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내 친구의 남자였던, 그에게 향하다.: Chapter 31 - Chapter 40

220 Chapters

31화 : 선을 넘는 감각 #1

화요일 아침, 강남대로 지하철역 출구 계단은 지상으로 쏟아져 나오는 직장인들의 무채색 발소리로 가득했다. 혜연은 이 거대한 기계 장치의 부속품처럼 인파를 헤치며 능숙하게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 뒤를 따르던 민지는 사정이 달랐다. 월요일의 숙취가 덜 깼는지, 아니면 새로 산 구두가 말썽인지 민지는 사람들에 밀려 휘청이다 앞서가는 누군가의 단단한 어깨를 아주 제대로, 강하게 들이받았다.“악! 아, 죄송합니... 어? 야, 너!”사과를 하려 고개를 든 민지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상대방 역시 구겨진 수트 어깨를 털며 고개를 돌리다 민지를 확인하자마자 미간을 험악하게 찌푸렸다. 얼마전, 푸드코트에서 음식 쟁반을 사이에 두고 처절하게 으르렁댔던 그 남자, 상수의 친형, 재현이었다.“이거 보세요, 김민지 씨. 우리 분명히 합의하지 않았습니까? 길에서 마주치면 투명인간 취급하고 모르는 척하기로. 출근길부터 사람 진을 다 빼놓으시네, 진짜.”“누가 할 소릴! 저도 그쪽 얼굴 보니까 오늘 아침부터 재수가 옴 붙은 것 같거든요? 어쩐지 아침에 까치가 안 울더라니!”민지는 본능적으로 독설을 쏘아붙였지만, 홱 돌아서서 멀어지려는 재현의 뒷모습을 보며 문득 뇌리에 번개가 쳤다. ‘잠깐. 이 인간, 강상수랑 제일 가까운 사이잖아?’ 상수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 민지에게 재현은 더 이상 단순한 ‘푸드코트 빌런’이 아니었다. 그는 상수의 지난 8년, 소영과의 연애사, 그리고 그가 왜 그녀와 헤어졋는지까지, 혜연이 말해주지 않는 것들도 탈탈 털어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정보원이었다. 민지의 눈동자가 정보원 발견에 기민하게 굴러가더니, 이내 입가에 경련 섞인 가식적인 미소가 번졌다.“아니, 재현 씨! 잠깐만요! 가만 보니까 오늘 수트가 아주 찰떡이시네요? 어머, 인물이 아주 훤하시네! 강남역에 웬 모델이 서 있나 했네!”“...뭐예요? 갑자기 왜 이래요? 무섭게. 돈 빌려달라고 할 거면 정중히 거절합니다.”“에이, 무섭긴요! 우리 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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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 선을 넘는 감각 #2

상수는 혜연의 눈동자에 일렁이는 진심 어린 고집과 전문가로서의 분노를 읽어냈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먼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낮게 숙였다."미안합니다. 제가 혜연 씨의 전문성을 사적인 감정으로 성급하게 오해했네요. 방금 발언은 사과하겠습니다."예상치 못한 상수의 깔끔한 사과에 혜연도 멈칫했다. 쏘아붙이려 준비했던 말들이 갈 곳을 잃고 흩어졌다. 팽팽했던 긴장의 끈이 아주 조금 느슨해졌다. 혜연 역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다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저도 미안해요. 너무 공간의 효율성만 내세우느라 당신의 조향 철학을 무시한 면이 있었네요. 저도 업무적인 철벽이 과했던 것 같아요."상수는 혜연의 사과에 묘한 안도감을 느낀 듯, 조금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다시 의자를 당겨 앉았다."그럼, 딱 30분만 여기서 같이 있어 보죠. 말싸움 대신 감각으로 확인하는 겁니다. 이 향이 전조에서 중조로 넘어가는 그 30분 동안, 정말로 공간을 압도하는지 아니면 스며드는지. 직접 느끼고 나서 결정하는 거로 하죠."“좋아요. 30분, 기다려보죠.”혜연의 승낙과 함께 회의실의 시계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상수는 대답 대신 셔츠 소매를 살짝 걷어 올리고는, 테이블 중앙에 놓인 라벤더 샘플병의 뚜껑을 완전히 열어젖혔다. 좁은 소회의실 안으로 보랏빛 안개가 밀려드는 착각이 들 만큼 강렬한 전조(Top Note)가 쏟아져 나왔다.처음 5분, 혜연은 팔짱을 낀 채 의자 등받이에 몸을 바짝 붙였다. 공격적으로 코끝을 찌르는 라벤더의 날카로운 허브향은 마치 상수의 첫인상 같았다. 세련됐지만 차갑고, 다정해 보이지만 결코 곁을 내주지 않는 단단한 막. 혜연은 속으로 '거봐, 너무 진하잖아'라고 되뇌며 방어 기제를 세웠다. 하지만 10분이 지나고 15분에 접어들자, 공기의 질감이 변하기 시작했다. 날카롭던 향의 입자들이 공조기의 낮은 진동과 섞여 바닥으로 가라앉더니, 이내 혜연이 입고 있는 리넨 재킷의 결 사이사이로 스며들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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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 중조(Middle Note)의 시간 #1

