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스물다섯으로 돌아온 날, 그 재벌이 나를 찍었다: Chapter 91 - Chapter 100

104 Chapters

91. 잦아든 폭풍

아침 일찍, 사장실로 공문 하나가 도착했다.밤새 뒤척였던 탓인지, 제이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부터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창밖으로 아직 옅은 새벽빛이 남아 있었다."사장님, 박진철 실장님 명의로 총회 안건 철회 공문이 왔습니다."비서의 목소리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제이는 서둘러 문서를 확인했다. 짧고 간결한 문장이었다.임시 주주총회 소집을 철회하며, 이사회 구성 변경 및 경영진 재신임 안건 역시 전면 철회한다는 내용이었다."드디어……."제이는 문서를 내려놓으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며칠 동안 그녀를 짓누르던 무게가, 그제야 조금씩 풀리는 듯 느껴졌다.준호가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의 표정에도 옅은 안도가 서려 있었다."방금 확인했습니다."그가 낮게 말했다."정지훈 씨가 어젯밤 늦게, 실장님을 직접 찾아가 뵀다고 하더군요.""두 분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는지, 아직 못 들었어요."제이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결과만 봐도, 어떤 대화였을지 짐작은 가네요. 밤새 한숨도 못 주무신 얼굴이셨을 텐데."준호가 그녀의 옆에 다가와 나란히 섰다.창밖으로 보이는 도심의 풍경이, 며칠 만에 처음으로 평온하게 느껴졌다.늘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공기가, 이제야 비로소 느슨해진 듯했다."실장님이 스스로 물러서실 줄은, 솔직히 예상 못 했습니다.""저도요."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끝까지 밀어붙이실 줄 알았는데, 마지막 순간에 멈추셨다는 게, 오히려 그분이 어떤 사람인지 다시 보게 만드네요.사십 년을 원망으로만 버텨온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쉽게 물러서지 못했을 거예요."오후, 정지훈이 사장실을 찾아왔다.그의 얼굴에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흔적이 역력했지만, 눈빛만은 어느 때보다 차분했다.손에는 낡은 봉투 하나가 조심스럽게 들려 있었다."두 분께 감사드립니다."그가 자리에 앉으며 낮게 입을 열었다."제가 부탁드린 걸, 끝까지 도와주셨으니까요.""저희가 도운 게 아니라, 스스로 해내신 거예요."제이가 옅게 웃으며 답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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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오랜만의 여유

박진철의 사무실, 오전.사십 년 동안 쌓여온 서류와 짐들이 상자 안으로 차곡차곡 들어가고 있었다.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하나하나의 서류철을 손끝으로 쓸어보며, 그 안에 담긴 시간들을 마지막으로 되짚어보는 듯했다.창밖으로 익숙한 사원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매일 아침 지나쳤던 복도였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다.이제 이 소리를 듣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 한구석을 아릿하게 만들었다.비서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다."이 서류들은 어떻게 할까요, 실장님.""인수인계 목록에 있는 것들은 후임자에게 넘기고, 개인적인 것들만 따로 챙겨주세요."박진철의 목소리는 담담했다.그는 책상 서랍을 하나씩 열어보며,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물건들을 발견하곤 했다.낡은 만년필, 색이 바랜 명함, 그리고 아주 오래전 정 회장과 함께 찍었던 사진 몇 장.그는 그 사진들을 한참 들여다보았다.젊은 시절의 자신과, 아직 세상의 무게를 다 짊어지기 전이었던 정 회장의 얼굴.그 시절에는, 이렇게 사십 년이 흘러 씁쓸한 이별을 앞두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그는 조심스럽게 그 사진들을 상자 안에 넣었다. 버리지 못할 기억이었다.원망도, 애정도 모두 담긴 그 시절의 조각들이었다."실장님."비서가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아쉬움이 옅게 스쳐 있었다."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박진철은 옅게 웃었다. 창밖에서 스며드는 아침 햇살이, 그의 지친 얼굴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나야말로, 자네들 덕분에 오래 버틸 수 있었지. 고생 많았네."그는 사무실을 마지막으로 한 번 둘러보았다.사십 년 동안 그의 하루하루가 담겨 있던 공간이었다.창가의 화분, 벽에 걸린 낡은 시계, 늘 앉아 있던 그 자리까지, 모든 것이 그의 시선 속에 천천히 담겼다.이제 이 방을 나서면,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그는 상자를 양손으로 안아 들고, 천천히 문을 향해 걸어갔다.문턱을 넘기 직전, 그는 다시 한번 뒤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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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남기고 가는 것들

