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내 아이를 지운 남자가 내 친구와 결혼한다: Chapter 71 - Chapter 80

148 Chapters

제71화. 삭제된 문장

[ 누가 선택했습니까? ]마지막 물음표가 전광판에 떠오르자, 쏟아지던 박수가 뚝 끊겼다.천장에서 터진 연두색 꽃가루만 느리게 내려앉았다.콩 모양 종이 한 장이 최혜경의 흰 장갑 위에 붙었다.“화면 내려요.”혜경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운영석 직원 셋이 동시에 움직였다.전광판이 검게 꺼졌다. 재단 공식 채널의 생중계 화면도 곧바로 끊겼다.그러나 늦었다.기자석에서 휴대전화 알림음이 연달아 울렸다.15초짜리 영상이 잘려 나가고, 다시 복제되고, 다른 계정으로 옮겨졌다.[ 세강 난임센터 개관식 돌발 문구 ][ ‘당신의 선택’을 뒤집은 질문 ][ 누가 선택했습니까? ]도율이 휴대전화 화면을 연희에게 보였다.“지역 방송에서 자막으로 받았습니다. 재단 채널 삭제 전 화면도 저장됐고요.”“몇 명이 봤어요?”“지금 숫자는 의미 없습니다. 이미 뉴스 편집실로 들어갔어요.”연희는 검게 꺼진 전광판을 바라봤다. 지운 것은 화면뿐이었다. 문장은 이미 병원 밖으로 나갔다.행사장 뒤편의 모니터에는 지역 방송 속보 화면이 떴다.앵커는 개관식 소개를 멈추고 전광판 장면을 반복 재생했다.화면 아래에는 ‘과거 세강의료재단 근무자 이연희’라는 자막이 붙었다.이름이 공개되는 데는 일 분도 걸리지 않았다.기자 한 명이 통제선을 넘어 물었다.“이연희 씨, 병원이 강제로 수술했다는 뜻입니까?”연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단정하는 순간 병원이 원하는 싸움이 시작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제가 말한 건 하나예요. 선택한 사람이 누구인지 기록으로 확인하자는 겁니다.”“최혜경 이사장이나 최무겸 본부장을 지목하는 겁니까?”“그날 서명하고, 약을 승인하고, 시간을 바꾼 사람을 지목합니다. 이름은 기록이 말하게 할 겁니다.”혜경은 기자를 향해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행사 취지와 무관한 개인의 일방적 주장에는 대응하지 않겠습니다.”연희가 조용히 되물었다.“대응하지 않는다고요?”운영석 직원의 모니터에는 이미 ‘긴급 법무 검토’라는 붉은 창이 떠 있었다.무겸이 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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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화. 고소장의 문법

고소장 첫 문장은 연희가 썼다.[ 피고소인은 확인되지 않은 개인적 기억을 객관적 사실인 것처럼 유포하여 의료기관의 사회적 신뢰를 훼손하였다. ]연희는 행사장 계단에 선 채 화면을 내리지 못했다.기자들이 출입문 밖에서 이름을 불렀지만,귀에 들어오는 것은 문장 속 단어뿐이었다.개인적 기억.객관적 사실.사회적 신뢰.“제가 만든 문구예요.”도율이 휴대전화를 받아 고소장을 넘겼다.“확실합니까?”“쉼표까지 기억해요.”몇 해 전 세강병원에서 신생아 사망 사고가 났을 때였다.연희가 쓴 첫 초안에는 '유가족의 진술을 먼저 듣겠다’고 적혀 있었다.결재를 거쳐 돌아온 문서에서는 유가족이 민원인으로, 진술이 주장으로 바뀌었다.수정 의견은 짧았다.[ 감정 표현 삭제 ][ 의료행위의 객관성 강조 ][ 재단 신뢰 우선 ]무겸은 그 문서를 연희에게 돌려주며 말했다.‘주어를 정리해야 손실이 줄어.’혜경은 최종본의 모서리를 반듯하게 맞췄다.‘날이 보이지 않는데도 잘 잘리는 문장이군요.’그때는 칭찬인 줄 알았다. 지금 보니 사람의 말을 기록 밖으로 밀어내는 법을 배운 날이었다.고소장 두 번째 문장도 익숙했다.[ 개인의 불행을 기관 전체의 구조적 문제로 확대하는 행위에는 엄정히 대응한다. ]연희가 처음 쓴 원문은 달랐다.[ 한 사람의 피해가 구조적 문제와 연결되는지 조사하겠다. ]재단은 ‘조사하겠다’를 ‘대응한다’로 바꿨고, 피해를 불행으로 줄였다.문장 하나를 뒤집었을 뿐인데 병원은 책임을 묻는 쪽에서 처벌하는 쪽으로 옮겨가 있었다.“제가 남의 입을 막으려고 만든 문장이 아니었어요.”도율은 괜찮다는 말을 얹지 않았다.“처음 문장과 최종 문장은 다릅니다. 누가 어떻게 바꿨는지 확인하면 됩니다.”행사장 유리문 안에서는 직원들이 전광판 아래 장식을 떼고 있었다.흰 아기 양말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누군가 밟고 지나간 양말에 연두색 꽃가루가 달라붙었다.장인우가 통제선을 돌아 계단 옆으로 올라왔다.손에는 법무실이 기자들에게 배포한 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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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화. 무겸의 문장

