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성녀의 침실에는 죄 많은 황제가 산다: Chapter 281 - Chapter 290

374 Chapters

281. 범인으로 확정된 적 없습니다

하겐이 그 설명을 듣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싸움을 잘하는 사람을 고르는 게 아니군.”“현재까지는 그렇습니다. 갑주가 원하는 건 강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경계를 통과할 수 있는 사람에 가깝습니다.”오스카가 선발 규칙의 오래된 사본을 찾아 읽었다.흑갑 착용자는 정식 기사일 필요가 없었고, 왕핵국이나 대신전의 소속도 필수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국경과 도시, 신전, 후보시설 가운데 최소 두 곳 이상을 별도 심사 없이 오갈 수 있는 권한이었다.엘리시아는 그 문장을 듣고 오래전 제17호 혈액병을 가져간 기사를 떠올렸다. 흑갑은 소속이 보이지 않았고, 왕핵국 긴급 우선표 하나로 후보 검사실까지 들어왔다. 사람의 이름보다 어디까지 통과할 수 있는지가 우선이었던 구조라면 얼굴을 숨기고 갑옷만 남기는 방식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현재 로스테에서 조건에 맞는 사람이 몇 명입니까?”테사는 이름을 열지 않고 숫자만 계산했다. 도시 경비와 북부 통행권을 모두 가진 사람, 시설 긴급권과 성녀 체류시설 접근권이 겹치는 사람, 법무 증거보관소와 외곽 관문을 동시에 오갈 수 있는 사람까지 합치면 처음에는 스물세 명이 나왔지만, 오래된 흑갑 체계가 읽을 수 없는 신규 권한을 제외하자 일곱 명으로 줄었다.하겐이 물었다. “내 이름도 들어갑니까?”“현재 권한 구조상 가능성이 높습니다.”“테사는?”“저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베른하르트는?”“평의회 대표권은 있지만 시설 접근이 부족해서 제외될 가능성이 큽니다.”엘리시아는 그때 더 이상 이름을 좁히지 못하게 했다. 일곱 명 가운데 누가 갑옷과 가장 잘 맞는지 알아내기 위해 직무망을 차례로 열어주는 순간, 선발 체계를 대신 완성해주는 셈이었다.“일곱 명 전부에게 알려주세요. 다만 다른 여섯 명 이름은 공개하지 말고, 각자 자기 직무가 오래된 흑갑 선발 조건과 겹칠 수 있다는 사실만 통지합니다.”한 평의원이 물었다. “그 사람들이 직무를 내려놓겠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내려놓을 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Read more

282. 시험을 받은 사람이라고만 기록하세요

남자는 물잔을 양손으로 감싸쥔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자신이 야간 확인석 작업명령을 직접 만들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시설과 창구에 이미 결재가 끝난 작업봉투가 놓여 있었고, 평소처럼 배달 순서에 끼워 넣었을 뿐이었다. 누가 놓았는지 확인하지 않은 잘못은 인정했지만, 성녀 침실에 관측장치를 들이려는 계획은 몰랐다고 했다.“그럼 왜 사라졌습니까?”에릭의 손이 물잔에서 떨어졌다. “의자가 문제 됐다는 걸 안 날 저녁, 집 문 아래로 쪽지가 들어왔습니다. 제가 전달한 작업명령 원본이 어디서 왔는지 조사받으면 가족 주소와 동생 근무지를 공개하겠다고 적혀 있었습니다.”“가족에게 직접 위협이 있었습니까?”“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무서웠습니다. 알고 있다는 것만 보여줬으니까요.”그는 가족을 보호하려고 사라졌다고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았다. 법무관이 왜 신고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에릭은 잠시 입술을 깨물다가 “시설표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넘긴 것도 제 책임이라, 조사를 받으면 제가 먼저 잡혀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했다.며칠 동안 숨어 있던 곳도 처음부터 그 관리실은 아니었다. 처음 이틀은 친척의 빈 집에 있었고, 그다음에는 누군가 다시 자신을 찾아온 뒤 남부 창고로 이동했다.법무관이 그 대목에서 질문을 멈췄다. “다시 찾아온 사람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지금 답하고 싶습니까?”에릭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손등의 둥근 자국을 내려다본 뒤에야 입을 열었다.“갑옷을 입어본 적 있느냐고 물었습니다.”방 안의 공기가 조용해졌다.“어떤 갑옷인지 설명했습니까?”“검은 갑옷이라고 했습니다. 얼굴은 가려지고, 이름도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상대가 누구였는지 봤습니까?”“얼굴은 못 봤습니다. 후드를 쓰고 있었고, 목소리도 금속판 같은 걸 통해 울렸습니다.”“강제로 입혔습니까?”“아닙니다.”에릭은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세 개의 둥근 자국을 보여주었다. “대신 이걸 댔습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Read more

