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내 아이를 지운 남자가 내 친구와 결혼한다: Chapter 11 - Chapter 20

159 Chapters

11화. 백지 계약의 신부

“내 합의서까지 네 비서실에서 만들어 줬어, 최무겸? 내 손은 장식품이냐?”이연희는 문서 맨 아래의 작성자 계정을 손가락으로 짓눌렀다. 종이를 통과할 듯 눌러도 글자는 지워지지 않았다. 수술 동의서에는 한세아의 이름이 있었고, 아직 읽지도 않은 합의서에는 자신의 가짜 서명이 들어 있었다. 아이를 지운 사람들은 그녀가 펜을 쥐기도 전에 모든 결정을 끝내 놓았다.맞은편 병원 직원이 문서를 회수하려 손을 뻗었다. 박도율이 합의서 모서리를 잡았다.“회수하지 마십시오. 작성자와 결재 이력부터 설명하시죠.”“내부에서 쓰는 양식을 재활용했을 뿐입니다. 착오가 있었을 수 있고요.”“착오는 남의 이름 한 글자 틀리는 거예요. 서명까지 만들어 놓는 건 도둑질이고.”연희가 웃자 직원의 뺨이 붉어졌다. 탁자 위 생수병에는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연희는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지만 그 물에는 손대지 않았다. 석 달 전에도 병원에서 건네는 물을 마셨다. 그 뒤 어떤 말을 듣고 어떻게 수술실에 들어갔는지, 기억은 군데군데 잘려 있었다.직원은 이번엔 전자서명이 ‘단순 출력 오류’일 수 있다고 했다. 연희는 그의 명찰을 읽어 수첩에 적었다. 직함 아래 붙은 사원번호까지 빠짐없이 옮기자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수술한 사람은 없는데 입막음할 담당자는 있었고, 잘못된 서명에는 매번 그럴듯한 변명이 붙었다. 연희가 서류의 첫 장을 펼쳐 보이자 직원은 서명란에서만 시선을 피했다.도율은 문서 번호와 회의 참석자 이름을 적고, 병원 측에 작성 경위에 대한 서면 답변을 요구했다. 연희는 합의서에 펜을 대지 않은 채 일어났다. 직원이 뒤늦게 ‘좋은 조건’이라고 중얼거렸다.“그 조건으로 당신 배에 손대면 좋겠어요? 사인까지 대신해 드리고.”복도로 나오자 향수 냄새가 먼저 밀려왔다. 한세아가 창가 소파에 앉아 웨딩숍 쇼핑백을 흔들고 있었다. 그녀는 연희를 보자마자 반지를 낀 손을 번쩍 들었다. 낯선 사람 앞에서는 다정한 친구인 척 입꼬리까지 올렸다.“어머, 우리 연희. 돈 준다는데 왜 또 뻗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Read more

12화. 아빠 땅에도 내 이름

“그 돈 거절하면, 네 아버지 땅부터 위험해져.”이연희는 전화를 끊지 않았다. 병원 앞 벤치에 앉은 채 최무겸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을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되감았다. 복숭아밭은 아버지 이재문이 평생 허리 굽혀 일군 땅이었다. 어릴 적 연희가 나무에 이름표를 달겠다고 떼쓰면 재문은 가장 낮은 가지를 골라 끈부터 묶어 줬다. 그런 밭을 무겸은 통장 잔액처럼 말하고 있었다.“땅? 지금 우리 아빠 땅으로 날 협박하는 거야?”“협박이 아니라 손실 안내야. 네가 합의하면 아무 일도 없어.”“와, 서비스 좋네. 애 지워 주고 집까지 날려 주는 패키지야?”“연희야. 말 예쁘게 해. 네 아버지까지 고생시키고 싶진 않잖아.”“내 아빠 이름 네 입에 올리지 마. 그리고 너, 방금 말한 거 다 남았어.”무겸은 대답 대신 짧게 웃었다. 예전에는 그 웃음 뒤로 반드시 장난스러운 입맞춤이 따라왔다. 이제 연희는 똑같은 웃음 끝에서 남의 집을 무너뜨리는 소리를 들었다.통화를 끝낸 연희는 박도율에게 녹음과 송금 내역을 보냈다. 별도 계좌에 옮겨 둔 돈은 한 푼도 쓰지 않았다. 손에 쥐면 더러워질까 두려웠던 거액이 이제는 아버지를 겨누는 칼자루처럼 보였다. 도율은 먼저 부동산 등기사항을 확인해 보자고 했다. 연희는 아버지가 오래전에 적어 준 과수원 지번을 입력했다. 오래된 토지 면적과 소유자 이름 아래 낯선 담보권 설정 내역이 나타났다.채권자 쪽에는 세강의료재단 이름이, 채무 관련 서류에는 재문의 이름이 연결돼 있었다. 설정일은 연희가 병원에서 수술받기 전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수확기를 앞두고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딸에게 매일 복숭아 사진을 보내 줬다. ‘올해는 네가 좋아하는 단 놈이 많다.’ 그 문자를 읽으며 웃던 날, 누군가는 아버지 땅을 빚 문서에 올려놓고 있었다.“이게 말이 돼요? 아빠는 병원에서 돈 빌릴 일이 없어요.”“등기만으로 계약 과정까지 알 수는 없습니다. 원본과 담보 설정 서류를 확인해야 합니다.”“그놈이 먼저 알고 협박했다는 건요?”“그 말과 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Read more