무겸은 연희의 문장을 해부해 놓았다.호텔 라운지 테이블 위 태블릿에는 그녀가 자주 쓰는 단어가 항목별로 정리돼 있었다.[ 예정일 — 과거에 고착된 인상 ][ 누가 — 책임 전가로 해석 ][ 기록 — 집요함과 불신 강조 ][ 내 아이 — 소유 집착 유도 ]연희는 화면을 끝까지 읽고서야 무겸을 보았다.“이걸 네가 만들었어?”“여론분석팀 자료야.”“분석팀이 내 일기까지 읽었나 보네.”무겸은 대답 대신 태블릿을 옆으로 밀었다. 개관식 영상 아래 달린 댓글이 시간대별로 분류돼 있었다.[ 아이를 잃은 슬픔을 병원 공격에 이용한다. ][ 전 남자에게 집착하는 것 같다. ][ 개인 연애와 의료 문제를 섞지 마라. ]연희가 실제로 하지 않은 말도 따옴표 안에 들어가 있었다.[ 내 아이를 빼앗았다. ][ 세강이 나를 죽이려 한다. ]“내가 한 말이 아니야.”“사람들이 그렇게 받아들였다는 뜻이야.”“아니. 그렇게 받아들이게 써 놓은 거지.”무겸의 손끝이 댓글 반응 그래프를 한 번 훑었다.“넌 날짜와 물건을 반복해. 약 봉투, 팔찌, 예정일.처음에는 구체적으로 들리지만 계속 나오면 집착처럼 보여. 질문형 문장도 많고.”연희는 그의 얼굴에서 연애하던 시절을 찾아보려 했다.원고를 가장 먼저 읽고, 같은 단어가 두 번 나오면 표시해 주던 사람.새벽 두 시에도 초안을 보내면 다 읽은 뒤 ‘이 문장은 너답다’고 답하던 사람.그때는 자신을 이해한다고 믿었다.이제 보니 그는 연희의 문장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용법을 익힌 것이었다.창가 유리에 무겸의 얼굴과 연희의 얼굴이 겹쳤다.두 사람 사이에는 찻잔 하나와 녹지 않는 각설탕 두 개가 놓여 있었다.예전에는 무겸이 연희 잔에 설탕을 넣었다. 오늘은 어느 쪽도 손대지 않았다.“그래서 고소장도 네가 썼어?”“초안만 정리했어. 법무실이 검토했고.”“내 말투를 제일 잘 아니까?”“대중이 싫어할 지점을 알았으니까.”그 대답에는 변명도 미안함도 없었다. 손실표를 읽듯 정확했다.무겸은 서류 봉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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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화. 땅까지 지우는 계약

