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e Kapitel von 내 친구의 남자였던, 그에게 향하다.: Kapitel 171 – Kapitel 180

220 Kapitel

171화 : 비릿한 훈장, 그리고 선(線) 너머의 고백 #3

무거웠던 공기는 부모님의 낮은 농담 섞인 배려 속에 조금씩 훈풍으로 변하고 있었다. 주방에서 경쾌하게 울리던 도마 소리처럼, 두 사람의 대화는 처절했던 서사 뒤에 찾아온 따스한 휴식이었다.동네 어귀 소공원은 낮의 소란을 지워낸 채 5월의 짙은 밤공기만을 머금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수줍게 내려앉은 벤치 주위로 연분홍 아카시아 꽃잎들이 눈처럼 흩날리며 두 사람만의 비현실적인 성역을 만들어냈다. 멀리서 라이트를 끄고 미끄러지듯 들어오는 상수의 차를 본 혜연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를 향해 뛰었다."상수 씨!"차 문이 열리기도 전에 달려온 혜연을 상수가 낚아채듯 끌어안았다. 젖은 외투 대신, 깨끗하게 세탁된 상수의 품에선 숲의 새벽을 닮은 서늘하고도 따스한 향기가 났다. 하지만 상수는 혜연을 품에 넣자마자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떨리는 목소리로 첫 마디를 뱉었다."미안해요, 혜연 씨... 내가 너무 비겁하게 도망가서, 당신 혼자 그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게 해서... 정말 죽을 만큼 미안해요."상수의 목소리는 그간 쌓여온 자괴감에 젖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혜연을 더 꽉 껴안으며 마치 그녀가 사라질까 두려운 사람처럼 애원하듯 덧붙였다."지켜준다는 핑계로 비겁하게 숨어있던 나를... 용서하지 마요. 오물 맞을 때보다, 산속에서 당신 생각하며 도망치던 그 며칠이 내 인생에서 가장 더럽고 추악했어요. 늦어서 미안해요. 정말 늦어서 미안해..."혜연은 상수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저었다. 그의 심장 박동이 그 거칠었던 엔진 소리보다 더 뜨겁게 전달되었다. 혜연은 상수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나직하게 답했다."아니요, 와줬잖아요. 내 손 잡아줬잖아요. 그거면 됐어요, 상수 씨."상수는 천천히 혜연을 품에서 떼어내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가로등 조명이 혜연의 눈망울 속에 맺힌 눈물을 보석처럼 투명하게 비췄다. 상수는 엄지손가락으로 혜연의 눈가를 조심스레 쓸어내리며,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다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01
Mehr lesen

172화 : 정면돌파 #1

회사 로비의 자동문이 무겁게 열리는 순간, 혜연은 발끝에서부터 전신으로 차오르는 서늘한 공기를 느꼈다. 아침부터 햇살은 통유리창을 통과하며 눈부시게 부서지고 있었지만, 사무실 안의 공기는 마치 산소가 희박한 고산지대처럼 기괴한 압박감을 머금고 있었다.엘리베이터 앞에 모여 낮게 수군거리던 동기들이 혜연의 실루엣을 발견하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 썰물처럼 흩어졌다. 방금까지 왁자지껄하던 공명은 순식간에 기괴한 정적으로 치환되었고,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는 누군가 흘리고 간 씁쓸한 커피 향과 비릿한 냉소만이 앙금처럼 감돌았다. 혜연은 그 텅 빈 공간,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투명한 화살들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걸었다. 예전 같으면 심장이 오그라들어 발끝만 보았을 그 시선들이, 이제는 그저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건조한 마찰음 정도로 느껴졌다."어머, 저기 좀 봐. 아주 철갑을 두르셨네, 철갑을. 전신주라도 들이받으시겠어."탕비실 입구에서부터 공기를 찢고 나온 민지가 요란한 발소리를 내며 등장했다. 민지는 보란 듯이 혜연의 팔짱을 꽉 끼더니, 흩어지던 무리들을 향해 레이저 같은 눈빛을 노골적으로 쏘아댔다. 평소보다 한 톤 높은 그녀의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야! 너네 다들 뭐 하니? 여기가 무슨 해수욕장이야? 사람이 오면 파도처럼 쩍쩍 갈라지게? 너네 조상 중에 모세라도 있니? 아님 길 터주는 홍해 바다야?"민지의 엉뚱하고도 날 선 비유에 혜연의 입가에서 참지 못한 웃음이 푸흡, 하고 터져 나왔다. 그 작은 소리가 적막한 사무실의 긴장감을 균열 내며 파동을 일으켰다."웃어? 야, 박혜연! 너 지금 웃었어? 너 진짜 드디어 미친 거야? 아니면 독기를 너무 품어서 해탈의 경지에 이른 거야? 어머, 얘 이마 뜨거운 것 좀 봐! 입원해야 하는 거 아니니? 아무래도 이제 나사가 한 10개는 풀린 것 같은데."민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혜연의 이마를 짚어보는 시늉을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혜연은 민지의 통통하고 따뜻한 손을 잡아 천천히 내리며 나직하게 속삭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02
Mehr lesen

