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내 아이를 지운 남자가 내 친구와 결혼한다: Chapter 31 - Chapter 40

56 Chapters

제31화. 같은 날의 두 여자

“그날은 네 보호자로 간 게 아니야.”연희가 휴대전화를 내리지 않았다.“그럼 환자로 갔어?”“내 진료였어.”“무슨 진료.”“그것까지 네가 알아야 해?”세아는 웨딩드레스 자락을 걷어 쥐었다.출구로 향하려는 순간, 연희가 다시 물었다.“진료기록 보여줘.”“싫어.”“내 수술 날 같은 산부인과에 있었는데도?”도율이 세아를 봤다.“본인이 동의하지 않으면 바로 확인하기 어렵습니다.”“동의 안 할게요.”세아의 대답은 빨랐다.“내 진료는 연희와 상관없으니까.”연희가 CCTV 캡처를 확대했다.세아가 든 봉투 위로 산부인과 2진료실이라는 글자가 보였다.번호표는 벽면 호출 화면과 일치했다.“같은 날, 같은 병원, 같은 진료과인데 상관없다고?”“우연이야.”“내 수술 날짜도 몰랐어?”세아의 시선이 흔들렸다.“병원에 도착하고 알았어.”“누가 알려줬는데? 무겸이야, 혜경이야?”대답은 나오지 않았다.“내 보호자 연락처는 네 번호로 들어가 있었어.그런데 넌 내 옆이 아니라 진료실 앞에서 네 번호표를 들고 있었고.”“내 진료였다고 했잖아.”“그럼 설명해. 왜 하필 그날이었는지.”재문이 다가가려 하자 정애가 팔을 붙잡았다.“연희가 묻게 둬.”도율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예식 준비 공유폴더의 활동 내역이 다시 갱신됐다.앞서 사진을 올린 임시 계정이었다.1017_카드승인내역.pdf도율이 즉시 파일을 내려받았다.“원본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우선 내용부터 보겠습니다.”승인 내역은 2건이었다.10월 17일 오후 2시 31분.세강병원 본관 카페.8,600원.10월 17일 오후 4시 18분.세강약국.37,400원.카드 명의자는 한세아였다.승인번호와 가맹점 번호도 함께 찍혀 있었다.“누가 만든 건지도 모르잖아요.”세아가 도율의 화면을 노려봤다.“당장 지워요.”“진위는 카드사 기록으로 확인하겠습니다.”도율이 답하는 사이 파일이 공유폴더에서 사라졌다.그는 이미 내려받은 사본과 활동 화면을 저장한 뒤였다.“업로드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Read more

제32화. 약 봉투의 주인

“네가 먹었어.”세아의 대답이 떨어졌다.연희는 휴대전화를 내리지 않았다.“누가 줬는데?”“병원에서 주라고 해서 건넨 것뿐이야.”“네 이름으로 처방된 약을?”“접수 과정에서 이름이 잘못 들어간 거겠지. 난 봉투도 안 열어봤어.”“누가 나한테 주라고 했어?”“간호사.”“이름은?”“7년 전 일이야. 정확히 기억 안 나.”“그런데 내가 먹었다는 건 기억하네.”세아의 시선이 흔들렸다.연희가 한 걸음 다가갔다.“무슨 약이었어?”“모른다고 했잖아.”“진료기록은 못 보여줘. 약 이름도 몰라.그런데 내 약이었다는 건 확실하고.”“내가 처방한 것도 아니야.”“대신 받아서 건넨 건 너야.”세아가 웨딩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그때는 너를 도우려고 했어.”“내 아이를 없애는 걸?”도율이 세아에게 말했다.“약국 조제 내역과 당시 투약기록을 대조하겠습니다.”“마음대로 해요.”세아가 출구로 향했다.“대신 내 진료기록에 손대면 바로 고소할 거예요.”연희는 붙잡지 않았다.“가.”세아의 걸음이 멎었다.“이번에는 네가 도망가도 기록은 남을 테니까.”다음 날 오전 10시.도율은 연희와 함께 정애가 보관 중이라는 병원 서류를 확인하러 고향집으로 갔다.정애는 찬장 가장 위에서 낡은 비닐봉투를 꺼냈다.안에는 진료 안내문과 약 봉투, 빈 포장지가 따로 담겨 있었다.“왜 이것까지 보관했어?”“네가 무슨 약을 먹었는지도 기억 못 했잖아.”정애가 구겨진 약 봉투를 펼쳤다.“혹시 몰라서 빈 포장지도 안 버렸어.”봉투 앞면의 글씨는 번져 있었지만 이름은 읽혔다.환자명 한세아.조제일 10월 17일.도율이 전날 받은 영수증 사진과 조제번호를 대조했다.“같은 처방입니다.”처방 시각은 오후 3시 56분이었다.처방 진료과는 세아가 기다리던 산부인과 2진료실이었다.빈 포장지에는 약품명이 남아 있었다.진정제 1정.항생제 2캡슐.연희의 기억 속에서 흰 종이컵이 떠올랐다.수술실로 들어가기 전 간호사가 건넨 물.‘긴장 풀어주는 약이에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Read more

