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Chapter 211 - Chapter 220

328 Chapters

211화. 열린 문

붕대 감긴 엄지가 온보요의 입술을 눌렀다."무슨 문인지 세 번째 묻고 있습니다."진묵의 손에서는 피 냄새 대신 약초의 쓴 향이 났다."말하면 막을 테지.""이미 못 가게 하고 싶습니다.""그러니까.""그래도 들은 뒤에 막겠습니다."진묵은 잠시 보요를 보다 품에서 황실 소환장을 꺼냈다. 붉은 테두리 안쪽에 심문에 참여할 관원의 이름이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가장 아래 이름에서 멎었다.강무. 내전 문서고 서리."누구입니까.""내가 월백 시신을 찾으라고 보낸 놈."보요의 눈이 소환장으로 떨어졌다. 진묵이 혼인 전부터 둘째 황자의 시신을 누가 보았는지 추적했다는 사실은 아버지의 문초 초본에서 이미 드러났다. 그러나 사람을 보냈다는 말과 그 행방은 처음이었다."혼인 전에 왜 그 일부터 찾으셨습니까.""네 주변을 캐다가."진묵은 숨길 생각도 없이 말했다."온가 딸 하나 시집보내는데 남쪽 상단 셋이 같은 날 길을 비웠어. 강호 객잔들은 네 가마가 지나갈 방부터 남겨 뒀고. 아비가 딸을 보내는 길치고는 손이 너무 많았지."그 보호선의 끝에 이름 없는 상단 아이가 있었다. 죽었다는 둘째 황자와 나이가 같고, 온보요가 다섯 살 때부터 곁에 둔 소년이었다."그래서 월백 공자의 시신을 찾으셨군요.""시신이 있으면 네가 숨기는 건 다른 거고, 없으면 그놈부터 봐야 하니까.""신첩에게는 왜 묻지 않으셨습니까.""물으면 규방 아가씨 얼굴로 모른다 했겠지."보요는 부정하지 못했다. 진묵은 그때 이미 가장 가까운 거짓말을 캐면서도 혼인을 물리지 않았다."죽은 줄 알았습니다.""나도.""그런데 황궁 서리 명부에 있군요.""내 이름을 보고 이 줄을 끼워 넣었어. 강무는 `무` 자 마지막 점을 왼쪽으로 찍거든."소환장 속 이름은 반듯했으나 마지막 점 하나가 옆 글자를 향해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살았다는 말도, 도와 달라는 말도 없었다. 진묵에게만 읽히는 손버릇 하나였다."그 사람은 무엇을 찾았습니까.""월백을 북강으로 호송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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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화. 세 사람의 글

"팔 드세요."먹빛 관복의 마지막 고름을 묶을 때 금군이 마당에 들어왔다.갑주도 왕의 금관도 없었다. 온보요는 붕대 감은 엄지를 소매 안에 넣고 허리띠에 검은 옥 하나만 달았다."오늘은 손부터 내밀지 마세요.""저들이 먼저 칼을 뽑으면.""한 번 참으세요.""한 번만."대문이 열리자 금군이 마당까지 들어왔다. 진묵은 보요가 가마에 먼저 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걸음을 옮겼다. 왕비의 황실 보호를 명분으로 붙인 궁인 여덟도 뒤따랐다.가마는 수인문에서 한 번, 내궁 앞에서 다시 멎었다. 첫 문에서는 왕부 호위가 떨어져 나갔고, 둘째 문에서는 가마꾼까지 황실 사람으로 바뀌었다. 보요가 창살 사이로 본 진묵은 끝까지 가마 옆을 걸었다. 그에게 타라고 내준 말은 고삐도 잡지 않았다.내궁 돌길은 한낮 볕을 받아 희게 달아올랐다. 궁인들이 양산을 들고 달려오자 진묵이 빼앗듯 받아 보요 쪽 창에 기울였다. 자기 어깨는 볕 아래 그대로 두었다."왕야께서 쓰시는 물건이 아닙니다.""왕비가 쓴다."그 한마디에 양산을 돌려 달라던 궁인이 물러났다.편전에는 상이 없었다. 바닥에 긴 흰 비단만 깔려 있었다. 맨 앞에 온보요의 자백, 그 뒤에 진묵의 피 묻은 글, 마지막에 소월백의 황자 인장이 놓였다. 열다섯 쪽지는 두 줄로 펼쳐져 세 글을 향해 길처럼 이어졌다.소월백은 이미 왼편에 서 있었다. 황자 예복 위로 빈 칼집만 찼다. 진묵은 인사보다 먼저 보요의 팔을 잡아 자기와 월백 사이에 세웠다.월백 앞에는 차 한 잔도 없었다. 황제가 들어오기 전에는 황자라도 상에 손대지 못한다는 법도였다. 보요가 제 소매 안 작은 물병을 꺼내 건네려 하자 진묵이 먼저 받았다."입 대지 말고 마셔.""삭왕 전하 물건입니까, 보요 물건입니까.""왕비의 것이다. 입술은 대지 마."소월백은 병을 높이 들어 물줄기만 받아 마셨다. 한 달 만의 재회 첫 대화가 물병 하나를 두고 벌어지자 보요는 눈을 감고 싶은 심정이었다."두 분 다 그만하세요."두 사내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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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화. 길의 끝

