연의 심장 깊은 곳에 박혀있던 가시를 뽑아내는 듯했다.혜연은 상수의 가슴에 귀를 대고 그의 규칙적인 심장 박동을 들었다.이 박동 소리가 들리는 동안만큼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상수는 혜연의 어깨를 감쓴 채 그녀의 정수리에 코를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오늘 당신한테서 다른 향이 섞여 있어서 조금 화가 났어요. 그 복숭아 향 말이에요.당신은 그런 싸구려 단내로 가려질 사람이 아닌데.”
이자카야를 빠져나와 올라탄 택시 안, 혜연은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서울의 야경이 비현실적인 잔상처럼 흩어졌다.방금 전까지 마주했던 소영의 그 서늘한 눈빛."복숭아 향 밑에 깔린 이 무거운 나무 냄새, 이거 강상수가 옛날에 좋아하던 베이스 노트 같은데"혼잣말처럼 던진 소영의 그 의문이 여전히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민지가 옆에서 필사적으로"어제 혜연이가 밀폐된 조향실에서 밤새 샘플들을 확인해서 그렇다"고 방어막을 쳐주지 않았다면,혜연은 그 자리에서 비명을 지르며 무너졌을지도 모른다.집으로 가야 한다는 이성은 이미 마비된 지 오래였다.지금 혜연에게 필요한 것은 안락한 자신의 침대가 아니라, 자신을 파멸시키더라도이 지독한 현실의 의심을 덮어줄 단 하나의 유일한 향기였다.“기사님, 최대한 빨리 가주세요.”혜연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20년 우정의 무게와 직장인으로서 사회적 가면이 한꺼번에 벗겨져 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작업실 도어록 앞에 선 혜연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상수가 알려준 새 비밀번호.0-3-2-0.자신의 생일 네 자리를 누르는 순간, 혜연은 세상으로부터 완벽하게 격리된 듯한 기묘한 해방감을 느꼈다.이 문 안쪽은 소영의 추궁도, 민지의 걱정도 닿지 않는 유일한 성역이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민지한테 다 털어놨어요. 냄새 너무 야하다고 복숭아 향으로 덧칠당하는 중이에요.근데 신기하죠. 살결 안쪽에서 당신 냄새가 계속 나요. 무서운데... 좋아요. 나 어떡하죠.]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전화가 걸려 왔다.좁은 화장실 칸 안에 상수의 낮은 저음이 울려 퍼졌다.“목소리 듣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네.”“...상수 씨, 저 지금 회사예요.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알아요. 그냥... 어제 당신의 고백이 자꾸 생각나서 일이 안 잡히네. 한 번만 더 불러주면 안 돼요?”상수가 처음으로 내 뱉은 사랑한다는 말.그 말이 혜연의 혀끝을 간지럽혔다.10년 동안 쌓아온 냉철한 직장인의 자아는 사무실에서 조차 상수의 목소리 한 번에 속절없이 녹아내렸다.“갈게요. 오늘 퇴근하자마자 바로 갈게요.”오후 5시.창밖으로 어스름한 노을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 혜연은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평소보다 이른 퇴근이었다.하지만 엘리베이터를 내려 로비로 향하던 혜연의 발걸음이 돌처럼 굳어버렸다.로비 입구, 유리문 너머로 서성이는 익숙한 인영.소영이었다.약속도 없이 불쑥 나타난 그녀는 초조한 듯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멀리서 혜연을 발견하자마자 환하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혜연아! 너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상수의 작업실의 새벽은 농밀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혜연은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억지로 눈을 떴다.전신을 짓누르는 노곤함보다 먼저 감각을 깨운 것은 목덜미에 닿는 상수의 뜨거운 숨결이었다.어제 그가 전한 애틋한 고백과 진심의 흔적들이 몸 구석구석에서 아늑한 잔상으로 남았다.단순한 피로가 아니었다.그것은 박혜연이라는 견고한 설계도 위에 상수가 제멋대로 그어버린 굵은 선들의 잔상이었다.“...더 자도 되는데.”낮게 가라앉은 상수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혜연은 대답 대신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차가운 액정의 감촉이 현실을 일깨웠다.전원을 켜자마자 쏟아지는 알림들.액정 위로 뜬 선명한 붉은 숫자가 심장을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다.[부재중 전화 7통: 윤소영]마지막 문자는 새벽 2시였다.[너 집 아냐? 벨 눌러도 대답 없네. 불도 꺼져 있고. 너 어제 파티 끝나고 어디로 증발한 거야? 걱정되니까 보면 연락해.]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20년 우정이라는 이름의 촘촘한 그물이 목을 조여오는 기분이었다.상수는 혜연의 경직된 어깨를 눈치챈 듯, 그녀를 뒤에서 가만히 끌어안으며 어깨선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그의 입술이 닿는 곳마다 어제의 다정한 기억이 불꽃처럼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