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형에게 안기면 의 모든 챕터: 챕터 1 - 챕터 10

85 챕터

1화. 그 남자의 문 앞에서

“강서우 씨, 저를 숨겨주세요. 강태겸이 찾기 전에.”“늦었군.”문이 열리자마자 돌아온 대답이었다.하진은 숨을 삼켰다.처음 찾아온 사람에게 할 말이 아니었다.마치 서우가 오늘 밤 자신이 올 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렸다.그 순간 복도 끝 전용 엘리베이터가 울렸다.태겸은 한 층 아래까지 와 있었다.빗물이 하진의 코트 끝에서 떨어졌다.젖은 대리석 위로 검은 얼룩이 번졌다.하진은 가방을 가슴에 끌어안았다.붉게 멍든 손목이 소매 밖으로 드러났다.서우의 시선이 그 자국에 닿았다.“내 동생이 한 짓인가.”“대답하면 들여보내 줄 건가요?”“아니. 네가 들어올지부터 정해.”하진의 휴대폰이 울렸다.[자정까지 돌아와.][안 오면 네 원고도, 네 이름도 끝이야.]오후 11시 43분.17분 뒤면 태겸은 하진의 마지막 원고를 자기 이름으로 넘긴다.계약서도, 작가 계정도, 출판사 연락망도 이미 빼앗겼다.가방 속 초고마저 잃으면 윤하진이라는 작가는 완전히 사라진다.“태겸 씨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 당신이니까 왔어요.”“그래서 내가 안전해 보였나.”“아니요.”하진이 서우를 똑바로 보았다.“당신이 더 위험해 보여요. 그래서 고른 거예요.”엘리베이터 숫자가 30층으로 바뀌려다 멈췄다.서우가 문에서 비켜섰다.“들어와. 지금부터는 네 선택이다.”하진은 문턱을 넘었다.철문이 닫히자 잠금장치 세 개가 차례로 걸렸다.곧바로 보안 패널이 붉게 점멸했다.[강태겸 님이 접근을 요청했습니다.]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스물한 번째 전화였다.서우가 말했다.“받아.”“싫어요.”“도망친 걸 숨기지 마. 네가 여기 있다는 걸 알려.”하진은 떨리는 손으로 통화를 연결했다.―윤하진. 문 열어.태겸의 목소리가 거실에 퍼졌다.―내 거 들고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서우가 휴대폰을 가져갔다.“여기까지.”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형?“돌아가.”―그 새끼가 내 원고를 훔쳤어.서우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네 원고라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7-09
더 보기

2화. 계약서의 발신인

자정이 되자 윤하진의 이름이 먼저 죽었다.휴대폰에 신작 공개 알림이 떴다.제목도 줄거리도 첫 장면도 하진이 쓴 그대로였다.작가명만 강태겸으로 바뀌어 있었다.곧이어 두 번째 알림이 올라왔다.[전 대필 작가 윤하진의 원고 절도 및 협박에 법적 대응하겠습니다.]하진이 태겸에게 초고를 돌려달라고 보낸 메시지는원고를 빼앗으려는 협박으로 편집돼 있었다.댓글은 순식간에 하진의 이름을 물어뜯었다.표절범.스토커.한 번도 제대로 데뷔하지 못한 도둑.하진이 작가 계정에 접속했지만 화면에는 이용 정지 문구만 떴다.[늦었어. 이제 네가 원본을 내밀어도 훔친 쪽은 너야.]휴대폰이 손에서 그대로 미끌어져 내렸다. 서우가 다행이도 바닥에 닿기 직전 받아냈다.“끝났어요.”“아니.”“내 이름으로 남은 게 없어요.”“가방은 남았지.”서우가 하진의 품에 안긴 가방을 보았다.“열어.”하진이 한 걸음 물러났다.“당신도 이걸 원하는 거예요?”“원고가 아니라 시간을 확인하려는 거다.”“무슨 시간요?”“강태겸보다 네가 먼저 썼다는 시간.”서우는 식탁 위 노트북을 돌려 보였다.화면에는 전자공증 접수창과 출판 금지 가처분 신청서가 이미 열려 있었다.신청인 칸에는 윤하진의 이름이 입력돼 있었다.작성 시각은 오늘 오후 9시 12분이었다.하진이 이 집에 오기 두 시간 전이었다.“내가 올 줄 알았어요?”“올 수밖에 없게 될 줄 알았지.”“그게 무슨 뜻이에요?”서우는 대답 대신 서류 한 부를 내밀었다.신변 보호 및 저작권 회복 계약서였다.거주지 제공. 법률 대응.태겸과의 직접 접촉 차단. 동의 없는 신체 접촉과 사적 대가 요구 금지.계약 해지는 하진의 의사만으로 즉시 가능하다는 조항까지 적혀 있었다.“사인해.”“당신이 얻는 건요?”“네 원고가 네 이름으로 돌아오는 것.”“그게 왜 당신 이익인데요?”“이익이 아니라 빚이니까.”하진은 계약서를 밀어냈다.“누구한테 진 빚인지 말하기 전에는 안 해요.”“지금 나가도 된다.”서우가 현관 잠금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7-09
더 보기

