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형에게 안기면 의 모든 챕터: 챕터 11 - 챕터 20

33 챕터

11화. 아침이 오는 방식

창밖이 밝아오고 있었다.하진은 낯선 팔의 무게를 느끼며 눈을 떴다.서우의 팔이 허리를 가볍게 두르고 있었다.어젯밤의 기억이 몸 곳곳에 남아 있었다."깼나."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하진은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몸이 낯설게 무거웠지만, 나쁜 무거움은 아니었다."아픈 데 없어?""거짓말하면 오늘은 네 옆에서 안 잔다.""그건 협박 아니에요?""협박이 아니라 걱정이다.""나는 네 침묵이 제일 무섭다.""괜찮아요.""조금 떨리긴 하지만.""떨리는 건 숨기지 마.""나는 맞추는 법을 배워야 하니까.""그 말, 처음 들었을 때랑 지금이랑 느낌이 달라요.""어떻게 다른데.""그때는 낯설었는데, 지금은 당연하게 들려요.""당연해질 때까지 계속 말할 생각이었다."서우가 몸을 일으켜 물컵을 건넸다.하진은 그 손끝이 여전히 조심스럽다는 걸 느꼈다.어젯밤 그렇게 뜨거웠던 사람이, 아침에는 다시 세심하게 돌아와 있었다.그 온도 차이가, 오히려 하진의 마음을 더 깊이 붙잡았다.물을 마시는 동안 서우의 시선이 줄곧 하진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눈빛이었다."왜 그렇게 봐요.""확인하는 거다.""네가 여전히 여기 있다는 거.""어디 안 가요.""갈 데도 없고요.""갈 데가 있어도 안 갔으면 좋겠다.""물 마셔.""그리고 이거."서우가 협탁 서랍에서 얇은 연고를 꺼내 내밀었다."뭐예요, 그건.""손목.""어젯밤에 좀 세게 잡았다."하진은 자기 손목을 내려다보았다.옅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아프지는 않았지만, 그 흔적이 이상하게 다정하게 느껴졌다."안 아파요.""근데 발라줘요.""응석이라고 해놓고 명령하는 거, 알아?""명령 아니에요.""부탁이에요.""부탁이면 더 잘 들어야겠네.""응석 부리는 거 처음 보는데.""오늘만요.""내일부터는 다시 날카롭게 굴 거예요.""각오하세요.""기대하지.""그 날카로움도 나쁘지 않으니까.""그거 칭찬이에요?""칭찬이다.""너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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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초대장

휴대폰이 울렸다.발신인은 낯선 번호였다.서우가 화면을 확인하더니 표정이 굳었다."본가에서군.""예상보다 빠르다.""본가요?""우리 집.""정확히는, 오혜련 여사님 댁."하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태겸의 어머니라는 존재는 이름만으로도 무게가 달랐다."뭐라고 하는데요.""저녁 식사에 초대한다는군.""너도 함께.""저를요?""왜요.""소문이 이미 거기까지 갔다는 뜻이다.""예상보다 빠르다."하진의 손끝이 차가워졌다.서우가 그 손을 가만히 감쌌다."그 사람 앞에 서는 거, 태겸 씨보다 더 무서울 것 같아요.""무섭겠지.""그 사람은 평생 남을 시험하는 법만 배웠으니까.""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된다.""안 가면요.""안 가면 다음엔 더 나쁜 카드를 꺼내겠지.""그 집안은 그런 식으로 사람을 시험한다.""물러서면 약점으로 보고 더 깊이 파고든다.""그럼 가요.""도망치는 것도 이제 지겨워요.""한 번은 부딪혀봐야죠."서우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걱정과, 그 결심에 대한 놀라움이 동시에 스쳤다."각오는 됐나.""그 집 식탁은, 밥보다 말이 더 날카롭다.""미소 속에 칼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당신이 옆에 있잖아요.""옆에 있는다.""그런데 그것만으로 다 막아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괜찮아요.""저도 이제 혼자 버티는 법은 좀 알아요.""당신 덕분에요."서우가 하진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처음 만났을 때의 젖은 얼굴과, 지금의 얼굴 사이에는 확실히 다른 것이 있었다.그때는 벼랑 끝에 선 얼굴이었다면, 지금은 발을 딛고 선 얼굴이었다."왜 그렇게 봐요.""네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보고 있었다.""좋은 쪽으로요, 나쁜 쪽으로요?""좋은 쪽으로.""확실히.""뭐 입고 갈지는 내가 골라줄게.""이번엔 순순히 따라줬으면 좋겠는데.""알겠어요.""대신 너무 화려한 건 싫어요.""화려하게 안 한다.""대신 단단해 보이게는 할 거다.""단단해 보인다는 게, 정확히 어떤 옷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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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긴 식탁