173화 : 정면돌파 #2

혜연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도심의 네온사인이 하나둘 켜지며 어둠을 밀어낼 때마다, 혜연의 눈빛 속에도 차가운 불빛이 켜지듯 조금씩 단단해졌다.소영의 차가 신호에 걸려 잠시 멈춘 찰나, 혜연은 주저 없이 아스팔트 위를 가로질러 차 앞을 막아섰다. 끼이익, 날카로운 파찰음이 골목을 찢었고, 운전석 문이 거칠게 열리며 소영이 내렸다."너 미쳤니? 죽으려고 환장을 했어? 왜 차 앞으로 뛰어들어! 죽으려면 곱게 죽어! 왜 또 나한테 피해주려고 그래!"소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명품 선글라스를 거칠게 벗어 던졌다. 분노와 증오로 일렁이는 그녀의 눈은 혜연을 꿰뚫어 죽일 듯 노려봤다."할 말 있어.""하아! 그래, 들어나 보자. 타. 길바닥에서 천박하게 소문나기 싫으니까."소영은 신경질적으로 운전석에 다시 올라탔고, 혜연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조수석에 실었다. 차 문이 닫히자 외부의 경적 소리와 소음은 단절되었고, 오직 고급스러운 가죽 냄새와 소영의 진한 향수 향이 좁은 실내를 가득 메웠다. 소영은 거칠게 핸들을 꺾으며 타이어 비명 소리를 내며 가속 페달을 밟았다."어디까지 가는데! 무슨 대단한 유언이라도 남기려고 이 바쁜 퇴근 시간에 사람을 붙잡아! 말해, 당장!"소영은 핸들을 부서질 듯 움켜쥔 채 앞만 보고 쏘아붙였다. 그녀는 운전석이라는 자신의 견고한 '성벽' 안에서 혜연을 마음껏 몰아세우며 우월감을 확인하려 했다. 반면 조수석의 혜연은 창밖으로 흐릿하게 멀어지는 풍경, 저녁이 내려앉는 서울의 뒷골목만 응시했다.혜연이 누른 네비의 안내를 따라 운전하던 소영의 눈에 점차 낯익은 풍경들이 들어왔다."세워줘. 저기... 영미네 떡볶이 앞."핸들을 잡은 소영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리며 심하게 꿈틀거렸다."너 지금 장난해? 여길 왜...! 여기를 왜 다시 오자는 건데!""내려. 여기서 얘기해. 네가 제일 좋아하던 데잖아. 우리 생일 때마다 왔던 곳."가게 안은 예전 그대로였다. 칠이 벗겨진 낡은 플라스틱 의자, 중학생들의 유치한 낙서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02
Mehr lesen

