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내 아이를 지운 남자가 내 친구와 결혼한다: Chapter 31 - Chapter 40

159 Chapters

31화. 병실에서 쇼핑한 신부

“내가 수술대에서 아이를 잃는 동안, 넌 보호자 의자에 앉아 돈 받을 궁리부터 했어?”이연희는 모니터에 띄운 두 화면을 번갈아 보았다. 오후 4시 37분. 보험금 청구서가 전산에 접수된 시각과, 한세아가 병실 보호자 의자에 앉아 찍힌 사진의 촬영 시각이 같았다. 정애에게 보냈던 그 사진 속에서 세아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당시에는 딸 곁을 지키다 지친 줄 알았다. 이제 연희의 눈에는 무릎 위에 놓인 검은 태블릿부터 들어왔다.사진에는 연희의 손목을 덮은 담요와 링거대도 찍혀 있었다. 세아는 정애에게 그 사진을 보내며 ‘연희 잠들었어요. 제가 옆에 있으니 걱정 마세요’라고 했다. 정애가 딸에게 달려오려고 택시를 잡던 시간, 병실에서는 보험금 청구가 접수되고 있었다. 눈을 감은 사람은 연희 한 명뿐이었다.확대된 화면 한쪽에 희미한 글자가 걸렸다. ‘신청’. 나머지는 빛에 가려 읽을 수 없었다. 연희는 휴대폰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저 한 글자로 세아가 청구서를 썼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정확히 같은 분, 정확히 같은 병실에서 그 여자는 연희가 아닌 자기 손에 들어올 돈을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었다.“변호사님, 세아가 저 의자에서 뭘 했는지 확인할 방법 없어요?”박도율은 사진을 오래 들여다보았다.“청구 계정의 접속 기록과 제출 기기를 확보하면 좁힐 수 있습니다. 병원에 원본 보전부터 요구하죠. 세아 씨의 당시 통화기록도 적법한 절차로 확보할 수 있도록 보전 필요성을 적겠습니다. 다만 시간 일치만으로 작성자를 확정하지는 맙시다.”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병실에서 깨어나자마자 배를 움켜쥐고 아이를 찾았다. 세아는 그때 침대 옆 의자에서 눈물까지 훔쳐 주었다. ‘연희야, 나라도 정신 차려야지.’ 그 말이 위로인 줄 알았던 자신이 지독하게 싫어졌다.그날 세아가 자신의 이불을 턱 아래까지 끌어올려 주던 손길도 기억났다. 친절하다고 여겼던 동작이었다. 연희는 잠든 사람에게만 베풀 수 있는 친절이 얼마나 편리한지 이제야 알았다.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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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검은 파일의 의뢰인

“웨딩반지보다 먼저 변호사부터 샀어? 한세아, 네 결혼식은 식순보다 입막음 계약이 먼저였니?”이연희는 지급 명세서에 적힌 수임료를 다시 읽었다. 아이의 의료사고 보상금이라는 이름으로 세아에게 건너간 돈이었다. 그 첫 출금처가 예식장도 드레스숍도 아닌 법무법인이라는 사실이 자꾸 목을 조였다. 병실에서 눈을 뜬 자신은 아이의 생사를 묻고 있었는데, 누군가는 그 사건을 막아 줄 사람부터 고용했다.박도율은 금액 옆에 붙은 첨부 영수증을 확대했다. 발행처 아래 작은 글씨로 ‘의료분쟁 특별대응’이 적혀 있었다. 결혼이 파탄 났을 때를 대비한 이혼 상담이 아니었다. 환자와 병원이 다투면 병원 쪽 발표문을 만들고 기록 제출에 대응하던 사무실이었다.“이 변호사, 저도 압니다.”“유명해요?”“환자들한테는 꽤 불편한 이름입니다. 의료사고가 보도될 때마다 병원 대리인으로 나타났거든요. 다만 사건을 맡았다는 사실만으로 은폐에 가담했다고 단정해선 안 됩니다.”연희는 사무실 이름을 소리 내 읽다가 손가락을 멈췄다. 어디서 봤다. 세강의료재단 홍보팀에서 일하던 때, 의료분쟁 기사가 나면 최혜경의 비서실에서 검은 표지의 대응 파일을 보내왔다. ‘환자 감정 호소에 대응하지 말 것.’ ‘행정 착오라는 표현으로 통일.’ 직접 원고를 고치던 연희는 그 밑에 찍힌 자문 기관을 떠올렸다.“이사장님이 쓰던 데예요. 예전에도요.”오래된 업무 백업에서 당시 자신이 작성한 보도 대응 초안을 찾아냈다. 환자의 이름은 들어 있지 않았지만 결재 의견란에는 ‘최혜경 이사장실 검토’, 외부 검토란에는 방금 영수증에서 본 법무법인 이름이 나란히 남아 있었다. 서로 다른 사건의 오래된 자료였다. 세아가 선임한 변호사의 사무실을 혜경이 수년 전부터 이용했다는 연결고리였다.“아이고, 며느리 면접도 이 집안은 로펌에서 보나 봐. 혼수 일등 공신이 변호사라니.”연희가 웃었지만 종이를 넘기는 손은 느려졌다. 그 시절 자신은 환자의 주장을 ‘일방적 문제 제기’로 바꾸라는 지시를 받았다. 누구의 사연인지 몰라 문장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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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임신 전의 덫

