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e Kapitel von 내 친구의 남자였던, 그에게 향하다.: Kapitel 181 – Kapitel 190

220 Kapitel

181화 : 유리의 방 #2

소영은 화면을 스크롤 할 때마다 자신의 심장 한쪽이 도려져 나가는 환각을 느꼈다. 분명 혜연을 무너뜨렸는데, 왜 통쾌함은 느껴지지 않는 걸까.그때, 책상 위에서 진동이 요란하게 울렸다. 소영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으며 도착한 것은 고등학교 동창들의 단체 카톡방 메시지였다. 평소에는 대답조차 뜸하던 이들이 마치 축제라도 열린 듯 쉴 새 없이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야, 너희 그 커뮤니티 글 봤어? 그년 실명만 안 나왔지 완전 걔잖아. 우리는 딱 보면 알지][봤지 봤지. 어머, 세상에... 평소에 그렇게 도도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뒷조사해보니까 집구석도 별거 없더만.][역시 나쁜 짓 하면 벌 받는다니까. 쌤통이다 진짜. 20년 친구 남친을 뺏어? 그것도 8년이나 사귄 사람을?][그러게, 남자를 잘 만나야지 그게 뭐 하는 짓이니? 소영아, 너 괜찮아? 우리가 다 속이 시원하다. 걔 이제 회사도 못 다니겠던데?][아니, 근데 우리 중에 저걸 올린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저런 글이 떡하니 올라갔데?][모르지. 사필귀정이야. 세상이 아무리 썩어빠져도 결국 다 업보로 돌아오는 거야.]액정 너머로 쏟아지는 동조는 소영의 목을 조르는 밧줄 같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자판을 눌렀다.'그러게.'단 세 글자를 적었다가 다시 지웠다. '내 말이, 자업자득이지.'라고 덧붙이려다 손가락이 마비된 듯 멈췄다. 친구들의 '쌤통이다'라는 말은 소영이 그토록 바랐던 사회적 복수의 완성이었지만, 막상 그것을 제삼자의 입을 통해 마주한 순간 느껴진 것은 짜릿한 쾌감이 아니라 비릿한 역겨움이었다. 타인들의 가벼운 입방아에 난도질당하는 혜연의 20년은, 곧 소영 자신의 20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친구들은 혜연을 '그 여자'라고 부르며 비웃었지만, 소영에게 혜연은 이름조차 필요 없는 자신의 일부였다. 소영은 눈을 감았다.기억은 자꾸만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초등학교 시절, 넘어져 무릎을 깨뜨린 자신을 업고 보건실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양로원까지 뛰어가던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06
Mehr lesen

182화 : 향기의 무덤 #1

사무실의 공기는 무거운 정적보다 한층 더 차갑고 예리해졌다. 공식적인 인사 발령이나 투명한 징계 위원회는 없었다. 하지만 혜연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김진우 팀장이 설계한 형벌은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라, '존재의 지우기'라는 가장 잔인한 정신적 고립이라는 것을.서른세살, 10년 차 공간 인테리어 디자이너 박혜연. 그녀는 공간의 동선을 짜고, 조명의 조도를 맞추며, 마감재 하나에도 자신만의 철학을 담아내던 부서의 에이스였다. 그녀가 손을 댄 공간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이 담긴 예술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책상 위에는 정교한 캐드(CAD) 도면이나 질감 넘치는 자재 샘플 대신, 싸구려 딱풀과 가위, 그리고 먼지 낀 수백 장의 법인카드 영수증 뭉치가 흉물스럽게 놓여 있었다."박 과장, 바쁜 일 없으면 이것 좀 도와주지? 신입들이 하기엔 좀 꼼꼼함이 필요해서 말이야. 숫자가 하나라도 틀리면 골치 아프니까."김 팀장이 툭 던지고 간 것은 부서 전체의 지출결의서 증빙 작업이었다. 10년 전, 사회 초년생 시절 코 끝에 단내가 나도록 하던 단순 노동. 혜연은 멍하니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현장의 거친 먼지를 묻히며 거침없이 자재를 고르고 도면을 그리던 그 당당한 손이, 이제는 영수증 모서리에 풀칠이나 하며 종이 조각을 맞추고 있었다."팀장님, 저 이번에 들어가는 '아트센터 리모델링' 컨셉 회의... 제가 짠 초안이 있어서 공유드리고 싶습니다. 공간 효율성을 극대화한 동선이라...""박 과장,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돼?"김 팀장이 말을 잘랐다. 그의 눈빛에는 경멸과 귀찮음이 뒤섞여 있었다."회사 게시판은 물론이고 밖에서도 박 과장 이름이 오르내려. 공식 징계만 안 내려갔을 뿐이지, 윗분들 눈초리 안 보여? 우리 팀 실적에 흠집 나게 생겼는데 기획안은 무슨. 그냥 조용히 자숙하면서 시키는 일이나 해. 그게 그나마 회사에 마지막으로 예의 차리는 거야."김 팀장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정중해서 더 송곳처럼 잔인했다. 혜연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07
Mehr lesen