박진철의 마지막 출근일이 다가오면서, 사내 곳곳에서는 그와의 작은 작별들이 이어지고 있었다.복도를 오갈 때마다, 그를 알아본 직원들이 걸음을 멈추고 인사를 건넸다.어떤 이는 그저 고개를 숙였고, 어떤 이는 조심스럽게 다가와 짧은 감사의 말을 남기고 갔다.몇몇 젊은 직원들은 그의 얼굴조차 낯설어했지만, 그마저도 세월의 흐름을 실감케 하는 풍경이었다.사십 년이라는 세월이 이 회사 곳곳에 얼마나 깊이 스며 있었는지, 그는 그제야 새삼 실감하고 있었다.오랫동안 그와 함께 일해온 재무팀장이 먼저 그를 찾아왔다.두 사람은 회의실에 마주 앉아, 오래된 프로젝트 이야기부터 시작해 지나온 세월을 하나씩 되짚었다.창밖으로 비치는 오후 햇살이 회의실 테이블 위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실장님 밑에서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재무팀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숫자만 보던 저한테, 사람을 먼저 보라고 가르쳐주신 분이셨죠."박진철은 옅게 웃었다."내가 언제 그런 거창한 말을 했나. 그냥 잔소리였을 텐데.""아닙니다. 실장님이 하신 말씀들, 지금도 종종 떠올립니다.힘든 협상 앞에서는 항상, 숫자보다 사람의 사정을 먼저 헤아리라고 하셨잖아요.그 말씀 덕분에 제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습니다."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차를 마셨다. 회의실 안에는 오랜 세월 함께 쌓아온 신뢰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오후에는 물류 현장 관리자들이 단체로 찾아왔다.사십 년 가까이 박진철과 함께 현장을 뛰어온 이들이었다.거친 손과 볕에 그을린 얼굴들이 회의실 문 앞에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박진철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그들은 낡은 사진첩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저희끼리 몰래 모은 겁니다."한 관리자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실장님이랑 같이 찍은 사진들, 죄다 모아봤어요. 다들 한 장씩 갖고 있던 걸 긁어모으느라 애 좀 먹었습니다."박진철은 그 사진첩을 천천히 넘겨보았다.젊은 시절의 자신과, 지금은 은퇴했거나 세상을 떠난 동료들의 얼굴이 빼곡히 담겨 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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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낯선 저녁 식사

박진철이 떠난 다음 날, 정 회장은 뜻밖의 제안을 했다."오늘 저녁, 혹시 시간 있느냐."전화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에, 정지훈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사무적인 용건이 아니라, 그저 저녁을 함께하자는 말이었다.사십 년 넘게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종류의 제안이었다.회사 일도, 유산 문제도, 그 어떤 무거운 안건도 없이, 그저 밥 한 끼를 나누자는 말이 이토록 낯설게 들릴 줄은 그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다."……있습니다."그가 겨우 답했다."그럼, 오늘 저녁 일곱 시에 본가로 오너라."전화를 끊은 뒤에도 정지훈은 한동안 휴대폰을 손에 쥔 채 가만히 서 있었다.다실에서의 격정적인 첫 만남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초대였다.그저 평범한 부자지간이 나눌 법한, 지극히 일상적인 자리였다.그는 옷장 앞에 서서, 오늘 무엇을 입어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사십 년 넘게 준비해온 만남이었지만, 정작 이런 사소한 고민은 처음이었다.결국 그는 가장 무난한 셔츠를 골라 입고, 몇 번이고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저녁 일곱 시, 정 회장의 넓은 본가.가사도우미가 조용히 상을 차리고 물러났다.넓은 식당에는 정 회장과 정지훈, 단둘만이 마주 앉아 있었다.상 위에는 화려하지 않은, 담백한 한식 반찬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은은한 조명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나란히 벽에 드리워져 있었다."입에 맞을지 모르겠구나."정 회장이 먼저 수저를 들며 말했다."미국에서 오래 살았으니, 이런 음식이 낯설 수도 있겠지.""아닙니다."정지훈이 수저를 들며 답했다."어머니가 늘 한식만 해주셨어요. 오히려 이런 음식이 저한테는 더 익숙합니다.특히 이 나물 무침은, 어머니가 자주 해주시던 것과 맛이 비슷하네요."그 말에 정 회장의 손끝이 미세하게 멈췄다.하지만 그는 애써 담담한 얼굴로 식사를 이어갔다.그의 시선이 잠시 정지훈의 젓가락질을 향했다가, 다시 조용히 거두어졌다.식사는 조용히 진행되었다.두 사람 다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알지 못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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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태평양을 다시 건너며

