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성녀의 침실에는 죄 많은 황제가 산다: Chapter 291 - Chapter 300

374 Chapters

291. 제가 필요한 일이 있습니까

한 번이 아니었다.로스테의 대형 마물 접근 경보였다.하겐이 통신석을 잡았지만 성문을 닫으라는 명령부터 하지 않았다. “거리부터.”북쪽 관측병의 목소리가 거칠게 들어왔다.“외곽 삼림선 너머입니다. 성벽에서 아직 멉니다.”“개체 확인?”“큰 흰 뿔 하나. 움직이지 않습니다.”“추가 개체?”“현재는 안 보입니다.”하겐은 공사 중단을 명령하고 작업자를 먼저 북벽 안쪽으로 뺐다. 성문은 열린 상태를 유지했지만 북부 외출만 멈췄고, 주민들에게는 대형 개체가 관측됐다는 사실과 현재 거리, 대피명령이 아직 없다는 점을 동시에 알렸다.엘리시아는 사무실에서 망토를 집어 들지 않았다.성벽으로 뛰어가지도 않았다.“제가 필요한 일이 있습니까?”하겐에게 물었다.“지금은 없습니다.”“그럼 여기 있겠습니다.”이레나는 문가에 서 있다가 물었다. “성녀님 사무실 주변 경비를 늘릴까요?”“현재 위험이 제 위치를 직접 겨냥한다는 증거가 있습니까?”“없습니다.”“그럼 기존 인원으로.”이레나는 그대로 따랐다.흰 뿔의 왕이 보였다고 모두가 엘리시아 주변으로 몰리지 않았다.도시는 자기 방어선대로 움직였다.북쪽 삼림선에서 흰 뿔의 왕은 한 시각 가까이 같은 자리에 머물렀다.성벽으로 다가오지 않았다.포효하지도 않았다.나무를 쓰러뜨리거나 땅을 파헤치는 움직임도 없었다.그저 아주 먼 거리에서 고개를 낮췄다가 다시 들기를 반복했다.테사는 왕핵 잔류 측정기를 북쪽으로 돌렸다.가장 강한 반응은 흰 뿔의 왕이 있는 곳이 아니었다.그보다 남쪽.세 번째 먹이점.그리고 그곳에서 로스테 방향으로 이어지던 얇은 흔적.하지만 낮에 시계장치를 멈췄고, 중계소도 차단했다. 새 먹이가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잔류가 오히려 떨어지고 있습니다.”오스카가 물었다. “그럼 왜 왕이 저기 있습니까?”테사는 화면을 확대했다.“기억했을 수도 있습니다.”십일 년 전 실험표.대상 개체는 이틀 뒤에도 같은 혼합비를 다시 식별했다.‘왕이 길을 기억한다.’장치를 멈춘다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Read more

292. 또 다른 표본창고가 되지 않도록

자정이 가까워졌을 때 흑갑 13번의 제작판이 마지막으로 한 번 반응했다.대형 마물 접근 조건.성립하지 않음.황실 긴급 지휘 전환.차단.지역 지휘 인증.실패.새 착용자.미지정.검은 금속 위의 회색빛이 서서히 꺼졌다.테사는 반응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 뒤 말했다. “현재 제작 절차는 정지 상태입니다.”폐기된 것은 아니었다.누군가 다시 길을 열면 재개될 수 있다.하지만 적어도 오늘 로스테 사람 하나를 갑옷 안에 밀어 넣는 절차는 멈췄다.엘리시아는 그 보고를 받은 뒤 한 가지 요청만 했다.“빈 침실 저장층을 중앙 보관하지 마세요.”오스카가 이유를 물었다.“제 신성력 잔류가 들어 있습니다. 증거라고 한곳에 모아두면 또 다른 표본창고가 됩니다.”로스테 법무관과 논의한 결과 저장층은 세 부분으로 나누지 않았다. 쪼개면 오히려 표본이 늘어난다. 대신 원형 그대로 이중 봉인한 뒤 사용 권한 없이 보존하고, 감정이 끝나면 장기보관 여부를 다시 엘리시아에게 통지하기로 했다.황실도 가져가지 않는다.대신전도 가져가지 않는다.로스테가 자기 소유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증거라는 이유로 주인이 없는 물건으로 만들지 않았다.그 절차까지 마무리된 뒤 엘리시아는 처음으로 오늘 업무가 끝났다는 표시를 했다.사무실 창문 밖으로 겨울 밤이 내려와 있었다.북쪽의 경계종은 울리지 않았다.흰 뿔의 왕도 더 가까이 오지 않았다.그러나 멀리 북동쪽 숲에서 간헐적으로 왕핵 잔류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현상은 계속됐다.누군가 먹이길의 더 먼 부분을 아직 가지고 있었다.오스카가 외투를 정리하며 물었다. “오늘은 숙소를 어디로 하시겠습니까?”엘리시아는 잠시 생각했다.야간 확인석이 있던 방은 바닥 수리까지 끝났지만 아직 검수가 남았다. 독립 사무실에는 잘 수 있는 시설이 없었다. 지난 며칠 머물렀던 임시방은 오늘도 사용할 수 있었다.“임시방으로 갑니다.”“원래 침실은요?”“내일 검수 결과 보고 정하죠.”위험해서 영원히 버리지 않았다.독립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Read more

