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연옥화(軟玉花) — 향이 없는 꽃: Chapter 151 - Chapter 160

215 Chapters

151화 손톱

뒤채 담 밑으로 회양목 그늘이 길게 누웠고, 그 그늘 끝에서 한경이 등을 하나 내려놓고 쪼그려 앉아 댓돌 오른쪽 귀퉁이를 손끝으로 문지르고 있었다.낮에 소하가 두고 간 종이는 소매 안쪽에 접어 넣어 두었는데, 접은 자리가 두꺼워 팔을 움직일 때마다 손목뼈에 걸렸다.행랑 쪽에서 발소리가 고르게 오다가 회양목 앞에서 멎었다."…부인."분이어멈이 등을 들고 서 있었다.부른 사람이 없는데도 옷을 갖춰 입고 나온 차림이었고, 신은 마른 것으로 신었다."어멈. 이리 와서 앉아요.""…소인은. 소인은 서 있겠습니다.""저 두레박 줄 누가 갈았어요."분이어멈이 우물 쪽을 봤다가 도로 부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소인이 갈았습니다. 지난달에요.아니, 지지난달입니다.""잘 갈았네.""부인. 이것 좀 봐 주십시오.""가만있어 봐요. 등 이리 줘요."분이어멈이 등을 건네고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넉 달 전 그 방에서는 손바닥을 뒤집는 데만 한참이 걸렸는데, 오늘은 그 손이 먼저 나왔다.한경이 등을 그 손 아래로 가져갔다.손톱 열 개의 뿌리 쪽에 맑은 자리가 반달만큼 올라와 있었고, 스무 해 묵은 회색은 그 위로 밀려 손끝 쪽에 가 있었다."이 자리가 요새 이렇습니다.씻으라 하신 대로 두 번씩 씻고 천은 매일 빨아서 감았는데, 씻을수록 여기가 이렇게 하얘집니다.소인은 처음에 살이 벗겨지는 줄로 알았습니다.""아. 그거 새로 나오는 거예요.""…새로 나옵니까.""응. 밑에서 올라오는 데는 이제 아무것도 안 묻거든요."한경이 등을 두 사람 사이의 댓돌 위에 내려놓았다.분이어멈이 제 손을 그 불빛에 더 가까이 가져갔다가 도로 내렸다.* * *우물 쪽에서 물방울이 한 번 떨어지고 나서 마당이 도로 조용해졌다.회양목 잎이 밤바람에 서걱거렸고, 담 너머 행랑에서 누가 기침을 두 번 했다."부인.""응.""이 어멈이 넣은 것이 사람을 상하게 합니까."한경이 그 얼굴을 봤다.여자의 눈이 부인의 눈에 와 있었는데, 넉 달 전에 이 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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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화 스물여덟 해

수라간 쪽에서 물 끓는 소리가 먼저 왔다.궁문이 열린 지 얼마 안 된 시각이라 회랑 끝의 등롱이 아직 꺼지지 않은 채로 낮게 흔들렸고, 해가 뜨려면 아직 멀었고, 기둥과 기둥 사이가 검푸른 채로 있었다.등롱 밑에 류 상궁이 서 있었다.뒤에 아무도 없었고 손에 든 것도 없었다.한경이 입은 것은 남색 마면군에 옅은 자색 적삼이었고, 새벽 기운이 돌아 그 위에 잿빛 배자를 하나 걸친 차림이었다.깃이 낮고 소맷부리 끝동에는 은실로 놓은 넝쿨이 있었는데, 앞서 걷던 문지기가 등롱 든 손을 아래로 내리자 불빛이 치맛단에서 깃 쪽으로 거꾸로 올라왔고, 한경이 고개를 돌리는 동안 은실 몇 올이 떴다가 도로 가라앉았다."부인.""예.""…소인이 이 시각에 여기 나와 설 자리가 아닌 줄은 소인도 압니다.""예.""예. 예. 문 여는 시각을 소인이 잘못 들었나 하고, 어제 새벽에도 한 번 나와 봤습니다."류 상궁이 소매 안에서 무엇을 꺼내려다 놓쳤다.접힌 종이가 회랑 바닥에 떨어지면서 반쯤 펴졌고, 상궁이 그것을 줍는데 손끝이 두 번 미끄러졌다.다 줍고 나서 귀뿌리가 붉었다."어. 그 종이 말고요. 상궁님 손이요. 바닥이 차요."류 상궁이 종이를 도로 소매에 넣었다.넣고 나서 두 손을 앞으로 모으는데 소맷부리 한쪽이 접혀 올라간 채였고, 상궁이 그것을 내리지 않았다.* * *회랑을 돌자 수라간 뒷마당이 나왔다.담 아래 시렁에 물린 그릇이 엎어져 있었는데 큰 것에서 작은 것 순으로 줄이 맞았고, 줄 끝의 대접 하나만 비뚜름하게 놓여 있었다.안에서 사람 여럿이 오가는 소리가 나는데도 밖으로는 말소리가 하나도 새어 나오지 않았고, 문턱 옆 함지에서 김이 곧게 올라가다가 처마 밑에서 옆으로 꺾였다."저 대접이요. 저건 오늘 거네요.""…소인이요?""아. 상궁님 말고 대접이요.뒤가 아직 안 말랐잖아요."류 상궁이 시렁 앞으로 가서 비뚜름한 대접을 바로 놓고 돌아왔다."상궁님 여기 매일 나오시죠.""…물린 상이 나오는 것을 봅니다.나온 것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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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화 있다

