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Chapter 221 - Chapter 230

328 Chapters

221화. 세 번의 기침

기침이 벽을 세 번 두드렸다.짧게 둘, 숨을 고른 뒤 하나.진묵은 어둠 속에서 손목의 포승을 비틀었다. 밧줄은 물에 불린 쇠가죽처럼 질겼고 매듭은 손등 쪽에 있었다. 왕을 묶는 법을 아는 자가 맨 솜씨였다.복도에서 자물쇠가 울렸다. 작은 창이 열리고 물그릇 하나가 들어왔다. 쉰내 밴 나무그릇에 물은 절반뿐이었다."죄인에게는 하루 두 그릇이다. 엎으면 핥아 마셔라."진묵은 그릇을 받지 않았다."뜨거운 물로 바꿔 와.""여기가 왕부인 줄 아십니까.""왕비가 찬물은 금했다."금군이 욕을 삼키며 창을 닫았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진묵은 발끝으로 그릇을 옆 벽에 붙였다. 빈 나무가 벽돌에 닿자 맞은편에서 낮은 숨이 멎었다."강무."잠시 뒤 벽 너머에서 목소리가 왔다."늦으셨습니다."목소리는 기억보다 낮고 거칠었다. 진묵이 마지막으로 본 강무는 북문 객잔에서 국수를 두 그릇 비우고도 배고프다던 스물넷 사내였다. 장부 한 장을 품고 남쪽으로 떠난 뒤 빈 솥과 잘린 문서끈만 남겼다. 그 이름을 군사 묘부에 올리지는 않았다. 시신 없는 자에게 죽었다는 글을 주기 싫었다."목소리가 늙었군.""왕야께서 너무 늦게 오셨습니다."죽었다 살아난 부하의 첫 인사가 퉁명스러웠다. 진묵의 입가가 비스듬히 올라갔다."살아 있었으면 돌아왔어야지.""처자식 목에 황실 밥줄이 걸렸습니다. 왕야께서는 아내 하나 때문에 북강도 버리셨다면서요.""버린 게 아니다. 보요에게 맡겼다."벽 너머에서 헛웃음이 새었다. 스무 해 가까이 궁에 묻힌 사람의 웃음은 마른 종이가 접히는 소리를 냈다."소인은 내전 문서고에 갇혔고, 아내와 아들은 서쪽 세탁방에 갇혔습니다. 셋이 한 담 안에서 열일곱 해를 살았는데 함께 밥 먹은 날은 열흘도 안 됩니다."말이 끝나자 벽 너머에서 쇠가 바닥을 긁었다. 강무가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다리께에서 짧은 쇳소리가 나고, 돌아오는 숨은 조금씩 더 가까워졌다. 둘 사이에는 벽돌 여섯 장뿐이었으나 얼굴을 볼 구멍은 없었다.진묵은 손가락으로 벽을 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Read more