293. 사람을 갈아 넣지 않는 성벽

하겐의 요청이었다.병력이 아니었다.성녀의 신성력도 아니었다.로스테가 필요로 한 것은 북부 치료소의 이동 의료품 목록과 부상자 분산 수용 가능 인원, 그리고 만약 성벽이 실제 공격을 받을 경우 성녀 측 치료진이 어느 구역까지 지원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선택지였다.엘리시아는 그 문서를 받은 뒤 망토 끈을 다시 풀었다.전장으로 나갈 준비가 아니라 치료소로 갈 준비를 했다.“미하일에게 먼저 묻죠. 필요한 범위를 그쪽에서 정하게 하세요.”이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창밖에서 경계종이 한 번 더 울렸다.로스테의 첫 쉰 날 동안 엘리시아는 결속을 거부했고, 황후가 되는 길을 거부했으며, 누군가 자신을 지켜준다는 이유로 대신 결정하는 방식도 조금씩 거부해왔다. 칼릭스 역시 그녀를 되찾겠다는 명목으로 명령하지 않았고, 자신의 몸과 권한을 혼자 쓰는 일을 멈추는 연습을 시작했다.그러나 그 모든 선택이 제국 바깥의 위험까지 사라지게 해주는 것은 아니었다.오히려 이제부터가 문제였다.둘이 오래된 제도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가 자동으로 안전해지는 일은 없었다.누군가 만들어둔 먹이길은 아직 북쪽에 남아 있었고, 흰 뿔의 왕은 그 길을 기억했다.엘리시아가 사무실로 들어서는 순간 북벽에서 네 번째 보고가 도착했다.흰 뿔의 왕은 아직 공격하지 않았다.대신 가장 앞서 달리던 작은 개체 하나가 멈춰서, 로스테 외곽 경계석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처음으로 경계석 안쪽에 발을 들였다.하겐은 활을 들지 않은 채 그 거리를 기록하게 했다.한 걸음.아직 전쟁은 아니었다.그러나 다음 한 걸음부터는, 로스테가 지난 오십 일 동안 배운 모든 선택이 실제로 사람을 살릴 수 있는지 시험받게 될 터였다.북벽 위에서 하겐이 낮게 말했다.“전원 위치 유지. 먼저 쏘지 마.”그 명령이 끝난 뒤, 숲 너머의 거대한 흰 뿔이 천천히 로스테 쪽으로 돌아섰다.북동쪽 숲에서 작은 개체들이 방향을 꺾었다는 보고가 들어온 뒤, 로스테 북벽에서는 누구도 흰 뿔의 왕을 향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Read more

