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유봄은 차트를 넘기며 VIP 병동 복도를 걸었다.며칠 전 인공로봇수술을 집도했던 환자, 한국대학교 원로교수 안기철의 병실 앞에 멈춰 섰다.가볍게 노크를 하고 들어서자 창가에 앉아 있던 노교수가 고개를 들었다.“교수님, 오늘은 좀 어떠세요?”안기철은 주름 깊은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자네가 수술해줬는데 괜찮지 않을 수가 있나?덕분에 통증도 많이 줄었네.”“회복 경과 아주 좋으세요. 수술 부위도 깨끗하고요.”그는 한참 유봄을 바라보더니 문득 눈을 반짝였다.“그런데 말이야, 아직 결혼 전이면… 우리 아들 한 번 만나볼 생각 없나?”뜻밖의 말에 유봄이 웃음을 터뜨렸다.“교수님 아드님이면… 정형외과 안영찬 교수님 말씀이세요?”“그래, 그래! 그 녀석도 자네처럼 공부만 해서 아직 여자가 없어.집에 오면 연구 이야기밖에 안 한다니까.”유봄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안영찬 교수님 여자들한테 엄청 인기 많으신데요? 그럴 리가요. 다시 알아보세요. 분명 있으실 거예요.”“없다니까. 내가 아비인데 모르겠나.”“저한테까지 기회가 안 올걸요.”농담처럼 말하자 안기철의 병실에 부드러운 웃음이 번졌다.유봄은 차트를 덮으며 말했다.“회복 속도 보니까 이틀 뒤엔 퇴원하셔도 될 것 같아요.식사 잘하시고, 조금씩 걷는 운동도 하세요.”“알겠네, 우리 주치의 선생.”그는 흐뭇한 눈으로 유봄을 바라봤다.유봄은 정중히 고개
호텔방은 지나치게 조용했다.조금 전까지 살던 집에서 쫓겨나듯 나왔다는 사실이 현실감 없이 공기 속에 떠 있었다.캐리어는 대충 벌려져 있고 옷은 반쯤 쏟아진 채였다.김지숙은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창가에 서 있었다.“이게 다 강철수 그 인간 때문이야.그 인간만 아니었어도”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내가 가만 안 둬.”침대에 털썩 주저앉은 유지원은 그 말을 듣다가 고개를 들었다.눈은 이미 퉁퉁 부어 있었다.“…왜 그랬어.”김지숙이 돌아봤다.“뭐가.”“왜 친아빠 버리고 그 집으로 가서 내가 친딸이라고 거짓말했어.”목소리가 갈라졌다.“이게 뭐야, 지금.다 끝났잖아.”김지숙의 얼굴이 굳었다.“내가 누구 때문에 그랬는데?”“……”“다 너 때문이야.네가 잘됐으면, 네가 똑바로 했으면 병원에서 쫓겨났겠어?”그 말은 비수처럼 꽂혔다.유지원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의사도 아니고, 집도 없고, 아버지도 사라졌고 자신이 서 있던 자리들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린 느낌이었다.김지숙은 한숨을 내쉬며 가방을 집어 들었다.“일단 나가서 밥부터 먹자.이러고 있어봐야 달라지는 거 없어.”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엄마가 그동안 챙겨둔 돈이 있어.조그만 아파트 하나는 살 수 있어.다시 시작하면 돼.”
전화가 끊기고 방 안은 조용해졌다.수술 케이스가 펼쳐진 책상 위로 스탠드 불빛만 고요히 내려앉아 있었다.유봄은 한동안 휴대폰을 쥔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할아버지의 떨리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우리 봄이 얼마나 외로웠을꼬…그 한마디가 마음 깊숙한 곳을 건드렸다.엄마가 떠난 날 이후 집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거실에서는 늘 웃음소리가 들렸다.김지숙과 유지원, 그리고 아버지 유재원의 웃음.그 웃음은 자신을 향한 적이 없었다.유봄은 조용히 방문을 조금 열고 그 모습을 훔쳐보곤 했다.소파에 나란히 앉아 과일을 먹으며 웃던 세 사람.아버지는 유지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그 웃음은 예전엔 자신의 것이었다.그걸 깨닫는 순간마다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아무도 모르게 다시 방문을 닫고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울음소리가 새어나갈까 봐 입술을 깨물고 베개를 끌어안고 숨죽여 울던 밤들.“아빠…”불러도 오지 않는 이름을 속으로만 수십 번 되뇌었다.그 어린아이는 슬프다고 말하는 법도 몰랐다.더 미원할까 봐,혹은 더 싫어질까 봐.그 시절의 공기가 지금 이 방 안으로 스며든 것처럼 가슴이 먹먹해졌다.눈물이 소리 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유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아파트 거실 창으로 다가가 커튼을 젖히자 밤의 한강이 보였다.잔잔한 물 위에 도시의 불빛이 길게 흔들리고 있었다.저 물은 저렇게 아무 일 없다는 듯 흐르는데 자신의 시간은 그날 이후로 한동안 멈춰 있었던 것 같았다.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한 번,그리고 또 한 번.“괜찮아&he