"길은 아직 이어져 있다."강무가 손을 거두자 황제는 두 번째 쪽지를 들었다."아우가 궁에 들어온 뒤에도 같은 글이 열네 번 더 오갔다. 온 대인을 위한 길이었다고 했지.""그렇습니다."소월백이 답했다."그럼 온 대인이 풀려난 날에는 끝날 길이었느냐.""노궁인과 객사의 증인, 중서성 문서도 제자리를 찾아야 합니다."온보요의 대답에 황제는 셋째 쪽지를 들었다."그 뒤에는?"편전 안 매미 소리가 갑자기 크게 들렸다. 창밖 회화나무 가지에서 울던 소리가 붉은 기둥 사이로 파고들었다.황제가 원하는 답은 끝이었다. 소월백이 아우로 인정되고 온 대인이 풀리면 모든 길이 황제의 옥좌 앞에서 멎는다고 쓰게 하려는 것이었다. 끝나지 않는다고 답하면 그 끝에 다른 옥좌가 있다고 부를 터였다.중서 사인이 붓을 들어 답을 기다렸다. 황제가 묻는 말은 모두 글로 남았고, 세 사람의 침묵까지 빈 줄로 표시되었다. 답하지 않으면 숨기는 뜻이 되고, 답하면 문장이 죄목이 되는 자리였다.보요는 열다섯 쪽지의 가장자리를 보았다. 닭국에 젖었던 첫 장은 새 종이에 덧대어져 있었다. 황실은 번진 먹도 버리지 않았다. `길` 자가 반쯤 풀린 자리 옆에 서리가 원래 글자를 다시 써 넣었다. 지워진 것까지 복원하면서 온 대인의 부러진 손과 스물아홉이 맞은 매는 한 줄도 적지 않았다."끝을 먼저 정한 길은 없습니다."보요가 말했다."사람이 살아 있는 한 그다음 할 일이 생깁니다. 폐하께서 오늘 온 대인을 풀어 주시면 내일은 다친 손을 고칠 의원을 찾을 것이고, 증인을 놓아주시면 돌아갈 집을 찾을 겁니다. 그것까지 역모라 하시겠습니까.""나라의 길은 옥좌에서 시작하고 끝난다.""백성이 걷는 길은 집 문 앞에서 시작합니다."대신 하나가 붓을 떨어뜨렸다. 가벼운 대나무 소리가 편전 바닥을 굴렀다.보요가 입을 열기 전 진묵이 말했다."내 집으로 가는 길."황제의 눈이 그에게 향했다."어느 집이냐. 병부를 내놓은 북강인가, 봉인된 경성 왕부인가.""보요가 있는 곳."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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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화. 살아남은 자