174화 : 고백 (告白) — 20년의 궤적, 훼손된 성역 #1

가게 안은 시간이 퇴적된 유적지 같았다. 칠이 벗겨진 낡은 플라스틱 의자, 기름때가 앉은 탁자, 그리고 벽면 가득 층층이 쌓인 낙서들. 그 낙서의 가장 깊은 지층 어디쯤에는 초등학생 시절의 혜연과 소영이 삐뚤빼뚤하게 적어 넣은 이름들이 숨어 있을 것이었다.33살. 11살에 처음 만나 떡볶이 한 접시를 두고 미래를 약속하던 소녀들은 이제 각자의 전쟁터에서 상처 입은 어른이 되어 마주 앉았다. 혜연의 기억 속 11살의 그날도 오늘처럼 5월의 싱그러운 햇살이 교실 창가에 부서지던 오후였다. 막 전학을 와 낯선 표정과 어색한 자세로로 교단 앞에 섰던 혜연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수십 개의 호기심 어린 시선에 숨이 막혀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였다."야, 너 이름이 박혜연이야? 이름 예쁘네."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혜연의 눈앞에, 반짝이는 눈동자를 한 소녀가 서 있었다. 소영이었다. 그녀는 망설임도, 낯가림도 없었다. 반에서 가장 목소리가 크고 예쁘기로 소문난 소영이 성큼성큼 다가와 혜연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나랑 친구 할래? 나 윤소영이야. 친하게지내자."그것은 제안이라기보다 선언에 가까웠다. 마음에 드는 것이 생기면 계산하기보다 먼저 손을 뻗고,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서스름 없이 친구가되는 그래야만 직성이 풀리는 소영 특유의 본능적인 당당함. 혜연은 그 눈부신 확신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날 이후 소영은 혜연의 거대한 세계가 되었다. 소영이 이끄는 대로 떡볶이집을 가고, 소영이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소영이 꿈꾸는 미래를 함께 그리며 20년을 보냈다.언제나 먼저 다가가는 쪽은 소영이었고, 그 손을 잡고 안도감을 느끼는 쪽은 혜연이었다. 그랬던 소영이기에, 혜연은 지금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움켜쥔 소영의 침묵이 얼마나 처절한 배신감인지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소영은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주도권을 뺏겨본 적이 없는 아이였으니까.그렇게 20년이었다. 혜연의 인생에서 소영이 없었던 순간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03
Mehr lesen

175화 : 고백 (告白) — 20년의 궤적, 훼손된 성역 #2

"겨우 그말하려고 여기까지 오자고 한거니? 하아, 정말 어이없다.""내 마음 편하자고 여기 오자고 한 거 아니야. 그냥... 너한테 이 말을 꼭 해야만 했어.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고, 내 진심을 다해서 사과를 꼭 하고 싶었어."혜연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 그녀는 소영의 일그러진 표정을 하나하나 가슴에 새기듯 말을 이어갔다."나한테 넌, 친구 그 이상이었어. 내 20년 생애의 모든 페이지에 네가 있었으니까. 네가 첫 생리를 시작해서 보건실로 뛰어갔을 때 내가 네 뒤를 따라갔던 거, 우리 아빠 사업 망해서 집안에 빨간 딱지 붙었을 때 네가 네 돼지저금통 털어서 내 손에 쥐여줬던 거... 난 하나도 잊지 않았어. 너는 내 삶의 증인이자, 내가 가장 닮고 싶었던 별이었어."소영의 턱 근육이 가늘게 떨렸다. 소영은 그 떨림을 들키지 않으려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그녀의 내면은 이미 혜연이 소환한 20년의 기억들로 인해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소영은 그 요동을 증오라는 외벽으로 필사적으로 막아내며 명품 가방의 가죽 손잡이를 바스러지게 움켜쥐었다."그래서 더 무서웠어. 내 마음이 너라는 별을 가리게 될까 봐. 상수 씨를 향한 내 마음이, 20년 동안 네가 내 곁에 쌓아 올린 그 거대한 성벽을 무너뜨리게 될까 봐... 나 정말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어. 그 사람 옆에서 일하지 않으려고, 그 사람 눈길을 피하려고, 내 가슴 속에 핀 꽃을 꺾어버리려고 매일 밤 나 자신을 저주했어. 너를 잃는 건 내 인생의 절반이 떨어져 나가는 거였으니까."혜연의 눈에 물기가 어렸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지금의 눈물은 사죄의 진정성을 흐릴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결국 이렇게 된 이상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니. 믿지 않아도 좋아. 내 사과를 쓰레기통에 처박고 내 얼굴에 다시 침을 뱉어도 달게 받을게. 세상 모두가 날 손가락질하고, 네가 평생 날 저주한다 해도 내가 할 말은 없어. 널 원망하지도 않아. 하지만 소영아, 이것만은 알아줘. 너는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03
Mehr lesen

