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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41화.여진을 태운 차가 서울을 벗어나 파주로 향했다.성훈은 룸미러로 뒷좌석에 앉은 여진의 상태를 예의 주시했다.다행히 여진은 산부인과 진료 후, 피곤해 보였으나 갤러리에서 보다는 편안한 얼굴이었다.여진은 피에 젖은 드레스 대신 면으로 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그녀가 산부인과 진료를 받는 동안 성훈이 사 온 옷이었다.성훈은 여진이 진료받는 동안 상당히 재빠르게 움직였다.그녀가 갈아입을 옷을 사야 했고, 피에 젖은 뒷좌석을 깨끗하게 정돈했다.그가 정신없이 한창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준석에게 연락이 왔었다.‘정 비서, 지금 어디야?’‘대표님, 지금 갤러리 근처에 있는 산부인과에 있습니다.’‘갤러리 근처 산부인과? 그럼 성북동이란 말이야?’‘네, 그렇습니다.’‘왜 HK 병원으로 데려가지 않은 거지?’화가 난듯한 준석의 음성이 성훈의 고막을 날카롭게 때렸다.준석은 여진이 당연히 HK 병원으로 갈거로 생각해 그쪽으로 이동 중이었다.원래 대로라면 여진은 HK 병원으로 가서 VIP 진료를 받아야 했다.한데 좀전의 상황은 일분일초를 다툴 정도로 급박했다.성훈도 하혈하는 여자를 건사한 건 처음이었으니까.그랬기에 근처 산부인과로 가자던 여진의 말에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그 긴박했던 상황을 준석에게 전화로 다 설명할 수가 있겠나.‘죄송합니다, 대표님. 자세한 건 만나서 말씀드리겠습니다.’그의 말에 준석은 답답한 듯 한숨을 뱉어내고는 다시 물었다.‘그래서 여진이 상태는?’‘지금 진료 중이십니다.’‘미칠 노릇이군!’‘….’‘진료 끝나면 여진이 곧장 파주로 데려와.’‘네, 그렇게 하겠습니다.’‘성훈아, 여진이 상태 봐가면서 운전해. 속도 내지 말고 천천히 와라.’‘네, 알겠습니다.’성훈은 여진을 향한 준석의 의중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았다.여전히 준석은 여진을 쥐면 부서질까 불면 날아갈까, 노심초사하며 바라보고 있었다.이혼 합의서에 진작 사인까지 받았으면서, 그 서류를 법원에는 제출하지 않고 있었다.결국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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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42화.파주 작업실.딸깍.준석이 작업실 건너편에 있는 주거 공간에 들어서며 전등을 켰다.침실이 딸린 20평 정도 되는 공간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여기도 오랜만이네.”그가 재킷을 벗어 소파에 놓고 넥타이를 끌러 재킷 위에 던졌다.답답하게 닫혀 있는 셔츠 단추를 몇 개 풀었다.그 사이로 탄탄하게 자리 잡은 근육들이 모습을 드러냈다.목이 탔다.주방으로 가 물 한 잔을 말끔히 비웠다.이곳에 도착하니 순식간에 피곤이 덮쳐왔다.그가 소파가 앉아 몸을 기대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층고가 높은 천장에 흰색 실링팬이 은은한 조명과 함께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준석이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 혼잣말을 한다.“내 아내는…, 어디까지 왔나.”나직한 음성이 실링팬을 타고 공간을 맴돌았다.“…축하해, 윤여진.”그의 음성이 메아리치듯 낮게 울렸다.“당신 작품, 멋지더라.”여진의 작품은 GLORIA의 화려하고 정교한 그 어떤 보석보다도 빛나고 아름다웠다.마치 윤여진처럼.준석이 혼잣말을 멈추고 조용히 돌아가는 실링팬만을 응시했다.“하, 미친놈. 제대로 돌았군.”무엇을 보든, 그의 눈엔 윤여진만 연상됐다.같은 시각.검은색 세단이 헤드라이트를 비추며 작업실이 위치한 마을로 들어섰다.여진의 작업실은 예술인이 주로 모여 사는 단지에 있었다.단지에서도 가장 안쪽에 자리했다.조용하고 안락한 곳에서 여진이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준석은 작업실을 완공하는 데 신경을 많이 썼었다.높은 침엽수로 둘러싸인 작업실은 입구에서 조금 더 들어가야 주차장과 디귿 자 형 본채가 나왔다.끼익.성훈이 조용히 차를 주차했다.그가 고개를 돌려 여진을 바라봤다.여진은 그새 새근거리며 잠을 자고 있었다.