“내가 임신했다고 말하기도 전에 변호사를 샀다고? 한세아, 넌 남자 뺏을 날짜보다 내 입 막을 날짜를 먼저 잡았니?”이연희는 검은 수임계약서의 날짜에 손가락을 댄 채 박도율을 올려다봤다. 최무겸이 아빠가 된다며 아기 신발을 고르던 날보다 한참 앞선 날짜였다. 그때 연희는 생리가 늦어진 이유도 모르고 편의점 커피를 끊을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세아는 이미 의료분쟁 전문 변호사와 계약을 맺었다. 우연이라 하기에는 계약 목적이 기이했고, 우연이 아니라면 누군가 연희의 몸보다 앞서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계약이 먼저였다는 건 확인됩니다. 하지만 임신을 미리 알았다는 증거는 아니에요.”도율이 날짜를 따로 저장하며 덧붙였다.“세아 씨가 어떤 정보를 언제 입수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 전후 연락을 시간순으로 복원해 보죠.”연희는 자신의 옛 메신저를 열었다. 세아와 주고받은 대화는 일기처럼 길었다. 출근길 버스가 늦었다는 투정부터 무겸이 웃으며 건넨 사탕 포장지 사진까지, 연희는 거의 모든 일을 세아에게 떠들었다. 믿었던 친구에게 숨길 게 없다는 사실이 한때는 행복했다. 이제 그 긴 대화 목록이 자신을 겨눈 감시 기록처럼 보였다.계약일 석 달 전, 연희는 세아에게 ‘금요일은 무겸이랑 저녁. 끝나고 우리 집에서 잘 듯’이라고 보냈다. 두 시간 뒤 무겸에게서 ‘금요일 회식 취소됐어. 네 집으로 바로 갈게’라는 메시지가 왔다. 같은 달에는 연희가 세아에게만 회사 뒷문으로 퇴근한다고 했는데, 무겸이 꽃다발을 들고 그 문 앞에 나타났다. 사랑에 빠졌을 때는 대단한 우연이라 여겼던 일들이었다.그 무렵 세아는 밤마다 연애 상황을 물었다. 무겸과 싸우면 누가 먼저 사과했는지, 며칠이나 만나지 않았는지까지 캐물었다. 연희가 답장을 늦게 하면 ‘야, 내가 네 연애 코치까지 해 줘야 해?’라며 삐쳤고, 연희는 미안하다며 대화 내용을 길게 털어놓았다. 다음 날 무겸은 전날 세아에게만 말했던 불만을 먼저 꺼내며 달랬다. 연희는 그때마다 운명처럼 마음이 통한다고 믿었다.“이 사람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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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친구가 판 내 일정