294. 신성력을 아껴야 하는 이유

엘리시아는 북벽으로 가지 않았다.경계종이 네 번 울리는 동안 그녀가 향한 곳은 성녀 사무실도 아니었다. 미하일이 임시 치료소로 확장해둔 북부 곡물창고였고, 그곳에서는 이미 외곽 숙영지에서 돌아온 노인과 아이들, 성벽에서 내려온 부상병들이 서로 다른 구역으로 나뉘고 있었다.미하일은 엘리시아를 보자 가장 먼저 환자 숫자를 건넸다. 전투 부상 둘, 외곽 복귀 중 미끄러져 손목을 다친 주민 하나, 추위 때문에 호흡이 나빠진 노인 셋, 불안 증세로 과호흡을 보이는 아이 둘. 아직 대량 부상 상황은 아니었지만, 북벽이 실제 공격을 받기 시작한 이상 치료소의 준비단계를 올려야 했다.엘리시아는 신성력을 쓰기 전에 물었다. “제가 직접 치료해야 할 환자가 있습니까?”“현재는 없습니다. 전투 부상자 둘도 봉합과 고정으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그럼 저는 병상과 인력부터 보겠습니다.”그녀는 성녀가 왔다는 이유로 모든 환자를 자기 앞으로 모으게 하지 않았다. 신성력은 응급순환이 무너지거나 일반 치료로 버틸 수 없는 경우에만 쓰기로 했고, 현재는 미하일의 지휘 아래 약품과 붕대, 난방, 수송 동선을 먼저 정리했다. 이름 없는 지원품 가운데 성분 검사가 끝난 진통제는 사용할 수 있었지만, 신성 파장을 억제하는 성분이 든 약은 성녀 치료와 섞이지 않도록 별도 선반으로 옮겼다.첫 번째 성벽 부상자가 들것에 실려 들어왔을 때 엘리시아는 그의 곁으로 달려가지 않았다.미하일이 먼저 상처를 확인하고 종아리 열상을 봉합했으며, 엘리시아에게 필요한 것은 출혈이 아니라 다른 문제였다.“성벽 돌에서 이상한 냄새가 납니다.”부상병이 이를 악문 채 말했다.미하일이 봉합하던 손을 멈추지 않고 물었다. “어떤 냄새지?”“쇠 비린내 같은데 단내도 섞였습니다. 놈이 들이받은 뒤 돌가루가 얼굴까지 튀었어요.”엘리시아의 시선이 그의 장화와 바짓단에 묻은 회색 먼지로 향했다.왕핵 정제분 4호.성유 보존수지.그동안 먹이점과 흑갑에서 반복해 발견된 조합이었다.“옷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Read more

295. 성녀가 힘을 써야 한다는 결론을 묶지 않았다

성녀가 있다는 사실과 성녀가 힘을 써야 한다는 결론을 한 줄로 묶지 않았다.로스테 시청의 전술실에서는 정오 직전 첫 전투평가가 시작됐다.사망자 없음.부상 경비병 여섯.중상 없음.북벽 세 번째 구획 사용 중지.외곽 숙영지 주민 예순세 명 전원 성내 이동 완료.가축 열일곱 마리와 저장 건초 일부는 외곽에 남았다.북문은 폐쇄됐지만 남문과 서문은 열려 있었다.소형 개체 가운데 확인된 사체는 네 구.부상 후 숲으로 물러난 개체는 수 미상.흰 뿔의 왕은 아직 직접 공격하지 않았다.하겐은 얼굴과 외투에 눈가루가 붙은 상태로 통신판 앞에 앉았다. “첫 파도라고 부르기는 이릅니다. 놈들이 조직적으로 성벽을 시험한 흔적은 없고, 숲에서 누군가 쏜 화살에 자극받아 뛰어든 쪽에 가깝습니다.”베른하르트가 물었다. “그 화살은 회수했나?”“두 개를 찾았습니다. 하나는 개체 몸에서, 하나는 눈밭에서.”검은 화살촉은 냉철도 황실 규격도 아니었다. 나무 자루는 북부산이었지만 제작소를 특정할 표식이 없었고, 화살촉 안쪽에 미량의 왕핵 정제분이 들어 있었다.테사가 말했다. “맞은 짐승이 성벽 쪽으로 달린 이유가 상처 때문인지, 화살에 묻은 잔류 때문인지 구분해야 합니다.”하겐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걸 확인한다고 다른 놈한테 화살 하나 더 쏘자는 소리는 아니겠지?”“그럴 생각 없습니다. 이미 발생한 이동선만 비교합니다.”누구도 마물을 다시 자극해 실험하지 않았다.대신 첫 번째 화살을 맞은 개체와 다른 두 개체의 발자국을 비교했다. 왕핵 가루가 묻은 화살을 맞은 첫 개체는 가장 가까운 기존 먹이점이 아니라 북벽 세 번째 보수구획으로 직선 이동했고, 그 돌 안쪽에서는 오래된 왕핵·신성 혼합 잔류가 확인됐다.미끼가 하나의 선으로 이어진 셈이었다.숲에서 누군가 개체를 찌른다.왕핵 잔류로 방향을 흔든다.성벽 안의 오래된 혼합 보수석이 다음 먹이가 된다.우연한 충돌처럼 보이지만 누군가가 과거 로스테 시설을 알고 있었다면 유도할 수 있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Read more

