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3년의 계약, 당신을 모른채 사랑에 빠지다.: Chapter 131 - Chapter 140

235 Chapters

131화. 계산된 눈빛과 서늘한 밑바닥

전직 장관의 딸. 그 정도 집안이라면 단순한 선 자리가 아니었다. 태산그룹과도 충분히 어울리는 혼처였다. 이창수 회장이 직접 나섰다는 것도 이제 이해가 됐다. 유하는 천천히 진성의 품에서 떨어졌다. “미술 한다고 했던가….” 진성이 무심하게 말했다. “미대를 나왔고 지금은 미술 학원을 한대.” “그래요?” “응.” “그게 다야.” 진성은 다시 한번 강조했다. “나 그 여자한테 아무 관심 없어.” 유하는 환하게 웃었다. “알았다니까요.” 그리고 진성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오늘 피곤했겠다.” “이제 그 이야기 그만해요.” 진성도 그제야 마음을 놓은 듯 웃었다. 하지만 유하의 머릿속은 이미 복잡해지고 있었다. 이창수 회장이 진성을 결혼시키려고 마음먹었다. 상대는 평범한 여자가 아니라 전직 장관의 딸이었다. 진성은 아버지에게 맞설 힘을 조금씩 잃고 있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지 않을 수도 있겠네.’ 유하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진성이 자신과 헤어질 마음이 없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보다 상황이 더 강할 때가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결국 진성이 황시아와 결혼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붙잡을 수 있다면 붙잡아야 했다. 하지만 붙잡을 수 없다면. 그 전에 자신의 몫을 확실하게 만들어야 했다. 진성이 돌아간 뒤 유하는 늦은 아침을 먹으며 태블릿을 켰다. 유하는 자신이 이 남자에게서 앞으로 얼마나 더 가져올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진성은 선 자리에서 돌아와 사랑하는 여자를 안심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불안해진 사람은 유하였다. 그리고 그 불안은 곧 그녀의 욕심을 더욱 빠르게 움직이게 만들고 있었다. 검색창에 이름 하나를 입력했다. 황시아. 그리고 그 아래에 다시 몇 글자를 덧붙였다. 황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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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화. 오래전부터 기억한 남자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황시아는 창가에 머리를 살짝 기대고 지나가는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 황태석은 앞좌석에서 이창수 회장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는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시아 역시 조용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 헤어진 한 남자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이진성. 오늘 처음 만난 남자는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오늘이 두 번째였다. 물론 진성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시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기억은 자연스럽게 2년 전으로 흘러갔다. 2년 전. 태산그룹 창립 기념행사. 황시아는 아버지 황태석을 따라 행사장을 찾았었다. 정·재계 인사들과 태산그룹 관계자들까지 참석한 큰 행사였다. 시아는 그런 자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웃으며 악수했지만 그 웃음 뒤에서는 서로의 직함과 배경을 먼저 살폈다. 아버지 곁에서 몇 사람에게 인사를 한 뒤, 시아는 사람들이 적은 곳으로 자리를 피했다. 그때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한 가족이 눈에 들어왔다. 태산그룹 이창수 회장 가족이었다. 이창수 회장. 아내 고미혜. 그리고 장남 이진성. 시아도 그들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무렵 태산가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아버지를 통해 얼핏 들은 적도 있었다. 이창수 회장의 딸이 갑작스럽게 결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으로 떠났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자세한 사정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날 행사장의 이창수와 고미혜는 완벽한 재벌가 부부처럼 보였다.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고, 사진을 찍을 때마다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우연히 사람들이 없는 복도에서 마주친 고미혜의 얼굴은 달랐다. 시아는 걸음을 멈췄다. 고미혜는 창가에 혼자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 사람들 앞에서 웃던 얼굴은 사라져 있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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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화. 다시 만난 사람