183화 : 향기의 무덤 #2

그것은 '걱정마'라는 신호이자, 철저하게 계산된 연기였다. 하지만 이내 팀장을 향해 돌아선 민지의 표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서늘하고 건조하게 굳어버렸다.독설을 퍼붓고 화를 내던 평소의 민지가 아니었다. 그 이중적인 표정 변화는 더 거대한 반격을 준비하는 노련한 사냥꾼의 묵직한 약속이었다. 혜연은 멀어지는 민지의 뒷모습을 보며 참았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고립된 진공 상태의 사무실에서 민지가 남긴 온기는 혜연이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현실이었다.재현을 통해 들려온 혜연의 처참한 상황은 상수의 세계를 단숨에 잿더미로 만들었다. 작업실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던 아름답고 뜨거운 오후의 햇살은 더 이상 예술적 영감을 주는 축복이 아니었다. 그것은 혜연의 등을 지지는 지옥의 불길이었고, 그녀의 자존심을 낱낱이 태워버리는 잔인한 고문 기구였다.상수는 작업대 위에 놓인 고가의 유리병들을 움켜쥐었다가 바닥에 내팽개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향기를 탐닉하며 보냈던 고결한 시간들이 모두 위선적인 연극처럼 느껴졌고,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지독한 모멸감이 차올랐다. 그는 작업대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혜연을 향한 미안함과 자신을 향한 증오를 토해내고 싶었다. 상수는 들끓는 분노를 삼켜내기 위해 거칠게 눈을 감았다. 망막 위로 번지는 붉은 잔상들은 혜연이 지금 이 순간 견뎌내고 있을 모욕의 선명한 색채 같았다. 조향사로서 향기를 탐닉하며 보냈던 평화로운 시간들이 이제는 구역질 나는 기만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고결한 향의 배합을 고민하며 정적의 사치를 누릴 때, 혜연은 비릿한 딱풀 냄새와 동료들의 멸시 섞인 발소리 속에서 영혼이 도사당하고 있었다.상수의 가슴 속에서 들끓는 것은 분노를 넘어선 지독한 자기혐오였다. 5년 전, 소영과의 이별 앞에서 '알겠다'는 무책임한 말 한마디로 상황을 회피했던 자신의 그 얄팍한 침묵이, 결국 그 시간을 돌아 혜연의 목을 죄는 밧줄이 되어 돌아왔다는 자각. 그 부채의식은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숨을 쉴 때마다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07
Mehr lesen