철컥.허강이라는 이름이 읽히자 편전 바깥의 창끝이 한꺼번에 들렸다.금군을 거느린 허 도위와 같은 성이었다. 장부에는 본래 성이 한씨였고, 스무 해 전 황자 호송에서 살아 돌아온 뒤 허씨 집안의 종적에 들어 성을 바꾸었다고 적혀 있었다.황제가 강무를 내려다보았다."누가 이 장부를 올리라 했느냐."강무가 무릎을 꿇었다."심문에 관계된 선황 기록을 모두 가져오라 하신 어명이옵니다.""마지막 장까지 가져오라 하지는 않았다.""폐하의 어명에는 덜 가져오라는 글도 없었사옵니다."내관들이 강무 양팔을 잡았다. 진묵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보요 손등 위에 놓인 손이 차갑게 굳었다.강무의 얼굴에는 억울하다는 표정도 살려 달라는 빛도 없었다. 끌려 일어나는 순간에만 진묵을 향해 아주 짧게 눈을 들었다. 스무 해 가까이 황궁 문서고에서 죽은 사람처럼 산 얼굴이었다."강무의 가족은 어디 있습니까."보요가 물었다.황제가 아니라 장 내관이 답했다."내전 일을 맡은 자의 가족은 황실이 먹여 살립니다."살아 있다는 답이면서, 한 걸음만 어기면 함께 죽는다는 말이었다. 강무의 입술이 처음으로 굳었다. 보요는 더 묻지 않았다.소월백이 장부 앞으로 나섰다."허강을 불러 주십시오. 제 아버지의 호송을 끝낸 자라면 제 앞에서 말할 것이 있습니다.""그자는 북문 수비 중이다.""경성 안이군요."황제는 답하지 않았다. 장부가 불에 들어가기 전에 보요는 열여섯 이름을 눈으로 훑었다. 선대 삭왕의 친병 다섯, 선귀비의 궁인 셋, 마부와 의원, 젖먹이를 안은 유모. 마지막 허강까지 한 번 읽었다.황제가 손을 내렸다."장부를 봉하라. 강무는 황실 기록을 함부로 드러낸 죄로 가둔다.""기록을 드러낸 것이 죄라면 거짓을 적은 자는 무슨 죄입니까."보요가 물었다.황제는 그녀를 보지 않고 새 명을 읽게 했다.금군이 옆문을 열었다. 큰오라비가 포승에 묶인 채 들어왔다. 다친 팔은 목에 걸려 있었고, 뺨에는 새 멍이 번져 있었다. 그는 보요를 보자 먼저 배를 살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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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화. 아이의 자리

금군의 군화가 큰오라비의 무릎 뒤를 찼다.피 섞인 침이 묻은 비단 위로 그가 쓰러졌다. 진묵이 나서려는 순간 보요가 두 손으로 팔을 붙들었다. 불러온 배로는 예전처럼 온몸을 막을 수 없었다. 진묵은 그녀가 비틀거리자 힘을 거두었다."앉아."그는 오히려 보요를 안아 의자에 내려놓았다. 황제와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치맛자락을 펴고, 발받침까지 제 발로 끌어다 댔다."왕야, 오라버니부터.""네가 먼저다.""신첩은 괜찮습니다.""내가 괜찮지 않다."거친 목소리는 편전을 향했고, 배 아래를 받친 손은 조심스러웠다. 큰오라비가 무릎 꿇은 채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저놈 말버릇은 여전해도 네 앞에서는 사람 꼴을 하는구나.""형님께서는 숨부터 고르십시오."진묵은 바로 말을 고쳤다. 큰오라비가 웃다가 멍든 옆구리를 누르자 보요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황제는 새 장부를 상에 올렸다. 왕실 족보였다. 두꺼운 비단 표지 안에 황족의 혼인과 아이 이름을 적고 붉은 인장을 찍는 책이었다. 진묵의 이름 아래에는 아직 빈 줄 하나가 남아 있었다.빈 줄 앞에는 작은 금잎이 끼워져 있었다. 아이가 아들이면 금빛 이름패를, 딸이면 붉은 옥 이름패를 내린다는 황실 예가 적혀 있었다. 봉지를 받으면 어느 고을의 세곡을 쓸지도 미리 골라 두었다. 아이는 아직 아버지 손에도 움직임을 알리지 않았는데, 황실은 먹을 곡식과 살 집부터 정해 놓았다.보요는 금잎을 빼 상 위에 놓았다."성별도 모르는 아이에게 벌써 백성의 세곡을 매기셨군요.""왕실 아이는 태어나기 전부터 나라의 책임을 진다.""아이는 오늘 처음으로 제 안에서 움직였습니다. 아직 나라에 진 빚이 없습니다."황제의 시선이 보요의 배로 내려갔다. 진묵이 즉시 한 걸음 옮겨 그 시선을 가렸다."그 눈을 거두십시오.""진묵.""아이에게 눈을 두지 마십시오."보요가 소매를 잡자 그는 비켜나지는 않고 몸만 조금 틀어 그녀 얼굴까지 가리지 않게 했다."삭왕의 적자가 태어나면 이 자리에 올릴 것이다."황제가 말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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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화. 밑창의 글

