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내 친구의 남자였던, 그에게 향하다.: Chapter 51 - Chapter 60

154 Chapters

보이지 않는 선의 침범 #1

비상계단 8층의 방화문은 평소보다 세 배는 더 무거웠다. 혜연은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폐부 깊숙이 밀려드는 찬 공기가 어제 마신 알코올의 잔해를 긁어내듯 쓰라렸다. ​‘박혜연, 정신 차려. 어제 넌 개였어. 강상수 씨는 그냥 프로젝트 파트너일 뿐이라고.’ ​하지만 주문은 힘이 없었다. 지하철역 입구에서 스치듯 본 상수의 뒷모습, 그 빳빳하게 각이 잡힌 코트 깃을 본 순간 혜연의 뇌는 ‘도망’이라는 단일 명령 체계로 전환되어 버렸다. 8층까지 단숨에 뛰어 올라온 탓에 종아리가 터질 듯 비명을 질렀지만, 심장의 고동은 그보다 훨씬 더 시끄러웠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혜연은 제 자리에 쓰러지듯 앉았다. 책상 한구석, 소영과 함께 찍은 사진 액자가 유난히 눈에 밟혔다. 환하게 웃고 있는 소영의 얼굴이 마치 ‘너 어제 무슨 짓을 한 거니?’라고 묻는 것만 같아 혜연은 얼른 모니터를 켰다. ​“야, 박혜연. 너 어디서 멧돼지한테 쫓기다 왔냐? 웬 땀을 그렇게 흘려?” ​옆자리 동기이자 십년지기인 민지가 커피잔을 들고 혜연을 살폈다. 혜연은 대답 대신 민지의 팔을 덥석 잡았다. ​“민지야, 제발. 오늘 강상수 씨 오면... 나 외근 나갔다고 해줘. 아니, 아예 퇴사했다고 해. 나 진짜 그 사람 얼굴 볼 자신 없어.” ​“뭐래? 너 어제 기억 안 나? 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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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선의 침범 #2

상수가 잠시 김 팀장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민지가 의자를 드르륵 밀며 혜연의 곁에 나타났다. ​"어제 둘은 정말 아무런 기억이 없어? 그 욕도 아니고 칭찬도 아니고 싸움도 아닌데 고백도 아닌 걸 주고받던 걸 정말 기억 못 한단 말야? 너 그때 상수 씨 가슴팍에 기대서 '왜 너는 상수가 아니라 상수(constant) 같은 놈이라 변하지도 않느냐'며 울었잖아. 수학 시간인 줄 알았다니까." ​그 순간, 민지의 말이 트리거가 되어 끊겼던 어젯밤의 필름이 지직거리며 복구되기 시작했다. --------------------------------------------------------------------------​[Flashback]가로등 불빛이 일렁이던 회사 앞 골목. 혜연은 상수의 멱살을 움켜쥐고 흔들고 있었다. “야! 강상수! 넌 무색무취했던 놈이... 왜 갑자기 자기주장이 강해져 가지고 날 피곤하게 해! 게다가 너는 왜 그렇게 섬세하고 난리야! 사람 미치게!” 상수는 혜연의 손목을 잡지도, 뿌리치지도 않은 채 그녀의 폭언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 역시 고함을 질렀다. “아니, 혜연 씨는 공간 디자인만 제대로 하면 될 거 아냐! 왜 자꾸 내 코앞에 나타나서 나한테 영감을 주는 건데! 왜 자꾸 사람 신경 쓰이게 만드냐고!!” ​두 사람은 서로를 비난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명백한 고백이었다. 서로의 존재가 자신의 세계를 얼마나 흔들고 있는지에 대한 처절한 비명이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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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연애, 나의 진심 #1