성훈은 잠시 고민하다 콘솔 박스를 열어 ‘산모 수첩’을 꺼냈다.그가 여진의 옷을 사고, 뒷좌석을 정리한 뒤 병원으로 올라오니, 여진은 회복실에 있다고 했다.‘윤여진 씨 담당하신 의사 선생님을 만나고 싶은데요.’준석에게 보고하기 위해서라도 성훈은 의사를 만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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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43화.성훈은 피를 흘렸던 여진을 떠올리며 애매하게 질문했다.‘아이는 괜찮겠죠?’‘산모님들 종종 이런 경우 있어요. 집에서 안정 취하시면 괜찮으실 거예요.’직원이 환한 미소까지 지으며 성훈을 안심시켰다.그때, 회복실에서 여진이 나왔다.성훈은 얼른 제 바지 뒷주머니에 산모 수첩은 숨겼었다.차준석의 아내, 윤여진이 임신했다.한데 누구의 아이를 가진 것일까.차준석의 아일까.아니면… 한정혁의 아이일까.성훈은 산모 수첩을 손에 꼭 움켜쥐었다. 이내 곤히 자는 여진을 다시 쳐다봤다.순진한 아이처럼 생겨서는, 대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이르게 만들었는지.성훈은 이해할 수 없는 여진의 부도덕한 행실에 얼굴을 와락 구겼다.여진의 임신을 준석에게 알려야 할까.준석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는 어떻게 나올까.성훈이 아는 차준석은 언제나 윤여진에게 약자가 아니었나.윤여진의 임신을 차준석에게 알린다면, 이혼 합의서는 보류될 것이 확실했다.아이가 태어나는 순간까지 차준석은 자신의 아이가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의심하며 고통의 나날을 보낼 것이다.그리고 아이가 태어났을 때, 만약 한정혁의 아이라면!아마도 차준석의 세상은 와르르 무너져 버릴지도 모른다.성훈은 자신의 우상이 어리석은 여자 윤여진으로 인해 무너지는 꼴을 볼 수는 없었다.생각을 정리한 성훈은 콘솔 박스에 산모 수첩을 다시 넣었다.탁! 소리와 함께 박스가 굳게 닫혔다.“도착… 했나요?”낮게 가라앉은 여자의 목소리였다.“…!”성훈은 자고 있을 거로 생각했던 여진의 목소리를 듣고 놀랐으나,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네, 도착했습니다.”“저기, 정 비서님.”여진이 조심스럽게 성훈을 불렀다.“네, 사모님.”“병원에서 그러는데 제가… 자궁에 혹, 혹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하혈한 거라고…. 병원에서 별거 아니라고 했어요. 남편한테는 그냥 생리통이었다고 말해주세요.”여진은 민망함에 잔뜩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아무리 남편의 비서이고 가족이라지만, 미혼인 성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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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44화.“그럼, 제가… 준석 씨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죠?”여진은 성훈에게 가족으로서 묻고 있었다.준석에게 도움은 못 될망정 더는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그런 이유로 이혼 합의서에 사인도 하지 않았었나.“형수님, 형과 하루빨리 이혼 절차를 밟아주세요. 아직 이혼 합의서가 법원에 제출되지 않았습니다.”“…!”여진은 성훈의 말에 다시금 놀랐다.당연히 이혼 절차가 진행되고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니!어처구니없게도 여진의 마음 한편엔 안도감이 일었다.하나 저와 제 친정의 안위를 위해 남편이 힘써 일궈 온 회사를 휘청이게 할 수는 없었다.여진은 성훈이 저를 ‘형수님’이라고 부르면서까지 이 이야기를 하는 심중을 정확히 알았다.차준석과 관계에서 윤여진이 나서서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는 말이었다.“저는 여기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대표님이 기다리고 계시니 들어가시죠.”성훈은 더는 말을 아꼈다.이 정도 얘기했으면, 여진이 알아듣고 잘 처신하리라 생각했다.지금 여진의 배 속의 아이가 만약 차준석의 아이라면, 그때 가서 고민할 문제라고 판단했다.