184화 : 그림자의 장례식 #1

신촌역 3번 출구를 빠져나온 상수의 눈에 들어온 풍경은 기괴할 정도로 낯설었다. 8년이라는 시간은 추억을 보존하는 대신 잔인하게 지워나가고 있었다. 친구들과 밤을 새우던 골목 안 PC방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그 자리엔 차가운 기계음만 가득한 무인 사진관이 들어서 있었다. 소영과 처음 만나 설렘에 잔을 부딪쳤던 호프집도 간판조차 남지 않은 채 다른 상점으로 바뀌어 있었다.상수는 그 낯선 간판들을 보며 서늘한 비극을 느꼈다. 소영과 함께했던 공간들이 하나둘 소멸할 때마다, 그들의 8년 또한 갈 곳 없는 유령이 되어 허공을 떠도는 것 같았다. 추억은 더 이상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라, 철거된 건물 잔해처럼 발끝에 채이는 거추장스러운 파편일 뿐이었다.'모든 게 변했구나. 나를 포함해서.'상수는 소멸된 세계 위로 솟아오른 차가운 건물들 사이를 지나 약속 장소로 향했다. 문을 열자, 익숙한 원두 탄 냄새와 소영의 서늘한 시선이 동시에 그를 덮쳤다. 상수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이미 과거의 늪에 깊숙이 발을 담근 기분이었다."왔어?"소영의 첫마디는 차가운 얼음 송곳이었다. 상수는 대답 대신 그녀의 일그러진 눈매를 보았다. 안 그래도 심란한 기색이 역력한 소영은 어느 때보다 날카롭고 뾰족한 날을 세운 채 상수를 쏘아보고 있었다. 카페의 세련된 조명조차 그녀의 날 선 실루엣을 부드럽게 감싸지 못했다."오늘은 또 나에게 어떤 모욕을 주려고 여기까지 부른 거야?""아냐. 내가 왜 그런...""그래, 그렇겠지. 그전에도 오빠는 그런 의도는 없었겠지. 하지만 늘 나에겐 모욕적이었어. 혜연이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도, 내가 쓰지도 않은 블라인드 글을 내려달라고 할 때도!"소영의 목소리가 카페 안의 정적을 찢었다. 주변의 시선이 닿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상수는 떨리는 손을 감추려 탁자 아래서 무릎을 꽉 쥐었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 8년의 세월을 단 한 마디로 정리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그를 짓눌렀다. 그는 나지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08
Mehr lesen

185화 : 그림자의 장례식 #2

슬퍼서가 아니었다. 5년 전 이별 후 줄곧 자신을 괴롭히던 '버려진 시간'들이 비로소 '찬란했던 기록'으로 복구되는 순간의 해방감이었다."너랑 만날 때 혜연 씨를 알았지만... 결단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런 절친. 그 이상으로 생각한 적 없어. 정말 나에게 처음으로 콜라보레이션 작업이 요청왔고 놓칠 수 없는 기회에 하필이면 혜연 씨를 만난 거고, 불편하더라도 내 경력을 위해서 시작한 일이었어."상수는 이제 가장 깊은 진심을 꺼내 놓았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도망칠 곳을 찾지 않았다."그런데 혜연 씨와 일을 하고, 조금씩 친해지면서 내가 스스로 바뀌어 가는 걸 느꼈어. 늘 뒤에 따라가기만 하던 내가, 누군가의 그림자에 숨기에 바빴던 내가, 어느새 나 스스로 혼자 앞으로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있었어. 그런 사람이야 나에게는."소영은 묘한 안도감이 섞인 미소를 지었다. '결국 혜연이가 오빠를 깨웠네. 내가 8년을 쏟아부어도 안 되던 게... 쓰라리지만, 이제야 오빠가 진짜 강상수처럼 보여.'상수가 말을 이어갔다."너에게 미안하지만, 이제 온전히 강상수라는 사람이 된 거 같아. 그래서 놓을 수가 없어. 우리가 어떤 지옥에 빠진다 하더라도 난 그녀를 놓을 수가 없어. 비난의 화살이든 소나기든, 불구덩이에 빠진다 하더라도 같이 있으려고 그 사람이랑."상수의 고백이 끝나자, 카페 안은 지독한 정적에 휩싸였다. 상수는 더 이상 미련 없는 눈빛으로 소영을 바라보며, 그녀의 8년을 지켜주었던 그 무거운 숙제를 마침내 끝냈음을 직감했다.오래도록,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소영은 식어가는 커피잔에 담긴 자신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둘의 세월이 박제된 채 썩어가고 있던 자신의 내면을 비로소 마주한 소영의 어깨가 소리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마침내 소영이 천천히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나 먼저 일어날게."상수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소영은 카페 문을 밀고 나섰다. 딸랑.소영이 밀고 나간 카페 문이 닫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08
Mehr lesen

