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내 아이를 지운 남자가 내 친구와 결혼한다: Chapter 41 - Chapter 50

159 Chapters

41화. 내 아이 검사표가 네 아기한테

“한세아 배 속 아이 사진에 왜 내 수술번호가 붙어 있어? 최무겸, 애 이름까지 돌려 쓸 셈이었어?”이연희는 화면에 박힌 41082673을 손끝으로 짚었다. 수술실에서 깨어났을 때 팔찌에 적혀 있던 번호였다. 세강병원이 한때는 존재하지 않는다던 기록, 한세아가 보호자로 서명했던 그 번호가 이번에는 축복받는 신부의 초음파 파일명에 붙어 있었다. 아이를 잃은 뒤 병원에서 받은 건 사본 몇 장과 ‘정리됐다’는 답변뿐이었다. 그런데 세아가 자랑하려고 내보낸 보도자료에는 그 번호가 멀쩡히 살아 있었다. 연희는 그 번호를 외우고 있었다. 접수대에서 기록이 없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직원 앞에서 반복했던 숫자였다. 언젠가 그 숫자로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이라도 찾고 싶었다.“파일명만으로 두 사람 기록이 섞였다고 단정할 순 없습니다.”박도율은 원본 배포 주소와 다운로드 시각을 따로 저장했다. 연희가 사진을 확대하자 재단 홍보실에서 함께 내보낸 첨부 묶음이 보였다. ‘산전 진료 요약_보도 검수용’. 공표 자료에 들어가서는 안 될 개인 진료정보였다. 세아 이름이 상단에 찍힌 표의 아래쪽에는 초음파 계측값과 검사 일자가 줄지어 있었다.연희는 그중 한 줄을 보자 의자를 밀었다. 심박수, 계측 길이, 검사가 이뤄진 주수까지, 자신이 임신 초기 받아 둔 검사표와 숫자가 일치했다. 한두 숫자가 아니었다. 마지막 소수점 자리와 측정 시각 표기까지 같았다. 더 기막힌 건 날짜였다. 기사 속 세아는 임신 20주라는데 첨부표에는 연희가 첫 검사에서 들었던 11주 기록이 적혀 있었다. 검사값을 갖다 붙인 사람이 확인조차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표 머리에는 ‘한세아’가 붙어 있었다. 몇 달 전에 측정된 연희 아이의 숫자들이 새 신부의 검사 항목 아래 끼어든 것이다.“이건 제 검사예요. 병원에서 직접 출력받았어요.”연희가 가방 깊숙이 넣어 둔 종이를 꺼냈다. 첫 초음파를 보고 집에 돌아와 무겸과 함께 냉장고 문에 붙이려던 결과표였다. 그때 무겸은 ‘우리 콩알 숫자도 예쁘네’라며 웃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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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멀쩡한 아이를 누가 죽였어?

“치명적 이상이 확인되지 않는다니. 그럼 내 아이한테 사형선고 내린 사람은 누구야?”이연희는 전문의의 예비 소견을 세 번째 읽었다. 손끝이 떨려 종이가 사각거렸다. 자신이 병원에서 들었던 말은 ‘태아에게 치명적 문제가 있어 출산을 권하기 어렵다’였다. 그러나 다른 병원의 전문의가 검토한 원본 계측표에는 그런 결론을 뒷받침할 수치가 없었다. 정상이라고 확정할 자료도 아직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날 의사들이 단정했던 ‘치명적’이라는 말만큼은 숫자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임신 사실을 알던 날, 최무겸은 휴대폰 배경에 첫 초음파 사진을 올리며 ‘우리 콩알 세상에서 제일 튼튼하겠네’라고 웃었다. 이후 검사실 문밖에선 ‘아픈 아이를 낳아 고생시키고 싶어?’라고 했다. 아이가 언제, 무엇 때문에 아프게 됐는지 연희에게 설명한 사람은 없었다.“변호사님. 의사가 저한테 틀린 진단을 내렸다는 뜻이죠?”박도율이 서류를 받아 들었다.“그 가능성을 조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계측 수치만으로 모든 질환을 배제할 순 없어요. 당시의 영상 원본과 전체 판독기록을 확보해야 합니다.”“그럼 확보해요. 날 수술대로 보낼 땐 확실하다던 사람들이, 이제 와선 검사마다 해석이 다르다고 빠져나가지 못하게.”연희는 밤새 보관한 검사표를 날짜별로 펼쳤다. 첫 진료 때 받은 출력물에는 ‘특이 소견 없음’이라는 판독 문장이 있었다. 수술 직전 병원이 나중에 건넨 요약표에는 ‘중증 이상 의심’이 들어 있었다. 그 사이 추가로 어떤 검사를 했는지는 비어 있었다. 같은 아이를 적은 종이인데, 한쪽은 괜찮다고 했고 다른 한쪽은 아이를 낳으면 안 되는 이유가 됐다.“멀쩡한 애를 누가 병들게 만들었는데?”그 질문을 내뱉는 순간 숨이 엉켰다. 연희는 입을 막고 고개를 숙였다. 울음이 터지면 숫자가 흐려질까 봐, 아이의 기록마저 놓칠까 봐 입술을 세게 눌렀다. 도율이 물컵을 가져다 놓았지만 이번엔 손을 뻗지 않았다.정애가 밤새 뜬 아기 양말은 아직 부모님 집 서랍에 있었다. 연희는 초음파 사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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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없는 의사의 서명