“이건 합의서가 아니에요.”도율은 연희가 가져온 별지를 책상 위에 펼쳤다. 고소 취하, 자료 반환, 언론 접촉 금지 뒤에 붙은 마지막 조건은 부모의 농지 전부를 세강 계열 개발회사에 넘기는 것이었다. 지번과 면적, 매매대금, 이전 기한까지 채워져 있었고 비어 있는 곳은 이재문과 김정애의 서명란뿐이었다.“채무를 갚는 계약이라면 담보권을 해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문서는 소유권부터 가져가게 돼 있어요.”“아버지는 저 회사에 땅을 담보로 잡힌 적도 없어요.”“그러면 채무 정리는 명분이고, 목적은 매입입니다.”도율이 토지이용계획도를 열었다. 별지의 지번을 하나씩 입력하자 지도 위에 붉은 경계가 생겼다. 세강 신도시 병원 예정 부지는 고속도로 쪽 빈 땅에서 끝나지 않았다. 마을 진입로를 가르고, 회관과 정류장을 지나, 재문의 복숭아밭 한가운데를 관통했다.연희는 화면을 확대했다. 부모가 사는 집은 이름이 아니라 숫자로 표시돼 있었다.[ 철거 대상 17-3 ]복숭아나무가 줄지어 선 밭은 주차장 예정지였다. 어머니가 고추와 들깨를 심던 자투리땅에는 자재 적치장이 그려져 있었다. 병원 도면 속에서 부모의 집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치워야 할 구조물이었다.“마을을 빈 땅처럼 그려 놨네요.”“부지 확보율도 이미 계산돼 있습니다.”도율이 산정표를 가리켰다. 연희 부모의 농지는 ‘협의 완료 예정’으로 분류돼 있었다. 서명도 받기 전에 확보된 땅으로 계산한 것이다.“부모님께 알려야 합니다.”연희는 곧바로 전화를 누르지 못했다. 수술 기록 때문에 부모의 통장이 막혔고, 이제는 자신이 입을 다무는 조건에 평생 일군 땅까지 붙었다. 말하지 않으면 잠깐은 지킬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 침묵도 무겸이 요구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연희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빠, 세강에서 땅 얘기한 적 있어?”수화기 너머에서 물이 흐르다 멈췄다.“병원 들어온다는 소리는 들었다. 우리 밭은 안 판다고 했다.”“계약서에는 이미 금액까지 적혀 있어.”“나무값도 모르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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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화. 깨끗한 종이

[ CLEAN SLATE ]연희는 화면의 영어를 읽는 순간, 고향집 식탁을 떠올렸다.“그 사람에게만 깨끗한 종이가 주어진다고 했어요.”도율이 복구 파일에서 시선을 떼었다.“누구에게 한 말입니까?”“엄마하고 아빠요. 집에서.”그날 저녁 텔레비전에서는 세강의 의료사고 관련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재단은 사실관계를 확인하겠다며 시간을 벌었고, 피해자 가족에게는 추측성 발언을 삼가 달라고 요구했다. 연희는 식은 국을 젓다가 말했다.‘잘못한 사람은 지우고 다시 쓰면 되잖아. 그 사람에게만 깨끗한 종이가 주어지니까.’정애는 국부터 먹으라고 했고, 재문은 텔레비전을 껐다.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기사에도 쓰지 않았다. 일기에도 남기지 않았고, 세아나 무겸에게 보낸 적도 없었다. 그 문장을 들은 사람은 부모뿐이었다.도율은 프로젝트 파일의 변경 이력을 열었다. 최초 등록 때는 숫자로 된 임시명이었고, ‘CLEAN SLATE’가 입력된 것은 연희가 고향집에서 그 말을 한 다음 날이었다.“우연일 가능성도 있습니다.”“내가 쓰지도 않은 문장이 하루 만에 재단 사업명이 되는 우연이요?”“그래서 확인해야 합니다. 집 안의 말이 밖으로 나갈 경로가 있었는지.”연희는 곧바로 아버지에게 전화했다.“아빠, 집에 손대지 말고 그대로 둬.”수화기 너머에서 수도꼭지가 잠겼다.“밥상도?”“응.”“반찬 상한다.”“냉장고에 넣는 건 괜찮아.”재문은 잠시 말이 없더니 물었다.“누가 우리 집 말을 들었냐?”연희는 아니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확인하러 갈게.”“올 때 두부나 사 와라. 네 엄마가 국 끓인단다.”통화가 끝난 뒤 연희는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 집 안에서 한 문장이 흘러나갔을 가능성을 말하면 부모는 이제 식탁에서도 목소리를 줄일지 몰랐다. 병원은 연희의 기록을 바꿨고, 이번에는 가족이 안심하고 말하던 장소까지 의심하게 만들었다.도율이 차 열쇠를 집었다.“제가 먼저 확인 범위를 설명하겠습니다. 부모님이 허락한 곳만 보죠.”“증거 찾는다고 우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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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화. 듣고 있던 집

