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형에게 안기면 의 모든 챕터: 챕터 21 - 챕터 30

33 챕터

21화. 기자회견 아침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하진은 눈을 떴다.창밖은 아직 어두웠다.옆에서 서우의 숨소리가 고르게 들려왔다.방 안 공기는 서늘했지만, 이불 속 온기만은 여전히 따뜻했다.창밖 새벽빛이 조금씩 짙어지고 있었다.오늘이었다.숨기지 않기로 한 날.이름을 걸고 서기로 한 날.하진은 천장을 오래 올려다보다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벌써 깼나."서우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잠에서 덜 깬 목소리였지만, 눈빛만은 이미 또렷했다."긴장돼서 잠이 안 왔어요.""나도 마찬가지다.""당신도 긴장해요?""당연하지.""오늘 이후로, 우리 둘 다 다시는 예전으로 못 돌아간다."하진은 그 말에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창밖 도시는 아직 새벽빛에 잠겨 있었다."강서우 씨,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뭐든.""후회할 것 같으면요.""후회는 안 한다.""대신 무서운 건 인정하지.""그런데 그 무서움보다, 너와 함께 서는 게 더 크다."하진은 그 대답에 마음이 놓였다.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가며, 어제 준비해둔 옷을 눈으로 훑었다.검은 코트, 흰 셔츠.화려하지 않지만 단정한 차림이었다.옷걸이에 걸린 그 옷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오늘이 특별한 날이라는 게 실감 났다."이 옷, 당신이 골라준 거죠.""그래.""카메라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색이 필요했다.""저 오늘 안 흔들릴 수 있을까요.""흔들려도 된다.""대신 넘어지지만 마."서우가 다가와 하진의 어깨를 가만히 감쌌다.그 손의 온도가 아침 공기 속에서 유독 따뜻했다."어젯밤엔 한숨도 못 잤죠?""조금 잤다.""대신 네 얼굴 보느라 시간을 더 썼지.""제 얼굴 보는 게 그렇게 재밌어요?""재밌는 게 아니라, 안심이 되는 거다.""네가 여기 있다는 확인.""오늘, 질문 험할 거다.""사생활, 과거, 태겸이 이야기까지 다 나올 수 있다.""그럴 줄 알았어요.""근데 이상하게, 그 질문들이 예전만큼 무섭지 않아요.""왜 그렇지.""예전엔 제가 숨길 게 많아서 무서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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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셔터가 터지는 자리

기자회견장 입구, 플래시가 일제히 터졌다.하진은 순간 눈이 부셨지만, 서우의 손이 곧바로 허리를 감쌌다.수십 대의 카메라가 동시에 셔터를 눌러대는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눈 감지 마.""당당하게 걸어.""그렇게 할게요."두 사람이 나란히 단상으로 걸어가자 웅성거림이 커졌다.기자들의 카메라가 일제히 방향을 틀었다.하진은 그 시선들 속에서, 발끝에 힘을 주고 똑바로 걸었다."강서우 대표님, 오늘 자리 이유가 뭡니까?"정문익의 목소리가 가장 먼저 날아들었다.서우가 마이크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제 개인적인 관계에 대해, 더 이상 숨기지 않기로 했습니다."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하진은 그 정적 속에서 숨을 골랐다."윤하진 씨와의 관계, 사실입니까?""사실입니다.""언제부터입니까?""중요한 건 언제부터가 아니라, 지금 어떤 마음이냐는 겁니다."기자들의 손이 일제히 올라갔다.하진은 그중 하나를 지목했다.스스로도 놀란 행동이었다.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능동적인 선택이었다."윤하진 씨, 강태겸 씨의 전 연인이라는 사실, 인지하고 계셨습니까?"날카로운 질문이었다.하진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서우의 손이 그 떨림을 곧바로 감쌌다."알고 있습니다.""그리고 그 사실이, 지금 이 자리에서 부끄러운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두 형제 사이에서 선택받은 기분, 어떻습니까?"무례한 질문이었다.장내 몇몇 기자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흘렀다.하진은 순간 화가 치밀었지만, 침착하게 대답했다."저는 선택받은 게 아니라, 제가 선택한 겁니다.""그 차이, 아셔야 할 것 같습니다."장내에 짧은 웅성거림이 일었다.몇몇 기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도 보였다.서우가 그 흐름을 이어받았다."이 자리는 해명을 하려는 자리가 아닙니다.""우리 관계를 숨기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려는 겁니다."한 기자가 다시 손을 들었다."강서우 대표님, 오늘 이후 회사 이미지 손상은 어떻게 책임지실 겁니까?""이미지보다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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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이름을 걸고