“내 산부인과 예약 문자까지 네 사진첩에 있다고? 한세아, 넌 내 친구가 아니라 내 휴대폰에 붙어 있던 도둑이었어?”이연희는 공유 앨범 첫 사진을 확대했다. 낯익은 산부인과 로고, 진료 예약 시각, 자기 이름. 임신 사실을 알기 전 생리가 불규칙해 검사를 예약했던 날이었다. 연희는 일정을 잊을까 봐 문자를 캡처해 뒀을 뿐, 세아에게 보낸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사진은 세아가 만든 ‘비밀’ 폴더 맨 앞에 박혀 있었다. 사랑하는 친구가 자기 몸보다 먼저 진료실 문 앞에 도착해 있었던 셈이었다.“이 사진, 제 휴대폰에만 있던 거예요.”박도율은 화면을 들여다보다 앨범 관리 메뉴를 가리켰다. 연희의 휴대폰에서 촬영한 사진이 특정 계정으로 자동 동기화되고 있었다. 연희는 대학 시절 세아가 여행 사진을 한데 모으자며 만들어 준 계정을 떠올렸다. 세아는 당시 ‘귀찮게 사진 보내지 말고 이것만 눌러. 내가 다 해 줄게’라며 연희의 휴대폰을 가져갔다. 편하다는 이유로 그 설정을 지우지 않았다.동기화 항목은 사진뿐 아니라 일정 백업에도 체크돼 있었다. 연희가 병원 예약 시간을 캘린더에 적거나 무겸과 만날 장소를 저장하면 같은 계정의 연결 기기에서 볼 수 있는 구조였다. 화면에 줄지어 나타난 항목 중에는 회사 사람들을 피해 무겸과 만나기로 했던 호텔의 예약 시간도 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둘만의 약속이라고 믿었던 밤이었다.연희는 달력에 자신이 그려 넣은 분홍 별표를 보았다. 무겸이 아이가 생기면 닮고 싶은 사람은 연희라고 말했던 저녁이었다. 그 말을 듣고 한참 웃다가 잠들기 전까지 별표를 지우지 못했다. 바로 다음 날 세아는 별안간 “너무 행복한 척하지 마. 보기 재수 없으니까”라며 농담했다. 이제 와 떠올리니 그 농담이 꼭 남의 일기장을 훑어본 사람의 대답처럼 들렸다.“미쳤네. 내 남자랑 몇 시에 어디서 만나는지도 구경했어?”그날 무겸은 로비에 먼저 도착해 연희가 좋아하는 꽃을 들고 있었다. ‘우리 사이 들키면 회사에서 난리 나잖아. 그래서 내가 먼저 와 있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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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이사장 비서의 가격표

“최혜경 비서실에서 내 산부인과 예약까지 들여다봤어? 한세아, 너 내 친구가 아니라 재단 첩자였니?”이연희는 접속 기록의 기기명을 다시 읽었다. 세아의 휴대폰이 연희의 일정에 접근한 직후, 같은 공유 앨범에 재단 비서실 이름을 단 기기가 접속했다. 임신을 알기도 전의 일이었다. 도율은 기기명만으로 사용자를 특정할 수 없다며 로그를 보존했지만, 연희의 속은 뒤집혀 있었다. 연애를 시작한 날부터 누군가는 사랑이 아니라 보고서를 쓰고 있었다. 연희가 무겸과 첫 여행을 떠나던 새벽, 세아는 여행가방 앞에서 사진을 찍어 주며 놀렸다. “야, 신혼여행도 아닌데 뭘 그렇게 떨고 있어?” 그 휴대폰이 숙소와 귀가 시각까지 남에게 보여 줬을지 몰랐다.“이 정도면 이사장한테 팔아먹은 거 아니에요?”“정보가 넘어간 정황은 있습니다. 대가가 오갔는지는 별도 자료가 필요해요.”연희는 세아가 보내 온 결혼 비용 명세표를 다시 펼쳤다. 보험계정에서 넘어온 돈과 법률자문료만 살폈던 탓에, 맨 뒤쪽 ‘과거 지원 내역’ 첨부는 지나쳤다. 세아는 결혼 비용이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자랑하려고 지원금까지 줄줄이 묶어 보냈다. 몇 장의 은행 알림 캡처에 똑같은 문구가 반복됐다.‘입금자 세강의료재단 이사장 비서실. 적요 가족 지원비.’첫 입금일은 연희가 세아에게 무겸과의 첫 여행 날짜를 털어놓은 다음 날이었다. 또 다른 입금은 산부인과 예약 문자가 공유된 주간에 찍혀 있었다. 지급 내역 옆에는 월세, 생활비라는 세아의 손글씨가 있었다. 세아가 제 손으로 보내 온 계좌 자료였다. 누가 지급을 승인했는지는 아직 몰랐다. 연희는 지급일과 앨범 열람일을 다른 색으로 칠했다. 겹치는 날이 늘어날수록 세아의 ‘그냥 지원받았다’는 변명은 가벼워졌다.“가족 지원비? 남의 사생활 팔아 놓고 가족이라 부르면 세금도 덜 내나?”도율은 지급 날짜와 정보 열람 날짜를 나란히 적었다. 대가 관계를 단정하기 전에 지급 주체와 근거를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연희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매달 돈을 받은 친구가 자신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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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가해자인 척 피해자

