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내 친구의 남자였던, 그에게 향하다.: Chapter 141 - Chapter 150

220 Chapters

141화 : 향기의 밀실, 허락된 만찬 #1

본가 대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혜연은 버티고 있던 무릎의 힘이 단번에 풀려버렸다.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의 손에는 엄마가 챙겨준 날달걀 두 알이 위태롭게 쥐어져 있었다."하아... 아..."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20년 우정의 파멸, 엄마의 뺨 때리기, 그리고 아빠의 그 아픈 용서 그리고 손에 있는 날달걀까지. 혜연은 자신이 등 뒤에 남겨두고 온 집안의 공기가 얼마나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자신을 난도질하고 있는지 실감했다. 고개를 숙이자 눈물이 바닥에 뚝뚝 떨어져 검은 얼룩을 만들었다. 이제 돌아갈 곳은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낙원을 불태우고 유배지로 걸어 나온 죄인이었다.그때였다. 적막한 골목 끝에서 날카로운 타이어 마찰음이 고요한 밤의 정적을 찢었다. 이어지는 차 문이 거칠게 닫히는 소리. 그리고 곧바로 누군가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벅, 벅, 벅—.그것은 단순히 걷는 소리가 아니었다. 단단한 구둣발이 아스팔트 지면을 사정없이 차고 나가는, 거칠고도 절박한 파열음이었다. 일정한 리듬을 잃어버린 채 급박하게 이어지는 그 발소리는 혜연의 심장 박동을 앞질러 달려오고 있었다. 구두 굽이 지면에 닿을 때마다 울리는 둔탁한 진동이 혜연의 척추를 타고 전해졌다.혜연은 겁에 질려 어깨를 더욱 웅크렸다. 혹시 소영의 가족이 다시 나타난 걸까, 아니면 이 비참한 꼴을 동네 사람 누군가에게 들킨 걸까. 공포가 목을 죄어올 때쯤, 그 무겁고도 빠른 발소리가 혜연의 바로 등 뒤에서 멈췄다. 거친 숨소리가 혜연의 뒷덜미에 닿았다."혜연 씨!"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목소리. 혜연이 고개를 들기도 전에, 상수가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주저앉았다. 가로등 불빛을 등진 그의 거대한 그림자가 혜연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마치 세상의 모든 비난과 쏟아지는 시선으로부터 그녀를 가려주는 거대한 성벽처럼.상수는 본가에 간다는 혜연의 연락을 받은 직후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차 안에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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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화 : 향기의 밀실, 허락된 만찬 #2

조향사로서 예민한 그의 감각은 혜연이 뿜어내는 슬픔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것은 눅눅한 흙냄새와 비릿한 눈물 향이 뒤섞인, 절망의 향취였다."상수 씨, 저녁... 안 먹어도 돼요. 속이 너무 울렁거려서...""안 돼요. 한 입이라도 먹어야 해요. 혜연 씨가 쓰러지면 내가 버틸 수가 없어서 그래요. 제발, 나를 위해서라도 먹어줘요."상수의 눈빛이 너무나 간절하여 혜연은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상수는 주방으로 향해 가스레인지를 켰다. 파란 불꽃이 조용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냉장고에서 마늘과 페페론치노, 신선한 파슬리를 꺼냈다. 도마 위에서 칼이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작업실의 무거운 침묵을 조금씩 걷어냈다.올리브유에 마늘이 볶아지며 고소하고 알싸한 향기가 퍼져 나갔다. 혜연은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그 뒷모습을 보았다. 상수는 요리하는 중간중간 고개를 돌려 혜연을 살폈다. 그녀가 혹시라도 사라질까 봐, 혹은 다시 울음을 터뜨릴까 봐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다 됐어요. 조금만 이쪽으로 와요."상수가 차려낸 식탁은 단출했지만 지극히 정갈했다. 그는 혜연의 의자를 직접 빼주며 그녀를 앉혔고, 차갑게 칠링된 화이트 와인을 잔 가득 따랐다."와인 한 모금만 마셔요. 긴장 풀어주는 데 최고예요."혜연은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포도의 상큼한 산미와 차가운 기운이 혀끝을 자극하자 비로소 굳어 있던 감각이 돌아오는 듯했다. 파스타를 한 입 넣었을 때, 혜연은 비로소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깊은 구덩이 위로 상수의 다정함이 촘촘하게 덮이는 기분이었다."상수씨. 집에는 안들어가도 되요?""형한테 오늘 안 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어요. 아까도 전화 왔는데, 만약 필요하면 자기가 당분간 집을 비워줄 수도 있다고 혜연씨 데리고 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니 혜연 씨, 너무 외로워하지 마요. 혜연 씨 옆엔 내가 있으니까."상수는 식탁 너머로 혜연의 손을 꼭 잡았다. 그의 손등에는 혜연을 부축하느라 묻은 아스팔트의 거친 흙먼지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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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화 : 폭풍 전야의 만찬 #1