긴 식탁 위로 은식기가 낮게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하진은 그 소리마저 낯설고 무거웠다.오혜련이 앉은 상석에서, 시선이 하진을 향해 천천히 미끄러졌다."저 사람, 태겸이 버린 애 아니야?"낮고 우아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날이 서 있었다.하진은 잠시 숨을 골랐다."고개 들어.""넌 여기서 숨을 사람이 아니다."서우의 목소리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옆에서 들려왔다.하진은 그 말에 힘입어 시선을 들었다.식탁 위 조명이 낮게 드리워져, 모든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안녕하세요.""윤하진입니다.""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오혜련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예상 밖의 대답이었던 모양이었다."태겸이 이야기는 안 하는 건가.""그 사람 이야기를 할 자리는 아닌 것 같아서요.""당돌하네.""보통 그렇게 나오지 않는데.""당돌한 게 아니라, 정직한 겁니다.""저는 원래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하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서우가 옆에서 짧게 덧붙였다.오혜련의 시선이 아들에게로 옮겨갔다."형, 설마 진짜로 그 애를 좋아해?"식탁 끝에서 태겸이 픽 웃으며 끼어들었다.하진의 어깨가 굳었지만,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좋아하는 게 아니라, 지키는 거다.""그리고 이제는, 좋아한다는 말도 부끄럽지 않다.""지킨다는 말, 형 입에서 나오니까 낯서네.""낯설어도 사실이다."오혜련이 나이프를 내려놓았다.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이 집에서 사랑은 약점이에요."정적이 흘렀다.하진은 그 말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꼈다.식탁 아래, 서우의 손이 조용히 하진의 손을 찾아 쥐었다."약점이어도 상관없습니다.""저는 이미 약점 하나쯤은 가지고 살기로 했으니까요."서우의 대답에 오혜련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아들에게서 처음 듣는 종류의 확신이었다."그 아이가 네 옆에 있는 한, 너는 계속 흠집 난 후계자가 될 거다.""흠집이라도 제가 고른 흠집입니다.""후회는 제 몫으로 남겨두겠습니다."하진은 그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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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전략적 동맹

"두 분, 들키는 게 문제가 아니라 들킨 뒤 주도권이 문제예요.""그거 놓치면 계속 끌려다녀요."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하진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서우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개했다."차윤서 씨다.""나와 정략 약혼 이야기가 오가는 사람."하진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윤서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고 웃었다.재벌가 특유의 화려함 대신, 실용적인 정장 차림이 눈에 띄었다."긴장하지 마세요.""나는 그 남자 안 가져요.""대신 당신이 버리지 말아요.""그럼 저도 곤란해지거든요.""무슨 뜻이에요?""강서우 대표, 나한테는 그냥 사업 파트너예요.""근데 세상은 그렇게 안 보거든요."윤서가 테이블에 앉으며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두 분 스캔들, 이대로 두면 계속 추문으로만 남아요.""제가 도와드릴게요.""어떻게요.""저랑 강서우 대표의 약혼설을 먼저 정리하는 거예요.""제가 직접 인터뷰해서, 우리 둘은 사업 관계일 뿐이라고 밝힐게요.""그러면 자연스럽게 두 분 이야기로 시선이 옮겨가요.""그게 저희한테 좋은 거예요?""당신 이야기는 추문이 아니라 서사예요.""주도권만 되찾으면요."하진은 그 말을 곱씹었다.낯선 사람 입에서 나온 위로였지만, 이상하게 신뢰가 갔다."왜 도와주시는 거예요?""저도 이 집안 거래 결혼, 혐오하거든요.""나 하나라도 제대로 된 선택을 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그게 제 나름의 반항이에요.""선택이라는 게, 정략을 거절하는 거예요?""그거 쉬운 결정 아니었을 텐데요.""주변에서 말이 많았을 것 같아요.""거절이 아니라, 재정의하는 거예요.""사업은 사업으로, 사랑은 사랑으로.""섞지 않는 거죠.""그게 제 나름의 원칙이에요.""그 원칙, 지키기 쉽지 않을 텐데요.""쉽지 않으니까 더 지켜야죠.""안 그러면 저도 결국 이 집안 방식에 잡아먹혀요."서우가 옆에서 낮게 덧붙였다."윤서 씨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이 바닥에서 몇 안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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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질투라는 이름