296. 누가 대신 죽을지를 정하지 마라

“왕핵을 사용하지 않았습니까?”“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검사기록도 법무청과 주치의 기록에 함께 올렸습니다.”“심장은요?”“이상 없습니다.”“오른손은?”“변화 없습니다.”대화는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그런데 칼릭스가 한 장을 더 보냈다.황실 왕핵관리국이 보관하고 있던 북부 대형 개체 대응 지침이었다.가장 오래된 판본은 팔십 년 전.흰 뿔의 왕으로 추정되는 대형 개체가 왕핵 혼합 잔류를 따라 접근했을 때, 황제가 왕핵을 직접 사용해 더 강한 맛을 먼 지역으로 이동시키면 개체를 도시에서 떼어낼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하겐이 문서를 읽자마자 욕설을 삼켰다. “그러니까 폐하가 미끼가 되면 된다는 소리군요.”칼릭스는 그 표현을 부정하지 않았다. “과거에는 그렇게 사용했습니다.”엘리시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폐하께서 지금 그 방법을 제안하시는 건 아니죠?”“아닙니다.”“선택지로도 보내지 마세요.”그 말에 회의실이 조용해졌다.엘리시아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왕핵 직접 사용이 의료적으로 위험하다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황제 한 사람에게 개체를 붙여 도시를 살리는 방식이면 구조 자체가 그대로입니다. 필요하다고 판단하셔도 현재 대안 목록에서는 제외하세요.”칼릭스는 한동안 화면 너머의 그녀를 바라봤다.“알겠습니다.”그는 ‘그대를 위해서라면’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곧 법무청 자료의 선택지 목록에서 ‘황제 직접 유도’를 현재 사용 금지 항목으로 옮겼다.하겐이 그걸 확인한 뒤 물었다. “그럼 진짜 성벽까지 오면 뭘로 막습니까?”칼릭스는 자신이 답하지 않았다.테사가 로스테 쪽 자료를 열었다. “냉철 장벽, 먹이점 차단, 고잔류 보수석 격리, 소형 개체 분산 방어까지는 현재 가능합니다. 왕이 직접 성벽을 공격하면 그다음 판단이 필요합니다.”엘리시아가 말했다. “그 판단은 실제 상황이 왔을 때 합니다. 지금부터 누가 대신 죽을지를 정하지 말고요.”칼릭스의 시선이 아주 잠깐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예.”그 한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Read more

297. 성녀 없이도 돌아간 치료소

엘리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도움을 주는 일도 점점 번거로워졌다.그녀는 그 번거로움이 싫지 않았다.적어도 누군가 훗날 물 한 통을 받았다는 이유로 결속을 찬성했다고 기록하는 것보다는 나았다.해가 지기 직전, 첫 번째 사체 감정 결과가 나왔다.소형 개체 네 구 가운데 세 구의 위장에서는 눈과 나무껍질, 작은 돌 조각이 나왔다. 문제는 네 번째였다.위장 안에서 검은 금속편 세 개가 발견됐다.왕핵 정제분 4호가 묻어 있었고, 표면에는 옛 성유 보존수지가 굳어 있었다. 성녀 잔류도 검출됐지만 아델라이드와 엘리시아 어느 한 사람에게 완전히 일치하지 않았고, 여러 표본이 섞인 폐목초지 혼합액과 더 가까웠다.“실제로 먹었습니다.”테사가 감정서를 보며 말했다.그동안 ‘먹이’가 단순한 기술자 은어인지, 길에 바르는 재료를 뜻하는지 불분명했던 부분이 처음으로 좁혀졌다. 적어도 일부 소형 개체는 혼합 잔류가 묻은 금속 자체를 삼켰다.더 이상한 것은 금속편의 모양이었다.그냥 부서진 갑옷 조각이 아니었다.세 개를 원래 형태대로 맞추자 작은 고리 하나가 됐다.목걸이나 족쇄에 가까운 크기.테사는 사체 목 주변을 다시 확인했다.털 아래 피부에 둥근 눌림 자국이 있었다.“원래 목에 걸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하겐의 얼굴이 굳었다. “누가 마물한테 직접 걸었다는 건가?”“가능성은 있지만, 사람이 직접 접근했는지는 모릅니다. 덫이나 먹이에 섞어 걸리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고리 안쪽에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13.흑갑 13번과 같은 번호.회의실 안의 공기가 가라앉았다.엘리시아가 천천히 물었다. “갑주 번호와 같은 체계입니까?”테사는 합금과 획을 비교했다. 금속 자체는 갑주용 흑철보다 훨씬 얇았지만, 숫자 13의 각인 방식은 북쪽 우편소에서 발견된 신규 갑주 조각과 일치했다.“같은 제작 체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흑갑 13번은 아직 사람을 찾지 못했다.그런데 13번이 새겨진 고리는 이미 소형 개체의 목에 있었다.사람과 마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Read more

