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Chapter 191 - Chapter 200

328 Chapters

191화. 금테 교지

금테를 두른 교지함 안에는 열쇠가 먼저 들어 있었다.소월백의 손목 쇠사슬을 여는 열쇠였다.황실 예관은 장터 바닥에 무릎을 댄 채 교지를 펼쳤다. 선황의 기록, 온 대인이 보관한 족보, 북강에서 드러난 백옥 인장과 친필을 대조한바 소월백을 선황의 둘째 아들로 볼 근거가 충분하다. 황제는 잃었던 아우가 살아 돌아옴을 기뻐한다.그 한 줄이 읽히자 서령현 사람들이 소월백을 보았다.어제까지 사칭범이라 적힌 죄수였다. 오늘은 같은 황제의 글에서 아우가 되었다. 달라진 것은 피가 아니라 글을 쓴 쪽의 필요였다.예순넷 가운데 한 사내가 제 아내에게 속삭였다."그럼 우릴 가둔 건 잘못이었나?"아내는 답하지 못했다. 황자가 참이면 그를 보았다는 죄로 가둔 일이 틀렸고, 거짓이면 오늘 교지가 틀렸다. 어느 쪽이든 옥에 갇힌 백성에게 사과하는 문장은 없었다.온보요는 그 빈자리를 기억해 두었다. 황실은 사람 하나의 이름은 되돌렸으나, 그 이름 때문에 다친 사람들의 날까지 되돌려 주지는 않았다.예관이 열쇠를 들고 다가왔다."전하, 손을 내어 주십시오."소월백은 손을 내지 않았다."뒤를 읽으시오."예관의 눈이 흔들렸다.나머지 요구는 작은 글씨로 이어졌다. 소월백은 다섯째 고을에서 호송대와 갈라져 황실 가마로 갈아탈 것. 선황의 친필과 어새는 예관에게 맡길 것. 삭왕 부부와 동행한 백성은 제 고을로 돌아갈 것. 이를 따르면 앞선 사칭의 죄는 묻지 않는다.진묵이 낮게 웃었다."아우 찾은 게 아니라 짐꾼 찾았네. 증거 들고 혼자 오라고."예관이 낯을 굳혔다."황명을 가벼이 말씀하지 마십시오.""가볍게 쓴 걸 가볍다 하지 무겁다 하나."온보요가 진묵의 소매를 잡았다. 그는 입은 다물었으나 눈은 예관의 목을 벨 듯 남았다.소월백이 물었다."내가 황자라는 인정은 값입니까, 사실입니까.""사실이옵니다.""그럼 내가 저들과 함께 가도 내 피가 바뀌지는 않겠군요.""폐하께서는 궁중의 법도를—""법도는 경성에서 배우겠습니다. 길에서 벗을 버리는 법부터 배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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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화. 황실 가마

황실 가마는 빈 채로 호송대 뒤를 따랐다.금실로 수놓은 휘장, 흰 말 여덟 필, 예관과 악공 열둘. 죄수를 맞는 행렬이 아니라 돌아온 황자를 온 나라에 보이기 위한 차림이었다. 그러나 주인인 소월백은 거름 냄새가 밴 문서 수레에 앉아 있었다.황실 가마가 지나갈 때마다 길가 백성은 누구를 향해 절해야 할지 몰랐다. 빈 금빛 가마에 먼저 엎드렸다가 뒤의 문서 수레에서 월백을 발견하고 다시 몸을 돌렸다. 소월백은 그때마다 수레에서 내려 절하지 말라 했고, 행렬은 자꾸 늦어졌다.예관은 마침내 월백에게 가마에 한 번만 앉아 달라 청했다."경성에 전할 모양이 필요하옵니다.""살아 돌아온 사람이 아니라 잘 꾸민 모양이 필요합니까.""백성은 보이는 것을 믿습니다.""그래서 저 수레를 타는 것이오. 내가 무엇을 지고 왔는지 보이게."문서 수레에는 관인과 증언, 풀린 사슬이 있었다. 금실 휘장보다 볼 것이 많았다.진묵은 그 꼴이 마음에 드는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왕이 되더니 좋은 가마가 생겼군.""삭왕 전하께 빌려 드릴까요.""싫어. 내 부인 가마가 더 좋아."그는 온보요의 가마 발을 걷고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자리가 좁아 어깨가 붙었다. 보요가 밖의 눈을 의식해 밀어내자 도리어 다리를 길게 뻗고 눕듯 앉았다."예관이 봅니다.""보라고 타는 거야. 황실 가마가 와도 부군 자리는 안 비운다고.""가마가 그것과 무슨 상관입니까.""다 상관있어."대꾸는 억지였으나 보요의 발 아래에 제 겉옷을 접어 놓는 손은 꼼꼼했다. 아침부터 오래 앉아 발목이 붓는 것을 먼저 알아본 것이다.그는 수레가 돌을 넘을 때마다 팔로 보요의 등을 받쳤다. 겉으로는 제 자리임을 드러내는 듯 굴었으나, 실제로는 흔들림 하나가 그녀 몸에 닿는 것부터 막고 있었다.소월백이 수레에서 말했다."제 가마를 거절하신 이유가 왕비마마 옆이 좁아서입니까.""황제 동생 됐으면 남의 부인 그만 쳐다봐.""수레가 앞을 향해 있어 저절로 보입니다.""뒤로 앉아."보요가 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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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화. 잔칫쌀

