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연옥화(軟玉花) — 향이 없는 꽃: Chapter 141 - Chapter 150

215 Chapters

141화 안 틀리는 사람

밤에 안채에 등을 둘 켰는데, 하나는 서안 모서리에 놓고 하나는 소하가 들었다.소하가 장부 위쪽에 서서 팔이 아픈지 두 손을 번갈아 바꿔 가며 들었고, 바꿀 때마다 종이 위로 그림자가 한 번씩 건너갔다."아휴, 부인. 저 이거 왜 이렇게 무거워요.종이가 무거운 게 아니라 등이 무거운 건데요, 근데 등이 무거우면 종이도 무거워지는 것 같지 않으세요?아니 무슨 말이냐면요, 소인이 아까부터—""말은 해도 되는데 등은 좀 가만히 있어.""예. 근데 그건 좀 어려운데요."한경이 소리 내어 웃었다.웃는 바람에 어깨가 흔들렸고, 어깨가 흔들리자 그 위로 지나가던 등불 그림자도 종이 위에서 한 번 크게 건너뛰었다."부인. 부인 웃으시면 글씨 흔들려요.""등을 네가 들었잖아.""…아 맞다."장부는 겉장이 손때로 검고 속이 누랬는데, 아래쪽 모서리만 닳아 둥근 것이 한 손이 늘 같은 자리를 쥐었다는 뜻이라 한경이 그 모서리에 잠깐 엄지를 대 보았다가 뗐다.열두 해 치가 한 권에 들어 있었고 든 것과 나간 것이 줄을 바꿔 가며 적혔는데, 줄과 줄 사이가 자로 잰 듯 고르고 글씨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 것이었다.한경이 첫 장을 폈다가 도로 덮고 뒤에서부터 펼쳤다.* * *"참. 소하야, 너 저잣거리에서 콩 살 때 파는 사람이 뭐라고 해.""…서 되 반이요, 하죠.""딱 서 되라고 해?""어우, 그렇게는 잘 안 해요.되질하면 늘 어중간하게 남으니까요.""그렇지."한경이 장을 앞으로 넘겨 가며 다른 것은 다 흘리고 숫자만 보았는데, 그렇게 훑는 동안 소하의 등이 종이를 따라 조금씩 왼쪽으로 옮겨 갔다.숫자들이 하나같이 어중간했다.서 근 두 냥, 열한 근 닷 돈, 스물아홉 근 서 돈.재고 나서 적은 손이었다.그러다 한 줄에서 손이 멎었다.스무 근.한경이 그 줄에 손톱을 대고 뒤로 넘겼는데, 두 장 뒤에 서른 근이 있었고 그다음 장에 열 근이 있어서 손톱을 댄 채로 세 장을 한꺼번에 붙들게 되었다.셋 다 나간 쪽이었고, 셋 다 그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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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화 이름이 없다

소하가 만두를 못 샀다.중문을 넘어 들어오는 걸음이 빨랐고 손에 든 것이 없었으며, 마당을 반쯤 건너다 말고 한 번 뒤를 돌아봤다가 다시 걸었다."부인.""참. 손에 아무것도 없는 걸 보니 못 샀지.""저 그게요."소하가 마루 아래에 서서 신을 벗지 않았다.이 집에 온 뒤로 이 아이가 마루 앞에서 신을 안 벗고 선 것은 처음이었다."물어봤어요. 세 사람한테요.앞의 둘은 모른다 그랬고 세 번째 사람이 알더라고요.근데 그 사람이 말해 주고 나서 소인한테 뭐라 그랬냐면요, 누가 묻더냐고요.그래서 소인이 아무도 안 묻는다고 했는데.""아무도 안 묻는다고 한 건 잘한 거야."소하가 대답 대신 마루 아래에서 발을 한 번 옮겨 디뎠다."그 아이 어디 있대."소하의 입이 한 번 열렸다가 다물렸다가 다시 열렸다."…시약이요. 시약이요."소하가 그 말을 하고 나서 한경을 봤다.아는 얼굴이 아니라 물어보는 얼굴이었다."부인. 시약이 뭐예요?"마당에서 비질하던 종이 손을 멈췄다.멈춘 김에 허리를 펴더니 하늘을 보는 시늉을 하고 다시 쓸었다.* * *한경이 마루 끝에 앉았다.아침 볕이 아직 마당 절반까지밖에 안 와서 그 경계가 소하의 젖은 신 앞에 금처럼 그어져 있었고, 볕 안쪽 흙은 이미 마른 빛인데 신이 선 자리만 검었다.종이 물을 뿌리며 그 금을 두 번 밟고 지나갔다."들어와.""소인 발이 더러운데요.""들어와."소하가 신을 벗고 마루에 오르다 한 번 헛디뎠다.올라와 앉은 자세는 등을 곧게 세우고 발끝을 나란히 모은 것이 작년 여름 이 집에 처음 들어오던 날 그대로였다.그날은 부엌에서 시켰고 오늘은 아무도 안 시켰다.한경이 장부를 폈다.어젯밤에 손톱을 댔던 자리를 다시 찾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소하야. 물건은 이름하고 근수가 같이 적히는 거야."열두 해 치 모든 줄에 물건 이름이 있었다.주사면 주사, 사향이면 사향, 근수가 그 옆에 붙고 그 뒤에 든 곳과 난 곳이 붙었으며, 열두 해 동안 한 줄도 거르지 않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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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화 맞춘 손