"저는 누군가의 나쁜 소문 속 사람이 아닙니다."하진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회견장 전체에 울렸다.정적이 흘렀다.카메라 셔터 소리조차 잠시 멎은 듯했다."제 이름은 윤하진입니다.""강태겸 씨의 전 연인도, 강서우 대표님의 스캔들 상대도 아닙니다.""저는 그냥, 제 이름으로 서 있는 사람입니다."기자들의 카메라가 일제히 하진을 향했다.그 시선들 속에서, 하진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담담했다.처음 이 자리에 서기로 결심했을 때의 두려움은, 이미 저 멀리 사라져 있었다."저는 대필 작가였습니다.""제 이름 대신 다른 사람 이름으로 글을 썼고, 그 시간 동안 제 존재는 지워져 있었습니다.""지금은 다릅니다.""제 이름으로 다시 글을 씁니다."기자들 사이에서 짧은 박수 소리가 새어 나왔다가,이내 조심스럽게 잦아들었다.하진은 그 소리에 잠시 목이 메었지만,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제가 겪은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됐으면 합니다.""이름을 빼앗긴 사람도, 결국 되찾을 수 있다는 걸요."서우가 옆에서 조용히 하진을 바라보았다.그 눈빛에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처음 만났던 밤의 젖은 얼굴과 지금 단상 위의 얼굴이,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기자들 중 하나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윤하진 씨, 재출간되는 원고 제목은 정해졌습니까?""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정해뒀습니다.""공개해주실 수 있나요?"하진은 잠시 서우를 바라보다가,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오늘이 아니라, 다음에 알려드릴게요.""오늘은 다른 이야기를 할 자리니까요.""강서우 대표님,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정문익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서우가 마이크를 잡았다."저는 이 사람을 숨기지 않습니다.""새 남자라는 표현은 틀렸습니다.""숨기고 싶지 않은 사람입니다.""사랑한다는 뜻입니까?"날카로운 질문이 날아들었다.회견장 전체가 그 대답을 기다리듯 조용해졌다.서우는 잠시 하진을 바라보다가, 분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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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세상의 반응

기자회견 다음 날, 실시간 검색어 1위에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걸렸다.하진은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며 숨을 골랐다.밤새 잠을 설쳤지만, 이상하게 몸은 가벼웠다."댓글, 봐도 될까요.""보고 싶으면 봐.""대신 각오는 해."하진은 스크롤을 내렸다.응원의 말과 비난의 말이 뒤섞여 있었다.[용기 있다. 응원한다.][재벌가 스캔들, 결국 이렇게 포장하는구나.][전 연인의 형이라니, 막장 아닌가.][그래도 당당한 게 낫다. 숨기는 것보다는.]온몸이 떨렸지만, 예전처럼 무너지지는 않았다.낯선 사람들의 말들이 여전히 아프게 다가왔지만, 그 아픔에 잠식되지는 않았다."생각보다 나쁜 말이 많네요.""생각보다 좋은 말도 많다.""어느 쪽에 집중할지는 네가 정하는 거다."이재에게서 전화가 왔다.목소리가 상기되어 있었다."하진아, 방송국에서도 인터뷰 요청 들어왔어.""심지어 해외 매체까지.""해외까지?""그렇게 커진 거야?""어제 회견 영상, 벌써 몇백만 조회수야.""특히 네가 말한 그 대사, 완전히 화제야.""어떤 대사?""저는 누구의 추문도 아닙니다, 그 말.""하진아, 너 어제 회견 완전 화제야.""출판사에서도 연락 왔어.""네 이름으로 원고 다시 내자고.""진짜?""진짜.""사람들이 네 이야기 궁금해해.""이번엔 남의 이름 아래서가 아니라, 네 이름으로.""이재야, 나 무섭기도 한데 진짜 기대돼.""당연히 그래야지.""이건 네가 오래 기다려온 순간이잖아.""고마워.""그동안 옆에서 챙겨줘서.""고맙긴.""나는 그냥 네가 무너지지 않게 옆에 있었을 뿐이야."하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오래 기다려온 순간이었다."강서우 씨, 들었어요?""들었다.""축하한다.""축하보다, 당신 덕분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아요.""내 덕분이 아니라, 네가 버틴 덕분이다."하진은 그 말에 눈시울이 붉어졌다.지난 몇 달간의 시간이 스쳐 지나갔다.젖은 채 문을 두드렸던 밤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정문익에게서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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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태겸의 발악