"백이재, 너랑 너무 가까워."서우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하진은 방금 통화를 끝낸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방금까지 웃고 있던 얼굴에 장난기가 남아 있었다."방금 통화하는 거, 계속 듣고 있었어요?""듣고 싶어서 들은 게 아니라, 옆에 있으니까 들렸다.""변명이 길어지는 거 보니, 듣고 싶어서 들은 거 맞네요.""친구한테까지 질투하면 피곤하지 않아요?""저는 그냥 웃은 것뿐인데.""피곤하지.""그래도 네가 돌아갈 곳을 확인하고 싶었다.""돌아갈 곳이 생기면 보내줄 수 있어요?""보내는 법은 안다.""다만 네가 돌아오지 않을까 봐 숨이 막힐 뿐이다.""그 두려움은 아직도 못 이겼다."하진은 그 고백에 마음이 저릿했다.서우의 손을 가만히 마주 잡았다.창밖 오후 햇살이 두 사람의 맞잡은 손 위로 낮게 내려앉았다.그 온기가 오래도록 이어지길, 하진은 조용히 바랐다.태겸과의 기억이 차갑게 식어가는 만큼, 이 온기는 점점 선명해졌다.하진은 그 말에 마음이 저릿했다.태겸이었다면 질투를 명령으로 바꿨을 것이다.서우는 달랐다.그의 질투에는 소유가 아니라 불안이 담겨 있었다."이재는 그냥 친구예요.""저를 걱정해주는 몇 안 되는 사람.""당신 말고요.""안다.""그래도 그 웃음을 내가 모른다는 게 싫다.""그 사람에게 웃지 말라는 말은 못 하겠다는 거예요?""그런 말은 못 하지.""그건 네 자유니까.""대신 그 웃음을 내가 모른다는 게 싫다고 말하는 거다."하진은 그 솔직함에 웃음이 났다.서우가 그 웃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이렇게 편하게 웃는 얼굴을 보는 게, 아직도 낯설고 좋았다."왜 웃어.""질투도 이렇게 예쁘게 하는 사람 처음 봐서요.""태겸 씨였으면 벌써 화부터 냈을 텐데.""당신은 다르게 표현하네요.""예쁘다는 말, 질투에 쓰는 표현은 아닌 것 같은데.""제 눈에는 그래요."서우가 다가와 하진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손등에 낮게 입술을 댔다.짧고,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그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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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역공

