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e Kapitel von 내 친구의 남자였던, 그에게 향하다.: Kapitel 161 – Kapitel 170

220 Kapitel

161화 : 부재의 무게 : 부치지 못한 편지 #1

혜연에게 남겨진 실질적인 형벌은 이제야 겨우 시작되었다. 회사 로비의 회전문을 통과하는 순간, 혜연은 거대한 진공 청소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출근길, 로비의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구두 소리가 유난히 날카롭게 울렸다. 평소라면 수백 명의 발소리에 묻혔을 그 소리가, 오늘따라 혜연의 고막을 때리는 채찍질 같았다. 사람들의 시선은 점성 높은 검은 액체처럼 혜연의 온몸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로비에 서서 커피를 마시던 타 팀 직원들이 혜연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그녀의 등이 채 멀어지기도 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바짝 붙였다. 혜연은 돌아보지 않아도 그들의 입술 모양이 그리는 잔인한 단어들을 읽을 수 있었다.'저 여자야? 10년 차라더니, 결국 친구 남자랑...''블라인드 봤어? 완전 소름 돋더라.'엘리베이터의 좁은 밀실은 그야말로 고문실이었다. 층수가 올라갈 때마다 혜연은 자신의 피부가 한 꺼풀씩 벗겨져 나가는 수치심을 견뎌야 했다. 누군가 옆 사람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눈짓을 보낼 때마다, 혜연은 벽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마치 오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느껴졌다. 빳빳하게 세운 재킷 깃이 목을 조여왔다. 그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갑옷이 아니라, 서서히 숨통을 끊어놓는 올가미였다.그렇게 힘들게 올라온 사무실, 그런 그녀를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김진우 팀장의 서늘하고도 기묘한 시선이었다. 회의실에서 던졌던 자신의 '조언'을 정면으로 무시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도면을 펼치는 혜연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당혹감을 넘어선 노골적인 불쾌함이 서려 있었다. 그것은 마치 '왜 아직도 거기 서 있느냐'는 무언의 압박이자, 조직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불순물을 향한 거부 반응이었다. 혜연은 그 시선이 자신의 등 뒤를 날카롭게 긁어내릴 때마다 심장이 오그라드는 모멸감을 느꼈지만, 짐짓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떨리는 손가락으로 마우스를 쥐었다. 팀장의 눈빛은 이제 단순한 권유가 아니라 퇴출을 명령하는 거대한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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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화 : 부재의 무게 : 부치지 못한 편지 #2

같은 시각, 상수는 이름 모를 산자락 아래 낡은 민박집 평상에 앉아 있었다. 그의 손톱 밑에는 흙먼지가 까맣게 끼어 있었고, 옷자락에서는 도시의 세련된 향기 대신 축축한 흙내음과 거친 풀비린내가 진동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산과 들을 헤맸다. 새로운 향료의 원천을 찾는다는 건 명분일 뿐이었다. 사실은 머릿속을 가득 채운 혜연의 눈동자를 지워내기 위한 처절한 고행이었다.산길을 걷다 발에 밟히는 야생 허브의 향을 맡을 때도, 새벽녘 숲의 서늘한 습기를 들이마실 때도 상수의 모든 감각은 단 하나의 과녁으로 수렴했다.'이 향기가 혜연 씨의 짓무른 마음을 조금은 덮어줄 수 있을까.''이 서늘한 감촉이 그녀의 달아오른 뺨을 식혀줄 수 있을까.'상수는 주머니 속의 작은 유리병을 매만졌다. 그 안에는 오늘 채집한 산초나무의 어린잎이 담겨 있었다. 혜연에게 이 향기를 전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서울로 차를 돌릴 수 없었다. 그가 마주했던 클라이언트의 그 경멸 어린 눈빛이 혜연의 회사 로비에서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을 것을 알기에.지금 나의 존재는 혜연에게 독(毒)이다. 내가 그녀의 곁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그녀를 '상간녀'라는 프레임에 가두고 난도질할 것이다. 나의 사랑이 그녀의 커리어를 파괴하고, 평온했던 호수를 진흙탕으로 만들었다는 자책감이 상수의 심장을 갉아먹었다.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국도를 지날 때마다, '서울'이라고 적힌 이정표가 나타나면 상수의 손은 본능적으로 핸들을 꺾으려 꿈틀거렸다. 브레이크를 밟는 발에 너무 힘을 주어 쥐가 날 지경이었다.'혜연 씨는 강하니까 잘 버티고 있겠지. 나 같은 놈 없어도 그녀는 훌륭한 디자이너니까.'상수는 스스로를 속이며 마른세수를 했다. 하지만 정작 무너지고 있는 건 자기 자신이었다. 혜연이 없는 상수의 세계는 향기를 잃은 꽃과 같았다. 아무리 귀한 향료를 손에 넣어도, 그것을 공유할 그녀가 없으니 모든 감각이 무채색으로 변해갔다. 그녀가 없는 공간에서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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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화 : 각성의 향기 #1