중문 밖에 여자가 서 있었다.늙지도 젊지도 않았고 옷이 낡았으나 깨끗했으며,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선 자세가 오래 그렇게 서 본 사람의 자세였는데 상궁의 그것과는 달라서 어깨가 조금 앞으로 말려 있었다.한경이 문을 열고 나가자 여자가 반 걸음 물러났다가 물러난 만큼 도로 다가왔다."부인이십니까.""…""아까 그 아이가 물었지요.그 아이 부인 댁 아이입니까.""그 아이는 제가 시켜서 물은 거예요."여자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숙였는데, 숙이고 나서 오래 들지 않았다."…묻는 사람이 있을 줄 몰랐습니다.""이름을 알아야 찾아요.""아이고, 소인 이름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참. 그거 말고요.그 아이 이름이요."여자가 숨을 들이켰다.모아 쥔 두 손이 서로를 잡는 것이 소매 밖으로 보였다."…연이. 연이입니다.이을 연 자를 씁니다."여자가 그 이름을 말하고 나서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열두 해를 적었는데요, 부인.그 아이가 적은 종이에 그 아이 이름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소인이 어제 그것을 알았습니다."* * *새벽에 동문을 넘었다.류 상궁이 갈림에서 오늘도 오른쪽으로 돌았고, 회랑 살창으로 든 빛이 자색 도련을 한 뼘씩 지나갔다가 놓았다.안쪽 방 문 앞에서 상궁이 걸음을 멈췄다."부인.""예.""오늘은 마마께서 먼저 물으실 것입니다.""저번에는 먼저 물으실 때까지 아뢰지 말라 하셨죠."류 상궁이 한경을 봤다.넉 달 동안 궁에서 본 어느 얼굴보다 오래 봤던 그 눈이었다."…오늘은 아뢰십시오."* * *방이 어제와 같았다.창이 닫혀 있었고 궤 스물넷의 덮개가 걷혀 있었으며 등이 켜져 있었다.발이 걷히고 태후가 서안 앞에 앉았다.검푸른 포의 깃과 소맷부리에서 금실 구름본이 등불을 얕게 물었다."짚었느냐.""예.""누구냐."한경이 소매 안에서 손끝을 한 번 오므렸다.넉 달 동안 이 방에 들 때마다 식던 손이 오늘도 똑같이 식어 있었고, 식는 데 걸리는 시간까지 늘 같았다.식은 채로 고개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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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화 뭘 드세요