3화. 문 안의 공범

문밖에는 원고를 훔친 남자가 있었다.문 안에는 그 원고를 건넨 남자가 있었다.하진은 도망칠 곳을 잘못 골랐다.“당신이었어요?”하진은 팔 년 전 전달 메일을 서우의 가슴에 밀어붙였다.“내 원고를 태겸한테 넘긴 사람이.”“그래.”하진은 곧장 현관으로 돌아섰다.서우는 붙잡지 않았다.“왜 안 막아요?”“막으면 또 네 선택을 빼앗게 되니까.”“이미 한 번 빼앗았잖아요.”하진이 마지막 잠금장치를 풀었다.보안 패널에 1층 로비 화면이 떠올랐다.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전용 엘리베이터 앞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휴대폰에도 속보가 올라왔다.[표절 의혹 윤하진, 강태겸 친형의 펜트하우스로 도피.]기사에는 빗속에서 가방을 안고 로비로 들어오는 하진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태겸이 이미 이곳까지 팔아넘긴 것이다.“이것도 몰랐어요?”“십 분 전에 확인했다.”“당신은 늘 너무 늦게 아네요.”하진은 잠금장치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문밖으로 나가면 표절범으로 생중계된다.남으면 자신의 원고를 태겸에게 건넨 남자의 집에 갇힌다.어느 쪽도 피난처가 아니었다.“왜 보냈어요?”“네가 익명 투고 계정으로 원고를 보냈으니까.”“그 계정이 당신 거였어요?”“내가 후원하던 신인 발굴 계정이었다.”“그래서 허락도 없이 동생한테 넘겼어요?”“당시 태겸이 출판 프로젝트를 맡고 있었다.”서우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세상에 내보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내 글만 봤겠죠.”하진이 돌아섰다.“사람은 보지도 않고.”서우는 부정하지 않았다.“맞아.”“태겸이 내 이름을 뺀 건 언제 알았어요?”“오늘.”“거짓말.”서우가 노트북 화면을 돌렸다.하진의 오래된 이메일 주소에서 발송된 메시지들이 연도별로 정리돼 있었다.[제 이름은 공개하지 않겠습니다.][원고의 권한을 강태겸 작가에게 위임합니다.][직접 연락은 원하지 않습니다.]주소도 서명도 하진의 것이었다.하지만 하진은 저런 문장을 쓴 적이 없었다.“태겸이 내 계정을 썼어요.”“그래서 오늘 너를 기다렸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7-09
더 보기