222화. 검은 화살촉

"아니라면 칼을 뽑을 텐가."진묵이 묻자 허강은 문을 닫고 빗장을 안에서 걸었다.횃불 아래 드러난 사내는 쉰을 넘긴 낯이었다. 눈썹 한쪽은 불에 그슬린 뒤 다시 나지 않았고, 검을 쥔 오른손 세 손가락이 끝마디에서 굽어 있었다. 죄인 명부보다 먼저 살아남은 몸이 펼쳐졌다.허강이 무릎을 꿇었다."한씨 성을 쓰던 열일곱 살 마부였습니다.""재호송대 열여섯 중 하나.""열다섯은 죽고 소인만 돌아왔습니다."반월령 고갯길에는 그날 비가 내렸다. 여덟 살 황자를 숨긴 곡식 수레 하나, 빈 수레 둘, 앞뒤를 지키는 기병 열셋과 마부 셋. 첫 화살은 수레를 끌던 말의 눈에 박혔다. 둘째는 유모의 등을 뚫었다. 허강은 아이를 끌어안은 흰 소매가 산 아래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서야 어깨에 박힌 쇠를 느꼈다고 했다."아이를 누가 데려갔지.""얼굴을 가린 상단 사람입니다. 선대 삭왕의 친병이 길을 내고, 그들이 아이를 받아 남쪽으로 갔습니다. 소인은 뒤에 남은 시신 틈에 엎드렸습니다."피와 빗물이 같은 골로 흘렀다. 추격대는 죽은 자들의 목을 베어 수를 맞췄으나, 가장 어린 마부 하나는 진흙 아래에서 숨을 삼켰다.그는 허리의 검을 풀었다. 칼집을 내놓으라는 말에도 날을 빼지 않고, 손잡이에 감긴 검은 가죽끈부터 풀었다. 땀과 손때에 절어 반들거리는 끈 아래 작은 홈이 나타났다.검은 쇳조각 하나가 그 안에서 떨어졌다.세모난 몸에 날이 셋 솟은 화살촉이었다. 날 하나는 부러졌고 가운데 골에는 메운 자국이 있었다. 허강이 횃불 가까이 들자 갈아 지운 자리 밑에서 연꽃잎 끝 하나가 희미하게 살아났다.불빛이 움직일 때마다 검은 쇠의 세 날이 차례로 번뜩였다. 사냥 화살보다 짧고 살이 넓었다. 짐승을 멀리 쫓는 물건이 아니라 가까운 사람의 몸 안에서 돌며 상처를 벌리는 꼴이었다."반월령에서 왼쪽 어깨를 맞았습니다. 의원이 뽑아 버리라 했으나 숨겼습니다. 그날 호송대를 쏜 화살은 모두 같은 꼴이었습니다.""연꽃은 황후전 문양이군.""당시 중궁 무기고의 쇠에는 잎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5
Read more

223화. 불붙은 장부

창끝이 문틈부터 들어왔다.허강은 빗장을 잡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장 내관 뒤로 금군 여덟이 두 줄로 섰다. 횃불은 넷이었다. 좁은 복도에 쓰기에는 지나치게 많았다."명부와 검을 내놓으시지요."장 내관이 웃었다."죄인을 받으러 온 사람에게 검까지 가져오라 하신 적은 없습니다.""오늘은 명이 달라졌습니다."허강의 손이 검 손잡이를 덮었다. 그 안에 든 쇠 한 조각을 장 내관도 아는 눈이었다.진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포승 묶인 두 손은 앞으로 늘어졌고 무기는 깨진 나무그릇뿐이었다."둘을 셀 때까지 나가.""왕야께서 아직 숫자를 고르실 처지입니까.""왕비가 두 번 참으라 했다. 끝났다."하나를 세기도 전에 창이 들어왔다.진묵이 몸을 틀었다. 창날이 옆구리의 옷을 찢고 벽에 박혔다. 그는 두 손 사이 포승을 창대에 감아 당겼다. 금군 하나가 문턱 안으로 고꾸라졌다. 무릎이 투구를 올려쳤다.옷 아래로 가느다란 피가 번졌다. 진묵은 내려다보지도 않았다. 두 번째 창이 얼굴을 향해 찔러 오자 고개를 비켜 날을 귓가로 흘렸다. 풀린 머리칼 몇 올이 잘려 횃불 속으로 날았다. 타는 머리칼 냄새가 짧게 피었다.쾅.허강의 검이 그제야 빠졌다. 좁은 곳에서 긴 칼을 휘두르지 않고 손잡이로 두 사람의 턱을 차례로 쳤다. 세 번째 금군이 장 내관을 밀치고 횃불을 별실 안에 던졌다.진묵이 넘어진 금군의 뒷덜미를 잡아 불길 밖으로 밀었다. 죽일 수 있는 목이 손안에 들어왔으나 비틀지 않았다. 대신 그 허리의 열쇠 꾸러미를 뜯어 강무가 갇힌 벽 쪽으로 던졌다."세 번째는 안 참으셔도 된다 하지 않으셨습니까."허강이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왕비가 살려 두라 했다."불은 짚자리보다 벽 너머에서 먼저 올랐다."문서고!"강무의 외침이 들렸다.기름이 벽 아래 배수 구멍을 타고 옆방으로 흘러든 뒤였다. 누런 불길이 종이 냄새를 삼키며 치솟았다.진묵은 빼앗은 창날에 포승을 문질렀다. 한 올, 두 올. 손목 살이 먼저 벗겨지고 밧줄이 끊어졌다.장 내관은 복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5
Read more