태후전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등 뒤로 들으면서 회랑을 반쯤 지났을 때, 앞에서 태감 하나가 옆으로 비켜서며 길을 하나 더 냈다.낸 길이 중문 쪽으로 가지 않고 후원 담을 따라 돌았다."부인. 이리로 드시지요.""어. 거기 뭐가 있는데요."태감이 허리를 굽힌 채 앞서 걸었고, 한경은 물어 놓은 것을 그냥 두고 따라갔다.담 안쪽은 밖보다 서늘했으며, 지난밤 비가 돌길에 아직 남아 있어서 걸을 때마다 신코에 흙이 묻어 올라왔다.후원 안쪽 길은 편전 뒤로 이어졌다.길이 끝나는 데에 늙은 살구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고 그 아래 사람이 혼자 서 있었는데, 열매가 아직 푸르러서 잎 색과 구분되지 않았다.한경이 걸음을 멈추고 무릎을 굽히려는데 소리가 먼저 왔다."서서 하라."한경이 두 손을 모으고 섰다.궁에 들 때만 꺼내는 남색 항라 치마에 흰 모시 저고리였고, 깃에 두른 자색 선과 소맷부리 끝이 볕에 드러났다가 손을 내리자 도로 들어갔다.소매 안에는 태후전에서 받은 옥패가 있었다.볕이 살구나무 그늘을 반쯤 밀어내고 있었다.한경이 고개를 돌리는 동안 치맛단 끝이 볕에 닿았다가 도로 그늘로 물러났다."패를 내어 보아라."한경이 옥패를 꺼내 두 손 위에 올렸다.파인 인 자리마다 그늘이 앉았고, 침향이 반 걸음 앞까지 왔다."…이것으로 넉 달을 들었느냐.""예.""…그 문을 닫은 것은 짐이다.""알죠. 그날부터 문지기들 눈 내리는 데가 달라졌던데요.""…""짐이 그리 명하고 나서 넉 달을 세었다.""아. 신코에 흙 묻으셨는데요."황제가 신코를 내려다보고 나서 도로 눈을 들었다.* * *"…무엇을 보고 나오느냐.""장부요. 아홉 해째 것요.""그것 말고.""…""매일 그 방에 들어가 무엇을 보고 나오느냐고 물었다."한경이 소맷부리를 손끝으로 한 번 눌렀다."…마마 손이요. 아니, 손이랑 상궁들 서는 자리요.마마께서 말씀하시면 상궁 셋이 같이 반 걸음 물러서거든요.폐하 앞에서는 아무도 안 물러서고요."한경이 무슨 말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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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화 값