일상은 살아야 했다. 제아무리 세상이 뒤집히고 심장이 난도질 당했어도, 아침이면 눈을 떠야 했고 지하철의 소음 속으로 비대한 몸뚱어리를 밀어 넣어야 했다. 하지만 그 일상은 이미 깨진 유리 조각 위를 걷는 것과 같았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발바닥이 찢기는 통증이 느껴졌지만, 혜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 구두를 신고 화장을 했다.본가에서 겪은 그 처참했던 밤은 혜연의 영혼에 깊은 자상을 남겼다. 엄마의 손바닥이 뺨에 닿던 그 순간의 파열음은 이명처럼 귓가를 맴돌았고, 산산조각 난 액자 유리에 비쳤던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은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되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녀의 슬픔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평온하게 돌아갔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어깨를 부딪치는 타인들의 무심함, 사무실 천장에서 쏟아지는 건조한 형광등 불빛, 모니터 위로 쏟아지는 무미건조한 업무 메일들. 혜연은 그 익숙한 풍경 속으로 자신을 억지로 밀어 넣으며 하루하루를 기계적으로 버텨냈다.하지만 그 위태로운 살얼음판 위에서 혜연을 지탱해 주는 두 개의 기둥이 있었다.점심시간, 북적이는 식당가를 피해 텅 빈 탕비실로 혜연을 불러낸 민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라는 흔한 질문조차 혜연에게는 칼날이 될 수 있음을 민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저 혜연의 뺨에 남은, 화장으로도 다 가려지지 않은 옅은 멍 자국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뜻한 유자차 한 잔을 건넸을 뿐이다."혜연아, 점심 안 먹어도 돼. 속 부대끼잖아. 대신 이거라도 다 마셔. 유자가 비타민이 많아서 기운 차리는 데 좋대. 너 지금 얼굴이 종잇장 같아."민지는 혜연의 차가운 손등 위에 자신의 두 손을 겹쳐 올렸다. 그 단단하고 따스한 촉감이 전해지자 혜연의 팽팽했던 긴장의 끈이 툭 끊어졌다. 민지는 혜연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다정하게 넘겨주며 나직하게 덧붙였다."세상이 다 너한테 손가락질해도, 나는 네 편인 거 알지? 네가 어떤 선택을 했든, 그게 너를 행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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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화 : 폭풍 전야의 만찬 #2