소회의실 벽면에 걸린 디지털시계의 숫자가 정지된 화면처럼 느릿하게, 그러나 정직하게 바뀌고 있었다. 혜연과 상수가 약속한 30분 중, 마지막 5분이 남았을 때였다. 좁은 공간을 밀도 있게 채웠던 팽팽한 긴장감은 어느덧 기묘한 정적으로 변해 있었다. 그것은 적대적인 침묵이 아니라, 서로의 영역을 조심스럽게 탐색하고 받아들이는 치유의 시간에 가까웠다.처음 샘플병의 뚜껑을 열었을 때 코끝을 사납게 찌르던 강렬하고 날카로운 라벤더의 전조(Top Note)는 시간이 흐르며 공기 중의 습도와 두 사람의 체온에 섞여 낮게 가라앉았다. 혜연은 시선을 서류에 고정한 채 애써 검토하는 척했지만, 그녀의 감각은 이미 상수가 설계한 향기의 그물망에 촘촘히 걸려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분명 30분 전만 해도 '공간을 압도하는 오만한 악취'라며 밀어냈던 향이, 지금은 마치 원래부터 이 방의 차가운 벽지나 무미건조한 공기 속에 존재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혜연의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그동안 거친 건설 현장을 구르며 시멘트 가루와 소음 속에 잔뜩 굳어있던 혜연의 뒷덜미가, 팽팽하게 날이 서 있던 승모근이 향기에 녹아내린 듯 말랑해진 기분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라벤더의 보랏빛 안개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자, 늘 숫자에 쫓기고 도면에 치이던 뇌세포들이 잠시 휴전을 선언한 듯 고요해졌다.상수는 미동도 없이 노트북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 끝은 혜연의 미세한 움직임을 집요하게 쫓고 있었다. 그녀가 생각에 잠길 때마다 볼펜을 만지작거리는 규칙적인 소리, 긴장이 풀리며 조금씩 깊어지는 숨소리 하나하나가 라벤더의 잔향 속에 녹아들어 상수의 예민한 신경을 건드렸다. 상수는 이 침묵 속에서 혜연이 자신의 향기를 '용납'하고, 나아가 그 속에 안주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묘한 정복감과 동시에 깊은 유대감을 느꼈다. 마침내 30분을 알리는 타이머의 진동이 책상 위에서 짧고 묵직하게 울렸다.혜연이 먼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물기가 어린 듯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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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 중조(Middle Note)의 시간 #2