“네 아버지가 의료사고 냈으니까, 내 아이도 없애도 됐다는 거야?”한세아가 던진 검은 서류철이 이연희의 찻잔을 쳤다. 커피가 테이블 위로 번졌지만 세아는 닦을 생각도 없이 손톱으로 첫 장을 두드렸다. ‘세강병원 의료사고 내부 조사보고서.’ 그 아래 책임자란에는 세아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연희는 그 이름을 오래 바라봤다. 복숭아를 얻어 가던 날마다 허리를 굽혀 인사하던 남자였다.“이게 네 아버지 이름이잖아.”“그래. 우리 아빠가 사고 냈어. 됐냐?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진실이야.”서류에는 오래전 수술 뒤 회복 중이던 환자에게 잘못된 처치가 이뤄졌고, 현장 확인을 맡은 세아의 아버지가 필수 절차를 건너뛰었다고 적혀 있었다. 환자에게 중대한 손상이 남았지만 대외 보고는 보류됐고, 징계도 유예됐다. 뒤쪽 결재란에는 최혜경의 이름과 ‘외부 유출 엄금’이라는 지시가 붙어 있었다.연희는 종이를 넘기다 멈췄다. 혜경은 단순히 사정을 봐준 사람이 아니었다. 사고를 덮는 결재에 직접 이름을 남겼다. 그 기록은 세아 집안의 목줄이 됐다.보고서에는 환자의 항의와 병원 답변 초안이 붙어 있었다. 사고 원인을 밝히라는 요구는 ‘내부 조사로 종결’이라는 문장으로 바뀌었고, 책임자 면담 요청에는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연희가 홍보팀에서 수도 없이 보던 삭제 방식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지운 문장 아래에 실제로 다친 사람이 있었다.“그래서? 이사장이 아버지 약점으로 널 협박했어?”“처음엔 그냥 연락만 하래. 네가 무겸 오빠랑 어디 가는지, 언제 병원에 가는지. 별것도 아닌 거잖아. 친구가 친구 일정 좀 알려 주는 게 뭐라고.”세아는 웃어 보이려다 실패했다. 입술 끝에 묻은 립스틱이 찻잔 가장자리에 번졌다.“그러다 네가 임신했잖아. 이사장이 그때 아빠 사건 다시 꺼내더라. 말 안 들으면 사고 조사 다시 열고 아빠 이름 세상에 까겠대. 아빠는 그때부터 제대로 잠도 못 잤어. 넌 내가 어떻게 해야 했을 것 같아?”세아는 휴대폰에서 오래된 메시지 하나를 열어 보였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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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변호사도 숨겼어?

“박도율 변호사님, 당신 여동생을 다치게 한 병원이 세강이라고요? 그런데 왜 내 옆에 앉아서 처음 듣는 척했어요?”이연희는 카페 유리문을 밀고 나오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한세아가 던진 조사보고서에는 사고 피해자의 보호자로 박도율이 적혀 있었다. 몇 달 동안 자신의 수술 기록을 함께 뒤지던 남자였다. 병원에서 전화 한 통만 와도 먼저 날짜부터 적으라고 했고, 연희가 울음을 삼키면 물컵을 밀어 주던 사람. 그런데 그가 읽던 서류 어딘가에는 처음부터 자기 가족의 이름도 있었다.수화기 너머에서 종이 넘기던 소리가 멎었다.“어디서 그 기록을 보셨습니까?”“대답부터 해요. 내가 당신 사건 자료 수집해 주는 여자였어요?”도율은 부인하지 않았다. 대신 만나서 설명하겠다며 사무실 주소를 보냈다. 연희는 택시를 타지 않고 한 정거장을 걸었다. 화가 나서라도 몸을 움직여야 했다. 세아는 가족이라고 부르며 사생활을 팔았고, 무겸은 사랑한다며 아이를 지웠다. 도율마저 다른 목적을 숨겼다면, 자신은 또 누군가의 복수에 필요한 증인으로만 쓰인 셈이었다.사무실에 들어서자 도율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책상 위에는 검은 파일과 얇은 서류 봉투가 놓여 있었다. 그는 앉으라는 말 대신 먼저 고개를 숙였다.“제 여동생이 그 사고의 피해자입니다. 그리고 저는 세강의료재단 장학금을 받았습니다.”연희가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어금니 사이로 새어 나온 숨에 가까웠다.“아주 집안 잔치네요. 신랑은 재단 아들, 신부는 재단 돈 받고, 변호사님은 재단 장학생. 나만 회비 안 낸 손님이었네.”“장학금은 제가 법학을 공부하던 시절 받았습니다. 동생 사고와 별개의 시기입니다. 하지만 재단과 이해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처음 상담할 때 밝혔어야 했습니다.”“왜 안 밝혔어요? 내가 변호사님 불쌍한 여동생 사연 들으면 계약 안 할까 봐?”도율은 연희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책상 한쪽에는 연희가 처음 가져왔던 낡은 약봉투가 투명 파일째 정리돼 있었다. 세심한 변호사의 책상이라고 믿었던 곳이다. 이제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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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수술실 앞의 남자