이사회를 앞둔 저녁, 태겸이 예고 없이 나타났다.이번엔 우산도, 여유로운 웃음도 없었다.흐트러진 머리와 충혈된 눈이,그가 얼마나 몰려 있는지 그대로 보여주었다."형, 진짜 다 망칠 셈이야?"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서우는 담담하게 마주 섰다.이전처럼 흔들리는 기색이 없었다."망친 적 없다.""오히려 처음으로 제대로 서 있는 거다.""그 여자 하나 때문에 후계 자리 날아가게 생겼는데, 그게 제대로 선 거야?""자리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걸, 너는 아직도 모르는군."태겸이 웃었다.웃음이라기보다 비웃음에 가까웠다."형답지 않네.""늘 회사 먼저였잖아.""갑자기 왜 이렇게 변했어?""변한 게 아니라, 원래 중요한 걸 이제야 알게 된 거다.""그 여자 하나가 형을 이렇게 바꿔놨다고?""그 여자가 아니라, 하진이가."태겸의 시선이 하진에게로 옮겨갔다.증오와 미련이 뒤섞인 눈빛이었다."너 때문에 우리 집안 완전히 흔들렸어.""만족해?""흔든 건 제가 아니라 당신이에요.""저는 그냥 살아남으려고 했을 뿐이에요.""살아남으려고 형까지 이용한 거잖아.""이용이 아니라 선택이에요.""그리고 그 선택, 저는 후회 안 해요.""너 진짜 뻔뻔하다.""나한테 그렇게 당하고도 이렇게 당당할 수 있어?""당했다고 해서 평생 무너져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저는 다시 일어난 거예요.""일어난 게 아니라, 형한테 기댄 거겠지.""기댄 것과 선택한 것도 구분 못 하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해요."태겸이 주먹을 꽉 쥐었다.서우가 그 사이를 조용히 가로막았다."이 이상 다가오면, 이번엔 나도 가만있지 않는다.""형이 뭘 어쩔 건데.""법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끝까지 갈 거다.""네가 그동안 저지른 짓, 이번엔 전부 드러낼 거다."태겸의 표정이 흔들렸다.처음으로 두려움이 스치는 얼굴이었다."협박이야?""경고다.""마지막.""형이 진짜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어.""너도 내가 이렇게까지 조용히 참을 거라고 생각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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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어머니 앞에서

이사회장 앞 복도, 오혜련이 서우를 기다리고 있었다.하진도 함께였다.오혜련의 시선이 두 사람을 번갈아 훑었다.복도의 조명이 그녀의 표정을 유난히 또렷하게 비추고 있었다."기어이 세상에 다 알렸구나.""숨기는 것보다, 이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그 대가가 뭔지는 알고 있나.""압니다.""그래도 감당하겠습니다."오혜련의 눈빛이 하진에게로 옮겨갔다.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른 눈빛이었다.경멸 대신, 무언가를 가늠하는 시선이었다."윤하진 씨.""네, 말씀하세요.""어제 그 회견, 봤다.""생각보다 담담하더군.""떨렸어요.""근데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두렵지 않았나.""두려웠습니다.""근데 두려움보다, 제 이름을 되찾고 싶은 마음이 더 컸어요."오혜련이 작게 웃었다."이 집에서 도망치지 않는 사람, 오랜만에 보는군.""도망치는 게 습관이 되면, 나중엔 도망칠 곳도 없어진다는 걸 배웠거든요.""누구한테 배웠나.""제 자신한테요.""그리고 강서우 씨한테도 조금.""저 하나 겁준다고 물러설 사람 아니라는 거, 이제 아셨을 거예요.""당돌한 건 여전하네.""당돌한 게 아니라, 정직한 거라고 말씀드렸었죠."오혜련이 웃음을 터뜨렸다.서우가 놀란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어머님, 지금 웃으신 겁니까?""웃으면 안 되나.""아니요.""그냥, 낯설어서요.""낯선 게 나쁜 건 아니다.""가끔은 필요하지.""서우야.""네, 어머님.""이사회에서 너를 밀어낼 명분, 이제 없다.""이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버렸으니까."하진의 눈이 커졌다.뜻밖의 말이었다."떳떳하게 나선 사람을 두고, 흠집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당당하다.""여론도 이미 그렇게 돌아가고 있고.""저희를 도와주시는 이유, 여론 때문만은 아니시죠.""반은 여론, 반은 내 판단이다.""이 정도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면, 며느리로 나쁘지 않다는 판단."며느리라는 단어가 이렇게 낯설고도 벅찰 줄 몰랐다."그럼 이번 이사회, 저희 편이신 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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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이사회