사라진 판독 서명은 의사 계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이연희는 세강병원이 보낸 판독 이력 확인서를 읽다가 의자를 밀쳤다. 어제까지 ‘정상 소견에 서명한 의사의 소재를 알 수 없다’던 병원이었다. 그런데 박도율이 원본 전자서명 식별자를 다시 요구하자, 병원은 담당자 이름 대신 계정 등록 정보를 보내 왔다. 종이 맨 아래 직종 칸에는 ‘간호사’라고 적혀 있었다.고미례. 진료지원 간호사.연희가 수술받던 날 태아 계측표에 ‘특이 소견 없음’을 입력한 계정의 명의자였다. 병원이 건네준 요약본에는 의사 서명처럼 표시돼 있었지만, 수정 이력의 사용자 번호를 따라가자 의사가 아닌 간호사의 계정이 나왔다. 누가 실제로 키보드를 눌렀는지, 의사의 판단을 옮겨 적은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연희는 등록 직종이라는 네 글자를 몇 번이나 읽었다. 의사의 판단이라며 수술을 밀어붙일 때는 그렇게 확신에 차 있었으면서, 이제 와서는 의사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다니. 자기 아이를 지울 때만 유난히 빠르고 정확했던 병원이었다.“의사라며요. 그 의사 찾을 수 없다며요. 이제는 간호사라고요?”도율은 두 서류를 맞대고 날짜에 표시했다. 병원 회신에 찍힌 접수번호가 달랐다. 첫 회신에서는 ‘판독 담당 퇴직’, 이번에는 ‘계정 소유자 고미례’. 서로 모순되는 답변을 내놓고도 정정 사유 한 줄 없었다.“병원이 실제 판독자와 전산 입력자를 구분하지 않고 회신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간호사 계정으로 의학적 판독 서명이 완료된 경위는 반드시 확인해야 해요.”“그날 제 애는 치명적으로 아프다더니, 아프지 않다고 적힌 원본에는 누가 사인했는지도 모르겠다고요? 저 인간들 병원이에요, 이름표 바꿔 다는 가면 가게예요?”연희는 첫 초음파 사진을 꺼냈다. 무겸이 ‘우리 콩알’이라 적어 둔 사진이었다. 수술실 앞에서 살려 달라고 빌었을 때 아무도 보여 주지 않았던 원본 숫자가 이제야 입을 열고 있었다. 문제는 그 숫자를 남긴 사람마저 기록 속에서 사라졌다는 것이었다.세강병원 기록관리실을 찾자 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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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13초의 고백

