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의 남자였던, 그에게 향하다.의 모든 챕터: 챕터 11 - 챕터 14

14 챕터

밤의 블루밍 - 야식과 오해 사이 #1

카페 '블루밍'의 공사 현장은 한낮의 열기가 식어가는 것과 동시에 또 다른 차원의 눅눅한 긴장감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천장을 때리는 거센 빗줄기는 폐건물 밖의 세상을 완전히 단절시켰다. 혜연은 노트북 화면에 떠 있는 도면의 격자무늬를 노려보며 연신 미간을 찌푸렸다. 클라이언트가 갑작스럽게 요구한 최종 수정안은 혜연이 지난 수개월간 쌓아온 공간의 철학과 논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무례한 간섭이었다.​"이건 그냥 무식한 요구예요. 동선의 효율성도, 조형미도 다 깨버리겠다는 거잖아요. 이런 식이면 제가 설계한 의미가 없어요."​혜연이 디지털 펜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신경이 곤두서 날카로워진 그녀의 목소리가 텅 빈 콘크리트 벽에 부딪혀 공허하게 되돌아왔다. 옆에서 묵묵히 조향 샘플을 배합하던 상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앞에는 수십 개의 바이알 병들이 규칙적으로 늘어서 있었다.​"흐름을 깨는 게 아니라, 새로운 길을 내달라는 요청 아닐까요? 혜연 씨의 디자인은... 때때로 너무 완벽해서, 사람들이 들어와서 숨을 쉴 틈이 없거든요. 클라이언트는 아마 본능적으로 그 숨구멍을 찾고 있는 걸 겁니다."​"말은 참 청산유수네요. 그 '틈'이라는 게 결국 작가님의 모호한 향기를 끼워 넣기 위한 비겁한 변명 아닌가요? 내 완벽한 직선에 구멍을 내서 당신의 곡선을 채우겠다는 거잖아요."​혜연의 날카로운 반격에도 상수는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아주 옅은, 슬픔인지 배려인지 모를 미소를 지었을 뿐이다. 과거 소영의 뒤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던 무기력한 상수였다면 당황하며 시선을 피했겠지만, 지금의 상수는 달랐다. 그는 혜연의 도면 위로 자신이 방금 배합한 향기 샘플을 조심스럽게 밀어 놓았다.​그때였다. 혜연의 야무진 자존심을 비웃듯, 그녀의 뱃속에서 민망할 정도로 커다란 '꼬르륵' 소리가 정적을 뚫고 울려 퍼졌다. 혜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귀 끝까지 달아올랐다. 그녀는 당황을 감추려 노트북 화면 속 도면을 괜히 확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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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블루밍 - 야식과 오해 사이 #2

혜연은 차마 고개를 들어 상수의 눈을 볼 수 없었다. 상수는 잠시 침묵하다가 작게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민지 씨는… 성격이 참, 입체적이시네요."​"…정말 죄송해요. 저 인간이 술 안 마셔도 원래 좀 제정신이 아니에요."​혜연은 노트북 모니터 뒤로 얼굴을 숨기듯 파묻었다. 민지의 난입 덕분에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혐오 관계'의 팽팽한 줄이 묘하게 늘어졌다. 혜연은 민지의 말대로 왠지 모르게 상수의 체취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더 진하게 느껴지는 샌달우드와 희미한 비 냄새. 그것은 분명 방금 전과 같은 향이었는데, 민지의 농담이 섞인 지금 이 공간에서는 묘하게 가슴을 간지럽히는 자극으로 변해 있었다.​상수는 다시 조향 배합에 집중했다. 혜연은 그 모습을 곁눈질했다. 그는 혜연이 도면의 선 하나를 수정할 때마다, 그 미세한 변화에 맞춰 향료의 방울 수를 조절하고 있었다. 혜연이 직선의 차가운 벽을 세우면 그는 그 벽을 안개처럼 감싸 안는 향을 만들었고, 혜연이 날카로운 금속 자재를 배치하면 그는 그곳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는 잔향을 깔았다. 혜연은 이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남자는 지금 자신의 디자인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를 '공부'하고 있었다.​"왜 이렇게까지 해요?"​혜연이 나지막이 물었다. 상수는 피펫을 내려놓고 혜연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뭘 말입니까?"​"내 디자인을 살리려고 그렇게 꼼꼼하게 배합을 바꾸는 거요. 당신도 자존심 상할 거 아니에요. 내가 계속 무시하고, 말도 안 되는 사유를 대면서 당신을 이 프로젝트에서 쫓아내려 안달복달했는데."​상수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 혜연의 맞은편으로 다가와 걸터앉았다. 좁은 가설 책상 위로 두 사람의 거리가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혜연은 뒷걸음질 치고 싶었지만, 왠지 이번만큼은 물러나지 않아야 할 것 같다는 묘한 고집이 생겼다.​"혜연 씨가 화를 낼 때마다, 향기가 더 선명하게 보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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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 혹은 불협화음의 서막 #1