176화 : 흉터를 덮는 향기, 오직 당신이라는 위로 #1

소영과 마주 앉았던 떡볶이집을 나서는 혜연의 발걸음은 납덩이를 매단 듯 무거웠다.그 비명 같던 독설과 서늘한 눈빛을 뒤로하고 걷는 동네 골목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해서 오히려 소름 끼치도록 잔인했다.길게 늘어진 노을이 담벼락의 붉은 장미 위로 내려앉아 마치 마르지 않은 선혈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이 골목은 혜연에게 지도 없이도 걸을 수 있는 성역이자, 소영과의 기록 보관소였다.중학교 시절, 떡볶이 코트를 입고 깔깔거리며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던 전신주 앞을 지날 때 혜연은 발을 멈췄다.전신주에는 누군가 붙여놓은 빛바랜 전단지 귀퉁이가 너덜거리고 있었다.마치 소영과 쌓아온 20년 세월이 저렇게 한순간에 낡고 초라한 종잇조각이 되어버린 것 같아 가슴 한구석이 서늘했다.손끝으로 전신주의 거친 표면을 쓸어내리자, 그때의 웃음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몇 걸음 더 옮기자 대학 시절, 취업 준비에 지쳐 서로의 등을 두드리며 편의점 맥주 한 캔에 눈물을 섞던 낡은 나무 벤치가 나타났다.혜연은 차마 그 벤치에 앉지 못하고 그 곁을 서성였다.벤치 밑바닥에는 소영과 함께 '우리 꼭 성공하자'며 날카로운 열쇠 끝으로 새겨놓았던 유치한 낙서가 여전했다.이제 그 낙서는 소영의 심장을 후벼 파는 흉터가 되었을 것이다.혜연은 그 낙서를 차마 만져보지도 못한 채 고개를 돌렸다.이제 이 길 위에서 소영의 웃음소리를 기대하는 일은, 스스로에게 허락되지 않은 사치였다.​'이제 이 추억을 나눌 사람은 세상에 없겠지. 나를 가장 잘 알던 사람이, 이제 나를 가장 증오하는 사람이 되었구나.'​착잡함이 명치끝을 꽉 눌러와 호흡이 가빠졌다.힘들게 결심했던 사과는 건넸지만, 그것은 소영의 상처를 봉합해주기는커녕 오히려 곪은 상처를 헤집어놓은 꼴이었다.사과를 함으로써 소영에게 '용서해야 한다'는 도덕적 부채감까지 지운 것은 아닌지, 혜연은 자신의 이기적인 진심이 진저리나게 싫어졌다.골목 어귀, 소영이 유독 좋아하던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핀 집 담벼락을 지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04
Mehr lesen

177화 : 흉터를 덮는 향기, 오직 당신이라는 위로 #2

으깨진 두부를 보며 느꼈던 그 처절한 죄책감이 이제는 소영의 눈물로 치환되어 혜연을 덮쳤다.​"상수 씨, 나 이제 정말 알 것 같아요. 우리가 지고 갈 짐이 얼마나 무겁고 날카로운지.소영이가 참아준 그 무게만큼, 우리가 기꺼이 세상의 죄인이 되어야 한다는 걸요. 회피하지 않을 거예요.소영이가 보여준 그 처절한 인내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은, 상수 씨 곁에서 이 짐을 끝까지 함께 짊어지고 걷는 거니까요.비겁하게 행복해지려고만 하지 않을게요. 이 고통까지 다 안고 당신이랑 같이 있을래요."​상수는 혜연의 어깨를 더 단단히 감싸 안으며 그녀의 정수리에 깊게 입을 맞췄다.​"고마워요, 혜연 씨. 나도 절대 안 피해요. 오물 맞을 때 결심했어요.당신이 걷는 모든 가시밭길에 내 발바닥을 깔아주겠다고. 우리가 지은 죄, 우리가 감당해야 할 비난... 내가 당신보다 두 배로 더 많이 맞을게요.이제 우리, 서로만 보고 걸어요. 세상이 던지는 돌은 내가 다 맞을 테니까."​상수의 고백은 지금까지 이어온 모든 서글픔을 단숨에 녹여버리는 마법 같았다. 그는 혜연의 허리를 감싸 안아 작업실 한쪽에 놓인 소파로 이끌었다.지난 새벽 공원 벤치에서의 포옹이 '생존의 확인'이었다면, 지금 이 순간의 접촉은 서로의 감정을 온전히 맞닿게 하는 '영혼의 결합'이었다.​상수의 손이 혜연의 뺨을 타고 내려와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그의 손끝은 조향사답게 섬세했고, 동시에 조심스러운 열기를 품고 있었다.그는 혜연의 젖은 눈동자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속삭였다.​"혜연 씨... 오늘 밤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마요. 소영이도, 회사도, 세상의 시선도 이 방 문 너머에 두고 와요. 오직 내 향기만 맡고, 내 심장 소리만 들어요."​상수의 낮은 음성이 혜연의 귓가를 간지럽히며 마음의 빗장을 완전히 풀어내게 했다.혜연은 상수의 셔츠 깃을 손가락이 하얗게 질리도록 움켜쥐며 그의 숨결을 받아들였다.상수의 입술은 혜연의 입술 위에서 한참 동안 애틋하게 머물다, 그녀의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04
Mehr lesen