283. 회수조가 되겠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미하일이 말했다.레나르트는 벽에 세워진 갑옷을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됐습니다.”그제야 테사가 내부 검증판을 확인했다.가슴판 안쪽에는 지금까지 보지 못한 얇은 은층 세 장이 겹쳐 있었다. 첫 번째는 갑주 번호와 통행권한을 저장하고, 두 번째는 착용자의 보폭과 체형을 갑옷에 맞추며, 세 번째는 교체 절차를 담당했다.문제는 세 번째 판의 중앙이 비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새 착용자 이름을 적는 칸 아래에 이미 최근 측정값 하나가 저장돼 있었다.오른손 손등.세 지점.열 반응 불일치.에릭 도른이 받은 검사와 정확히 같았다.“에릭 씨를 검사한 장치가 이 갑옷과 같은 방식이었습니다.”테사는 단정 대신 구조 일치로 기록했다.법무관이 다음 층을 읽었다.에릭 도른.부적합.사유는 전투능력도 체격도 아니었다.‘왕핵 잔류 수용률 부족.’그 아래에는 새로운 후보를 고르는 기준이 있었다.오래된 직무 접근권.도시 내 이동 자유.성녀 주변 시설 접근 가능성.왕핵 잔류에 일정 이상 반응할 신체.그리고 마지막 조건.‘후보가 역할을 자발적으로 수락할 필요 없음.’엘리시아는 원격 화면에서 그 문장을 읽은 뒤 한동안 펜을 움직이지 않았다.“수락이 필요 없다는 건 어떤 방식입니까?”테사가 다음 줄을 확인했다. “장비 착용과 직무 인증이 완료되면 수락으로 처리하도록 돼 있습니다.”“억지로 입혀도?”“장치 입장에서는 구분하지 못합니다.”“벗으면요?”“직무 이탈로 분류합니다.”흑갑 체계는 동의를 요구하지 않았다.갑옷이 몸에 맞고, 필요한 권한을 가졌으며, 왕핵 잔류를 받아낼 수 있으면 역할이 완성된다. 그 사람이 원했는지는 기록할 칸조차 없었다.레나르트가 벽에 세워진 7번 갑옷을 보며 낮게 말했다. “제가 처음 이 갑옷을 입었을 때도 누구에게 허락한 적은 없습니다.”법무관이 그를 바라봤다.“직접 입으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입었습니다. 추위를 버티고 국경을 넘으려면 필요했으니까요.”레나르트의 시선은 갑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Read more

