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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화.

171화.이천, HK 재활병원.성훈이 병원장과 미팅을 마치고 1층 로비에 있는 개인 사무실로 향했다.조만간 이정희는 미국의 유명 재활병원으로 이관될 예정이었다. 그 모든 진행 과정을 성훈이 도맡아 진행하고 있었다.그가 원무과를 지날 때였다.낯익은 누군가가 원무과를 나왔다. 남이준이었다.“어? 안녕하세요.”이준도 성훈을 알아보고는 우연한 만남에 놀라면서도 밝게 인사했다.“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습니까?”성훈도 반가운 얼굴로 인사했다.“그러잖아도 따로 뵙고 인사드리고 싶었는데….”이준이 택배 모자 위로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듯 말했다.호영의 병원비를 납부한 성훈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었으나 그와 연락이 쉽게 닿지 않았었다.바쁜 사람에게 계속 연락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호영이 문자로 간단한 인사만 했었다.이렇게 만나게 되니 이준의 입장에서는 성훈을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혹시 잠깐 시간 되실까요?”“아, 네. 잠깐은 괜찮습니다.”성훈이 시간을 확인하고는 흔쾌히 응했다.그 또한 호영의 안부가 궁금했었던 참이었다.잠시 뒤.두 사람이 병원 옥상에 조성된 공원에 놓인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테이블 위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 놓여 있었다.이준이 차 한 잔을 사겠다며 이곳에 오기 전 일부러 사 온 커피였다.“호영이 병원비도 내주시고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더 좋은 걸 대접해야 하는데….”이준이 아이스 커피를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아닙니다. 연락받고도 제가 바빠서 제대로 답을 못 드렸었네요. 호영이는 잘 지내죠?”“네. 최근에 다시 축구를 시작했어요.”“아, 다행이네요.”“….”“….”두 남자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이준은 막상 성훈을 마주하니 감사하다는 말 밖는 할 말이 없었다.사실 여진의 안부가 궁금했으나, 혹여 불쾌하게 생각할까 싶어 묻지도 못하고 있었다.“사모님, 아… 윤여진 씨는 별아랑 잘 지내고 계십니다.”마치 이준의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성훈이 여진의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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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화.

172화.그렇게 윤설과 성훈은 반장과 부반장이 되었다.다행히 성훈의 도움으로 윤설은 반 아이들의 괴롭힘에도 불구하고 나름 반장의 역할을 잘 수행해 갔다.하나 그것도 잠시.성훈의 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시면서 성훈은 학교생활을 제대로 하기가 힘들었다. 이 세상에 달랑 혼자 남겨진 자신을 돌보기도 버거웠으니까.자연스레 윤설은 반장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다시금 반장과 부반장이 새롭게 뽑혔다.그렇게 두 사람의 중학교 인연은 거기서 끝이 났었다.몇 년이 흐르고, 18살이 된 성훈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닥치는 대로 하던 시기였다.그날도 늦게까지 고깃집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으로 가던 중, 동네 양아치들에게 둘러싸인 제 또래 여자아이를 보게 됐다.‘…!’아는 여자아이가 아니더라도 걸음을 멈췄을 뻔한 광경인데, 심지어 양아치들에게 둘러싸인 여자는 다름이 아닌 남윤설이었다.그렇게 시작된 1대 8의 난투극.그로 인해 경찰서에서 보호자로 만나게 된 배다른 형 차준석.어쩌면 남윤설이 아니었다면, 성훈은 차준석과 만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그 후, 성훈과 윤설의 풋풋하고 아린 첫사랑이 시작되었다.‘윤설아…. 나 너를 보고만 있어도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마구 뛰어. 미친놈처럼. 네가 너무 좋다.’‘후훗. 정성훈, 나도… 네가 좋아. 나도 너 보면 내 심장이 마구 뛰어. 숨이 쉬어지는 게 신기할 정도로.’수줍은 고백에 수줍은 답이 돌아왔다.윤설의 말에 자신감을 얻은 성훈이 그동안 너무도 하고 싶었던 제 마음을 냅다 뱉었다. 스스로를 미쳤다고 생각하면서.‘검정고시 만점으로 합격하면, 너한테 받고 싶은 선물 있어.’‘뭔데?’샘물처럼 맑고 커다란 눈동자가 성훈을 향했다.‘그게…. 사실 너무 소중하고 소중한 거라….’성훈은 무해할 정도 깨끗한 윤설을 보며 차마 제 바람을 곧장 말하지 못했다. 그걸 말하는 순간 자신은 짐승이 된 것만 같았다.‘말해 봐. 혹시 비싼 거야? 나 돈이 없어서 비싼 건 못 해주는데….’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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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화.

