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합의서가 아니에요.”도율은 연희가 가져온 별지를 책상 위에 펼쳤다. 고소 취하, 자료 반환, 언론 접촉 금지 뒤에 붙은 마지막 조건은 부모의 농지 전부를 세강 계열 개발회사에 넘기는 것이었다. 지번과 면적, 매매대금, 이전 기한까지 채워져 있었고 비어 있는 곳은 이재문과 김정애의 서명란뿐이었다.“채무를 갚는 계약이라면 담보권을 해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문서는 소유권부터 가져가게 돼 있어요.”“아버지는 저 회사에 땅을 담보로 잡힌 적도 없어요.”“그러면 채무 정리는 명분이고, 목적은 매입입니다.”도율이 토지이용계획도를 열었다. 별지의 지번을 하나씩 입력하자 지도 위에 붉은 경계가 생겼다. 세강 신도시 병원 예정 부지는 고속도로 쪽 빈 땅에서 끝나지 않았다. 마을 진입로를 가르고, 회관과 정류장을 지나, 재문의 복숭아밭 한가운데를 관통했다.연희는 화면을 확대했다. 부모가 사는 집은 이름이 아니라 숫자로 표시돼 있었다.[ 철거 대상 17-3 ]복숭아나무가 줄지어 선 밭은 주차장 예정지였다. 어머니가 고추와 들깨를 심던 자투리땅에는 자재 적치장이 그려져 있었다. 병원 도면 속에서 부모의 집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치워야 할 구조물이었다.“마을을 빈 땅처럼 그려 놨네요.”“부지 확보율도 이미 계산돼 있습니다.”도율이 산정표를 가리켰다. 연희 부모의 농지는 ‘협의 완료 예정’으로 분류돼 있었다. 서명도 받기 전에 확보된 땅으로 계산한 것이다.“부모님께 알려야 합니다.”연희는 곧바로 전화를 누르지 못했다. 수술 기록 때문에 부모의 통장이 막혔고, 이제는 자신이 입을 다무는 조건에 평생 일군 땅까지 붙었다. 말하지 않으면 잠깐은 지킬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 침묵도 무겸이 요구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연희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빠, 세강에서 땅 얘기한 적 있어?”수화기 너머에서 물이 흐르다 멈췄다.“병원 들어온다는 소리는 들었다. 우리 밭은 안 판다고 했다.”“계약서에는 이미 금액까지 적혀 있어.”“나무값도 모르는
Last Updated : 2026-08-07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