회랑을 앞서 걷는 신이 오늘은 깨끗하지 않았다.뒤축에 마른 흙이 앉아 걸을 때마다 부스러기가 떨어졌고, 떨어진 것이 한경이 지나온 자리에 점점이 남았다.앞선 상궁은 스물이 될까 말까 했고, 갈림에서 한 번 서더니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 보다가 왼쪽으로 돌았다."어. 오른쪽으로 도세요.저번까지는 오른쪽으로 돌았거든요.""…예. 예."상궁이 걸음을 되돌리는 동안 한경이 기다렸다.오늘 입은 것은 먹빛 치마에 잿빛 저고리로, 깃이 좁고 고름이 짧아 목만 길어 보였다.소맷부리에 놓은 흰 매화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살창으로 든 볕에 들어왔다가 나갔다.안쪽 방 문 앞에서 상궁이 걸음을 멈추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한경이 문고리를 보고 나서야 그 손이 문고리로 갔다.발이 반쯤 걷혀 있었고, 태후가 오늘은 발 밖에 나와 앉아 있었는데, 볕이 아직 자리까지 오지 않아 방 안이 어제보다 어두웠고, 어두운 데서도 손등만 희었다."앉거라. 오늘은 밥 이야기 말고 다른 것을 하자.""예.""네가 며칠 전에 그 아이에게 준 것을 먹어 보았다."한경의 손이 자리 위에서 멎었다."팥이 들었더구나.너는 팥을 못 먹는다지.""…""수라간에 일러 두었다.이 방에 드는 것에 팥을 넣지 말라 하였어.""…""오늘 안내한 아이가 서툴렀지.류가는 연치가 있어 처소를 옮겼다.열셋에 들어와 스물여덟 해를 살았으니 이제 쉬어야지.""…어디로 가셨어요.""처소를 옮기는 데 어디가 정해져 있겠느냐. 그래, 그래."태후가 손을 뻗어 한경의 볼에서 귀 앞까지 쓸었다.금 호갑이 살에 닿았다가 떨어졌고, 닿았던 자리만 오래 찼다."너는 오래 두마."* * *회랑 끝 층계 아래에 강목이 문서 상자를 안고 서 있었다.삿갓은 없었고 왼손은 소매 안에 있었으며, 상자 모서리가 한쪽 터져서 종이 끝이 손가락 사이로 나와 있었다."부인.""나리는 들으셨겠죠.""…예. 예. 아침에 태의원에 방이 붙었습니다.태후전 상궁 하나가 물러난다고요.""죄목이 뭐라고 적혔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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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화 류가

부엌에 마늘 냄새가 밴 것이 며칠째였다.오어멈이 아궁이 앞에 앉아 절구를 무릎 사이에 끼고 마늘을 찧었는데, 공이가 내려갈 때마다 한 마디씩 중얼거리는 소리가 솥 끓는 소리에 반쯤 먹혔다."어유. 이 나이에 새로 배웁니다.""부인. 부인!"소하가 뛰어 들어오다가 문지방에 발끝이 걸려 소쿠리를 떨어뜨렸고, 콩이 굴러가는 동안 오어멈이 공이를 든 채로 그 콩을 눈으로만 따라갔다."아이고. 저 콩을.""어. 콩.""어우, 소인이 주울게요.근데 부인, 아까 시전 거간이 문 앞에 와서 이 댁에 외상을 드리겠대요.그리고 저잣거리에 이 댁으로 뭐가 내려온다는 말이 도는데요, 세 군데서 들었는데 다 달랐어요.그게 뭔지는 아무도 모르는데요, 다들 알아요."한경이 소리 내어 웃었다.오어멈이 절구를 내려놓고 따라 웃었는데, 웃으면서도 쏟아진 콩 쪽으로 눈이 갔다."부인. 정말 뭐가 내려와요?""몰라. 나도 어제 너한테 들었잖아.""아 맞다.""외상은 안 써요.그 집이 값을 두 번 받거든요."오어멈이 시렁 위에 엎어 놓은 빈 찬합을 한 번 보고 도로 절구를 안았다."…이 찬합은 누구 걸 씻어 놨나.""…껍질이 안 벗겨지네."* * *광 문이 낮에 열려 있었고 문턱 앞 멍석에 콩대가 널려 있었다.노영감이 멍석 가장자리에 앉아 나무판에 작대기를 하나 그은 다음, 그 옆에 점 대신 짧은 금을 하나 더 그었다.그런 금이 판 아래쪽에 벌써 여러 줄 있었다."영감. 그 금은 뭐예요.""…짐이 아닌 것입니다.짐은 작대기고 반 짐은 점인데, 사람은 짐이 아니라서 금으로 적습니다.문 앞에 선 사람이 셋이면 금 셋이고요.누가 적으라 하신 것도 아닌데 세는 게 손에 붙어서."중문 쪽에서 총관이 왔다.오는 동안 소맷자락 안의 무언가를 두 번 고쳐 쥐었고, 멍석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도 한참 그것을 안 꺼냈다."부인. 소인이… 소인이 시키지 않은 것을 하였습니다.""총관.""예. 예.""영감이 잘못한 건 아직 하나도 없는데요."총관이 소매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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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화 물에 타는 것