173화.31살이 된 정성훈 앞에 첫사랑 남윤설과 닮은 남이준과 호영이 마치 만나길 기다렸던 사람들처럼 우연히 나타났다.“저기, 남이준 씨.”지난 추억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깊은 눈동자로 성훈이 이준을 불렀다.“네! 말씀하세요.”이준은 오랜만에 들은 여진과 별아의 반가운 소식에 들뜬 표정을 지은 채 대답했다.또 무슨 좋은 소식이 있나 기대하는 얼굴이었다.“혹시, 누나가… 있습니까?”“네…?”“남윤설, 아시나요?”“…!”뜻밖의 질문에 이준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갔다.그것도 잠시, 이준은 굳은 표정을 갈음하고 삽시간에 날을 세우며 성훈을 사납게 응시했다.“우리 누나, 어떻게 알아요?”“하아…. 맞나보네요.”성훈은 혹시나 했던 가설이 맞아 들자 반가움보다 허탈함이 먼저 밀려들었다.“당신! 누구야? 누군데 우리 누날 알아?”이준이 무섭게 일그러진 얼굴로 성훈 앞에 바짝 다가섰다.두 남자의 눈동자가 지척에서 맞물렸다.“윤설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젠장! 당신 누구냐고!”이준이 평소 그 답지 않게 소리치며 성훈의 멱살을 확 그러잡았다.난폭한 상황에도 성훈은 동요하지 않고 이준을 응시하며 침착하게 물었다.“호영이가 윤설이… 아들인가요?”“…!”성훈의 멱살을 쥐고 있던 이준의 손아귀에 갑자기 힘이 쭉 풀렸다.이준은 놀란 눈으로 한 발짝 제 몸을 뒤로 물렀다. 그의 눈동자가 바람에 이는 물결처럼 흔들거렸다.그 눈을 직시하는 성훈이다.“맞나보네요.”놀람과 반감을 간신히 누르며 이준이 입을 열었다.“뭡니까. 당신 뭐야….”“윤설이한테 첫 남자였고, 저 또한 윤설이가 첫 여자였습니다. 윤설이랑 사랑했던 사입니다.”“…!”“윤설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성훈이 재차 물었다. 불안감이 가득한 물음이었다.그도 그럴 것이.‘저 부모님 안 계세요. 삼촌이 제 부모예요.’언젠가 호영에게 돈가스를 사주었던 날, 그가 호영에게 부모에 관해 물었을 때, 호영의 대답이었다.아닐 거야. 아닐 거야. 아니어야 해!성훈은 부모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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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화.

