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Chapter 181 - Chapter 190

328 Chapters

181화. 피의 끝

핏방울은 버드나무 세 그루를 지나 마른 도랑으로 내려갔다.온보요의 가마가 앞장섰다. 진묵은 그 곁을 걸으며 몇 번이나 발을 내리지 말라 했다. 피는 땅에만 있지 않았다. 나무껍질 어깨 높이에도 손바닥 자국이 남았다. 일영은 걸었고, 몸을 숨기면서도 뒤따를 사람이 알아보게 흔적을 남겼다."저쪽입니다."보요가 마른 갈대가 한 방향으로 눕힌 곳을 가리켰다. 진묵은 대답도 없이 도랑 아래로 뛰어내렸다.무너진 수문 밑에서 쇠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챙.일영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왼쪽 어깨에는 부러진 화살이 박혔고, 오른손의 칼은 수문 안쪽을 향했다. 그 앞에는 검은 융복의 사내 하나가 배를 움켜쥔 채 쓰러져 있었다. 죽지는 않았다. 일영은 제 피를 흘리면서도 마지막 추격자를 산 채로 막고 있었다."왕야."그가 진묵을 알아보고서야 칼끝을 내렸다."말은 돌아갔습니까.""네놈보다 먼저 왔어.""명을 잘 듣는 놈입니다."일영이 웃다가 기침했다. 입술 사이로 피가 번졌다. 진묵은 그의 멱살을 잡듯 받쳐 눕히고 의원을 불렀다. 거친 손이 상처 둘레를 누르는 힘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편지는.""온 대인께 닿았습니다. 옥졸에게 은전 셋을 먹이고 창살 사이로 벼루를 보였습니다. 대인께서 오른손을 못 쓰셔서 왼손으로 쓰셨습니다."보요의 손이 가마 발 위에서 굳었다."오른손을 왜 못 쓰셨습니까."일영은 곧장 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이 말보다 먼저 닿았다."손가락 두 개가 부어 있었습니다. 뼈가 성한지는 못 보았습니다. 그래도 정신은 맑으셨습니다. 왕비마마가 길을 바꾸지 않을 줄 아신다고 했습니다."의원이 화살대를 잘랐다. 일영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으나 비명은 없었다. 대신 낮은 신음 하나가 이 사이로 샜다."읏."진묵의 턱이 굳었다."누가 쐈어.""형부를 나선 뒤부터 넷이 붙었습니다. 편지가 아니라 벼루 조각을 내놓으라 했습니다. 둘은 따돌리고, 하나는 강에 빠졌고, 저놈은 여기까지 왔습니다."쓰러진 사내의 허리에는 금오위 패가 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9
Read more

182화. 왼손

일영의 어깨에서 화살촉이 나온 것은 해가 기운 뒤였다.의원은 버드나무 아래에 천막을 치고 칼을 불에 달궜다. 진묵은 일영의 멀쩡한 어깨를 눌렀고, 노강은 다리를 잡았다. 온보요는 가마 안에서 약재 이름을 불러 주었다. 피 냄새가 바람을 타고 들 때마다 속이 뒤집혔으나 토하지 않았다.쇠가 살을 빠져나오는 순간 일영의 발뒤꿈치가 땅을 팠다.달각.의원이 쟁반에 떨어진 화살촉을 닦았다. 금오위에서 쓰는 세모촉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데는 흔한 물건이었으나, 홈 안에 푸른 가루가 끼어 있었다."독은 아닙니다."일영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문서에 묻히는 푸른 안료입니다. 저들이 형부 안에서 곧장 나온 자들이라는 표겠지요."진묵이 포박한 군졸을 끌어왔다. 사내는 배의 칼상을 꿰맨 뒤였고, 눈에는 죽을 각오보다 버려진 자의 공포가 짙었다."이름.""금오위 말단 교위 유삼입니다.""명을 준 놈.""옥문 밖 푸른 가마의 내관이었습니다. 얼굴은 못 봤습니다. 벼루를 가져오면 가족의 군적을 지워 준다 했습니다."유삼의 두 동생은 북강 보충병으로 뽑혀 있었다. 금오위 교위에게 벼루 조각은 충성도 음모도 아니었다. 동생 둘을 전장에 보내지 않을 값이었다.진묵이 차갑게 물었다."그래서 내 사람을 죽여?""죽이라는 명은 아니었습니다. 되찾으라 했습니다. 저자가 칼을 뽑아서—""쫓아오는 넷을 보고 절부터 했어야 하나."일영이 눈도 뜨지 않고 중얼거렸다.보요는 유삼 앞에 종이와 붓을 놓게 했다. 본 내관의 옷, 명을 받은 때, 함께 간 사람의 이름을 적으라 했다. 유삼은 붓을 들지 못했다. 글을 몰랐다."제가 묻고 다른 사람이 받아 적겠습니다. 틀리면 그 자리에서 고치세요.""살려 주시는 겁니까.""살아야 형부 앞에서 같은 말을 하겠지요.""제 동생들은요."보요는 답을 주지 못했다. 월백이 쇠사슬을 끌고 가까이 왔다."이름을 대시오. 북강으로 간 명부에 있다면 내가 갚아야 할 빚에 올리겠습니다."유삼이 고개를 들었다. 황자로 인정받지 못한 죄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9
Read more