13화. 항아리에 남은 손

“진짜 도장이면, 우리 집에 도둑이 들었다는 거잖아.”이연희가 계약서를 움켜쥐자 아버지 이재문의 손등에 굵은 힘줄이 솟았다. 붉은 인영의 테두리 한쪽이 조금 깨져 있었다. 재문이 몇 해 전 장독대 돌바닥에 인감을 떨어뜨린 날 생긴 흠이었다. 관공서에서 찍은 오래된 서류에도 같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남의 손으로 새긴 가짜가 아니라면, 누군가 아버지가 감춰 둔 진짜 인감을 가져갔다는 뜻이었다.“아빠, 도장 어디 있어?”“복숭아나무 아래. 그 항아리 말고 어디다 두겠냐.”재문은 말하면서도 계약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딸이 어릴 때부터 과수원 수입을 적던 낡은 수첩까지 남에게 보여 주지 않던 사람이었다. 인감은 더했다. 평소엔 집 안에도 두지 않고, 마당 끝 오래된 복숭아나무 뿌리 옆 항아리에 싸 두었다. 급히 돈을 빌릴 일도 없으니 굳이 꺼낼 이유가 없었다.박도율이 서류를 접지 않고 투명 파일에 넣었다.“지금부터 발견하는 건 먼저 사진을 찍으세요. 누가 만졌는지, 언제 확인했는지도 남겨야 합니다.”“알아요. 저 인간들 특기잖아요. 남의 손으로 죄짓고 서류에는 남의 이름 쓰는 거.”연희가 먼저 신발을 신었다. 마당을 가로질러 과수원으로 들어서자 아직 덜 익은 복숭아 냄새가 풀잎 사이에 묻어났다. 아버지가 해마다 열매가 많이 달린 가지에만 걸어 주던 붉은 끈이 흔들렸다. 그 나무 아래서 어린 연희와 세아는 손톱에 복숭아물이 들 때까지 열매를 깎아 먹었다. 세아가 제 몫을 다 먹고 연희 접시까지 들여다보면 재문은 웃으며 하나를 더 꺼내 줬다.“아빠, 여기 흙이 왜 이래?”나무 밑 둥근 돌 세 개 가운데 하나가 옆으로 밀려 있었다. 주변은 며칠째 비가 오지 않아 바싹 말랐는데, 돌 아래 흙만 뒤집힌 듯 색이 달랐다. 작은 삽날로 긁은 것처럼 가장자리에 가느다란 홈도 남았다. 재문이 허리를 굽히려 하자 연희가 팔을 붙잡았다.“잠깐. 사진부터.”연희는 나무와 돌의 위치가 함께 보이게 찍고, 뒤집힌 흙을 가까이에서 다시 찍었다. 정애도 따라 나왔다. 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Read more

14화. 네 기억이 문제야?