174화.말을 마친 이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당신 같은 무책임한 사람한테는 싸구려 커피도 아까운 거였어.”이준은 성훈에게 침이라도 뱉고 싶었지만, 제 성정이 그렇게 모질지 못한 게 원망스러웠다.그가 멍청이처럼 고개를 떨구고 있는 성훈을 한번 노려보고는 그 자리를 빠르게 벗어났다.잊으며 살려고 했던 누나의 사고.윤설은 출산 과정에서 병원의 실수로 출혈이 심각해 목숨이 경각에 달렸었다.그 당시 동네 병원에서 큰 병원으로 곧장 이송하지 않고 응급조치를 하다가 골든 타임을 놓쳤다.그로 인해 윤설은 상당히 오랜 기간 의식을 잃었었다.이 과정에서 병원은 그녀의 부모에게 합의금을 제안했고, 부모는 수억의 돈을 받은 뒤 누가 봐도 허황된 사기 사업에 투자해 모든 돈을 다 잃었다.어린 호영이 앞으로는 단 한 푼도 남겨 놓지 않은 것이다.몇 년 뒤, 성인이 된 이준은 어린 호영을 데리고 무작정 집을 나왔다.어린 조카만큼은 누나와 저처럼 시궁창 같은 삶을 살지 않길 바랐다.그렇게 조카를 최선을 다해 키우며 살아왔는데….느닷없이 나타난 정성훈으로 인해 이준은 속에서 울화가 치솟았다.하지만 누나와 성훈이 어떻게 헤어졌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11년 전,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던 부모는 윤설과 이준을 데리고 아무도 모르게 야반도주를 했었다.그 당시 누나가 남자친구를 만나고 있다는 것을 이준은 알았다.야반도주 후 기존의 집보다 더 낡아빠진 집에서 살아갈 때, 누나는 혼자 우는 날이 많았다.그 이유가 야반도주로 억지로 헤어지게 된 남자친구 때문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계절이 두 번 바뀌고 나서야 이준은 누나가 호영을 임신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렇게 서글피 울었었나.누나와 헤어진 남자친구가 여진과 연관 있는 정성훈일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무거운 표정으로 병원을 벗어나는 이준의 눈앞에 조카 호영의 얼굴이 아른거렸다.“젠장.”성훈에게는 으름장을 놓듯 호영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했지만, 둘 사이는 분명 의심할 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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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화.

175화.“한 달?”“네.”“무슨 일로 그렇게 장기간 휴가를 내지?”준석이 미간을 좁히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차원호 회장의 부재와 차애란 전무 일로 본사 경영에 힘쓸 게 많았다. 이 시점에 준석의 오른팔인 성훈의 휴가는 달갑지 않았다.아무리 뛰어난 직원들이 비서실을 채우고 있다고 해도 준석에게 가장 유능한 직원은 비서실장 정성훈이었다.그것을 모르지 않는 성훈이 한 달의 휴가를 낸다고 말한다.“그새 여자라도 생긴 거야?”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막무가내로 무책임할 리 없었다.설사 여자가 생겼다 하더라도 이해 못 할 행동이었다.준석의 질문에 성훈이 입을 꾹 다문 채 말을 못했다.허, 진짠가?준석은 손에 들고 있던 테블릿을 테이블 위에 쌓인 서류 위에 툭 올려놨다.이내 의자를 뒤로 물려 긴 다리를 한쪽으로 꼬고 가슴팍 위로 팔짱을 꼈다.“뭐 신혼여행이라도 가나?”의구심 가득한 눈초리가 성훈의 얼굴을 강하게 훑었다.“그런 거 아닙니다.”“그런 게 아니면, 불허야.”“형.”“…!”성훈이 자발적으로 저를 형이라 부른 적이 있었나? 준석의 기억엔 존재하지 않았다.그가 성훈에게 그렇게 부르라 허락해야 불렀던 호칭이었다.‘형’이라는 부름 하나가 앞으로 성훈이 뱉어낼 내용의 정도를 가늠하게 했다.상당히 심각하고 중요하다는 뜻이다.거기에 형으로서 도와달라는 의미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앉아 있을 수는 없지.준석이 꼬았던 다리를 풀고 자리에서 우뚝 일어났다.이 순간 두 사람 사이는 상하 관계가 아니었다. 형과 동생으로, 피를 나눈 형제로서 대면이었다.“하, 새끼. 긴장되게. 대체 무슨 일이야?”준석이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으며 격이 없이 물었다.공적인 관계가 아닌 사적인 관계에서 준석은 성훈을 꽤 편하게 대했다.두 사람 사이에 공기가 빈틈 하나 없이 견고하고 친밀해졌다.“저한테 아들이 있어요.”“뭐…? 뭐가 있어?”준석은 제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그러나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남이준, 기억하시죠? 택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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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화.