자신이 상수와 나누는 그 달콤한 밀어들이, 엄마에게는 시장 바닥에 뿌려진 오물이 되어 돌아가고 있었다.“내가 앞으로 시장도 못 가게 생겼어! 이 동네에서 어떻게 얼굴 들고 사냐고! 너는 네 사랑 찾아서 속 시원하니? 나는 여기서 매일매일이 지옥이야! 너 때문에 내 60년 인생이 쓰레기가 됐다고!”엄마의 악담이 혜연의 고막을 난도질할 때쯤, 수화기 너머로 투박한 마찰음이 들렸다. 누군가 휴대폰을 강제로 뺏는 소리, 아빠였다. 아빠는 혜연 모의 절규를 뒤로하고 한숨을 깊게 내쉬며 전화를 이어받았다.“혜연아, 나다. 엄마가 오늘 시장 갔다가 소영이 엄마랑 마주쳐서 좀 험한 꼴을 당했어. 마음이 많이 상해서 그런 거니까 너무 마음에 두지 마라. 내가 잘 다독일 테니까 너도 조심하고... 한동안 여기 오지 않도록 해라. 특히 주말에는 웬만하면 이 근처에 오지 마라. 소영이네 가족들이 잔뜩 독이 올라 있더라. 그 사람들, 지금 제정신 아니야.”전화는 아빠의 씁쓸한 당부로 끝이 났다. 혜연은 끊어진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동안 제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내 세상만 무너진 게 아니었다. 엄마의 20년 인생도, 아빠의 소박한 평화도 함께 무너지고 있었다. 자신이 선택한 사랑은 가족 전체를 태우는 거대한 화마가 되어 있었다.그날 저녁, 혜연은 넋이 나간 채 상수의 차에 올랐다. 상수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녀의 차가운 손등을 덮어 쥐었다. 그는 혜연을 자신의 작업실로 데려갔다. 무거운 침묵이 흐를 것이라는 혜연의 예상과 달리, 작업실 문을 열자마자 뜻밖의 소란함이 그녀를 맞이했다.“혜연아! 고개 숙이지 마! 여기선 너 죄인 아니야!”민지의 활기찬 목소리가 쏟아졌다. 식탁 위에는 치킨과 피자, 그리고 차가운 맥주 캔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상수의 형 재현도 앞치마를 두른 채 커다란 샐러드 볼을 들고 나타났다.“오, 드디어 왔네. 혜연 씨, 오늘 우리 상수 작업실 털러 왔어요. 이 녀석이 혜연 씨 혼자 독차지하고 안 보여주길래 내가 민지 씨랑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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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화 : 가장 눈부신 날의 장례식 #1

토요일 아침, 창틈으로 들이닥친 햇살은 잔인할 만큼 투명했다. 5월의 생동감이 넘치는 빛줄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지만, 거울 앞에 앉은 혜연의 얼굴에는 그 어떤 빛도 머물지 못했다. 그녀는 마치 박제된 인형처럼 앉아 몇 번이고 파운데이션을 덧발랐다.피부 위로 하얗게 일어나는 각질을 누르기 위해 퍼프를 두드리는 손길엔 생기가 없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릴 때마다 화장품 용기가 탁자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지만, 혜연은 그것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거울 속의 여자는 눈가가 튱튱 부어 있었고, 초점 없는 눈동자는 이미 먼 곳을 향해 있었다. 오늘 그녀가 입어야 할 옷은 축복의 예복이어야 했지만 그녀는 지금 이 옷이 자신의 상복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득했다.준비를 마친 혜연이 수수하도 단아한 베이지 드레스를 입고 일어서자, 문가에서 그녀를 지켜보던 상수가 다가왔다. 그의 눈동자에는 차마 다 뱉지 못한 걱정이 일렁이고 있었다."괜찮겠어요? 꼭 가야 해요?"상수의 목소리는 낮고 깔깔했다. 그는 밤새 한잠도 자지 못한 듯 수척해진 혜연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이 혜연의 어깨를 타고 전해졌다. 혜연은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을 맞춘 채, 유령처럼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당연히 가야죠. 10년 넘은 친구인데, 바쁜 와중에도 청첩장 준다고 회사 앞까지 찾아와줬고요. 물론 지금 내 상황이 바뀌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안 가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요. 겁나지만 그래도 가야죠. 어쩌면… 제가 갈 수 있는 마지막 결혼식일지도 몰라요.""소영이 얼굴을 또 봐야 할 텐데... 정말 괜찮아요? 그 성격에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텐데... 내가 같이 가줄까요? 입구까지만이라도."상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지금이라도 혜연을 붙잡아 침대에 눕히고, 외부의 모든 악의로부터 그녀를 격리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혜연은 상수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차가운 얼음 같은 그녀의 손길에 상수의 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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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화 : 가장 눈부신 날의 장례식 #2