도율은 검은 단추를 증거 봉투에 넣었다.“지금부터는 아무것도 누르지 마십시오. 전원이 살아 있으면 마지막 접속 기록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정애는 의자에 걸린 작업복을 바라봤다.“내 남편 옷인데, 이제 만지는 것도 허락을 받아야 하네.”“증거를 지키려는 겁니다. 집의 주인은 두 분입니다.”도율은 확인할 범위를 다시 물었다. 재문은 거실과 부엌을 허락했고, 안방 장롱은 자신이 열겠다고 했다. 정애는 서랍 속 물건을 직접 꺼내 식탁에 올렸다. 녹음기 하나가 발견됐다고 해서 집 전체를 남의 수색 장소로 내줄 수는 없었다.공유기, 벽시계, 전화기, 멀티탭에서는 다른 장치가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도 없었다. 단추 하나만으로도 식탁과 마당, 복도까지 따라다닐 수 있었다.연희는 아버지의 작업복을 보았다.그 옷을 입고 재문은 수술 동의서 이야기를 들었다. 정애와 과수원 빚을 의논했고, 잠들지 못한 딸의 방문 앞을 새벽마다 오갔다. 가족이 말하지 않은 시간까지 누군가 가져갔을지 몰랐다.“엄마, 아빠가 나 때문에—”재문이 작업복을 접어 의자 위에 놓았다.“도둑이 들어온 일을 네 짐으로 들지 마라.”“내 일을 쫓아온 사람이잖아.”“문을 연 놈과 훔친 놈이 따로 있는데 네가 왜 가운데 서냐.”정애는 식은 두부찌개를 다시 불 위에 올렸다.“말 줄일 생각도 하지 마. 우리가 우리 집에서 날짜 골라 말하면, 귀 달아 놓은 놈이 주인이 되는 거야.”도율은 증거 봉투를 챙겼다.“오늘 밤은 다른 곳에서 주무실 수도 있습니다.”재문은 장화를 현관에 나란히 놓았다.“내 집 놔두고 내가 왜 나가.”“그 선택도 두 분이 하시면 됩니다. 다만 분석이 끝날 때까지 발견 사실은 외부에 알리지 마십시오.”정애가 국자를 내려놓았다.“누구한테 말해야 외부인데요? 딸한테 말하면 가족이고, 경찰한테 말하면 외부예요?”도율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지금은 설치자를 모릅니다. 먼저 장치가 어디서 왔는지 확인하겠습니다.”사무실로 돌아온 뒤 분석 결과는 예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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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화. 듣고 있던 집

도율은 검은 단추를 증거 봉투에 넣었다.“지금부터는 아무것도 누르지 마십시오. 전원이 살아 있으면 마지막 접속 기록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정애는 의자에 걸린 작업복을 바라봤다.“내 남편 옷인데, 이제 만지는 것도 허락을 받아야 하네.”“증거를 지키려는 겁니다. 집의 주인은 두 분입니다.”도율은 확인할 범위를 다시 물었다. 재문은 거실과 부엌을 허락했고, 안방 장롱은 자신이 열겠다고 했다. 정애는 서랍 속 물건을 직접 꺼내 식탁에 올렸다. 녹음기 하나가 발견됐다고 해서 집 전체를 남의 수색 장소로 내줄 수는 없었다.공유기, 벽시계, 전화기, 멀티탭에서는 다른 장치가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도 없었다. 단추 하나만으로도 식탁과 마당, 복도까지 따라다닐 수 있었다.연희는 아버지의 작업복을 보았다.그 옷을 입고 재문은 수술 동의서 이야기를 들었다. 정애와 과수원 빚을 의논했고, 잠들지 못한 딸의 방문 앞을 새벽마다 오갔다. 가족이 말하지 않은 시간까지 누군가 가져갔을지 몰랐다.“엄마, 아빠가 나 때문에...”재문이 작업복을 접어 의자 위에 놓았다.“도둑이 들어온 일을 네 짐으로 들지 마라.”“내 일을 쫓아온 사람이잖아.”“문을 연 놈과 훔친 놈이 따로 있는데 네가 왜 가운데 서냐.”정애는 식은 두부찌개를 다시 불 위에 올렸다.“말 줄일 생각도 하지 마. 우리가 우리 집에서 날짜 골라 말하면, 귀 달아 놓은 놈이 주인이 되는 거야.”도율은 증거 봉투를 챙겼다.“오늘 밤은 다른 곳에서 주무실 수도 있습니다.”재문은 장화를 현관에 나란히 놓았다.“내 집 놔두고 내가 왜 나가.”“그 선택도 두 분이 하시면 됩니다. 다만 분석이 끝날 때까지 발견 사실은 외부에 알리지 마십시오.”정애가 국자를 내려놓았다.“누구한테 말해야 외부인데요? 딸한테 말하면 가족이고, 경찰한테 말하면 외부예요?”도율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지금은 설치자를 모릅니다. 먼저 장치가 어디서 왔는지 확인하겠습니다.”사무실로 돌아온 뒤 분석 결과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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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화. 도둑맞은 자장가

