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내 친구의 남자였던, 그에게 향하다.: Chapter 41 - Chapter 50

154 Chapters

무너지는 경계선 #1

토요일 오후, 서촌의 좁은 골목은 낮은 기와지붕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에 눈부시게 부서지고 있었다. 혜연은 갤러리 입구 옆, 담쟁이덩굴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벽 앞에 서서 연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이건 비즈니스 미팅의 연장일 뿐이다'라고 수백 번 되뇌었지만, 오늘 아침 거울 앞에서 옷을 세 번이나 갈아입고 립스틱 색깔을 고민했던 사실은 스스로도 속일 수 없었다. ​“혜연 씨.” ​낮게 깔린, 하지만 명확한 음성이 혜연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혜연이 고개를 돌리자, 화이트 린넨 셔츠의 소매를 가볍게 걷어 올린 상수가 서 있었다.  가평의 안개 속에서 보았던 위태로운 모습과는 또 다른, 담백하면서도 날카로운 도시 남자의 얼굴이었다. 그의 몸에선 은은한 시트러스와 쌉싸름한 차 향기가 났다. ​“일찍 오셨네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상수의 시선이 혜연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그 짧은 찰나, 혜연은 지난주 가평에서의 그 밤을 떠올렸다.  가평에서 돌아오는 차 안, 운전대를 잡은 상수의 손등 위로 쏟아지던 아침 햇살은 유독 투명했다. 민지와 재현이 뒷좌석에서 곯아떨어진 사이, 차 안에는 오직 두 사람의 규칙적인 숨소리와 낮은 라디오 클래식 음악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때 상수는 아무 말 없이 혜연의 손 곁에 따뜻한 캔커피를 놓아주었었다. ​“서촌에 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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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경계선 #2

상수는 잠시 걸려 온 전화를 받으러 일어났고, 혜연은 벤치에 앉아 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통화를 마치고 돌아오는 상수의 실루엣이 노을빛을 받아 부드럽게 번지고 있었다. 상수는 혜연에게 다가와 자연스럽게 그녀의 곁에 앉았다. ​그때 갑자기 골목 사이로 강한 바람이 불어와 혜연의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릴 정도로 흩날렸다. 혜연이 가방을 챙기느라 손이 묶인 사이, 상수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혜연의 얼굴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가평에서와 달리 혜연의 살결에 닿기 직전, 허공에서 단호하게 멈춰 섰다. ​상수는 직접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대신, 혜연의 뺨 근처에서 손을 멈춘 채 바람을 막아주듯 커다란 손바닥으로 그늘을 만들었다.  손끝이 닿을 듯 말 듯한 그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깊게 엉켰다. 상수의 손에서 배어 나오는 온기가 닿지도 않은 혜연의 피부 위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혜연 씨와 있으면 공간이 입체적으로 보여요.” ​상수가 낮게 읊조렸다. “저는 늘 향기라는 보이지 않는 선을 긋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혜연 씨의 도면, 혜연 씨의 시선이 그 선 위에 벽을 세우고 지붕을 덮어주는 기분이 들어요. 제 향기가 갈 곳을 잃지 않게 가둬주는 안식처를 만난 것 같습니다.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에요.” ​그것은 상수가 평생 타인에게 내비친 적 없는 가장 내밀한 고백이었다. 소영과 함께했던 8년의 시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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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의 위선 #1

일요일 새벽, 소영의 원룸은 지독하리만큼 고요했다. 창밖으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이끼처럼 스며들었지만, 소영은 단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침대 맡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바닥에 엎어진 휴대폰에 고정되어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 지은과의 통화가 남긴 잔상은 치명적인 독약처럼 소영의 전신에 퍼져나갔다. ​“야, 윤소영. 너 박혜연이랑 요즘 연락 안 해? 나 방금 서촌에서 걔 봤거든? 근데 옆에 있는 남자가... 야, 아무리 봐도 강상수더라고. 둘이 분위기 장난 아니던데?” ​지은의 목소리는 흥분과 경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소영은 그 목소리가 귓가를 때리는 순간, 심장이 발끝까지 추락하는 기표를 경험했다.  혜연이 누구인가. 소영이 강상수와 8년이라는 긴 세월을 사귀는 내내 소영의 연애 상담을 도맡아 주던 친구였다. 20살 풋풋한 새내기 시절의 설렘부터 서른을 앞둔 권태로운 연인이 되기까지, 상수의 무심함에 소영이 눈물을 흘릴 때마다 같이 상수를 욕해주던 20년 지기 분신이었다.  무엇보다 5년 전, 소영이 참다못해 던진 이별 통보에 상수가 눈 하나 깜짝 않고 "알았어"라고 대답하던 그 잔인한 순간에, 소영의 곁에서 같이 밤을 새우며 상수를 저주해준 사람도 혜연이었다. ​소영은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위로 8년의 조각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상수가 처음 고백하던 날의 수줍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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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의 위선 #2