제33화. 친구의 보험금

연희의 아이값은 7년 뒤 세아의 결혼식 비용이 됐다.예식 준비 공유폴더에 또 파일이 올라왔다.1106_보험금지급계좌_거래내역.pdf도율이 파일을 내려받았다.“앞서 자료를 올린 임시 계정입니다. 실제 금융거래 기록과 대조해야 합니다.”보험금 4,800만원은 지급 다음 날 한세아 명의의 다른 계좌로 전액 이체됐다.그 뒤 7년 동안 잔액은 그대로였다.출금이 시작된 건 6개월 전이었다.세강웨딩홀 12,000,000원.라비앙드레스 8,500,000원.다온리빙 혼수가전 18,000,000원.남은 돈도 예물과 가구업체로 빠져나갔다.정애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전부 어제 그 결혼식 준비잖아.”연희는 거래내역을 세아에게 보냈다.[ 내 이름으로 받은 4,800만원.네 결혼식에 쓴 거 맞아? ]읽음 표시가 뜨자마자 답장이 왔다.[ 문 열어. ]초인종이 울렸다.재문이 현관문을 열자 세아가 서 있었다.검은 코트 아래로 전날 입었던 드레스의 흰 자락이 보였다.머리에도 핀 하나가 남아 있었다.연희는 식탁 맞은편을 가리켰다.“들어와.”세아는 앉지 않았다.노트북 화면을 본 뒤 먼저 입을 열었다.“돈 쓴 건 맞아.”정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우리 애 이름으로 받은 돈을 네 결혼식에 썼다고?”“제가 갖고 싶어서 받은 돈 아니에요.”“받은 다음 날 숨겨놓고 7년 뒤에 썼잖아.”“안 쓰면 우리 아빠가 끝난다고 했어요.”연희가 물었다.“누가 시켰어?”세아는 입을 다물었다.“무겸도 이 돈인 걸 알았어?”“걔는 내가 모아둔 돈인 줄 알았어.”“7년 동안 손도 안 댄 4,800만원을?”“그걸 왜 무겸한테 설명해야 해?”“내 아이를 지운 대가였으니까.”세아의 얼굴이 굳었다.연희는 위조된 보험금 위임장을 식탁 위로 밀었다.“내 서명까지 훔쳐서 받은 돈이야.”“내가 서명한 거 아니야.”“그럼 누가 했는데?”“몰라.”“돈은 받았고, 서명한 사람은 모르고, 쓰라는 사람도 말 못 해.”연희가 세아를 바라봤다.“너는 모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Read more