낮에 회의실에서 보았던, 향기에 취해 무장해제된 혜연의 단호하면서도 진실한 눈빛이 잔상처럼 떠올랐다.“아니, 혜연 씨... 보기보다 유연해. 일에 대해서는 고집이 좀 센데, 그게 다 자기 확신이 있어서 그런 거더라고. 오늘 보니까 잘못 인정하는 것도 빠르고, 남의 의견을 경청할 줄도 알고. 형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날카롭기만 한 사람 아니야. 오히려 배울 점이 많지. 보고 있으면... 가끔 놀라워. 저 사람 속엔 어떤 도면이 그려져 있을까 궁금해질 정도로.”상수의 의외의 반응에 재현이 마시던 맥주 캔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뜨며 쳐다봤다.“오호? 강상수, 너 지금 그 사람 두둔하는 거야? 무슨 같이 일한 지 얼마 됐다고 전우애 같은 게 생긴 거야? 아니면 너 뭐 약점 잡혔냐? 그 여자가 너 소영이랑 사귀거나 헤어질 때 다른 비밀이라도 알고 있는건가? 그래서 실드 쳐주는 거야?”“약점은 무슨. 그냥 일하는 스타일이 마음에 들어서 그래. 10년 차에 딴 과장 타이틀이 그냥 고스톱 쳐서 딴 건 아닐 거 아냐. 그 치열함이 좋아 보이는 거지. 그리고... 나를 그냥 '강상수'라는 조향사로만 봐주거든. 소영이 전 남친이 아니라.”재현의 장난 섞인 추궁을 싱겁게 넘기려던 찰나, 테이블 위에 놓인 상수의 휴대폰이 짧고 묵직한 진동을 울렸다. 화면에 뜬 두 글자, '아버지'를 보자마자 두 사람 사이의 유쾌했던 공기는 순식간에 영하로 얼어붙었다. 상수의 얼굴에서 온기가 순식간에 휘발되었다.상수의 손가락이 잠시 화면 위에서 멈췄다. 받지 않고 싶다는 강한 충동과 아들로서의 의무감이 짧게 충돌했다. 결국 그는 무거운 한숨을 삼키며 말없이 전화를 받아 귀에 댔다.“네, 아버지. 상수입니다.”• “밥은 묵었나.”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음성은 거칠고 투박했다.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온 남자다운 단답형 물음. 다정함의 부재가 기본값인, 마치 하급자의 보고 절차를 확인하는 상급자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엔 안부보다 검열의 뉘앙스가 짙었다.“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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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 잔향의 점성(粘性) #1

수요일 오후의 사무실은 늘 그렇듯 건조한 키보드 타격음과 낮게 깔린 공조기 소음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혜연의 책상 주변만큼은 점성이 높은 기묘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어제 소회의실에서 상수가 일부러인 듯 실수인 듯 두고 간 라벤더 샘플 병. 분명 뚜껑은 틈 없이 닫혀 있었지만, 혜연은 자꾸만 코끝을 간지럽히는 은은한 향기를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물리적 분자의 이동이라기보다, 어제 상수가 낮게 읊조렸던 “파트너로서 믿어주는 걸로 알겠습니다”라는 저음의 잔향이 귓가를 맴도는 환각에 가까웠다. 혜연은 서류를 검토하다가도 자꾸만 그 작은 유리병으로 시선이 향했다. 그 안의 액체는 마치 상수의 고집스러운 자아처럼 투명하면서도 묵직하게 출렁이고 있었다.​“박 과장님, 잠깐 옥상 좀? 공기가 너무 텁텁해서 질식하겠어.”​점심 식사 직후, 민지가 혜연의 팔꿈치를 콕 찌르며 은밀하게 눈짓했다. 혜연은 못 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옥상으로 향하는 비상계단을 오르는 동안 민지는 벌써 입이 근질거리는지 주변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야, 박혜연. 너 내가 어제 그 ‘재현 씨’한테서 들은 건데, 우리 강 작가님 말이야. 집안 분위기가 장난 아니래.”“뭐. 상수 씨가 어디서 사고라도 쳤대?”“아니, 그 반대야. 걔네 아버지 현역 때 별까지 다셨던 장성 출신이시라잖아. 근데 재현 씨 말로는 아버지가 상수가 하는 일에 도통 관심을 안주신데. 반대를 하시는 건 아닌데, 그냥 뭐랄까... ‘여전히 향수를 만들고 있나’는 식의 시큰둥한 반응? 그래서 상수는 명절에 집에 가도 자기 일 이야기는 입 밖에도 못 꺼낸대. 재현 씨는 넉살 좋게 사업 이야기며 아버지랑 낚시 다녀온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상수는 그 화기애애한 식탁 사이에서 투명인간 취급받는 기분이라는 거야. 그 숨 막히는 무관심 속에서 상수 씨가 얼마나 완벽해지려고 애썼겠냐? 무시당하기 싫어서, 자기 존재가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려고 향기에 목숨 거는 거라니까. 걔한테 향기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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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 잔향의 점성(粘性) #2