서재는 적막했다.불도 켜지 않은 채, 유재원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손에는 오래된 사진 한 장.어린 유봄이 그의 넥타이를 붙잡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아직 앞니가 다 나지 않은 채, 아빠를 세상 전부처럼 바라보던 눈.그 눈을, 그는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했다.퇴근하면 현관까지 달려 나오던 작은 발소리.“아빠!” 하고 매달리며 하루 있었던 일을 숨도 안 쉬고 떠들던 목소리.그때 옆에서 웃으며 말하던 여자.최진희.수술복을 입고 나란히 서서 환자 차트를 들여다보던 아내.어려운 케이스를 두고 밤늦도록 의논하던 동료.수술이 성공하면 누구보다 먼저 그의 어깨를 안아주며 “수고했어요” 하고 웃어주던 사람.그 여자가, 어느 날 그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그 여자… 어떻게 할 거예요.”김지숙을 만나고 돌아온 날이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리고 최진희는 끝내 말했다.“당신이라도…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 말은 원망이 아니었다.체념이었다.자신을 붙잡지 않는, 그저 남편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지막 배려였다.그런데 그는 그 배려를 짓밟고 돌아섰다.김지숙의 말만 믿고.눈물과 연기를 진심으로 착각하고.자신의 딸도 아니었던 아이를 위해 자기 피로 태어난 딸을 밀어냈다.사진 속 유봄이 웃고 있었다.하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면, 어느 순간부터 그 아이는 웃지 않았다.조용해졌고, 묻지 않았고, 기대하지 않았다.“아버지에겐… 아무 기대도 없어요.”차갑게 말하던 딸의 목소리가 서재 안을 가득 채웠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유재원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현관에 서 있던 김지숙이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오늘은 왜 이렇게 늦었어요? 지원이 일은”“앉아.”짧고 낮은 말.김지숙은 순간 심장이 철렁했지만, 혹시 유지원에게 좋은 소식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기대를 안고 소파에 앉았다.유재원은 말없이 서류봉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당신… 나한테 속인 거 없어?”김지숙의 눈이 흔들렸다가 이내 표정을 고쳤다.“내가 왜 속여요? 무슨 말이에요.”유재원은 봉투에서 종이를 꺼내 그녀 앞에 밀어놓았다.유전자 검사 결과지.김지숙의 손이 떨렸다.한 줄 한 줄 내려가던 시선이 ‘불일치’라는 단어에서 멈췄다.“이, 이게 뭐예요…? 조작이잖아요. 이거 강철수 그 인간이 준 거죠? 그 사람 말 믿지 말아요!”“내가 했어.”차갑게 잘린 말.유재원은 손가락으로 결과지의 수치를 짚었다.“여기. 0. 전부 0이야.”그의 눈이 붉게 충혈돼 있었다.“당신이 인간이야?”김지숙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아니야… 이건 뭔가 잘못된 거예요…”“당신 행복하려고 몇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 거야!”유재원의 목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당신 때문에 내가… 내가…”말을 잇지 못했다.그동안 믿었던 세월
집앞 골목은 유난히 고요했다.강철수는 차를 천천히 세우며 시동을 끄려는 순간 차창 너머로 검은 그림자가 스쳤다.문을 열고 내리려는 찰나, 한 남자가 거칠게 다가오더니 말 한마디 없이 품에서 칼을 꺼내 그의 복부를 향해 내질렀다.“이 자식”강철수는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다.날카로운 칼끝이 옷자락만 스치고 지나갔다.남자의 숨은 거칠었고, 눈에는 살기가 서려 있었다.두 사람은 그대로 엉켜붙었다.강철수가 남자의 손목을 붙잡고 힘껏 비틀자 칼날이 허공에서 흔들렸다.그러나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어깨를 밀치며 다시 칼을 겨누려 했다.“누가 보냈어!”강철수의 낮고 분노 섞인 목소리가 골목에 울렸다.남자는 대답 대신 이를 악물고 몸을 덮쳐왔다.둘은 차 옆에 부딪히며 넘어질 듯 휘청였다.칼이 다시 번뜩였다.이번엔 옆구리를 스치며 얕은 상처를 남겼다.피가 번졌다.강철수는 이를 악물고 마지막 힘을 짜내 남자의 손목을 차문에 세게 부딪혔다.금속음과 함께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를 밀쳐내자, 남자는 균형을 잃고 뒤로 물러섰다.멀리서 차 한 대가 들어오는 헤드라이트 불빛이 번쩍이자 남자는 욕설을 내뱉으며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강철수는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떨어진 칼을 노려보았다.손으로 옆구리를 짚자 따뜻한 피가 묻어났다.그의 머릿속에 스친 얼굴.김지숙.그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강철수는 김지숙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그동안은 참고 또 참았다.과거를 들추고 싶지 않았고, 스스로 선택한 침묵이라 여겼다.하지만 자신의 목숨까지도 하찮게 여기는 김지숙을 보고 이제는 가만히 있을 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