186화 : 그녀에게로 향하다 #1

상수는 핸드폰에서 혜연을 누르려다 말았다. 카페를 뛰쳐 나온 상수는 신촌역을 향해 뛰어갔다. 지금 홀로 싸우고 있을 나의 여자, 그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오늘 따라 지하철은 왜이리 안오는건지, 왜이리 달리지 못하고 거북이 같은건지, 스크린 도어가 열리자마자 지하철에서 뛰쳐나온 상수는 한달음에 역을 뛰어 올라왔다. 그런 상수의 앞에는 차가운 유리와 철골로 이루어진 거대한 빌딩이 솟아 있었다. 혜연의 직장. 그곳은 혜연에게 꿈의 터전이 아니라, 매일 아침 비릿한 딱풀 냄새와 영수증 더미에 질식해야 하는 거대한 감옥이었다.상수는 로비의 회전문을 밀고 들어섰다.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에 닿을 때마다 '탁, 탁' 하고 건조한 파열음이 일었다. 퇴근 시간의 로비는 전쟁터였다. 쏟아져 나오는 직장인들의 무표정한 얼굴들, 사원증을 목에 걸고 바쁘게 개찰구를 통과하는 사람들, 거대한 유리 빌딩의 로비는 썰물처럼 밀려 나오는 직장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 무채색의 인파 속에서 상수는 멈춰 섰다.그가 로비 중앙의 원형 기둥 옆에 자리를 잡자마자, 공기의 흐름이 미세하게 바뀌었다."야, 저 사람 아냐? 어제 블라인드에 올라온...""진짜네? 와, 얼굴 두껍다. 여기가 어디라고 나타나?"발걸음 소리에 섞여 전염병처럼 번지는 수군거림. 사람들은 대놓고 손가락질하진 않았지만, 곁을 지나며 힐끔거리는 시선에는 노골적인 경멸과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상수는 그 시선들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벽면의 대형 시계를 응시했다. 초침이 움직일 때마다 그의 심박수도 빨라졌지만, 눈빛만은 흐려지지 않았다. 8년 동안 누군가의 그림자로 살았던 남자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빛 속에 서 있는 순간이었다.그는 숨지 않았다. 오히려 로비 중앙, 가장 거대한 원형 기둥 옆에 자리를 잡았다.'여기였구나. 혜연 씨가 매일 고개를 숙이고 지나던 길이.'상수는 코트 주머니 속에서 작은 유리병을 만지작거렸다. 며칠전부터 오직 혜연만을 생각하며 배합한 향료였다. 그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09
Mehr lesen

187화 : 그녀에게로 향하다 #2

로비의 중심,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길게 뻗은 그림자의 끝에 상수가 서 있었다. 그는 수백 개의 날 선 시선들을 방패 하나 없이 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저 사람이야?", "세상에, 저기가 어디라고..." 하는 독설 섞인 수군거림이 파도처럼 상수를 덮치고 있었지만, 상수의 시선은 오직 한 곳, 혜연의 젖은 눈동자에 고정되어 있었다.그 순간, 혜연의 세계에서 모든 소음이 음소거되었다.수군대던 사람들의 입모양도, 바쁘게 움직이던 회전문 소리도 사라졌다. 오직 상수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구두 소리만이 심장 박동처럼 크게 울렸다. 디즈니 동화 속, 저주받은 성의 문을 부수고 들어온 기사처럼, 혹은 유령으로 살던 그녀에게 다시 '이름'을 돌려주러 온 창조주처럼 그가 눈앞에 섰다."상수 씨..."혜연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상수는 대답 대신 혜연의 차가운 손을 낚아채듯 꽉 잡았다.앗, 하는 짧은 신음이 나올 새도 없이 뜨거운 온기가 전해졌다. 하루 종일 에어컨 바람 아래 딱풀 독에 올라 뻣뻣하게 굳어 있던 혜연의 손이, 상수의 단단한 손바닥 안에서 눈 녹듯 풀어졌다. 그의 손은 너무나 뜨거워 화상을 입을 것 같았고, 동시에 세상 그 어떤 요새보다 견고했다."데리러 왔어요. 가요, 우리."상수의 짧은 한마디는 선언이었다. 이제 더 이상 혼자서 이 비난의 화살을 맞게 두지 않겠다는, 비겁함을 씻어낸 남자의 결연한 맹세.상수는 수많은 구경꾼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대신 혜연을 자신의 품 쪽으로 바짝 끌어당기며 로비를 가로질렀다. 혜연은 비로소 깨달았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질식시켰던 그 지독한 수군거림이, 이제는 상수의 넓은 어깨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고 있다는 것을.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따가웠지만 상관없었다. 상수가 잡은 손을 통해 전달되는 그의 규칙적인 맥박이 혜연의 혈관을 타고 흘러 들어와, 그녀의 멈춰있던 시간을 다시 돌리고 있었으니까. 그에게서 나는 약간의 땀 냄새와 찬 공기의 향은 그 어떤 향수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09
Mehr lesen