제34화. 지워진 아이의 이름

“죽은 아이 이름을 왜 지웠어?”연희의 질문에 세아가 오래된 휴대전화를 뒤집었다.“우리 아빠를 살리려고.”“누가?”“세강재단.”도율이 손을 내밀었다.“영상과 함께 온 자료가 더 있습니까?”세아는 숨겨진 폴더를 열었다.사진 6장.음성 파일 사본 2개.내부조사서 사본 1개.“아빠가 무슨 짓을 했는지 똑똑히 보라면서 보낸 거야. 원본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다고 했어.”문서 이름은 신생아_투약사고_내부조사서_원본.docx였다.담당의 한진석.사고 원인 투약량 확인 오류.실제 투약량 정상치의 10배.정애가 화면을 붙들었다.“10배나 넣고 실수라고 했어?”“아빠가 용량을 잘못 확인했어요.경보가 울린 뒤 바로 처치했지만 아이는 그날 죽었고요.”도율이 사고 날짜를 확인한 순간 화면을 넘기던 손을 멈췄다.연희가 그를 봤지만 도율은 곧 다음 문서를 열었다.“그런데 왜 네 아버지는 처벌받지 않았어?”세아가 첫 번째 음성 파일을 재생했다.‘전산 투약기록은 삭제합니다. 내부조사서는 법무실에서 관리하죠.’종이 넘기는 소리가 이어졌다.‘사망 원인은 선천성 심장질환으로 정리합니다. 보호자에게 원본 기록은 공개하지 마십시오.’‘한진석 과장은 오늘부로 사직 처리합니다. 이 건은 외부에 보고하지 않겠습니다.’다른 남자의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시키는 건 다 하겠습니다. 가족만은 건드리지 마십시오.’세아가 재생을 멈췄다.“우리 아빠 목소리야.”연희가 내부조사서를 내려다봤다.“사고를 덮어준 날부터 병원 손아귀에 들어간 거네.”도율이 다음 사진을 열었다.사고 다음 날, 세강병원 법무실.한진석이 각서에 서명하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혜경과 병원장이 앉아 있었다.의료과실 인정 금지.외부 진술 금지.재단 요청 시 사실확인 협조.지시 불이행 시 사고 영상 공개.각서 마지막 장에는 세강재단 법인 인감이 찍혀 있었다.재문이 식탁을 내리쳤다.“그래서 연희 수술 때 네가 들어온 거냐?”“수술 전날 연락이 왔어요.”“누구한테.”“혜경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Read more

제35화. 당신도 나를 증거로 썼어요?

“나한테 숨겼어요?”연희가 도율의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아니, 내 사건을 당신 여동생 사건의 열쇠로 쓴 거예요?”화면에는 세강병원이 발급한 사망진단서가 떠 있었다.박수인.사망 시각 오전 3시 42분.보호자 연락처 끝 번호 2719.“처음 만났을 때부터 한진석이 당신 여동생 담당의였다는 걸 알았죠?”도율은 휴대전화를 돌려받지 않았다.“알고 있었습니다.”“과다 투약도요?”“의심했습니다.”연희가 내부조사서를 들어 보였다.“검은 도형을 한 번에 벗기고, 진단서도 바로 찾았는데 의심뿐이었다고요?”“병원은 심장질환이라고 발표했습니다.투약기록은 사라졌고, 담당자들은 진술을 거부했습니다.”“그래서 한진석 딸이 관련된 내 사건을 맡았어요?”“처음에는 그 연결을 확인하려고 맡았습니다.”연희의 손에서 문서가 구겨졌다.“나는 의뢰인이 아니라 열쇠였네요.”“처음에는 그랬습니다.”정애가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처음에는?”“엄마.”연희가 정애를 막았다.“끝까지 들을게.”그녀는 세아의 보호자 확인서와 박수인의 사망진단서를 나란히 놓았다.“세아는 아버지 영상을 막으려고 내 아이를 내줬어요.”세아가 고개를 숙였다.“당신은 여동생 기록을 찾으려고 내 사건을 열었고요.”“이용한 책임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책임이라는 말로 문장 끝내지 마요. 언제 말할 생각이었어요?”“한진석의 과실을 입증한 뒤에요.”“입증이 안 됐으면?”도율은 연희를 바라봤다.“말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무겸도 그랬어요. 내가 알아야 할 사실을 자기가 고른 날에만 말했죠.”“비교하셔도 됩니다.”“그 말도 편하네요. 판단할 재료를 숨긴 사람이 판단은 나한테 넘기니까.”“제가 틀렸습니다.”“아니요. 틀린 게 아니라 골랐어요.”연희가 두 서류를 차례로 눌렀다.“여동생 진실과 내 신뢰 사이에서, 당신은 진실을 골랐어요.”“그렇습니다.”“그런데 왜 나한테는 선택권을 준다고 했어요?”도율은 답하지 못했다.“내가 세아를 고소하면 당신은 누구 변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8
Read more

