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회귀한 대군의 후회: Chapter 121 - Chapter 130

231 Chapters

[119화] 옥좌의 목줄(1)

 어둠이 무겁게 깔린 대군저의 집무실, 취선당.이헌의 서안 위로, 붉은 명주실로 단단히 봉인된 서신 한 통이 툭 떨어졌다.서신의 겉면에는 조선 국왕의 공식 인장인 대보(大寶)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압록강이 얼어붙기 직전, 도강하려던 밀사를 나루터에서 생포하였사옵니다.”어둠 속에서 무릎을 꿇은 흑위대장의 목소리에는 서늘한 살기가 배어 있었다.“밀사의 품에서 나온 것은,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전하의 친서였사옵니다.”이헌은 말없이 서안 위에 놓인 서신을 내려다보았다.그의 길고 흰 손가락이 봉인을 뜯고, 빳빳한 종이를 펼쳤다.그 안에는 조공의 예를 갖추어 명나라 황제에게 엎드려 절하는, 조선 국왕 이도의 비굴한 문장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섭정 진안대군이 권력을 찬탈하고 옥좌를 위협하고 있사오니, 황제 폐하께서 천자(天子)의 군대를 내어주시어 저 역적을 토벌해 주시옵소서. 그리해주신다면 조선은 대대로 명의 충견이 되어…….]사락.이헌은 서신을 반으로 접어 턱을 괴었다.“명나라의 군대를 불러들여 나를 치시겠다.”이헌의 입술 사이로 기가 차다는 듯, 낮고 건조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분노보다는 지독한 씁쓸함이 먼저 밀려왔다.자신이 아무리 율법의 칼을 휘두르고 훈구파를 도륙 냈다 한들, 그는 단 한 번도 이도의 옥좌를 물리적으로 끌어내리려 한 적이 없었다.하지만 핏줄을 나눈 친형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외세의 이리 떼를 안방으로 끌어들이는 길을 택했다.백성의 목숨과 조선의 자주권을 명나라 황제의 발밑에 내동댕이치면서까지 말이다.“정녕 이 조선의 옥좌는, 사람의 눈을 멀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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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옥좌의 목줄(2)

 “자신의 동생을 죽이겠다고,백성의 피를 짜내어 명나라 황제에게 바치고 오랑캐의 군대를 도성으로 불러들이려 하셨습니까.”“그, 그것은……!”“이것은 국왕의 통치가 아니라, 국가를 팔아먹는 반역이옵니다!”이헌의 벼락같은 사자후가 침전을 뒤흔들었다.“이 밀서가 내일 아침 어전 회의에 공개되고, 성균관 유생들과 사관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어찌 될 것 같사옵니까! 그들이 과연 저를 역적이라 부르겠습니까, 아니면 외세에 나라를 팔아넘긴 전하를 옥좌에서 끌어내리려 들겠습니까!”“……!”이도의 무릎이 힘없이 꺾였다.그는 대리석 바닥에 주저앉은 채,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밀서를 움켜쥐려 했다.“진안…… 내가, 내가 잘못했다…….”결국 옥좌의 주인이, 권력의 공포 앞에 완벽하게 이성을 잃고 섭정의 발밑에 엎드려 애원하기 시작했다.“내 잠시, 잠시 이성을 잃고 헛된 꿈을 꾸었구나. 제발 이 서신만은 덮어다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더 큰 영지냐? 아니면 재물이냐!”“재물 따위가 필요했다면 애초에 이 밀서를 어전에 던졌겠지요.”이헌은 주저앉은 이도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형제로서의 마지막 연민조차 깔끔하게 도려낸, 완벽하게 계산된 변호사의 혓바닥이 마침내 가장 치명적인 청구서를 내밀었다.“이 밀서를 영원히 잿더미로 만들어 드리는 대가로, 전하께서 내어주셔야 할 것은 단 하나뿐이옵니다.”이헌이 품에서 미리 작성해 둔 또 다른 붉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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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화] 단 한 장의 구원(1)