인천공항 출국장, 이른 아침의 서늘한 공기.박진철은 캐리어 하나만을 끌고 게이트 앞에 서 있었다.사십 년 넘게 몸담았던 회사도, 익숙했던 서울의 풍경도, 이제 그의 뒤편에 남겨질 것들이었다.어제까지도 분주했던 마음이,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공항 안은 이른 시간임에도 여행객들로 분주했지만, 그의 주변만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게 느껴졌다.정지훈이 배웅을 나왔다.그의 손에는 작은 종이가방 하나가 조심스럽게 들려 있었다. 새벽부터 일부러 시간을 내어 나온 걸음이었다."이거, 어머니 갖다 드리세요, 꼭이요."정지훈이 그것을 내밀며 말했다."제가 좋아하던 한과예요. 한국 오시면서 사 오셨던 그 가게 거요.기억하시죠? 어릴 때부터 실장님이 오실 때마다 늘 사 오시던 그거요."박진철은 그 가방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며 옅게 웃었다."기억하다마다. 네가 어렸을 때, 이 한과 하나 때문에 울고불고했던 것도 기억하는데.그 조그맣던 녀석이 벌써 이렇게 컸구나.""그때 얘기는 그만하세요."정지훈이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오랜만에 편안한 웃음이었다.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공항의 아침 안내 방송이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채웠다.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도 드문드문했다."실장님."정지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저는, 당분간 한국에 좀 더 남아 있으려고 합니다."박진철의 눈빛이 흔들렸다."회사 일 때문이냐.""아니요."정지훈이 고개를 저었다."정 회장님을, 조금 더 알아가 보고 싶어서요.어제 처음으로, 단 둘이서만 저녁을 먹었습니다.낯설었지만, 나쁘지 않았어요. 정원도 함께 걸었는데, 어머니가 좋아하셨던 곳이라고 하시더라고요."박진철은 그 말에 잠시 시선을 떨궜다.복잡한 감정이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안도와 씁쓸함, 그리고 어쩌면 옅은 질투까지도.사십 년 동안 홀로 짊어져온 그 이름이, 이제 다른 사람의 입에서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있었다."그래야지."한참 만에, 그가 낮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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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처음 하는 데이트

임원 회의실, 오전.콜드체인 사업 확장안을 검토하는 자리였다.회의실 스크린에는 최근 몇 주간의 매출 그래프와 배송 데이터가 나란히 띄워져 있었다.재무팀장이 자료를 넘기며 조심스럽게 우려를 꺼냈다."사장님, 이 무료배송 정책 말입니다. 파 한 단을 이천 원에 파는데, 배송비를 안 받으면 그건 사실상 손해 아닙니까?배송 기사 인건비에 유류비까지 생각하면, 건당 손실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몇몇 임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아직 이 시대에는, 온라인으로 신선식품을 주문하고 배송비까지 무료로 받는다는 개념 자체가 낯설었다.대형 유통사들도 소량 배송에는 반드시 별도 요금을 부과하던 시절이었다."이해합니다."제이가 차분하게 답했다."파 한 단만 시켰을 때는, 당연히 배송비를 따로 받아야죠. 그건 저희도 그렇게 설계했습니다.다만 오해가 있으신 것 같아서, 구조를 다시 설명드리겠습니다.""그런데 왜 무료배송이라고 광고를 하시는 겁니까?""최소 주문 금액을 채우면, 그때부터 무료배송이 적용되는 구조예요."제이가 화면에 표를 띄우며 설명을 이어갔다."삼만 원 이상 주문하시면 배송비를 받지 않습니다.그럼 소비자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필요한 걸 한 번에 모아서 주문하게 되죠.파 한 단이 아니라, 일주일 치 장을 한 번에 보는 겁니다.그러니까 저희가 손해를 보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객단가를 자연스럽게 끌어올리는 구조예요.""그래도 그 삼만 원어치를 배송하는 비용이, 배송비보다 더 들지 않겠습니까?"물류본부장이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그의 옆에 앉은 다른 임원들도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단건 배송 몇 번보다, 묶음 배송 한 번이 훨씬 효율적입니다."제이가 단호하게 답했다."저희 마이크로 거점 시스템은 이미 그걸 계산해서 설계됐어요.배송 건수를 줄이는 대신, 건당 물량을 늘리는 거죠.그게 이 사업의 핵심입니다. 지금 이 방식이 낯설게 느껴지시겠지만, 조금만 지나면 이게 표준이 될 거예요."회의실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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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첫 결실