4화. 도청기는 서우의 것이었다

“양도를 승인한 목소리는 당신 거예요.”하진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노트북에서 서우와 똑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윤하진의 원고 양도를 승인한다.”억양도, 호흡도, 문장 끝을 낮추는 습관도 같았다.오전 0시 3분.하진이 이 집에 들어온 뒤 만들어진 승인 기록이었다.승인에는 서우의 보안키와 하진의 휴대폰 인증값이 동시에 사용돼 있었다.두 사람 중 한 명이라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내가 한 말은 아니다.”“내 휴대폰 인증도 같이 쓰였어요.”“그래서 더 문제다.”서우는 벽면 패널을 끄고 외부망을 차단했다.현관 잠금장치가 수동 모드로 바뀌자 하진이 곧장 문을 보았다.“가두는 거예요?”서우가 비상 열쇠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나가고 싶으면 네가 열어.”“그러면서 내 물건은 뒤지겠다고요?”“허락하면.”태겸은 한 번도 묻지 않았다.휴대폰도, 가방도, 하진의 몸도 제 것처럼 확인했다.하진은 젖은 코트를 벗어 소파에 내려놓았다.“코트만 봐요. 나한테는 손대지 말고.”“알았다.”서우가 탐지기를 켰다.기계가 왼쪽 어깨를 지나는 순간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렸다.안감을 뜯자 검은 단추만 한 중계기가 모습을 드러냈다.“태겸이 심은 거예요?”“네 휴대폰 인증값과 이 집 안의 음성을 빼간 장치다.”하진은 복도에 버려진 짐에서 코트를 꺼내 입던 순간을 떠올렸다.태겸은 차 안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서우가 전원을 끄려 하자 하진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서우는 즉시 손을 멈췄다.하진이 먼저 닿았는데도 그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그 절제가 지금은 다정함보다 의심스럽게 느껴졌다.“왜.”“듣고 있다면 속일 수도 있잖아요.”하진은 중계기를 다시 안감 속에 넣었다.그리고 일부러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완결 원본은 객실 금고에 있어요.”서우가 곧장 말을 받았다.“그걸 넘기면 강태겸이 널 놓아줄 거라고 믿나?”“당신보다는 믿을 만하니까요.”십 초 뒤 태겸에게 메시지가 왔다.[금고 비밀번호는 0719야.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7-09
더 보기

5화. 실종되기 전의 신고

윤하진이 사라지기 한 시간 전, 강서우는 이미 실종 신고를 했다.형사가 내민 접수증에는 오후 10시 41분이 찍혀 있었다.하진이 이 집의 초인종을 누르기 전이었다.“내가 올 줄 알았어요?”서우는 부정하지 않았다.“네 메일을 받았다.”“나는 당신한테 메일 보낸 적 없어요.”형사가 태블릿을 돌렸다.오후 10시 32분, 하진의 오래된 작가 계정에서 서우에게 발송된 메일이었다.제목은 마지막 원고였다.본문은 한 줄뿐이었다.[오늘 자정, 내 이름이 사라지면 나도 끝내겠습니다.]첨부 파일에는 하진이 열아홉 살 때 쓴 최초 초고가 들어 있었다.세상에서 지웠다고 믿었던 첫 문장까지 그대로였다.“이걸 보고 신고한 거예요?”“전화를 열세 번 했다.”서우의 목소리가 흔들렸다.“네가 한 번도 받지 않았어.”하진은 휴대폰을 확인했다.부재중 전화 목록에는 태겸의 이름만 있었다.서우의 전화는 단 한 통도 없었다.“거짓말.”“내 통화 기록에는 남아 있다.”서우가 화면을 내밀었다.하진의 번호로 열세 번 전화를 건 기록이 있었다.같은 시간, 하진의 휴대폰은 수신을 거부한 것으로 표시돼 있었다.누군가 두 사람 사이의 연락만 골라 지웠다.형사가 하진의 품에 안긴 가방을 바라보았다.“원고는 증거물로 제출해주셔야 합니다.”하진이 가방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안 됩니다.”“표절 피해를 입증하려면 원본 확인이 필요합니다.”“여기서 확인하세요.”“디지털 포렌식 절차상 가져가야 합니다.”서우가 하진과 형사 사이를 막았다.“영장부터 가져오시죠.”“실종 신고자가 수사까지 방해하시는 겁니까?”“신고는 보호를 요청한 거지, 원고를 넘기겠다는 동의가 아닙니다.”팔 년 전에는 묻지 않고 하진의 원고를 태겸에게 넘겼던 남자였다.지금은 경찰 앞에서도 하진의 허락을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믿고 싶지 않은데 그 차이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형사는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대신 메일에 첨부된 두 번째 파일을 열었다.“유서로 보이는 문서도 있습니다.”하진의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7-09
더 보기