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의 유리문을 밀 때부터 혜연의 손바닥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불과 며칠 전,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소영을 찾아갔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그때 소영은 아무것도 모른 채 혜연을 반겼고, 오늘도 변함없는 미소로 창가 자리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20년.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함께하며 서로의 첫사랑부터 이별까지 모든 역사를 공유한 사이. 그 세월이 혜연의 발목에 무거운 족쇄를 채웠다. 식당 안의 은은한 조명조차 혜연에게는 취조실의 불빛처럼 따갑게 느껴졌다. "혜연아! 여기, 여기!" 소영은 평소처럼 티 없이 맑은 미소로 자리를 가리켰다. 혜연은 떨리는 입꼬리를 간신히 끌어올리며 마주 앉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식기들이 혜연의 불안한 시선을 따라 미세하게 흔들리는 듯했다. "오늘 회사 근처까지 오느라 고생했네. 소영아, 피곤해 보여." "말도 마. 요새 시즌이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너는? 그 대형 프로젝트는 잘 돼가? 네 성격에 또 밤새고 그러는 거 아냐?" 혜연의 손이 식탁보 아래에서 가늘게 떨렸다. '프로젝트'.  그 단어는 이제 혜연에게 단순한 업무가 아니었다. 그것은 곧 강상수라는 이름과 동의어였고, 동시에 금기된 구역의 열쇠였다. 가평의 그 서늘했던 밤, 안개 사이로 전해지던 상수의 체온과 떨리던 숨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스쳤다. "응, 잘 돼가.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야. 데이터도 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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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연애, 나의 진심 #2

'나 지금 뭐 하는 거야... 진짜 미쳤나 봐. 소영이 얼굴을 보고 어떻게 강상수 생각을 해.' 혜연은 가방 속에서 상수의 시향지를 꺼내려다 멈췄다. 그때 테이블 위에 던져둔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화면에 뜬 이름은 [강상수 씨].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받지 말아야 한다고, 여기서 멈춰야 한다고 이성이 비명을 질렀지만, 손가락은 이미 통제 불능 상태로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여보세요." "아, 혜연 씨. 접니다. 강상수입니다." 수화기 너머 상수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낮에 사무실에서 보여주었던 그 서슬 퍼런 확신은 어디로 갔는지, 지금의 목소리는 지독하게 평소의 '소심한 강상수'로 돌아와 있었다. 그 온도 차가 혜연의 마음을 더 아릿하게 만들었다. "아... 네, 상수 씨.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늦은 시간에 실례인 줄 아는데... 오늘 낮에 제가 좀 무례했던 것 같아서요. 마음이 쓰여서 전화를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 "사무실에서 사람들 다 보는데... 제가 평소답지 않게 고집을 부린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 혜연 씨 곤란하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제가 요새 좀... 제정신이 아니었나 봅니다. 혜연 씨만 보면 제가 자꾸 저답지 않게 굴어서요." 상수의 사과는 투박하고 담백했다. 하지만 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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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들어 가는 마음, 익어가는 시간 #1

고깃집 안은 이미 퇴근한 직장인들의 소란스러운 해방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은색 흡입구들은 제 소임을 다하느라 요란한 금속음을 내뱉었고, 누군가의 건배사와 뒤섞인 웃음소리가 자욱한 연기 사이를 유령처럼 부유했다.  혜연은 식당 입구에서 잠시 멈춰 서서 코트 깃을 바짝 여몄다. 오늘 낮, 상수의 전화를 받고 ‘절대 나가지 말아야지’라고 수만 번 다짐했던 결심은 식당 문을 여는 순간 무력하게 흩어졌다. ‘딱 30분만. 정산만 하고 바로 일어나는 거야. 절대 웃어주지도 말고, 빈틈도 주지 마, 박혜연.’ 혜연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식당 구석, 상수는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평소 사무실에서 보던 그 구부정한 어깨는 간데없고, 집게를 든 손놀림이 꽤 능숙하고 분주했다. 불판 위에서 솟아오르는 붉은 열기가 그의 안경 너머 눈동자를 이따금 흐릿하게 만들었고, 그럴 때마다 상수는 기묘한 집중력을 발휘하며 고기를 살폈다. “오셨어요? 여기, 여기요! 길 안 잃고 잘 찾아오셨네.” 상수가 해맑게 손을 흔들었다. 그 무던하고 담백한 얼굴을 보자마자, 혜연은 어제 소영이 씁쓸하게 뱉었던 말이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가슴을 찔렀다. ‘그 오빠, 고기 구울 줄도 몰라. 연애 초반에 멋있게 구워주겠다고 큰소리치더니 맨날 시커멓게 태워 먹어서 결국 내가 다 구웠다니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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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들어 가는 마음, 익어가는 시간 #2