식장 건물의 화려한 대리석 외벽이 오늘따라 유독 차갑고 거대해 보였다.'지금이라도 차를 돌릴까. 그냥 몸이 안 좋다고 둘러대고 도망칠까. 축의금만 보내면 되는 거 아닐까.'비겁한 충동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도망칠 곳이 없었다. 여기서 등을 돌리면, 그녀는 평생 이 비겁함의 그늘 아래서 평생을 숨어 지내야 할 것 같았다. 이것은 경은의 결혼을 축하하러 가는 자리가 아니었다. 자신이 저지른 선택에 대해 세상이 내리는 판결을 받으러 가는, 단두대로의 행진이었다.혜연은 간신히 차에서 내려 식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구두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마치 "여기 배신자가 왔다"라고 광고라도 하는 듯한 소리였다. 혜연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소리가 나지 않도록 더 조심히 걷고 있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신부 대기실로 향하는 복도를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치 늪 속을 걷는 것처럼 무거웠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이 모두 자신을 향한 비난처럼 들려 혜연은 고개를 숙인 채 바닥만 보며 걸었다. 신부 대기실 문 앞. 혜연은 심호흡을 크게 한 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그곳에는 혜연이 모르는 친구들과 함께 환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는 경은이 있었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경은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보이고 보였다. 혜연은 문가에 멈춰 서서 그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신이 결코 다시는 소유할 수 없을 듯한, 그 순수하고 투명한 축복의 공기.사진 촬영이 마무리되고 경은이 하객들과 인사를 나누다 문득 혜연과 눈이 마주쳤다.순간, 경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찰나의 경악, 그리고 뒤이어 찾아온 명백한 불쾌함과 어이없음. 혜연은 그 짧은 표정의 변화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처절하게 확인했다. 경은은 곧바로 표정을 관리하며 어색한 비즈니스용 미소를 지었다."축하해, 경은아. 오늘 정말 예쁘다."혜연이 가까스로 목소리를 쥐어짜 내었다. 경은은 혜연의 눈을 피하며 드레스 자락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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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화 : 찬란한 태양 아래의 처형대 #1

신부 대기실의 무거운 문을 닫고 나오는 혜연의 발걸음은 위태로웠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경은의 환한 웃음소리가 마치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박히는 것 같았다. 혜연은 자신의 구두 소리가 대리석 바닥에 부딪힐 때마다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조심스럽다 못해 비겁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 걸음걸이는, 이미 그녀가 이 장소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하지만 로비 한복판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소영은 정반대였다.시끌벅적하던 대화 소리가 마치 누군가 전원을 끈 것처럼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그리고 소영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소영은 턱을 살짝 치켜든 채 혜연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아주 느리게 훑어 내렸다. 입가에 아주 희미하게 걸린 비틀린 미소는 혜연의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소영은 여전히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혜연을 향해 아주 천천히 걸음을 떼려 하고 있었다.또각, 또각, 또각—.일정한 박자로 바닥을 울리는 소영의 구두 소리는 당당하다 못해 오만했다. 혜연의 도망치듯 비틀거리는 발소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소영은 허리를 곧게 펴고 턱을 치켜든 채 다가왔다. 로비의 화려한 조명이 소영의 실크 드레스 위로 부서졌고, 그녀는 마치 이 식장의 진짜 주인이라도 되는 양 압도적인 기세를 뿜어냈다.소영이 혜연의 코앞에서 멈춰 섰다. 가늘게 뜬 눈동자에는 앞서 묘사했던 그 최상위 포식자의 가소로움이 여전히 서려 있었다."왔네? 겁이 없는 건지... 아니면 상황 파악이 안 되는 현실 감각 제로인 건지."소영이 혜연의 귀에 닿을 듯 몸을 숙이며 낮게 읊조렸다. 서늘한 향수 냄새가 혜연의 코끝을 찔렀다."암튼 용기가 대단하네. 아님 아직도 네가 예전처럼 여기서 경은이랑 행복하게 사진 찍고, 저기 저 친구들과 웃고 즐기고 담소도 나누고 뭐 그런 그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혜연은 등 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통증을 버팀목 삼아 가까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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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화 : 찬란한 태양 아래의 처형대 #2