혜연은 말을 이어갔다.  “너한테 미리 말 안 한 건... 네가 먼저 끝낸 인연이고, 이제야 겨우 마음 잡고 잘 사는 너한테 굳이 그 인간 이름을 꺼내서 다시 지옥으로 밀어 넣고 싶지 않았어. 내 생각이 짧았다면 정말 미안해.” ​소영은 혜연의 청산유수 같은 설명에 그제야 빳빳하게 세웠던 어깨의 긴장을 풀었다. 혜연의 눈에 고인 미안함이 진심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20년의 세월은 이토록 잔인하게 소영의 눈을 가렸다. ​“아... 그런 거였어? 난 또... 난 네가 나 배신하고 그 인간이랑 몰래 눈이라도 맞은 줄 알고 밤새 지옥이었어. 늘 내 옆에서 걔 욕을 같이 해준 게 너인데, 네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지은이 말이 너무 확신에 차 있어서...” ​소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혜연이 내온 차를 들이켰다. 긴장이 풀리자 소영 특유의 거침없는 말투가 돌아왔다. ​“에휴, 그럼 그렇지. 야, 근데 강상수 그 인간이랑 일하려면 진짜 속 터지겠다? 너도 알잖아, 걔 8년 내내 얼마나 감정 없는 목석 같았는지. 내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알았어’라고 하던 인간이잖아. 매사에 ‘네 맘대로 해’, ‘난 상관없어’라며 주관이라곤 눈씻고 찾아봐도 없던 애인데, 너처럼 완벽주의자인 애랑 일하면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겠네.” ​소영의 비아냥거림에 혜연은 순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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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감옥 #1

월요일 아침부터 혜연의 세계는 뒤틀린 채 시작되었다. 소영과의 폭풍 같은 대치 이후, 혜연은 상수를 마주하는 것 자체가 거대한 재앙이자 부도덕한 범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운명은 비릿한 농담처럼 혜연을 상수의 개인 작업실로 밀어 넣었다. 프로젝트 막바지 샘플링 확인을 위해 성수동에 위치한 그의 프라이빗 아틀리에로 외근을 가야 했기 때문이다. ​“민지야, 나 진짜 오늘 몸이 안 좋거든? 그냥 너만 가면 안 될까? 나 여기서 도면 검토할 거 산더미야. 머리가 깨질 것 같아.” ​혜연은 출근하자마자 민지의 소매를 붙잡고 간절하게 매달렸다. 평소라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현장을 진두지휘했을 혜연의 생소한 모습에 민지는 미간을 찌푸렸다. ​“뭐? 야, 박혜연. 너답지 않게 왜 이래? 지금 막바지라 제일 바쁜 거 알면서 나 혼자 가서 뭘 어쩌라고. 강상수 씨랑 조율할 게 한두 개야? 조명 조도랑 향기 확산 범위 체크하는 거, 너 없으면 결정도 못 해. 빨리 일어나.” ​“그냥… 좀 그래. 오한이 좀 드는 것 같기도 하고, 속이 안 좋아.” ​“뭔 소리야, 에어컨 바람 너무 쐬어서 그래. 얼른 나와! 이미 차 시동 걸었어. 이럴 시간 없으니까 빨리 가방 챙겨. 너 오늘 이상해, 진짜.” ​민지는 혜연의 등을 떠밀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어쩔 수 없이 조수석에 올라탄 혜연은 창밖의 풍경이 뒤로 밀려 나가는 것을 멍하니 응시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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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감옥 #2