충청도의 어느 이름 모를 산기슭, 민박집의 밤은 잔인할 정도로 고요했다. 상수는 전등조차 켜지 않은 채 어둠 속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낡은 창호지 문 너머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조차 비수처럼 날카롭게 고막을 찔렀다. 방 안에는 그가 며칠간 미친 듯이 채집한 약초와 들풀들이 뒤섞여 기묘하고도 매캐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것은 생명력이 거세된 식물들이 좁은 방 안에서 서서히 말라 죽어가며 내뱉는 단명(斷命)의 향기였고, 동시에 상수의 부패한 양심이 내뿜는 악취이기도 했다.상수는 주머니 속에서 꼬깃꼬깃해진 혜연의 사진을 꺼냈다. 스마트폰 액정 속의 차가운 빛이 아닌, 지갑 속에 넣어두어 모서리가 하얗게 닳아버린 인화된 사진. 그 속의 혜연은 선도리 해변에서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을 볼 때마다 상수의 심장에는 염산이 부어지는 것 같은 통증이 일었다.'내가 너를 지키겠다고 했지. 그런데 지금 나는 어디에 있나.'상수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흙이 끼고 거친 풀독에 올라 상처가 난 조향사의 손. 그는 이 손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향기를 만들고 혜연의 상처를 어루만지려 했다. 하지만 현실은 어땠나. 회사에서 팀장에 불려가 수치심에 고개를 숙였을 혜연, 사내 카페와 엘리베이터라는 좁은 감옥 속에서 타인의 시선에 난도질당하고 있을 혜연. 상수는 그 모든 지옥의 풍경을 머릿속으로 그리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 풍경 밖으로 도망쳐 '유배'라는 우아한 이름을 붙였다."내가 곁에 없어야 그녀가 산다."그것은 상수가 스스로에게 건 최면이었다. 하지만 그 최면은 오늘 밤, 지독한 악취를 풍기며 썩어 문드러졌다. 상수는 문득 방 한구석에 놓인 거울 속 자신의 실루엣을 보았다. 어둠 속에 비친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 떠난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저 비난의 화살이 무서워, 혹은 자신이 입을 타격이 두려워 혜연을 홀로 사지에 남겨두고 도망친 '비겁한 방관자'에 불과했다.어둠 속에서도 자신의 비루한 실루엣은 선명했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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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화 : 각성의 향기 #2