298. 사람부터 안으로 철수시켜라

새벽이 완전히 밝기도 전에 북벽 아래의 두 번째 방어선이 먼저 움직였다. 전날 소형 개체의 충돌로 금이 간 세 번째 보수구획은 밤새 임시 지지대를 세웠지만, 눈 아래 남아 있는 왕핵·신성 혼합 잔류를 완전히 걷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병력을 다시 올리지 않았다. 하겐은 성벽을 지키려면 모든 망루를 채워야 한다는 오래된 원칙 대신, 위험한 구획을 비운 채 양옆 사각을 넓혀 보완하는 쪽을 택했고, 그 결과 북문 바로 오른쪽에는 눈에 띄는 빈 구간이 생겼다. 평소라면 적이 가장 먼저 노릴 약점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무너지기 쉬운 바닥 위에 사람을 올려놓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공간이었다.밤새 숲 가장자리에 머물던 다섯 개체는 날이 밝자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갑각이 몸을 덮고 있었으나 흑갑 기사와 닮은 것은 색뿐이었고, 사람처럼 직립한 채 걷지도 않았다. 앞다리는 길고 뒷다리는 짧아 몸이 앞으로 기울었으며, 뿔 대신 머리뼈 양옆에서 짧은 검은 돌기가 뻗어 있었다. 목에는 전날 확인한 고리가 걸려 있었고 숫자 1, 4, 9, 11, 13이 각각 새겨져 있었는데, 흰 뿔의 왕이 멀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동안에도 이 다섯은 마치 서로 다른 길을 맡은 것처럼 넓게 흩어졌다.하겐은 망원경을 넘겨받아 한참 그 움직임을 살핀 뒤 테사에게 물었다. “저 번호가 갑주 번호와 같은 역할이라면, 놈들마다 가는 곳도 다를 수 있겠군.”테사는 전날 밤 확보한 지도에 다섯 개체의 위치를 표시했다.“현재로서는 그렇게 보입니다. 1번은 북문 정면보다 왼쪽 배수로 쪽을 보고 있고, 4번은 우리가 끊어놓은 첫 번째 심장 흡수선 근처를 맴돕니다.9번과 11번은 아직 움직임이 적고, 13번은 계속 세 번째 보수구획 쪽을 봅니다.”“먹이가 남아서인지, 번호가 원래 그 구역을 가리키는 건지는 모른다는 거지?”“예. 그래서 먼저 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자극해서 원래 이동선을 망가뜨릴 수 있으니까요.”하겐은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장궁대에 대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1
Read more