관평현의 잔칫쌀은 집집마다 밥그릇에서 한 숟갈씩 걷은 것이었다.현령은 황실 예관이 보낸 분담표를 내놓았다. 땅 한 마지기마다 쌀 한 말, 소 없는 집은 닭 두 마리, 닭도 없는 집은 장작 한 단. 잃었던 황자가 돌아오는 경사이니 가난한 자도 빠져서는 안 된다는 붉은 주가 붙었다.가난할수록 더 내어 경사를 증명해야 하는 셈이었다.온보요가 물었다."거두기 시작한 것이 언제입니까.""닷새 전입니다. 거부한 집은 역모를 의심하라 하여…… 소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봄갈이를 앞둔 종자벼까지 퍼낸 집이 많았다. 지금 한 끼를 굶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들에 뿌릴 씨가 사라져 가을의 밥도 없어질 판이었다.소월백은 환영전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성문 아래 터진 쌀자루 곁에 앉아 낟알을 한 줌 집었다. 윤이 도는 좋은 쌀 사이로 볍씨가 섞여 있었다."이것이 나를 위한 것입니까."예관이 답했다."황실의 체면을 위한 것이옵니다. 전하께서 초라한 고을을 지나셨다는 말이 돌면—""내 체면이 백성의 씨앗보다 무겁습니까.""전하의 체면은 곧 나라의 체면입니다.""굶은 사람이 든 잔칫상도 나라의 낯이오."소월백은 잔치에 들인 물건을 적은 장부를 가져오게 했다. 금실 휘장 열두 폭, 은 술잔 스물넷, 향 백 근, 흰 말 여덟 필의 먹이까지 관평현 몫으로 적혀 있었다. 황실은 선물 하나 내지 않고 고을의 쌀로 황자를 맞으려 했다."전부 돌려주시오."현령이 놀라 무릎을 꿇었다."이미 황실 창고에 넣어 봉했습니다. 소관이 열면 목이 달아납니다.""내 잔치라 하지 않았소. 내가 취소하오.""책봉 전에는 황실 창고를 열 권한이 없으십니다."예관의 말에 소월백이 제 발목의 사슬을 들어 보였다."황자 권한은 없고 황자 잔치만 있군. 참 편리한 핏줄입니다."진묵이 성문 기둥에 기대 웃었다."이제야 궁이 어떤 데인지 배우네. 먹을 때만 아들이고 명할 때는 죄수야."소월백은 잠시 생각하다 빈 황실 가마를 가리켰다."저것은 누구 것입니까.""전하께 내린 어가입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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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화. 왕의 이름