224화. 동쪽 벽

기름 먹은 문이 안쪽으로 불을 뿜었다.허강이 옷자락으로 장부를 감쌌다. 강무는 쇠사슬을 창살에 걸어 잡아당겼고, 진묵은 무기 궤를 문 앞에 세웠다. 마른 나무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타닥, 못대가리부터 붉게 달아올랐다."다른 문은.""없습니다."강무가 기침 사이로 답했다."동쪽 벽 너머가 옛 목욕전입니다. 삼십 년 전 물길을 막고 창고를 넓혔습니다."진묵이 벽에 손바닥을 댔다. 아래쪽 벽돌 두 장이 축축했다. 서늘한 물비린내가 불 냄새 밑에서 가늘게 올라왔다."여기군."그는 무기 궤의 쇠장식을 뜯어 벽돌 틈에 박았다. 한 번 내리칠 때마다 팔뚝 힘줄이 솟고 손목의 벗겨진 살에서 피가 흘렀다. 강무가 곁의 쇠촛대를 들었다."왕야께서 부수는 동안 소인이 장부를 지키겠습니다.""장부를 버려. 너부터 나와."천장에서 타는 소리가 났다.굵은 들보 하나가 허강 쪽으로 내려앉았다. 그가 장부를 품은 채 몸을 틀었으나 왼쪽 어깨가 깔렸다. 오래된 상처 위로 나무가 눌리자 이를 악문 입에서 피가 배었다.강무가 장부를 잡으러 뛰었다.진묵은 벽돌에서 손을 뗐다."그쪽이 아닙니다!"강무가 소리쳤다.진묵은 타는 들보 아래 어깨를 넣었다. 비단 관복이 불씨를 먹고 검은 머리칼 끝이 오그라들었다. 들보가 손바닥 하나만큼 들리자 허강이 기어 나왔다.무게가 등뼈를 따라 내려앉았다. 옆구리의 베인 곳이 다시 벌어져 피가 허리띠를 적셨다. 진묵은 숨을 한 번 길게 뱉고 무릎을 폈다. 들보 아래 눌렸던 허강의 검집이 돌바닥을 긁으며 빠져나왔다."왕야, 놓으십시오.""입 다물고 팔부터 빼.""장부가 탑니다.""너도 타고 있어."그 사이 장부를 감싼 옷자락에 불이 붙었다.강무가 맨손으로 불을 눌렀다. 스무 해 전 줄은 가운데부터 검게 말렸다. 붉은 먹점이 사라지고 중궁의 두 글자만 반쪽 남았다. 손바닥 살이 타는 냄새가 종이 냄새와 섞였다."버려.""원본입니다.""산 입도 원본이야."진묵이 장부를 불길 속으로 걷어찼다. 허강을 등에 업고 동쪽 벽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5
Read more