진묵의 발이 반 치 앞으로 나갔다.강무가 끌려가는 사이 밑창에서 빠진 종이가 그 아래 감춰졌다. 온보요만 보았다.황제가 편전을 나가고 대신들이 흩어졌다. 큰오라비도 다시 포승에 끌려갔다. 보요가 그에게 다가가려 하자 금군의 창대가 길을 막았다."오라버니.""한 줄도 쓰지 마라."큰오라비는 뒤를 보지 않고 말했다."아버님도 같은 말을 하셨다. 우리 둘을 살리겠다고 네 스무 해를 버리면, 옥에서 나오는 날 내가 다시 밀어 넣을 것이다.""살아 계셔야 밀어 넣으시지요.""그러니 네가 밖에서 살려. 사람 팔지 말고."목소리는 옆문 너머로 사라졌다. 소월백이 그 길을 따라가려 했으나 황실 예관이 황자 처소로 돌아가라 막았다."전하께서도 내일 아침까지 외전 출입이 금지되셨습니다."소월백은 진묵을 보았다."삭왕 전하께서 혼자 들어가시면 나오지 못할 겁니다.""알아.""알면서도 가십니까.""황자는 제 문부터 열어. 왕비가 궁에 들지 않게 하고.""보요가 제 말을 들을 것 같습니까.""들어야 할 때는 듣지."보요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둘 다 신첩 없는 데서 신첩 일을 정하지 마세요."진묵과 소월백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왕부로 돌아오는 가마 안에서 진묵은 신을 벗었다. 밑창에 눌린 종이는 땀과 먼지에 젖어 있었다. 보요가 무릎 위에 펴자 짧은 글이 드러났다.가마 창밖으로는 금군 말발굽이 나란히 따라왔다. 창에 붙은 얇은 비단 너머로 사람 그림자가 계속 지나갔다. 보요는 종이를 치맛자락 아래에 펴고, 진묵은 발을 그녀 치마 끝에 걸쳐 밖의 눈을 막았다. 황궁에서 왕부까지 오는 짧은 길도 둘만의 방이 아니었다.허강은 사흘마다 자시, 내전 북쪽 창고의 죄인 명부를 직접 받는다. 선황 호송 때 가져온 물건 하나를 아직 몸에 지녔다.그 아래에는 강무의 이름도, 수결도 없었다. 마지막 점만 왼쪽으로 길게 누워 있었다."선황 호송 때 가져온 물건은 무엇일까요.""몰라.""옥패나 밀지는 이미 우리 손을 거쳤습니다.""사람이 물건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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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화. 한 줄도

"수결하시지요."궁인이 붉은 축을 내밀었다. 보요는 진묵의 무릎 위에서 받았고, 그는 팔 하나로 그녀 허리를 감은 채 축만 펴 주었다.문장마다 줄 끝이 이미 가지런했다. 월백의 계승을 돕지 않는다. 열두 사람은 황실에 바친다. 선귀비 독살의 증인은 조정이 거둔다. 온가는 황실의 은혜로 풀려난다. 마지막에는 태어날 아이의 족보 자리를 비워 두겠다는 약속이 붙어 있었다.붉은 축과 함께 수결에 쓸 옥도장도 들어 있었다. 보요의 도장은 아니었다. 황실 은장방에서 새로 판 `삭왕비 온씨` 네 글자가 거꾸로 새겨져 있었다. 족보에서는 온가의 딸이라 부르고, 거리의 방에는 책사 온보요라 쓰면서, 포기문에는 다시 이름 없는 온씨로 줄였다.보요는 도장을 손바닥에 굴려 보았다. 차가운 옥 모서리가 살을 눌렀다."제 수결도 없이 제 도장을 만드셨군요.""찍으면 네 것이 되는 줄 아나 보지."진묵이 도장을 받아 바닥에 놓고 발뒤꿈치로 눌렀다. 딱, 마른 소리와 함께 옥이 둘로 갈라졌다. 궁인들이 동시에 숨을 삼켰다."왕야, 그릇은 던지지 말라 했더니 도장을 깨십니까.""던지지는 않았다.""말을 아주 잘 들으시네요.""그렇지."빈정거림도 칭찬처럼 받는 얼굴에 보요는 더 꾸짖지 못했다."아이 자리까지 저들이 주는 것처럼 적었군요."보요가 말했다."태어나면 내가 자리 만들어 줘.""어디에요?""우리 사이."진묵은 당연한 말을 하듯 그녀를 조금 더 끌어당겼다. 배가 눌리지 않도록 허벅지 위에 비스듬히 앉힌 자세였다. 보요는 붉은 축을 다시 말았다."불에 넣을까요.""궁인들이 보고 있다.""그래서 묻습니다."진묵이 턱으로 화로를 가리켰다.보요는 붉은 축을 불 위에 놓았다. 비단은 종이처럼 바로 타지 않았다. 가장자리가 오그라들며 검은 냄새를 냈고, 금실로 짠 `포기` 두 글자가 마지막까지 번뜩이다 재로 주저앉았다.연기가 안채 천장에 고였다. 궁인 하나가 창을 열려 했으나 황실 봉인이 붙은 문이라 손을 대지 못했다. 진묵이 봉인째 뜯으려 하자 보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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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화. 꺼지지 않은 심지