“정 비서님, 자세히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준석 씨, 잘… 부탁드릴게요.”여진은 성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차를 나왔다.그러곤 곧장 준석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철컥.여진의 등 뒤로 현관문이 무겁게 닫혔다.거실 전면 창 앞에서 밖을 바라보고 있던 준석이 몸을 돌렸다.“왜 이렇게 늦게 들어온 거지? 옷은 어떻게 된 거야.”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어투로 말했다.주차장에 차가 도착한 게 한참이 됐는데도, 성훈도 여진도 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인내심이 바닥날 때쯤 여진이 차에서 내리는 게 보였다.한데 그녀의 옷이 이상했다.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던 드레스는 어디 가고 여진은 본 적 없는 싸구려 면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갑자기 옷을 갈아입고 나타난 아내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여진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저를 추궁하는 준석을 보며 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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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45화.달콤한 사탕인 줄 알았던 아내가 알고 보니 속을 타들어 가게 하는 독약이었다.“허, 하하.”어처구니가 없으니,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준석이 웃음을 멈추고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았다.이내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이더니, 서늘한 눈빛으로 말한다.“누릴 만큼 누렸다…, 이건가?”“네.”망설임 없는 대답이 여진의 입에서 나왔다.준석이 고개를 바로 한 채 여진을 부숴버릴 것처럼 응시했다.“금성 산업이 망해도 상관없다는 거야?”“상관없어요. 어차피 내가 외도한 순간, ‘혼전 계약서’의 조항을 어긴 거잖아요. 투자금 환수, 마음대로 하세요.”마음대로 하라니.준석은 여진의 무책임함에 다시금 얼굴을 일그러트렸다.“한정혁이 그렇게 좋아? 가정도, 친정도 내팽개칠 만큼?”여진은 준석의 다그침에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준석은 자신이 외도했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었다.제게 남은 일말의 정을 떼 내려면, 더 독하게 말해야 했다.그래야 차준석이 윤여진에게 자유로워진다.“우리 이혼에 다른 사람을 꿰맞추지 말아요. 난, 차준석이 지겨워졌을 뿐이에요.”“윤여진! 한 마디만 더해!”준석이 소리치며 큰 보폭으로 발걸음을 옮겨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 앞에 섰다.곧 터질 것 같은 활화산이 그녀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만 같았다.여진은 준석이 뿜어내는 거대한 분노에 움찔했으나, 이내 냉정해지려 노력했다.그때였다.커다란 손이 여진의 얼굴로 빠르게 향했다.“…!”여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그 순간, 그녀의 목에 걸려 있던 별 모양의 목걸이를 준석이 꽉 잡아당겼다.그 힘에 여진의 몸이 그에게 완전히 밀착됐다.준석이 그 목걸이를 손아귀에 더 꽉 쥐었다.여진의 신음과 함께 투둑! 투둑, 투두둑!작은 별 모양으로 연결되었던 목걸이가 억센 힘을 버티지 못하고 무참히 끊어져 버렸다.정교한 세공을 무시하듯 그 안에 박힌 수십 개의 다이아몬드가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마치 준석이 프러포즈했던 그 날, 한강 위로 떨어지던 폭죽의 잔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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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46화.