관평현령은 인장을 꺼내고도 찍지 못했다.황실 봉인을 뜯으면 목이 달아난다. 월백의 글을 거절하면 다섯 고을의 마지막 관인이 끊긴다. 그의 손등에서 식은땀이 인주 위로 한 방울 떨어졌다.온보요가 황제의 금테 교지를 펼쳤다."봉인을 뜯지 않아도 됩니다."그녀는 `선황의 둘째 아들로 볼 근거가 충분하다`는 줄 아래에 관평현이 받은 잔치 분담표를 붙였다. 이어 월백의 잔치 거부문을 나란히 놓았다."현령께서 찍을 것은 창고를 열라는 명이 아닙니다. 이 세 문서를 같은 날 받았다는 사실입니다."현령이 고개를 들었다."그것만으로 쌀을 돌려줄 수 있습니까.""창고지기가 고르면 됩니다. 황제께서 인정한 황자의 거부를 따를지, 황자가 싫다는데도 잔치를 강요할지. 어느 쪽이 충인지요."봉인을 지키던 창고지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명을 내린 자는 멀리 있고, 굶은 사람들은 문 앞에 있었다.소월백이 말했다."열지 않아도 그대 죄로 적지 않겠소. 다만 오늘 굶은 사람의 이름도 내 빚에서 지우지 않겠소."협박이 아니라 기다리겠다는 말이었다.창고지기는 오래 봉인을 보았다. 마침내 칼을 뽑지 않고 손톱으로 붉은 종이 한 귀퉁이를 들었다. 봉인이 찢어지는 소리는 놀랄 만큼 작았다.사각.문이 열리자 쌀 냄새가 쏟아졌다. 장터 사람들은 달려들지 않았다. 온보요가 분담표를 한 집씩 읽었고, 노강과 황실 수행원들이 같은 양을 저울에 달았다. 먼저 나온 것은 볍씨였다. 밥쌀보다 가을을 돌려주는 일이 급했다.소월백은 제 발목 사슬을 찬 채 쌀가마를 날랐다. 예관이 막으려 하자 그가 어깨에 가마니를 올렸다."황실 체면이라 했지요. 그럼 황실이 나르시오."예관도 관복 소매를 걷었다. 악공은 악기를 내려놓고 쌀을 퍼 담았다. 빈 가마를 따르던 황실 행렬이 처음으로 사람에게 쓸모 있는 행렬이 되었다.해가 질 무렵 마지막 종자벼가 주인에게 돌아갔다. 쓰러졌던 노인은 자기 자루를 열어 한 줌 세어 본 뒤 소월백에게 고개를 숙였다."황자 전하의 잔치를 못 차려 죄송합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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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화. 성 밖의 밤

경성의 불빛을 앞에 둔 밤, 진묵은 천막 입구를 두 겹으로 여몄다.바깥에는 황실 예관과 수행원, 다섯 고을의 문서를 실은 수레, 아직 떠나지 않은 관평현 사람들이 있었다. 내일 성문을 넘으면 셋이 같은 방에 들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온보요가 비녀를 빼자 머리칼에서 밥 짓는 연기 냄새가 났다. 진묵은 대야에 따뜻한 물을 붓고 그녀 발을 제 무릎에 올렸다. 오래 앉아 있던 발목이 조금 부어 있었다."내일은 걷지 마.""성문 앞에서 가마를 타면 숨는 것처럼 보입니다.""남들이 네 발 아픈 건 책임져 줘?""왕야가 책임져 주시잖아요."그의 손이 멎었다. 이내 입꼬리가 느슨해졌다."다시 말해 봐.""싫습니다.""한 번 더.""물이나 식기 전에 닦으세요."퉁명스러운 명을 들은 북강의 왕은 고분고분하게 무명을 짰다. 따뜻한 천이 발등을 감싸고, 엄지가 부은 곳을 천천히 밀었다. 콩가루로 씻긴 물 냄새와 그의 침향이 좁은 천막 안에서 섞였다."월백 공자가 황제가 되면 왕야는 무엇을 하실 겁니까.""너랑 집에 가지.""북강으로요?""네가 가는 데가 집이야."대답이 너무 쉬워 보요가 그를 내려다보았다."왕야는 옥좌가 탐나지 않으십니까.""앉아 있으면 네가 멀어진다. 그런 의자는 필요 없어.""천하보다 신첩이 좋다는 말씀입니까.""천하는 밤마다 내 옷깃 잡아당기진 않지."보요의 귀 끝이 달아올랐다. 발을 빼려 하자 진묵이 놓치지 않고 복사뼈에 입술을 가볍게 댔다. 뜨겁고 짧았다."왕야.""응."말투가 온순해졌다. 보요가 혼내려다 웃음을 삼켰다.진묵은 그녀를 안아 침상에 앉혔다. 겉옷 고름을 풀지 않고 느슨하게만 당겨 목덜미에 숨을 묻었다. 사각거리는 비단, 약하게 젖은 머리칼, 눌린 탄식 하나가 천막 밖의 밤과 갈라졌다."하아…… 잠시만요."말이 떨어지자 입술이 바로 멎었다. 달아오른 눈만 가까이 남았다. 보요는 그의 익숙한 여유가 얄미워 손끝으로 목깃을 구겼다."왜 그렇게 보십니까.""계속해도 된다는 말 기다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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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화. 성 밖