6화. 금지 조항

“나한테 끌리면 계약 위반인가요?”하진의 질문에 서우가 처음으로 대답을 머뭇거렸다.복도에는 기자들이 남아 있었고,거실 화면에는 팔 년 전 원고의 작성자 변경 기록이 떠 있었다.윤하진에서 강서우로.하진은 조금 전까지 잡고 있던 손을 내려다봤다.“내 이름을 지우고 당신 이름을 넣었잖아요.”“가져가려고 한 건 아니다.”“도둑이 제일 먼저 하는 말이네요.”서우가 화면 아래 숨겨진 문서를 열었다.팔 년 전 오혜련 명의로 내려온 내부 지시였다.익명 투고자의 신원을 확인하고, 강씨 집안에 위험이 될 원고는 폐기하라는 내용이었다.“네 이름이 드러나면 원고도 너도 없어질 상황이었다.”“그래서 당신 이름 뒤에 숨겼어요?”“임시 등록으로 묶어두면 누구도 폐기하지 못하니까.”“나한테 묻지 않고요.”“그래.”“태겸한테 넘긴 것도 보호였고, 이름을 지운 것도 보호였고,오늘 이 집으로 오게 만든 것도 보호예요?”“오늘 밤 네가 도망칠 곳을 남겨둔 건 나다.”“비밀번호를 바꾸고 짐을 내놓은 것도요?”“그건 태겸이 한 짓이야.”“알고도 기다렸군요.”“내가 데리러 가면 또 네 선택을 빼앗게 되니까.”하진이 헛웃음을 흘렸다.“선택권을 존중하는 남자가 팔 년 전에는 참 바빴네요.”“그래서 지금은 네가 허락한 것만 한다.”서우가 식탁 위 계약서를 하진 앞으로 밀었다.찢었던 계약서를 다시 출력한 것이었다.하진은 마지막 장에서 손을 멈췄다.[보호자는 보호를 이유로 신체적 또는 정서적 대가를 요구할 수 없다.]그 아래에는 새 조항이 추가돼 있었다.[사적 감정은 계약의 대가로 간주하지 않으며, 모든 접촉은 별도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사적 감정이라.”“당신한테도 있어요?”“있다.”대답이 너무 빨라 하진의 손이 멈췄다.“언제부터요?”“네가 내 문 앞에 오기 전부터.”“팔 년 전부터라고 하면 신고할 거예요.”“그때는 네 문장만 알았다.”서우의 시선이 하진의 젖은 머리와 입술을 지나 눈에 멈췄다.“너를 원하게 된 건 오늘이다.”하진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7-09
더 보기

7화. 가족 식탁

“저 사람, 태겸이 버린 애 아니야?”하진이 식당에 들어선 순간, 첫마디가 날아왔다.강씨 일가 열두 명의 시선이 한꺼번에 꽂혔다.하진의 입술에는 아직 서우와 닿기 직전의 열기가 남아 있었다.끝내 입 맞추지 못한 채 이곳까지 끌려온 이유가 저 식탁 위에 전부 앉아 있었다.서우가 하진보다 반걸음 앞에 섰다.“돌아가도 된다.”“내 얘기를 하는데 제가 왜 돌아가요?”하진은 비어 있는 말석을 지나 서우의 오른쪽 의자를 당겼다.태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오혜련이 잔을 내려놓았다.“그 자리는 가족 자리예요.”“그럼 저를 왜 부르셨죠?”서우는 막지 않았고, 허락받았다는 듯 행동하지도 않았다.다만 하진이 선택한 자리에 맞춰 자신의 의자를 조금 가까이 당겼다.“밤중에 남의 집으로 도망쳐 들어가 놓고 말이 많군요.”오혜련이 서류 봉투를 밀었다.“원고와 관련한 모든 주장을 철회하고 오늘 안으로 출국하세요.”봉투 안에는 항공권과 합의금 수표가 들어 있었다.금액은 하진이 평생 글을 써도 만지기 어려운 숫자였다.“사인하면 제 이름을 돌려줍니까?”“당신 이름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요?”“가치가 없으면 이렇게 비싼 값으로 지우려 하지 않겠죠.”태겸이 비웃음을 흘렸다.“형 집에서 하룻밤 보내더니 배짱이 생겼네.”“당신한테서 도망친 뒤에 생긴 겁니다.”“도망?”태겸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내 원고를 들고 형 침대로 간 걸 그렇게 부르나?”“침대에는 안 갔어요.”태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아직은?”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을 오혜련이 낚아챘다.“사람들은 원고를 되찾으려고 형제 사이를 오간 작가라고 기억할 겁니다.”“아니요.”하진이 서우를 바라보았다.“정확히 기억하게 만들면 돼요.”식탁 아래에서 하진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서우의 손등에 손끝이 닿자 그의 시선이 내려왔다.붙잡지 않았다.하진이 손바닥을 완전히 포갤 때까지 기다렸다.“원고는 제 것이고, 이 손은 제가 잡았습니다.”오혜련의 눈빛이 차갑게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7-09
더 보기