"강서우 대표님, 소송 준비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법무팀 직원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울렸다.하진은 소파에 앉아 그 말을 듣다가 몸이 굳었다.방금까지 평온했던 거실 공기가 순식간에 팽팽해졌다."무슨 소송이요.""태겸 씨 쪽에서, 원고 계약서가 위조라는 저희 주장에 대해명예훼손으로 맞고소를 준비 중입니다.""뻔뻔하네요.""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에요."서우가 서류를 덮으며 하진을 향해 대꾸했다."뻔뻔한 게 그 자식 특기다.""늘 그래왔다."서우가 서류를 넘기며 계속 이야기했다. 얼굴에는 동요가 없었지만, 손끝의 속도가 미세하게 빨라져 있었다."저 때문에 이렇게 커지는 거죠.""너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식 때문이다.""원인을 헷갈리지 마.""그래도 무서워요.""저쪽은 변호사만 몇 명이에요.""우리도 마찬가지다.""그리고 이번엔 증거가 있다.""태겸이 방심한 게 우리한테는 다행이었다."서우가 태블릿을 내밀었다.화면에는 낯선 녹취 파일 재생 목록이 떠 있었다."이게 뭐예요?""태겸이 예전에 자기 입으로 계약서 조작을 지시하는 통화 녹음이다.""부인할 수 없는 증거다.""변호사들도 손을 못 쓸 거다.""어떻게 구했어요.""방법은 묻지 말라고 했잖아.""결과만 믿어."하진은 그 태도가 낯설었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 단호함이, 이번에는 자신의 편이라는 사실이 든든했다."이거면 확실히 이길 수 있어요?""이긴다.""그리고 이번엔 그 자식이 먼저 무릎 꿇게 만들 거다.""복수하려는 거예요?""아니.""되찾으려는 거다.""네 이름, 네 원고, 네 시간.""시간까지요?""그래.""그 자식한테 뺏긴 시간, 돌려줄 방법은 없지만 적어도 더는 뺏기지 않게 할 거다.""그 말, 든든하네요.""든든하라고 하는 말이다.""너 혼자 감당할 일 아니니까."하진은 그 말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태겸에게 빼앗겼던 것들이 하나씩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원고, 이름, 그리고 자신을 믿는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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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유출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백이재였다.목소리가 다급했다."하진아, 큰일 났어.""너랑 강서우 대표 사진, 사적인 것까지 인터넷에 돌고 있어.""뭐?""어떤 사진인데.""자세히 말해봐.""펜트하우스 안에서 찍힌 것 같아.""각도 보니까 몰래 설치한 카메라야."하진의 손끝이 얼어붙었다.서우가 그 목소리를 듣고 표정을 굳혔다.방금까지의 안온했던 공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확산 속도가 어느 정도야.""정확히 말해봐.""벌써 수천 건 공유됐어요.""캡처본까지 돌고 있고요.""삭제 요청은?""넣긴 했는데, 워낙 빨라서 다 못 잡고 있어요."서우가 미간을 좁히며 휴대폰을 다시 확인했다.상황은 예상보다 빠르게 번지고 있었다."어디서 도는지 확인됐나.""익명 커뮤니티예요.""근데 확산 속도가 심상치 않아요."서우가 욕설을 삼켰다.처음 보는 감정의 균열이었다.하진은 그 얼굴에서,처음으로 이 남자도 완벽하게 통제된 사람은 아니라는 걸 보았다."카메라, 언제 설치됐는지 확인해야 한다.""명운아."비서실장 조명운이 조용히 등장했다.그는 늘 그렇듯 말이 거의 없었다."이미 확인 중입니다.""설치 시점은 대략 두 주 전으로 추정됩니다.""청소업체를 통한 접근으로 보입니다.""두 주 전이면, 태겸이 다녀간 그날이군."하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그 사람이 이런 짓까지 해요?""그 자식한테는 선이 없다.""그래서 내가 더 화가 난다.""이번엔 절대 가만두지 않는다."서우가 하진의 어깨를 붙잡았다."미안하다.""이 집을 완전히 안전하다고 믿게 한 게 내 잘못이다.""당신 잘못 아니에요.""아니, 내 잘못이다.""지켜준다고 해놓고 이런 일이 생겼으니까.""그럼 지금부터 다시 지켜요.""자책은 나중에 하고요.""그 말이 맞다.""지금은 정리가 먼저다.""저도 도울게요.""뭐부터 할까요.""가만히 있는 건 못 하겠어요.""일단 너는 쉬어.""이건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아니요.""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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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못 지운 이름

밤이 깊었다.하진은 서재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았다.서우가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그거, 뭐예요?""손에서 놓지도 못하고."서우가 흠칫 놀라며 사진을 내려놓았다.하진은 조심스레 다가가 옆에 앉았다.서재의 불빛이 두 사람의 얼굴에 내려앉았다."오래된 사진이다.""누구예요?"서우는 잠시 침묵했다.창밖 도시의 불빛이 그의 옆 얼굴을 물들였다."내 동생이었다.""태겸이 말고, 진짜 동생."처음 듣는 이야기였다.이렇게 단단해 보이는 사람에게도,오래된 상처가 있었다는 사실이 낯설게 다가왔다."어릴 때 사고로 잃었다.""내가 지켜야 했던 사람이었는데, 지키지 못했다.""그 뒤로 오랫동안, 이 사진을 볼 자신도 없었다.""그래서 그렇게, 지키는 것에 집착하는 거예요?""그럴지도 모른다.""그 이후로는, 누군가를 지킨다는 말을 함부로 안 했다.""그런데 저한테는요?""너한테는, 처음으로 그 말을 다시 쓰고 싶어졌다."하진은 목이 메었다.그 이름을 아직 지우지 못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이름이 뭐였어요?""서인.""강서인.""몇 살이었어요, 그때.""열두 살.""나는 열여덟이었고.""그때는 내가 세상 전부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지금 생각하면, 그저 어린 오만이었다.""많이 어렸네요.""당신도, 그 애도.""어렸다.""그래서 더 지켜줬어야 했다고 생각한다.""지금도.""예쁜 이름이네요.""그래.""그런데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나는 늘 늦었다는 자책이 따라왔다.""지금은요?""지금은, 네 이름을 부를 때 그 자책이 조금씩 옅어진다."하진은 그 말에 서우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강서우 씨, 저는 서인 씨가 아니에요.""대신해서 지키려고 하지 마요.""안다.""그래서 더 조심스럽다.""너를 그 애의 그림자로 만들고 싶지 않아서.""그림자가 아니라, 저는 그냥 저예요.""안다.""그래서 매일 다시 확인한다.""네가 서인이가 아니라 윤하진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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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최후통첩