경성 외성 앞에는 환영 인파보다 종이를 든 사람이 많았다.청하현에서 베낀 선황의 친필, 하령현 내관의 이름, 서령현 예순넷의 손도장. 다섯 고을에서 서로 다른 길로 보낸 사본들이 원본보다 먼저 성벽 아래에 모였다. 장사꾼은 장부 사이에, 유생은 책 표지 안에, 의원은 약첩 밑에 숨겨 가져왔다.황실 군졸은 종이를 빼앗지 못했다. 한 장을 뺏으면 옆 사람이 소리 내 읽었고, 두 장을 찢으면 열 사람이 그 문장을 받아 적었다.성벽 아래에는 먹과 종이를 파는 좌판까지 급히 들어섰다. 글을 모르는 이는 읽을 줄 아는 사람에게 한 줄을 청했고, 돈 없는 이는 장부 뒷장을 찢어 썼다. 같은 글이 번질수록 누가 처음 가져왔는지는 흐려졌다. 사람 하나를 잡아 입을 막는 수로는 끝낼 수 없는 소문이 되었다.온보요는 수레 안의 원본과 성밖 사본을 번갈아 보았다. 다섯 고을을 도느라 늦어진 날들이 처음으로 눈앞의 힘이 되어 있었다. 곧은길로 먼저 왔다면 아버지의 옥문 앞에 딸 하나만 섰을 터였다. 지금은 얼굴도 모르는 수백 사람이 같은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소월백이 낡은 수레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절하지 않았다. 먼저 그의 발목 사슬을 보았다. 아우로 인정한다는 교지가 도착했는데도 남겨 둔 쇠였다."문을 열라!"누군가 외치자 함성이 번졌다. 소월백은 손을 들어 소리를 낮추었다."문을 부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안에서 열게 하러 왔습니다."성벽 위 북이 한 번 울렸다. 그러나 문은 움직이지 않았다.인파 뒤에서 온가의 푸른 가마가 밀고 들어왔다. 큰오라비가 팔을 목에 건 채 내렸다. 얼굴은 며칠 사이 야위었고, 붕대 아래로 피가 배어 있었다.온보요가 가마에서 내려 달려가려 하자 진묵이 허리를 받쳤다. 막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보다 반 걸음 앞에서 길을 열었다."오라버니.""천천히 와. 네 몸부터 생각해야지."큰오라비는 한 팔로 동생의 어깨를 감쌌다. 보요는 그의 붕대를 보고, 그는 보요의 창백한 낯을 보았다. 서로 묻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첫 물음은 같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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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화. 아버지의 글

온 대인의 왼손 글씨는 줄마다 아래로 기울었다.오른손으로 쓰던 평생의 버릇을 왼손이 따라가지 못했다. 획은 서툴렀지만 문장은 흐트러지지 않았다.황제가 월백을 아우라 부르면 황자의 귀환은 황제가 베푼 은혜가 된다. 피로 타고난 자리를 형이 돌려준 것처럼 꾸미면, 동생이 진실을 말할 때마다 배은한 자가 된다.소월백이 종이를 읽고 오래 침묵했다."형님이 이름을 돌려준 게 아니라, 내 이름에 손잡이를 단 거군.""그래도 거부하면 안 돼."온보요가 말했다."그러면 황제가 내민 틀 안에서 다시 사칭범이 돼. 받되, 누구에게 받은 게 아닌지는 계속 밝혀."진묵이 종이를 내려다보며 코웃음 쳤다."황실 피라는 게 빚문서보다 질기네. 태어날 때 찍힌 도장으로 평생 받아 내니까."두 번째 단락에는 온 대인의 문초가 적혀 있었다.형부는 선귀비의 독살을 증언한 노궁인이 어디 숨었는지 물었다. 나는 모른다 답했다. 그 사람은 살아 있다. 거처는 아직 내 입에서 나가지 않았다.보요의 손끝이 종이에서 멎었다. 노궁인은 이미 독합과 죽은 은침을 황제 앞에 놓았으나, 태후의 칼을 피해 다시 몸을 숨긴 뒤였다. 아버지가 형틀을 견디는 까닭은 새로운 비밀을 품어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증인을 두 번 내주지 않기 위해서였다."아버님이 거처를 아십니까."소월백이 물었다.큰오라비가 고개를 저었다."나도 모른다. 아버님은 종이에 쓰지 않으셨다. 아신다는 사실도 형부에는 인정하지 않으셨고."진묵이 말했다."잘했어. 이 종이도 잡힐 수 있으니까."그는 노궁인이 살아 있다는 줄을 등불에 가까이 댔다. 태우려는 손을 보요가 막았다."이미 아버님이 문초에서 그 사람을 드러내셨습니다. 이걸 없애면 형부 기록만 남아요.""그럼 네가 가져."진묵은 바로 손을 거두었다. 보요는 편지를 다섯 관인 문서 사이에 끼우지 않고 제 속옷 안쪽 작은 주머니에 넣었다. 공적 증거가 되기 전까지는 가족만 아는 말이었다.마지막 단락은 딸에게 쓴 것이었다.나를 구하려 산 사람의 이름을 내주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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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화. 문 앞의 값