마루에 남은 등 하나가 심지에서 한 번 튀었다.류가가 무릎 위에 얹었던 손을 폈다가 도로 접었고, 접는 동안에도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물입니다.""물이요.""세답방으로 드는 물입니다.수레 하나에 항아리를 여섯 싣고 새벽에 서문 옆 뒷문으로 듭니다.빨래에 쓰는 물이라 수라간을 거치지 않고, 거치지 않으니 어느 장부에도 적을 자리가 없습니다."한경이 넘기던 종이를 무릎에 내려놓았다."여섯 중에 하나가 다릅니다.뚜껑에 붉은 끈이 매여 있습니다.""끈은 왜 매여 있어요.""물이 다르다고만 들었습니다.마마 처소로 드는 것이니 손을 대지 말라고요."류가의 목이 한 번 잠겼다가 풀렸다."소인이 그 끈을 스물여덟 해 보았습니다.보고도 못 봤습니다.""스물여덟 해를 보셨네요.""예.""그동안 그 물로 빨래를 하셨어요?""세답방 물은 세답방에서 씁니다.붉은 끈이 매인 것만 따로 내갑니다.내가는 사람이 세답방 사람이 아니고, 어디로 가는지는 소인이 못 봤습니다.""그 사람은 아세요?""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늘 어두울 때 들고 어두울 때 나갔습니다."* * *부엌 쪽에서 맨발 소리가 나더니 소하가 물그릇을 받쳐 들고 왔다.자다 나온 얼굴이었고 머리 한쪽이 눌려 있었다."부인. 물 드시라고—""물."소하가 한경을 보다가 섬돌에서 발을 헛디뎠다.그릇이 손에서 빠져 떨어졌고, 물이 마루 밑까지 튀었으며 그릇은 두 조각이 났다."아이고. 아이고.""발 봐. 물 말고."부엌문 안쪽에서 오어멈이 허리를 두 번에 펴며 나왔다."그릇이 무슨 죄야.밤에 물을 왜 들고 다녀, 밤에.""어멈. 우리 집은 물을 누가 세요.""물을 셉니까. 물은 안 셉니다.길어다 붓는 거지요.""그러니까요. 물은 아무도 안 세거든요."소하가 조각을 주우면서 고개를 들었다."어. 그건 제가 알아요.우리 집 물은 개천 건너 우물이요.물장수 아저씨가 새벽마다 지고 오는데요, 비 오는 날은 흐리다고 하루 쉬어요.그러면 어멈이 아저씨한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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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화 셋을 겹치다

광 앞 멍석에 어제 널어 둔 콩이 아직 그대로 있었다.노영감이 그 옆에 나무판을 석 장 늘어놓고 눈에서 멀찍이 떼어 들어 하나씩 짚는 동안, 총관이 소매에서 접은 종이를 꺼내 마루 끝에 놓고 한 손으로 무릎을 짚으며 앉았다.분이어멈이 빨래 광주리를 안고 지나가다 멍석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콩을 여태 널어 두면 밤이슬에 도로 눅습니다.아니, 내 일도 아닌데."아무도 대꾸를 안 하자 어멈이 그대로 갔다."영감. 이 긴 금은 무엇입니까.""사람입니다.""이것도 사람입니까.""그것도 사람이지요.""그럼 이 짧은 것은 무엇입니까.""…쥐 지나간 겁니다."총관이 판 위에 얹었던 손을 뗐다."영감!""곳간에 드는 건 다 적는 게 내 일입니다.나더러 사람만 적으라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요."마루 아래에서 소하의 웃음이 터졌다.부엌문 안쪽에서 오어멈이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났고, 총관이 소하를 한 번 보다가 저도 따라 웃었다."그럼 쥐는 빼고 봐요.사람만 남기면 되잖아요.""…예. 그건 소인이 가리겠습니다."* * *총관이 제 종이를 폈다.날짜가 왼쪽에 있고 오른쪽에 차림이 적혀 있었는데, 글씨가 뒤로 갈수록 잘아졌다."초닷새. 패랭이 쓴 자 하나, 등짐 진 자 둘, 신코에 붉은 흙이 묻은 자 하나.""열이틀은요.""패랭이 하나, 등짐 하나.그리고 붉은 흙이 또 있습니다.""이름은 안 적으셨죠.""예. 부인께서 묻지 말라 하셨으니 안 물었습니다.소인은 신만 봤습니다."류가가 마루 끝에 종이 뭉치를 놓았다.넉 달 치였고, 날마다 수라간에서 태후전으로 올린 것이 오른쪽 끝에 숫자로 적혀 있었다."물입니다. 이레에 한 번쯤 이 숫자가 반으로 줍니다.""마마가 물을 덜 쓰신 날이에요?""그런 날은 아니었습니다.그날은 수라도 그대로 물려 나왔습니다.손도 안 대신 상이 그대로 돌아온 날에 물만 반으로 줄었습니다."한경이 세 가지를 나란히 놓았다.노영감의 판, 총관의 종이, 류가의 넉 달 치."영감. 금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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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화 한 항아리