"그 아이를 내보내라."오혜련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차갑게 울렸다.서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하진은 옆에서 그 표정만으로도 상황을 짐작했다.스피커폰 너머 목소리는 우아했지만, 그 안의 칼끝은 숨겨지지 않았다."어머님, 그건 제가 정할 일입니다.""이사회 문제도 제가 감당합니다."서우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림이 없었다.전화기 너머 오혜련의 숨소리마저 잠깐 멎는 듯했다."네가 정할 일이 아니야.""이사회에서 벌써 말이 나온다.""후계자 자격 문제로.""자격은 제 능력으로 증명하겠습니다.""하진의 존재와는 상관없이.""상관없을 수가 없어.""세상이 그렇게 안 봐."전화가 끊겼다.서우가 휴대폰을 내려놓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하진은 그 손을 가만히 잡았다."저 때문이죠.""너 때문이 아니다.""그 사람들 방식 때문이다.""그래도, 저 때문에 후계 자리 위태로워지는 거잖아요.""위태로워져도 상관없다.""나는 자리보다 너를 선택했다.""이미 오래전에 정한 일이다.""그렇게 쉽게 말하지 마요.""평생 준비해온 자리잖아요.""쉽게 말하는 게 아니다.""오래 생각한 끝에 하는 말이다."하진은 목이 메었다.이 사람이 자신을 위해 무엇을 내려놓으려 하는지, 온전히 느껴졌다.평생을 준비해온 자리였다는 걸 알기에, 그 무게가 더 아프게 다가왔다."강서우 씨, 저 나갈게요.""당신 자리 지키게."서우의 눈빛이 순간 서늘해졌다."그런 말 하지 마.""제가 있어서 당신이 다치는 거면, 제가 물러나는 게 맞아요.""저는 그렇게 생각해요."하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그 논리라면, 나도 너를 위해 물러나야 한다.""그런데 나는 그럴 생각 없다.""왜요.""물러나서 지키는 건, 지키는 게 아니라 도망이니까.""그 말, 예전에 저한테 해줬던 말이랑 닮았어요.""닮은 게 아니라 같은 말이다.""이번엔 내가 지킬 차례다.""네가 나를 믿고 여기 남았듯, 나도 이 자리를 지킬 거다.""물러나면,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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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선언 전야

창밖으로 도시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하진은 내일 있을 기자회견 자료를 손에 쥔 채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서우가 다가와 옆에 앉았다.종이 위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머릿속이 복잡했다."떨리나.""손이 차갑다.""물이라도 마셔."서우가 물컵을 하진의 손에 쥐여주었다."많이요.""근데 무섭지는 않아요.""이상한 조합이네.""그러게요.""근데 지금은 그게 맞는 것 같아요."서우가 하진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손끝이 서로의 온도를 나눴다.그 온기만으로도, 내일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씩 옅어지는 것 같았다."내일, 다 밝히면 돌이킬 수 없다.""알지.""세상이 우리를 다르게 볼 거다.""그래도 각오됐나.""알아요.""그래도 이제 숨기는 것보다 이게 나아요.""후회 안 할 자신 있나.""후회는 도망칠 때나 하는 거라고, 예전에 당신이 알려줬잖아요."오래된 말을 그대로 돌려받는 기분이었다."그 말, 그대로 돌려주는 거 재미있네.""당신한테 배운 거니까, 당신한테 돌려주는 게 맞죠.""그럼 앞으로도 계속 돌려줘.""나쁘지 않다.""오히려 듣기 좋다.""내일, 기자들 질문 험할 거다.""각오해.""각오됐어요.""대신, 당신도 하나 각오해요.""뭘.""제가 먼저 손 잡을 거예요.""카메라 앞에서."서우의 눈빛이 흔들렸다가, 이내 부드럽게 풀렸다."그거, 나야말로 바라던 거다.""바라던 거였어요?""저는 당신이 조심스러워할 줄 알았는데."하진이 살짝 웃으며 물었다."조심스러운 것과 바라는 건 다르다.""나는 늘 네가 먼저 손 내밀길 기다렸다.""어머님은요.""괜찮으실까요.""안 괜찮으실 거다.""근데 이제 그 반응까지 내가 책임질 일은 아니다.""그래도 마음 쓰이지 않아요?""쓰인다.""그런데 이제는 그 마음보다, 네 손을 놓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태겸 씨는요.""그 자식 반응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저는 오히려 궁금해요.""그 사람 표정.""보고 싶으면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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