온 대인의 다음 문초까지 세 시진이 남았다.성 안에서는 황실 가마가 기다리고, 성 밖에는 다섯 고을의 문서 수레가 서 있었다. 문지기는 소월백 한 사람만 들일 수 있다는 말을 되풀이했다."문서는 남쪽 공조문으로 보내시오. 조사 뒤 쓸 만한 것은 형부에 올릴 것이오."온보요가 물었다."쓸 만한 것을 누가 고릅니까.""조정에서 정할 일이오.""그럼 쓸 만하지 않다고 제쳐 둔 이름도 남겨 주세요."문지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문으로 보낸다는 것은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라, 사람 없는 창고에서 고르고 없애겠다는 뜻이었다.성밖 인파가 다시 종이를 들어 올렸다. 원본이 사라져도 사본은 남았지만, 원본이 황실에 접수되지 않으면 조정은 평생 떠도는 소문이라 부를 수 있었다.반대로 원본만 성 안에 넣고 사본을 흩으면 조정은 내용이 다르다 우길 터였다. 안과 밖의 글이 같은 때에 서로를 보고 있어야 했다.소월백은 선덕문 앞 돌계단에 앉았다. 발목의 사슬이 계단 모서리에 부딪혔다."문서가 먼저 들어가기 전에는 나도 들어가지 않겠소."예관이 다급히 다가왔다."전하, 폐하께서 친히 종묘 문을 열고 기다리십니다.""내 아버지의 종묘라면 내 아버지의 글도 함께 들어가야지요.""형부 문초가 시작되면 온 대인의 몸이 버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먼저 들어가 폐하께 은전을 청하십시오."사람 하나를 살리려면 증거를 문밖에 두고 혼자 들어오라. 태후가 청하현에서 내밀었던 선택과 모양만 달랐다.온보요는 성벽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의 글이 떠올랐다. 나를 구하려 산 사람의 이름을 내주지 마라."문을 열어 달라고 더 청하지 않겠습니다."그녀는 문서 수레의 궤를 하나씩 내렸다. 청하현의 사본은 동쪽 인파에, 회주현 스물셋의 문서는 서쪽 장사꾼들에게, 하령과 서령 기록은 유생들에게 맡겼다. 원본은 성문 앞에 그대로 두었다."해 질 때까지 접수하지 않으면 여기서 전부 읽겠습니다. 아버님의 문초가 시작되는 때에 맞춰, 성 안에서는 형부가 묻고 성 밖에서는 백성이 답하게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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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화. 아우