183화. 하루

호송대는 그날 한 걸음도 가지 못했다.일영은 밤새 열이 올랐다. 화살이 스친 뼈에 염증이 붙으면 팔을 잘라야 할 수도 있다고 의원이 말했다. 금오위 교위 유삼도 칼상이 터져 자꾸 피를 쏟았다. 쫓고 쫓긴 두 사람이 천막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같은 약탕을 마셨다.남은 약재는 한 사람 몫뿐이었다.노강이 저울추를 놓고 말했다."일영에게 전부 쓰겠습니다."진묵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삼이 벽 쪽으로 몸을 돌렸다. 살려 두겠다는 말이 약까지 나눠 준다는 뜻은 아니었다.온보요가 약첩을 절반으로 갈랐다."둘에게 씁니다.""마마, 그러면 약효가 모자랍니다.""한쪽을 죽게 두면 다른 한쪽 진술도 원한 때문에 꾸민 말이 됩니다. 둘 다 경성까지 살아가야 해요."진묵의 눈썹이 험해졌다."내 사람 약을 저놈한테 줘?""왕야께서 살려 두셨잖아요.""네가 시켜서.""그럼 끝까지 제 말을 들으세요."그는 유삼을 노려보다 약탕기 두 개를 불 위에 올렸다. 입으로는 욕을 삼켰지만 물의 양은 정확히 같았다.소월백은 마른 도랑 너머 마을로 들어갔다. 약을 더 구해 오겠다며 나섰으나 한 시진 뒤 빈손으로 돌아왔다. 관아가 호송대에 약을 판 의원도 역모로 다스린다는 방문을 먼저 붙여 두었다. 대신 마을의 늙은 여인이 담 너머로 버드나무 껍질과 깨끗한 무명천을 던져 주었다."값을 치르겠습니다."소월백이 말하자 담 안에서 대답이 왔다."돈 받으면 판 것이 됩니다. 주운 것으로 하십시오."그는 절하지도 이름을 묻지도 못한 채 물건만 주웠다. 돕는 사람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갚는 일이었다.해가 지자 온보요는 가마 안에서 아버지의 문초를 세 번 베꼈다. 원문은 아직 없었다. 일영이 들은 한 문장과 첫 죄목, 문초가 열린 때뿐이었다. 모르는 자리는 비워 두었다.소월백이 빈 줄을 보며 물었다."온 대인의 말씀대로라면 왕비마마는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아버님 혼자 죽으시면 빠져나간 것이 아닙니다.""그 거짓말을 뒤집으실 겁니까.""아버님이 숨기신 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9
Read more