176화.“남이준 말로는 윤설이가 호영이를 낳다가 죽었다고 했습니다. 아, 제 여자 이름이 남윤설이에요.”하, 제 여자라니.11년 전에 헤어진 여자를 ‘제 여자’라고 지칭하는 성훈을 보며 준석은 어이가 없었으나, 한편으론 이해도 되었다.형제는 생각보다 닮은 게 많았다. 첫사랑만 죽도록 사랑하는 게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닮아있었다.“그런데 그게 아니란 말이야?”“네….”“그럼 죽었다는 거야, 살았다는 거야?”“살아, 있습니다.”“엄마가 살아 있는데 삼촌이 아이를 키운다…. 딴 놈이랑 살림이라도 차린 건가?”준석은 윤설이라는 여자가 다른 남자랑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다르자, 상당히 불쾌했다.성훈은 배다른 형제지만, 제가 무척이나 아끼는 친동생이었다.그런 동생을 두고 다른 남자를 선택한 윤설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밖에.“그건 아니고…, 신생아들을 돌보면서 살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보육원에서요.”성훈은 착잡한 감정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신생아? 자기 자식은 동생한테 맡기고 남의 자식들을 돌보고 있다고?”“네.”“하, 그 여자도 매정한 엄마네.”“기억 상실증이라고 합니다.”“뭐…? 기억 상실증?”허! 산 넘어 산이라더니!준석은 기가 막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호영이 낳을 때 출혈이 심했다고 합니다. 의식 없이 꽤 오랫동안 중환자실에 있었나 봐요. 그 후유증이라고… 하더라고요.”성훈은 윤설이 죽었다는 이준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그래서 흥신소에 의뢰해 윤설을 찾기 시작했다.다행히 윤설을 찾는 일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다만 윤설은 출산할 때 있었던 과다 출혈로 인해 오랜 기간 의식을 차리지 못했었고, 그 후유증으로 기억을 잃었다고 했다. 그녀의 기억은 중학교 때에 멈춰있다고.후회가 잔뜩 뒤덮여 침울한 표정으로 말하는 성훈을 보며 준석은 더는 어떤 것도 묻지 못했다.지금까지 전한 내용만으로도 성훈의 괴로운 심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준석은 복잡한 성훈의 상황을 머릿속에서 다시금 정리하며 여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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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화.

177화.별아를 챙기다 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가긴 했지만, 그래도 준석이 옆에 있는 거랑 없는 건 확연히 달랐다.다시 부부가 되고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준석을 꽤 많이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마다 여진은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준석이 다정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여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뭐, 더 먹을까?”“당신은 어때요?”“음, 사실 난 술이 좀 당기긴 해.”준석이 조금은 피곤한 얼굴로 대답했다.출장 준비로 바쁜 것도 바쁜 거지만, 오늘 성훈의 이야기는 그를 머릿속을 꽤 복잡하게 했다.그 복잡한 생각을 집에서는 내려놓고 싶었다. 이럴 땐 술만 한 게 또 없지.“알았어요. 그럼 씻고 내려와요. 내가 준비해 놓을게요.”“그래, 곧 내려갈게.”“내려올 때 별아 잘 자는지 살펴보고요.”“걱정하지 마. 이젠 그 정도는 말하지 않아도 아니까.”준석의 말에 여진이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그런 아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준석이 엷게 미소 지었다.***잠시 뒤.1층 한편에 있는 미니 바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았다.고급스러운 도자기 접시 위에 과일과 치즈가 보기 좋게 놓여 있었다.준석의 손엔 크리스탈로 된 온더록스 잔이 들려 있었다.술을 마시지 않는 여진은 얼음이 들어간 긴 유리잔에 탄산수를 부었다.청량감을 가득 품은 투명한 기포가 차가운 얼음과 만나 시원한 소리를 내며 맑게 떨어졌다.여진의 행동 하나하나를 눈에 담고 있던 준석이 제 잔을 여진의 유리잔에 챙, 하고 부딪혔다.그 소리에 여진이 준석에게 시선을 두었다.샤워하고 내려온 준석에게선 은은한 우디 향이 잔잔하게 풍겼다.평소 단정하게 정돈된 그의 앞머리가 자연스레 이마를 덮고 있었다.준석은 이미 몇 잔을 마신 상태였다.알코올이 들어가니 삽시간에 몸이 노곤해지며 그의 눈가가 느슨하게 풀렸다.언제나 정돈된 모습이 일상이었던 남자의 무방비 상태를 오랜만에 보니 여진은 내심 기분이 좋았다.그녀가 저도 모르게 미묘한 웃음을 흘렸다.그 미소를 눈여겨보며 준석이 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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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화.