225화. 빈 관

문빗장이 올라갔다.온보요가 약조한 하루가 꼭 찬 때였다.주칠 대문 밖에는 흰 천을 두른 관 하나가 놓여 있었다. 금군은 불에 그은 삭왕의 유해를 모셔 왔다고 말했다. 관 뚜껑에는 황실 봉인이 세 줄로 붙었고, 검은 재가 일부러 뿌린 듯 고르게 앉아 있었다.왕부 식솔들은 대문 안쪽에 줄지어 섰다. 울음을 터뜨리는 이는 없었다. 노강은 관을 멘 자들의 신발을 보았고, 상엄은 흰 천 아래로 드러난 새 밧줄의 매듭을 살폈다. 방어멈만 보요의 팔꿈치 아래에 손을 받친 채 손바닥을 떨었다.길 건너에는 새벽 장을 열던 상인들이 바구니를 내려놓고 모여 있었다. 뜨거운 콩죽 냄새와 관에 뿌린 젖은 재 냄새가 섞였다. 아이 하나가 울려 하자 어미가 입을 가렸다. 열린 왕부 문 앞이 장례식보다 조용했다.보요는 문턱을 넘기 전에 배 위로 겉옷을 한 번 여몄다. 밤새 자지 못한 눈 아래로 엷은 그늘이 졌으나 머리칼에는 흐트러진 곳이 없었다.먹빛 치마 위에는 은실 살구꽃이 한 송이만 놓였다. 진묵이 골라 주던 왕부의 색이었다. 방어멈이 다른 옷을 꺼냈으나 보요는 검은색도 흰색도 입지 않았다. 살아 돌아올 사람의 부고 앞에서 상복을 입을 수는 없었다."열어 주세요.""왕비마마께서 보실 만한 모습이 아니옵니다.""신첩의 부군입니다."금군이 눈을 피했다. 그때 행렬 뒤에서 황자 가마가 멎었다. 소월백이 흰 상복도 검은 관복도 아닌 옥빛 예복 차림으로 내렸다. 외전 출입을 막은 명은 해가 뜨며 끝났으나, 허리에는 칼도 황자패도 없었다."관을 여십시오.""둘째 전하께서도 명을 거스르시면 곤란합니다.""죽은 형제의 얼굴을 보겠다는 것도 거역입니까."그가 관 앞에 서자 길가에 모인 백성들이 무릎을 꿇었다. 금군은 더 버티지 못하고 봉인을 뜯었다.쇠못이 하나씩 뽑힐 때마다 나무가 길게 울었다. 뚜껑이 들리자 탄 비단과 젖은 재 냄새가 퍼졌다. 안에는 검게 그은 관복 한 벌, 끊어진 허리띠, 검은 옥 장식이 들어 있었다.뼈는 한 조각도 없었다.사람들 사이에서 눌린 숨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6
Read more

226화. 차가운 옥

빈 관이 편전 한가운데 놓였다.끌려 온 재가 흰 돌바닥에 길게 떨어졌다. 대신들은 향 냄새를 맡은 듯 소매로 코를 가렸고, 황제는 높은 자리에서 열린 관을 내려다보았다.왕부에서 궁까지 관 뚜껑은 한 번도 닫히지 않았다. 저잣거리 사람들은 길 양쪽에 서서 검은 관복과 빈 바닥을 함께 보았다. 금군이 비키라 외칠수록 사람은 더 모였다. 빈 관이 네 궁문을 지날 때마다 문지기들은 안을 보고서도 죽은 자의 이름을 적지 못했다.편전 서리 하나가 부고 장부를 들고 다가왔다가 붓을 멈췄다. 시신의 수를 적는 칸에 한 획도 넣을 수 없었다. 먹이 붓끝에서 불어나 흰 종이 위로 떨어졌다.온보요가 검은 옥을 들어 보였다."불길 속에서 건진 물건이라 하셨습니까.""내전 서리가 세 사람의 유품을 가려냈다.""불은 비단을 태우고 사람의 뼈까지 삼켰는데, 옥의 금선은 머리카락만큼도 벌어지지 않았습니다."그녀가 옥을 바닥에 놓았다. 차가운 표면에 손의 온기만 둥글게 남았다. 황제의 시선이 금군 교위에게 갔다. 교위는 이마를 돌에 박았다."소신은 전해 받은 관을 옮겼을 뿐이옵니다.""누가 전했느냐.""자녕궁 장 내관이옵니다."편전 문밖에서 염주알 구르는 소리가 났다.허 태후가 흰 비단 장막 사이로 들어왔다. 수수한 잿빛 옷에 장신구는 하나도 없었고, 손에는 윤이 난 침향 염주만 들려 있었다. 사람이 죽었다는 아침에도 자애로운 국모의 낯은 흐트러지지 않았다."불탄 자리를 보고 싶으냐."태후가 보요에게 물었다."예.""아이 가진 몸으로 재와 피를 밟겠다고.""빈 관을 끌어안고 우는 것보다 낫습니다."태후의 염주가 한 알 멎었다. 소월백이 보요보다 반걸음 앞에 섰다."소자도 함께 보겠습니다.""황자는 외전으로 돌아가거라.""삭왕 전하의 죽음을 고한 자가 모후의 내관입니다. 아우 된 몸으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긴 호칭이 편전의 거리를 더 차갑게 벌렸다.태후는 빈 관 옆에 작은 상을 들이라 했다. 그 위에 왕부에서 가져온 문서 궤 하나가 놓였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6
Read more