284. 누군가를 몰아붙이지 않는 시간

통신이 잠깐 조용해졌다. 칼릭스의 오른손은 오늘도 책상 위에 보이는 위치에 있었고, 의료기록은 회의 시작 전에 이미 전달돼 있었다. 전날의 불규칙한 심박은 재발하지 않았으며 감각 저하도 악화되지 않았고, 왕핵 직접 사용은 하지 않았다.그녀가 별도로 묻지 않자 칼릭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오늘은 의료 제한 마지막 관찰일입니다.”“해제됩니까?”“일부 일정만 정상화합니다. 왕핵 사용 제한은 그대로입니다.”“폐하께서 줄여달라고 요청하지 않으셨고요?”“요청하지 않았습니다.”엘리시아는 서류를 넘기다가 잠시 그를 바라봤다. “요즘은 제가 물을 말을 먼저 많이 답하시네요.”“계속 물으시게 만드는 것보다는 낫다고 판단했습니다.”그 문장에는 자신이 변했다는 자랑도, 그녀가 걱정해줬다는 의미를 붙잡는 기색도 없었다. 엘리시아는 아주 희미하게 입가를 움직였다가 다시 사건철로 시선을 내렸다.“괜찮은 판단 같습니다.”칼릭스의 눈이 잠깐 멈췄다.그녀는 곧바로 다음 자료를 펼쳤다. “다만 의료정보를 저한테만 보내지 않는 것도 계속 유지하세요.”“법무청과 주치의 기록에도 동시에 보내고 있습니다.”“그럼 됐습니다.”말은 업무적인데, 이상하게 예전과는 다른 종류의 침묵이 뒤에 남았다. 과거에는 엘리시아가 칼릭스의 숨긴 사실을 찾아내기 위해 질문했고, 칼릭스는 들키지 않을 만큼만 말하려 했다. 지금은 그가 먼저 필요한 정보를 같은 경로에 올리고, 엘리시아는 무엇을 받아볼지 선택하고 있었다.그것이 용서도 아니고 신뢰의 회복을 선언하는 일도 아니었다.다만 둘 사이에서 정보를 얻기 위해 누군가를 몰아붙여야 하는 시간이 조금 줄었다.밤이 깊어졌을 무렵, 테사가 7번 갑옷의 마지막 판독층에서 새로운 기록을 찾아냈다.‘다음 착용자를 로스테에서 선발한다’는 문장은 갑옷 자체가 무작위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 최근 누군가 교체 절차를 활성화했고, 그 순간부터 갑주 7번이 로스테의 구형 권한망을 읽기 시작한 것이다.활성 시각은 엘리시아가 로스테에 들어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Read more

285. 갑옷의 길을 끊어야죠

그는 화면을 보자 물잔을 내려놓았다. 얼굴에는 여전히 피로가 남아 있었지만 오전보다 목소리는 안정돼 있었다.“기억난 게 있다고 들었습니다.”“그 사람이 제 손에 판을 대고 나서 ‘안 맞는다’고 했습니다. 그 뒤에 혼잣말처럼 한 말이 하나 더 있었어요.”“정확한 문장이 기억납니까?”“거의요.”에릭은 한참 기억을 되짚은 뒤 천천히 말했다.“시설과는 안 된다. 도시가 믿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랬습니다.”하겐의 얼굴이 화면 한쪽에서 굳었다.엘리시아는 말을 재촉하지 않았다.에릭이 이어 말했다.“그리고 다음 사람 이름을 말했습니다.”법무관이 바로 물었다. “그 이름을 현재 공개하길 원합니까? 먼저 비공개 기록으로 남길 수도 있습니다.”에릭은 잠깐 숨을 골랐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겠습니다. 그 사람도 자기가 후보인지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그 판단은 우리가 대신하지 않겠습니다. 먼저 기록한 뒤 당사자에게 통지하고, 공개 여부는 다시 묻겠습니다.”에릭은 그 조건을 확인한 후 이름을 말했다.법무관의 펜이 멈췄다.엘리시아도 아무 말 없이 화면을 바라봤다.하겐이 가장 먼저 얼굴을 굳혔지만 욕설을 내뱉지는 않았다.상대가 고른 사람은 경비대장도, 테사도, 베른하르트도 아니었다.로스테가 성녀를 받아들일지 처음 투표하던 날, 가장 먼저 “구원자라면 돌아가고 당사자라면 들어오라”고 말했던 사람.북부 방어대의 실무를 맡으면서도 황실과 대신전 어느 쪽의 사람이 아니었고, 주민들이 성벽 문제를 논의할 때 가장 자주 그의 설명을 믿었다.베른하르트 휘하 북부 방어대의 독립 지휘축 가운데 한 사람.미하일도 아니었다.테사도 아니었다.에릭이 들은 이름은 따로 있었다.‘베른하르트의 방어부관, Hagen의 보조권한을 일부 공유하는 북부 수비 실무자 - 그러나 현 시점의 기록상 정확한 대상은 아직 공개 전으로 봉인되었다.’엘리시아는 이름을 그대로 낭독하지 않았다.“당사자에게 먼저 알리세요.”법무관이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사람에게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Read more