[ KJA_LULLABY ]파일명 아래에는 녹음 날짜와 재생 시간이 적혀 있었다.연희가 강에서 돌아온 첫날 밤.47분 12초.도율은 재생 버튼에 손을 대지 않았다.“어머니 목소리입니다. 먼저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연희는 정애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장가 파일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정애는 한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로 그릇을 포개는 소리만 두 번 났다.“엄마가 정해. 안 들을 수도 있어.”“틀어.”“엄마.”“내가 부른 노래라며. 남이 훔쳐 가서 이름까지 붙였는데, 나는 못 듣는 게 더 우습지.”도율은 통화를 스피커로 전환한 뒤 복제본을 재생했다.처음에는 방문이 닫히는 소리만 들렸다. 정애가 물컵을 내려놓고 이불을 당겨 주는 소리, 재문이 복도 끝에서 기침을 참는 소리도 이어졌다.그리고 노래가 시작됐다.연희가 어릴 때 열이 오르면 정애가 부르던 자장가였다. 음정은 자주 흔들렸고 같은 구절이 몇 번이나 반복됐다. 노래 사이마다 정애는 잠든 딸의 숨을 확인했다.‘오늘만 자자.’‘내일 일어나서 밥 먹자.’‘물은 엄마가 떠다 놓을게.’연희는 화면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강에서 돌아온 뒤 자신이 잠든 줄만 알았던 밤이었다. 어머니는 딸이 눈을 뜰 때까지 같은 노래를 47분 동안 되풀이했다.파일이 끝나자 정애가 먼저 물었다.“끝까지 다 들었니?”“응.”“그럼 됐다. 그날 네가 살아 있었던 것도 같이 들어갔겠지.”연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수치심이 먼저 올라왔다. 자신이 무너졌던 밤을 누군가 들었고, 어머니의 다급한 부탁까지 보관했다는 사실이 견디기 어려웠다.도율이 파일 속성 창을 열었다.“음성만 저장한 게 아닙니다.”파일 오른쪽에는 작성 부서와 분류 목적이 붙어 있었다.[ 작성 부서: 재단 위기관리팀 ][ 자료 유형: 감정 취약도 자료 ][ 대상자: 이연희 ][ 보호자 변수: 김정애 ]연희의 시선이 마지막 항목에서 멎었다.[ 활용 가능 요소 ][ 모친의 죄책감 ][ 수면 전 반복 언어 ][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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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화. 유리집의 이사장