227화. 두 개의 열쇠

황자패가 쇠열쇠 곁에 놓였다.소월백은 미련 없이 패를 풀었다. 궁문 하나를 열 수 있는 백옥이 검은 옥과 부딪혀 맑은 소리를 냈다.허 태후가 두 물건을 거두었다."해가 중천에 오르기 전까지만 허락하마. 찾지 못하면 왕비는 왕부로, 황자는 외전으로 돌아간다.""그 전에 궤를 여시겠지요."보요의 말에 태후가 옅게 웃었다."열쇠는 쓰라고 주는 물건이 아니더냐."북쪽 회랑으로 가는 동안 금군 열둘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 타다 남은 문서고는 지붕 절반이 내려앉아 있었다. 젖은 재 위로 아침 햇빛이 들었고, 물을 먹은 종이들이 검은 꽃잎처럼 돌바닥에 붙었다.회랑 기둥마다 물동이가 놓였으나 바닥은 이상하리만큼 말라 있었다. 불을 끈 물보다 기름이 먼저 스민 자리였다. 창고 문 앞에는 쇠빗장이 바깥쪽으로 내려앉아 있었다.보요가 빗장 끝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새 검댕 아래 붉은 칠이 벗겨져 있었다. 불이 붙은 뒤 누군가 바깥에서 힘껏 걸어 잠근 자국이었다."이 문을 누가 닫았습니까."금군 교위는 답하지 않았다. 그의 목덜미를 타고 땀 한 줄이 갑옷 안으로 흘렀다.세 사람이 죽었다는 자리에는 핏자국도 뼛조각도 없었다.타 버린 무기 궤 아래에서 쇠사슬 한 토막이 나왔다. 고리는 창날로 비튼 듯 벌어졌고 한쪽에는 검붉은 살점이 아니라 옷실만 걸렸다. 진묵은 손을 찢어 가며 포승을 끊었을 뿐, 사람을 베지는 않은 흔적이었다.보요가 사슬을 들어 소매 안에 넣었다. 금군 교위가 막으려 손을 뻗었다가 소월백의 눈을 보고 거뒀다.보요는 무너지지 않은 벽을 따라 걸었다. 오래 서 있자 허리가 묵직해졌으나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소월백이 팔을 내밀었다."잡아.""됐어.""안 됐어."그녀는 그의 팔 대신 소매 끝만 쥐었다. 짧은 말 사이로 금군의 눈이 따라붙었다. 소월백은 더 가까이 오지 않고 걸음을 그녀에게 맞췄다.동쪽 벽 아래만 재가 얇았다. 젖은 벽돌 세 장이 안으로 무너졌고, 검은 물이 바닥의 재를 가느다랗게 끌고 갔다. 보요가 무릎을 굽히려 하자 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6
Read more