자신이 저지른 선택의 파편이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난도질하고 있다는 사실이 실시간으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미... 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해..."혜연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싸늘한 눈빛들은 차가운 송곳이 되어 그녀의 온몸을 찔러댔다. 혜연은 고개를 처박은 채 로비를 가로질러 식장 밖으로 도망치듯 뛰쳐나갔다.식장 밖은 여전히 찬란한 5월이었다.눈부시게 푸른 하늘과 따스한 햇살 아래, 화려한 화환들이 줄지어 서 있는 광경은 지독하게 이질적이었다. 혜연은 비틀거리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는 여전히 친구들의 차가운 시선과 하객들의 수군거림이 꼬리표처럼 따라붙고 있었다.어린 시절, 혜연은 늘 '5월의 신부'를 꿈꿨다. 장미향이 가득한 교정에서 소영과 함께 서로의 결혼식에 들러리가 되어주자고 약속했던 수많은 밤들. 하지만 현실의 5월은 그녀에게 가장 잔인한 처형장이 되었다.축복받아야 할 친구의 결혼식에서, 혜연은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치정극의 주인공이 되어 무대 밖으로 쫓겨나고 있었다. 5월의 햇살은 혜연의 드레스 위에서 반사되며 그녀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도망칠 곳 없는 빛의 감옥 안에서, 혜연은 주저앉아 울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차 문을 열었다.혜연은 어떻게 주차장까지 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등 뒤에서 꽂히던 선혜의 서슬 퍼런 일갈과 소영의 비릿한 눈물, 그리고 하객들의 그 끈적한 수군거림이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몸을 던지듯 처박은 혜연은 문을 잠그자마자 핸들에 고개를 묻었다."아... 아아..."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울음이 터졌다. 혜연은 짐승처럼 울었다. 꺼느끼는 숨소리가 좁은 차 안을 가득 채웠고, 화장은 눈물과 범벅이 되어 검은 얼룩으로 시트를 적셨다. 예쁘게 보이려 정성 들여 발랐던 파운데이션과 아이라인이 수치심의 흔적이 되어 얼굴을 난도질했다. 혜연은 자신의 손등을 입으로 짓이기며 울음을 삼켰다. 지금 이 주차장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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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화 : 부서진 향기의 궤적 #1

