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Chapter 201 - Chapter 210

328 Chapters

201화. 한 달

한 달 뒤.삭왕부 안마당의 살구는 작은 열매를 맺었고, 주칠 대문에는 여전히 황실 봉인이 붙어 있었다.온보요는 창가 소반에 놓인 종이쪽지 열다섯 장을 다시 세었다. 이틀마다 궁에서 나온 글은 한 줄뿐이었다.길은 아직 이어져 있다.처음 다섯 장에는 소월백의 본래 수결이 찍혀 있었다. 다음 다섯 장에는 둘째 황자에게 새로 내린 붉은 인장이 붙었다. 마지막 다섯 장은 궁 안에서만 쓰는 금테 종이였다. 종이는 번듯해질수록 얇아졌고, 글씨는 갈수록 종이 한가운데에 갇혔다.보요가 열다섯 번째 쪽지를 접자 여름 볕이 얇은 치마 위로 내려앉았다. 한 달 전에는 허리띠 아래 숨던 배가 이제는 가벼운 옷 아래에서 둥글게 자리를 잡았다. 진묵은 서책을 읽다가도 그 자락이 조금만 당기면 눈부터 들었다."또 보십니까.""내 아이인데 왜 못 봐.""신첩 얼굴도 좀 보시지요."진묵이 서책을 덮었다."그건 계속 보고 있고."그가 보요를 제 무릎으로 끌어 앉혔다. 감시하는 궁인이 열린 창 너머에 둘이나 있었지만 손은 거리끼지 않았다. 손바닥이 불러오는 배를 누르지 않게 감싸고, 다른 손으로 차가워진 매실차를 치웠다."찬 것은 그만 마셔.""어의는 한 잔까지 괜찮다 했습니다.""그 어의가 네 배를 안고 자나.""왕야."한마디에 진묵은 찻잔을 도로 놓았다. 대신 제 손으로 잔을 데우겠다는 듯 두 손 사이에 품었다. 창밖 궁인 하나가 황급히 눈을 내렸다.그 한 달 동안 온 대인의 옥문은 열리지 않았다. 큰오라비는 사흘에 한 번 기침 소리만 전했고, 남쪽 객사의 증인들은 서로 만나지 못했다. 중서성에 들어간 다섯 고을 원본은 봉인을 뜯지 않은 채 황실 창고로 옮겨졌다.왕부의 하루는 문소리로 나뉘었다. 새벽에는 여의가 들어와 보요의 맥을 짚었고, 낮에는 금군이 창호지를 들어 안채 사람 수를 세었다. 저녁이면 온가 쪽에서 온 작은 약 바구니가 문턱에서 세 번 뒤집혔다. 그 안에 글은 없었다. 방어멈이 싼 말린 매실의 수만 달라졌다. 아버지의 기침이 들린 날에는 셋,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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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화. 열다섯 장

"불에 비춰 봐."진묵이 첫 주머니를 밀었다. 온보요가 빈 비단을 등불 앞에 들자 안쪽에서 먹획이 떠올랐다. 첫째에는 초이튿날, 둘째에는 초나흗날. 날짜와 쪽지가 왕부에 들어온 때까지 이미 적혀 있었다."우리가 몇 장 가졌는지 세러 온 것이 아니군요."사자가 입을 다물었다.진묵은 열다섯 번째 주머니를 집어 바닥의 먹을 엄지로 문질렀다. 마른 먹은 번지지 않았다."어제 만든 것도 아니야. 쪽지 올 때마다 하나씩 만들었군."궁에서 나온 글은 수인문을 지나 왕부에 닿을 때마다 두 번 접수되었다. 문지기가 봉인을 살피고, 황실 서리가 보낸 때를 적었다. 진묵과 보요가 보낸 답장도 같은 손을 거쳤다. 그들은 서로 살아 있음을 알았고, 황제는 그 안부가 쌓이는 모양을 보았다.보요는 첫 쪽지를 주머니에 넣었다."내일 무엇을 물으실 예정입니까.""소인은 알지 못하옵니다.""그럼 아는 이를 보내세요. 원본을 가져오라면 받을 사람의 이름도 있어야 합니다."사자가 곤란한 낯으로 문밖을 보았다. 곧 황실 서리 하나가 들어왔다. 겨드랑이에 두꺼운 장부를 끼고 있었다.그는 마루 아래에 엎드려 첫 장을 펼쳤다. 종이 위에는 세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소월백, 진묵, 온보요. 그 아래로 같은 문장이 서른 번 적혔다. 궁에서 나온 열다섯 번과 왕부에서 들어간 열다섯 번이었다."중서성에서 오늘 아침 문답할 문구로 올렸사옵니다.""어떤 문답이지?"진묵이 묻자 서리의 이마가 마룻바닥에 닿았다."황자께서 이미 성 안에 계신데도 무슨 길이 이어져야 하는지, 그 길 끝에 어느 자리를 두었는지 묻는다 하셨습니다."진묵이 웃었다. 소리는 낮았으나 서리의 어깨가 더 굳었다."사람 살아 있냐고 묻는 것도 역모라니. 경성 법은 한 달 사이 많이 자랐군."온보요는 쪽지를 날짜 순서대로 넣었다. 종이 가장자리마다 작은 바늘구멍이 있었다. 궁에서 필사할 때 한꺼번에 꿰어 순서를 맞춘 흔적이었다. 한 장도 우연히 흘러나온 적이 없었다."연회를 베푸는 까닭도 적혀 있습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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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화. 가족의 상