상수는 순간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에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는 수저를 내려놓고 상수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네?""지난번, 네가 그 여자를 찾겠다고 내 앞에서 달려 나갔을 때... 난 사실 기뻤다. 드디어 내 아들이 제 생각대로, 제 의지대로 사는구나 싶어서."아버지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상수의 영혼을 발가벗기는 듯한 일갈을 이어갔다."그런데 지금 너희 형제가 하는 말을 듣자 하니, 넌 여전히 문제를 피하려고만 하는구나. 상수야, 넌 예전부터 그랬지."상수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붉어진 얼굴이 부끄러움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내가 너 어릴 때부터 너에게 이것저것 물었을 때, 넌 항상 내 말이 맞다고만 했다. 난 네가 나한테 따져 묻기를 바랐다. 아버지 생각은 왜 그러시냐고, 내 생각은 다르다고 소리라도 지르길 바랐어. 하지만 넌 그저 순종하는 척하며 속으로 네 문을 닫아버렸지. 그것 또한 너의 비겁함이었다."상수의 주먹이 식탁 밑에서 떨렸다. 평생 '착한 아들'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 갈등을 회피해온 자신의 본성이 아버지라는 거울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상수의 머릿속에 과거의 수많은 장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진로를 결정할 때, 전공을 택할 때, 심지어 사소한 반찬 투정조차 하지 않았던 어린 날의 자신. 아버지가 "이게 좋겠지?"라고 물으면, 상수는 그것이 질문이 아닌 명령이라 지레짐작하며 "네, 맞아요"라고 답해왔다.그것은 효심이 아니었다. 갈등을 견디지 못하는 나약함이었고,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기 싫어 아버지의 그림자 뒤로 숨어버린 비겁한 평화였다. 지금 혜연을 떠나온 것도 똑같았다. 자신이 가진 조향사로서의 명예를 잃을까 봐 두려웠고, 그녀를 지켜낼 능력이 없다는 비참한 민낯을 마주하기 싫어 '지켜준다'는 우아한 명분 뒤로 숨어버린 것이다.'아... 나는 한 번도 내 삶을 산 적이 없구나. 아버지 앞에서도, 그리고 혜연 씨 앞에서도. 나는 그저 상황이 나를 떠밀면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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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화 : 가시밭길 위의 모정 #1

5월의 끝자락은 잔인할 만큼 눈부셨다. 버스 창창으로 쏟아지는 정오의 햇살은 연록색으로 물든 가로수들을 축복하듯 비추고 있었지만, 그 찬란함은 혜연에게 도리어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박혔다. 며칠째 이어진 불면으로 눈꺼풀 아래엔 모래알이 굴러다니는 듯한 통증이 가득했고, 마스크 속으로 몰아쉬는 숨은 덥고 습했다.본가로 향하는 길은 혜연에게 거대한 단두대로 걸어 들어가는 고행과도 같았다. 버스가 덜컹거릴 때마다 위장이 뒤틀렸고,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신물이 올라왔다.'엄마가 시장도 못 갈 만큼 힘들대.'결혼식장에서 들었던 친구의 독설 한마디. 그건 혜연의 위태로운 평온을 산산조각 냈다. 나 하나 사랑을 지키겠다고, 나 하나 행복해지겠다고 고집 피우는 사이, 평생을 정직함 하나로 버텨온 부모님의 노년이 무참히 짓밟히고 있었다.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아카시아 향기가 진동했다. 예전 같으면 코끝을 간지럽혔을 그 달콤한 향기가 오늘따라 숨을 막히게 하는 악취처럼 느껴졌다. 담장 너머로 들려오는 수군거림은 환청이 되어 혜연의 귀를 파고들었고, 그녀는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며 자신의 죄책감을 가리려 애썼다.본가 거실은 5월의 열기가 스며들어 후끈거렸지만, 공기만큼은 얼음장처럼 서늘했다. TV조차 켜지지 않은 적막함 속에서 아버지는 낡은 신문을 무의미하게 뒤척이고 있었다."혜연이냐?"아버지는 딸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지 못했다. 그 짧은 부름 속에 담긴 억눌린 슬픔이 혜연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엄마는?""시장에... 저녁거리 산다고 나갔다."혜연의 미간이 짓눌리듯 찌푸려졌다."그 난리를 겪고도 또? 그냥 배달시키지, 왜...""그때 이후로도 매일 간단다. 여전히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모양인데, 그래도 기어이 나가신다. 피하면 정말 죄짓는 것 같다고. 도망치면 네가 진짜 죄인이 되는 것 같아서 못 그러시겠다더구나."혜연은 숨을 들이켜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가슴 안쪽이 뜨거운 인두로 지진 듯 화끈거렸다.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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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화 : 가시밭길 위의 모정 #2