228화. 타는 궤

진묵이 깨진 병풍 뒤에서 나왔다.한쪽 옷자락은 옆구리의 피에 붙었고, 풀린 머리칼 끝은 불에 오그라들었다. 맨발에는 백자 조각에 베인 상처가 줄줄이 나 있었다. 그런데도 소월백의 팔부터 보는 눈은 멀쩡했다.보요가 쥐고 있던 옥빛 소매를 놓았다."왕야."숨결에 젖은 그 부름에 진묵의 어깨가 먼저 풀렸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허리를 감아 안았다. 배를 피해 등이 휘도록 끌어당기면서도 눈은 소월백을 향했다.젖은 관복에서 탄 종이와 피 냄새가 났다. 보요의 뺨이 그의 맨가슴 가까이에 닿자 밤새 차갑던 숨이 비로소 흔들렸다. 손은 옆구리 상처를 피해 등 가운데를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젖은 머리칼이 미끄러졌다.진묵은 그녀의 귀 아래에 얼굴을 묻었다. 입술이 닿지는 않았으나 뜨거운 숨이 같은 자리를 오래 데웠다. 살아 있는 사람의 온도가 목덜미에서 천천히 퍼졌다."다음에는 그자 없이 와.""길을 연 사람이 월백입니다.""공은 안다. 다음엔 문만 열고 물러나라 해."보요의 굳었던 입술 끝이 속절없이 풀렸다. 소월백은 그 작은 웃음을 보고서야 시선을 돌렸다."다치셨잖아요. 조금 놓으세요."팔이 곧 느슨해졌다. 떨어지지는 않았다. 소월백은 두 사람 사이에 남은 손바닥 하나만큼의 틈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병풍 뒤에는 허강이 젖은 옷을 덮고 누워 있었고 강무가 탄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허강의 검 손잡이는 끝까지 품 안에 감춰져 있었다."왕비마마."강무가 머리를 숙이려 하자 보요가 막았다."살아 나오신 뒤에 받겠습니다. 가족은 어디 있습니까.""서쪽 세탁방에 둘, 허 부도위의 식구 셋은 자녕궁 수방에 있습니다."소월백이 문 쪽에 귀를 댔다. 바깥에서 항아리 마개를 여는 소리가 났다."기름을 붓고 있어.""또 태우겠군."진묵은 보요를 품에서 놓지 않은 채 말했다. 그녀가 상처 난 옆구리를 보려 하자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보지 마.""손 치우세요."손이 곧 내려갔다. 소월백의 입가에 웃음이 잠깐 걸렸다가 사라졌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Read more

229화. 눈 돌려

문이 열리자 진묵이 먼저 사라졌다.빗장 밖에 서 있던 금군은 기름 항아리를 들고 있었다. 문 안이 비었다고 여긴 첫 사람이 발을 들이는 순간, 깨진 병풍 뒤에서 젖은 쇠사슬이 날아왔다.먼저 보인 것은 날이 아니라 창끝에 맺힌 기름방울이었다. 불을 끄러 온 군졸의 무기에는 붙을 까닭이 없는 냄새였다. 진묵은 보요를 병풍 안쪽으로 밀고 제 몸으로 입구를 가렸다. 옆구리에서 새 피가 번졌으나 얼굴에는 통증이 지나가지 않았다.철컥.사슬이 창대와 손목을 함께 감았다. 진묵이 당기자 군졸 둘이 서로 부딪혀 문턱 안으로 넘어졌다. 소월백은 세 번째 사람의 팔꿈치를 비틀어 항아리를 받아 냈다. 기름 한 방울도 바닥에 쏟아지지 않았다."황자가 사람 팔을 잘 꺾는군.""삭왕 전하께서는 죄인 꼴로도 말이 많으십니다.""왕비를 데려왔으니 팔 하나로 끝내."진묵은 빼앗은 포승으로 군졸 넷을 탕 기둥에 묶었다. 죽이지는 않았으나 소리 낼 틈도 주지 않았다. 허강과 강무가 금군의 겉옷을 걸쳤고, 보요에게는 키가 가장 작은 군졸의 회색 덧옷이 돌아왔다.갑옷은 불을 쬐어 미지근했고 안감에는 낯선 사내의 땀 냄새가 배었다. 강무는 탄 손을 소매 안에 감추고 허강은 내려앉은 어깨 쪽 끈을 느슨하게 풀었다. 둘 다 걸음만 멀쩡히 보이면 문 하나쯤은 지날 수 있었다.진묵은 보요 몫의 덧옷을 두 번 털었다. 주머니와 안감, 옷깃의 바늘땀까지 손으로 훑고 나서야 그녀 어깨에 대어 보았다.진묵이 직접 옷을 들었다."눈 돌려."소월백의 미간이 좁아졌다."겉옷 하나 걸치는 데까지 그래야 합니까.""그 하나도 내 부인 것이다.""왕야도 돌아서세요."보요의 말에 진묵은 즉시 등을 돌렸다. 소월백은 그 등을 보다가 입가를 눌렀다. 보요는 먹빛 겉옷 위에 회색 덧옷을 겹쳐 입고 머리의 보요 장식을 빼 소매에 넣었다. 둥글어진 배는 넉넉한 옷자락 아래로 겨우 가려졌다.머리 장식이 빠지자 검은 머리칼 한 타래가 귀 옆으로 흘렀다. 진묵은 돌아선 채로도 사락이는 소리를 들은 듯 손가락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Read more