286. 빈 갑옷을 먼저 만드는 방식

그 사실은 그의 기억 진술로만 남았다.테사가 검증판을 계속 관측했다.외부 착용자 검색.북부 권한망 응답 없음.황실 옛 회수조망 차단.대신전 구형 표본 운송망 조회.그 지점에서 마티아스가 즉시 대신전 본부에 긴급 차단을 요청했다. 현재 권한으로는 로스테에서 직접 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응답이 오기까지 몇 분이 걸렸다.그리고 그 몇 분 동안 갑주 7번의 판이 먼저 다른 경로를 찾아냈다.‘예비 번호 사용.’북쪽 우편소 저장함에서 발견된 번호 없는 흑철 조각.그 물건과 갑주 7번이 같은 신호로 연결됐다.테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빈 갑주 쪽이 활성화됩니다.”“사람이 있습니까?”“아닙니다. 저장함 안의 금속만 반응합니다.”하지만 번호가 없던 조각에 처음으로 숫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7이 아니었다.기존에 발견한 1, 4, 9, 11도 아니었다.새로운 번호.13.레나르트가 화면을 보자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열두 벌뿐이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하겐이 물었다.“옛 북부 원정대는 그랬습니다.”“그럼 13번은?”레나르트가 대답하지 못했다.테사는 번호 아래 새 문장을 읽었다.기존 흑갑 체계는 열두 역할까지였지만, 내부 후보 확보에 실패하고 기존 번호 회수가 불가능할 경우 새로운 갑주를 만드는 예비 절차가 남아 있었다.그리고 그 절차는 이미 시작됐다.로스테가 주민을 내주지 않자, 시스템은 사람을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대신 빈 번호를 하나 더 만들었다.엘리시아는 화면 속 검은 금속 조각을 오래 바라보다가 천천히 물었다.“13번에 들어갈 사람은 정해졌습니까?”테사가 판독값을 확인했다.“아직 없습니다.”“그럼 무엇부터 찾습니까?”잠시 뒤 새 문장이 나타났다.새 갑주에 필요한 첫 번째 재료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었다.왕핵 잔류.두 번째는 성녀 잔류.세 번째는 지역 지휘 인증.그리고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이 착용자의 신체였다.하지만 그 순서에서 가장 불길한 점은 사람을 맨 마지막에 찾는다는 것이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Read more

287. 중간에서 길을 하나 더 만듭니다

흑갑 13번이 새겨진 금속 조각과 엘리시아가 한때 사용했던 침실 사이의 연결은,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단순하면서도 불쾌한 방식으로 이어져 있었다. 야간 확인석을 떼어낸 뒤 바닥과 벽을 재검사했을 때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가느다란 은선 하나가, 침대가 놓였던 자리에서 벽 안쪽을 타고 숙소 건물의 오래된 난방관까지 연결돼 있었고, 그 선은 성녀의 신성력을 강제로 끌어내는 장치가 아니라 방 안에 남은 잔류를 아주 천천히 긁어 모으는 수집선이었다.사람이 다시 들어오지 않아도 됐다. 엘리시아가 며칠 동안 잠을 자고, 옷을 갈아입고, 성흔 통증 때문에 숨을 고르며 머물렀던 흔적이 방 안 곳곳에 남아 있었고, 관측석은 그것을 실시간으로 읽는 동안 일부를 바닥 아래에 저장했다. 이후 의자를 떼어냈어도 저장층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었으며, 흑갑 13번의 예비 제작 절차가 시작되자 오래된 수집선이 그 잔류를 새로운 갑주 쪽으로 넘기려 한 것이다.엘리시아는 사무실에서 구조도를 읽은 뒤 침실을 폐쇄하겠다는 말부터 하지 않았다. “현재도 빠져나가고 있습니까?”테사는 원격 측정값을 다시 확인했다. “외부 연결은 이미 끊었습니다. 다만 바닥 아래 저장층에 남은 양이 있고, 그걸 제거하려면 바닥 일부를 뜯어야 합니다.”“제 신성력이 지금도 새로 들어가지는 않고요?”“성녀님이 그 방을 사용하지 않은 뒤로 새로운 유입은 없습니다. 기존 잔류만 남아 있습니다.”“그럼 방을 태우거나 건물을 비울 필요는 없겠네요.”하겐은 화면 너머에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성녀님이 다시 들어갈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니겠죠?”엘리시아가 시선을 들었다. “아직 결정하지 않았습니다.”“지금 저 방에서 새 흑갑을 만들 재료를 뽑아갔는데도요?”“그래서 위험조사를 하는 거죠. 위험하다는 이유로 누가 제 거처를 자동으로 정하는 것도 싫고, 반대로 아무도 못 정하게 하겠다고 위험한 방에 일부러 들어가는 것도 싫습니다.”하겐은 잠시 말을 잃었다가 턱을 쓸었다. “요즘 성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Read more