188화 : 껍데기만 남은 계절의 끝 #1

상수와 남남이 된 지 벌써 5년이었다.신촌의 그 낡은 카페를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소영은 문득 자신이 슬프지 않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8년의 뜨거웠던 연애가 마침표를 찍은 건 5년 전 어느 비 오는 날이었고, 오늘 카페에서의 만남은 그저 오래된 유작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거실은 지독하리만큼 정돈되어 있었다. 이미 오래전 상수의 짐을 다 들어내고, 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가구 배치까지 싹 바꾼 공간. 소영은 알고 있었다. 강상수를 향한 마음은 진작에 분리수거함에 던져넣어 이미 형체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하지만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자, 상수의 빈자리 대신 엉뚱한 것들이 시야에 걸려들기 시작했다.거실 한 켠, 투박한 스탠드 옆에 놓인 작고 앙증맞은 다육이 화분. 혜연이 "너희 집 너무 모델하우스 같아, 사람 냄새 좀 나야지"라며 쑥스럽게 내밀었던 것이었다. 주인이 물을 주는 둥 마는 둥 방치했음에도, 녀석은 혜연을 닮아 질긴 생명력으로 여전히 초록빛을 띠고 있었다.시선을 돌리자 주방 선반 위에 놓인 노란색 머그컵 세트가 보였다. 상수가 사준 비싼 브랜드 제품들은 5년 전 그와 함께 사라졌지만, 혜연이 첫 월급을 탔다며 시장 길거리 점포에서 제 것과 커플로 사왔던 이 투박한 컵만은 버려지지 않고 살아남았다."소영아, 이거 진짜 튼튼해. 나중에 우리 할머니 될 때까지 여기다 차 마시자."그때 혜연은 뭐가 그리 좋았는지 코끝을 찡긋거리며 웃었더랬다. 상수의 흔적은 진작에 마음속에서 도려내 무거울 게 없었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오는 혜연의 흔적들은 처음으로 소영의 심장을 날카롭게 찔렀다.상수를 지운 자리에 남은 건 혜연이었다.소영은 자신의 상실감을 감추기 위해 오히려 혜연을 가해자로 몰아세웠다. 그래야만 자신의 8년이 헛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혜연이 남겨둔 저 사소한 물건들은 끊임없이 묻고 있었다. 8년의 연애보다 더 길고 단단했던 우리의 우정을,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10
Mehr lesen