230화. 다 들립니다

돌문 너머로 창끝이 지나갔다.진묵은 한 손으로 보요의 입을 가리고 다른 팔로 허리를 감았다. 좁은 불방에는 식은 재와 오래된 약쑥 냄새가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의 몸이 붙을 때마다 벽의 검댕이 옷자락에 묻었다.보요의 등은 차가운 돌에, 앞은 젖은 사내의 몸에 막혔다. 회색 덧옷 아래 치맛자락이 그의 무릎 사이에 끼어 움직이지 않았다. 진묵은 배에 힘이 닿지 않도록 허리를 비틀고 있었으나 그 탓에 입술과 눈 사이의 거리는 더 가까워졌다.바깥 횃불이 돌 틈을 지날 때마다 그의 눈동자에 붉은 빛이 가늘게 들었다가 사라졌다. 불에 탄 머리칼 끝 하나가 보요의 뺨을 간질였다.보요가 그의 손등을 두 번 두드렸다.손은 물러나지 않고 손가락만 느슨해졌다."왕야, 숨 좀 쉬게 해 주세요."젖은 목소리가 손바닥 안에서 낮게 번졌다. 진묵의 엄지가 입술 아래를 천천히 훑었다."숨 낮춰.""왕야의 심장 소리입니다."그는 대꾸 대신 그녀의 손을 제 가슴 위에 올렸다. 불길 속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던 박동이 이번에는 손바닥 아래에서 빠르게 쳤다.사내의 숨이 귓바퀴 안쪽에 부딪혔다. 보요가 얼굴을 피하면 입술이 관자놀이를 스쳤고, 가만히 있으면 손바닥 아래 심장이 더 세게 울렸다. 밖의 발소리보다 안쪽의 소리가 더 커 어느 쪽에 들킬지 알 수 없었다.문밖의 순찰이 멀어졌다. 돌문이 열리자 소월백이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보요의 붉어진 입술과 진묵의 손을 차례로 보고는 말없이 등을 돌렸다."들었나.""돌벽 하나입니다.""그럼 됐다."보요가 진묵의 옆구리 무명을 세게 당겼다. 그가 짧게 숨을 삼켰다."아픕니까.""네 손이면 괜찮다.""그런 말 하지 마세요.""그자에게 한 말은 아니다."소월백이 마른 탕 너머에서 답했다."다 들립니다.""귀를 막아 줄 생각은 없었다."보요가 입술 안쪽을 깨물어 웃음을 누르자 진묵의 눈매가 느긋하게 휘었다. 소월백을 향한 시선만은 여전히 서늘했다.강무가 타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허강은 죽다 살아난 사람답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Read more
PREV
1
...
2122232425
...
33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