차에서 대기 중이던 성훈은 작업실을 빠져나오는 준석을 보며 황급히 밖으로 나왔다.곧 폭발할 것 같은 준석의 표정을 보고 성훈은 되려 안도했다.차준석과 윤여진의 관계가 완벽히 정의됐음을 직감적으로 알았다.성훈은 곧장 뒷좌석 문을 열었다.준석은 성난 얼굴 그대로 차에 타며 성훈에게 말했다.“내일 금성 산업 관련해서 모조리 정리해.”“네, 알겠습니다. 대표님.”성훈은 운전석에 타기 전, 여진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거리가 있어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망연한 듯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입안이 썼다.성훈은 여진을 향한 시선을 거두고 차에 탔다.곧이어 검은색 세단이 미련 없이 그곳을 벗어났다.***몇 주 뒤.금성 산업은 오토매틱 로봇에 결국 투자금을 상환하지 못했다.그로 인해 금성 산업의 대주주였던 여진의 부모와 오빠 윤태성은 회사에 대한 모든 권한을 잃었다.금성 산업의 대주주가 차준석으로 바뀐 것이다.그뿐만이 아니었다.윤태성은 공금 횡령으로 검찰에 구속되었다.여진의 집안은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났다.비서 실장을 통해 이런 사태에 대한 보고를 듣고 있던 차원호 회장의 얼굴에 답답함이 서렸다.그는 소파에 앉아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문 채 묵묵히 보고를 들었다.비서 실장의 보고가 끝나자, 비서실로부터 연락이 왔다.“회장님, 차 대표님이 도착하셨답니다.”“고얀 놈. 들어오라고 해.”잠시 뒤, 준석이 집무실로 들어왔다.“오셨습니까, 대표님.”준석을 보고 비서 실장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에 준석도 짧게 묵례했다.차원호 회장이 준석을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다, 비서 실장에게 말했다.“오 실장은 나가봐. 이놈이랑 단둘이 할 얘기가 있으니.”“네, 회장님.”오 실장이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차 회장은 식어 버린 녹차를 한 모금 마셨다.오늘따라 녹차가 비리다 못해 지독하게 썼다.그가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준석을 바라봤다.“여진이 전화번호가 없는 번호로 나오더구나.”“이제 윤여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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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47화.“버릇없이 감히 누구 앞에서 소리를 질러! 네가 잘한 게 뭐가 있다고!”차 회장의 엄한 질타에 준석도 아차 싶었는지 곧장 표정을 풀었다.“목소리 높인 건, 죄송합니다.”“말이 나와서 묻겠다만, 넌 여진이가 진짜 바람을 피웠다고 생각하니?”“저와 여진이의 문제입니다. 여진이가 바람을 피웠든, 안 피웠든, 참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어째 이 늙은이보다 제 아내를 저리 모를까. 쯧쯧.”“….”“꼴도 보기 싫으니, 당분간은 보지 말자꾸나.”준석도 바라는 바였다.그렇지 않아도 부채 덩어리 회사를 인수해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언젠가는 닥칠 일이라 일부러 시간 내서 본사에 온 것인데, 결국은 이 지경이었다.“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준석은 형식적인 인사만을 하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집무실 문이 닫히자 차 회장은 다시 녹차 잔을 들다 이내 내려놓았다.그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혼잣말했다.“분명 사자가 새끼를 낳았었는데, 이 꿈값은 어디서 받나….”차 회장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오늘따라 손주며느리가 내려준 따뜻한 녹차가 그립구나.”차 회장이 여진을 찾으려면야 하루 만에도 찾을 수 있었다. 하나 사람의 연이라는 것이 억지로 되나.두 사람 사이를 참견하지 말라는 준석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 가만히 있는 거였다.무엇보다 이미 이혼까지 한 두 사람이 아닌가.