혜연이 향에 취해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는 사이, 상수는 고개를 숙여 혜연의 정수리와 가느다란 목덜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혜연의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잔머리가 상수의 숨결에 미세하게 흔들렸다.​“...어때요? 이번엔 좀 유연합니까? 당신의 그 견고한 도면 속에 스며들 수 있을 정도로.”​상수의 목소리가 혜연의 귓가 바로 옆에서 낮게 깔렸다. 혜연이 놀라 고개를 들자, 상수의 얼굴이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평소의 냉소 대신,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위태로운 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상수의 손가락 끝이 혜연의 예민한 귓바퀴를 스치고 뺨의 여린 살결을 부드럽게 지날 때, 혜연은 전기에 감전된 듯 작게 숨을 삼켰다. 그의 손가락은 서늘했지만, 그가 지나간 자리는 불길이 번지는 것처럼 뜨거웠다.​“혜연 씨는 사람 마음을 참... 향기처럼 파고드네요. 예고도 없이, 거부할 틈도 주지 않고.”​상수의 엄지손가락이 혜연의 뺨을 아주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그의 시선이 혜연의 입술에 머물렀고,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0.5mm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 좁혀졌다. 직장인으로서 견고하게 쌓아온 이성과 도덕적 경계선이 상수의 체온 앞에서 속절없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혜연은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번지는 마약 같은 안도감에 몸을 맡기고 싶어졌다.​바로 그 순간이었다. 혜연의 가방 속에서 휴대폰이 비명처럼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텅 빈 샘플실의 벽을 타고 반사되는 벨 소리는 마치 불륜의 현장을 덮치는 수사관의 외침처럼 날카로웠다. 화면에 선명하게 뜬 이름은 '소영'.​두 사람 사이의 진득했던 공기가 날카로운 소리에 산산조각 났다. 혜연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상수의 손길을 뿌리치듯 물러났다.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전화를 받으려는 혜연의 시선 끝에, 상수의 얼굴이 걸렸다.​소영의 이름이 뜬 화면을 확인한 순간, 조금 전까지 갈구하듯 혜연을 응시하던 상수의 눈빛이 순식간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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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 큐피드의 무리수 #1

목요일 오후 2시. 사무실의 공기는 식곤증과 건조한 에어컨 바람, 그리고 복사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세한 열기가 뒤섞여 텁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난 뒤의 나른함이 전염병처럼 번지는 시간이었지만, 혜연의 파티션 안쪽만큼은 예외였다. 혜연은 모니터 화면 가득 띄워진 도면 레이어를 수정하다 말고 자꾸만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어제 샘플실에서 상수가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내뱉었던 그 낮고 뜨거운 목소리, "자꾸만 더 깊이 맡고 싶어지게 만드네요"라는 말이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기 때문이다. 공간 인테리어 전문가로서 쌓아온 10년 차의 견고한 이성이, 단 한 번의 향기와 손길에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혜연은 자꾸만 달아오르는 뺨을 식히려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켰지만, 속수무책이었다.“혜연 씨, 잠깐만요. 이 부분 레이아웃 좀 같이 봐요. 수정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익숙하고 낮은 저음이 혜연의 오른쪽 귓가를 파고들었다. 상수였다. 평소라면 메일로 파일을 보내거나 전화를 걸어 회의실로 호출했을 그가, 이번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혜연의 책상 옆으로 다가왔다. 상수는 한쪽 손으로 혜연의 책상 모서리를 짚으며 몸을 낮게 숙였다. 그의 하얀 셔츠 소매가 혜연의 어깨 근처까지 내려왔고, 어제 맡았던 그 깊고 묵직한 우디 향이 혜연의 코끝을 훅 파고들었다.혜연은 자신도 모르게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상수의 체온이 좁은 파티션 공간을 순식간에 데우는 기분이었다. 상수의 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단단한 근육의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올 때마다 혜연의 사고 회로는 정지했다.“여기, 주 출입구 동선이 너무 꼬이는 것 같은데. 향기가 입구에서부터 부드럽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의 너비가 부족해요. 0.5미터만 더 확보해주면 안 될까요? 이 정도면 향의 입자가 벽에 부딪혀서 죽어버립니다.”상수가 마우스를 쥔 혜연의 손 위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직접 손을 겹쳐 잡지는 않았지만, 그의 긴 손가락 끝이 혜연의 손등 위를 스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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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 큐피드의 무리수 #2