“약 먹고 또 잊었니? 한세아, 네가 지금 그 말을 할 자격은 있고?”이연희는 복숭아나무 아래서 휴대폰을 쥔 손을 펴지 못했다. 화면에는 세아가 보낸 문장이 남아 있었다. ‘네가 돌려준 반지야. 약 먹고 또 잊었니?’ 방금까지 항아리에 들어 있던 은반지는 투명 봉투 안에서 흙을 묻힌 채 굴러다녔다. 반지 안쪽의 ‘평생 네 편’이라는 글자가 가로등 불빛을 받아 번쩍였다. 남의 집 도장이 감춰진 곳에 제 우정반지가 나온 이유를 묻자, 친구는 대답 대신 그녀의 기억을 병든 것처럼 취급했다. 재문은 한참 전부터 삽을 세워 둔 채 나무 뒤편만 살피고 있었다. 세아가 어린 시절 이 마당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것을 아버지도 기억했다. 한 번 믿어 준 아이가 어디까지 집 안을 헤집었는지 생각하기 싫다는 듯했다.연희는 전화를 걸었다. 세아는 세 번째 신호음에 받더니 기다렸다는 듯 웃었다.“왜? 기억나는 거라도 있어? 아유, 우리 연희 똑똑해졌네.”“반지를 언제, 어디서 돌려줬는데.”“그걸 나한테 물어? 너 수술하고 약에 취해서 며칠이나 헛소리했는지 기억 안 나?”“날짜를 말해. 아니면 입 닥치고.”세아는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얘 또 시작이다’라고 속삭였다. 잔 부딪히는 소리 뒤로 최무겸의 웃음이 스쳤다. 연희의 배에 볼을 비비며 ‘우리 셋 평생 한 팀’이라던 남자는, 이제 그 아이를 지운 서류에 사인한 여자 곁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야, 네가 멀쩡했으면 내가 네 뒤치다꺼리했겠냐? 병원에서 눈도 제대로 못 뜨던 주제에 기억 타령은.”“눈을 못 떴다는 건 잘 아네. 그때 무슨 약을 맞았는지도 알아?”“네가 별걸 다 물어. 내가 약사야?”“그럼 내가 반지를 돌려줬다는 것도 네 입에서만 나온 소리네.”통화 너머가 잠깐 조용해졌다. 연희는 그 침묵까지 녹음되고 있는지 화면을 확인했다. 세아가 직접 서명한 수술 동의서의 빈 환자란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남 대신 사인해 놓고는 당사자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조롱하는 여자였다. 지금이라도 그 입에서 정확한 시간 하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Read more

15화. 이사장님, 환자 맞아요?

최혜경.이연희는 진정제 처방란에 찍힌 세 글자를 보자 휴대폰을 식탁에 엎어 놓았다. 수술실로 끌려가던 날, 그 여자는 연희의 배가 아니라 시계부터 봤다. ‘그만 울어요. 감정적으로 군다고 결과가 바뀌진 않아요.’ 그렇게 말한 사람의 이름이, 연희의 끊어진 기억 옆에 붙어 있었다.그때 연희는 혜경의 진료실에서 검사지를 달라고 세 번 말했다. 혜경은 종이를 뒤집고 무겸에게만 눈짓했다. 돌아온 건 검사 결과가 아니라 수술 날짜였다. 이젠 그날의 약까지 그 여자 명의였다.“무겸이 엄마가 약까지 처방했다고요?”전화를 받은 박도율은 즉답하지 않았다.“처방의 칸에 이름이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 누가 진찰하고 지시했는지는 더 확인해야 합니다.”“그럼 확인할 때까지 가만있으라고요? 내 애는 이미 없는데?”“가만있으라는 말 아닙니다. 누가 거짓말하는지, 그 사람 입으로 남기자는 겁니다.”연희는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부엌에서는 김정애가 찬밥을 데우고 있었다. 정애는 딸이 최혜경의 이름을 말하자 냄비 뚜껑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손잡이를 쥔 손등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아프다는 소리도 하지 않았다.“네 애 아프다던 그 여자 말이지? 네가 한 번만 더 검사해 달라니까 버릇없다고 했던?”“응. 그런데 이번엔 날 진찰한 적도 없다나 봐.”“기가 막혀. 안 본 사람 배에는 어떻게 약을 넣었대?”연희는 서류를 챙겨 서울로 올라갔다. 병원에 도착할 즈음 도율이 전달한 추가 회신이 왔다. ‘환자 정보 보호를 위한 상세 투약내역 열람 보류.’ 결재 경로에는 병원장실 옆에 ‘이사장실 검토’가 붙어 있었다. 진료한 적 없다는 여자가 기록을 보여 줄지 말지 정하는 자리에 있었다.세강병원 로비에는 ‘환자와 함께하는 열린 간담회’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홍보팀에 다닐 때 연희가 직접 만들었던 행사였다. 질문은 미리 접수받고, 답변은 공적인 자리에서 남긴다. 원래는 병원을 믿어 달라는 홍보 행사였지만 오늘만큼은 연희도 그 절차를 써먹을 생각이었다. 사전 접수한 질문지를 확인한 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Read more