“이진성 한번 만나볼래?” 아버지의 뜻밖의 질문에 시아는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심장이 자신도 모르게 조금 빠르게 뛰었다. 하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갑자기요?” “갑자기는 아니고.” 황태석은 딸의 표정을 살피며 웃었다. “전에 네가 진성이에 대해 물어봤던 게 생각나서.” “그게 언제인데요.” “아버지는 그런 거 안 잊는다.” 시아가 민망한 듯 시선을 피했다. 황태석은 웃음을 거두고 조금 진지하게 말했다. “이창수 회장이 진성이 혼처를 알아보는 모양이야.” 시아의 표정이 달라졌다. “혼처요?” “그래.” “그러니까…… 선을 보라는 거예요?”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고 한번 만나봐.” 황태석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싫으면 안 만나도 되고.” 시아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2년 전 스쳐 지나가듯 보았던 남자. 그런데 이상하게 가끔 생각났던 남자. 시아는 잠시 고민하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만나볼게요.” 그렇게 오늘의 만남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오늘. 한정식집으로 들어오는 진성을 보는 순간 시아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억지로 나왔구나. 2년 전보다 조금 더 날카로워진 얼굴. 단정한 정장과 흐트러짐 없는 모습은 여전했지만 눈빛에는 피곤함이 짙게 묻어 있었다. 시아는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자신은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성에게 자신은 부모가 만나보라고 해서 나온 낯선 여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기분 나빠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가 자신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서 둘만 남게 되었을 때 진성이 말했다. “미안합니다.” 시아는 그를 바라보았다. “뭐가요?” “오늘 자리 말입니다.” 진성은 솔직했다. “저는 제 뜻으로 나온 게 아닙니다.” 시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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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화. 기다려 주는 남자

월요일 오전. 뉴럴링크 대표실. 재혁은 결재를 마친 서류를 덮었지만 한동안 다음 서류로 손을 옮기지 못했다. 며칠 전 친구들과 함께했던 술자리에서 주연이 했던 말들이 계속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친구들은 오랜만에 만난 재혁을 놀리느라 주연에게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졌었다. 처음에는 당황하던 주연도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그들의 장난을 받아주었다. 마치 정말 자신의 아내인 것처럼. 아니. 그녀는 정말 자신의 아내였다. 재혁은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특히 마지막 질문에 주연이 했던 대답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이 좋다고 했다. 차갑고 무뚝뚝해 보여도 마음은 따뜻한 사람이라고.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라 좋다고. 그 순간에는 친구들 앞이라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 말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그게 당신의 진심이었다면…….’ 재혁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렇다면 이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기다려 주는 것. 자신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행복나무 보육원에서 만난 이주연이 자신의 법적인 아내라는 것도. 그녀가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남아 있다는 것도. 그리고 자신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는 자신이 남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도.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왜 말하지 않았을까. 왜 자신이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바로잡지 않았을까. 하지만 생각할수록 주연의 마음도 조금씩 이해되었다. 자신은 결혼식 이후 아내에게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 남편 앞에 나타나 ‘제가 당신의 아내예요.’ 그 한마디를 하는 것이 그녀에게 얼마나 어려웠을까. 재혁은 이제 그녀를 몰아붙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무작정 기다리기만 할 수도 없었다. 주연이 자신의 입으로 진실을 이야기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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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이번에는 말해야 해

재혁은 휴대전화를 손에 든 채 한참 고민하고 있었다. 이창수의 전화를 받고 나니 생각이 조금 더 분명해졌다. 주연도 이제 부모님을 계속 피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언젠가는 주연과 함께 이창수 부부 앞에 서야 했다. 이번에는 계약으로 맺어진 사위와 딸이 아니라— 진짜 부부로.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주연의 고백. 그녀가 자신의 입으로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재혁은 메시지 창을 열었다. 이주연.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가 천천히 움직였다. 이번 주말 시간 괜찮습니까? 잠시 고민한 뒤 한 줄을 더 적었다. 주연 씨와 함께 만나고 싶은 분들이 있습니다. 전송 버튼을 누르려던 재혁의 손이 멈췄다. ‘아니.’ 이렇게 말하면 그녀가 겁부터 먹을지도 몰랐다. 재혁은 두 번째 문장을 지웠다. 그리고 조금 다른 문장을 적었다. 이번 주말 저와 하루 같이 보내주시겠습니까? 재혁은 메시지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전송했다. 잠시 후. 휴대전화 화면에 답장이 떠올랐다. 좋아요. 저도 재혁 씨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재혁의 시선이 마지막 문장에 멈췄다. 꼭 하고 싶은 이야기. 그것이 무엇인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재혁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이번에는 묻지 않을 것이다. 재촉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그녀가 자신의 입으로 말할 때까지 기다려 줄 생각이었다. ‘이번 주말 저와 하루 같이 보내주시겠습니까?’ 짧은 문장이었다. 그런데 주연은 그 메시지를 벌써 몇 번째 읽고 있는지 몰랐다.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예전 같으면 재혁이 먼저 만나자는 연락을 해오는 것만으로도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설렘보다 마음을 무겁게 누르는 것이 있었다. 주연은 천천히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목에 걸린 가느다란 목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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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화. 아픈 마음까지는