두 사람의 메신저 대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민지는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담한 작전을 제안했다.[민지: 이 기세를 몰아서 이번 주말에 ‘창의적 영감 워크숍’ 하나 잡죠. 혜연이는 내가 팀장님 컨펌받아서 공식 일정인 것처럼 속여 데려갈 테니까, 재현 씨는 상수 씨 모르게 보쌈해와요.여행이라고 하든, 술 마시자고 하든!][재현: 크으, 민지 씨 추진력 보소. 좋습니다. 마침 제가 아는 가평 숲속 스테이가 하나 있는데, 거기 분위기 죽여줍니다. 침엽수 향이 예술이라 조향사한테 딱이죠. 상수는 제가 어떻게든 끌고 갈 테니 거기서 합류하죠. 민지 씨, 우리 나중에 결혼정보회사 하나 해도 되겠는데요?]민지는 작전 성공을 예감하며 입가에 비열한(?) 미소를 띠었다. 그녀에게 이번 프로젝트의 성공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10년 동안 일만 하며 연애 세포가 말라비틀어진 친구 혜연의 로맨스를 부활시키는 것이었다.금요일 오후. 상수는 영문도 모른 채 재현의 SUV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재현은 아침부터 "바깥공기 쐬고 싶다", "새로 오픈하는 프리미엄 스테이가 그렇게 좋다는데 무조건 가봐야 한다"며 상수를 달달 볶았다.“아 형! 무슨 갑자기 근교에 나가자는 거야? 그것도 가평까지? 어제까지 야근한 거 뻔히 알면서. 나 조향 데이터 정리할 거 산더미라고. 그리고 내 차 놔두고 왜 형 차로 가는데?”“에헤이, 강 작가님. 이게 다 널 위한 거야. 요새 핫한 공간은 직접 가서 그 공기를 마셔봐야 안다니까. 넌 그냥 몸만 와서 영감만 얻어. 내가 운전 다 하잖아. 형이 오랜만에 쏘는 거니까 즐겨 좀! 너 요새 너무 예민해!”상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재현을 쳐다봤지만, 워낙 외향적이고 바깥나들이를 좋아하는 형의 성격을 알기에 포기한 듯 시트에 몸을 묻었다. 오랫동안 소원했던 형과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곳은 형제끼리 오기엔 지나치게 로맨틱하고 아늑한 분위기의 숲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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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 안개의 채집 #1