긴 회의 테이블 위로 시선들이 날카롭게 쏟아졌다.서우가 자리에 앉자, 이사들 중 하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회의실 공기는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강서우 대표, 이번 스캔들로 인한 주가 하락, 책임지실 겁니까?""책임집니다.""대신 스캔들이 아니라 제 선택이라고 정정하겠습니다.""선택이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면, 그건 무책임한 선택 아닙니까?"날카로운 질문이었다.서우는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목소리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단기적인 주가는 흔들릴 수 있습니다.""하지만 제 판단력과 경영 능력은, 이번 일과 무관하게 실적으로 증명해왔습니다."오혜련이 그 순간 자리에서 일어섰다.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회의실 안, 그녀가 발언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제가 한 말씀 드리죠."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오혜련의 위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발언의 무게를 짐작하고도 남았다."저는 처음에 이 관계를 반대했습니다.""집안의 명예, 후계 구도, 여러 이유로요."이사들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예상 밖의 발언이었다.몇몇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그런데 어제 그 회견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숨기지 않고 정면으로 서는 태도,그거야말로 우리 그룹이 필요로 하는 리더십입니다."하진은 그 말을 들으며 숨을 죽였다.오혜련의 목소리가 이어졌다."강서우 대표의 후계 자격에 대해 다시 논하고 싶다면,그의 경영 실적으로만 판단하시죠.""사생활 문제로 흠을 잡는 건,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습니다."한 이사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그럼 강태겸 씨 쪽에서 제기한 소송 건은 어떻게 처리하실 계획입니까?"서우가 그 질문을 받았다."법원 판결이 곧 나옵니다.""계약서 위조와 사생활 침해, 명백한 증거가 있습니다.""그 결과가 나오면, 이 자리에서도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정적이 흘렀다.이사들 중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처음의 적대적이던 분위기가, 조금씩 누그러지고 있었다."표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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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되찾은 이름

법원 앞, 하진은 판결문을 손에 쥔 채 서 있었다.태겸의 계약서 위조와 사생활 침해 혐의가 모두 인정된 판결이었다.손끝이 떨렸지만, 이번엔 두려움이 아니라 벅참 때문이었다."이겼다.""완전히."이재의 목소리가 떨렸다.하진은 판결문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활자 하나하나가 눈에 박히듯 선명했다."원고 저작권, 완전히 제 이름으로 돌아온 거죠?""그래.""이제 그 책, 네 이름으로 다시 나온다."서우가 옆에서 하진의 어깨를 가만히 감쌌다."축하한다.""진짜로.""당신 없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거예요.""아니.""너 혼자 해낸 거다.""나는 그냥 옆에 있었을 뿐이다.""옆에 있어준 것만으로도 충분해요.""저는 그게 제일 큰 힘이었어요.""그럼 앞으로도 계속 옆에 있어야겠군.""그래야죠.""계약서에도 그렇게 써 있잖아요."오래전 서명했던 계약서의 조항들이 떠올랐다.출판사에서 재출간 소식을 알리는 전화가 왔다.표지 시안도 함께 도착했다.하진은 그 표지에 적힌 자기 이름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화면 속 활자가 눈앞에서 흐릿해질 만큼, 눈물이 차올랐다.이재가 옆에서 그 화면을 함께 들여다보았다."어때, 마음에 들어?""마음에 든다는 말로는 부족해.""이거 진짜 제 이름 맞죠?""그래, 네 이름 맞아.""이제 아무도 못 뺏어가."[윤하진 지음]그 다섯 글자가 이렇게 벅찰 줄은 몰랐다."강서우 씨, 저 이 순간 평생 기억할 것 같아요.""기억해.""나도 평생 기억할 거니까."이재가 눈물을 훔치며 웃었다."이걸로 진짜 다 끝난 거지?""법적으로는.""근데 저는 이제 시작인 것 같아요.""다시 쓰는 거니까.""다음 작품은 뭐 쓸 건데?"하진은 잠시 서우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제 이야기요.""도망치던 사람이, 어떻게 선택하는 사람이 됐는지."서우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그 소설, 제목은 정했나.""아직요.""근데 마지막 문장은 정해뒀어요.""뭔데.""그 남자의 형에게 안기면, 네가 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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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작은 축하