상수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혜연의 눈동자 속에 서린 명확한 거부감과 혐오에 가까운 경계심을 확인한 상수는 더 이상 묻지 못하고 돌아섰다. 상수는 답답한 마음을 누르며 잠시 밖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마주친 민지에게 슬쩍 물었다. “민지 씨, 혹시 오늘 혜연 씨한테 무슨 일 있었나요? 아침부터 저를… 좀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요. 제가 모르는 사이에 실수를 한 건지.” 민지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응? 아니요? 아침에 출근해서 저랑 커피 마실 때만 해도 농담하고 잘 웃던데요? 왜요,상수 씨가 혜연이한테 뭐 잘못했어요? 쟤가 원래 일할 때 좀 까칠하긴 한데 오늘은 좀 심하네.”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상수는 혜연이 자신에게만 유독 차갑게 벽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혜연이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 상수는 텅 빈 의자를 바라보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닿고 싶어도 닿을 수 없는, 향기처럼 투명한 벽이 두 사람 사이에 세워져 있었다. ​혜연이 돌아왔을 때, 상수는 마지막 시도를 했다. 그는 혜연의 취향을 완벽하게 저격해 만든 자몽 향 베이스의 시향지를 혜연의 코끝에 조심스럽게 가져다 댔다. ​“혜연 씨, 이건 아까 말씀하신 피드백 반영한 건데… 한번 맡아보실래요? 혜연 씨가 좋아할 것 같아서 밤새 신경 좀 썼습니다. 이 향이라면 혜연 씨의 도면이 완벽해질 겁니다.&r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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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잔에 띄운 폭탄 #1

프로젝트의 9부 능선을 넘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각자의 내면에 감춰둔 비밀의 무게가 임계점을 넘어선 탓이었을까. 성수동의 한 고깃집, 눈치 없는 김 팀장의 주도로 시작된 강제 회식은 시작부터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 아슬아슬했다.  불판 위에서 고기가 익어가는 지글거리는 소리보다 더 시끄러운 것은 김 팀장의 거침없는 입담이었다. ​“아니, 내가 보니까 말이야. 강 소장님이랑 우리 박 과장님, 이거 보통 인연이 아니야. 일하는 거 보면 아주 전생에 부부였겠어! 어쩜 그렇게 척하면 척이야? 내가 20년 넘게 이 바닥에 있었지만, 이런 찰떡궁합은 처음 본다니까!” ​김 팀장이 소주잔을 높이 들며 던진 농담에 혜연은 마시던 물을 뿜을 뻔하며 컥컥거렸다. 식탁 구석에는 이미 초록색 소주병들이 전리품처럼 쌓여가고 있었다.  혜연은 어제 소영이 보낸 ‘사랑해 베프’라는 문자를 확인한 순간부터 지독한 자기혐오에 시달리고 있었다. 차라리 술기운에 정신을 놓고, 이 지긋지긋한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부부요? 푸하하! 팀장님, 소영이가 들으면 거품 물 소리 하시네! 그 인간은… 강상수는 원래 무색무취한 기계거든요! 저랑은 상극이라고요, 상극!” ​취기가 머리끝까지 오른 혜연이 상수를 향해 삿대질하며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소영'이라는 이름이 혜연의 입술 사이로 튀어나오는 순간, 테이블 위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옆에 앉은 민지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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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잔에 띄운 폭탄 #2

