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내 아이를 지운 남자가 내 친구와 결혼한다: Chapter 51 - Chapter 60

159 Chapters

51화. 남의 누나로 쓴 특종

“장인우 기자 누나가 첫 번째였다고? 그럼 저 기자는 내 아이를 취재한 게 아니라 자기 집 사건을 캐러 온 거야?”이연희가 검은 파일을 가리키자 신유라는 손바닥으로 표지를 덮었다. 호텔 라운지 테이블에는 먹지도 않은 케이크와 물방울 맺힌 유리잔이 놓여 있었다. 조금 전까지 원본에 값을 매기던 여자는 명단 첫 줄을 보여 준 것으로 값을 올렸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였다.“처음은 아니죠. 내가 가진 목록에서 첫 줄이라는 뜻이에요. 기자가 누나 이름 보고 눈 돌아갈 만하지 않아요?”“그 사람 기록은 덮어요. 허락도 없이 남의 병력 펴 놓고 돈부터 달라는 사람 말, 한 글자도 공짜로 믿기 싫으니까.”박도율이 파일을 유라 쪽으로 돌려놓았다. 누군가의 이름을 확인했다고 그 사람의 의료정보를 볼 권리가 생기지는 않았다. 연희는 결혼식장에서 자기 수술 얘기를 했을 때 무겸이 ‘환자 개인정보’라며 협박하던 얼굴을 떠올렸다. 정작 병원은 필요한 순간마다 다른 여성들의 삶을 관리 목록에 올려놓고 있었다.“장인우 기자와는 어떤 관계입니까?” 도율이 물었다.유라는 대답 대신 휴대폰을 꺼냈다. 기사 제보를 받겠다며 장인우가 보낸 메시지가 있었다. ‘세강 내부자료에 가족 이름이 있습니다. 공개 전 꼭 확인하고 싶습니다.’ 전송 시각은 연희의 결혼식장 난동 기사가 나오기 훨씬 전이었다.연희는 그 메시지만 촬영 허락을 받아 보존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돈으로 흥정할 거면 여기까지 해요. 증언할 마음 생기면 변호사님 통해 연락하세요. 그때도 다른 피해자 이름은 먼저 가리시고.”라운지를 나서자 카펫을 밟는 구두 소리가 뒤따랐다. 유라가 아니었다. 복도 끝에 카메라 가방을 멘 장인우가 서 있었다. 예식장에서 신부의 욕설이 터졌을 때 제일 먼저 촬영 위치를 바꾸던 기자였다. 그날은 빠르고 유능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가 어느 질문을 끝내 묻지 않았는지가 생각났다.“이연희 씨, 얘기 좀 하시죠. 세강 재단 내부 명단 찾으셨다면서요.”“저보다 먼저 그 명단 찾고 있었잖아요. 당신 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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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첫 보도의 함정

장인우가 방송국 보도국 문을 연 그날 밤, 이연희의 약 복용 내역이 뉴스 자막에 올라갔다.연희는 처음엔 텔레비전 앞에서 일어섰다. 화면에는 ‘세강병원 강제 수술 의혹’이라는 제목과 함께 한세아의 결혼식 영상이 흘렀다. 무겸이 “네 발로 수술대 올라갔잖아”라고 말하고, 뒤이어 연희의 “싫어, 아이를 지키고 싶어”라는 음성이 이어졌다. 마침내 자기 목소리가 세상에 도착했다는 생각에 눈시울이 달아오른 순간이었다.그런데 앵커의 다음 문장에서 숨이 멎었다.‘재단 측은 당사자가 과거 심각한 정서적 위기를 겪었고, 진정 작용이 있는 약물을 복용한 이력이 있다고 반박했습니다.’하단 자막에는 연희가 상담받았던 시기와 처방 항목 일부가 흐릿하게 떠 있었다. 이름을 가렸다는 말이 우스웠다. 바로 앞 영상에서 얼굴과 이름이 나간 여자의 의료정보였다. 아이를 살려 달라고 울었던 목소리가 나오는 동안, 그 목소리를 믿지 말라는 이유까지 한 화면에 붙여 놓은 셈이었다.그 상담은 재단 홍보팀에서 밤샘 근무하던 시절 스스로 도움을 청한 기록이었다. 연희는 약을 처방받고 회복해 다시 출근했다. 무겸은 약 봉투를 챙겨 주었고 세아는 병원 예약을 도왔다. 믿고 건넨 정보가 자신을 부정하는 증거가 됐다.“이걸 누가 줬어?”옆에서 방송을 보던 김정애가 리모컨을 쥔 채 물었다. 연희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병원에조차 돌려받지 못했던 상세 복약 정보였다. 정애가 딸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고도 남 앞에서는 한 번도 꺼내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기록이 이제 ‘객관적 반론’이라는 제목으로 팔리고 있었다.현관 초인종이 울렸다. 기자라고 밝힌 남자가 인터폰 앞에 서 있었고, 뒤에서는 휴대폰 진동이 쉼 없이 이어졌다. ‘약 먹고 기억 조작한 여자냐’, ‘전남친 결혼 못 하게 발악하더니’ 같은 문자가 모르는 번호에서 들어왔다. 연희는 초인종을 끄지 않았다. 방문 시간과 영상을 남긴 뒤 문을 열지 않았다.화면이 바뀌자 한세아가 나타났다. 파행된 결혼식 사진과 달리 단정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배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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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약 봉투를 던져라

