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스물다섯으로 돌아온 날, 그 재벌이 나를 찍었다: Chapter 61 - Chapter 70

95 Chapters

61. 뒤집힌 포식자

​“윽, 컥……!”​소금 먼지가 섞인 차가운 흙바닥에 얼굴이 짓눌린 이영민은 단 한 줌의 공기도 제대로 들이마시지 못했다. 등허리를 짓누른 준호의 무릎은 거대한 바위 같았다. 이영민의 손발이 비참하게 버둥거릴 때마다 준호의 아귀힘은 목뼈가 부러질 듯 그의 덜미를 바투 조였다.​“누구야.”​낮게 가라앉은 준호의 목소리는 평소의 비서나 직원들에게 쓰던 정중한 존댓말 체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 안에 담긴 살기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섬뜩했다.​“이영민 씨. 당신 뒤에서 자금 대주고, 제이 납치하라고 부추긴 쥐새끼. 누구입니까.”​“내, 내가…… 미쳤다고 말할 것…… 아악!”​말끝이 채 맺어지기도 전에 준호가 그의 팔을 등 뒤로 꺾어 올렸다. 관절이 비틀리는 극심한 고통에 이영민의 비명이 텅 빈 염전 창고 천장을 때렸다. 준호의 눈동자는 이미 이성을 잃기 일보 직전이었다.​“말해.”​“윽! 끄으으윽……!”​“내 인내심 바닥내지 마세요. 내 여자가 이런 썩은 소금 구덩이에 갇혀 있었던 시간에 비하면, 당신 손가락 몇 개 부러지는 건 일도 아니니까.”​서늘하게 내려앉는 준호의 경고는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뼈가 어긋나는 둔탁한 마찰음이 울리자, 진짜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가 이영민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돈이고 배후고 간에, 당장 이 괴물 같은 정준호의 손귀에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사, 삼촌! 네 삼촌이라고! 정 부회장!”​이영민이 바닥을 긁으며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그분이 시켰어! 난 그냥 시키는 대로 사람만 보낸 거야! 돈도 다 그쪽에서 대줬단 말이야!”​준호의 움직임이 굳어졌다. 제이 역시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며 이영민을 매서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준호가 짓누르는 힘을 아주 미세하게 늦추자, 이영민이 흙먼지를 뱉어내며 거칠게 헐떡였다.​“정 부회장님이…… 구체적으로 뭐라고 지시했습니까.”​제이가 차갑고 일정한 톤으로 물었다. 이영민은 제이의 흔들림 없는 눈빛에 압도되어, 살기 위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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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선전포고

차갑게 식은 새벽안개를 뚫고 달리는 차 안에서, 제이는 조용히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거친 소금바닥을 짚었던 손끝에 여전히 미세한 모래알이 만져지는 듯했다. 몸 깊은 곳에서 피로가 묵직하게 밀려왔지만,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투명하게 가라앉아 있었다.회귀하기 전, 마흔다섯의 나이로 쓸쓸한 병실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시절의 자신이었다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그 시절 대기업의 정 회장이라는 존재는 하늘 위에 사는 신이나 다름없었다. 평생을 발버둥 쳐도 말 한마디 섞어볼 수 없었을 절대적인 권력자.​하지만 지금의 제이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기 위해 거대한 저택의 문을 열고 있었다.회장실의 묵직한 마호가니 문이 열리자, 은은한 침향 냄새와 함께 소리 없는 위압감이 사방을 압도했다.​정 회장은 이른 아침부터 흐트러짐 없는 정장 차림으로 집무실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흙먼지와 소금기가 미처 다 가시지 않은 제이와 준호의 옷차림에 닿았다.​“이 이른 시간에 예의도 없이 무슨 일이냐.”낮게 울리는 정 회장의 목소리에는 불쾌함과 동시에 손자의 행보를 시험하려는 엄격함이 서려 있었다. 준호가 한 걸음 나서려 했지만, 제이가 먼저 준호의 팔을 가볍게 누르며 정 회장의 정면으로 걸어 나갔다.“안녕하세요, 회장님. 이른 아침부터 정중하게 문안인사를 드리러 왔다고는 말씀드리지 못하겠네요.”“…….”“저희의 행색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사실 어제 납치를 당했었습니다.”폭탄 같은 선언이 비서도 없는 고요한 집무실 안을 강타했다. 정 회장의 희끗한 눈썹이 찰나의 순간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러나 제이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그 구차하고 더러운 곳을 빠져나와, 지금 바로 회장님을 뵙기 위해 달려오는 길입니다.”“…….”“회장님께서 저에게 계열사 사장 자리를 주시며 능력을 입증하라 하셨을 때, 저는 앞으로의 10년 계획을 머릿속에 이미 다 그려두었습니다.” ​“ 그리고 그 10년을 움직이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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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온기가 닿는 자리