288. 할 수 없는 것과 하지 않겠다는 것의 차이

엘리시아는 그 점이 오히려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만을 노린 음모라면 범인을 찾고 끝낼 수 있다. 그러나 방 자체가 성녀라는 직위를 기다리고 있었다면 다음 성녀, 그다음 성녀에게도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었다.“저 유리판을 증거로 가져옵니까?”“전체를 떼면 저장값이 손상될 수 있습니다. 현재는 바닥 조각과 함께 통째로 옮기는 게 안전합니다.”“그럼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저 방에 새 바닥을 깔 때는 성녀 숙소 규격이라는 이름으로 별도 장치를 넣지 마세요.”로스테 시설관이 어색한 표정으로 물었다. “일반 숙소 규격으로 합니까?”“네. 제가 나중에 다시 쓸지 말지도 아직 결정하지 않았고요.”그 방이 성녀의 방이라는 이유로 특별한 감시와 보호를 덧붙이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엘리시아가 항목별로 선택한다.공사가 끝난 뒤 방의 상태를 확인할 사람도 엘리시아가 아니었다. 로스테 시설기술자와 주민 관찰인, 성녀 측 기록관이 함께 검수했고, 침대나 의자는 아직 들여놓지 않았다.그 대신 제거된 저장층에서 중요한 기록 하나가 나왔다.현 성녀 체류파장을 어느 시설로 보낼 수 있는지 적힌 오래된 목록이었다.성녀선발원.결속 준비위원회.왕핵 북부 안정화망.황실 혼인국 야간실.그리고 마지막에 이름 없는 한 경로가 있었다.‘흑갑 제작.’오스카가 한동안 그 문장을 보다 물었다. “흑갑이 원래 성녀 보호용 장비였습니까?”테사가 오래된 왕핵국 기록을 비교했다. “초기에는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성녀가 장거리 이동할 때 신성력 흔적을 갑옷에 남겨서 마물이나 지맥 반응을 분산시키는 호위 기술로 시작했을 수 있어요.”“그럼 처음부터 나쁜 장치는 아니었다는 뜻입니까?”엘리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처음 목적이 어떻든 지금 기능을 설명해주지는 못합니다.”흑갑은 시간이 지나며 표본을 운반하고, 지역 지휘자의 권한을 회수하고, 사람보다 오래 살아남는 익명 직무가 됐다. 처음에 누군가 성녀를 보호하려고 만들었더라도, 그 사실이 지금 사람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Read more