 조선의 모든 군사를 통제할 수 있는 호부(虎符)와 병권 이양 각서.그 절대적인 권력의 상징들이 집무실 취선당의 서안 한구석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왕의 손발을 자르고, 훈구파의 숨통을 끊어내며, 지방의 거대한 자금줄마저 완벽하게 말려 죽였다.이제 이 조선 땅에서 섭정 이헌의 허락 없이는 군사 한 명 움직일 수 없었고, 엽전 한 닢조차 마음대로 굴러갈 수 없었다.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서늘한 서류 몇 장으로, 그는 명실상부 조선의 모든 권력과 무력을 거머쥔 유일무이한 군주로 올라선 것이다.“…….”하지만 이헌의 시선은 그 대단한 호부 따위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그는 서안의 한가운데, 가장 정갈하게 깔린 눈꽃처럼 하얀 설화지(雪花紙) 한 장만을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다.그의 크고 단단한 손이 벼루를 쥐고 먹을 갈기 시작했다.스극, 스극.먹이 갈리는 서늘한 마찰음만이 텅 빈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조선을 집어삼킨 절대 권력자가, 오직 단 한 사람을 위해 붓을 집어 들었다.이헌의 핏발 선 눈동자가 허공을 한 번 맴돌더니, 이내 하얀 종이 위로 거침없이, 그러나 한없이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사면 및 신원 복권법(赦免 及 伸寃 復權法) 기안.]첫 줄을 써 내려가는 이헌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건원 12년에 발생한 호조 판서 서상서의 역모 사건은, 훈구파와 지방 토호들의 추악한 조작과 무고로 빚어진 희대의 오판이었음을 천명한다.]붓끝에 묻은 짙은 먹물이 종이 위로 스며들며, 십 년간 굳게 닫혀 있던 진실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기 시작했다.[이에 율법의 이름으로 서상서 가문에 씌워진 모든 반역의 죄를 영구히 소멸시키고, 삭탈 당한 관직과 품계를 사후 복권한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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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단 한 장의 구원(2)

 대궐문을 지키던 수백 명의 금군과 병사들이, 압도적인 권력을 쥐고 나타난 섭정의 거대한 실루엣 앞에 일제히 창을 내리고 무릎을 꿇었다.하지만 조선의 진정한 지배자는 그들의 충성 맹세조차 안중에도 없이, 오직 대군저를 향해 짐승처럼 말채찍을 내리칠 뿐이었다.깊은 밤, 대군저의 안채.수십 명의 흑위대 무사들이 철통같이 호위하고 있는 비밀 정원의 가장 깊숙한 곳.서연이 머무는 처소 앞에는 겨울의 찬바람만이 쓸쓸하게 불어오고 있었다.저벅, 저벅.거친 숨소리와 함께 이헌의 거대한 신형이 안채의 뜰 안으로 들어섰다.“대군 자가, 납시었사옵…….”“쉿.”호위 무사가 큰 소리로 외치려 하자, 이헌이 황급히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며 매섭게 노려보았다.그의 눈빛은 마치 맹수가 포효하기 전의 그것처럼 흉흉했으나,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기괴할 정도로 처절한 두려움이었다.‘소리를 내지 마라. 아가씨가 놀라실라.’이헌은 무사들을 손짓으로 물린 뒤, 홀로 서연의 처소를 향해 다가갔다.창호지 문 너머로는 희미한 촛불이 흔들릴 뿐, 인기척은 없었다.이헌은 문턱 한 걸음 앞에 멈춰 섰다.그의 억센 손이 가슴팍으로 향했다. 비단 주머니 너머로 바스락거리는 종이의 감촉이 느껴졌다.‘아가씨. 드디어 복권 교서의 최종 초안이 완성되었습니다.’이헌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굳은 입술을 달싹였다.‘이 마지막 절차만 끝나면, 아가씨는 다시 누구도 함부로 천인이라 부를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이 지옥 같은 대군저를 벗어나 당당히 세상 밖으로 걸어 나가셔도 아무도 아가씨의 신분을 다시 빼앗지 못하게 만들겠습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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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독(毒)과 서류(1)