여진과 준석은 이제 법적으로 남남이었다.“처음 마음은 어디 가고 이혼이라니, 어리석은 놈.”여진과 결혼하려 무릎까지 꿇었던 손자였다.이번 일은 금성 산업의 과오가 컸으나, 처가라는 이유를 들어 경고하고 감시하면 될 일이었다.그러나 준석은 여진의 집안을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철저히 응징했다.처가를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게 만든 것이다.가장 큰 이유가 여진의 외도라는 사실을 나중에 보고를 통해 알았다.차 회장이 두 사람의 이혼을 말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여진이가 외도를 하다니…. 믿을 걸 믿어야지. 아내를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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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48화.어느새 계절은 봄을 지나 완연한 여름에 다다랐다.한 계절이 지났을 뿐인데, 여진에게는 몇 년이 흐른 것만 같았다.임신 5개월에 접어든 여진은 이제 아랫배가 조금씩 볼록 나오기 시작했다.다행히 안정기에 접어들어 입덧도 사라졌고, 유산의 위험도 확연히 줄어들었다.여진은 준석과 이혼하면서 파주 작업실을 나왔다.파주 작업실은 여진의 명의였으나, 준석이 여진에게 결혼선물로 준 것이기에 이혼 후 여진은 그곳에서 지낼 염치가 없었다.현재 여진이 지내는 곳은 이천이었다.그녀의 대학교 친구 희주가 이천의 시골 마을에서 도자기 공방을 운영하고 있었다.그래서 그 근처에 집을 마련했다.주황빛 능소화가 회색의 담벼락을 타고 길게 뻗은 아담한 시골집이었다.철컹.파란색 대문이 열리고, 여진이 문밖으로 나왔다.한여름의 태양이 그녀를 사선으로 비췄다.여진은 강렬한 태양에 눈가를 찌푸리다 손을 들어 눈 위로 차양을 만들었다.그녀가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이 있는 쪽으로 걸었다.정류장에 도착한 여진이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버스가 곧 도착할 시간이었다.한데 5분, 10분, 20분이 지나도록 버스는 오지 않았다.“왜 이렇게 안 오지?”여진이 고개를 길게 뻗어 버스가 오는 길을 바라봤다.저 멀리 트럭 한 대가 오는 게 보일 뿐, 버스는 보이지 않았다.몸을 바로 한 그녀가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잠시 뒤.끼익! 소리와 함께 택배 트럭 한 대가 정류장에 섰다.여진은 자연스레 고개를 들어 트럭을 바라봤다.보조석 창문이 열리고, 야구 모자를 쓴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안녕하세요, 선생님.”“어? 안녕하세요.”여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얼떨결에 인사했다.여진이 인사한 택배기사는 여진의 도예 수업을 듣고 있는 초등학생 호영이의 삼촌이었다.여진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희주와 함께 동네 아이들을 위해 무료로 도예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어디 가세요?”호영의 삼촌이 여진에게 물었다.“네, 봄 요양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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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49화.여진을 태운 택배 트럭이 시내를 통과하지 않고 요양병원으로 향하는 지름길을 택했다.진녹색의 푸르름이 가로수 길을 길게 이룬 한적한 도로였다.호영이 삼촌, 이준은 평소 같지 않게 운전을 느리게 했다. 택배 트럭은 방지턱을 넘을 때 거의 멈추다시피 했다.그도 그럴 게 지금 보조석에 탄 여자는 임산부였으니까.이준은 곁눈질로 힐긋 여진을 바라봤다. 그러면서 사춘기 소년처럼 혼자 얼굴을 붉혔다.세상에 태어나서 저렇게 새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는 처음 봤다.조카 호영을 데리러 공방에 갔을 때, 이준은 여진을 보고 새하얀 호리병이 살아 움직이는 줄 알았다.임신을 했다고는 하지만 혼자 사는 여자였다. 남편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여자.