제36화. 남을 자르기 전에 당신부터 자르지 마요

“내가 당신 이름까지 지울지, 내일 결정할게요.”도율은 연희가 접은 사임서를 바라봤다.“시간을 드린다고 달라질 문제는 아닙니다.”“누구한테 시간을 준대요?”연희가 사임서를 다시 펼쳤다.박도율의 서명 아래, 의뢰인 확인란만 비어 있었다.“당신은 나한테 사실을 숨겼고, 들킨 뒤에는 사임을 결정했어요.”“제가 물러나야 사건이 공격받지 않습니다.”“그 판단도 당신 혼자 했죠.”도율의 손이 서류 위에서 멈췄다.“무겸은 내 수술이 최선이라고 정했고, 세아는 내가 판단할 상태가 아니라고 정했어요.”연희가 빈 확인란을 손톱으로 눌렀다.“당신은 나한테 알리지 않는 게 사건을 위한 일이라고 정했고요.”“세 사람을 같다고 보셔도 할 말 없습니다.”“또 내 판단 뒤에 숨네요.”연희는 사임서를 반으로 접었다.종이가 찢어질 듯 꺾였지만 끝내 갈라지지 않았다.“다른 점이 있다면 당신 입으로 설명해요.”“저는 연희 씨에게 수술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대신 내 사건을 당신 복수에 쓸 수 있게 만들었죠.”“맞습니다.”“내가 진실을 알면 당신을 자를까 봐 숨겼고요.”“그렇습니다.”“그럼 이제 내가 결정할 차례네요.”연희가 사임서를 도율 쪽으로 밀었다.“안 찢어요.”정애가 연희를 돌아봤다.“그 사람을 계속 쓰겠다는 거니?”“사람을 믿는 게 아니야.”연희는 내부조사서와 박수인의 사망진단서를 나란히 놓았다.“두 아이가 같은 병원에서 같은 방식으로 지워졌는지 확인하는 거야.”세아가 입술을 깨물었다.“우리 아빠를 잡으려고 나까지 이용하겠다는 거네.”“네가 이용당했다는 말로 네가 한 일을 덮진 않을 거야.”연희가 세아의 휴대전화를 가리켰다.“하지만 혜경이 네 아버지 영상을 쥐고 너를 부렸다면, 그 협박도 기록할 거야.”“왜?”“네 죄와 병원 죄를 섞으면 둘 다 빠져나가니까.”세아는 더 묻지 못했다.연희가 빈 종이를 꺼내 네 줄을 적었다.도율의 여동생 사건과 연희 사건을 분리할 것.새로운 자료는 판단 전에 의뢰인에게 공개할 것.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8
Read more

제37화. 죽은 서버에 아빠 이름이 박혔다

“죽었다던 원본 서버가 살아 있습니다.”도율이 보험 명세서를 연희 앞으로 돌렸다.폐기된 지 십삼 년 된 장비에 석 달 전 보험료가 빠져나갔다.장비번호는 SG-NICU-04였다.박수인이 죽은 날 신생아중환자실에서 사용된 서버였다.연희가 폐기확인서와 보험 명세서를 겹쳐 놓았다.“버린 물건에 돈을 낸 게 아니라, 살아 있는 기록에 입막음값을 낸 거네요.”도율의 휴대전화에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성에가 낀 철문.세강물류 제3보관소.사진 아래에는 주소와 문장이 적혀 있었다.―오늘 밤 열한 시 삼십 분, 전산장비 전량 반출.“제보자는요?”“발신번호도 신원도 없습니다.”“함정일 가능성은요?”“있습니다.”“서버가 없어질 가능성은요?”“더 큽니다.”도율은 제보 사진의 촬영정보와 전송 경로를 연희에게 먼저 내밀었다.“확인 가능한 건 여기까지입니다.”연희가 파일을 받아 자기 휴대전화에 저장했다.“이번에는 판단 전에 보여줬네요.”“약속했으니까요.”“약속 지킨 한 번으로 어제 일이 없어지진 않아요.”“없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연희는 외투를 집었다.도율은 막지 않고 장인우에게 연락했다.30분 뒤, 인우가 카메라 가방을 들고 도착했다.“원본 서버가 실제로 남아 있으면 기사 한 편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연희가 카메라 렌즈를 손바닥으로 가렸다.“내 얼굴부터 찍으면 여기서 끝내요.”인우가 전원을 끄고 메모장을 꺼냈다.“무엇을 남길지 먼저 정해 주십시오.”“창고 외부, 서버 번호, 봉인 상태만요. 내 가족 이름은 내 허락 없이 쓰지 마세요.”“동의합니다.”도율이 두 사람의 합의를 녹음한 뒤 차를 출발시켰다.창고에 도착했을 때 반출 예정 시각까지 52분 남아 있었다.철문 옆 번호판은 꺼져 있었고, 출입구 위 감시카메라는 벽을 향해 돌아가 있었다.인우가 카메라를 들려다 연희를 봤다.연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촬영을 시작했다.도율이 미리 연락한 관리업체 당직자가 10분 뒤 도착했다.그는 출입대장을 확인하더니 얼굴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8
Read more