“당신 아이는 아프지 않았어.”이연희는 고미례라는 이름보다 그 말에 먼저 숨이 멎었다. 수술실로 끌려가던 날, 최무겸은 아이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고 했다. 최혜경은 괜한 고집으로 아이를 고생시키지 말라고 했다. 그 말을 믿지 않겠다고 버틴 연희에게는 진정제가 들어갔고, 눈을 떴을 때 배는 비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날 근무했다는 간호사가 전화기 너머에서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었다.“고미례 씨, 지금 무슨 뜻이에요? 제 아이 검사 결과를 직접 봤어요?”수화기 건너편에서 거친 숨이 들렸다. 여자는 대답하기 전에 누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신발 밑창이 자갈을 긁는 소리, 멀리서 차가 후진할 때 울리는 경고음이 섞여 들어왔다.“원본은 정상 판독이었어요. 제 계정으로 입력됐고요. 그런데 수술은 강행됐어요. 제가 말렸는데…….”쾅.자동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터졌다. 미례가 짧게 숨을 삼키더니 전화가 끊겼다. 연희는 얼어붙은 화면을 내려다봤다. 통화 시간은 고작 13초였다. 손에 쥔 휴대폰이 뜨거웠다. 방금까지 듣고 있던 목소리가 끊기자 사무실 천장의 형광등 소음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연희는 빈 의자를 바라봤다. 그곳에 미례가 앉아 조금만 더 설명해 준다면, 자신이 몇 달째 붙잡고 있는 마지막 의문에 답이 생길 것 같았다. 여자가 마지막에 내뱉은 말이 귓속에 달라붙었다. ‘제가 말렸는데.’ 누군가 멈추라고 했는데도 수술은 진행됐다. 그때 복도에 있던 사람들은 대체 몇 명이나 같은 말을 외면했을까.연희는 반사적으로 다시 걸려다가 손가락을 거뒀다. 자동차 문소리가 너무 가까웠다. 미례가 혼자 있었는지, 누가 데려갔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전화를 되걸면 그 사람을 더 위험하게 만들지도 몰랐다.먼저 통화 녹음이 저장됐는지 확인했다. ‘고미례’라고 자신을 밝힌 앞선 말과 이번 13초가 끊기지 않은 통화 파일에 남아 있었다. 연희는 원본을 그대로 보존하고 별도의 사본에서 소리의 순서만 확인했다. 차 문이 닫힌 직후에도 잠깐 옷깃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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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복숭아 상자의 녹음

“고미례가 우리 아빠 과수원 앞에 있었다고? 내 애를 지운 병원 사람이 왜 거길 찾아와?”이연희는 지도 위에 찍힌 점을 확대했다. 이재문이 새벽마다 복숭아 상자를 싣는 창고 입구였다. 얼마 전 아버지의 인감이 묻혔다 나왔던 그 땅. 최무겸과 한세아가 아버지의 땅까지 건드린 뒤라, 연희는 낯선 발자국 하나도 우연으로 넘길 수 없었다.“위치 공유가 그 부근이라는 뜻이지, 미례 씨가 창고에 들어갔다는 증거는 아닙니다.”박도율은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덧붙였다.“무턱대고 찾아다니지 마세요. 부모님께 먼저 안전한지 확인하고, 창고에 이상한 물건이 있으면 손대기 전에 촬영하세요.”연희는 화면을 두 번 눌러 위치 공유의 시각을 저장했다. 미례가 왜 자신에게 말을 남기고 과수원까지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재단 사람들이 뒤따른다면 부모님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다. 먼저 집이 안전한지 확인해야 했다.연희는 곧장 재문에게 전화했다. 농기구를 정리하던 아버지는 딸의 질문을 듣자 잠시 말을 멈췄다.“오늘 오후에 낯선 여자가 왔었다. 복숭아 사러 왔다더니 창고 쪽을 자꾸 보더라고. 내가 누구 찾느냐니까 길을 잘못 들었다며 갔어.”“아빠, 지금 혼자 있어?”“엄마도 있다. 근데 왜 그러냐? 그 여자, 무겸이네가 보낸 사람이냐?”“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어. 일단 창고 문 잠그고 기다려. 내가 갈게.”가는 길에 도율에게 위치와 이동 경로를 전송했다. 그는 낯선 차가 보이거나 문이 강제로 열려 있으면 들어가지 말고 경찰을 부르라고 했다. 어릴 때는 이 길 끝에서 아버지가 복숭아를 쥐여 주었다. 이제 같은 길에서 수술실 기록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연희가 도착했을 때 과수원은 해가 져서 검붉었다. 정애가 현관에 서서 손에 묻은 밀가루를 앞치마에 닦고 있었다. 재문은 손전등을 들고 창고 앞을 지켰다. 녹슨 빗장 옆에는 어제 없던 얇은 긁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누가 또 우리 집을 제집처럼 드나드네. 남의 땅에 도장 찍는 걸로도 모자라?”재문의 말에 연희는 배낭에서 휴대폰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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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지워진 생일의 암호