박혜연의 삶은 톱니바퀴가 정확히 맞물려 돌아가는 정교한 스위스제 시계와 같았다.​새벽 5시 30분.창밖의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암막 커튼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기 직전, 알람이 울리기 정확히 1분 전 눈을 뜨는 것. 그것은 혜연이 10년 동안 스스로에게 부여한 유일한 훈장이자 자부심이었다. 6시 정각에 시작되는 한강 변 조깅은 폐부 깊숙이 차가운 공기를 집어넣어 잡념을 털어내는 의식이었고, 7시의 정확한 영양 배합 단백질 셰이크는 감정 따위에 휘둘리지 않는 신체를 유지하기 위한 연료 주입이었다. 8시 00분, 사무실 지문 인식기에 손가락을 올릴 때 느껴지는 그 짧은 기계음은 그녀가 오늘도 완벽한 '박 과장'으로 접속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부모님은 항상 “우리 혜연이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잘 커서 참 기특하다”며 친척들 앞에서 입버릇처럼 자랑을 늘어놓곤 했다. 혜연은 그런 ‘완벽한 모범생’이라는 타이틀을 자신의 정체성이자,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세상의 거친 파도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단단하고 차가운 방패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적어도 어제까지는 그랬다.​하지만 오늘 아침, 그 견고하던 톱니바퀴 사이에 고운 모래알 같은 것이 끼어들었다.​어젯밤 폐건물 공사 현장, 그 먼지 구덩이 속에서 맡았던 낯설면서도 매혹적이던 샌달우드 향기가 문제였다. 잠결에 뒤척일 때마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그 서늘한 나무 냄새가 혜연의 무의식 저편을 자꾸만 헤집어 놓았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평소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알람을 끄고 다시 잠들기’라는 금기를 깨고 만 것이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평소 기상 시간을 30분이나 훌쩍 넘긴 뒤였다.​“아, 진짜… 박혜연, 너 왜 이래!”​헝클어진 머리칼만큼이나 마음도 어지러웠다. 주방으로 달려가 하얀 단백질 가루를 셰이크 통에 담으려 했지만, 초조함에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툭, 하고 미끄러진 스푼이 바닥에 부딪히며 하얀 가루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검은색 대리석 바닥 위로 흩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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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 혹은 불협화음의 서막 #2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방어벽을 쳤지만, 오후의 클라이언트 미팅에서 보여준 상수의 모습은 그 벽을 비웃듯 무너뜨렸다. 그는 혜연의 차가운 금속 소재와 직선적인 가구 배치 위로, 마치 안개처럼 부드럽게 스며드는 향기를 제안했다. 클라이언트는 감탄했고, 미팅은 완벽한 성공이었다.미팅이 끝나고 향한 맥주집. 민지는 이미 분위기에 취해 두 사람을 대놓고 엮기 시작했다.​“상수 씨, 우리 혜연이가 어릴 때부터 1등만 해서 연애를 좀 못 해요. 걔가 도면은 완벽하게 그려도 사람 마음은 잘 모르거든요. 고지식함의 결정체랄까? 근데 오늘은 좀 풀어지네? 너 맥주 한 잔에 얼굴이 그렇게 빨개지면 어떡해?”“민지야, 제발 그만해!”​혜연이 테이블 밑으로 민지의 발을 걷어찼지만, 이미 차오른 술기운은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홍당무가 된 얼굴로 맥주잔만 들이키는 혜연을, 상수는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자, 상수 씨. 솔직히 말해봐요. 우리 혜연이 첫인상, 진짜 재수 없었죠? 너무 빡빡해서 숨 막혔죠?”​민지의 짓궂은 질문에 혜연은 차라리 이 자리가 꺼지길 바랐다. 하지만 상수는 잔잔한 웃음을 띠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첫인상은… 세상에서 제일 빈틈없는 사람처럼 보였어요.”​그의 시선이 혜연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고정되었다.​“그래서 더 궁금했습니다. 저 단단한 방패 뒤엔, 도대체 어떤 맘이 숨어 있을까 하고.”​상수의 그 말은 단순한 호기심의 선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혜연이 정성껏 쌓아 올린 성벽의 가장 약한 지점을 정확히 겨냥한 직격탄이었다. 혜연은 타오르는 얼굴을 감추려 차가운 맥주잔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닿는 축축한 습기가 마치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 같았다."어머, 작가님 멘트 장난 아니다! 혜연이 방패가 아니라 유리창이라니까? 속이 다 보여!"민지가 짓궂게 웃어댔지만, 혜연의 귀에는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오직 제 앞에 앉아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응시하는 상수의 눈빛만이 비현실적으로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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