작은 기록문으로 중서 사인 셋이 나왔다.그들은 성밖 돌탁자에 장부를 펼치고 문서 궤를 하나씩 받았다. 봉인이 온전한지, 사본이 몇 장인지, 누가 수결했는지까지 소리 내 살폈다. 온보요는 마지막 궤가 올라갈 때까지 열쇠를 놓지 않았다."청하현 선황 친필 목격서, 원본 하나 사본 열둘.""맞습니다.""회주현 상단 식솔 스물셋 방면 명문, 원본 하나 사본 셋.""맞습니다.""하령현 내관 조복의 매질과 인질 증언, 서로 다른 진술 셋. 서령현 불법 구금 예순넷의 손도장. 관평현 환영곡 반환문."다섯 고을의 이름이 경성 장부 첫 장에 차례로 올랐다.중서 사인이 마지막으로 선황 어새를 살피려 하자 진묵이 빈 병부 주머니에서 보자기를 꺼냈다. 그는 어새를 바로 넘기지 않고 온보요를 보았다.보요가 고개를 끄덕인 뒤에야 손이 움직였다."왕야의 물건이 아니었습니다.""왕비의 것도 아니다. 그러니 네 뜻을 묻고 내놓는다."어새가 장부 위에 놓였다. 사인이 탁본을 뜨고 다시 보자기에 싸 문서 궤에 넣었다. 원본 접수가 끝났다는 검은 관인이 찍혔다.그 순간 선덕문 위에서 황제의 사자가 나타났다.두 번째 교지는 첫 교지보다 짧았다.짐은 선황의 둘째 아들 소월백이 살아 돌아왔음을 종묘와 천하에 고한다. 짐의 아우를 성 안으로 맞아 예에 따라 자리를 돌려줄 것이다.`짐의 아우`라는 네 글자가 성벽 아래로 울렸다.사람들이 이번에는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소월백만 서 있었다. 발목 사슬이 햇빛 아래 검게 빛났다.그는 절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지 않고 성벽 위 황제의 사자만 보았다. 형에게 예를 올리는 자리도, 백성에게 예를 받는 자리도 아니었다. 이름을 인정한 자와 그 인정의 값을 따지는 자가 처음 마주 선 자리였다.교지는 다섯 고을에서 문서에 이름을 남긴 백성을 황자 귀환을 도운 자로 인정하여 앞선 공모죄를 묻지 않는다고 했다. 서령현 예순넷, 회주현 스물셋, 장터에서 사본을 가져온 사람들까지 한꺼번에 죄인 명부에서 빠졌다.황제가 자비를 베푼 모양이었으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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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화. 세 개의 문

소월백의 발목 사슬은 선덕문 앞에서 풀렸다.황실 예관이 무릎을 꿇고 마지막 자물쇠에 열쇠를 넣었다. 철이 벌어지자 한 달 넘게 살을 누른 자리에 검붉은 띠가 남았다. 사람들은 환호하려다 그 상처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소월백은 풀린 사슬을 중서성 문서 궤 위에 올렸다."손목 사슬과 한 벌입니다. 빠뜨리지 말고 황실 기록에 넣으시오."사인이 난처한 얼굴로 물었다."이 물건을 무엇이라 적겠습니까.""황제가 아우를 알아보기 전까지 채운 것."붓끝이 잠시 멎었다가 그대로 움직였다. 사슬도 증거가 되어 성 안으로 들어갔다.선덕문 안에는 붉은 융단과 황실 가마가 기다렸다. 악공들이 피리를 들었으나 소월백은 연주하지 말라 했다. 오늘 잔칫쌀을 돌려받은 관평현 사람들의 밥이 다 익기 전에는 귀환 음악을 듣지 않겠다고 했다."전하."온보요가 그를 불렀다.소월백이 돌아보았다. 쇠사슬 없는 두 손이 낯설게 비어 있었다.보요는 이틀마다 보내기로 한 짧은 문장을 다시 읽었다."길은 아직 이어져 있다.""같은 문장으로 보내겠습니다.""한 번이라도 끊기면 신첩이 궁으로 갑니다."진묵이 곁에서 덧붙였다."그전에 내가 문을 연다.""왕야는 궁문을 부수지 마세요.""답이 오면 부술 일도 없다."말은 소월백에게 했으나 눈은 보요만 보았다. 진묵은 그녀 회색 겉옷의 매듭을 다시 묶고, 목에 건 문서 궤 열쇠가 옷 안에 잘 감춰졌는지 손등으로 더듬었다.소월백이 헛웃음을 흘렸다."마지막까지 부군인 것을 보이셔야 합니까.""마지막이 아니니 새겨 두라."진묵은 보요의 어깨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거칠고 당연한 손길이었다. 황자의 자리가 생겨도 보요 곁의 자리는 비지 않는다는 선언이었다.큰오라비가 보요에게 온가 가마로 가자 손을 내밀었다. 보요는 그 손을 잡아 인사한 뒤 진묵 곁에 남았다."신첩은 왕야와 삭왕부로 갑니다. 아버님께도 그리 전해 주세요."진묵의 눈매가 순식간에 풀렸다."들으셨지요. 보요는 나와 갑니다.""네 귀에만 들린 줄 알았나. 동생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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