“내 아이가 태어나기로 했던 날을, 누가 자기 비밀을 여는 번호로 썼다고?”이연희는 복숭아 상자 안에서 나온 쪽지를 다시 펼쳤다. ‘휴대폰 잠금번호는 이연희 씨 아이의 출산 예정일입니다.’ 잉크가 조금 번진 문장이었다. 진료실에서 예정일을 듣던 날, 최무겸은 휴대폰 달력에 별을 그려 놓고 ‘우리 콩알이 세상 구경하는 날’이라며 연희의 배에 입을 맞췄다. 그날이 이제는 태어날 수 없게 된 아이의 이름을 대신하고 있었다.“이걸 누가 알고 있었을까.”김정애는 대답 대신 손을 씻었다. 복숭아 털이 묻은 손끝을 몇 번이나 문지르더니 창고에서 꺼내 온 작은 달력을 내밀었다. 붉은 원 하나가 그려진 날짜였다. 아이를 잃고 돌아온 연희가 찢어 버리려 하자 정애가 몰래 보관한 달력이었다.“엄마가 안 지웠어. 네가 언젠가 다시 보고 싶을까 봐.”그날 밤 연희의 휴대폰에는 세아가 보낸 메시지까지 쌓였다. ‘무겸 오빠랑 나한테 언제까지 들러붙을래? 죽은 애 핑계로 우리 아기까지 불행하게 만들면 가만 안 둬.’ 연희는 화면을 한참 들여다보다 그대로 보존했다. 저 여자는 아이를 지우는 서류에 사인하고도, 아이를 기억하는 일마저 잘못이라고 했다. 연희는 답장 대신 어머니가 적어 둔 출산 예정일을 손으로 가렸다. 세아에게 그 날짜까지 놀림감으로 내줄 수는 없었다.연희는 달력을 받았지만 펴 두지는 못했다. 몇 달 동안 애써 외면했던 숫자를 이제 자기 손으로 눌러야 했다.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빼앗긴 아이가, 처음으로 무언가를 돌려주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다음 날 오전, 박도율은 연희와 부모가 기록한 발견 현장 사진과 봉인 시각을 확인한 뒤 휴대폰과 서류를 수사기관에 제출했다. 잠금 해제와 자료 추출은 디지털 증거 담당자 입회하에 진행하기로 했다. 누가 과수원에 물건을 놓았는지 아직 알 수 없었으므로, 미례가 보낸 것이라고 단정하지도 않았다. 연희는 봉투를 여는 과정까지 기록하고 싶다고 요청했다.“오늘 안에 다 밝혀질까요?”“아뇨. 그래도 누가 파일을 만들었고 언제 수정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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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정리하라는 애 아빠

“기록을 깨끗하게 해.”최무겸의 목소리가 재생되자 이연희는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몇 달 전, 같은 입으로 그는 아이가 태어나면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아빠가 되겠다고 했다. 그런데 수술실 앞에서는 태어날 아이보다 기록부터 걱정하고 있었다. 복도 바퀴 소리와 누군가 종이를 넘기는 소음 사이로 무겸의 숨소리까지 들렸다.“정지하지 마세요.”박도율이 재생을 맡은 분석 담당자에게 부탁하려던 순간, 연희가 먼저 말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들을래요. 저 사람들 때문에 제가 못 들은 말이 얼마나 많은데요.”고미례가 남긴 근무일지는 수술 당일의 시각을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인계 사항과 환자번호가 흘러나왔지만, 어느 순간 주변에서 벌어진 대화가 함께 잡혔다. 무겸이 다급하게 말했다.‘잠깐 멈춰요. 연희가 아직 싫다고 하잖아요.’연희의 가슴이 조여 왔다. 분명 자기 이름이었다. 수술 전 침대에 누워 천장만 보던 순간, 복도에서 무겸을 닮은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었다. 연희는 그가 구하러 왔다고 믿었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힘으로 손목의 줄을 붙잡고 문 쪽으로 몸을 틀었었다. 아무도 커튼을 걷어 주지 않았지만. 그토록 기다렸던 말이 실제로 수술실 앞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손끝이 시렸다. 하지만 파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구두 굽이 바닥을 두드리고, 최혜경의 목소리가 짧게 끼어들었다.‘네가 책임질 수 있어? 재단이 흔들리면 네 자리도 없어.’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뒤 무겸이 내뱉은 말은 처음보다 또렷했다.‘그럼 예정대로 진행하세요. 대신 연희가 거부했다는 기록은 남기지 마. 이사장님 이름도 빼고.’연희는 무릎 아래로 힘이 빠져 의자 끝을 움켜잡았다. 그는 멈추라고 했었다. 고작 한 번. 그러고는 엄마의 말을 듣고 서류를 고치라고 했다. 입술이 떨렸지만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무겸은 아이 방 벽지를 고르면서 연희에게 선택권을 주겠다고 떠들던 남자였다. 정작 가장 중요한 선택 앞에서는 그녀를 지우는 쪽에 서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날 자신은 문 너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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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수면제처럼 쓴 우정