그날 밤, 펜트하우스에는 작은 축하 자리가 마련됐다.촛불 몇 개와 와인 한 병, 그리고 두 사람뿐이었다."거창하게 안 해서 미안하다.""거창한 거 필요 없어요.""이거면 충분해요."서우가 와인 잔을 건넸다.하진은 그 잔을 받으며 웃었다."건배사, 뭐로 할까요.""네가 골라."하진이 잔을 들어 올렸다."도망이 아니라, 선택을 위하여."서우가 그 말을 따라 하며 잔을 부딪혔다."강서우 씨.""말해.""저 오늘, 진짜 행복해요.""나도.""이런 날이 올 줄, 처음엔 상상도 못 했다.""저도요.""처음 이 집 문 두드렸을 때는, 그냥 살아남는 게 목표였어요.""지금은?""지금은, 당신이랑 계속 이렇게 있는 게 목표예요."서우가 하진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췄다.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오늘은, 참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하진이 그 말에 얼굴을 붉혔다."참지 말아요.""오늘은 저도, 온전히 당신 쪽으로 갈래요.""후회 안 할 자신 있나.""후회는 도망칠 때나 하는 거라면서요.""저는 지금 도망치는 게 아니에요."서우가 웃으며 하진의 이마에 이마를 맞댔다."그 대답, 매번 나를 무너뜨린다.""무너져도 돼요.""오늘은 제가 받아줄게요."두 사람의 숨이 가까워졌다.창밖 도시의 불빛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부드럽게 감쌌다."문, 닫을까요.""네가 닫아.""그게 우리 방식이니까."하진이 몸을 일으켜 조용히 문을 닫았다.촛불이 조용히 흔들리며 방 안을 따뜻하게 물들였다."오늘 밤은, 애쓰지 않아도 돼요.""그냥 서로 확인만 해요.""확인, 좋다.""매 순간."서우가 하진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가며 눈을 맞췄다."지금도 괜찮아?""괜찮아요.""근데 그렇게 물어볼 때마다, 저는 더 긴장돼요.""긴장되면 멈춘다.""멈추지 마요.""그냥, 저를 이렇게 확인하는 당신이 좋아서 그래요."서우의 손끝이 하진의 쇄골에서 잠시 멎었다."네가 허락한 만큼만 갈 거다.""오늘은, 허락한 만큼이 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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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한 계절이 지나고

아침 햇살이 커튼 틈으로 스며들었다.하진은 눈을 뜨자마자 서우의 팔 안에서 몸을 뒤척였다.“잘 잤어?”“네.”“이렇게 푹 잔 거, 오랜만이에요.”서우가 하진의 이마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협탁 위에는 물컵과 따뜻한 담요가 놓여 있었다.“몸은 괜찮아?”“괜찮아요.”“조금 나른하긴 하지만.”“나른한 거, 오늘 하루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오늘 회의 있지 않아요?”“미뤘다.”“이런 아침은 자주 없으니까.”하진은 그 배려에 웃음이 났다.처음 이 집에 왔을 때는 상상도 못 했던 아침이었다.“강서우 씨, 저 요즘 자주 생각해요.”“뭘.”“그날 밤, 비 맞으면서 여기 왔던 거요.”“그때 제가 여기 안 왔으면 어떻게 됐을까요.”“모른다.”“근데 매일 아침, 네가 여기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저도요.”창밖으로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비 오는 밤 이 집 문을 두드렸던 그날로부터, 어느새 한 계절이 지나 있었다.“이재가 새 원고 마감 언제냐고 재촉하던데요.”“써야지.”“이번엔 마음 편하게.”“당신은요?”“이사회 일은 좀 안정됐어요?”“안정됐다.”“어머님도 이제, 가끔 먼저 연락하신다.”“신기하네요.”“그 어머님이.”“나도 아직 적응 중이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웃었다.태겸은 그 뒤로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조용했다.“강서우 씨.”“말해.”“저 오늘, 그 계약서 다시 보고 싶어요.”“서랍에 있는 거.”서우가 서랍에서 낡은 종이를 꺼내 건넸다.하진은 그 위의 글자들을 손끝으로 천천히 짚었다.“이제 이 조항들, 다 의미 없어졌네요.”“의미 없어진 게 아니라, 완성된 거다.”“우리가 이렇게 될 때까지의 증거니까.”하진은 그 말에 눈시울이 붉어졌다.“강서우 씨, 저 다음 소설 제목 정했어요.”“뭔데.”“그 남자의 형에게 안기면.”서우가 웃으며 하진을 끌어안았다.“그 제목, 이제 완전히 다른 뜻이 됐네.”“네.”“이제는 굴복이 아니라, 선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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