8화. 거울 속의 허락

거울 속에서 태겸과 닮은 남자가 하진의 허리를 잡기 직전 멈췄다.“왜 멈춰요?”“네가 허락하지 않았으니까.”저택에서 돌아온 뒤에도 하진은 서우의 셔츠를 입고 있었다.젖은 옷 대신 빌린 검은 셔츠는 손등을 덮었고,목깃에는 서우의 체온과 향이 남아 있었다.거울 안에는 닮은 눈매를 가진 두 형제 중 한 사람만 서 있었다.그런데 하진의 몸은 자꾸 다른 한 사람을 기억하며 굳었다.“당신 얼굴을 보면 가끔 태겸 씨가 보여요.”서우의 손이 허리 옆에서 천천히 내려갔다.“그럼 보지 마.”“피하라는 뜻이에요?”“네가 겁먹는 건 원하지 않으니까.”“겁먹었다고 한 적 없어요.”하진은 거울을 통해 서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닮아서 화가 나는 건지, 다른데도 끌려서 화가 나는 건지 모르겠다는 거예요.”“그 말을 하고도 내가 가만히 있길 바라나.”“가만히 있을 수 있어요?”“네가 원하면.”“원하지 않으면요?”“그래도 먼저 묻는다.”하진은 서우의 손목을 잡았다.단단한 손을 자신의 허리 위로 직접 끌어올렸다.“지금은 허락할게요.”서우의 손바닥이 셔츠 위에 닿았다.힘을 주면 단숨에 끌어안을 수 있는 손이었지만,손끝은 하진이 정한 자리에서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하진이 뒤로 기대자 서우의 가슴이 등에 닿았다.거울 속 서우의 눈빛이 순식간에 짙어졌다.“이렇게까지 참으면서 왜 가까이 있어요?”“네가 멀어지면 더 참기 힘드니까.”“그건 앞뒤가 안 맞잖아요.”“너한테는 원래 그렇다.”하진은 웃지 못했다.태겸은 붙잡고 싶다는 말을 사랑처럼 포장했다.서우는 붙잡고 싶다는 얼굴로 빠져나갈 틈부터 남겼다.그 차이가 자꾸 하진을 뒤로 기울게 했다.서우 쪽으로.“더 잡아도 돼요.”“어디까지.”“그것도 제가 전부 말해야 해요?”“그래야 내가 넘지 않아.”하진은 서우의 손을 허리 뒤로 조금 더 끌었다.서우의 팔이 느리게 몸을 감쌌다.가두는 힘은 없었지만 하진이 기대기에는 충분했다.“이제 태겸 씨랑 달라 보여요?”“아직요.”“그럼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7-09
더 보기