“내 아이가 왜 죽었는지 설명하라고? 연희야, 너 지금 또 흥분한 거니?”한세아는 대답 대신 배를 감싸 쥐었다. 카메라가 일제히 이연희 쪽으로 돌아서자 세아는 눈가를 문지르며 의자를 당겼다. 방금까지 ‘친구를 위한 희생’을 이야기하던 여자가, 정작 그 친구의 질문 앞에서는 또 환자를 달래는 보호자 행세를 시작했다.“우리 연희가 예전부터 밤마다 잠도 못 자고 울었어요. 불안해서 병원도 다녔고, 약 없으면 힘들어하는 날도 있었거든요. 여러분, 저 애 좀 자극하지 말아 주세요.”취재진 앞줄에서 셔터가 터졌다. 연희는 세아가 입에 올리는 상담 시기와 처방 내역을 들으며 손에 쥔 약 봉투를 펴지 않았다. 회사에서 힘들던 시절 스스로 병원을 찾은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도움이 필요했던 과거가 자신의 배 속 아이를 포기했다는 증거는 될 수 없었다.“내가 상담받았다는 얘길 몇 번째 파는 거야? 결혼 축의금 모자라서 이제 내 병력까지 하객 답례품으로 돌려?”세아가 곤란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보셨죠? 저렇게 공격적으로 변하곤 해요. 그래서 제가 대신 설명하고, 약도 챙겼어요. 지금도 저 애가 걱정돼 죽겠어요.”“죽겠다는 말 쉽게 하지 마. 너한텐 그냥 비유겠지만 난 진짜 아이를 잃었거든.”객석에서 누군가 작게 탄식했다. 연희는 맨 앞줄 카메라의 빨간 불빛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 기자회견의 주제는 세아의 착한 우정이 아니라 수술 동의서의 서명이었다.사회자가 진행을 중단하려 하자 연희는 준비해 온 공개 질문서를 들어 올렸다. 세아가 서명한 수술 동의서 사본의 인적 사항은 가리고 서명란만 보이도록 해 둔 종이였다. 기자들 사이에서 마이크가 뻗어 나왔다. 한 기자가 세아에게 직접 동의 여부를 확인했느냐고 물었다. 세아는 잠시 말을 삼키더니 ‘그 상황에선 제가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고 답했다.“한세아 씨. 제 정신이 걱정됐다면서 왜 제 수술 동의서에 본인 이름을 썼죠? 제가 싫다고 한 녹음은 들으셨나요?”“연희야, 네가 얼마나 아팠는지 내가 제일 잘 알잖아. 의료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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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방송사고 난 신부