178화 : 진공의 방, 그리고 박제된 공기 #1

월요일 아침의 공기는 평소보다 날카로웠지만, 혜연은 지난밤 상수의 품 안에서 따뜻했던 기억을 등 뒤에 업고 사무실 문을 열었다. 상수가 아침 일찍 집 앞까지 데려다주며 쥐여준 따뜻한 캔커피의 온기가 여전히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 차 안에서 그는 혜연의 차가운 손을 감싸 쥐며 속삭였다."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퇴근 시간에 맞춰 여기 있을게요. 그러니까 겁내지 마요."상수의 그 낮은 목소리는 혜연에게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방패였고, 벼랑 끝에서 붙잡은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혜연은 그 목소리를 부적처럼 되새기며 로비를 통과했다.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수군거림은 여전했다. 탕비실 근처에서 혜연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동료들, 대놓고 위아래를 훑으며 들으라는 듯 혀를 차는 타 부서 직원들의 시선. 하지만 혜연은 평소보다 담담하게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소영에게 고개를 숙였던 그 비참한 밤, 혜연은 이미 세상의 모든 매를 맞을 각오를 끝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더 정갈하게 서류를 정리하고, 가방을 걸었다."어머, 박 과장님! 오늘 웬일이야? 얼굴에 막 광이 나네?"익숙하고 명랑한 목소리. 김민지 과장이 커피 두 잔을 들고 다가와 혜연의 어깨를 툭 쳤다. 민지는 주위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혜연의 책상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떼 한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혜연의 귓가에 입을 바짝 대고 장난스럽게 속삭였다."뭐야, 상수 씨가 주말에 보약이라도 해 먹였어? 이 지옥 같은 월요일에 혼자 생기가 돌다 못해 아주 넘쳐흐르네? 박혜연, 너 지금 이 상황에 그렇게 예쁘면 반칙이지. 눈가에 아주 봄꽃이 피었어."민지의 짓궂은 농담에 혜연은 처음으로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회사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진 지독한 고립 속에서 민지는 유일하게 혜연을 '문제아'가 아닌 '사람'으로 대우해주는 소중한 숨구멍이었다."농담 좀 하지 마, 민지야. 그냥... 어제 잠을 좀 잘 잤어. 마음을 좀 비웠거든.""잠만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05
Mehr lesen