다음 날 아침. 혜연은 머리가 도끼로 쪼개지는 듯한 통증과 함께 눈을 떴다. 입안은 모래를 씹은 듯 깔깔했고, 어젯밤의 기억은 듬성듬성 끊긴 필름처럼 혜연의 양심을 할퀴었다. ​'내가 어제 소영이 이름을 불렀나? 강상수한테 기계라고 소리를 질렀던가?' ​수치심에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쓴 그때, 베개 옆에서 요란하게 진동하는 휴대폰. 엄마였다. 혜연은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받았다. ​“어, 엄마… 왜 이 아침부터 전화를….” ​“야, 너 목소리가 왜 그래? 또 술 마셨니? 정신 차려, 이 기집애야! 지금 해가 중천이야!” ​엄마의 쩌렁쩌렁한 목소리 너머로 낯익은 웃음소리가 섞여 들었다. 소영의 엄마였다.  혜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두 엄마는 딸들이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20년 넘게 우정을 이어온, 사실상 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였다. 두 집안은 혜연과 소영이 싸우면 엄마들끼리 화해시킬 정도로 깊이 얽혀 있었다. ​“혜연아, 나 소영 엄마야! 너 자니? 우리 소영이 이번에 소개팅한 남자랑 분위기 너무 좋단다! 아주 신사고 매너도 좋대. 너도 소영이한테 하나 소개해달라 그래. 언제까지 혼자 청승떨 거야?” ​스피커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소영 엄마의 들뜬 목소리. 소영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려 한다는 소식은 혜연에게 안도감보다 더 지독한 죄책감을 안겨주었다. &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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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향의 고백 #1

강상수의 인생은 언제나 ‘뒷줄’이었다. 학창 시절엔 튀지 않는 성적으로 중간 대열에 섞여 지냈고, 8년간의 연애는 기가 센 소영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는 긴 산책 같았다.  메뉴 하나를 고를 때도, 주말 데이트 코스를 정할 때도 상수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소영의 그림자 뒤에서 묵묵히 보조를 맞추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소영은 그를 '순종적이고 착한 사람'이라 정의했지만, 사실 상수는 그저 갈등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색깔을 지워버린 투명한 존재에 가까웠다. ​어렵게 들어간 대기업에서의 생활은 상수의 인생에서 유일한 '훈장'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영광은 3년도 채 되지 않아 코로나19라는 거대한 해일 앞에 ‘희망퇴직’이라는 이름으로 허망하게 무너졌다.  서른도 안 된 나이에 겪은 실직은 그에게 깊은 패배감을 남겼다. 번듯한 사원증이 사라진 순간, 상수는 자신이 아무런 색깔도, 향기도 없는 무색무취한 존재로 전락했음을 깨달았다. 소영의 곁에서도 그는 언제나 대체 가능한 부속품처럼 느껴졌다. ​그 지독한 패배감의 밑바닥에서 상수가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 바로 ‘조향’이었다. 타인의 감각을 지배하고, 보이지 않는 공기 속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작업. 하지만 그 선택조차 반쪽짜리였다.  아들이 대기업 직원이길 바랐던 아버지의 실망한 기색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상수는 여전히 아버지 앞에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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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향의 고백 #2

재현이 다시 잠든 깊은 밤, 상수는 숙취가 남긴 둔탁한 여운 속에서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거실로 나와 자신의 작은 작업실 책상 앞에 앉았다.  가슴 한구석이 달아올라 있었다. 그것은 술기운 때문이 아니라,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열망이 터져 나오며 생기는 마찰열이었다. 그는 수천 개의 향료 병들이 꽂혀 있는 선반을 멍하니 응시했다. ​조향사에게 향기는 언어다. 말로 전하지 못하는 진심, 혀끝에서 맴돌다 삼켜버린 문장들을 병 안에 담아내는 작업.  상수는 홀린 듯 스포이트를 집어 들었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정교한 화학 수식이나 데이터 계산도 없이, 오직 어제 느꼈던 그 지독하고도 매혹적인 혜연의 잔상을 쫓아 향료를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베이스에 깔린 것은 ‘시더우드(Cedarwood)’와 ‘베티버(Vetiver)’였다. 소영에 대한 부채감과 20년 우정이라는 무게로 짓눌린 혜연의 무거운 내면을 표현하고 싶었다.  눅눅한 흙 내음과 묵직한 나무 향이 작업실의 공기를 가라앉혔다. 혜연이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그 깊고 어두운 감옥의 향이었다. ​그 위로 상수는 혜연의 겉모습을 닮은 ‘알데하이드(Aldehyde)’를 배합했다. 코끝을 찌르는 금속성 차가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날카로움.  그것은 상수를 마주할 때 혜연이 두르는 갑옷이자, 차가운 거절의 언어였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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