콜드체인 사업 정식 출범 한 달째, 사장실로 이번 달 실적 보고서가 올라왔다.제이는 보고서를 펼쳐 들고 한동안 말없이 숫자들을 훑어 내려갔다.재구매율, 평균 객단가, 배송 만족도까지, 모든 지표가 예상치를 웃돌고 있었다.창밖으로 화창한 오후 햇살이 사장실 안으로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사장님, 이 정도면 업계에서도 이례적인 수치입니다."기획조정실장이 흥분한 목소리로 보고를 이어갔다. 그의 손끝에는 두툼한 보고서 뭉치가 여러 장 들려 있었다."경쟁사들도 벌써 저희 방식을 벤치마킹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합니다.마이크로 거점 시스템에 대한 문의가 벌써 여러 곳에서 들어오고 있고요.심지어 해외 유통사에서도 관심을 보인다는 소문이 있습니다.이 추세라면, 다음 분기 매출 목표도 상향 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네요."제이가 나직이 중얼거렸다.회귀 전 미래에서는 훨씬 나중에야 보편화됐던 방식이, 지금 이 시점에 벌써 시장의 표준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그녀가 갖고 있던 확신이, 이제 눈앞의 숫자로 증명되고 있었다.처음 이 사업을 밀어붙일 때 쏟아졌던 회의적인 시선들이, 이제는 감탄으로 바뀌어 있었다.그때 준호가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경제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이거, 오늘 아침 자 신문입니다."그가 신문을 조심스레 펼쳐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일면 머리기사에, 콜드체인 신선식품 배송 시장의 새로운 강자로 회사의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기사 아래로는 마이크로 거점 시스템을 도식화한 그래픽까지 크게 곁들여져 있었다."드디어 세상에서 제대로 인정받는 것 같아요."제이가 옅게 웃으며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이영민이 훔쳐 가려던 그 시스템이, 결국 이렇게 시장을 뒤흔들게 됐네요.그때는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모든 게 다 당신 손끝에서 시작된 겁니다."준호가 그녀 옆에 앉으며 말했다."저는 그저, 옆에서 조금 거들었을 뿐이고요.""그렇게 겸손하게만 말씀하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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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우리 둘 차례

며칠 뒤 어느 토요일 저녁, 준호에게서 갑작스러운 문자가 왔다.오늘 저녁 일곱 시, 회사 앞으로 나와줄 수 있습니까. 편하게 입고 나오세요.제이는 그 짧은 메시지를 몇 번이고 다시 곱씹어 읽었다.평소와 다른, 묘하게 들뜬 듯한 문체였다.그녀는 옷장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가장 편안하면서도 마음에 쏙 드는 원피스를 골라 입었다.며칠 전 밤길에서 그가 남긴 알 수 없는 말이, 하루 종일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약속 시간에 정확히 맞춰 회사 앞으로 나가자, 준호가 이미 차를 세워두고 기다리고 있었다.평소의 단정한 슈트 차림이 아니라, 캐주얼한 니트에 재킷을 편안하게 걸친 모습이었다.그런 그의 모습을 오랜만에 보는 것도, 새삼 반가운 일이었다."오늘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이렇게 나오라고 하시니까 좀 이상하잖아요."제이가 차에 오르며 물었다."가보시면 압니다."준호가 옅게 웃으며 답했다.그의 눈빛에는 평소와 다른 긴장감이 살짝 스쳐 있었다.제이는 그런 그의 모습을 힐끗 살피며, 오늘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속으로 이런저런 짐작을 해보았다.차는 도심을 벗어나 한적한 교외로 향했다.창밖으로 노을이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이 펼쳐졌다.한 시간 남짓 달린 끝에, 차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 위에 멈춰 섰다."여기는……."제이가 차에서 내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언덕 위에는 작은 테이블 하나가 준비되어 있었다.은은한 조명과 촛불이 테이블 주위를 감싸고 있었고, 저 멀리로 강물 위에 반짝이는 노을빛이 눈부시게 펼쳐져 있었다.테이블 위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꽃들로 소박하게 꾸며진 작은 화병도 놓여 있었다.준호가 이 모든 걸 준비하기 위해 얼마나 신경 썼을지,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풍경이었다."준호 씨, 이거 다…….""당신이랑 처음으로 진짜 데이트를 했던 그날, 다음엔 더 특별한 곳으로 데려오겠다고 약속했잖아요."준호가 그녀의 손을 잡아 이끌며 테이블로 안내했다. 그의 손끝이 평소보다 조금 더 뜨겁게 느껴졌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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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반가운 소식