병원 응급실. 희미한 소독약 냄새와 함께 분주하게 오가는 의료진의 발걸음 소리가 복도를 채우고 있었다. 주연은 응급실 앞 의자에 앉아 두 손을 꼭 맞잡고 있었다. 손끝이 아직도 차가웠다. 조금 전 집에서 자신의 품으로 힘없이 쓰러지던 지혜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아직도 가슴이 두근 거렸다. “지혜야…….” 주연은 닫힌 처치실 문을 바라보았다. 구급차 안에서도 지혜의 몸은 뜨거웠다. 이마에 손을 대는 순간 놀랄 정도였다. 그런데 자신은 그것도 몰랐다. 같은 집에서 생활하면서도 지혜가 이렇게 아플 때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재혁에게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자신의 감정에만 빠져 지내는 동안 가장 가까이에 있는 친구가 힘들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처치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주연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김지혜 씨 보호자분이시죠?” “네. 제가 보호자예요. 지혜는 괜찮은가요?” “일단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말에 주연은 조금이나마 숨을 내쉬었다. “열이 상당히 높습니다. 최근에 제대로 쉬지 못한 상태에서 감기 증상과 몸살이 심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쓰러진 건가요?” “현재로서는 고열과 탈진 가능성을 보고 있습니다. 다만 정확한 상태는 조금 더 확인해야 합니다.” “다른 데도 문제가 있는 건 아니죠?” 걱정스러운 주연의 물음에 의사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 부분을 확인하기 위해 기본적인 검사를 더 진행하겠습니다. 우선 수액을 맞으면서 경과를 보죠.” “입원해야 하나요?” “검사 결과와 열이 떨어지는 정도를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주연은 연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의사가 자리를 떠난 뒤에야 주연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큰일은 아니라는 말을 들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잠시 후. 지혜가 누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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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화. 보고 싶은 사람

늦은 밤. 병실 안에는 희미한 조명만 켜져 있었다. 주연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잠든 지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해열제를 투여받고 수액까지 맞고 있었지만 지혜의 얼굴은 여전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가끔 힘겨운 듯 미간을 찌푸릴 때마다 주연의 마음도 함께 내려앉았다. 그때였다. 진동으로 해놓은 지혜의 휴대전화가 침대 옆 테이블 위에서 길게 울렸다. 우웅― 우웅― 주연은 무심코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순간 멈칫했다. 이민성. 주연의 시선이 잠든 지혜에게 향했다. ‘민성 씨…….’ 전화를 받아야 할까. 지혜가 병원에 있다고 알려줘야 할까.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주연이 망설이는 사이 전화가 끊겼다. 병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그런데 잠시 후. 짧은 진동음이 다시 울렸다. 메시지였다. 화면에 메시지 일부가 떠올랐다. 지혜 씨, 내일 잠시만 시간을 내주세요. 꼭 할 말이 있습니다. 주연은 한동안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돌려 지혜를 바라보았다. 열에 지친 얼굴. 평소처럼 밝게 웃지도, 괜찮은 척 농담하지도 못한 채 힘없이 잠들어 있는 친구. 주연의 마음이 아려왔다. “지혜야…….”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도 아픈 사랑을 하고 있구나.” 어쩌면 자신과 지혜는 전혀 다른 사랑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닮아 있었다. 그때 병실 문이 열렸다. 담당 의사가 들어왔다. 주연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의사는 지혜의 상태를 확인하고 차트를 살펴보았다. “아직 열이 많이 높네요.” “많이 안 좋은 건가요?” “검사상 크게 걱정할 만한 이상은 현재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고열이 계속되고 몸 상태도 많이 떨어져 있어서 오늘 바로 귀가시키는 것보다는 하루 이틀 입원하면서 경과를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주연은 안도의 숨을 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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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화. 완전히 끝났어