​​정 회장의 저택을 나서는 순간부터 제이의 몸은 이미 한계를 가리키고 있었다.​평생을 물류 현장에서 구르며 단단해졌다고 믿었던 육체였다. 마흔다섯의 고단한 삶을 지나 다시 얻은 스물다섯의 육신은 분명 생기 넘쳤지만, 태안의 차디찬 염전 바닥에서 겪은 물리적 공포와 정 회장과의 피 말리는 독대까지 연이어 겪은 뒤였다. 극도로 팽팽하게 당겨졌던 신경의 끈이 느슨해지자마자, 머릿속이 아득해질 정도의 피로가 해일처럼 밀려왔다.​서울과 인접하면서도 삼촌의 감시망을 완벽하게 따돌릴 수 있는 곳. 준호가 택한 은신처는 인천 송도의 한 초고층 호텔 펜트하우스였다.​철컥, 육중한 객실 문이 잠기는 소리가 사막의 정적처럼 고요하게 내려앉았다.​통유리창 너머로 서해의 검푸른 바다가 아스라이 펼쳐졌지만, 제이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방 안의 따뜻하고 정돈된 공기가 온몸을 감싸는 순간, 그녀는 뼈가 마디마디 부서져 내리는 듯한 무력감을 느끼며 가죽 소파 위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마치 실이 끊어진 종이인형처럼 위태로운 모습이었다.​“제이 씨!”​준호가 황급히 다가가 제이의 마른 어깨를 감싸 안았다. 품에 안긴 몸이 깃털보다 가볍고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서늘한 가죽 소파 위에서 옅게 떨고 있는 제이의 이마에는 끈적한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평소라면 이 상황에서도 노트북부터 켜고 다음 수를 계산했을 여자였다. 제이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경련하는 것을 본 준호의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지독한 소유욕과 분노, 그리고 그녀를 잃을 뻔했다는 뒤늦은 공포가 소용돌이쳤다.​“준호 씨…… 난 괜찮아요. 잠깐, 잠깐 눈만 붙이면…….”​제이가 풀린 눈으로 간신히 입술을 뗐지만, 준호는 그녀의 말을 차갑게 잘라냈다.​“가만히 있어요.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준호는 가볍게 제이를 안아 올렸다. 저항할 힘조차 없는 제이는 그의 단단한 어깨에 뺨을 기댄 채 힘없이 흔들렸다.​준호가 그녀를 데려간 곳은 넓고 호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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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덫의 방아쇠를 당기다

송도 앞바다를 집어삼킨 해무는 아침이 되어도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고층 펜트하우스의 통유리창 너머는 온통 잿빛 안개뿐이었다. 세상을 차단한 듯한 고요 속에서, 창문을 두드리는 서늘한 습기가 미세하게 객실 안으로 스며들었다.제이는 가운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목의 붉은 줄 자국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준호가 꼼꼼히 발라준 연고 덕에 화끈거림은 가라앉았지만, 밧줄에 조여들던 순간의 감각은 여전히 피부 표면에 생생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신체적 피로보다 제이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거대한 역공의 판이었다.고급스러운 대리석 테이블 위에는 어제 태안의 눅눅한 염전 바닥에서 거칠게 굴러먹던 이영민의 싸구려 휴대폰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제이는 주머니에 두 손을 깊숙이 찔러 넣은 채 테이블 앞으로 가만히 걸어갔다. 인기척을 느낀 준호 역시 물컵을 내려놓고 그녀의 곁에 묵묵히 섰다. 간밤에 서로에게 기대며 나누었던 다정한 온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두 사람의 눈빛은 이미 사적인 감정을 완벽하게 걷어낸, 지독하리만큼 차갑고 냉철한 비즈니스 파트너의 그것으로 돌아와 있었다.제이가 손을 뻗어 먼지 낀 휴대폰의 전원을 켰다.화면이 켜지자마자 액정 위에 여러 개의 미확인 메시지 수신음이 끈질기게 울려댔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 하지만 최근 며칠간의 송수신 내역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채우고 있는 번호였다. 제이는 마른 침을 삼키며, 그 번호로 주고받은 마지막 문자 메시지들을 조용히 쓸어내렸다.[일은 끝났나?][왜 보고가 없어. 당장 연락해. 내 인내심 시험하지 마라.]어조는 명령조였고 거만했다. 발신인은 철저하게 추적을 피하고자 차명 휴대폰을 사용했겠지만, 이영민 같은 밑바닥 인간에게 천문학적인 거금을 쥐여주며 자신들을 납치하라고 등 떠밀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이영민이 제시간에 보고를 안 하니 피가 마르는 모양이네요."제이가 액정을 응시하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건조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그 어떤 두려움도, 감정도 배제되어 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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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채워지는 야심