달칵.문서 궤 열쇠가 침상 머리맡에서 등불을 튕겼다. 온보요가 목에서 풀어 놓은 열쇠에는 아직 체온이 남아 있었다. 내일 진묵이 궁으로 들어가면 왕부의 문을 여는 쪽은 자신이었다. 무엇을 깨고 누구를 불러야 할지는 새벽 뒤에 생각하기로 했다.창밖에는 황실 궁인의 그림자가 줄지어 있었다. 진묵은 겉옷을 벗어 창호에 걸었다."내 집 창이야."먹빛 옷자락이 바깥의 눈을 가렸다. 보요도 남은 창호에 휘장을 내렸다.진묵은 등불 심지를 줄이지 않았다."주무셔야 합니다.""아직.""내일 황제 앞에서 하품하실 겁니까.""폐하의 말이 길면."보요가 비녀를 빼자 검은 머리칼이 어깨 아래로 쏟아졌다. 진묵이 뒤에서 한 줌을 받아 목덜미를 드러냈다. 침향이 먼저 닿고, 뜨거운 입술이 그 뒤를 따랐다."왕야."꾸지람이어야 할 두 음절이 숨에 젖어 나긋이 흘렀다."오늘은 부군.""명하지 마세요.""청한 것이다."말은 청이라면서 팔은 이미 허리를 놓지 않았다. 보요가 돌아서 그의 옷깃을 잡았다. 먹빛 중의 고름을 한 번 당기자 매듭이 느슨해졌다. 단단한 목과 오래된 흉터가 등불 아래 드러났다."내일 상처 만들지 마세요.""네가 보는데는 안 만들어.""안 보는 데서도요.""그건 어려운데."보요가 눈을 흘기자 진묵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해 볼게."그녀는 느슨해진 옷깃 안으로 손을 넣었다. 손바닥 아래 심장이 조금 빨라졌다. 끝까지 여유로운 얼굴과 달리 숨은 거짓말을 못 했다.진묵이 그 손을 더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보요의 손끝이 오래된 흉터를 따라 내려갈수록 그의 턱선이 단단해졌다. 웃는 듯하던 입매도 어느 순간 펴져 있었다."왕야께서도 긴장하십니까.""네 손이 거기 있는데 태연하면 거짓이지."그가 손목 안쪽의 맥에 입술을 대었다. 뛰는 곳을 정확히 문 채 눈만 올려 보았다. 보요의 발끝이 이불 아래에서 오그라들었다."하아…… 그렇게 보지 마세요.""왜.""내일 못 가게 하고 싶어지니까.""그리 해."그는 정말 멈출 사람처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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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화. 수발