“최무겸이 왜 당신 여동생 수술실에 있었어요? 그날도 누굴 ‘처리 완료’ 하러 갔대요?”이연희는 낡은 출입기록을 책상에 펼쳤다. 방문자 성명 아래 찍힌 최무겸의 세 글자 때문에 종이가 구겨질 만큼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도율의 여동생이 다쳤던 날이었다. 세아의 아버지가 사고를 내고 최혜경이 덮었다는 바로 그 사건. 그런데 그 수술실 출입 명부에 무겸의 이름까지 있었다. 남의 비극들이 하나의 병원 복도에서 서로를 스치고 있었다.박도율은 종이의 오른쪽 끝을 조심히 폈다.“이 기록을 확보했을 때부터 의문이었습니다. 다만 이름이 적혔다고 수술에 관여했다고 단정할 순 없어요. 제 동생 사건과 연희 씨 사건을 섞어서 몰아갈 생각도 없습니다.”“그럼 왜 숨겼어요? 내가 최무겸한테 직접 묻게 될까 봐?”“네. 그리고 제가 먼저 물으면 제 감정부터 앞설까 봐요.”연희는 사임 의사가 적힌 봉투를 내려다봤다. 도율을 계속 믿을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록의 날짜를 확인하는 데까지 그의 허락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도율의 손등에는 오래된 종이를 몇 번이나 펼쳤는지 모를 잔주름이 잡혀 있었다. 동생의 이름이 나온 서류를 그가 얼마나 들여다봤을지 짐작은 됐다. 그렇다고 연희가 대신 이해해 줄 이유는 없었다. 그가 말하지 않은 과거가 연희의 선택에 영향을 줬으니까. 그녀는 수술실 출입시각을 적어 놓고 휴대폰을 집었다.무겸은 두 번 만에 전화를 받았다. 뒤에서는 컵 부딪치는 소리와 세아의 웃음이 들렸다. 망가진 결혼식을 치르고도 둘은 식사할 여유가 있는 모양이었다.“연희야, 또 돈 얘기면 변호사 통해. 난 너랑 감정싸움 안 해.”“돈 말고 사람 얘기야. 도율 씨 여동생 수술받던 날, 세강병원 갔어?”잠깐 침묵이 흘렀다. 무겸이 물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가까워졌다.“그날 나 지방 출장 중이었어. 일정표도 사진도 다 있어. 그런 사고에 나까지 엮지 마.”“어느 지방? 몇 시까지?”“네가 감사팀이야? 연희야, 헤어진 남자 일정 캐는 버릇 좀 고쳐.”세아가 전화를 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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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잠깐 말렸다고?