한동네에 살면서 한 달 넘게 지켜본 결과 여진이 사는 집에 남자가 드나드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더군다나 여진은 그 흔한 핸드폰도 없었다.언제나 손목시계를 차고 다녔는데, 그 손목시계가 쉽게 보지 못하는 고가의 명품이었다.얼핏 봐도 수천만 원 이상은 호가하는 시계였다.수수한 옷차림에 명품 손목시계라니….이런 상황만으로도 이준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한 여자였다.이준은 눈부시게 새하얀 여자의 과거가 무척 궁금했다.“저기, 선생님.”이준이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여진을 불렀다.“네?”여진은 깊은 상념에 빠져 있었던 것처럼 저를 부르는 소리에 짐짓 놀라며 대답했다.“봄 요양병원에 어머니가 계신다고 들었어요.”“아, 네.”그랬다.여진의 엄마가 요양병원에 입원한 지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다.엄마는 오빠 윤태성이 검찰에 구속되고 그 충격으로 뇌출혈이 왔다.아버지는 새로운 사업을 해보겠다며 여기저기 투자자를 알아보느라, 엄마를 돌보지 못했다.어쩔 수 없이 여진이 엄마를 건사하게 됐다.집에서 가까운 괜찮은 요양병원을 수소문하다 보니, 자연스레 동네 사람들도 알게 되었다.“어머니 상태는 좀 어떠세요? 안 좋다고는 들었는데….”이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네…. 거동을 못 하세요.”여진의 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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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50화.끼익.택배 트럭이 요양병원에 도착했다.“잠시만 기다리세요.”이준은 안전하게 주차한 뒤 서둘러 밖으로 나와 보조석 문을 열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여진에게 팔을 내밀었다.여진은 그의 팔을 의지해 트럭에서 내렸다.“먼저 들어가세요. 전 물건을 꺼내야 해서요.”이준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태워다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호영이 삼촌.”“남이준이요.”“네?”“제 이름이요. 남이준이라고요. ‘호영이 삼촌’은 좀 나이 들어 보여서요.”멋쩍은 표정을 지은 채 이준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그의 얼굴이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붉게 변했다.“아, 죄송해요. 이준… 씨.”여진은 미안해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보통 공방에서 수업받는 아이들의 부모에게는 ‘어머님’, ‘아버님’이라는 호칭을 썼다.하나 이준은 여진과 비슷한 또래였고, 그의 이름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호영이의 삼촌이기에 ‘호영이 삼촌’이라고 불렀었다.그런데 그 호칭이 이준이 듣기 거북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죄송하긴요. 그런 말 들으려고 한 소리는 아니고요. 그냥… 선생님하고 저랑 나이도 비슷한 거 같아서 편하게, 편하게 부르라고 말한 거예요.”이준은 여진이 되려 미안해하자 손사래까지 치며 그녀의 미안함을 덜어줬다.그의 얼굴은 여전히 붉었다.“네, 앞으론 편하게 부를게요. 그래도 말해주셔서 감사해요.”여진은 이준의 순박한 모습에 엷게 웃으며 대답했다.***여진이 면회실에서 엄마를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간병인이 엄마가 누워있는 베드를 끌고 면회실로 들어왔다.의자에 앉아 있던 여진은 엄마를 보고 벌떡 일어났다.“엄마….”엄마를 본 여진의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여진은 일주일에 한 번 엄마를 보러왔는데, 엄마는 지난주보다 더 야위어 있었다.부잣집 안주인으로 부족함 없이 누리고 싶은 거 다 누리며 살아왔던 엄마였다.자랄 때부터 오빠와 편애하며 여진을 나 몰라라 했던 엄마였지만, 그래도 여진에게는 저를 낳고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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