연희가 초인종에 손을 대기 전에 현관문이 열렸다.최혜경은 안쪽으로 한 걸음 물러나 길을 내줬다.“들어와요. 찾을 게 있다면 직접 봐요.”현관에서 거실, 주방, 서재까지 막힌 곳이 없었다.유리문은 모두 열려 있었고 장식장과 수납장도 반쯤 비워진 채였다.숨길 것이 없다는 말을 집 전체가 대신하고 있었다.도율은 현관 밖에 섰다.“문은 열어 두겠습니다. 나올 때 말씀하세요.”연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혜경은 현관문을 닫지 않았다.대신 거실 한가운데로 걸어가 차 두 잔을 준비했다.연희는 자리에 앉지 않고 가방에서 문서 한 장을 꺼냈다.[ 자료 유형: 감정 취약도 자료 ][ 보호자 변수: 김정애 ]“우리 엄마 자장가를 누가 이렇게 분류했죠?”혜경은 종이를 읽지 않았다.“출처부터 확인해야겠군요.”“세강 서버에서 나왔어요.”“서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사장 개인의 지시가 되진 않습니다.”“그래서 지시했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누가 만들었는지 물었죠.”혜경은 찻잔을 연희 쪽으로 밀었다.“당신은 질문과 비난을 구분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당신들은 사람과 자료를 구분하지 못하고요.”“기관은 위험을 관리합니다. 예측하기 어려운 대상의 주변 관계를 검토하는 일도 그 안에 들어가죠.”“딸이 살아 있는지 확인하던 엄마의 노래가 누구에게 위험했습니까?”혜경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대답 대신 거실 양쪽 문을 더 활짝 밀어 열었다.“보고 싶은 곳이 있으면 보세요. 이 집에는 잠긴 문이 없습니다.”연희는 서재와 복도 끝까지 이어진 투명한 벽을 바라봤다.문은 열려 있었지만 어디에도 편히 등을 보일 자리가 없었다.유리에 비친 자신의 뒤편으로 작은 붉은 점 하나가 켜졌다가 사라졌다.천장 모서리에 렌즈가 박혀 있었다.주방 입구, 책장 위, 계단 아래에도 같은 크기의 검은 원이 보였다.현관에서 거실로 들어온 순간부터 어느 쪽으로 움직여도 촬영 범위를 벗어날 수 없는 구조였다.연희가 천장을 올려다봤다.“지금 녹화 중이네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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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화. 엄마가 되는 자격

“그 영상이 법정에서 당신을 보호할 거라고 생각해요?”혜경은 천장 카메라를 확인하지도 않았다. 연희의 얼굴과 목소리가 어느 각도로 저장되는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연희는 가방을 내려놓지 않았다.“적어도 당신이 무슨 기준으로 사람을 분류하는지는 남겠죠.”“기준이 없으면 더 많은 사람이 다칩니다.”혜경은 탁자 위 ‘감정 취약도 자료’를 뒤집었다.“당신은 수술 전후로 설명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치료 지시도 따르지 않았어요. 위기 행동까지 기록돼 있죠. 그런 상태에서 아이를 안정적으로 보호할 수 있었을까요?”연희는 혜경이 원하는 장면을 알아차렸다. 목소리를 높이거나 문을 박차고 나가면, 이 집의 영상은 또 하나의 ‘불안정한 이연희’가 된다.그래서 날짜부터 꺼냈다.“수술 전날 밤 11시 40분에 진정제가 추가됐어요. 전자동의서 시간은 47분 앞으로 옮겨졌고, 정상 판독은 다른 기록에 붙었죠.”혜경의 손이 뒤집힌 문서 위에 놓였다.“그 사실들이 양육 능력을 증명하지는 않아요.”“당신들이 내 몸을 망가뜨린 과정은 빼고, 망가진 모습만 자격 심사에 썼다는 건 증명하죠.”“모든 원인을 외부에 돌리는 태도도 안정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외부가 아니라 이름을 말하는 거예요. 최혜경, 최무겸, 한세아. 날짜하고 서명이 있는 사람들.”천장 카메라의 붉은 표시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깜박였다. 혜경은 연희의 분노를 기록하려 했지만, 화면에 쌓이는 것은 수술 시각과 처방, 숨겨진 판독이었다.혜경이 찻잔을 자신의 정면으로 옮겼다.“아이를 낳는다고 누구나 좋은 어머니가 되는 건 아닙니다. 출산은 권리만이 아니라 책임이기도 해요.”“그 책임을 질 기회를 누가 없앴죠?”“아이의 안전을 판단할 사람은 필요합니다.”“그날 내 아이한테 가장 위험했던 사람이 판단자가 됐네요.”혜경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연희의 젖은 옷 사진, 강가 기록, 약 복용 내역이 들어 있을 법한 얇은 서류철을 탁자 끝에 올렸다. 표지에는 이름 대신 번호만 붙어 있었다.연희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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