 햇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좁고 음습한 방.도성 외곽에 자리 잡은 허름한 가옥의 주변에는 높고 날카로운 가시덤불이 겹겹이 쳐져 있었다. 위리안치(圍籬安置).조정을 쥐고 흔들던 우의정 김윤합은, 이제 쥐새끼처럼 이 좁은 방안에 갇혀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해 있었다.“쿨럭…… 쿨럭!”김윤합은 마른기침을 토해내며 핏발 선 눈으로 허공을 쏘아보았다.“전하께서…… 기어이 병권마저 넘기셨다니.”그의 덜덜 떨리는 손에 쥐어진 것은, 궐내에 남아있는 마지막 첩자가 몰래 던져 넣고 간 구겨진 쪽지였다.자신이 평생을 바쳐 키워낸 훈구파의 수족들이 모조리 목이 잘리거나 노비로 끌려갔다.지방의 토호들은 씨가 말랐고, 유일한 희망이었던 국왕 이도마저 밀서가 발각되어 섭정의 발밑에 엎드렸다.“이헌…… 이 미친 악귀 같은 놈…….”우두둑. 김윤합의 이가 부서질 듯 맞물렸다.율법. 논리. 증거.자신이 섭정을 이기기 위해 꺼내 들었던 모든 수는, 그 괴물 같은 대군의 압도적인 법리적 두뇌 앞에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법으로는 절대 저놈을 이길 수 없다. 정면으로 맞붙는 순간 뼈도 추리지 못하고 찢어 발겨질 뿐이다.“그렇다면 법을 벗어나면 그만이지.”김윤합의 늙고 주름진 입술 사이로 소름 끼치는 살기가 새어 나왔다.그는 쪽지의 뒷면에 떨리는 손으로 은밀한 지령을 휘갈기기 시작했다.[율법이 네놈을 지켜줄지언정, 독(毒) 앞에서는 그 알량한 혓바닥도 썩어문드러지겠지.]권력을 잃고 벼랑 끝에 내몰린 짐승의 마지막, 그리고 가장 비열한 발악.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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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핏빛 위임장(1)

 편전 안은 평소와 다름없이 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대신들은 고개를 숙인 채 섭정의 입술만 바라보고 있었고, 이헌은 어상에 기대어 서상서 가문의 복권을 공식화하는 조칙을 낭독하려 하고 있었다.“……건원 12년의 역모는 무고였으며, 이에…… 서연의 신분을 회복하고…….”이헌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탁하고 억눌려 있었다.그의 뺨은 잿빛으로 변해 있었고, 이마에서는 비 오듯 땀이 쏟아져 내렸다.“섭정 대감? 안색이…….”눈치 빠른 좌의정이 의아한 듯 고개를 들려던 찰나였다.“쿨럭……!”이헌의 어깨가 크게 흔들리며 입술 사이로 기침이 튀어나왔다.“……!”그의 손으로 틀어막은 입술 새로, 시커먼 피가 꿀럭거리며 쏟아져 내렸다.툭, 투둑.검붉은 핏방울이 어전의 대리석 바닥을 적시고, 이헌이 쥐고 있던 서상서의 토지 대장 위로 처참하게 번져갔다.“서, 섭정 대감!”“어의! 당장 어의를 들라 하라!”편전 안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이헌의 거대한 신형이 통나무처럼 기울어지더니, 쿵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그의 시야가 급격하게 암전되어 갔다.귀가 멀어지는 듯한 이명 속에서 대신들의 웅성거림과 비명이 아득하게 멀어졌다.‘안 돼…….’바닥에 쓰러진 채로, 이헌은 피 묻은 손을 뻗어 바닥에 떨어진 서연의 복권 교서 초안을 꽉 움켜쥐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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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핏빛 위임장(2)