189화 : 껍데기만 남은 계절의 끝 #2

"어머, 소영아! 연락도 없이 웬일이니? 얼굴 반쪽 된 것 좀 봐. 너 밥은? 밥은 먹고 다니는 거야?"엄마의 손이 소영의 까칠해진 뺨을 쓸어내렸다. 그 따뜻하고 일상적인 걱정이 오히려 소영의 목 안쪽을 날카롭게 긁었다. 소영은 엄마의 손을 밀어내지도 못한 채 물었다."엄마... 얼마전에 시장에서 난리 쳤어? 혜연이네 아줌마랑 싸웠냐고."엄마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지더니, 이내 억울함과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너 그거 들었니? 그래, 내가 아주 박살을 내고 왔다! 세상에, 어떻게 우리한테 이럴 수가 있어? 너 5년 전에 죽네 사네 하던 거 혜연이네도 다 알면서! 내가 선혜 엄마랑 같이 가서 혜연이 그 기집애를 그냥...!""엄마, 이제 하지 마... 제발.""뭐? 어떻게 내가 참아! 내 딸 눈에 피눈물 흘리게 한 년을 내가 어떻게 가만두니? 혜연이 그게 상수랑 그러고 다니는 꼴을 보고도 내가 가만히 있으면 그게 엄마니?"엄마는 자식을 대신해 복수라도 마친 장군처럼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소영은 가슴이 꽉 막힌 듯 숨이 가빠왔다."엄마... 제발... 제발 그만해..."결국 소영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거실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보며 엄마는 당황해서 소영의 어깨를 붙잡았다."왜 이래, 소영아? 응? 너 또 상수 생각나서 그래? 아이고, 이 미련한 것아. 괜찮아, 엄마가 다 해결해 줄게. 그년 동네 발도 못 붙이게 할 테니까...""엄마 그런 거 아니니까 제발...! 나 이미 강상수 그 인간 다 잊은 지 오래야. 5년도 더 됐어. 나 상수 때문에 우는 거 아니라고!"소영이 비명처럼 엄마의 손을 뿌리쳤다. 울음 섞인 목소리가 거실 벽을 타고 서글프게 울려 퍼졌다. 엄마는 멍한 표정으로 소품처럼 굳어버렸다."그게 무슨 소리야... 너 보름 전에 내 앞에서 죽고 싶다며 울었잖아. 혜연이가 어떻게 나한테 이러냐고...""그건 상수가 그리워서가 아니라, 혜연이한테 배신당했다 생각했어. 그래서 너무 화가 나서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10
Mehr lesen

190화 : 안개의 끝, 드러난 실루엣 #1

월요일 아침, 지하철역에서 회사 건물까지 이어지는 짧은 보도블록 위로 혜연의 구두 굽 소리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평소보다 일찍 도착했음에도 공기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로비 회전문을 통과하는 순간부터 공기는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혜연의 뺨을 스쳤다. 마스크 위로 드러난 눈동자들이 혜연의 동선을 따라 끈덕지게 달라붙었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칠라치면 황급히 스마트폰 화면 속으로 숨어들었다.사건 이후의 시간은 소문을 무뎌지게 하기보다, 오히려 더 단단한 낙인으로 고착시킨 듯했다. 성실히 걸어온 길이 단 며칠 만에 '상간녀의 외줄 타기'로 격하되었다는 사실이 혜연의 발목을 잡았다. 수군거림이 배경음악처럼 익숙해져 버린 스스로가 서글퍼져, 혜연은 애써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자신이 직접 자재를 고르고 조도를 맞췄던 로비의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이 오늘따라 유난히 미끄럽고 위태롭게 느껴졌다.사무실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이미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던 동기 민지였다. 민지는 혜연의 기척을 느끼자마자 의자를 홱 돌려 일어났다."혜연아, 일찍 왔네?"민지가 평소보다 조금 더 밝은 톤으로 인사를 건네며 혜연의 자리로 다가왔다. 혜연은 힘없이 가방을 내려놓으며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방 고리에 걸린 작은 장식조차 오늘따라 천근만근의 무게로 느껴졌다."응, 너도 일찍 왔네.""잠이 안 와서. 아, 참. 이거 마셔. 오는 길에 네 생각나서 사 왔어. 따뜻한 자몽차야. 너 요즘 통 못 먹어서 얼굴 반쪽 됐잖아. 속 쓰릴 텐데 커피 마시지 말고 이거 마셔."민지가 혜연의 책상 위에 조심스레 놓아준 종이컵에서는 달콤 쌉싸름한 온기가 피어올랐다. 혜연은 컵을 감싸 쥐며 그 온기에 잠시 손끝을 녹였다. 차가운 사무실 공기 속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인류애의 온기였다."고마워, 민지야. 잘 마실게. 요즘 나 때문에 너까지 피곤하게 해서 미안해.""무슨 소리야, 친구 사이에! 근데 너 오늘 안색이 너무 안 좋아. 주말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11
Mehr lesen
ZURÜCK
1
...
171819202122
CODE SCANNEN, UM IN DER APP ZU LESEN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