제38화. 아빠 이름을 훔쳐 갔다

“이재문 사장님 허락받고 왔습니다.”철문 밖의 남자가 손잡이를 다시 흔들었다.연희는 계약서의 아버지 이름을 움켜쥐었다.도율이 문 가까이 다가갔다.“이재문 씨와 통화한 녹음이나 위임장을 보여주십시오.”“우리한테 확인할 권한 없잖아요.”“경찰이 오는 중입니다.”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지자 바깥의 발소리가 흩어졌다.차량 두 대가 급히 빠져나갔다.인우가 연희를 바라봤다.“번호판만 찍겠습니다.”연희가 고개를 끄덕인 뒤에야 카메라가 움직였다.경찰은 서버 열두 대와 임대계약서를 봉인했다.바닥에 떨어진 반출지시서도 증거봉투에 들어갔다.반출 의뢰인은 우리마을영농조합이었다.대표자란에는 또 이재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연희는 아버지에게 전화하지 않았다.종이 몇 장으로 묻기에는 이름이 너무 많이 쓰여 있었다.날이 밝기 전 세 사람은 고향집으로 돌아왔다.재문은 작업복 차림으로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연희가 냉동창고 계약서 사본을 내려놓았다.“아빠 이름으로 서버를 십삼 년 숨겼어.”재문은 첫 장보다 마지막 장의 인감부터 봤다.“내 도장 맞다.”정애가 물컵을 내려놓았다.“저 종이에 당신이 찍었어?”“저 종이는 처음 본다.”“그럼 어디에 찍었는데?”“빈 종이에 찍었다.”연희가 계약서를 넘기던 손을 멈췄다.“몇 장?”“네 장.”“언제?”“13년 전.”서버가 폐기됐다는 날짜와 같았다.정애가 의자를 끌어당겼다.“누가 빈 종이를 내밀었어?”“마을 공동저장고 지원금 받는 데 필요하다 했다.”“누가 그랬냐고.”재문은 식탁의 나뭇결을 한 번 쓸었다.“변성호 이장.”그날 성호는 빈 서류 네 장의 아래쪽에 연필로 동그라미를 그려 왔다.재문은 표시된 곳마다 인감을 찍었다.며칠 뒤 지원 사업에서 떨어졌다는 말만 들었고 서류는 돌려받지 못했다.“왜 그때 말 안 했어?”정애의 질문에 재문은 작업복 소매를 접었다.“좋은 일 해 보려다 속은 게 창피했다.”연희가 아버지 앞에 계약서를 세웠다.“아빠가 숨긴 동안 저 사람들은 아빠 이름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Read more