179화 : 진공의 방, 그리고 박제된 공기 #2

순식간에 사무실의 공기가 낯설게 변했다. 익숙했던 복사기 돌아가는 소리, 공기청정기의 웅웅거림, 타 부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마치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멀고 먹먹하게 느껴졌다. 혜연은 노트북 화면만 응시했다. 메일함은 여전히 비어 있고, 결재 창에는 확인해야 할 서류가 단 한 건도 없었다.'내가 없어도 이 회사는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가는구나. 10년의 시간이 고작 이 정도 무게였나.'그 자각은 혜연의 자존감을 바닥까지 끌어내렸다. 상수의 품 안에서 느꼈던 온기는 이제 이 서늘한 진공 상태의 사무실에서 흔적조차 찾기 힘들었다. 혜연은 아무것도 띄워져 있지 않은 하얀 모니터에 비친 자신의 창백한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헌신이 단 한 통의 메일 누락으로 부정당하는 비참함 속에 혜연은 숨 쉬는 법조차 잊은 채 굳어 있었다.회의실 안에서 간간이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가 벽을 타고 전해질 때마다 혜연은 자신의 존재가 서서히 투명해지는 공포를 느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전우처럼 함께 밤을 지새우던 동료들이, 이제는 벽 너머에서 자신을 도려낸 채 완벽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혜연은 마른침을 삼켰다.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지만, 탕비실로 갈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그곳에 가면 또 어떤 비릿한 속삭임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기에.같은 시각, 상수의 작업실. 두 사람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그 공간에 '띠링' 하는 도어락 소리가 울렸다. 방문자는 혜연이 아니었다. 상수의 어깨를 짓누르는 가장 비릿하고도 통속적인 현실, 건물주였다."강 작가, 바쁜데 미안한데... 지난달 월세가 아직 안 들어왔어. 확인 좀 해봐."상수는 들고 있던 스포이드를 멈췄다. 혜연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다 책임지겠다, 당신 곁은 내가 지키겠다"고 호언장담했던 그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조향사로서 쌓아온 우아한 권위와 예술가적인 자존심은 월세 독촉이라는 비루한 단어 앞에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상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연신 고개를 숙였다."아, 사장님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05
Mehr lesen

180화 : 유리의 방 #1

작업실의 정오는 잔인할 정도로 고요했다. 천장의 높은 창틀 사이로 스며든 햇살은 먼지 섞인 공기를 투과하며 상수의 발등 위에 잘게 부서졌다. 그 빛은 따스함이 아니라, 마치 취조실의 차가운 조명처럼 상수의 비루한 현실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었다. 공기 중에는 미처 정리하지 못한 베르가모트와 샌들우드의 잔향이 떠다녔으나, 그것은 이제 우아한 향기가 아니라 죽어가는 짐승의 마지막 숨결처럼 비릿하게 느껴졌다.상수는 벌써 한 시간째, 신호음조차 가지 않는 핸드폰을 손바닥이 하얗게 질리도록 쥐고 있었다. 화면은 꺼져 있었지만, 그 검은 유리 너머로 오전 내내 쏟아졌던 거절의 말들이 환청처럼 맴돌았다."강 작가님, 죄송합니다. 본사 지침이라 저희도 어쩔 수가 없네요. 도덕성 리스크가 있는 인물과는 협업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이미 제작된 샘플은 폐기해 주시고, 계약금 반환 건은 법무팀을 통해 연락드리겠습니다."사형 선고보다 정중하고, 칼날보다 예리한 거절. 대기업 실직 후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던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조향사로서 보낸 지난 5년의 시간이었다. 대기업의 부품으로 살아가던 시절, 그는 자신의 냄새를 잃어버린 무취의 인간이었다. 그 무색무취한 삶을 견디지 못해 뛰어든 향기의 세계는 그에게 유일한 구원이었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다는 열등감을 씻기 위해, 그는 남들이 잠든 새벽에도 수천 개의 향료 병들과 씨름하며 코끝이 마비될 때까지 향을 쫓았다.장미 향료 단 한 방울을 얻기 위해 수천 송이의 꽃잎이 짓눌려야 하듯, 상수의 지난 5년은 스스로의 영혼을 짓이겨 짜낸 고결한 정수의 시간이었다. 그 결정체가 이제 막 업계에서 '강상수'라는 이름의 향기로 인정받기 시작한 찰나였다. 하지만 그 수소들은 '블라인드'라는 익명의 담장을 넘어온 단 몇 줄의 문장에 먼지처럼 바스러지고 있었다.상수는 작업대 위에 놓인 수천 개의 향료 병들을 멍하니 응시했다. 갈색 유리병 속에 갇힌 액체들은 더 이상 향기를 품은 보석이 아니라, 자신을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06
Mehr lesen
ZURÜCK
1
...
1617181920
...
22
CODE SCANNEN, UM IN DER APP ZU LESEN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