이튿날, 내관이 빈 열두 줄을 황제 앞에 펼치자 참외 접시가 상 끝으로 밀려났다.붉은 기둥 사이로 매미 소리가 들었다. 긴 상에는 얼음에 식힌 참외와 연밥, 맑은 닭국이 올랐으나 누구도 수저를 들지 않았다. 황제는 가장 높은 자리에, 소월백은 오른편 한 단 아래에 앉았다. 한 달 만에 본 월백은 황자 예복을 입고 있었다. 소매에는 금실 구름이 가득했지만 손목에는 옥문에서 눌린 자국이 아직 남아 있었다.상마다 이름패도 놓여 있었다. `둘째 황자`, `삭왕`, `삭왕비`. 소월백이라는 석 자만 어디에도 없었다. 황제가 돌려주었다는 자리는 사람의 이름부터 걷어 낸 뒤 마련되어 있었다.보요가 월백의 이름패를 뒤집자 밑면에 가느다란 칼자국이 보였다. 한 달 동안 누군가 다른 호칭을 새겼다가 다시 갈아 낸 흔적이었다. 월백은 그것을 보고도 말하지 않았다. 대신 이름패를 상 아래로 내려놓았다.황제가 눈썹을 들었다."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느냐.""제 이름이 없는 자리는 아직 제 자리가 아닙니다."소월백은 빈 상 앞에 그대로 앉았다. 궁인들이 새 이름패를 가져오려 했으나 황제는 막았다. 가족을 보이는 연회는 첫 음식에 손대기도 전부터 금이 갔다.온보요가 그 자국을 보는 사이 진묵이 제 찻잔을 그녀 앞에 밀었다."따라 줘."궁인이 다가오려 하자 그가 눈만 들었다. 궁인은 그대로 멎었다."손이 없으십니까."보요가 낮게 물었다."있는데 네가 따라 준 게 낫다."퉁명스러운 말과 달리 그는 보요가 일어날 틈도 주지 않았다. 주전자를 직접 들어 그녀 손에 쥐여 주고, 무거운 밑은 제 손으로 받쳤다. 차가 잔에 차오르자 소월백이 헛웃음을 흘렸다."삭왕 전하께서는 궁에서도 수발을 받으셔야 합니까.""부인 있는 놈이 왜 남의 손을 받아."진묵은 보요가 따라 준 잔만 마셨다. 황제의 상에서조차 누가 그녀의 부군인지 보란 듯한 태도였다."잔은 내려놓으세요. 속이 비었잖아요."보요가 닭국을 앞으로 밀자 그는 말없이 잔을 놓고 국부터 들었다. 소월백의 입가에 웃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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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화. 빈 의자