본사 27층 대회의실, 정기 이사회가 예정된 시각이 다가오고 있었다.상석 옆, 늘 정준호의 이름이 적혀 있던 명패 자리가 오늘따라 유독 휑하게 비어 있었다. 비서실에서도 별다른 연락을 받지 못한 채, 그의 부재만이 확인되고 있었다.가장 상석, 오늘은 이례적으로 정 회장이 직접 자리했다. 평소 정기 이사회에는 좀처럼 얼굴을 비치지 않던 그였기에, 그 존재만으로도 회의실 안 공기는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정 실장, 오늘도 연락이 안 됩니까?"한 임원이 옆자리에 조용히 물었다."어제부터 완전히 두절이랍니다. 현제이 사장님도 함께 자취를 감췄고요.""두 분이 같이요?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닙니까?""그러게 말입니다. 비서실 쪽에서도 위치 파악이 전혀 안 된다고……."낮은 웅성거림이 회의실 안을 채웠다. 다들 서류를 뒤적이면서도 시선은 자꾸 그 빈자리와, 그 옆에 말없이 앉아 있는 정 회장의 얼굴을 번갈아 살폈다. 회장의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그 무거운 침묵 한가운데, 정 부회장이 여유로운 걸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정성스레 덧입혀져 있었지만, 눈빛 깊은 곳에는 숨길 수 없는 흥분이 일렁이고 있었다. 아버지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지금 이 순간에는 그에게 위축이 아니라 오히려 무대를 넓혀주는 판처럼 느껴졌다."아버지, 그리고 여기 계신 이사님들. 다들 걱정이 크실 텐데,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부회장이 정 회장을 슬쩍 곁눈질하며 운을 뗐다."조카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저도 애가 탑니다. 다만……."그는 잠깐 뜸을 들이며 좌중을 둘러보았다."이런 중대한 이사회를, 후계자라는 사람이 사전 통보 하나 없이 통째로 내팽개친다는 게, 과연 정상적인 일인지는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부회장님, 그래도 실종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실종이라면 더더욱 걱정입니다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요?"부회장이 말을 자르며 목소리를 높였다."신입사원 하나와 눈이 맞아서, 회사의 중대사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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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무너지는 승리

​부회장의 집무실은 오전 내내 분주했다.​증권사 담당자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고, 책상 위 모니터에는 실시간으로 변동하는 지분율 그래프가 떠 있었다. 부회장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헤친 채, 흡족한 얼굴로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오늘 아침 장에서만 3퍼센트를 더 확보했습니다. 이 추세라면 오늘 안에 정준호 실장 측 지분을 완전히 넘어설 수 있습니다."​담당자의 보고에 부회장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올라갔다.​"좋아. 계속 밀어붙여. 시장에 풀린 물량은 보이는 대로 다 쓸어 담아."​"다만, 대표님. 최근 매물로 나오는 지분들의 매도처가 조금 특이합니다. 대부분 특정 몇몇 개인 투자조합을 통해서만 나오고 있는데, 그쪽 실소유주 파악이 쉽지 않습니다."​"신경 쓰지 마. 파는 놈이 있으면 사면 그만이야. 어차피 지금 이 판에서 나한테 맞설 배짱 있는 놈은 없어."​부회장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저었다. 그는 이사회에서의 승리 이후 완전히 고삐가 풀려 있었다. 조카를 몰아세우고, 아버지 앞에서 판을 뒤집었다는 그 짜릿한 성취감이 그의 판단력을 무디게 만들고 있었다.같은 시각, 정 회장의 서재.묵직한 원목 책상을 사이에 두고, 준호가 정 회장과 마주 앉아 있었다. 겉으로 드러난 준호의 옷차림은 이틀 전 태안의 염전에서와 달리 흐트러짐 없이 단정했지만, 그 눈빛만큼은 여전히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이사회에서는 침묵을 지키시더군요."​준호가 낮게 운을 뗐다. 정 회장은 찻잔을 들어 천천히 한 모금 넘겼다.​"침묵이 아니라 관망이었다. 네가 스스로 이 판을 어떻게 풀어내는지 지켜보고 싶었으니까."​"제가 만약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면요."​"그랬다면 애초에 후계자 자리를 논할 자격조차 없었겠지."​정 회장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서랍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준호 앞에 밀어놓았다.​"네 삼촌이 최근 사들이고 있는 지분들, 그 매도처들을 한번 확인해 봐라."​준호가 서류를 펼쳤다. 나열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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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광대의 최후