“한세아가 추가 진정제를 요구했다.”이연희는 재생을 멈추지 않았다. 손이 떨려도 이번에는 끝까지 듣기로 했다. 고미례의 숨소리 뒤에서 바퀴 달린 침대가 문턱에 걸리는 소리가 났고, 잠시 후 미례가 시간을 읽었다. 연희가 수술실로 옮겨지기 직전이었다.‘환자분이 계속 거부한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보호자 한세아 씨가 왜 아직도 말을 하게 두느냐며 약을 더 쓰라고 했어요. 처방 권한이 없다고 설명했더니 이사장실에 전화하겠다고…….’녹음은 거기서 한 차례 끊겼다. 의료진의 실제 투약 여부를 확정하는 기록은 아니었지만, 자기 입을 막아 달라고 요구한 사람이 열다섯 해 친구였다는 말만으로도 연희의 손바닥에 식은땀이 찼다. 세아는 병원 침대 옆에서 ‘내가 널 지킬게’라며 손등을 쓰다듬었다. 그 손길을 믿느라 마지막까지 친구의 얼굴을 찾았었다.“절 가만히 있게 만들려고 한 거네요. 제가 계속 싫다고 하니까.”박도율은 분석용 파일의 구간을 표시했다.“요청했다는 정황과 실제 투약은 구분해야 합니다. 원처방, 투여기록, 동의서 작성 시각을 나란히 놓겠습니다.”연희는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병원은 투약 상세 시각을 개인정보 보호라는 이유로 가리더니, 진정제를 처방한 사람의 이름만 남겨 뒀다. 최혜경. 또다시 그 이름을 보니 수술실 앞에서 혜경이 자신의 울음에 눈썹을 찌푸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여자가 건넨 손수건을 거절하자 ‘흥분을 가라앉혀야 해요’라고 했었다. 그 말이 위로가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연희는 그날 손목에 남았던 붉은 자국을 떠올렸다. 침대 난간을 붙잡고 버티는 동안 누군가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 냈다. 자신이 발버둥 친 이유를 묻는 대신 얼마나 소란스러웠는지만 기록했을 것이다.미례의 음성에는 다음 근무 메모가 이어졌다. 진정제 추가 요청을 들은 시각, 담당자에게 보고한 시각, 환자가 다시 거부 의사를 밝혔다는 시각. 미례는 분을 말할 때마다 한 박자 쉬었다. 나중에 누군가 시간을 뒤섞을까 봐 못 박듯이.연희는 법원에 제출할 수 있도록 정리된 자료 묶음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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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47분을 훔친 손