"이제 놓으세요."동이 틀 무렵에야 진묵의 손이 풀렸다.온보요는 진묵보다 먼저 일어나 심지를 잘랐다. 따뜻한 물에 적신 무명으로 그의 얼굴을 닦고, 먹빛 관복을 펼쳤다. 황제에게 죄를 받으러 가는 날인데도 옷에는 주름 하나 없어야 했다.머리칼을 틀어 올리자 목덜미 아래 옅은 붉은 자국이 드러났다. 보요가 서둘러 옷깃을 올렸으나 진묵이 손가락으로 다시 한 번 그 자리를 쓸었다."가리세요. 곧 월백 공자도 옵니다.""그래서 아까운데.""진묵."그는 못마땅하게 옷깃을 여몄지만 엄지는 붉은 자국에서 늦게 떨어졌다.진묵은 침상 끝에 앉아 보요가 시키는 대로 팔을 들었다. 중의를 입히고, 겉옷 깃을 겹치고, 허리띠를 두 번 감았다. 금군이 문밖에서 재촉해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손 주세요."붕대 감은 엄지가 앞으로 나왔다. 보요는 어제보다 느슨하게 새 무명을 둘렀다."피가 통하지 않으면 말씀하셔야 합니다.""네 손이면 견딘다.""그럴 리가요.""그러니 계속."뺨에 닿는 보요의 머리칼까지 눈으로 좇았다. 수발보다 제 아내의 손길을 오래 가지려는 눈이었다.아침상에는 닭고기를 잘게 찢어 넣은 흰죽과 초록 매실장아찌가 올랐다. 보요가 숟가락을 내밀자 진묵은 군말 없이 받아먹었다.참기름 향 밴 죽과 매실이 입 안에서 맑게 씹혔다. 진묵은 보요가 내미는 것은 다 먹으면서 제 손으로 그릇은 들지 않았다. 그녀가 죽을 식히면 입술부터 보았다."죽을 보세요.""함께 보고 있다.""신첩을 보고 계시잖아요.""네 손에 들렸으니 함께 보이지."보요는 마지막 술에 장아찌를 얹었다. 진묵은 시다는 기색도 없이 삼켰다. 그녀도 그제야 식은 차를 마셨다."혼자 드실 수 있잖아요."문밖에 선 소월백이 말했다.황자 예복 차림의 그는 금군 호위와 함께 열린 문턱 밖에 서 있었다. 안으로 들이지 말라는 명 때문이었다.진묵이 죽을 삼키고 답했다."왕비가 들고 있지 않나.""마지막 아침처럼 굴지 마십시오.""마지막이 아니니 보아 두라."소월백은 보요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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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화. 안쪽의 문

"신까지 벗으십시오."세 번째 궁문 앞에서 금군이 진묵의 발을 가리켰다.금군은 밑창을 두드리고 안감을 뒤집었다. 먹 묻은 종이도 바늘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네 번째 문에서는 머리의 뼈비녀를 빼앗았다. 검은 머리칼이 어깨로 흘러내리자 젊은 군졸 하나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진묵이 눈을 들었다."눈을 거둬."군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왕야, 먼저 시비 걸지 않으셔야 합니다."뒤따르던 황실 여관이 말했다.진묵은 보요의 명을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벌써 한 번 참은 셈이었다.편전에는 황제 혼자 앉아 있었다. 어제의 대신도, 흰 비단 위의 글도 없었다. 상 위에는 북강 동호 병부와 삭왕의 금책이 놓여 있었다. 진묵이 내놓았던 병부는 깨끗이 닦였고, 왕의 지위를 적은 금책에는 새 붉은 끈이 매여 있었다.병부 옆에는 보요의 포기문을 태우고 남은 재가 작은 백자 접시에 담겨 있었다. 갈라진 옥도장 두 조각도 나란히 놓였다. 황제는 왕부 안채에서 일어난 일을 밤새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받아 본 모양이었다.진묵은 재보다 깨진 도장을 먼저 보았다."온보요의 이름을 어찌 폐하께서 파셨습니까.""삭왕비의 인장은 황실이 내린다.""온보요라는 이름은 장인어른께서 주셨습니다. 황실의 것이 아닙니다."황제는 대꾸하지 않고 금책을 펼쳤다."온보요 한 사람을 버리면 모두 돌려주마."황제가 말했다."병부, 북강, 네 왕부. 온 대인과 그 아들도 풀어 준다. 내 아우는 황자로 살려 두고, 네 아이는 족보에 올린다."진묵은 병부를 집어 들지 않았다."왕비는 어찌하십니까.""열두 사람을 움직인 죄만 받고 별궁에 갇힐 것이다. 목숨은 살려 주지.""부부로 사는 것은.""허락하지 않는다.""그렇다면 모두 필요 없습니다."대답이 너무 짧아 황제의 눈썹이 움직였다."북강 스무 해보다 그 여인이 무겁더냐.""견줄 일이 아닙니다. 북강도 보요에게 줄 것이었습니다.""여인 하나에게 나라를 넘길 셈이었나.""제 것이니 제가 줍니다."황제의 손이 병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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