강목이 뿌리 하나를 사흘째 보고 있었다.남방 배가 그저께 닿아 궤 열둘이 올라왔고 그중 열하나는 반나절에 끝났는데, 마지막 하나가 사흘을 잡아먹었다.태의원 뒤뜰 처마 아래 상을 내다 놓고 아침볕에 한 번, 낮볕에 한 번, 저녁에 등불로 한 번씩 봤다.오른손으로 꺾어 단면을 내자 결이 곱게 났고, 그 위에 왼손 엄지를 가져다 댔다.아무 느낌도 오지 않았다.미끄러운지 걸리는지, 대고 있는지 아닌지도.떼었다가 다시 대 보고, 한 번 더 그렇게 했다.* * *"강 나리."돌아보다가 강목이 왼손에서 뿌리를 놓쳤다.뿌리가 상 아래로 굴러 발치에 멎었고, 몸을 굽혀 그것을 집는 동안 귀가 붉어졌다.한경이 뒤뜰 문에 서 있었다.궁에서 바로 온 차림이었고 소맷부리에 아직 회랑 먼지가 앉아 있었다.강목이 뿌리를 상에 올려놓고 손바닥으로 덮었다가, 덮고 나서 제가 왜 덮었는지 몰라 그 손을 잠깐 그대로 두었다."…부인.""사흘 걸렸다면서요.""…예.""그거 물건이 어려워서예요?"강목이 대답을 고르는 동안 처마에서 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어제 비가 그쳤는데 처마 끝에는 아직 남아 있었다."소신이. 소신이 이제 못 봅니다."말해 놓고 강목이 입을 다물었는데, 다물고 나서도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을 세는 것처럼 한참 그대로 있었다.이 말을 소리 내어 한 것이 처음이었다.한경이 상 앞으로 와서 앉았다.놀란 얼굴을 하지 않았고 위로하지도 않았으며, 덮인 손 옆에 제 손을 놓고 뿌리 끝을 손끝으로 밀어 냈다."그럼 오른손으로 보세요.""…엄지는 왼쪽입니다.""오른쪽에도 엄지 있는데."강목이 한경을 봤다."열두 해를 왼손으로 봤습니다.""그럼 열세 해째부터는 오른손으로 보시면 되죠."강목이 아무 말도 못 했다.못 하는 동안 목울대가 한 번 움직였고, 그가 그러고 있는 사이 한경은 이미 상 위의 다른 것으로 눈이 가 있었다.* * *"강 나리.""…예.""참. 폐하 뭐 드세요?"강목이 고개를 들었는데, 되묻는 얼굴이 아니라 못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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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화 마늘

태의원 심약이 부엌 문지방에 서서 안으로 못 들어오고 있었다.오어멈이 솥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그를 한 번 보고, 보고 나서 부지깽이를 옮겨 놓아 길을 냈다.강목이 그 길로 들어와 아궁이에서 두 걸음 떨어진 데 섰다."어멈."오어멈이 솥에서 눈을 안 뗀 채로 턱만 끄덕였다."어멈 손등 왜 그래요. 데었어요?""…솥전에요. 늘 있는 일입니다.""이따 참기름 좀 발라요.물집 잡히면 터뜨리지 말고."한경이 아궁이 쪽으로 한 걸음 더 갔다.불기운이 치맛단에 닿아 뜨거웠는데 물러나지 않았다."아. 그리고 어멈, 우리 집에서 마늘 언제 써요."오어멈의 손이 국자 위에서 잠깐 멎었다가 다시 저었다."요새는 씁니다."오어멈이 국자로 솥전을 두드리고 나서 국물을 조금 떠 입에 대 보았다."…간이 안 맞네.""저 시집와서 이 집 상에 마늘 오른 적 없어요.""어유. 어공 나가는 달에는 안 썼지요.냄새가 배면 물건 값이 떨어진다고, 총관 영감이 스물세 해 그리 일렀습니다.…한 짝이 이천 냥이라는데, 소인이 마늘 한 톨로 그 값을 깎으면 식구를 다 팔아도 못 뭅니다.마늘도 파도 젓갈도 다 못 썼습니다.어공 궤짝이 광에 있는 동안에는 부엌에서 매운 걸 못 냈어요.""…참. 부엌이 이리 낮습니까."강목이 문지방 쪽으로 반 걸음 물러났다.부엌 천장이 낮아서 물러나면서 고개를 한 번 숙였다."올가을에 어공이 끊기고 나서요.그때부터 씁니다.""그럼 여태 몇 해를 안 쓴 거예요.""…아씨 시집오시기 전부터요."매운 것을 못 내는 동안 이 집 부엌은 단것과 짠것으로 갔다.조림이 늘고 국은 들깨나 아욱으로 갔으며, 그렇게 차린 상을 열 해 아침저녁 받아 온 사람이 이 집 안주인이었다.* * *한경이 부뚜막에 손을 얹었다.아침부터 불을 땐 자리라 손바닥이 금방 뜨거워졌는데 떼지 않았다."어멈. 궁 부엌은 어떨까요.""소인이 궁을 어떻게 압니까.""어멈이면 알죠.""…""어공이 어디로 가요."오어멈이 국자를 솥전에 걸쳐 놓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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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화 달걀