가평의 펜션 거실은 이미 거나하게 취기가 오른 민지와 재현의 독무대였다. 노란 조명 아래 펼쳐진 테이블 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안주 접시들과 반쯤 비워진 와인병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두 사람의 목소리는 산속의 정적을 비웃듯 천장을 찌르고 있었다.​“아니, 재현 씨! 내가 진짜 우리 혜연이 10년 넘게 봐오면서 장담하는데요, 걔 진짜 목석이라니까요? 설계도면 그릴 때 보면 사람이 아니라 무슨 정밀 기계 같아요. 수치 1밀리미터 틀리는 건 봐도, 선 굵기 제각각인 건 못 참는 애라고요. 근데 오늘 상수 씨가 향료 설명할 때 혜연이 눈빛 보셨어요? 나 그렇게 집중하는 거 처음 봤잖아! 거의 눈으로 향기를 뚫어버릴 기세였다니까?”​민지가 와인잔을 위험하게 흔들며 호들갑을 떨자, 재현이 무릎을 탁 치며 맞장구를 쳤다. 그는 이미 넥타이를 풀어헤친 채 완전히 무장해제된 상태였다.​“민지 씨, 거 봐요! 우리 상수, 저 녀석이 평소엔 저렇게 숫기 없고 맹해 보여도 자기 일 할 때는 사람 홀리는 묘한 구석이 있다니까요? 저 녀석 조향 공부할 때 옆에서 지켜봤는데, 쟤는 향기를 맡는 게 아니라 향기랑 대화를 해요. 아주 집요하다니까! 아마 혜연 씨도 그 전문가적인 포스에 좀 놀랐을걸요?”​재현은 기분이 좋은 지 상수의 가방에서 몰래 꺼내 온 작은 샘플 병을 민지 앞에 들이밀었다.​“이거 봐요. 이게 상수가 이번 프로젝트 베이스로 고민 중인 향인데, 이름이 뭔 줄 알아요? ‘침묵의 선’이래요. 아니, 무슨 향기 이름이 이렇게 거창해? 내 코에는 그냥 비 온 뒤 산소 냄새구만! 근데 혜연 씨는 이걸 맡고 '공간의 뼈대'가 느껴진다고 하더라고요. 역시 전문가들끼리는 주파수가 통하는 게 있나 봐요. 안 그래요?”​“왜이래? 나도 전문가거든요? ‘침묵의 선’? 이름부터 완전 우리 혜연이 취향 저격이네! 재현 씨, 우리 오늘 안주가 너무 좋네요. 전문가들의 만남이라니, 아주 로맨틱하고 멋져!”​두 사람은 서로 잔을 부딪치며 낄낄거렸다. 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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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 안개의 채집 #2

“...정적이에요. 그런데 아주 단단해요. 마치 절대 무너지지 않는 거대한 숲의 뼈대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제가 도면을 그리면서 머릿속에 그렸던 이 프로젝트의 근본적인 공간감과...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히 일치해요.”​혜연의 낮은 감상에 상수의 손길이 잠시 멈췄다. 상수는 시향지를 거두지 않은 채, 안개 너머로 혜연을 가만히 응시했다. ​혜연이 천천히 눈을 뜨자, 상수의 짙은 눈동자가 그녀의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 눈은 달빛보다 깊었고 안개보다 모호했지만, 그 안에는 자신의 내밀한 세계를 완벽히 이해받았다는 안도감과, 눈앞의 파트너를 향한 억누를 수 없는 신뢰가 서려 있었다. 테라스 난간 너머로 보이는 가평의 풍경은 이제 완벽한 수묵화의 빛깔을 띠고 있었다. 검은 실루엣으로 남은 산등성이가 겹겹이 쌓여 공간의 층위(Layer)를 만들어냈고, 그 사이를 유영하는 안개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나무 사이를 조심스럽게 헤집고 다녔다. 혜연은 이 풍경이 상수의 인생과 닮아있다고 느꼈다. 겉으로는 단정하고 정돈된 수트를 입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누구에게도 쉽게 내보이지 못하는 짙은 안개와 고독한 숲이 도사리고 있는 남자.​상수는 천천히 몸을 숙여 혜연의 옆으로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요란한 고백이나 노골적인 유혹은 없었으나, 서로의 예술적 지향점이 완벽히 일치하는 순간의 전율이 두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을 투명하게 녹여버렸다. 그의 체온이 안개의 습기를 뚫고 혜연에게 닿았다. 평소 철저하게 지켜오던 '갑과 을', '과장님과 작가님'이라는 사회적 안전거리가, 이 찰나의 정신적 공명을 통해 아주 자연스럽게 소멸하고 있었다.​“혜연 씨와 일하면서, 저도 제 향기를 다시 보게 됐습니다.”​상수가 안개 낀 숲을 응시하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낮에 보았던 자신만만한 조향사의 위악적인 모습이 아닌, 한 명의 연약한 인간으로서의 진심이 묻어났다.​“전 늘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향을 만들었습니다. 특히 아버지에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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