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모든 군사를 통제할 수 있는 호부(虎符)와 병권 이양 각서.그 절대적인 권력의 상징들이 집무실 취선당의 서안 한구석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왕의 손발을 자르고, 훈구파의 숨통을 끊어내며, 지방의 거대한 자금줄마저 완벽하게 말려 죽였다.이제 이 조선 땅에서 섭정 이헌의 허락 없이는 군사 한 명 움직일 수 없었고, 엽전 한 닢조차 마음대로 굴러갈 수 없었다.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서늘한 서류 몇 장으로, 그는 명실상부 조선의 모든 권력과 무력을 거머쥔 유일무이한 군주로 올라선 것이다.“…….”하지만 이헌의 시선은 그 대단한 호부 따위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그는 서안의 한가운데, 가장 정갈하게 깔린 눈꽃처럼 하얀 설화지(雪花紙) 한 장만을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다.그의 크고 단단한 손이 벼루를 쥐고 먹을 갈기 시작했다.스극, 스극.먹이 갈리는 서늘한 마찰음만이 텅 빈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조선을 집어삼킨 절대 권력자가, 오직 단 한 사람을 위해 붓을 집어 들었다.이헌의 핏발 선 눈동자가 허공을 한 번 맴돌더니, 이내 하얀 종이 위로 거침없이, 그러나 한없이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사면 및 신원 복권법(赦免 及 伸寃 復權法) 기안.]첫 줄을 써 내려가는 이헌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건원 12년에 발생한 호조 판서 서상서의 역모 사건은, 훈구파와 지방 토호들의 추악한 조작과 무고로 빚어진 희대의 오판이었음을 천명한다.]붓끝에 묻은 짙은 먹물이 종이 위로 스며들며, 십 년간 굳게 닫혀 있던 진실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기 시작했다.[이에 율법의 이름으로 서상서 가문에 씌워진 모든 반역의 죄를 영구히 소멸시키고, 삭탈 당한 관직과 품계를 사후 복권한다.]
Last Updated : 2026-08-15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