“수술 중단 요청? 최무겸, 너 사람 살리는 흉내도 냈어? 그런데 왜 환자는 다쳤는데?”이연희는 오래된 출입기록의 마지막 칸을 손톱으로 눌렀다. 박도율의 여동생이 수술받던 날, 병원 출입카드를 찍은 방문자가 최무겸이었다. 출입 목적에는 분명히 ‘수술 중단 요청’이라고 적혀 있었다. 지방 출장 중이었다던 무겸의 말과 정면으로 어긋났다. 연희는 종이를 뒤집어 뒷면까지 살폈다. 한번 멈추라는 말을 했다면, 그다음엔 어떻게 됐는지가 남아 있어야 했다.도율은 같은 사건의 경과표를 펼쳤다. 중단 요청 시각에서 불과 7분 뒤, 이사장실 지시를 확인했다는 메모가 있었다. 이어 ‘행정상 이의 철회’. 수술을 중단한 기록은 없었다. 경과표에는 환자 상태가 악화됐다는 보고만 남았다. 누가 어떤 설명을 듣고 요청을 철회했는지는 없었다. 도율은 주먹을 쥔 채 종이를 바라봤다. 연희는 그에게도 자신에게도 왜 멈추지 않았느냐는 질문이 남았다고 생각했다.“이건 제 동생 사건입니다. 연희 씨 수술과 섞으면 안 됩니다.”“알아요. 대신 패턴은 보이네요. 잠깐 말렸다가 엄마가 부르면 돌아서는 거.”연희는 무겸의 출장 사진 원본을 다시 확인했다. 촬영 날짜는 사고 다음 날. 그는 그날 현장에 없었다는 증거로 이 사진을 내밀었지만, 정작 자신의 카드가 병원에 찍힌 기록은 설명하지 못했다. 연희는 사진과 출입대장을 나란히 캡처해 무겸에게 보냈다.‘출장 사진은 다음 날 찍혔네. 네 카드가 병원에 들어간 날엔 무슨 구경 했어?’십 분 뒤 무겸에게 전화가 걸렸다. 연희가 받자마자 그가 쏘아붙였다.“너 도대체 남의 가족 사고까지 어디서 캐고 다녀? 그 일은 내가 책임질 일이 아니야.”“그럼 왜 중단해 달라고 했어? 구경하다 심심해서?”“위험하다는 말을 들으니까 멈추라고 했지. 하지만 어머니가 의료진 판단에 끼어들지 말라고 하셨어. 나는 의사도 아니고, 그분이 병원 책임자였어.”연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픈 사람 앞에서 잠시 착한 일을 하려다 윗사람 말 한마디에 손을 뗀 것이다. 그건 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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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신부는 이미 임신 중

“내 아이를 지운 결재 서류 이름이 ‘신부’라고? 최무겸, 넌 애를 지운 게 아니라 결혼식부터 준비했니?”이연희는 모니터에 뜬 BRIDE_01을 노려봤다. 전략기획실장 최무겸의 승인 표시 옆에 찍힌 그 코드는 예전에 홍보실 백업에서 발견한 관리 목록과 같았다. 누가 임신하고 누가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됐는지를 ‘대외 위험’으로 분류하던 서류였다. 무겸은 잠깐 반대했다고 변명했지만, 끝에서 도장을 찍은 사람도 그였다.그때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포털의 속보 알림이었다.‘결혼식 파행 겪은 세강재단 전략기획실장 최무겸, 신부 한세아 임신 발표.’연희는 제목을 두 번 읽었다. 기사는 세아가 임신 20주째이며, 두 사람이 태어날 아이를 위해 조용히 시간을 보내겠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예식장에서 신부가 ‘그깟 애’라며 연희의 아이를 욕한 영상은 여전히 퍼지고 있었는데, 재단은 새 생명의 축복이라는 보도자료를 먼저 돌린 모양이었다.“와, 축하할 아이는 따로 있었네.”연희의 수술은 약 13주 전이었다. 임신 주수만으로 정확한 수정 날짜를 못 박을 수는 없었지만, 세아의 임신은 연희가 아직 무겸의 아이를 지키려고 애원하던 시기와 겹쳤다. 연희는 기사에 실린 두 사람의 여행 사진을 확대했다. 무겸이 연희에게 ‘일이 바빠 밤샘 회의한다’고 했던 날, 같은 장소에서 세아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었다. 창밖의 계절 장식까지 일치했다.연희는 웃음을 터뜨렸다가 입을 막았다. 비명이 되기 직전의 웃음이었다. 세아가 첫 초음파 사진을 빼앗아 웨딩드레스 주머니에 넣었던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았다. 남의 아이 사진은 쓰레기라면서, 자기 아이의 사진은 축복 기사에 실었다. 두 사진을 고른 손이 같은 손이었다.기사에는 ‘세강가의 새로운 축복’이라는 표현까지 붙었다. 연희는 그 문장을 수술 당시 무겸이 했던 말 옆에 적었다. ‘우리 집안 아이를 아무렇게나 낳을 순 없다.’ 그때는 자기 아이가 축복받을 자격이 없다는 뜻인지 몰랐다. 연희가 화난 건 세아의 임신 때문이 아니었다. 한 아이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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