 그 냉혹하고 치밀한 법적 장치가, 지금 이 조선의 어전 한가운데서 핏빛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붓…….”이헌이 헐떡이며 흑위대장에게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붓을…… 대라.”흑위대장이 황급히 품에서 호신용 단검을 꺼내어, 이헌의 손끝에 묻은 피를 먹물 삼아 찢어진 소매 자락 위에 글자를 겹쳐 쓰도록 받쳐주었다.이헌의 덜덜 떨리는 손가락이 핏물로 젖은 비단 위를 처절하게 긁어 나갔다.[본 섭정의 의식이 끊어지는 즉시, 조선의 병권과 모든 국정의 통제권은 흑위대장에게 임시 위임한다.]단 한 줄의 문장.하지만 그 아래에는, 이헌이 평소 섭정의 수결을 할 때 쓰던 고유의 인장 모양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지장이 붉고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그 피투성이의 혈서를 본 반대파 대신들의 턱이 기괴하게 벌어졌다.“저,저것이 무슨……!”“섭정의 권한을 호위 무사 따위에게 위임하다니! 저런 억지 문건이 어찌 국법으로 인정받는단 말이오!”좌의정이 핏대를 세우며 반발했다.하지만 이헌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핏발 선 눈으로 좌의정을 노려보았다.“경국대전…… 형전…….”이헌의 입술 사이로 검은 피가 꿀럭이며 흘러내렸지만, 그의 혓바닥은 멈추지 않았다.“조선의 국법에 명시된…… 병권의 이양은, 호부를 지닌 자의 명백한 수결이 담긴…… 교지나 서신으로 갈음할 수 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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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완벽한 그물(1)

 “우욱……! 커헉!”취선당의 굳게 닫힌 병풍 뒤로, 짐승의 멱을 따는 듯한 끔찍한 구토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요강 안으로 쏟아지는 시커먼 핏물과 약재 찌꺼기들.어의가 밀어 넣은 독한 해독제는 비상의 독 기운과 뒤엉켜, 이헌의 내장을 헤집어놓고 있었다.“자가……! 조금만 더 참으시옵소서!”수의가 사색이 된 얼굴로 이헌의 등에 침을 꽂아 넣었다.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이헌의 상반신이 발작하듯 튀어 올랐다가, 이내 침상 위로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사흘 밤낮이 이어졌다.내의원의 어의들이 목숨을 걸고 매달린 끝에, 이헌은 간신히 숨이 끊어지는 사태만은 면할 수 있었다.하지만 몸속 깊숙이 파고든 맹독의 흔적은 그를 무참히 망가뜨려 놓았다.시야는 수시로 뿌옇게 흐려졌고,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의 뼈마디가 부서지는 듯한 극심한 후유증이 그를 덮쳤다.“하아…… 하아…….”침상에 누운 이헌의 숨소리는 얇은 창호지처럼 위태로웠다.그의 핏기 없는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힘겹게 열렸다.“흑위대장…….”“예! 자가! 신이 여기 있사옵니다!”문밖에서 밤을 지새우던 흑위대장이 단숨에 뛰어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이헌은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더듬거리며, 흑위대장의 옷깃을 뼈만 남은 손가락으로 움켜쥐었다.“서연이…… 복권 교서 초안은…….”“안전하옵니다! 자가께서 쓰러지실 때 손에 꼭 쥐고 계시던 문서를, 소인이 피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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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맹독(猛毒)의 역학(疫學)(1)