289. 성녀 보호 명령이라 부르지 마세요

이미 수차례 해온 일이었다.황실이 제공한 방벽 보수재와 원격 왕핵 측정기는 소유권과 지휘권을 이전하지 않는다. 황실 지원을 수락해도 지역 방어명령권은 로스테에 남는다. 성녀 체류를 이유로 지원이 이루어져도 그 지원은 결속·혼인·성녀 보호권의 자동 승인이 아니다.로스테 법무관은 기존 문서들을 모아 하나의 새로운 선언문을 만들려고 했다.엘리시아가 그걸 막았다.“새 서명을 만들지 마세요.”“그럼 흑갑 체계가 읽을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합니다.”“이미 서명한 문서가 있잖아요.”하겐의 시험 때 만든 지휘분리 규정.황실 지원품 수령 조건.성녀 독립 청원.칼릭스의 권한 불행사 이의서.새로운 서명 한 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지 말고, 이미 각각 다른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 문서들을 그대로 대조한다.장치가 하나의 승인서를 요구한다고 해서 사람 쪽에서도 하나의 승인서를 새로 만들어줄 필요는 없었다.테사가 문서값만 연결해 모형으로 돌렸다.결과는 처음에 모순으로 나왔다.황실 지원 존재.지역 지휘권 이전 없음.성녀 체류 존재.성녀 보호권 자동 승인 없음.흑갑 시스템은 그 상태를 이해하지 못하고 세 차례 재검토를 반복했다.네 번째 판정에서 처음으로 다른 문장이 나타났다.‘지역 지휘 인증 불충분.’하겐이 낮게 웃었다. “불충분이면 됐습니다.”그러나 그다음 줄에서 웃음이 사라졌다.‘외부 위기 발생 시 자동 보완 가능.’엘리시아의 손이 멈췄다.“어떤 외부 위기입니까?”테사가 오래된 정의를 열었다.국경 침입.도시 방벽 붕괴.대형 마물 접근.왕핵 본선 단절.그중 하나만 발생해도 황실의 긴급 방어지원 권한이 강해지고, 흑갑은 그 강화된 권한을 지역 지휘 인증으로 가져올 수 있었다.하겐의 얼굴이 굳었다.“그러면 저 갑옷은 흰 뿔의 왕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셈이군요.”이번에는 엘리시아도 그 말을 바로 고치지 못했다.근거가 있었다.흑갑 13번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지역 지휘 인증이 부족하다.하지만 대형 마물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Read more

290. 반대할 권리와 돌아올 이유

‘대기.’그 한 단어만 남았다.엘리시아가 물었다. “얼마나 기다릴 수 있습니까?”테사는 고개를 저었다. “기록이 없습니다.”“외부에서 다시 활성화할 수도 있고요?”“가능합니다.”“그럼 증거로 보존하되 제작선만 계속 차단합니다.”결정이 내려졌다.칼릭스가 화면 너머에서 말했다. “북부 병력을 추가하지 않겠습니다.”엘리시아가 그를 바라봤다.“제가 요청하지 않아서요?”“그것도 있고, 현재 로스테 지휘부가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필요해지면?”“요청이 오면 선택지를 보내겠습니다. 병력 규모와 지휘조건을 같이.”“폐하가 직접 오시는 선택지도 넣으실 겁니까?”칼릭스의 시선이 아주 잠깐 멈췄다.“현재는 넣지 않겠습니다.”“이유는요?”“왕핵의 맛을 구별하는 개체가 있다는 정황이 있고, 제가 이동하면 위험 변수를 하나 더 만드는 셈입니다.”엘리시아는 그의 심장이나 희생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그 역시 ‘그대를 위해 남겠다’고 하지 않았다.황제가 현장에 나서는 것이 항상 책임은 아니다.때로는 가지 않는 것이 더 정확한 선택이었다.“의료기록은 받았습니다.”엘리시아가 먼저 말했다.칼릭스의 눈빛이 미세하게 달라졌다.오늘 기록에는 심박 이상 재발 없음, 오른손 감각 변화 없음, 왕핵 사용 없음, 일정 일부 정상화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확인하셨습니까?”“네.”“질문은 없습니까?”“지금은요.”그가 먼저 말하고 그녀가 매번 캐묻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칼릭스는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화면 옆의 문서로 시선을 옮겼다.“엘리시아.”“네.”“로스테 체류 표결 결과도 받았습니다.”엘리시아의 손가락이 사건철 가장자리에서 잠시 멈췄다.“황실 의견을 보내지 않으셨더군요.”“보낼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일곱 명은 제가 떠나길 원했습니다.”칼릭스의 얼굴에 무언가 스쳤지만, 그는 그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았다.“들었습니다.”“폐하라면 예전에는 어떻게 하셨을 것 같습니까?”질문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Read more
PREV
1
...
2728293031
...
38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