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회루에서의 핏빛 선언이 있은 지 불과 하루.조정의 공기는 완벽하게 뒤바뀌어 있었다.만조백관은 어전에서 섭정이 뽑아 들었던 시퍼런 단검과 그 서늘한 살기를 똑똑히 기억했다.‘섭정의 영혼은, 역적 가문 출신이었던 그 계집에게 완벽하게 저당 잡혀 있다.’대신들의 머릿속에 그 사실이 기정사실로, 아니 절대적인 생존의 공식으로 박혀버린 것이다.아무리 실무 능력을 중시하는 새로운 체제가 들어섰다 한들, 권력의 정점에 선 자의 약점을 파고드는 것은 관료들의 본능이었다.권력의 향방을 기가 막히게 냄새 맡는 이들은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다음 날 아침, 취선당 앞은 진풍경이 벌어졌다.섭정에게 올리는 상소문을 든 대신들이 문전성시를 이루며 앞다투어 무릎을 꿇고 있었다.“섭정 대감!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집무실 한가운데 엎드린 이조 참판이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목놓아 울부짖었다.그의 목소리는 과장되게 떨리고 있었으며, 억지로 쥐어짜 낸 눈물이 대리석 바닥을 적셨다.“소신, 지난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피눈물을 흘렸사옵니다! 십 년 전, 고(故) 서 판서 대감께서 그토록 억울하게 모함을 받으실 때, 감히 바른말을 올리지 못했던 이 비겁한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사옵니다!”그의 곁에 엎드린 예조 판서도 질 세라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그러하옵니다! 서 판서 대감이야말로 조선의 진정한 충신이자 칠흑 같은 어둠 속의 빛이셨사옵니다! 이제라도 그 숭고한 명예가 섭정 대감의 율법으로 회복되었으니, 국가에서 사당을 지어 그 넋을 기려야 마땅하옵니다!”“또한, 그 모진 고초를 견뎌내신 영애 낭자의 정절과 효심을 기려, 조정에서 정려문(旌閭門)을 내려주심이 가할 줄로 아옵니
Última atualização : 2026-08-19 Ler ma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