동트기 전 궁 뒷문 안쪽 돌바닥은 아직 밤 빛깔이었다.한경이 담 그늘에 서서 기다리는 동안 수레 소리가 문밖에서 먼저 왔다.궁에 들 때만 꺼내는 남색 명주 치마에 흰 겹적삼이었고, 깃을 따라 돌린 자색 선이 어두운 데서는 검게만 보였다.소맷부리를 여며 쥔 손등이 곱아서 쥔 자리만 하얬다.앞선 태감이 반 걸음 물러서며 길을 냈다."부인. 진시까지는 아직입니다.""알아요. 오늘은 일찍 나왔어요.""…예.""태감님도 늘 이 시각에 서 계세요?""소인은 문이 열리는 것만 봅니다."문이 열리고 수레가 들었다.항아리가 여섯이었고, 뚜껑마다 짚이 물려 있었으며, 맨 뒤엣것 하나만 뚜껑 위로 붉은 끈이 돌아가 있었다.사람 넷이 내려서 지게에 나눠 지는 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지게가 수라간 쪽으로 가지 않고 담을 따라 왼쪽으로 돌았다.왼쪽 처마 밑에 젖은 빨랫감이 걷히다 만 채로 걸려 있었고, 잿물 냄새가 담 아래에 고여 있었다.* * *맨 뒤에 선 지게꾼 뒤로 누가 한 번 지나갔다.궁 사람이었고, 지나가는 동안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지게가 왼쪽으로 기울었다.맨 위에 얹혔던 항아리가 미끄러져 돌바닥에 떨어졌고, 깨지는 소리가 담을 치고 돌아왔다.물이 넓게 퍼지면서 신 신은 발들 사이로 흘렀다."제, 제가 아닙니다!"지게꾼이 지게를 진 채로 무릎을 굽혔다.세답방 쪽에서 나인 하나가 뛰어나와 깨진 자리를 보고 섰다."여섯이 들었는데 다섯이 갔습니다.""…""이걸 누가 아뢰어."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한경이 숨을 삼켰다.붉은 끈이 깨진 조각 하나에 아직 감겨서 물 위에 떠 있었고, 물은 돌 틈으로 이미 빠지고 있었다.조각 안쪽이 볕도 들기 전인데 허옇게 보였다.태감이 옆으로 왔다."부인. 이리로 드시지요.""예."한경이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따라 걸었다.걷다가 한 번 돌아봤을 때 지나간 사람은 이미 없었고, 나인 둘이 빗자루와 물통을 들고 뛰어오고 있었다.* * *회랑 앞에서 처음 보는 상궁이 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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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화 되찾기