강목이 어주 곳간 앞에서 돌아섰다.물건을 보러 온 것이니 못 들어갈 자리가 아니었는데, 문 안쪽에서 나온 자가 오늘은 볼 것이 없다고 했다.사흘 전에 든 궤가 있지 않으냐 하니 그 궤는 이미 봉이 되었다고 했다.봉을 누가 했느냐 하니 대답이 없었다.돌아 나오는 회랑에서 강목이 한 번 걸음을 늦췄다.여섯 해 동안 이 회랑을 하루에 두 번씩 지났고 그동안 뒤에서 사람 소리가 안 난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으며 나지 않는 것이 오늘따라 더 걸렸다.* * *태후 처소 안쪽 방에 등이 둘 켜져 있었다.한경이 열두 해 치를 앞에서부터 넘기는 동안 류 상궁이 문 안쪽에 서 있었다.여덟 해째 장을 넘길 때 상궁이 물 그릇을 갈아 놓고 나가지 않았다."부인."한경이 장을 넘기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어주 곳간에는 어공 목록에 오른 것만 듭니다."한경이 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목록에 없는 건 여기서 도로 나가겠네요.""들지 않습니다. 문에서 돌려보냅니다.""그 목록을 곳간에서 적지는 않고요."류 상궁이 대답하기까지 한 박자가 걸렸다."…어공서에서 적어 올립니다."한경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상궁이 그 눈을 받고 나서 물 그릇을 들고 물러났고, 물러나면서 문을 반만 닫았다.* * *그 밤에 한경이 서재로 갔다.안채에서 나올 때 소하가 등을 들겠다 했는데 두고 나왔다.서재는 안채에서 마당을 하나 건너야 했고, 건너는 동안 별당 창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언니."육설이 창틀에 팔을 얹고 마당을 보고 있었다.손에 골패 한 짝이 들려 있었고 그것을 손가락 사이에서 돌리다 한 번 놓쳤다.놓친 것을 창틀에서 도로 집었다."밤에 골패 돌리면 잠이 더 안 와요.""잠이 안 와서요.언니는 이 밤에 어디 가세요.…아니 여쭈려던 게 그게 아니고요, 저 오늘 낮에 이상한 얘기를 들었는데요, 우리 집에 어공이 다시 열린다는 말이 돈대요."한경이 걸음을 멈췄다.소매 안에서 종이 모서리가 손목에 걸렸다."끊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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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화 해 뜨거든

한경이 종이를 소매에 넣고 돌아서는데 문이 안 열렸다.육정의 손이 문틀에 있었고, 언제 일어나 왔는지 모르게 와 있었으며, 팔이 한경의 어깨 위로 지나 문틀을 잡은 자세로 내려오지 않았다."나리."육정이 대답하지 않았다.팔이 어깨 위에서 조금도 내려오지 않았고, 내려오지 않는 동안 문틀을 잡은 손등에 힘줄이 섰다."문 좀."등이 서안 위에 있어서 문 쪽은 어두웠다.어두운 데서 그의 숨소리가 아까 붓을 놓을 때보다 짧았고, 짧아진 것을 저도 아는지 한 번 크게 들이켰다가 그대로 참았다."나리. 저 이거 내일 새벽에—"말이 끝나지 않았다.끝내야 할 쪽이 끝내지 않았다.* * *등이 서안 위에서 오래 탔다.심지가 한 번 크게 흔들렸다가 잦아들었고, 잦아들고 나서 방이 아까보다 어두워졌는데 아무도 그것을 고치러 가지 않았다.한경의 소매에서 종이가 빠져나와 바닥에 떨어졌는데, 접힌 자리가 저절로 펴지면서 먹 냄새가 났고, 그 냄새가 방 안의 다른 냄새들 사이에서 유독 또렷했으나 둘 다 그것을 줍지 않았다."…부인."부르고 나서 그다음이 없었다."부인."십 년 동안 전례를 열두 마디씩 대던 입이었다.어전에서도 문장을 끝내던 사람이고, 아내 앞에서 받지 말라는 말을 하려고 열두 마디를 두른 사람이었다."…내가."거기서 또 끊겼고, 끊긴 자리를 잇지 못하는 동안 그의 어깨가 한 번 크게 내려갔다."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한경이 그의 뒷목에 손을 얹었다.얹은 데가 뜨거웠고, 뜨거운 것이 열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손바닥이 먼저 알았다."하지 마세요."육정이 그 손 아래로 이마를 떨어뜨렸는데, 떨어뜨린 이마가 한경의 어깨에 닿기까지 걸린 시간이 넉 달 전 마당에서 그가 아내 등에 손을 얹던 때와 같았다."말 안 해도 돼요."* * *새벽에 한경이 먼저 깼다.옷끈이 매어져 있었다.제가 맨 기억이 없는데 매어져 있었고, 매듭이 왼쪽으로 기울어 있었다.흰 속적삼 위에 어제 입고 나갔던 옅은 자색 저고리가 덮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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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화 손이 안 떨린다