“근데 이상하게 혜연 씨랑 있으면 자꾸 손이 가네요. 혜연 씨가 맛있게 드시는 걸 보고 싶고, 내가 만든 향기든 내가 구운 고기든 혜연 씨가 좋게 평가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생겨요. 조향사로서의 새로운 직업병이 생긴건지, 아니면 다른 병인지는 모르겠지만.” 특별한 기교를 섞은 유혹의 말 같지는 않았다. 그냥 떠오르는 감상을 필터 없이 내뱉은 말 같은데, 그게 혜연의 심장을 둔기로 때리듯 묵직하게 건드리고 지나갔다. ‘왜 나한테만 이러는 거야, 이 사람은.  왜 소영이한테는 한 번도 안 보여준 얼굴을 나한테만 자꾸 내미는 건데. 왜 나를 이렇게 나쁜 친구로 만드느냐고.’혜연은 소영이 느꼈을 무색무취함을 생각했다. 소영이 그토록 원했을 상수의 '온도'와 '색채'를, 지금 자신이 아무런 노력도 없이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20년 우정에 대한 배신감과, 이름 모를 우월감, 그리고 거대한 죄책감이 뒤섞여 목구멍을 꽉 막았다. 혜연은 억지로 고기를 씹어 삼켰지만, 맛은 이미 느껴지지 않았다. “상수 씨. 저한테 너무 잘해주지 마세요. 저 소영이랑 20년 지기예요. 상수 씨가 어떤 사람인지, 소영이한테 이미 다 들었다고요. 당신은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고, 무관심한 사람이라면서요.” 상수의 집게질이 멈췄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혜연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식당의 소음이 멀어지고, 불판 위에서 고기가 타들어 가는 소리만 선명해졌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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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향의 침범 #1

어제 상수가 건넨 그 작은 유리병은 독약이었을까, 아니면 지독하게 달콤한 최면제였을까.혜연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코끝을 간지럽히는 낯선 향기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베개 끝에 딱 한 방울 떨어뜨렸을 뿐인데, 좁은 방 안은 이미 상수가 설계한 향의 그물에 촘촘히 갇혀 있었다.  샌달우드의 묵직하고 고요한 베이스 위에 혜연이 평소 좋아하던 상큼한 시트러스 계열의 잔향이 묘하게 섞여 있었다. 그것은 마치 차가운 새벽 숲속에서 갓 쪼갠 귤껍질 향기가 배어 나오는 듯한, 이질적이면서도 완벽한 조화였다. "업무용이라더니... 사람 취향은 기막히게 아네, 진짜." 혜연은 자책하듯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어제 그 향기에 취해, 아니 그 향기를 빌미 삼아 상수의 무던한 얼굴과 고기를 굽던 다정한 손길을 떠올리며 잠들었던 자신이 한심했다.  서둘러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왔지만, 이미 옷깃과 머리카락 깊숙이 스며든 향기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마치 상수가 방금까지 곁에 서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들어, 혜연은 마른세수를 하며 거울 속 자신을 노려보았다. '정신 차려, 박혜연. 이건 그냥 프로젝트의 연장선일 뿐이야. 향기에 속지 마.' 하지만 거울 속 혜연의 눈동자는 평소보다 생기가 돌고 있었다. 소영이 말했던 "요즘 얼굴 좋아졌다"는 말이 비수처럼 떠올랐다.  친구의 전 남친이 만든 향기를 몸에 두르고 활력을 얻는 자신이라니. 혜연은 죄책감을 씻어내듯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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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향의 침범 #2