시장 바구니를 내팽개친 채 달려온 엄마가 혜연의 앞을 가로막았다. 엄마의 마른 몸은 경련하듯 떨리고 있었지만, 소영 엄마를 노려보는 눈빛만큼은 딸을 지키기 위한 일념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꼴에 딸이라고 막아서냐? 뺏어갈 게 없어서 친구 남자를 뺏어?" 소영의 엄마가 다시 대파를 휘두르려 하자, 혜연의 엄마가 그 팔목을 부서질 듯 낚아챘다. 그리고 평생 누구에게도 내보이지 않았던, 짐승과도 같은 사자후를 터뜨렸다. "그래! 내 딸이다! 너네 딸은 뭐 그리 잘나서 내 딸한테 이 지랄이야! 네 딸만 귀하고 내 딸은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쓰레기인 줄 알아?" 평생 남에게 쓴소리 한번 못 하던 순한 여자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들에 시장 전체가 얼어붙었다. 엄마는 혜연의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고, 세상의 모든 화살을 대신 맞겠다는 듯 가슴을 폈다. "말은 똑바로 해! 그 남자랑 소영이랑 지금 사귀다가 우리 딸이 뺏은 거냐? 5년 전이야! 너네 딸이랑 그놈이랑 헤어진 게 벌써 5년 전이라고! 너, 한 달 전만 해도 소영이 돈 잘 버는 남자 만난다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지 않았어? 잊고 살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왜 내 딸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우리 딸은 그래서 지금 눈물로 지내고 있다고! 그 배신감이 어디 가겠어?" 소영의 엄마가 당황하며 소리를 높였다. "그럼 우리 딸은... 우리 딸은 눈물로 안 보내냐? 얘 속은 속이겠어? 친구 눈치 보랴, 엄마 눈치 보랴 가슴이 새카맣게 타버린 애야! 나도 너네 소영이, 내 딸처럼 생각했어. 어릴 때 피아노 학원, 태권도 학원 다 내 손 잡고 같이 다녔어. 그래서 나도 처음엔 이 미련한 년이랑 같이 죽고 싶었어! 내 자식이 그 미친 사랑 하나 때문에 인생 망치는 거 보면서 나도 피눈물이 났다고!" 엄마의 목소리가 끝내 처절하게 젖어 들었다. 혜연은 엄마의 작고 앙상한 어깨가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보며 가슴이 미어지는 오열을 터뜨렸다. 엄마의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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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화 : 사랑의 그물망 #1

시장을 빠져나온 길 위에는 늦은 오후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5월의 햇살은 땅의 열기를 한껏 끌어올렸고, 아스팔트 위로 아른거리는 아지랑이는 방금 전의 소란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평화로웠다. 하지만 세 사람 사이를 흐르는 공기는 끈적한 침묵으로 가득 찼다.앞서 걷는 엄마의 등은 작고 꼿꼿했다. 시장 바구니를 움켜쥔 마디 굵은 손가락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분노와 슬픔이 길 위에 무거운 발자국을 남겼다. 그 뒤를 상수가 따랐다. 머리카락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생선 핏물 섞인 오수가 그의 낡은 점퍼를 검게 적셨다. 비릿한 악취가 진동했지만, 그는 마치 훈장을 단 병사처럼 묵묵히 혜연의 짐을 들고 걸었다.혜연은 그 둘 사이, 어느 쪽에도 섞이지 못한 채 애매한 거리를 두고 걸었다. 엄마의 분노가 무서웠고, 상수의 젖은 등이 가슴 아팠다. 길가 담장 너머로 흐드러지게 핀 붉은 장미들이 마치 시장 사람들의 비웃음처럼 선명하게 타오르는 것 같아 혜연은 자꾸만 고개를 숙였다. 동네 사람 몇몇이 멈춰 서서 이 기이한 행렬을 구경했지만, 세 사람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오직 타박거리는 세 쌍의 발소리만이 골목의 정적을 깨울 뿐이었다.상수는 자신의 코끝을 찌르는 지독한 비린내를 들이마셨다. 그것은 단순히 생선 핏물 냄새가 아니었다. 5년 전, 소영을 떠나보낼 때 자신의 마음 밑바닥에 고여있던 구차한 변명들의 냄새였다.오늘 소영의 엄마에게 맞은 물벼락은 혜연을 향한 공격이었지만, 상수는 그것을 자신이 받아야 할 형벌로 여겼다. 혜연을 사랑하게 된 것은 죄가 아니었으나,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의 청춘을 외면했던 과거의 업보가 오늘 비릿한 오수가 되어 돌아온 것이라 생각했다.젖은 옷이 5월의 미풍에 마르며 몸을 식힐 때마다, 상수는 차라리 이 한기가 더 지독하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혜연의 곁에 설 자격이 조금이라도 생길 것 같았다. 그는 곁눈질로 혜연을 보았다. 그녀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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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화 : 사랑의 그물망 #2