“내 이름으로 샀어!”한세아의 비명이 생방송 회견장 천장에 부딪힌 순간, 기자들의 카메라가 일제히 그녀의 입을 향했다. 이연희는 세아의 발치에 놓인 약 봉투를 내려다봤다. 이름을 묻는 질문 하나에, 지난 방송 내내 남의 복약 기록을 줄줄 외우던 여자의 혀가 제 발등을 찍었다.“본인 명의 약을 연희 씨에게 준 겁니까?”“그 약이 처방약이었다는 뜻입니까?”마이크가 한꺼번에 밀려오자 세아는 의자를 뒤로 밀었다. 손바닥이 배를 감싸는 동안 눈은 재단 홍보 담당자를 찾고 있었다. 담당자가 생방송 중단을 외쳤지만 객석의 휴대폰 화면마다 이미 짧은 영상이 돌아가고 있었다. ‘내 이름으로 샀어’라는 자막을 붙인 영상 아래로 댓글이 쏟아졌다. 불과 어제까지 연희를 두고 약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졌다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약 봉투의 주인을 묻고 있었다.회견 전까지 세아는 자기 사연이 기사 제목이 될 줄 알았다. ‘상처 입은 친구를 지킨 신부’. 재단이 사전에 배포한 제목이었다. 하지만 기자들은 마이크를 피하는 세아의 얼굴을 찍었다. 연희가 가져온 봉투에 인쇄된 이름을 가리려다 도리어 자기 입으로 밝힌 여자. 세아는 남이 짜 놓은 함정에 빠진 척하며 제가 준비한 무대에서 넘어진 사실을 부정했다.“이거 편집이에요! 앞뒤 잘라서 나 곤란하게 만든 거잖아!”세아는 먼저 장인우를 가리켰다. 맨 뒤에서 촬영하던 인우가 카메라를 내리기도 전이었다.“장 기자! 당신이 연희랑 짜고 나한테 함정 질문했지? 사람 말 잘라 먹는 게 기자 특기야? 우리 아기한테 무슨 일 생기면 당신 책임이야!”“저는 아직 질문도 안 했습니다.”“그럼 누가 편집했는데! 방송국이든 당신이든 누군가는 손댔겠지!”연희는 떨어진 봉투를 주워 속이 보이지 않도록 접었다. 세아 명의로 샀다는 말만으로 약의 성분이나 복용자를 확정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바라는 건 또 다른 추측이 아니었다. 왜 세아가 남의 병력을 폭로하면서 약 봉투에 적힌 이름은 숨겼는지, 그 한마디의 원본을 남기는 일이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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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계약으로 산 신부

“혼인계약 위반? 내가 남편이랑 결혼했지, 세강재단에 임대된 배라도 돼?”한세아는 차 안에서 휴대폰 화면을 세게 눌렀다. 최혜경의 이름이 박힌 통보서에는 방송사고로 재단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문장이 있었다. 그 아래 위반 조항들이 번호를 달고 길게 이어졌다. 언론 발언은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하며, 임신 사실의 공개 시기와 산전 진료 일정, 행사 참석 여부까지 재단과 협의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결혼할 때는 ‘서로를 보호하기 위한 약속’이라고 했던 종이였다. 세아가 고른 것은 웨딩드레스뿐이고, 나머지는 죄다 혜경이 정했다는 사실이 이제야 보였다.“오빠, 전화 좀 받아. 네 엄마가 나한테 위반 통보서 보냈어!”최무겸에게 열 번 넘게 전화를 걸었지만 돌아오는 건 자동응답뿐이었다. 세아는 비서실에 전화를 걸었다. 혜경의 비서는 통보서의 수령 여부만 확인하며 추가 문의는 지정된 법무 담당자를 통하라고 했다. 세아가 배를 움켜잡자 기사는 룸미러로 눈치를 살폈다. 남편 집에 들어온 줄 알았더니, 의자에 앉는 자세까지 결재받아야 하는 곳이었다. 휴대폰 배경에는 결혼 발표 때 무겸이 허리를 감싸고 웃던 사진이 있었다. 지금 그 남자는 전화도 받지 않았다.한 시간 뒤 세아는 혜경의 집무실에 들이닥쳤다. 혜경은 커피를 마시며 방송 화면을 끈 태블릿을 뒤집어 놓았다.“어머니,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요? 친구 도와줬다고 인터뷰한 것뿐인데.”“도와줬으면 조용히 있었어야지. 네가 입을 열어서 재단 이름이 약 봉투 옆에 붙었잖니.”“그럼 제가 악역 다 맡았는데 칭찬은 못 해 주실망정 위약금이요? 저 지금 오빠 애 임신했어요!”혜경은 세아의 배가 아니라 손에 쥔 계약서만 보았다.“임신했으니까 더 조심하라는 거야. 이미지 유지, 임신 경과 관리, 공식 일정 협조. 사인할 때 분명히 읽었지?”“그땐 가족이 된다고 하셨잖아요.”“가족이면 가족의 체면을 지켜야지. 네 사생활까지 재단이 책임져 줘야 하니?”문밖으로 나온 세아는 목이 뜨거워졌다. 과거 혜경이 아버지의 의료사고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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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애 낳으면 버려진다