184화. 닫힌 거리

서령현의 성문은 사람을 막지 않았다.대신 사람을 감췄다.장터의 좌판은 펼쳐진 채였고 생선전 얼음은 녹아 물이 흘렀다. 국밥집 화덕에는 불씨가 남았으나 솥은 비었다. 누군가 명을 받고 급히 사라진 거리였다. 호송대 수레바퀴 소리만 처마마다 부딪혀 돌아왔다.진묵은 온보요의 가마 휘장을 내렸다."얼굴 내밀지 마. 매복이면 지붕부터 온다.""화살이 없어요.""뭘 보고 알아.""개가 짖지 않습니다. 사람과 함께 집 안에 묶여 있는 겁니다. 죽이려 비운 거리가 아니라, 보지 못하게 만든 거리예요."그 말이 끝나자 오른편 약방 문틈에서 아이의 울음이 새었다. 곧 어른 손에 막혀 뚝 끊겼다.소월백이 빈 장터 가운데 멈췄다."운수 상단과 거래한 자를 전부 잡으라는 명이 왔겠군요."노강이 관아 벽의 방문을 떼어 왔다. 사흘 전 서령현에 도착한 감찰어사 명의였다. 황자 사칭범의 행렬을 구경하거나 말을 섞거나 종이 한 장을 받는 자는 공모자로 문초한다. 이미 잡아들인 자 예순넷의 이름이 아래 적혀 있었다.온보요는 명부를 읽었다. 객주 셋, 마부 열한, 종이 장수 둘, 글방 아이 다섯. 여덟 살 여자아이 이름도 있었다. 회주 분점에서 얻은 떡을 먹었다는 죄였다."예순넷은 어디 있습니까."대답 대신 관아 뒤편에서 북이 울렸다. 한 번, 쉬고 두 번. 옥에서 밥을 들인다는 기별이었다.일행이 관아로 향하자 집집마다 빗장 거는 소리가 이어졌다. 살고 싶어 닫은 문인데, 소리는 마치 죄를 고백하는 것처럼 떨렸다.관아 대문에는 붉은 봉인이 세 겹 붙었다. 현령은 병을 핑계로 직무를 그만두었고 관인은 감찰어사가 거두었다는 글이 걸렸다. 뜰에는 푸른 휘장을 친 공청이 급히 세워져 있었다.감찰어사 장문도가 차를 마시며 그들을 맞았다."죄수는 역원에 들이고 삭왕비는 별채에 머무르십시오. 삭왕 전하는 경성 교지를 기다리시면 됩니다."진묵이 웃었다."내 부인한테 네놈 별채가 왜 필요하지.""왕야께서는 병부를 반납하셨습니다. 이곳에서는 관법을 따르셔야 합니다.""병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9
Read more

185화. 빈 장터

빈 장터의 첫 증인은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종이 장수 강씨의 아내입니다."닫힌 포목전 안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온보요는 좌판 위에 종이를 펴고 그대로 받아 적었다."남편은 언제 잡혀갔습니까.""그제 오시였습니다. 운수 상단에 종이를 판 적이 있느냐 묻더니, 있다 하자 데려갔습니다. 열 해 동안 종이를 팔았습니다. 어느 종이에 역모가 적힐지 장사꾼이 어찌 압니까.""관아에서 끌고 간다는 문서를 받았습니까.""못 받았습니다."첫 줄 아래에 `구금 문서 없음`이 적혔다.다음 목소리는 지붕 너머에서 왔다. 떡장수의 오라비였다. 그다음은 우물 안쪽 담장 뒤, 그다음은 닫힌 술집 이층. 사람들은 모습을 보이면 잡혀갈까 숨어서 가족 이름을 불렀다.예순넷 가운데 스물일곱이 붙잡힌 때가 맞춰졌다. 관아가 명부를 붙이기 전날 밤에 이미 잡힌 이도 있었다. 감찰어사는 교지가 오기 전에 사람부터 가두고, 뒤늦게 죄를 붙였다.장문도가 군졸을 이끌고 장터로 나왔다."불법 집회를 당장 거두시오."진묵이 좌판 앞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았다. 칼도 갑옷도 없었으나 군졸들은 세 걸음 밖에서 멈췄다."거둬 봐.""왕야께서 관무를 방해하시면 삭왕부까지—""내 부인이 글 쓰는데 시끄럽잖아. 입 다물어."장문도가 얼굴을 붉혔다. 보요가 진묵의 소매를 한 번 당겼다."왕야, 의자를 옆으로 조금만 옮겨 주세요. 등불을 가리십니다."그는 군말 없이 의자를 들고 옆으로 갔다. 군졸들 사이에서 작게 숨 삼키는 소리가 났다. 황명도 비웃던 사내가 아내의 한마디에는 얌전히 등불을 비켰다.소월백은 쇠사슬을 찬 채 장터 바닥에 섰다. 그는 예순넷의 명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아이 이름 다섯에 닿았을 때 목소리가 한 번 갈라졌다."이 사람들은 나를 황자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충성을 맹세하지도 않았습니다. 종이를 팔고 떡을 주고 길을 본 죄뿐입니다."닫힌 문 뒤가 조용해졌다."내가 황자가 아니라면 이들은 죄가 없습니다. 내가 황자라면 더더욱 내 백성에게 죄가 없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9
Read more