178화.재촉에 못이겨 여진이 대답했다.“많이?”“흠, 많이. 그래, 내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됐어.”“그럼, 당신은요?”이번엔 여진이 준석을 강하게 응시하며 물었다.“나?”“네. 내가 만약에 당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어떨 것 같아요?”“나한테는 너무 쉬운 질문인데.”“쉽다고요?”“응. 너무 쉽지. 윤여진이 기억하지 못하는 차준석이라….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갈 의미가 있나? 죽은 거나 다름없지.”“…!”“물어놓고 보니, 이혼보다 더 끔찍한 가정이군. 내가 괜한 것을 물어봤어. 괜한 것을.”“준석 씨, 혹시 무슨 일… 있어요?”여진은 그제야 준석이 평소 같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래서 걱정스러운 눈동자로 물었다.“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갑자기 궁금했을 뿐이야.”준석은 성훈의 일을 여진에게 당분간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굳이 지금 말하지 않아도 언젠간 자연스레 알게 될 일이었다.챙.준석이 잔을 들어 다시금 여진의 유리잔에 건배했다. 그러곤 금세 잔을 비웠다.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여진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지우지 않은 채 그녀 또한 탄산수로 입을 축였다.“여진아.”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장난기도, 여유도 없이 진심만 남은 목소리.여진이 대답 없이 그를 응시했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다시금 맞물렸다.준석이 여진을 소유욕 짙은 눈길로 바라보며 입술을 열었다. 뜨거움 가득한 열기와 함께.“사랑해.”갑작스러우면서도 진심이 전부인 고백이었다.“준석 씨….”놀란 기색이 역력한 여진을 눈에서 떼지 않으며 준석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에 따라 여진도 자연스레 얼굴을 들었다. 우람한 남자의 그늘이 그녀의 얼굴 위로 깊게 드리워졌다.크고 뜨거운 손바닥이 여진의 양 볼을 감쌌다. 엄지가 그녀의 아랫입술을 느릿하게 쓸었다.준석이 양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이윽고 정염이 가득한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한다.“단 한 순간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날이 없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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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화.