“애 낳고 나면 내 애를 가져가겠다고? 최혜경, 나를 며느리로 들인 게 아니라 애 낳는 기계로 산 거야?”한세아는 계약서의 마지막 문장을 몇 번이고 확대했다. 출산 이후 친권과 양육에 관한 권리 행사를 포기한다는 조항 밑에 자기 서명이 있었다. 결혼 전 최무겸은 두 사람이 평생 함께할 약속이라며 서류를 넘겼고, 최혜경은 재단의 보호를 받으려면 형식적인 절차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때는 연희의 반지를 빼앗아 끼고 결혼식장에 서는 것만으로 세상을 다 얻은 줄 알았다. 무겸은 계약서에 찍힌 작은 글씨를 손가락으로 덮으며 "우리 세아, 어려운 건 오빠가 다 알아서 해"라고 웃었다. 세아는 그 말에 취해 마지막 장도 넘기지 않았다. 이제 그가 알아서 한다던 일이 자기 이름을 지우는 일이었다니, 배 속 아이가 발로 찬 것도 아닌데 아랫배가 서늘했다.그런데 계약서에서 세아가 보호받는 기간은 출산 전까지였다. 이후 아이의 거처와 양육 방침은 재단이 정하고, 세아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옆의 별첨에는 홍보 활동 중단 여부와 생활비 지급 조정까지 묶여 있었다. 화면을 넘길수록 세아의 이름은 줄어들고 ‘재단의 결정’이라는 글자만 늘어났다.세아는 무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받았다.“오빠. 우리 아기 낳으면 나더러 손 떼라는데, 이게 무슨 소리야?”“그건 어머니가 재단 이미지 때문에 넣은 문구야. 걱정하지 마.”“아이 엄마를 종이로 해고하는 게 이미지 관리야? 나 낳자마자 버릴 거야?”“말 좀 예쁘게 해. 네가 방송에서 사고 친 건 생각 안 해?”무겸은 세아가 안정돼야 아이도 안전하다며 통화를 끝냈다. 아이를 위한다는 말이 연희에게 쓰이던 때와 똑같았다. 세아는 처음으로 무겸이 전 연인에게 건네던 ‘걱정’의 안쪽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했다. 그러나 미안함보다 먼저 치밀어 오른 것은 자기 몫을 빼앗길 수 있다는 두려움이었다.그녀는 곧장 최혜경을 찾아갔다. 비서실에서는 면담 일정이 없다며 막았고, 담당자는 출산 후 권리 제한 조항의 법적 유효성은 별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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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도둑질한 내 일기

“대체 가능한 삶? 한세아, 내 애를 지운 것도 모자라 내가 살던 자리까지 네 이름으로 바꿔 놨어?”이연희가 휴대폰을 향해 손을 뻗자 한세아는 반사적으로 화면을 제 가슴에 붙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최혜경에게 빼앗길 아이를 지켜 달라던 여자가, 계정 하나를 보여 주는 데는 목숨처럼 몸을 사렸다. 박도율은 두 사람 사이에 놓인 테이블에서 손을 거뒀다. 세아가 자발적으로 공개한 범위와 실제 자료를 확보할 절차는 구분해야 했다.“보여 준다며. 비밀번호까지 쥐고 울기만 하면 네 비밀도 보호받는 줄 알아?”“너한테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 보여 주는 거야. 괜히 남의 거 뒤져 놓고 고소한다고 난리 치지 마.”“남의 거? 제목부터 내 인생 훔쳐 놓고 주인이 누구냐고 따져?”세아는 마지못해 계정 안으로 들어갔다. 휴대폰 위로 손가락이 지나갈 때마다 화면 유리에 연희의 얼굴이 비쳤다. 도율의 사무실에는 식은 커피 냄새가 남아 있었고, 창밖에서 퇴근 차량들이 길게 경적을 울렸다. 그런데 연희에게는 그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자신이 살아온 시간이 손바닥만 한 기계 안에 정리돼 있다는 사실만 선명했다. 첫 화면에는 날짜별 폴더가 빽빽했다. ‘출근복’, ‘반지’, ‘대화’, ‘집’, ‘병원’. 연희는 옷이라는 이름을 붙인 폴더의 작은 사진을 보고 등허리가 서늘해졌다. 자신이 처음 회사 면접을 보러 갔을 때 입은 베이지색 재킷이었다. 세아는 그날 연희의 옷깃을 손수 펴 주고 잘 다녀오라며 응원했다. 그런데 사진 옆에는 색상과 구입처뿐 아니라 ‘동일 제품 확보’라는 메모가 있었다.다음 폴더에는 연희의 손이 보였다. 무겸이 청혼하며 끼워 준 반지가 선명했다. 사진 속 손목에는 정애가 생일에 사 준 가느다란 팔찌도 있었다. 세아는 그 반지를 자기 손에 끼고 결혼식장에 들어섰다. 그 장면이 우발적인 욕심이 아니라 오래 적어 둔 구매 목록의 마지막 칸 같았다.“너 내 사진을 왜 이렇게 모았어?”“예쁜 건 따라 할 수도 있지. 세상에 너만 베이지색 옷 입냐?”“그러게. 세상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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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엄마까지 훔쳤니?