16화. 신부 파일의 정체

“BRIDE_01? 신부 파일을 왜 병원 서버에 숨겨 놨어?”이연희는 노트북 화면에 코를 가까이 댔다. 백업 목록에는 몇 년 전 자신이 작성했던 세강병원 행사 이름들이 줄지어 있었지만, 마지막 줄만 달랐다. ‘BRIDE_01’. 그 옆에는 홍보물처럼 촬영 날짜나 담당 디자이너 이름도 없었다. 수술 날짜보다 먼저 만들어진 파일이라는 사실에 손가락이 멈췄다.한세아는 요즘 입만 열면 신부 타령이었다. 연희의 약혼반지를 끼고 ‘좋은 주인 만난 반지는 더 빛난다’고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혹시 신부대기실 사진이라도 숨겨 뒀나 싶어 입꼬리가 뒤틀렸다. 그런데 파일 경로 끝에는 웨딩이나 행사 대신 ‘대외위험대응’이라는 낡은 부서명이 붙어 있었다.연희는 곧장 열지 않았다. 저장장치에 남아 있는 것은 재단 홍보팀에서 일할 때 자신이 만든 업무 백업이었다. 내부 서버에 새로 접속할 권한이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연희는 경로와 생성 날짜를 찍어 박도율에게 전송했다.“변호사님. 신부라는 이름으로 묶인 게 있어요. 저 회사 다닐 때 만든 백업 목록인데요.”“지금 병원 서버에 접속하신 건 아니죠?”“내 외장 저장장치예요. 남의 서버 문 따고 들어갈 만큼 한가한 여자 아닙니다. 내 애 지운 놈들 쫓기도 바빠요.”도율은 화면 전체와 파일 속성을 먼저 보존하라고 했다. 목록 바로 아래 ‘검수용 미리보기’라는 이름의 PDF가 있었다. 연희가 업무 때문에 받아 두었던 홍보 대응자료 묶음이었다. 도율은 기존에 보관하던 사본인지 확인한 뒤, 열람 전에 복사본을 만들고 원본은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미리보기 첫 장이 열리자 연희의 웃음이 지워졌다.꽃다발도, 웨딩드레스도 없었다. 회색 표 맨 위에 ‘재단 관계인 임신 관련 대외 노출 관리’라는 문구가 찍혀 있었다. 그 아래에는 교제 관계, 임신 확인일, 조치 담당 부서, 언론 문의 시 답변 문안이 줄을 이었다. 여성들의 이름은 대부분 코드로 바뀌어 있었고, 남자들은 ‘관계인’이라는 칸에 직책과 함께 정리돼 있었다.연희는 그 표의 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Read more

17화. 보호자의 도장

“보호자, 한세아.”이연희는 화면에 찍힌 세 글자를 손끝으로 눌렀다. 수술실에서 깨어나자마자 아이를 찾던 자신에게 세아는 ‘네가 동의했잖아’라고 했다. 그런데 병원은 환자 팔찌에 세아의 이름을 달고, 비밀 관리표에는 세아를 보호자로 적어 놓았다. 세아는 환자였다가 보호자였다가, 필요할 때마다 다른 이름표를 달았다. 정작 배를 가르고 아이를 잃은 연희만 어느 칸에도 제대로 남지 않았다. 연희는 그날 병실에서 세아가 들고 있던 두꺼운 서류 봉투를 떠올렸다. 간호사가 무언가를 설명할 때마다 세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연희가 입을 열면 어깨를 눌렀다. 그러고는 마치 자기 일이 끝났다는 듯 봉투를 가방에 넣었다.“변호사님, 얘가 보호자면 제가 싫다고 한 것도 들었겠네요.”도율의 대답은 신중했다.“그 칸만으로 설명을 들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연결된 상담 기록이 있는지 확인하죠. 지금 가진 자료는 어디까지나 옛 업무 사본입니다.”연희는 외장 저장장치에 남은 검수용 PDF의 첨부 목록을 살폈다. 자신이 근무하던 시절, 홍보실은 비공개 자료를 전달받으면 어떤 쪽이 대외 배포용인지 표시하는 검수표를 붙였다. 목록 아래 작은 글씨로 ‘상담 경과 발췌’가 적혀 있었다. 오래된 파일에 함께 저장된 미리보기였다. 그녀는 원본을 따로 보존한 뒤 사본에서 그 항목을 열었다.수술 당일 오후. 설명 대상자는 한세아. 환자의 상태와 처치 계획을 안내했다는 문장 다음에 ‘보호자 확인’ 표시가 세 번 반복됐다. 설명 청취, 서류 전달, 처치 전 재확인. 세 항목 옆에는 모두 비슷한 필체의 서명이 있었다. 연희가 고등학교 졸업앨범에 장난으로 받아 놓았던 세아의 사인과 똑같이 마지막 획이 길었다.“한 번 실수로 이름 잘못 적었다고 우기더니, 세 번이나 참 부지런하게 실수했네.”도율은 자료의 증거력을 확인하려면 병원 원본과 작성 경위를 확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연희는 대답 대신 파일을 지정된 보관 폴더에 복사했다. 세아가 무엇을 들었는지, 의료진이 정확히 무엇을 설명했는지는 아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Read more