9화. 돌아갈 집

“백이재, 너랑 너무 가까워.”서우의 목소리가 하진의 어깨 너머로 떨어졌다.이재는 하진을 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팔 년 친구가 이 정도도 못 합니까?”“친구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서우의 시선이 하진에게 향했다.“하진이 허락했는지가 중요하지.”하진은 순간 대답을 잊었다.질투로 눈빛이 차갑게 굳은 남자가 이재가 아니라 자신에게 허락부터 확인하고 있었다.“허락했어요.”“알았다.”서우는 더 말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났다.그 순순한 후퇴가 하진을 이상하게 화나게 했다.조금 전 하진은 그의 방문을 직접 열고 들어오라고 말했다.입술이 닿기 직전 울린 초인종만 아니었다면,이미 서로가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지 확인하고 있었을 것이다.그런데 서우는 질투한다는 말만 남기고 너무 쉽게 자리를 내줬다.이재가 하진을 놓고 검은 외장하드를 내밀었다.“완결 원본하고 수정 기록 전부 들어 있어.”하진이 받아 들자 이번에는 작은 열쇠 하나가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이건 뭐야?”“내가 구한 작업실.”“네 작업실?”“네 거.”하진의 눈이 커졌다.이재는 하진이 태겸에게 빼앗긴 보증금 대신 자신의 적금을 깨 계약했다고 말했다.현관 비밀번호도, 임대 계약도, 전기와 인터넷 명의도 전부 윤하진으로 해뒀다.태겸도 모르고 강씨 집안도 모르는, 하진의 이름만 적힌 첫 번째 공간이었다.“오늘 나랑 가.”이재가 열쇠를 하진의 손에 꼭 쥐여줬다.“이제 남의 집에 숨어 있을 필요 없어.”하진은 손안의 열쇠와 원고실 열쇠를 나란히 내려다보았다.하나는 누구에게도 빚지지 않은 자신의 집이었다.다른 하나는 자신을 원하는 남자가 열어준 방이었다.“강서우 씨는 할 말 없어요?”“네 이름으로 된 집이라면 가는 게 맞다.”“그게 끝이에요?”“뭘 듣고 싶은데.”“몰라서 물어요?”서우가 천천히 다가왔다.이재가 막아서려 했지만 하진이 손을 들어 멈췄다.서우는 하진의 한 걸음 앞에서 멈췄다.“가지 마.”하진의 심장이 크게 내려앉았다.“왜요?”“백이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7-09
더 보기

10화. 오늘은 내가 먼저 돌아왔다

“돌아갈 곳이 생기면, 당신은 날 보내줄 수 있어요?”서우는 하진의 주머니에서 부딪치는 열쇠 소리를 들었다.백이재가 마련한 작업실 열쇠였다.누구의 허락도 필요 없는, 윤하진의 이름으로 된 첫 번째 집이었다.“보내준다.”하진의 손이 서우의 셔츠 깃에서 멈췄다.“그렇게 쉽게요?”“쉽지 않아.”서우가 하진의 손을 떼어내지 않은 채 현관을 바라보았다.“그래도 문은 열어준다.”“가지 말라는 말은 안 하고요?”“그 말까지 참을 생각은 없어.”서우의 시선이 다시 하진에게 돌아왔다.“가지 마.”두 글자가 하진의 가슴을 세게 눌렀다.“하지만 네가 나가겠다면 막지는 않는다.”하진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그리고 정말로 현관까지 걸어갔다.서우는 뒤따라왔지만 손을 뻗지 않았다.마지막 잠금장치까지 직접 풀어 문을 활짝 열었다.차가운 복도 공기가 두 사람 사이로 밀려들었다.“나가.”하진의 얼굴이 굳었다.“보내기 싫다면서요.”“그래서 네가 직접 확인해야 해.”서우가 문에서 비켜섰다.“이 집에 남는 이유가 잠긴 문은 아니어야 하니까.”하진은 문턱을 넘었다.한 걸음만 더 가면 엘리베이터였고, 아래로 내려가면 자기 이름으로 된 집이 있었다.등 뒤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붙잡는 손도, 돌아오라는 명령도 없었다.하진은 엘리베이터 버튼 앞까지 갔다.손가락이 버튼에 닿기 직전 멈췄다.태겸에게서 도망칠 때는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돌아보는 순간 다시 끌려갈 것 같았으니까.그러나 이번에는 자신이 어느 쪽으로 갈지 확인하고 싶었다.하진이 몸을 돌렸다.서우는 열린 문 안에 그대로 서 있었다.기다리는 얼굴은 평온했지만 문틀을 쥔 손등에는 핏줄이 선명하게 솟아 있었다.하진은 천천히 다시 걸었다.서우의 앞에 멈춰선 뒤 문을 직접 닫았다.잠금장치가 걸리는 소리가 이번에는 감금처럼 들리지 않았다.“오늘은 제가 먼저 돌아왔어요.”서우의 눈빛이 짙어졌다.“후회해도 네 탓이라고는 하지 마.”“후회도 내 거예요.”하진은 서우의 넥타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7-09
더 보기
이전
123456
...
9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