299. 재산을 가볍게 만들지 않는다

전날 미처 옮기지 못한 건초와 가축 몇 마리가 외곽에 남아 있었지만, 그것을 회수하겠다고 사람을 다시 내보내지 않았다. 시설 손실은 곧바로 기록됐고, 가축 소유자에게는 현장 접근 금지와 함께 손실 보상 심사가 별도로 안내됐다.전쟁의 두 번째 날은 그렇게 화살보다 장부가 먼저 움직이면서 시작됐다.엘리시아가 치료소에 도착했을 때 미하일은 전날 들어온 부상병 가운데 두 명을 이미 퇴원시키고 있었다. 종아리 열상을 입은 병사는 아직 목발이 필요했지만, 성벽 근무가 아닌 기록보조 업무로 전환하면 숙소에서 쉬는 것보다 낫겠다고 스스로 요청했고, 미하일은 그 선택이 회복을 늦추지 않는 범위에서만 허용했다. 반대로 어깨를 다친 병사는 통증이 줄었다며 바로 복귀하겠다고 했으나, 팔을 들어 올리는 것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이틀 추가 휴식 판정을 받았다.엘리시아는 두 사람을 설득하려 들지 않았다. 한쪽이 일하고 싶다고 했다고 무조건 보내지 않았고, 다른 쪽이 싸우고 싶어한다고 용기를 칭찬하지도 않았다. 의료진이 판단한 범위 안에서 본인이 선택하게 두었다.북벽에서 들어온 아침 보고를 읽은 미하일이 말했다.“오늘은 전투 부상보다 외곽 주민 이동이 더 문제일 수 있습니다. 북쪽 목축지에 남은 가축을 포기하라는 명령이 내려갔으니, 몰래 나가려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엘리시아는 치료소 창가에서 주민 이동표를 확인했다. “가축을 두고 왔다고 비난하지 마세요. 생활기반을 잃는 일인데 쉽게 포기하기는 어렵죠.”“그렇다고 나가게 둘 수도 없습니다.”“그래서 경비가 막는 겁니다. 우리는 돌아오다가 다치거나 추위에 노출된 사람을 받을 준비를 하고요.”예상대로 한 시각도 지나지 않아 첫 환자가 들어왔다. 목축업자 한 명이 북문 경비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사람을 밀쳐 다친 것이 아니라, 돌아서는 길에 얼어붙은 돌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무릎을 찧은 경우였다. 그는 치료를 받으면서도 밖에 남겨둔 염소 세 마리를 데려와야 한다고 계속 말했다.“내 재산입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1
Read more

300. 사람 세워놓고 빨리 끊는 것보다는

이레나는 더 묻지 않았다.그 시각 엘리시아가 가장 신경 쓰는 것은 흰 뿔의 왕도, 자기 거처도 아니었다. 치료소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숫자가 전날보다 서서히 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직 전투 부상자는 아니었지만, 외곽 숙영지를 비우면서 발생한 저체온과 발목 염좌, 불안 때문에 숨이 가빠진 아이들이 들어왔다. 전쟁은 성벽에 닿기 전부터 사람을 소모시키고 있었다.그녀는 신성력을 쓰는 대신 난방용 석탄 배분표를 다시 고쳤다.성녀가 가장 빠르게 할 수 있는 일보다, 도시가 오래 버틸 수 있는 일을 먼저 골랐다.정오 무렵 첫 직접 충돌이 일어났다.4번 개체가 원을 그리던 옛 흡수선 주변에서 갑자기 북벽 쪽으로 뛰었고, 그 움직임에 맞춰 9번과 11번도 방향을 바꿨다. 이번에는 숲속의 검은 화살이 없었고, 세 개체가 거의 같은 시각에 반응했다는 점이 전날과 달랐다.테사가 외부 잔류를 확인하자 이유가 드러났다.첫 번째 심장의 우회판을 설치하면서 바닥 아래로 빼낸 오래된 왕핵 잔류를 폐기판에 모아두고 있었는데, 두 번째 폐기판이 예상보다 빨리 포화되면서 미세한 반응이 외부로 새어 나온 것이다.“우리 쪽에서 맛을 만들었습니다.”테사의 목소리가 굳었다.하겐은 누가 잘못했는지부터 묻지 않았다. “폐기판을 멈출 수 있습니까?”“안쪽에서 분리하면 됩니다. 다만 분리 순간 잔류가 한 번 튈 수 있습니다.”“사람이 위험합니까?”“보호장비를 쓰면 가능하지만, 지금 마물이 접근 중입니다.”하겐은 성벽 밖으로 나가는 선택을 버렸다. 폐기판은 성 안쪽 통로에 있었으므로 시설 기술자 둘이 접근할 수 있었지만,만약 개체들이 성벽을 들이받으면 그 충격이 그대로 작업구역에 전달될 수 있었다.“기술자 먼저 대피시키고 자동 차단은?”“느립니다.”“얼마나?”“반 시각.”“그걸 씁니다.”테사가 그를 봤다. “그 사이 놈들이 올 수 있습니다.”“그럼 방벽에서 막습니다. 사람 세워놓고 빨리 끊는 것보다는 낫습니다.”자동 차단이 시작됐다.남은 시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1
Read more
PREV
1
...
2829303132
...
38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