18화. 신부 가족석

“출입 금지 명단에 올려놓고, 신부 가족석엔 앉으라고?”이연희는 호텔 예식장 입구에서 직원이 내민 좌석 안내도를 내려다봤다. 결혼식까지 나흘이나 남았는데도 로비에는 흰 꽃이 쌓여 있었고, 통로를 따라 새 카펫이 깔리고 있었다. 꽃향기가 짙어질수록 병원 복도에서 맡았던 소독약 냄새가 떠올랐다. 한세아는 아이를 지우는 서류에 사인한 손으로 이곳에선 꽃다발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객님 성함이 이연희 씨 맞으시죠? 신부 측에서 가족석으로 지정하셨는데, 별도로 출입 제한 요청도 있어서요.”직원은 난처한 표정으로 두 장의 명단을 번갈아 확인했다. 연희는 청첩장을 꺼내 펼쳤다. 금박 글씨 아래 신랑 최무겸, 신부 한세아의 이름이 번들거렸다.“초대장은 보내고 문은 막아 놓더니, 앉을 자리까지 정해 놨네요. 신부 취미가 사람 갖고 인형놀이 하는 건가 봐요.”직원이 대답하지 못하자 연희는 출입 제한을 통보받은 문자와 초청 등록 확인 내역을 보여 주었다. 직원에게 따질 일은 아니었다. 누가 언제 자신을 초대했고 또 막았는지, 그 모순이 그대로 남게 하면 됐다.그때 휴대폰 알림이 울렸다. 세아의 SNS 게시물이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세아 옆에 연희가 웃고 있었다. 언뜻 오늘 찍은 화해 사진처럼 보였지만 연희는 곧 배경을 알아봤다. 지난해 봄, 정애가 복숭아꽃을 보러 나오라며 두 사람을 불렀던 날이었다. 세아는 그때 사진에서 연희만 잘라 웨딩 사진 옆에 붙여 놓았다.‘열다섯 해 내 곁을 지켜 준 가족 같은 친구, 연희. 우린 다 괜찮아졌어요. 내 가장 행복한 날에도 함께해 줘서 고마워.’댓글에는 ‘우정이 너무 예뻐요’, ‘신부님 인성까지 완벽하네요’라는 축하가 줄을 이었다. 연희는 배가 아프도록 웃고 싶었다. 세아는 다른 사람 앞에서 연희를 미친 여자라 욕하면서, 자기 사진 밑에서는 용서받은 친구 행세를 하고 있었다. 아이를 잃은 뒤 한 번도 마주 앉아 사과한 적 없는 사이였다.연희는 원본 사진의 촬영 날짜와 세아의 게시물을 나란히 캡처했다. 그리고 신부에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Read more