혜연은 끈적한 달걀물이 묻은 비닐봉지를 닦아내며 무너져 내렸다.엄마는 이 난장판 속에서도 자식 먹일 반찬을 지키려 애썼던 것이다. 아니, 지키려 했던 것은 반찬이 아니라 딸의 미래였을 것이다. 혜연은 바구니 밑바닥에 떨어진 흙 묻은 대파 조각을 집어 들었다. 아까 소영 엄마가 휘둘렀던 그 파였다.'엄마는 이걸 다 알고 있었어. 내가 올 걸 알고, 사람들이 수군댈 걸 알고... 그래서 매일 여기를 나갔던 거야.'혜연은 싱크대를 붙잡고 소리 없이 오열했다. 자신이 지키려 했던 사랑이 고결한 꽃인 줄 알았는데, 사실 그 꽃을 피우기 위해 엄마라는 대지가 온갖 오물을 다 받아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거실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아빠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도대체... 시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다들 이 모양이야?"모녀는 대답이 없었다. 엄마의 씩씩거리는 소리만 거실을 메웠다."자꾸 말 안 하면, 나 지금 당장 소영이 아빠한테 전화 건다!"아빠의 최후통첩에 가까운 협박이 떨어지자, 엄마가 폭발하듯 소리를 질렀다."아니! 무슨 그 집안에다 연락을 해!! 정 궁금하면 이년한테 물어보던가!!"엄마는 안방 문을 부서질 듯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남겨진 혜연은 아빠에게 시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띄엄띄엄 설명했다. 소영 엄마의 비난, 대파 다발로 맞았던 수모, 그리고 엄마의 처절한 반격까지. 이야기를 듣던 아빠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내 정말 참으려니까! 그 여편네가 감히 내 딸을...! 안 되겠다, 내가 가서 결판을 내야지!"아빠가 분개하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혜연이 급히 아빠의 팔을 붙잡았다."이미 엄마가 다 했어... 늦었어, 아빠.""아... 그래? 우리 최여사님이 벌써 정리를 했어?"방금까지 맹수처럼 포효하려던 아빠가 멋쩍은 듯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빠는 헛기침을 하며 싱크대 밑 찬장에서 낡은 소주잔 두 개를 꺼냈다. 그리고는 말없이 딸의 앞에 한 잔을 밀어놓았다."아빠...""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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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화 : 비릿한 훈장, 그리고 선(線) 너머의 고백 #1