“한세아, 내 남자에 내 반지까지 훔쳐 가더니 이제 우리 엄마 자리도 네 거였어?”이연희가 휴대폰 속 가장 오래된 사진을 가리키자 세아의 손가락이 화면을 가렸다. 복숭아가 담긴 접시, 김정애가 한 벌 더 놓아준 수저, 식탁 끝에 나란히 앉은 두 소녀. 사진을 찍은 날 세아는 정애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우리 엄마, 나도 복숭아 더 줘’라고 웃었다. 연희도 웃었다. 친구가 제 집에서 편히 밥 먹는 게 좋아서였다. 지금 보니 그 웃음 뒤에 남의 자리를 재는 눈이 있었다. 식탁 뒤 벽에는 연희가 유치원에서 받은 상장이 걸려 있었고, 세아는 자기 머리 위로 그 상장이 보이도록 앉아 있었다. 사진의 구도까지 우연이 아니었을까. 연희는 그 생각이 끔찍해서 손바닥을 폈다.“사진 한 장 갖고 뭘 그렇게 지랄이야? 네 엄마가 나 딸처럼 여긴다면서.”“딸처럼 대해 준 거지, 딸 자리를 비워 준 게 아니야. 네 계정엔 왜 이 사진이 ‘시작’으로 저장돼 있는데?”세아는 휴대폰을 움켜쥐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화면 가장자리에는 ‘가족’이라는 분류 표시가 있었다. 옷이나 반지 폴더보다 먼저 만들어진 항목이었다. 연희는 더 들춰 보지 않았다. 남의 의료기록과 대화까지 엮인 계정을 통째로 가져오면 자신이 지키려는 선마저 허물어질 수 있었다. 박도율이 확인 가능한 계정 식별자와 접속 시각만 따로 기록하자 세아는 비웃었다.“아주 대단한 정의의 사도들 납셨네. 네가 싫다 해도 그 집에서 먹은 밥까지 토해 내야 해?”“토할 필요 없어. 누가 먹여 줬는지나 기억해. 엄마는 네가 고기 좋아한다고 내 도시락 반찬까지 나눠 줬어. 너는 그걸 받아먹으면서 내 자리까지 세어 봤어?”연희는 엄마에게 사진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전했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정애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저녁마다 손수건을 목에 두르고 부엌을 오가던 엄마가 떠올랐다. 고등학생 세아가 집에 오면 정애는 달걀말이를 한 줄 더 부쳤고, 겨울에는 연희 것과 같은 두께의 이불을 꺼냈다. 학비가 모자란다는 말에 통장을 열었고, 월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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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엄마 서명도 네 짓?