“47분을 되돌렸다고? 최무겸, 내 시간을 훔쳐서 내 입으로 수술에 동의한 척까지 했어?”이연희는 전산 로그의 붉은 숫자를 손끝으로 눌렀다. 고미례의 근무일지에는 자신이 수술을 거부한 뒤 진정제가 투여됐다고 남아 있었다. 그런데 병원이 제출한 전자 동의서에는 그보다 앞선 시각, 환자 본인이 화면을 확인하고 서명했다는 표시가 찍혀 있었다. 깨어서 허락한 여자와 약에 취해 저항한 여자. 같은 날 같은 침대에 있던 사람을 기록은 둘로 갈라놓았다.동의서에는 ‘환자 의식 명료’라는 확인 문구까지 있었다. 연희는 그날의 자기 목소리를 기억했다. “아이 낳을 거예요”라고 외쳤고, 한세아는 그런 말을 하지 못하게 해 달라고 의료진을 닦달했다. 병원은 두 여자 중 한 명의 말만 남겨 놓았다. 마치 연희가 스스로 자기 목소리를 지운 것처럼.박도율이 두 화면을 나란히 띄웠다. 한쪽은 병원 전자서명 시각, 다른 쪽은 시스템이 남긴 작업 순번과 서버 수신 기록이었다. 시각표는 동의가 먼저라고 우겼지만 작업 순번은 진정제 관련 기록 다음에 서명이 저장됐다고 말하고 있었다.“시각만 바꾸고 순번까지는 못 바꾼 걸까요?”“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로그 복제나 전산 오류 여부까지 감정해야 합니다. 지금은 조작 정황이지 감정 결과가 아니에요.”연희는 의자에 등을 기대지 못했다. 수술실 앞에서 침대 난간을 붙들고 ‘싫다’고 외쳤던 목이 다시 아픈 것 같았다. 무겸은 그날 자신의 어깨를 감싸며 ‘우리 애기 엄마, 나만 믿어’라고 했다. 그 손이 결국 자기가 한 말을 못 한 말로 바꾸는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도율이 변경 이력의 사용자 칸을 확대했다. ‘관리자 승인, 전략기획실 비서실 공용 계정.’ 담당 부서에는 최무겸의 이름이 붙은 비서실이 적혀 있었다. 임상 기록을 입력하는 간호사 계정도, 진료를 맡은 의사 계정도 아니었다.“병원 기록을 왜 전략기획실 비서가 고쳐요? 거긴 엑셀로 사람 배까지 뜯어고쳐요?”도율이 입술을 다물었다가 서류를 짚었다.“계정 이름과 실제 사용자는 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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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비서가 판 양심

“원본을 팝니다.”이연희는 화면의 마지막 네 글자를 보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최무겸은 수술 뒤 입막음 돈을 제시했고, 한세아는 아이의 의료사고 보상금으로 변호사를 선임했다. 이제 무겸의 옛 비서라는 여자까지 나타나 진실에 가격표를 붙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연희가 먼저 값을 물을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수술실 문 앞에서 무겸을 불렀던 날, 누구도 그녀의 말을 듣는 대가를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다. 모두가 허락 없이 가져갔을 뿐이었다. 이제 그들이 숨겨 놓은 종이를 되찾으려는데 돈을 달라니, 사람의 양심에도 영수증을 붙일 셈인가.‘얼마짜리 양심인데요?’답장은 순식간에 왔다. ‘직접 만나시죠. 계약금 절반 선입금. 입금 확인되면 전자결재 원본과 관리자 로그를 드립니다.’ 계좌번호 대신 전송된 건 호텔 라운지 주소였다. 연희는 곧장 박도율에게 대화 내용을 넘겼다.“돈 주고 사면 증거로 못 써요?”“매매 자체보다 취득 경위와 원본성, 개인정보 침해 여부가 문제입니다. 불법 반출 자료일 수 있어요. 대화부터 보존하고, 함부로 돈 보내지 마세요.”다음 날 연희는 도율과 함께 사람이 많은 라운지에 앉았다. 천장 조명이 테이블 위 물잔을 희게 비췄다. 약속 시각보다 늦게 들어온 신유라는 검은 재킷에 커다란 선글라스를 걸쳤다. 빈손으로 앉아 물을 주문한 뒤 휴대폰을 탁자에 엎었다.“축하해요. 그 결혼식 박살 내고 제 전 상사 잠 못 자게 한 분이시네.”“전 남의 잠보다 제 수술 기록이 궁금한데요. 신유라 씨, 왜 제 번호를 알아요?”“비서가 그 정도도 모르면 잘리죠. 아, 이미 잘렸지만.”유라는 입술을 비틀었다. 무겸 비서실 공용 계정의 변경 이력을 갖고 있다는 그녀는 자신이 퇴사하며 챙긴 ‘보험용 사본’이라 주장했다. 처음 보여 준 건 승인자 이름이 가려진 전자결재 화면 한 장이었다. 연희가 손을 내밀자 휴대폰을 곧장 뒤집었다.“먼저 입금.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요? 제가 최무겸 밑에서 모은 퇴직금보다 이 파일이 비싸요.”“네 양심은 카드 결제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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