다음 날 아침 일찍, 제이는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몇 번이고 내려다보았다.어젯밤의 기억이 여전히 꿈결처럼 느껴졌다.창밖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이 반지 위에 부딪혀 은은하게 빛났다."실감이 안 나요."그녀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준호가 그녀 옆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조심스럽게 건네며 옅게 웃었다."저도 그렇습니다. 몇 번이나 연습했는데도, 막상 그 순간이 되니 머릿속이 하얘지더군요.""연습까지 하셨어요?"제이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럼요. 거울 앞에서 몇 번이나 대사를 맞춰봤는지 모릅니다.그런데도 막상 당신 얼굴을 보니까, 준비했던 말은 다 어디로 가고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그냥 말하게 되더군요."준호가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제이는 그 모습이 우스워 웃음을 터뜨렸다."준호 씨도 그렇게 긴장할 때가 있으시네요. 평소엔 그렇게 침착하시더니.""당신 앞에서는, 늘 그렇습니다."그날 오후, 두 사람은 정 회장의 본가를 함께 찾았다.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마침 정지훈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요즘 들어 부쩍 자주 이 집을 드나드는 그였다."저희,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준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 회장과 정지훈의 시선이 동시에 두 사람에게 향했다.제이가 왼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반지가 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였다.정 회장의 눈이 커졌다."이거…….""어제, 제가 청혼했습니다."준호가 담담히 말했다."제이 씨가, 받아주셨고요."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정 회장의 얼굴에 오랜만에 보는, 환한 웃음이 번졌다.그의 주름진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드디어……."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의 손을 조심스럽게 맞잡았다."드디어 좋은 소식을 듣는구나.요즘 이 늙은이한테 이런 기쁜 소식이 연달아 찾아오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다.지훈이가 돌아온 것도, 회사가 이렇게 자리 잡은 것도, 이제 너희 둘까지, 이보다 더 감사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정지훈도 환하게 웃으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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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낯익은 통증

건강검진 예약일 아침, 제이는 준호와 함께 서둘러 병원을 찾았다.이른 시간이었지만, 대기실에는 벌써 여러 사람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긴장하지 마세요."준호가 대기실 의자에 나란히 앉은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매년 이맘때쯤 받던 거잖아요.""긴장 안 해요, 정말로요."제이가 옅게 웃으며 답했다.하지만 그녀의 손끝은 미세하게 차가웠다.회귀 전, 이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를 맡을 때마다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마흔다섯의 나이로 마주했던 그 진단명, 그리고 이미 손쓸 수 없었던 그 순간이.그때는 증상이 나타나고도 한참을 미루다가, 결국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병원을 찾았었다.이번 생에서는 다를 거라고, 그녀는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매년 거르지 않고 검진을 받아온 것도, 결국 그 오래된 두려움 때문이었다.간호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제이는 옅게 숨을 고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진료실 문을 향해 걸어가는 그녀의 발걸음이 조금씩 무거워졌다."다녀올게요.""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준호가 그녀의 손을 놓아주며 답했다.그의 시선이 그녀가 진료실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오래도록 그 문을 향해 있었다.내시경 검사가 끝난 뒤, 의사가 화면을 가리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흐릿한 모니터 화면 위로 위 내벽의 사진들이 여러 장 떠 있었다."위 안쪽에서 작은 병변이 하나 발견됐습니다."제이의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 익숙한 그 단어가, 오래된 두려움을 순식간에 되살렸다."조직검사를 진행해봐야 정확히 알겠지만, 크기나 위치로 봤을 때 초기 단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다행히 증상이 거의 없으셨는데도 이렇게 일찍 발견하신 게, 정말 다행입니다.보통은 이런 초기 병변은 스스로 알아채기가 쉽지 않거든요."제이는 화면 속, 작게 표시된 그 병변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손끝이 저릿하게 떨려왔지만, 그녀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다.대기실로 나온 준호가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다가왔다."어떻게 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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