촤악.식은 닭국이 붉은 비단을 타고 열다섯 쪽지까지 번졌다.내관들이 달려들었으나 황제가 손을 들었다. 젖은 종이에서는 `길` 자부터 먹물이 풀렸다. 열두 사람의 이름을 적으라던 빈 줄은 기름 자국 아래로 사라졌다."아비의 상을 엎는 딸이로구나."황제가 말했다.온보요는 빈 그릇을 내려놓았다."아버님은 사람을 팔아 앉을 자리라면 싫어하실 겁니다. 식은 국으로 효녀인 척하는 것도요."진묵이 제 무명을 꺼내 보요의 손등에 튄 국물을 닦았다. 황제를 앞에 두고도 먼저 살핀 것은 그녀 손이었다."데지 않았나.""식었다고 말씀드렸잖아요.""그래도 살핀다.""괜찮습니다. 앉으세요."그는 바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다만 의자를 보요 쪽으로 붙여 팔 하나가 그녀 등 뒤를 가렸다.소월백은 젖지 않은 쪽지 하나를 집었다. 자신의 수결이 찍힌 마지막 글이었다."이 문장을 먼저 정한 것은 접니다. 두 분께 죄를 물으시려면 제 이름을 맨 위에 올리십시오.""너는 돌아온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다. 저 여인은 스무 해를 사람을 심었다.""그러니 더더욱 열둘은 제 사람이 아닙니다."황제는 대답 대신 내관에게 눈짓했다. 새 종이 두 장이 올라왔다. 한 장에는 온 대인의 옥중 진술이 적혀 있었다. 오른손이 부러졌으며, 노궁인의 거처를 묻는 문초에도 모른다고 답했다는 형부 기록이었다.다른 한 장은 황제의 요구였다.열두 그림자의 이름. 선귀비 독살을 증언한 노궁인의 은신처. 두 가지를 적으면 온 대인을 오늘 풀어 준다.글 아래에는 형부 옥문을 여는 패의 탁본까지 찍혀 있었다. 검은 먹으로 눌러 뜬 무늬가 선명했다. 보요가 수결하는 순간 내관이 패를 들고 달려가겠다는 모양이었다. 아버지의 기침이 오늘 밤 멎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까지 한 장 안에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소월백이 패의 탁본을 손으로 가렸다."온 대인은 제 신원을 밝힌 죄로 갇혔습니다. 제가 황자라면 이분부터 풀어 달라는 첫 청을 받아 주십시오.""황자가 된 지 한 달 만에 조정 문초를 거두려 하느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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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화. 작은 물결

"병이 났다 전해."진묵은 사흘째 멀쩡한 얼굴로 같은 말을 했다. 어의를 보내겠다는 답에는 문밖에서 목을 분질러 놓겠다 덧붙였다."누워라도 계시지요.""네가 보는데 왜.""꾀병에도 성의가 있어야 합니다."진묵은 마지못해 침상에 길게 누웠다. 먹빛 중의의 깃은 헐거웠고, 검은 머리칼이 베개 밖으로 흘렀다. 환자라기보다 한낮부터 사람을 홀릴 채비를 한 사내 같았다.보요가 약 냄새라도 내려고 쓴 탕약을 들고 오자 그가 코를 찌푸렸다."그걸 왜 진짜로 달여.""아픈 분이 드셔야지요.""안 아파.""방금 황실 사자에게는 열이 심하다 하셨습니다.""네가 없으면 그렇지."보요는 웃지 않으려 입술을 다물었다. 탕약을 소반에 놓고 침상 끝에 앉는 순간, 아랫배 안쪽에서 아주 작은 것이 스쳤다.손가락 하나가 물속에서 치맛자락을 건드린 듯했다.그녀의 숨이 멎었다.진묵이 몸을 일으켰다."왜. 아파?"보요는 대답하지 못하고 배 위에 손을 얹었다. 둥근 곳 안쪽은 다시 고요했다. 조금 전의 느낌이 장거리 가마 뒤에 남는 근육의 떨림인지, 아이가 보낸 첫 기별인지 알 수 없었다.여의는 이 무렵 작은 물고기가 꼬리를 치는 듯한 느낌이 올 수 있다 했다. 처음에는 장 속의 움직임과 헷갈릴 만큼 가볍고, 하루 종일 기다려도 다시 오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보요는 그 말을 들을 때도 남의 몸 이야기를 받아 적듯 고개만 끄덕였었다.막상 제 안에서 일어나자 세상의 소리가 한꺼번에 멀어졌다. 대문 밖 사자의 재촉도, 처마 아래 매미도, 약탕기에서 끓는 물도 잠시 들리지 않았다. 다섯 고을을 지나며 품고 온 아이가 처음으로 제가 살아 있음을 알렸다."방금…… 움직인 것 같습니다."진묵의 눈이 그녀 손으로 떨어졌다."아이 말이야?""아마도요."그는 침상 아래로 내려가 보요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큰 손이 묻지도 않고 다가오다 한 치 앞에서 멎었다."대도 돼?"보요가 그의 손을 잡아 배 위에 놓았다. 여름 치마 한 겹 아래로 온기가 겹쳤다. 진묵은 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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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화. 닿지 않은 손