제39화. 그 아이는 이미 와 있었다

“그날 우리 편으로 온 사람은 처음부터 세강 편이었어.”연희는 화면 속 변성호의 얼굴을 멈춰 세웠다.재문이 영농조합 차량대여서를 꺼냈다.“차는 아직 조합 창고에 있을 거다.”화환차는 건물 뒤편에 세워져 있었다.앞유리에는 운행 종료라는 종이가 끼워져 있었고 블랙박스 전원선은 뽑혀 있었다.조합 당직자가 문을 열며 말했다.“변 이장이 어젯밤 직접 반납했습니다.”“몇 시에요?”“열한 시 조금 넘어서요. 기계가 고장 났으니 수리하지 말라고도 했고요.”운전석 블랙박스의 메모리카드는 사라져 있었다.인우가 빈 슬롯을 촬영했다.“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 있었겠죠.”재문은 화물칸 문을 열었다.흰 꽃잎 몇 장이 바닥에 눌어붙어 있었다.그가 운전석 아래를 더듬다가 작은 장치를 꺼냈다.“이건 안 가져갔구나.”화환을 내릴 때 뒤쪽을 확인하는 보조 카메라 수신기였다.도율이 덮개를 열자 작은 저장카드가 꽂혀 있었다.“원본부터 복제하겠습니다.”연희가 그의 손을 막았다.“누가 먼저 봐요?”“연희 씨가 정하십시오.”“다 같이 봐요. 대신 내 가족 얼굴은 기사에 쓰지 마세요.”인우가 카메라를 가방에 넣었다.“허락받기 전에는 한 장면도 내보내지 않겠습니다.”저장카드에는 결혼식 당일 파일 하나만 남아 있었다.오후 3시 58분.후진 중 충격을 감지해 자동 보존된 영상이었다.화면에는 화환 사이로 예식장 지하주차장이 보였다.재문이 조수석에서 내려 화물칸으로 걸어왔다.운전석에 남은 성호가 전화를 걸었다.“회장님, 이재문 들여보냈습니다.”영상 속 성호가 말을 이었다.“팔찌 달린 화환도 확인했습니다. 예식 시작하면 바로 치우겠습니다.”연희가 재생 시간을 확인했다.아버지가 자기 편이라고 믿었던 남자는 아버지의 움직임을 혜경에게 보고하고 있었다.잠시 뒤 성호가 차에서 내렸다.카메라 가장자리로 흰 구두가 들어왔다.세아였다.드레스 자락을 쥔 손이 떨리고 있었다.혜경이 뒤따라와 세아의 손목을 잡았다.“여기서 울면 사람들이 봐요.”“연희가 정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Read more

제40화. 내 아이보다 먼저였다

―그 아이, 내 수술 전이야 후야?메시지 아래에 읽음 표시가 떴다.세아는 답하지 않았다.대신 초음파 사진 한 장을 보냈다.병원 이름과 환자번호는 잘려 있었지만 검사일과 임신 주수는 남아 있었다.임신 12주 6일.―결혼식 날 받은 사진이야. 네 수술 뒤에 생긴 아이야.연희는 달력부터 펼쳤다.결혼식 날짜에서 열두 주와 엿새를 거슬러 올라가자 붉은 펜이 수술일보다 앞에서 멈췄다.도율이 산부인과 주수 계산표를 화면에 띄웠다.“임신 주수는 마지막 생리 시작일부터 계산합니다.”“실제로 아이가 생긴 날은요?”“일반적으로 표시된 주수보다 약 두 주 뒤로 봅니다.며칠의 오차는 있어도 수술 전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연희는 계산된 기간의 시작과 끝에 선을 그었다.두 날짜 모두 자신이 무겸의 아이를 품고 있던 때였다.세아가 임신테스트기의 두 줄을 보며 울었던 밤도 그 안에 들어 있었다.연희는 세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사진 네가 보낸 거 맞아?”“네가 내 기록을 뒤질까 봐 보낸 거야.”“뒤지지 않을게.”연희가 달력 위 숫자를 하나씩 읽었다.“대신 네가 보낸 숫자로 물을게. 내 수술 전에 무겸이랑 잤어?”세아의 대답 대신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날짜로 말해.”“한 번이었어.”“횟수 말고 날짜.”“둘 다 술을 마셨고…….”“상태 말고 날짜.”세아가 숨을 삼켰다.“네가 임신했다고 말하기 전.”연희의 펜끝이 달력을 눌렀다.“얼마나 전?”“그건 기억 안 나.”“아이 주수는 숨기면서 첫날은 기억이 안 나?”“연희야, 나는 그때 네 자리를 빼앗으려고 한 게 아니야.”“그런데 내가 아이를 잃은 날 네 자리에 필요한 아이는 이미 있었네.”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연희는 오래된 메신저 대화를 열었다.임신 소식을 세아에게 처음 알린 날.세아는 축하보다 먼저 무겸도 아느냐고 물었다.“내가 임신했다고 말했을 때 이미 너도 임신한 걸 알았어?”“확실하지 않았어.”“그래서 내 테스트기를 보고 울었구나.”“네가 힘들까 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Read more
PREV
123456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