186화. 부러진 붓

옥문이 열린 것은 사람을 풀어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감찰어사 장문도는 죄수 하나를 끌어내 장터 한가운데 꿇렸다. 서령현 형방의 늙은 서리였다. 수염에는 피가 엉겨 붙었고 오른손은 천으로 둘둘 감겨 있었다.장터 문턱에 있던 젊은 여인이 입을 틀어막았다. 서리의 며느리였다. 시아버지가 잡혀간 뒤 갓난아이와 단둘이 남았으나, 옥 안에 있는 줄도 모르고 사흘을 관아 주변에서 찾았다고 했다. 장문도는 현령뿐 아니라 장부를 쓸 사람까지 이름 없이 감춘 것이다."이자가 구금 장부를 맡은 자요. 왕비가 장부가 없다 하니 직접 물어보시오."온보요가 서리 앞에 몸을 낮추려 하자 진묵의 손이 팔꿈치를 받쳤다. 그녀가 무릎까지 굽히지 않게 제 무릎을 먼저 땅에 대었다. 서리의 손을 살핀 진묵의 눈빛이 달라졌다."천 풀어."군졸이 머뭇거리자 그가 손목을 낚아챘다. 천 아래 검지와 중지가 검붉게 부어 있었다. 마디마다 짧은 나뭇조각을 대고 끈으로 묶었으나, 손가락 두 개는 이미 엉뚱한 방향으로 굽었다.장문도가 태연히 말했다."옥 안에서 난동을 부려 다쳤소."서리가 고개를 저었다."장부를 쓰지 않아 매를 맞으셨습니까."보요가 묻자 노인이 갈라진 입술을 열었다."쓰라 하셨습니다.""무엇을요.""예순넷이 한날한시에 황자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장터 문턱마다 앉은 사람들이 숨을 삼켰다. 장문도가 군졸에게 눈짓했다. 군졸이 서리의 등을 걷어차려는 순간, 진묵의 손이 발목을 잡았다.우두둑.뼈가 아니라 군화 가죽이 비틀리는 소리였다. 군졸은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진묵은 여전히 한쪽 무릎을 땅에 댄 채였다."내 부인 앞에서 사람 차지 마. 흙 튄다."온보요가 낮게 불렀다."왕야, 놓아주세요."그는 곧 손을 폈다. 군졸은 기어서 물러났다.보요는 서리 앞에 붓을 놓았다. 노인의 멀쩡한 세 손가락도 몽둥이에 맞아 붓대를 쥘 힘이 없었다. 그는 한참 붓을 보다가 입으로 물었다.먹 묻은 붓끝이 종이 위에서 떨렸다. 한 획을 긋는 동안 핏물이 턱에서 떨어졌다.없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0
Read more

187화. 예순넷

밧줄 가게 주인이 문을 닫자 대장간도 문을 열었다.대장장이가 쇠망치와 함께 옥 자물쇠를 부술 끌을 내놓았다. 진묵이 그것을 집으려 하자 온보요가 먼저 손을 얹었다."부수면 안 됩니다.""안에 네 번째 관인이 있어.""우리가 부수는 순간 예순넷은 탈옥수가 됩니다."진묵은 끌을 내려놓았다. 대장장이는 실망한 낯이었으나 보요는 그에게 다른 것을 청했다."서령현 법전이 있는 글방을 열어 주세요."현마다 죄수를 옥에 들일 때 지켜야 할 조목이 달랐다. 서령현은 장날 싸움이 잦아, 구금한 날 저녁까지 죄목과 고발자 이름을 옥문 밖 나무패에 걸도록 했다. 패가 없으면 다음 날 해 뜰 때 옥졸이 풀어도 죄를 묻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었다. 돈 많은 객주가 원수진 이를 몰래 가두는 일을 막으려 만든 옛 법이었다.오늘은 이미 그다음 날이었다.보요는 법전 해당 장을 세 벌 베꼈다. 한 벌은 옥문에, 한 벌은 장터에, 한 벌은 장문도 앞에 놓았다."우리가 열지 않습니다. 서령현 옥졸이 서령현 법대로 열면 됩니다."장문도가 법전을 걷어찼다."감찰어사의 명이 현법보다 위다.""그 명을 적어 관인을 찍으세요.""관인은 내가 거두었다.""현령께서 몸에 지녔다고 들었습니다."장문도의 입이 닫혔다. 관인을 빼앗았다고 쓰면 현령의 몸에서 나오는 순간 도둑이 되고, 빼앗지 않았다고 하면 제 명을 공문으로 만들 수 없었다.동쪽 하늘이 밝기 시작했다.옥 안에서 예순넷이 제 이름을 차례로 외쳤다. 밖의 가족들이 같은 이름을 받아 불렀다. 안과 밖의 수가 맞을 때마다 온보요가 종이에 점을 찍었다.예순셋.마지막 이름은 여덟 살 난 떡장수의 딸이었다. 아이는 울다 목이 쉬어 대답하지 못했다. 어미가 옥문에 귀를 대고 이름을 세 번 불렀다.안에서 아주 작은 손이 철문을 두드렸다.톡. 톡.예순넷.해가 성벽 위로 올라왔다.늙은 옥졸이 허리에서 열쇠를 풀었다. 장문도의 호위가 창을 겨누자 옥졸은 가족들이 모인 장터를 한 번 보고 말했다."소인은 사십 년 동안 이 옥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0
Read more