진묵의 손은 밤새 같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온보요가 등불을 끄려 하면 아직이라 했고, 돌아누우려 하면 이쪽이라며 제 품으로 다시 데려왔다. 큰 손은 얇은 중의 위에 가볍게 얹혀 있었다. 누르지는 않으면서 한 자리를 고집스럽게 지켰다."왕야께서 그렇게 보고 계시면 아이가 다시 숨겠습니다.""감았다.""눈꺼풀 사이로 보고 계시잖아요."진묵은 그제야 눈을 완전히 감았다. 긴 속눈썹 아래의 그늘만 움직였다. 보요는 웃음을 삼키며 그의 손등을 덮었다."오늘은 그만 주무세요.""조금 더.""그럼 손을 조금 위로 올리시든가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이 고분고분 올라갔다. 보요는 그의 손목을 베고 누웠다. 침향이 밴 옷깃 가까이에서 숨을 고르자 진묵의 입술이 머리칼에 닿았다."내일도 안 갈 겁니까.""네가 가지 말라 하면.""신첩에게 떠넘기지 마세요.""떠넘기는 것이 아니다. 네 뜻을 묻는 거지."그의 숨이 귓바퀴를 천천히 덥혔다. 보요가 얼굴을 돌리자 입술이 곧 겹쳤다. 서두르지 않는 입맞춤 사이로 숨이 짧아졌다."하아…… 아이 기다리신다면서요.""이것도 기다리면서 할 수 있어.""못 느끼실 겁니다.""그럼 또 기다리지."진묵은 보요의 아랫입술을 느리게 물었다 놓았다. 한 번 삼킨 숨을 돌려주지 않듯 다시 겹쳐 왔다. 보요가 그의 어깨를 밀자 그는 물러나는 대신 그 손을 제 목 뒤로 옮겨 놓았다."왕야, 조심하신다면서요.""조심하는 것과 굶는 건 다르지."낮게 구른 목소리가 입술 안쪽까지 울렸다. 허리를 받친 손은 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그녀가 한 치도 멀어지지 못하게 했다. 중의 끈 하나가 그의 손등에 걸려 반쯤 풀렸다. 언제 손이 다녀갔는지 알지 못해 보요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사락. 그의 손이 허리 뒤 옷감을 쓸어 올렸으나 배 위의 손은 끝내 조심스러웠다. 보요가 목깃을 쥐고 먼저 당기자 진묵의 여유가 한 번 흔들렸다. 뜨거워진 숨이 목덜미에 묻혔다."읏…… 잠깐."입술은 바로 멎었다. 달아오른 눈만 가까이 남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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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화. 보호의 문

똑.붉은 밀랍이 비단 매듭 위에서 굳었다. 누가 문을 열면 바로 깨지는 봉인이었다. 궁인들은 바깥 서재로 가는 문, 부엌 쪽문, 방어멈이 드나들던 회랑까지 차례로 묶었다.온보요의 시비 둘은 짐을 쌀 틈도 없이 바깥채로 밀려났다. 방어멈이 약함을 안고 버티자 금군이 창대를 세웠다."그 약은 내가 달인 거야. 우리 아씨가 남의 손에서 뭘 먹는 줄 알아?""어멈."보요가 부르자 방어멈의 눈이 붉어졌다. 그래도 약함을 내려놓지는 않았다.여의가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고 은침을 담갔다. 약재 이름과 양을 장부에 적은 뒤에야 안으로 들였다. 따뜻했던 탕약은 그사이 김이 사라졌다.진묵이 그릇을 집어 마루 아래로 쏟았다."차가운 건 안 먹어. 다시 달여."여의의 낯이 굳었다."왕야, 황실 약재이옵니다.""그래서 불에 못 올리나?""왕야."보요가 부르자 그가 돌아보았다."그릇은 던지지 마세요.""던지지는 않았다.""다음 것도요.""알았어."궁인 여덟이 일제히 눈을 내렸다. 황제의 친동생에게도 반말을 던지는 사내가 왕비의 한마디에는 얌전히 빈 그릇을 상에 놓았다.여의는 새 탕약이 끓는 동안 보요의 맥을 짚었다. 손끝을 세 번 옮기고 배의 높이를 눈으로 살폈다. 얇은 여름 적삼 아래로 둥근 선이 드러나자 궁인 하나가 금실 자를 꺼냈다."그건 치워."진묵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달마다 변화를 적어 궁에 올려야 하옵니다.""보았으면 물러가라."보요가 손을 들어 자를 받았다. 제 손으로 배 위에 느슨하게 둘러 길이를 읽고 돌려주었다. 진묵의 턱이 굳었으나 막지 않았다."보호라 하셨지요."보요가 여의에게 물었다."예, 마마.""아이가 누구에게서 보호받아야 합니까."여의는 답하지 못했다. 대신 새 장부의 첫 줄을 보여 주었다.왕실 혈맥 진묵의 적자.아이의 이름도 태어나기 전의 별칭도 없었다. 황실 장부에 먼저 오른 것은 아버지의 이름과 적자라는 두 글자였다. 밑에는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온보요를 삭왕부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다는 명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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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화. 열두 길