179화.젖은 신음이 새어 나오는 순간, 준석의 인내심이 뚝 끊겼다. 그가 여진의 허리와 허벅지를 받쳐 단숨에 들어 올렸다.“읏…!”순식간에 시야가 뒤집히며, 여진이 그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놀란 그녀가 그의 목을 끌어안자, 준석이 낮게 웃었다.아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준석은 붉게 물든 여진의 얼굴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뚫어지게 올려다보았다.“골라.”“뭘요…?”“거실, 식탁, 서재. 어디서 할까.”여진을 받친 팔에 힘이 더 들어갔다. 도망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듯이.“그, 그냥….”“그냥?”그가 부풀어 오른 그녀의 입술을 빤히 보며 말끝을 따라 했다. 재촉하듯, 놀리듯.여진이 질끈 눈을 감았다가, 이내 부끄러움을 버리고 그의 귓가에 은밀하게 속삭였다.“그냥 여기서… 해요.”준석의 입꼬리가 천천히, 아주 느리게 올라갔다.“이제 보니 내 아내는 남편을 홀리는데 선수였어.”“알았으면….”여진이 그의 셔츠 깃을 움켜쥐고 끌어당겼다.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까이.“참지 말고 어서 해요.”“…젠장.”주도권이 뒤집힌 순간, 준석의 눈빛이 완전히 바뀌었다.그는 여진을 곧장 미니 바 위에 앉히고 양팔로 상판을 짚어 그녀를 그 안에 가두었다. 차가운 대리석과 뜨거운 남자 사이에서 여진의 몸이 움찔 떨렸다.“먼저 도발한 건 당신야.”“…알아요.”“이 예쁜 입술에서 소리 지르게 할거고, 당신 울게 할 거야.”“앗!”그가 그녀의 턱 끝에 짧게 입을 맞추고는, 쇄골을 지나 천천히, 더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데일 듯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배꼽 아래로 향했다.“주, 준석 씨….”“날 유혹했으면 이 정도 각오는 했어야지.”“읏…!”부부의 밤은 그렇게…, 격렬하게 솟구치는 열기와 축축하게 흐르는 습기로 가득 차올랐다.***며칠 뒤.출장 마지막 날이었다.뉴욕의 유명한 클럽에서 한정혁을 만난 것은 예고 없이 맞닥뜨린 우연이었다.뉴욕 지사 방문 후 직원 격려 차원에서 클럽을 들렸다.직원들이 모여 있다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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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화.

180화.여진이한테 약을 먹였다니!“한정혁 씨! 대체 그게 무슨 소립니까?”준석의 옆에 있던 성훈 또한 여진에게 약을 먹였다는 소리에 놀라며 한정혁을 큰 소리로 다그쳤다.“아…, 그, 그게….”한정혁은 아차 싶었다.그가 베트남으로 쫓겨났을 때 차준석이 모든 것을 알고 저에게 내린 벌이라고 생각했다.한데 오늘 보니 차준석도 정성훈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그럼 여진에게 약을 먹여 호텔에 데리고 가고 사진을 찍어 협박한 게 나라는 사실을 모르고도 나를 그 유배지로 보냈단 말이야?단순히 윤여진의 전 약혼자이고 그녀에게 찝쩍거렸다는 이유만으로?차준석! 이 미친 괴물 새끼!“돌았나, 한정혁. 누구한테 약을 먹여? 똑바로 말해!”“허억!”클럽을 통째로 집어삼킬 것 같은 분노에 준석이 한정혁의 멱살을 강하게 그러쥐었다.그때 클럽의 가드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성훈은 준석과 한정혁을 예의주시하다 가드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가드를 제지하기 위해 그쪽으로 향했다.성훈이 가드에게 별일 아니다 우리 선에서 해결하겠다 말하며 두둑한 달러를 건넬 때였다.퍽! 퍽!뒤에서 들리는 둔탁한 타격 소리에 성훈은 몸을 급하게 돌려 준석을 바라봤다.“대표님!”어둠을 찢고 나타난 사나운 야차처럼 준석은 이글거리는 광분을 감추지 않고 한정혁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제 서식지를 겁도 없이 침범하고 제 것을 탐하려 했던 더럽고 야비한 짐승을 살려둘 필요가 있을까.연속 되는 타격에 구김 하나 없이 반듯한 새하얀 셔츠에 붉은 액체가 금세 어두운 얼룩을 만들었다.“대표님! 그만 하세요! 제가 합니다!”쏜살같이 다가온 성훈이 준석 팔을 강하게 잡았다.저런 지저분한 놈을 상대 해야 할 사람은 차준석이 아니라 그의 몫이었다.성훈의 제지에 분노를 애써 삼키며 준석이 한정혁의 멱살을 팍! 놓았다. 그 힘에 한정혁은 바닥으로 꼬꾸라졌다.“으으윽!”한정혁의 얼굴은 그 짧은 사이에 피범벅으로 엉망이 되었다.연거푸 고통스러운 신음이 튀어나왔다. 붉은 액체로 얼굴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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