시계 바늘이 비정상적으로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상수는 작업실 한가운데 서서 몇 번이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마치 거대한 망치가 텅 빈 콘크리트 바닥을 치는 듯 고막을 기괴하게 때렸다. 혜연이 식장으로 떠난 지 고작 두 시간 남짓이었지만, 그에게는 이 시간이 분 단위로 쪼개져 살을 베어내는 억겁의 세월처럼 느껴졌다. 공기의 흐름마저 느껴지는 것 같은 시간들이 상수를 옥죄어 오는 것 같았다.작업실을 가득 채운 수천 가지 향료의 냄새도 오늘만큼은 그의 신경을 안정시키지 못했다. 조향사로서의 예민한 후각은 평소 그에게 축복이었으나, 지금은 저주였다. 혜연의 잔향이 남아 있지 않은 공기는 죽은 것처럼 건조했다. 샌달우드의 묵직함은 질식할 것 같은 압박으로, 로즈마리의 청량함은 신경을 긁는 금속성 소음으로 변질되어 상수의 폐부를 찔러댔다. 주인을 잃은 향기들은 이제 상처 난 기억 위로 쏟아지는 소금물처럼 따가웠다.'식이 시작됐겠지. 이제는 끝날 시간인가.'상수는 휴대폰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화면 속 혜연의 사진을 엄지로 쓸어내리며, 별일 없는지, 너무 힘들면 바로 나오라는 문자를 보냈지만 '1'이라는 숫자는 사라질 기미가 없었다. 혜연은 답이 없었다. 불안은 형체 없는 진득한 늪처럼 상수의 발목부터 차오르기 시작해 이내 목구멍까지 조여왔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신호음만 무심하게 이어졌다. 열 번, 스무 번. 규칙적인 기계음이 이어질 때마다 상수의 심장 박동도 그 속도에 맞춰 기형적으로 빨라졌다. 혜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상수의 얼굴이 핏기를 잃고 하얗게 질렸다. 혜연의 성격상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상수의 연락을 이토록 오랫동안 무시할 여자가 아니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확신이 들자 상수는 더 이상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외투를 챙겨 들고 거칠게 차 키를 낚아챘다. 그때, 작업실 테이블 한구석에 혜연이 깜빡하고 놓고 간 경은의 청첩장이 눈에 들어왔다. 상수는 그것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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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화 : 부서진 향기의 궤적 #2

그는 대문 앞에 서서 한참 동안 그 낡은 집을 응시했다. 혜연이 평생을 자라온, 그리고 이제는 혜연에게 가장 아픈 상처가 되어버린 그 집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상수의 발등을 덮었다.비참했다. 자신이 선택한 사랑이, 이토록 무력하게 혜연을 실종 상태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이 상수의 영혼을 난도질했다.'소영아, 혜연이가 안 보여. 혹시 네가 무슨 짓을 했니?'수십 번 휴대폰 화면에 띄운 소영의 번호는 맹독을 품은 전갈 같았다. 통화 버튼 하나만 누르면 이 모든 미로의 끝을 알 수 있겠지만, 그 전화를 거는 순간 상수는 혜연이 그토록 필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마지막 자존심을 짓밟는 꼴이 된다. 혜연은 소영 앞에서 당당하고 싶어 했다. 그런 그녀의 연인이 소영에게 전화를 걸어 "혜연이를 찾아달라"고 애원하는 것은, 혜연에게 죽음보다 더한 수치를 안겨주는 일임을 상수는 너무나 잘 알았다. 그는 핸들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비명을 삼켰다.그때였다. 상수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장소, 단 하나의 좌표가 있었다.충청남도 서천군 선도리. 그곳은 상수가 삶의 무게에 짓눌려 숨이 가빠질 때마다 도망치듯 찾았던 비밀의 해변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작업실에서 밤을 지새우며 혜연에게 고백하듯 털어놓았던 곳이기도 했다."혜연 씨, 나는 정말 세상이 나를 버린 것 같을 때 선도리에 가요. 거기 갯벌 끝에 서 있으면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느껴져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거든요."당시 혜연은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눈을 반짝였다."상수 씨가 아끼는 장소라면 나도 언젠가 꼭 가보고 싶어요. 우리, 나중에 정말 힘든 일 생기면 거기서 만나기로 할까요? 서로의 슬픔을 공유하는 성지처럼요."그 약속이, 그 찰나의 대화가 상수의 뇌리를 강하게 때렸다. 혜연은 지금 자신과 모든 것을 공유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아픔뿐만 아니라, 상수가 위로받던 그 공간까지도 그녀의 안식처로 삼고 싶어 할 터였다. 상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확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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