​"……이, 이게 왜 너희 이름으로……."부회장의 손가락이 종이를 찢을 듯이 움켜쥐었다. 벌겋게 충혈된 눈이 떨리는 서류와 정준호를 번갈아 가며 쫓았다."말씀드렸잖아요."제이가 부회장의 책상 위에 놓인 만년필을 톡,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우리가 던진 미끼를 물어주셔서 감사하다고요.""닥쳐! 네까짓 게 감히 어디서……!""삼촌."준호가 한 걸음 다가서며 부회장의 시선을 차단했다. 그의 큰 체구가 드리운 그림자가 부회장의 머리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십니까? 삼촌이 오늘 쓴 돈, 전부 사채업자들에게 빌린 사채 아닙니까."부회장의 어깨가 크게 움츠러들었다. 정곡을 찔린 얼굴에 핏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계열사 자금까지 몰래 빼돌려 가면서 어떻게든 대주주가 되려고 하셨겠지요. 내일 아침 삼촌의 불법 주식 매집 뉴스가 나가는 순간, 그 사채업자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습니까?""이, 이…… 건방진 놈들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감히 나를 협박해? 회사는 내 거야! 너도 다 내 밑으로 기어 들어와야 한다고!"부회장이 책상 위의 서류들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서류 더미가 바닥으로 요란하게 흩어졌다. 그의 가슴이 미친 듯이 오르내렸다.제이는 그 꼴을 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그 사채업자들에게 돈을 빌려준 진짜 쩐주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날뛰시는 꼴이라니.""……뭐?"부회장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사채 시장의 큰손인 태성 파이낸스 아시죠? 삼촌이 오늘 급하게 끌어다 쓴 수백억의 출처."제이가 준호의 팔짱을 가볍게 끼며, 부회장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을 한마디를 던졌다."그 태성 파이낸스의 진짜 주인이 바로 저예요, 부회장님. 결국 삼촌은 제 돈을 빌려다가 제 주식을 아주 비싸게 사주신 거예요. 이자가 꽤 비쌀 텐데, 내일부터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그래요?"부회장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자신이 완벽한 승자라고 믿었던 이 방 안에서, 그는 그저 두 어린 남녀가 짜놓은 거대한 덫 속에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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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웃는 얼굴의 그림자

부회장이 끌려 나간 다음 날 아침, 본사는 폭풍이 지나간 뒤의 고요함으로 가득했다.밤새 뉴스 속보로 도배된 부회장의 구속 소식은 이미 전 임직원의 귀에 들어가 있었다. 27층 복도를 걷는 제이와 준호를 향한 시선들에는 더 이상 낙하산이나 애송이를 향한 무시가 담겨 있지 않았다. 오히려 경외와 두려움이 뒤섞인 눈빛들이었다."현 사장님, 정 실장님."익숙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두 사람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정 회장의 비서실장, 박진철이었다.올해로 이 회사에서만 사십 년째 일해온 그는, 정 회장이 젊은 시절부터 곁을 지켜온 산증인이었다. 희끗한 머리와 깊게 팬 눈가 주름 속에는 오랜 세월 쌓아온 노련함이 배어 있었다."어제는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두 분 덕분에 회사가 큰 위기를 넘겼습니다."박진철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태도는 흠잡을 데 없이 깍듯했다."부회장님 관련 뒷수습, 언론 대응까지 제가 맡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두 분은 그저 앞으로의 사업에만 집중하시면 됩니다.""감사합니다, 실장님."제이가 예의 바르게 웃으며 답했다. 준호 역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표면적으로는 지극히 평범하고 감사한 대화였다.박진철은 그 뒤로도 몇 마디를 더 이었다. 이사회 소집 일정, 언론 브리핑 초안, 부회장 소유 지분의 임시 처리 방안까지, 마치 이미 다 준비해둔 사람처럼 막힘없이 술술 풀어놓았다."참, 그리고 말씀드릴 게 하나 더 있습니다."박진철이 서류철을 열며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신선식품 사업 관련해서 제가 몇몇 지인분들 통해 자문을 좀 구해봤습니다. 아무래도 두 분께서 아직 이 거친 바닥의 생리를 다 겪어보지 못하셨으니, 궂은일은 이 늙은이에게 맡기시고 편하게 앞만 보고 나아가시면 됩니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제이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겉으로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한 채였다."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실장님."박진철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리를 떠난 뒤, 제이는 걸음을 멈추고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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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가면 뒤의 사냥개