이레째 되는 날 아침에 회랑이 밝았다.살창으로 드는 빛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달라져 있었다.물을 나르던 아이가 걸음을 늦추지 않았고, 갈림에서 마주친 내관 둘이 인사를 하면서 눈을 내리지 않았으며, 회랑 끝에서 누가 소리 내어 웃었다가 곧 그쳤다.류 상궁이 오늘도 오른쪽으로 돌면서 자색 도련을 한 번 여몄다.여미는 손이 평소보다 빨랐다."부인."류 상궁이 걸음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오늘은. 오늘은 마마께서 말씀이 많으실 것입니다."한경이 걸음을 늦췄다."참. 도련은 그냥 두셔도 돼요."류 상궁이 대답하지 않았다.대답 대신 안쪽 방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어제와 같이 한경의 왼쪽 어깨에서 없는 것을 떼어 냈다.떼어 내고 나서 깃을 여며 주는 손이 어제보다 오래 머물렀다.* * *방의 창이 열려 있었다.넉 달 동안 이 방에 든 스무 번 남짓 중에 창이 열린 것은 처음이었다.궤 스물넷의 그림자가 천장까지 올라가 있던 자리에 오늘은 아침볕이 비스듬히 들어와 바닥에 네모를 그렸고, 등은 아예 켜져 있지 않았으며, 열린 창으로 뜰의 소리가 방 안까지 들어왔다.태후가 서안 앞에 앉아 있었다.검푸른 포 대신 옅은 자색이었고 깃과 소맷부리의 금실 구름본이 볕을 받아 앉은 자세대로 빛났다.호갑은 그대로였다."왔느냐.""예. 마마.""앉거라. 앉아서 그 장부를 마저 보아라."한경이 장부를 펴고 아홉 해째 장을 넘겼다.넘기는 동안 태후가 말했고, 그 말이 끊기지 않았다."어젯밤에 어의가 들었다.들어와서 무어라 하였는지 아느냐.맥이 고르다고 하였어.열 해 만에 처음 들어 보는 말이다.열 해라 하였느냐.아니, 그 아이가 보위에 오른 것이 열두 해 전이니 열두 해구나."* * *한경의 손이 장을 넘기던 자리에서 멎지 않았다.멎지 않게 하는 데 힘이 들었고, 힘을 주는 동안 손끝이 여느 날처럼 식었다."그리고 어제 낮에 붓을 들었다더구나.""…""한 자를 다 썼다고 하였다.획이 어디서도 안 끊겼다고.승지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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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화 한 번 더