19화. 훔친 축사

‘세아가 처음 우리 집 밥을 먹은 날, 나는 진짜 자매가 생긴 줄 알았다.’이연희는 태블릿 화면을 손톱으로 긁을 뻔했다. 열여섯 살 겨울, 공책 맨 뒤에 적어 놓은 문장이었다. 한세아가 양말도 제대로 못 신고 찾아왔던 날, 김정애는 말없이 밥 한 그릇을 더 퍼 주었다. 연희는 그날 일기에 ‘이제 우리 집은 네 식구’라고 썼다. 세아는 그런 글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라야 했다.“신부가 직접 쓴 원고라고요?”웨딩 담당자는 진행표를 확인했다.“신부님이 전달하셨고, 신랑 측 홍보실에서 문구 검수까지 마쳤습니다. 연희 씨가 낭독하실 거라고요.”연희는 헛웃음을 삼켰다. 최무겸이 일하던 재단 홍보실. 남의 몸에서 아이를 지운 뒤 이번에는 남의 일기에서 문장을 뜯어 예식장에 장식한 것이다.“남의 글까지 신혼 혼수로 챙겼네. 세아답다.”담당자 앞에서 화를 쏟아 봐야 세아에게 달려갈 소식만 늘어날 터였다. 연희는 파일을 자신의 메일로 받았다. 축사 끝에는 ‘우리가 이겨 낸 사랑을 축복해 주세요’라는 문장이 굵게 표시돼 있었다. 도대체 누가 무엇을 이겼다는 걸까. 살아 있는 아이를 지켜 달라며 울던 사람을 짓밟아 놓고, 저들은 그것을 승리라고 불렀다.호텔을 나온 연희는 가까운 카페에 앉아 낡은 메신저 백업을 열었다. ‘세아는 가족이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밥부터 먹이고 싶다.’ 대학 시절 세아가 집을 나갔을 때 무겸에게 보낸 문장이 축사 두 번째 문단에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그 아래에는 연희가 열여덟 살에 쓴 일기의 철자 실수까지 똑같이 남아 있었다. 우연히 닮은 문장이 아니었다. 누군가 그녀가 쓴 글을 통째로 가져갔다.연희는 두 화면을 나란히 띄웠다. 오래된 일기에는 잉크가 번진 부분까지 있었고, 축사에는 그 자리를 매끄럽게 고친 흔적이 남았다. 유일하게 빠진 문단은 무겸을 처음 소개한 날의 기록이었다. 세아가 그 남자를 보고 “야, 너 혼자 이런 남자 만나면 반칙 아니냐”라고 웃던 부분. 훔친 글에서도 자기 속셈이 드러나는 문장만 쏙 빼놓은 셈이었다.연희는 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Read more

20화. 드레스 속 내 아이

‘수술 동의서에 사인한 사람은 신부다.’이연희는 축사 수정본을 보낸 뒤에도 그 문장을 지우지 않았다. 호텔 담당자에게서 ‘최종본은 신랑 신부 확인 후 확정’이라는 답이 왔지만, 적어도 이제 누가 어떤 말을 빼려고 했는지는 기록으로 남았다. 다음 날 리허설 초청 일정이 도착했다. 한세아가 직접 지정한 ‘신부 가족 대표’ 자리였다.연희는 박도율에게 일정을 보냈다. 도율은 공개 장소에서의 대화를 기록할 땐 자신이 참여한 대화만 담고, 자료 원본을 훼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연희는 대답 대신 휴대폰 저장 공간을 비웠다. 세아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울고, 둘만 남으면 욕을 했다. 이번엔 그 두 얼굴이 얼마나 빨리 바뀌는지 지켜볼 생각이었다. 리허설 초청장 밑에는 축사 담당자가 신부 가족으로 표기돼 있었다. 세아가 정한 호칭을 연희는 굳이 지우지 않았다. 누구 가족을 팔아먹었는지 하객들도 언젠가는 알아야 했다.리허설이 한창인 호텔은 사방이 꽃이었다. 하얀 장미를 담은 화병 옆으로 무선 마이크와 카메라 받침대가 놓였고, 직원들은 단상으로 이어지는 동선을 여러 번 걸어 봤다. 연희가 신부대기실 앞에 이르자 안에서 익숙한 웃음이 터졌다.“아유, 우리 오빠 눈 좀 봐. 신부가 너무 예뻐서 숨 넘어가겠네?”문틈으로 보이는 거울 앞에서 세아는 드레스 자락을 쓸어 올리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최무겸이 베일 끝을 정리해 주자 그녀는 일부러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임신했을 때 무겸은 연희의 부은 발을 무릎에 올려놓고 ‘우리 공주님 발은 내가 평생 모실게’라며 장난쳤다. 이제 그 손은 세아의 머리핀을 고르고 있었다. 연희는 복도에 걸린 전신 거울에서 자기 옷차림을 한번 봤다. 세아가 뒤집어씌울 질투나 소란이 아니라, 오늘 묻고 싶은 것을 끝까지 묻겠다는 뜻으로 고른 옷이었다.세아가 거울 속 연희를 발견했다. 웃던 입꼬리가 잠깐 굳더니 곧 더 환해졌다.“어머, 진짜 왔네? 우리 우정 축사 하러 왔어? 역시 넌 내가 없으면 못 살아.”“축사는 내가 쓴 걸로 확인해야지. 네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Read more
PREV
123456
...
16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