188화. 아버지의 문초

서령현령이 관인을 찍기 전, 경성에서 온 파발이 장터로 들어섰다.이번 말에는 푸른 봉투가 세 개 매달려 있었다. 하나는 서령현 관아, 하나는 삭왕, 하나는 선황의 둘째 아들이라 자칭하는 죄수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온보요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현령이 첫 봉투를 열었다. 형부가 전국 관아에 돌린 온 대인의 첫 문초 초본이었다. 사위와 딸, 소월백을 갈라놓으려는 질문만 뽑아 크게 베낀 글이었다.온보요는 장터 등불 아래에서 소리 내 읽었다."온 대인은 선황의 둘째 아들이 살아 있음을 언제 알았는가."답은 짧았다.삭왕이 먼저 물은 뒤에야 알았다.보요의 시선이 종이에서 멎었다. 소월백도 진묵을 보았다.두 번째 질문이 이어졌다."삭왕은 언제 물었는가."왕비와 혼인하기 전, 북강에서 사람을 보내 둘째 황자의 시신을 누가 보았는지 물었다.장터가 술렁였다. 진묵은 보요와 혼인하기 전부터 소월백이 살아 있을 수 있음을 따로 캐고 있었다. 온보요조차 모른 일이었다.세 번째 질문."삭왕이 가짜 황자를 세우려 했는가."모른다. 그는 시신이 없다는 사실만 찾았다. 소월백이라는 이름을 내게 처음 댄 사람은 내 딸이다.아버지는 진묵이 조사한 사실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두 사람이 공모했다는 고리는 끊었다.그 답에는 아버지가 지킨 선이 분명했다. 진묵은 시신이 없음을 물었을 뿐 황자를 세우라 하지 않았고, 온보요는 뒤늦게 월백을 알아보았을 뿐 혼인을 미끼로 삼지 않았다. 형부가 셋의 시간을 한날로 꿰려 하자 아버지는 오른손을 잃으면서도 순서를 바로 놓았다.보요는 진묵을 보았다. 그가 먼저 찾은 것이 사실이라면 월백과 마주친 뒤 놀라지 않았던 까닭, 선황 어새를 제 병부 주머니에 넣어 지켜 온 까닭도 달리 읽혔다. 우연히 휘말린 사내의 침착함이 아니었다.진묵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 해명하지 않겠다는 듯 턱을 아주 조금 들었다. 보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네 번째 질문에는 핏자국이 번졌다는 주가 붙었다."온보요는 황자 사칭을 알고 삭왕부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0
Read more