염주가 태후의 손에서 한 알 굴렀다."소인은 그 약을 본 적이 없습니다.""…""본 적 없는 것에 양을 아뢰면 그것이 거짓이 됩니다."볕이 태후의 손등에 앉아 있었고 호갑을 낀 손가락 넷만 그늘이었다.창이 열려 있어서 마당 비질 소리가 방 안까지 들어왔는데, 넉 달 동안 스무 번 남짓 든 방에서 밖의 소리가 안까지 들어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그럼 무엇을 물으면 되겠느냐.""…잡숫는 것을요.""밥을.""예. 약은 밑에 뭐가 깔렸느냐에 따라 달라져요.밑을 모르면 위엣것도 모르거든요."태후가 상궁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상궁이 외웠다.아침에 흰죽, 낮에 흰밥과 맑은 국, 저녁에 인삼 달인 물.비린 것은 올리지 않고 매운 것도 올리지 않으며 찬 것은 여름에도 올리지 않는다 하였다."매운 건 언제부터 안 올려요.""열두 해입니다. 열두 해."한경이 무릎 앞자리의 짠 무늬를 봤다.무늬를 두 번 세는 동안 방 안에서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볕이 자리 위로 한 뼘 더 왔고, 오면서 태후의 목선까지 닿았는데, 닿은 자리에 그늘이 한 줄도 지지 않았다."아. 저 창은 언제부터 열어 두셨어요.""오늘부터다. 볕이 좋아서.""…""말이 남았으면 하라.""달걀은요.""…달걀.""올립니까.""비린 것이라 하지 않았느냐."* * *회랑 끝에서 상궁 하나가 따라왔다.열셋에 들어와 스물여덟 해를 살았다는 사람이었고 손에 찬합이 들려 있었다."부인.""예.""저. 두고 가셨습니다."한경이 제 손을 봤다.들어갈 때 들고 있던 것을 어디서 놓쳤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아이고. 고맙습니다."찬합을 받는 동안 소맷부리가 흘러내렸다.궁에 들 때만 꺼내는 옥색 항라 저고리였는데, 겨드랑이 아래로 넣은 자색 끝동이 볕에 한 번 드러났다가 손목을 내리자 도로 들어갔다."상궁님이 드세요.""…소인이요? 소인이 이걸 받아도 되는지를 모르겠습니다.""저는 팥을 못 먹거든요.사 놓고 남 주는 게 벌써 두 번짼데, 이번엔 아예 안 사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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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화 세는 사람

마루 끝에 어제 등잔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밤새 탄 자국이 한쪽으로만 번져 있어서 한경이 심지를 손끝으로 돌려 세워 놓았다.육정은 해도 뜨기 전에 나갔다.마루에 놓아둔 서책도, 어제 못 끝낸 말도 놓고 갔다.안방에서는 삼월이 어제 입은 것을 개고 있었다.옥색 항라 저고리에 매화 자수가 깃을 따라 돌고 소맷부리 속으로 자색 끝동이 접혀 들어갔는데, 궤에 넣으려고 돌아설 때 볕에서 자색이 먼저 빠져나갔다.소하가 중문을 넘어 들어왔다.마당에서 걸음을 멈추고 중문 쪽을 살피더니 마루로 왔는데, 두 팔에 종이가 여러 장이었다."부인.""참. 만두는.""저 그게요. 만두는 안 사고 이걸 하느라고요."* * *소하가 마루에 올라앉아 종이를 폈다.넉 장이었고 넉 장 다 귀퉁이가 접혔으며, 먹이 마르기 전에 겹쳐 놓았는지 뒷장마다 앞장 것이 뒤집혀 번져 있었다."이 동그란 건 뭐야.""사람이요.""…사람?""예. 갓 쓴 사람이요."한경이 종이를 볕 쪽으로 돌려 놓고 다시 봤다.동그라미 하나에 작대기가 넷 붙었고, 그 위에 네모가 얹혀 있었다."소하야. 이건 상이야.""상 아니에요. 갓이요. 갓이요."한경의 웃음이 터졌다.그 바람에 종이 한 장이 무릎에서 미끄러졌고, 소하가 얼른 손바닥으로 눌러 놓으면서 부인을 올려다봤다."이거 어제 저녁내 그렸는데요.""안 웃을게."한경이 그러고 나서 또 웃었다.소하가 넉 장을 마루에 나란히 놓고 눌러 폈다."이 사람은 사흘 내리 골목 어귀에 서 있었고요.이 사람은 지게를 졌는데 지게에 짐이 없었어요.아침에도 없고 저녁에도 없고요.이 여자는 나물을 파는데요, 나물이 아침이랑 저녁이랑 똑같았어요.""이 사람들 언제부터야.""…한 이레쯤이요.아니, 닷새인가."한경이 넉 장을 볕 안쪽으로 옮겨 놓았다.볕이 마루 절반까지 들어와 있었다."근데 부인. 저 아까 비단전 앞을 지나는데요.""응.""거기 사람들이 우리 집 얘기를 해요.육가에 뭐가 내려온다고요.벼슬은 아니고요, 벼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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