“한세아가 우리 엄마 글씨까지 훔쳤다고? 설마 그날 수술 서류에도 엄마 이름을 팔아먹은 거야?”이연희는 김정애가 보내 온 연습장 사진을 확대했다. ‘김’ 자의 마지막 획을 짧게 꺾는 버릇까지 닮아 있었다. 빈 종이에는 ‘김정애’라는 이름이 수십 번 겹쳐졌고, 그 옆에는 엄마가 생일 카드에 적던 ‘우리 딸’까지 따라 쓴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엄마를 부러워했다던 친구가 엄마의 글씨를 흉내 내기 위해 밤을 새웠다는 사실보다 끔찍한 건, 그 손글씨를 어디에 썼느냐는 질문이었다.마침 박도율에게 세강병원 기록관리실의 추가 회신이 들어왔다. 지난번 증거보전 요청에서 빠진 수술 관련 보충서류의 스캔본이었다. 연희는 화면을 넘기다 손을 멈췄다. ‘보호자 추가 확인서’. 한세아의 최초 동의서와는 별도로 작성된 문서였다. 보호자 관계를 묻는 칸에는 ‘모’라고 적혀 있었고, 맨 아래 서명은 김정애였다.“이거 거짓말이죠?”연희가 웃었지만 웃음 끝이 흔들렸다. 수술하던 날 정애는 병실에 들어오지도 못했다. 세아가 ‘연희가 안정이 필요하니 지금 오지 말라’는 문자를 보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병원은 정애가 확인한 것처럼 서명을 받아 놓았다. 연희는 휴대폰 속 연습장과 화면의 서명 부분을 나란히 붙여 보았다. 글자의 끝맺음, ‘정’ 자의 동그라미 크기까지 닮았다.도율이 화면을 가렸다.“닮았다는 것과 위조됐다는 건 다릅니다. 스캔 화면만으로 판단하면 저쪽에 반박할 틈을 줍니다. 원본과 작성 당시 출입 기록, 서명한 장소부터 확인해야 합니다.”“서명한 장소요? 우리 엄마는 그날 병원 문도 못 들어왔는데.”“그 사실 역시 증명합시다. 그리고 어머님께 직접 확인받아야 해요.”연희는 전화를 걸었다가 첫 신호음에 끊었다. 엄마가 자기 아이를 지우는 데 동의했을 거라는 의심을 입 밖에 내는 순간, 그날 세아가 했던 짓과 무엇이 달라질까. 그러나 종이에 적힌 엄마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렸을 때 정애가 숙제 끝에 적어 주던 서명, 학교 체험학습 동의서마다 보던 바로 그 글씨였다. 이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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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화. 둘째 딸

화면에서 08번 기록이 사라진 뒤에도 도율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삭제 직전 음성과 심박 기록이 세아가 넘긴 계정 안쪽으로 복사돼 있었다.[ HS_0718 / 대체 가능한 삶 / 임시보관 ]도율은 마지막 좌표와 음성 파일을 경찰에 전송했다.“번호가 바뀌어도 같은 아이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연희는 끊긴 음성의 마지막 부분을 따로 저장했다.[ 내 이름은 윤…… ]“찾으면 번호부터 묻지 말라고 해 주세요.”“이름을 먼저 확인하라고 전달하겠습니다.”도율이 ‘대체 가능한 삶’ 폴더를 생성일 순서로 바꿨다.가장 오래된 사진 한 장이 화면 위로 올라왔다.열 살 무렵의 연희가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옆자리에는 마른 팔로 밥그릇을 감싼 세아가 있었다.세아의 입술은 터져 있었고, 손목에는 오래된 멍이 겹쳐 있었다.사진 뒤편에서 정애가 두 아이의 국그릇을 바꿔 놓고 있었다.연희가 다음 사진을 열었다.현관에는 운동화 두 켤레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한 켤레 안쪽에는 이연희.다른 한 켤레에는 한세아.사진 아래 정애의 글씨가 남아 있었다.[ 둘 다 우산 챙길 것. ]다음 사진에는 도시락 두 개가 놓여 있었다.연희 것에는 멸치 빼기.세아 것에는 계란 두 개.겨울 사진에서 정애는 세아의 깁스 위로 교복 단추를 채워 주고 있었다.학교 비상연락망 사본도 있었다.한세아의 보호자 전화번호에 정애의 번호가 적혀 있었다.관계 칸의 ‘이모’는 두 줄로 지워져 있었고, 그 위에 ‘보호자’라고 다시 쓰여 있었다.연희는 그 종이를 처음 봤다.세아에게 정애가 보호자였던 시간도, 그 관계가 끝난 날도 자신만 모르고 있었다.사진은 하루나 한 계절에 끝나지 않았다.같은 식탁과 같은 현관이 삼 년 동안 반복됐다.연희는 어머니에게 사진을 보냈다.정애는 한참 뒤에야 전화를 받았다.“세아가 우리 집에서 살았어?”“왔다 갔다 했다.”“삼 년치야.”전화기 너머에서 냄비 뚜껑이 내려앉는 소리가 났다.“그 애 아버지가 술 마신 날은 못 돌려보냈다.”“왜 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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