​박진철이 데려온 외부 자문단은 오후 두 시 정각에 회의실에 도착했다.세 명 모두 화려한 이력서를 자랑했다. 유통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컨설턴트, 물류 시스템 전문 교수, 그리고 콜드체인 기술 특허를 여러 건 보유했다는 엔지니어. 서류상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조합이었다."이분들이라면 신선식품 사업의 초기 설계에 큰 도움이 되실 겁니다."박진철이 흐뭇한 얼굴로 소개를 마쳤다. 제이는 정중히 웃으며 자문단과 인사를 나눴지만, 대화가 이어질수록 미세한 위화감이 쌓여갔다.자문단은 하나같이 콜드체인 시스템의 핵심 설계도와 마이크로 거점의 위치, 자금 조달 구조 같은 세부 사항을 유독 캐물었다. 기존 물류망과의 호환성을 검토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수치라는 명분이 매번 앞서 붙었지만, 정작 사업의 방향성이나 전략에 대한 조언은 겉핥기 수준이었다.'실질적인 조언을 주려는 게 아니라, 정보를 캐가려는 거구나.'제이는 속으로 확신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티 내지 않고 오히려 더 상세하게, 조금은 부풀려진 숫자와 가짜 일정표까지 섞어가며 술술 풀어놓았다. 준호 역시 제이의 의도를 즉시 알아채고, 자연스럽게 맞장구치며 판을 더 크게 벌려주었다.회의가 끝난 뒤, 박진철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문단을 배웅했다."오늘 미팅이 아주 유익했던 것 같습니다. 두 분께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믿습니다.""실장님 덕분이에요.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제이가 흠잡을 데 없는 미소로 답했다. 박진철이 흡족한 얼굴로 자리를 뜬 뒤, 회의실에는 제이와 준호만 남았다.늦은 밤, 전 직원이 퇴근한 본사 건물은 적막했다. 제이는 사장실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낮 동안 완벽하게 유지했던 포커페이스가 풀리자, 잔뜩 긴장했던 어깨가 그제야 뻐근하게 저려왔다."수고했어요."준호가 조용히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짚었다. 커다란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근육을 천천히 풀어주었다."오늘 하루 종일 연기하느라 힘들었죠.""준호 씨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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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눈먼 사냥개의 덫

​다음 날 오전, 27층 대회의실에는 예산안 검토를 위해 임원진 전원이 소집되어 있었다.박진철은 상석 근처, 정 회장의 대리인 자리에 조용히 앉아 회의를 지켜보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참관일 뿐이었지만, 그의 시선은 시종일관 제이와 준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자문단에서 제안한 안대로, 초기 예산의 상당 부분을 냉장 설비 임대 쪽으로 돌리는 게 맞다고 봅니다."제이가 태블릿을 넘기며 말했다. 준호의 미간이 눈에 띄게 좁아졌다."임대는 장기적으로 훨씬 손해입니다. 처음부터 자체 설비를 구축하는 쪽이 맞다고 몇 번을 말씀드렸습니까.""실장님이 소개해주신 자문단 의견이 더 현실적이에요. 저희끼리만 판단하기엔 아직 경험이 부족한 부분도 있고요.""현 사장님."준호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지금 그 자문단이라는 사람들, 정말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된 사람들 의견에 이렇게까지 흔들리시는 게, 저는 이해가 안 갑니다.""저는 그저 열린 마음으로 여러 의견을 듣자는 거예요. 정실장님이야말로 왜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세요?"회의실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임원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침묵했다. 두 사람의 신경전이 이 정도로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은 처음이었다.몇몇 임원들은 곤란한 표정으로 시선을 아래로 떨궜고, 몇몇은 은근한 흥미를 감추지 못한 채 두 사람을 번갈아 살폈다.회사 내부에서 완벽한 파트너십을 자랑하던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는 소문은, 이 회의실을 나가는 순간 삽시간에 사내 전체로 퍼져나갈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소문이야말로 지금 두 사람이 노리는 진짜 미끼였다.박진철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는 찻잔을 들어 조용히 한 모금 삼키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틈이었다."오늘 안건은 여기까지 하고, 조금 더 검토한 뒤 다시 논의하는 게 좋겠습니다."박진철이 부드럽게 회의를 중재하며 자리를 정리했다. 임원들이 하나둘 회의실을 빠져나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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