여의가 안채로 끌고 들어온 종이는 소반보다 길었다.왕비를 놀라게 할 글은 먼저 살피라는 명을 받았다 했다. 종이 위에는 경성에서 출발한 사람과 말, 배가 날짜별로 그려져 열두 갈래로 뻗었다.선귀비 능에서 돌아온 밤, 객잔의 후문으로 열두 사람이 흩어졌다. 하나는 태후전으로 향한 향갑을 쫓고, 둘은 능원의 늙은 수문장 가족을 옮겼다. 셋은 불탄 은장방의 생존자를 숨겼으며, 나머지는 온가와 사가, 북강으로 갈렸다.이름은 없었다. 대신 류자, 류축, 류인부터 류해까지 열두 부호가 적혀 있었다.온보요는 종이를 소반에 편 채 한참 움직이지 않았다."어디서 난 글입니까."여의가 대답했다."사대문 통행패와 역참의 말 장부, 강 나루의 삯전을 맞춰 중서성에서 그렸다 들었사옵니다."경성에서 같은 밤 떠난 발자국은 각기 다른 장부에 남았다. 말 한 필을 바꾸면 역참에 먹점이 찍혔고, 배 한 척을 빌리면 나루에 동전 수가 적혔다. 한 장에서는 보이지 않던 열둘이 한 상 위에 모이자 사람의 모양을 갖췄다.진묵이 마지막 길을 손가락으로 짚었다."이건 틀렸어."북강으로 간 류해의 길이었다."어디가요?""두 번째 역참부터 말이 다르다. 그자는 왼쪽 무릎이 성치 않아 회색 암말만 탔다. 장부에는 검은 수말이라고 되어 있군."그가 류해를 본 것은 객잔 뒤뜰의 짧은 순간뿐이었다. 보요가 눈을 들자 진묵은 아무렇지 않게 종이를 접었다."다른 사람을 잡았다는 뜻입니다."여의의 입술이 떨렸다."오늘 새벽, 열두 길에서 스물아홉 명을 잡았다 하옵니다. 말 빌려 준 역졸과 배를 댄 사공, 약재를 판 상인들입니다. 닷새 안에 열두 사람의 본명을 대지 않으면 같은 죄로 다스린다는 방이 붙었사옵니다."보요는 접힌 종이를 다시 펼쳤다. 길마다 붉은 동그라미가 찍혀 있었다. 류자가 지나간 향갑 가게의 어린 점원, 류묘에게 쪽빛 옷을 내준 염색공, 류해에게 말죽을 먹인 역졸. 열둘을 잡지 못한 손이 그 주변부터 움켜쥐었다."잡힌 이들의 이름을 적어 주세요.""마마께 드릴 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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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화. 한 사람의 이름