오후가 되면서 병실 안으로 따뜻한 햇살이 길게 들어왔다. 아침보다 열은 조금 내려갔지만 지혜의 얼굴은 여전히 핏기가 없었다. 수액은 일정한 속도로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고, 지혜는 침대에 기대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주연은 그런 친구를 굳이 재촉하지 않았다. 아침에 민성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한 뒤부터 지혜의 말수가 부쩍 줄어 있었다. 괜찮냐고 물으면 괜찮다고 했고,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으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주연은 알고 있었다. 지혜가 괜찮지 않다는 것을. 그때였다.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전화가 울렸다. 우웅― 우웅― 지혜의 시선이 천천히 화면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대로 멈췄다. 화면에는 세 글자가 떠 있었다. 이민성. 주연도 그 이름을 보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혜 역시 전화기를 들지 않았다. 그저 화면만 바라보았다. 전화는 한참을 울리다 끊어졌다. 병실에 다시 조용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주연은 지혜의 표정을 살폈다. “…….” 지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이불 위에 올려놓은 손끝이 아주 조금 떨리고 있었다. 주연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모른 척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휴대전화가 울렸다. 우웅― 우웅― 또다시 같은 이름이었다. 이민성. 이번에는 지혜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전화기는 계속 울렸다. 꼭 지혜가 받을때까지 계속 울릴듯이… 결국 지혜가 천천히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한참 화면을 바라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짧은 한마디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주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구가 자신을 의식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고 싶었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지혜가 주연을 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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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거짓말로 끝낸 사랑

통화가 끊겼다. 민성은 한동안 휴대전화를 귀에서 떼지 못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전화기 너머를 바라보듯 멍하니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 들려오던 지혜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과는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 연락하지 말아주세요. 민성은 천천히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통화 종료 화면 위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이름. 김지혜. 그 이름을 바라보는 민성의 눈빛이 흔들렸다. “……다른 남자?” 낮게 흘러나온 목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민성은 지혜가 근무하는 복지센터 앞에 서 있었다. 한쪽 팔에는 아직 보호대를 하고 있었다. 사고 이후 몸은 많이 회복됐지만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는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민성을 괴롭히는 것은 몸의 불편함이 아니었다. 지혜였다. 며칠째 전화를 받지 않았다. 메시지를 보내도 답이 없었다. 처음에는 화가 많이 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만했다.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생각하면 몇 번이고 무시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기다렸다. 사과했고, 다시 연락했고,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어젯밤. 민성은 결국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지혜 씨, 내일 잠시만 시간을 내주세요. 꼭 할 말이 있습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지만 답은 없었다. 민성은 결국 직접 복지센터를 찾아왔다. 얼굴을 보고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자신이 왜 그날 그런 바보 같은 행동을 했는지. 그 이후 얼마나 후회했는지. 그리고 자신도 이제야 깨닫기 시작한 감정을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복지센터 직원에게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김지혜 선생님이요?” “네.” “오늘 연차 내셨어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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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화. 엇갈린 선택

민성은 고개를 뒤로 젖혀 시트에 기대었다. “……결혼까지.”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믿기지 않았다. 자신은 이제야 그 여자에게 품은 감정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가고 있는데 지혜에게는 이미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가 있었단다. 그렇다면 자신은 뭐였을까. 귀찮게 따라다니던 남자? 잠깐 밥이나 먹어줄 수 있는 사람? 아니면 그저 재혁의 친구라 몇 번 어울려준 것뿐이었을까. 생각할수록 가슴 한구석이 답답했다. 하지만 지혜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처음 잘못한 사람은 자신이었다. 그날 그녀를 모텔 앞까지 데려간 순간 자신은 지혜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품고 있었을 좋은 감정을 스스로 망가뜨렸다. “멍청한 자식…….” 민성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다른 사람에게 빼앗겼다는 생각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어쩌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었을지 모른다는 후회였다. 그때였다. 우웅― 우웅― 조수석에 던져놓았던 휴대전화가 울렸다. 민성의 심장이 순간 뛰었다. 혹시— 고개를 돌려 화면을 확인했다. 하지만 지혜가 아니었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다. 민성의 얼굴에 실망이 스쳤다. 받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대로 두려다가 계속 울리는 전화에 결국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잠시 후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이민성 씨 맞으세요?” “네. 그런데요?” “안녕하세요. 갑자기 연락드려서 죄송해요.” 여자는 조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 박지민이라고 합니다.” 민성의 눈빛이 굳었다. 박지민. 어디선가 들었던 이름이었다. 그리고 곧 기억났다. 어젯밤 아버지가 말했던 여자. 중학교 교장을 지낸 박승찬의 딸. 자신에게 한번 만나보라고 했던 바로 그 여자였다. 민성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아…….” 짧은 대답이 나왔다. 지민도 그의 반응에서 자신을 반기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듯 잠시 말이 없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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