어제 제 방을 점령했던 그 지독하고 달콤한 샌달우드 향의 주인. 상수의 체취였다. "오셨네요, 혜연 씨. 어제보다 안색이 밝아 보여서 다행입니다." 상수는 편안한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인 채 공간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었다.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드러난 탄탄한 팔뚝과 힘줄이 혜연의 시선을 자극했다. 그는 혜연의 곁으로 다가와 자연스럽게 공간의 습도를 체크하는 기기를 꺼내 들었다. "여기는 통풍이 잘돼서 향이 금방 날아가겠네요. 발향 포인트를 좀 더 위쪽으로 잡고, 농도를 1.5배 정도 올려야겠어요. 혜연 씨 생각은 어때요?" 상수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덤덤하고 무던했다. 하지만 혜연은 그의 존재감이 너무나 크게 느껴져 도면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어제 고깃집에서 그가 했던 말, '안 하던 짓을 하게 된다'는 고백 같은 말이 현장의 전동 드릴 소리보다 더 크게 귓가에 맴돌았다. "아, 네... 그러시죠. 상수 씨가 알아서 잘 잡아주세요. 전 디자인적 요소만 체크하면 되니까요." 혜연은 일부러 거리를 두며 자리를 옮기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바닥에 놓여 있던 굵은 전선 다발에 안전화 끝이 걸렸다. "어...!"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지려는 찰나, 강하고 묵직한 힘이 혜연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상수의 팔이었다.  혜연의 코끝이 상수의 목덜미 근처에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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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머무는 자리 #1

토요일 아침, 혜연의 오피스텔 창가엔 이른 봄볕이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먼지 섞인 햇살이 공중을 부유하며 평화로운 주말의 시작을 알렸지만, 혜연의 미간은 좀체 펴지지 않았다.  모처럼의 늦잠을 만끽하며 이불속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려던 혜연의 손끝에 짧고 묵직한 진동이 울렸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시간에 이런 속도로 연락할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다. [혜연아, 반찬 해놨다. 오늘 안 오면 네 아빠가 다 먹어치운단다. 고기 삶아놨으니 식기 전에 와.] 엄마의 카톡은 언제나 용건만 간단히, 하지만 거절할 틈을 주지 않는 묵직한 압박이 있었다. 혜연은 "회사 일이 밀려서..."라고 자판을 두드리다 이내 한숨을 내쉬며 지웠다.  "너 요새 얼굴 까칠해졌더라"는 지난번 통화에서의 엄마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했기 때문이다. 딸의 목소리 톤 하나만으로 컨디션을 읽어내는 엄마의 레이더를 피하기란 불가능했다. 결국 혜연은 부스스 일어나 대충 머리를 묶고 본가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본가 현관문을 열자마자 끼쳐오는 것은 그리운 '삶의 냄새'였다.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와 달큰한 간장에 푹 고아진 돼지 수육의 향기. 혜연은 신발을 벗으며 무의식중에 코를 킁킁거렸다.  조향사 상수와 일하며 후각이 예민해진 탓일까, 예전엔 당연하게 여겼던 '집 냄새'가 오늘따라 유독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상수가 만드는 인공적인 향기와는 또 다른, 세월이 켜켜이 쌓인 안도감의 냄새였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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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머무는 자리 #2

혜연은 구석 자리에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하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딸랑— 익숙한 종소리와 함께 카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혜연의 코끝에 익숙한 샌달우드 향이 먼저 닿았다. 재료 박스를 양팔 가득 품에 안고 들어오는 남자, 강상수였다. "강 작가님...?" 혜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수는 혜연을 발견하자마자 조금 놀란 눈치를 보이더니, 이내 특유의 무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어, 혜연 씨. 여기서 뵙네요. 진짜 신기하다." 상수는 자연스럽게 혜연의 맞은편 자리에 박스를 내려놓았다. 그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프로젝트에 필요한 재료를 구매하러 다시 이 동네에 왔고 온 김에 뒤 야산에서 야생화도 따왔다는 그의 말은 늘 그렇듯 담백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상수는 박스 안에서 정성스럽게 갈무리된 시향지 몇 장을 꺼내 혜연에게 내밀었다. 방금 채취한 식물의 생명력이 향기에 배어 있었다.  혜연은 철벽을 치려던 마음도 잊은 채, 조심스럽게 시향지를 건네받았다. 상큼하면서도 끝맛은 쌉싸름한 흙 내음. 지독하게 상수의 성격을 닮은 향이었다. "어제 잠은 좀 잤나요? 아까 보니까 눈 밑이 조금 어두운 것 같아서요.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 "강 작가님, 제 사적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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