189화. 먼저 본 사람

"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온보요는 서령현 객사 문이 닫히자마자 물었다.진묵은 낮에 군졸의 발목을 잡다 찢어진 손바닥을 물에 씻고 있었다. 대야의 물이 옅게 붉었다. 그는 대답 대신 마른 무명을 내밀었다."닦아 줘.""왕야.""손 아파."소월백이 같은 방 탁자에 앉아 있었다. 진묵은 그것을 알면서도 멀쩡한 왼손까지 내밀었다. 보요가 기가 막혀 바라보자 눈썹을 한 번 들었다. 부군 수발을 들라는, 아주 뻔뻔한 낯이었다.보요는 결국 그의 손을 잡아 물기를 닦았다. 상처에 약을 바르고 무명천을 감는 동안 진묵은 소월백 쪽을 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붕대를 묶은 보요의 손가락은 놓지 않았다."부군이신 것은 충분히 알겠습니다."소월백이 마른 목소리로 말했다."알면 나가.""제 혈통을 왜 먼저 조사하셨는지 듣고 나가겠습니다."진묵의 입매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보요가 왕부에 오기 전부터 누군가 온가 주변에 옛 동궁 사람을 심었어. 혼인을 깨려는 게 아니라 성사시키려는 손이었지. 내게 여자를 보내는 놈은 많았어도, 혼처를 지켜 주는 놈은 처음이었다."그는 북강에서 온 대인에게 사람을 보내 물었다. 선황의 둘째 아들은 정말 죽었는가. 시신을 본 자는 누구인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질문을 보낸 사람 둘이 경성에서 사라졌다."월백을 찾으신 겁니까.""아니. 널 노리는 손을 찾았어. 그 끝에 황자가 있었고.""진짜 황자였으면요.""먼저 잡았겠지."소월백이 물었다."죽이려고요?""보요한테 위험하면."망설임 없는 답이었다. 소월백은 헛웃음을 흘렸다."가짜여도 죽고 진짜여도 죽을 수 있었군요.""지금은 안 죽이잖아. 고마워해."온보요가 붕대를 조금 세게 당겼다. 진묵의 손가락이 움찔했다."아픕니까.""아니.""거짓말하실 때 더 퉁명스러우십니다."그는 변명하지 않았다. 보요가 매듭을 지은 뒤에야 손을 풀어 주었다."말했으면 넌 황자를 찾기도 전에 네가 미끼라고 생각했을 거야. 온가로 돌아가 혼인을 깨고 혼자 파고들었겠지."정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0
Read more

190화. 네 번째 인장

서령현 관인은 예순넷의 손도장 가운데 찍혔다.현령은 장터 좌판 위에 밤새 작성한 구금 기록을 펼쳤다. 잡힌 때, 먹지 못한 끼니, 맞은 자리, 풀려난 때. 형방 서리는 붓을 쥐지 못해 곁에서 한 줄씩 읽어 주었다."이 문서에 관인을 찍으면 벼슬을 잃으실 겁니다."온보요가 말했다.현령은 부은 눈으로 웃었다."이미 옥 안에서 잃었습니다. 아직 품에 남은 도장까지 빼앗기기 전에 쓸 곳이 생겨 다행입니다."그는 먼저 소월백의 책임 문서에 관인을 찍었다. 이어 온보요와 진묵이 함께 수결한 글, 장문도가 구금 장부 없이 예순넷을 가둔 기록에도 붉은 네모를 남겼다.마지막은 선황의 친필과 어새를 서령현이 보았다고 수결한 글이었다.현령이 인장을 내려놓자 예순넷이 차례로 엄지를 인주에 묻혔다. 글을 모르는 자도 자기가 갇혔고 살아 나왔다는 사실은 제 손으로 남겼다. 여덟 살 아이의 손도장이 가장 작았다.소월백은 인주 묻은 아이 손을 천으로 닦아 주었다."아저씨는 이제 왕이에요?""아직은 아니란다.""그럼 언제 돼요?""네가 다시는 이유 없이 옥에 갇히지 않게 할 수 있을 때."아이는 어려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어미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장터의 어른들은 들었다.정오가 되자 파직패가 도착했다. 예상보다 빨랐다. 장문도가 성밖 역참에서 제 패를 먼저 날린 것이었다. 관복을 벗기고 관인을 회수하라는 형부 명이 적혀 있었다.예순넷의 가족들이 현령 앞에 무릎을 꿇으려 하자 그가 손사래를 쳤다."내가 더 일찍 열었어야 했습니다. 절을 받을 일이 아닙니다.""마마 일행이 오지 않았으면 현령도 안에서 죽었을 겁니다."형방 서리가 입 대신 며느리의 손을 빌려 말했다. 현령은 대답하지 못하고 관모 끈만 오래 만졌다. 벼슬을 잃는 순간에도 자기가 살린 사람보다 늦게 살린 사람을 세고 있었다.현령은 기다렸다는 듯 관모를 내려놓았다. 관복 띠도 풀었다. 다만 관인은 내놓지 않고 온보요에게 건넸다."회수하러 온 관리가 직접 받아 가게 하십시오. 그전까지는 이 문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0
Read more
PREV
1
...
1718192021
...
33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