서울로 돌아온 상수의 원룸은 며칠간 비워둔 탓에 서늘한 한기만이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상수는 전등을 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혜연의 집 대문 앞에서 쫓겨나듯 돌아선 순간부터 코끝을 떠나지 않던 지독한 생선 비린내가 좁은 방안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그는 현관문에 기대어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어둠 속에서 상수의 거친 호흡 소리만이 기계적으로 울려 퍼졌다.'드디어... 드디어 내가 당신 앞에 실체로 서 있었어, 혜연 씨.'상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 앞의 스위치를 올리자, 형광등의 차가운 백색광이 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비췄다. 거울 속의 남자는 조향사 강상수가 아니었다. 시장 바닥에서 혜연과 어머니를 대신해 뒤집어쓴 생선 핏물과 오수가 말라붙어 뻣뻣해진 점퍼, 머리카락 끝에 엉겨 붙은 검붉은 불순물들. 얼굴 여기저기에 튄 오물 자국은 마치 패잔병의 화장처럼 기괴했다.하지만 상수는 웃음이 났다. 미친놈처럼 거울 속 자신의 흉측한 몰골을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혜연을 혼자 폭풍 속에 남겨두고 비겁하게 산속으로 도망쳤던 그 지독한 자괴감에 비하면, 지금 이 오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 악취는 그가 혜연을 위해 대신 맞은 '영광스러운 상흔'이자 훈장이었다. 아버지가 찔렀던 '비겁함'이라는 칼날이, 이 오물 세례를 통해 비로소 뽑혀 나간 기분이었다.상수는 뻣뻣하게 굳은 점퍼를 벗어 던졌다. 혜연의 손 위에 포개졌던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오물 묻은 손이었지만, 그 찰나의 온기는 상수의 영혼을 발가벗겼던 아버지의 일갈조차 녹여내기에 충분했다. 그는 샤워기를 틀었다. 뜨거운 물이 어깨 위로 쏟아지자, 몸에 말라붙어 있던 오수들이 핏빛으로 변해 욕조 바닥으로 흘러내렸다.'혜연 씨, 미안해요. 내가 너무 비겁해서... 당신을 그 지옥 같은 시장 바닥에 혼자 두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상수는 샴푸를 짜내어 머리카락을 미친 듯이 비벼댔다. 비린내를 지우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 차가운 대문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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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화 : 비릿한 훈장, 그리고 선(線) 너머의 고백 #2

혜연은 수화기 너머 상수의 단단한 확신에 가슴이 벅차올랐다."상수 씨, 나 아까 아빠랑 술 한잔하면서 얘기했어요. 나만 힘든 줄 알았는데, 사실은 상수 씨도, 우리 엄마 아빠도 나랑 같이 싸워주고 있었다는 거 이제야 알았고... 민지도 회사에서 그 따가운 눈총 받아내면서 끝까지 내 편 들어주고... 나 이제 안 숨을게요. 상수 씨가 내 방패가 되어준 것처럼, 나도 상수 씨한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될게요.""고마워요, 혜연 씨. 그 말 한마디면 돼요. 우리... 많이 힘들겠죠? 내일 출근하면 또 폭풍이 불 거고, 소영이는 더 화를 낼지도 몰라요. 그래도 혜연 씨, 우리 이것만 약속해요. 어떤 오물이 날아와도 서로 손은 놓지 말기로.""응, 절대 안 놓을게요. 상수 씨가 내 손 위로 손 겹쳐줬던 그 느낌... 평생 안 잊을 거예요."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대화는 처절할 정도로 절절했고, 동시에 가장 순수한 형태로 맞닿아 있었다. 고독과 수치를 통과해온 연인들에게 허락된 이 짧은 통화는, 내일의 지옥을 견디게 할 유일한 성수(聖水)였다.상수는 멀리서 들려오는 새벽 공기의 소리를 들으며 혜연의 이름을 나직이 읊조렸다. 혜연네 대문 앞에서 묻어났던 그 비린내는 이제 상상조차 되지 않을 만큼, 상수의 목소리에는 오직 혜연을 향한 지독한 갈증만이 서려 있었다."혜연 씨... 나 지금 도저히 잠이 안 와요. 씻고 누웠는데, 자꾸 아까 대문 밖에서 못 잡은 혜연 씨 손끝만 생각나서."혜연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쓴 채 콩닥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소영 엄마의 비난을 온몸으로 받아내던 상수의 뒷모습이 떠올라 코끝이 찡해졌다."나도요... 아까 엄마 때문에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보낸 게 너무 속상해서 계속 뒤척였어요.""지금... 나갈까요? 내가 혜연 씨네 동네로 다시 갈게요. 딱 5분만, 아니 1분만이라도 얼굴 보고 싶어요."상수의 돌발적인 제안에 혜연의 눈이 커졌다. 서울에서 이곳까지 다시 달려오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상수의 단호한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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