회랑을 앞서 걷는 상궁이 오늘은 둘이었다.하나가 앞에서 문을 열고 하나가 뒤에서 따라 걸었는데, 뒤엣사람은 층계 아래에서 멈춰 서고 더는 올라오지 않았다.태후전 창이 오늘은 넷 다 열려 있었다.볕이 자리 한복판까지 들어와 있었고, 방 안에 상궁이 하나도 없었다.한경은 궁에 들 때만 꺼내는 옥색 명주 겹적삼에 먹빛 치마였다.깃을 따라 흰 매화가 한 송이씩 돌고, 소맷부리 안으로 접힌 자색 끝동이 앉을 때 한 번 드러났다가 도로 들어갔다."왔느냐. 앉거라."태후가 발 밖에 나와 있다가 몸을 돌렸는데, 돌리는 데 시간이 들었다.낯과 목에는 볕이 고르게 앉았고, 그 아래 상 위에 놓인 두 손만 금 호갑에 덮여 있었다."어제 궁에서 항아리가 하나 깨졌다더구나.""저도 그 자리에 있었어요.""…""세답방 물이다. 빨래하는 물이 나한테까지 오는구나. 그래, 그래."* * *"소매에 든 것을 내어 보아라."한경이 옥패를 꺼내 상 위에 올렸다.파인 인 자리마다 그늘이 앉았다."그것은 넉 달 전에 너를 이 방에 들이려고 준 것이다.오늘은 그것 말고 다른 것을 주마."태후가 상 위의 것을 한경 앞으로 밀었다.벼루와 종이와 붓이었고, 종이는 아직 한 자도 적히지 않았다."너는 넉 달을 이 방에 들어와 남의 집 장부를 봤다.보는 값을 내가 아직 안 치렀어.""…""태의원에 여자가 설 자리가 없다.없으면 하나 세우면 되지.의녀라 부르든 무어라 부르든 이름은 나중에 붙이고, 자리부터 만들어 두마.""…""약재는 어공 궤짝에서 네가 쓰겠다는 만큼 내가마.손발이 모자라면 사람도 붙여 주고.스물이든 서른이든 네가 적어 오너라.""사람은 새로 붙일 것도 없다.네가 아쉬워하던 늙은 것도 도로 부르면 되지.연치가 있어 쉬라 하였을 뿐이지 내친 것이 아니니까."한경의 손이 무릎에서 한 번 움직였다가 도로 멎었다.창밖에서 비질 소리가 들어왔다가 멀어졌다."…그분은 지금 저희 집에 계세요.""안다."태후의 손이 상 위로 왔다.금 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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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화 무너진다

서하당에 등이 둘 켜져 있었다.한경이 상 앞에 앉아 종이를 펴 놓았는데, 궁에서 받아 온 종이라 결이 곱고 귀퉁이가 한 번도 접히지 않았으며, 붓은 아직 마른 채였다.마당 쪽에서 중문 여는 소리가 났는데 평소보다 컸다.부엌에서 오어멈이 물 붓다 말고 뭐라 하는 소리가 잠깐 나다가 그쳤다.문 앞에 사람이 선 것은 그러고 한참 뒤였다.육정이 문지방을 넘지 않고 서서 방 안을 봤다. 며칠 만이었다."…부인.""오셨어요.""…""들어오세요. 거기 서 계시지 말고."육정이 들어와 앉았다.앉고 나서 오른팔을 뒤로 한 번 돌렸는데, 왼 어깨가 늦게 따라 올라갔다."저녁은 드셨어요.""…들었소.""아. 그럼 됐고요.""이 집에서 요새 처가 이야기가 돈다고 들었소.물이 어떻고 하는—"말끝에 숨이 모자랐다.육정이 한 번 삼키고 다시 시작했다."…아니오. 저. 그건 됐소.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 아니오."* * *"오늘 어공서에서 사람들이 나한테 축하를 하였소.""무슨 축하를 받으셨는데요.""모르겠소. 나한테 축하를 하는데 내가 무엇을 받는지를 나만 모르오.웃는 낯으로 손을 잡길래 나도 잡았고, 잡고 나서 저녁내 그 손이 무슨 손인가만 생각하였소."육정이 엄지로 왼쪽 광대를 한 번 문질렀다."오늘 궁에 드셨소.""예.""태후전에.""예."육정이 상 위의 종이를 봤다.한 자도 적히지 않은 종이였다."…무엇을 적으시오.""아직 안 적었어요.""무엇을 적으라 하였소.""…""부인. 나는 열 해 동안 부인한테 아무것도 안 물었소.물어야 할 것을 몰라서 안 물은 것이 아니라, 물으면 부인이 이 집에서 못 산다고 여겼고, 그래서 안 물었는데, 지금은—""나리.""—지금은 물어야겠소.오늘 무엇을 받아 오셨소.""…"* * *"부인."한경이 종이 끝을 손끝으로 눌렀다."말을 해."한경이 육정을 봤다.육정이 제가 한 말을 저도 듣고 나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명주.""…""열 해를 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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