"붓과 흰 비단을 주세요."첫 문초의 북이 세 번째 울릴 때 온보요가 손을 내밀었다.종이는 궁인이 가져갈 때 접히거나 바뀔 수 있었다. 비단은 폭과 올 수를 세어 두면 달라진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무엇을 쓰시려는 겁니까."진묵이 물었다."스물아홉을 빼내는 글입니다.""대신 네가 들어가겠군."붓끝이 먹 위에서 멎었다."그들이 받은 명이 신첩에게서 나왔다고 밝히면, 말과 배를 빌려 준 사람에게 같은 죄를 물을 수 없습니다.""황제가 그 이치를 몰라서 잡았나. 네 입으로 네 이름 쓰게 하려는 거지."진묵은 비단 한쪽 끝을 눌렀다. 빼앗지는 않았다. 보요가 쓰기 편하도록 주름만 폈다.첫 줄에는 다른 이름을 세우지 않았다.신 온보요가 열두 사람에게 명하였다.향갑을 쫓고, 능원의 가족을 숨기고, 은장이를 살려 옮기고, 온가와 사가를 지키라 한 일은 모두 제 입에서 나왔다. 말 한 필과 배 한 척을 빌려 준 백성은 명의 까닭도, 가는 곳도 알지 못했다. 죄를 묻는다면 나 한 사람에게 물으라.규방의 병약한 딸, 황제가 삭왕을 감시하라 보낸 세작, 진묵 뒤에 앉아 붓만 들던 왕비. 그 얼굴들이 먹 한 줄 아래에서 차례로 벗겨졌다.보요는 글을 멈추고 창밖을 보았다. 궁인 둘이 회랑에 앉아 그녀 붓이 움직이는 횟수까지 세고 있었다. 대문 너머에서는 문초 북이 네 번째 울렸다. 글 한 장을 다 쓸 때마다 누군가 매를 한 차례 더 맞을 수 있었다.그녀는 마지막 문장을 고쳤다. `명의 까닭을 몰랐다`고만 쓰면 황실은 알고 도왔는지 다시 물을 수 있었다. 그래서 각 사람이 실제로 한 일을 붙였다. 말죽 한 바가지를 팔고 삯전 두 닢을 받았다. 빈 배에 손님 하나를 태웠다. 젖은 옷을 말릴 자리를 내주었다. 그것이 전부라고, 황실 장부에 남은 값과 맞춰 적었다.허술한 변명이 아니라 이미 그들 손에 든 장부와 어긋나지 않는 글이어야 했다. 한 줄이라도 넘치면 황제가 그 틈에 공모를 끼워 넣을 터였다.진묵이 벼루를 보요 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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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화. 내 아내의 죄

마른 붓끝이 진묵의 엄지 앞에서 멎었다."먹이 없군."궁인이 입을 열기 전에 진묵이 제 엄지를 깨물었다. 오래된 흉터 위로 피 한 방울이 솟았다."왕야!"온보요가 손을 잡았으나 늦었다. 그는 피를 붓끝에 묻혀 형부의 방 아래에 글을 썼다.온보요는 삭왕 진묵의 아내다. 아내의 죄를 물으려면 부군부터 불러라.마지막 획이 마르기 전 진묵의 붉은 수결이 찍혔다."왜 상처를 내십니까."보요가 무명을 가져와 엄지를 감쌌다. 화가 난 손길이라 매듭이 단단했다."먹을 주지 않았다.""그러면 안 쓰시면 되지요.""네 이름만 저리 올려둘 수는 없다.""그게 다행인 겁니다.""허락하지 않는다."진묵은 궁인을 향해서는 턱만 까딱했다."가져가. 한 획이라도 베끼면 손 자른다고 전하고."그러고는 보요가 손을 펴라 하자 순순히 엄지를 내주었다. 궁인은 어느 쪽을 더 무서워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피 묻은 방을 받았다."마마께서는 혼자 책임지겠다 하셨습니다."궁인이 마지막으로 용기를 내 말했다.진묵이 보요에게 손을 맡긴 채 답했다."그건 보요의 뜻이다.""왕야 생각은요?"보요가 매듭을 묶으며 물었다."혼자 책임지게 두지 않는다.""아까 한 번만이라 하셨습니다.""한 번이라 한 것은 네 부름이었다. 내가 약조한 적은 없다."보요가 붕대 매듭을 조금 세게 당겼다. 진묵의 눈썹이 움찔했으나 아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그 글이 궁에 닿기도 전에 선덕문에서 두 번째 글이 나왔다. 소월백은 황자 인장을 찍고 짧게 적었다.열두 사람은 온보요의 명을 받았고, 온보요는 내 청을 받았다. 선귀비의 이름과 내 출생을 찾으라 청한 사람은 나다.세 사람이 서로의 앞에 서려고 한 글은 저녁 조회의 상 위에 나란히 놓였다.형부 관원은 세 글을 따로 봉하지 않았다. 한 폭의 긴 종이에 차례로 붙이고 이음새마다 황제의 인장을 찍었다. 한 사람의 글을 떼면 나머지 두 장도 찢어지게 만든 뒤 `공동 진술`이라 적었다.소월백의 글은 온보요가 무엇을 시켰는지 인정했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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