 그러니 내 피로 쓴 이 계약에…… 목숨을 걸어라.”자신이 피를 토하고 사경을 헤매는 그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도.이헌의 시선은 자신의 살길이나 고통에는 단 한 줌도 머물러 있지 않았다.정치를 장악하고 대신들의 목을 치며 피비린내를 풍겼던 괴물의 모습. 그 이면에 웅크리고 있던 이헌의 본질은, 오직 그녀 하나만을 맹목적으로 살려내려 발버둥 치는 병적인 순애(純愛) 그 자체였다.“……명심, 또 명심하겠사옵니다.”흑위대장이 이마에서 피가 나도록 바닥에 찧으며 대답했다.이헌은 그제야 쥐고 있던 붓을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그의 핏기 없는 입술 사이로 아주 옅고 서늘한, 텅 빈 미소가 번져갔다.“다행이군.”이헌은 베개 밑에 손을 넣어, 피가 묻지 않은 새 비단 주머니를 조심스럽게 꺼내어 가슴에 품었다.서연의 복권 교서 초안이 담긴 주머니였다.그는 그 주머니를 마치 자신의 부서진 심장이라도 되는 양, 꼭 끌어안은 채 침상 위로 무너져 내렸다.‘아가씨. 이 초안만은 끝까지 지켜 반드시 최종 복권까지 완성하겠습니다.’이헌의 눈동자가 서서히 풀리며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그의 의식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의 뇌리를 지배한 것은 자신의 생존에 대한 갈망이 아니라, 그녀의 안전을 담보하는 서늘한 법적 계약의 완결성뿐이었다.죽음조차 뛰어넘어 그녀를 지키려 했던, 폭군의 지독하게 외롭고도 맹목적인 그물망이 조선과 명나라를 관통하며 완벽하게 짜여진 밤이었다.취선당의 공기는 무겁고 탁했다.방 안을 가득 채운 지독한 탕약 냄새와 피비린내가 뒤섞여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울 지경이었다.침상에 반쯤 기대어 앉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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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맹독(猛毒)의 역학(疫學)(2)

 결국 완벽한 역학 조사의 결과 앞에, 최고 상궁은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며 바닥에 엎어졌다.“소, 소인이 어찌 감히 섭정 대감의 옥체에 해를 가할 생각을 하겠사옵니까! 다, 다 시켜서 한 일이옵니다!”“누구의 사주를 받았느냐!”최고 상궁이 눈물 콧물을 쏟아내며 처절하게 부르짖었다.“우, 우의정 대감이옵니다! 우의정 대감의 첩자가 소인의 친오라비를 볼모로 잡고 협박하여…… 탕약에 약을 타면 평생 먹고살 은표를 주겠다 하였사옵니다!”취선당의 굳게 닫힌 방문 너머로, 흑위대장의 보고를 전해 들은 이헌의 입술이 차갑게 비틀렸다.그는 핏기가 가시지 않은 창백한 손으로 서안의 붓을 집어 들었다.“결국, 그 늙은 쥐새끼의 마지막 발악이었군.”이헌의 목소리는 텅 비어 있었으나, 붓을 쥔 손끝에는 서늘한 살기가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자가. 어찌하시겠사옵니까. 금군을 보내어 우의정의 목을 쳐버릴깝쇼.”“아니.”이헌이 기침을 삼키며 빳빳한 종이 위에 글자를 휘갈기기 시작했다.“칼로 목을 베는 것은 짐승의 방식이지. 그자는 평생 율법과 명분을 방패 삼아 남을 짓밟아 온 자다. 그러니 마지막 숨통도 내가 짜놓은 가장 완벽한 율법의 철퇴로 끊어주어야 마땅하다.”이헌의 붓이 백지 위를 거침없이 갈랐다.[가택 연금 중인 죄인 김윤합은, 은밀히 첩자를 움직여 섭정의 탕약에 극독을 타 넣는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다.][이는 단순한 살인 미수가 아니라, 조선의 국정을 전복시키려 한 반역의 수괴가 저지른 명백한 대역죄(大逆罪)이다.]사락. 사락.사형 선고문이 완성되어 가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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