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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통제 불능: Chapter 101 - Chapter 110

110 Chapters

101화

나는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태경 씨.”“네.”“수아에게 바로 연락하지 마.”태경이 고개를 끄덕였다.“대신 뭘 찾을까요?”나는 화면 속 파일명을 가리켰다.‘수아_보관용.’“이 파일이 만들어진 날짜.”태경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움직였다.몇 초 뒤, 화면에 기록 하나가 떴다.“일주일 전입니다.”“정확히 언제?”태경의 표정이 굳었다.“새벽 2시 17분.”나는 숨을 삼켰다.내 기억이 끊긴 시간과 너무 가까웠다.“그리고 이상한 게 하나 더 있습니다.”“뭔데?”“파일 생성자는 수아가 아닙니다.”나는 천천히 태경을 바라봤다.“누군데?”태경이 화면을 확대했다.하지만 이름 대신 숫자와 기호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외부에서 만든 임시 계정 같습니다. 문제는…”태경이 말을 멈췄다.“이 계정이 한 번만 접속한 게 아니에요.”“몇 번?”“세 번.”나는 의자를 끌어당겼다.“날짜.”“일주일 전 새벽 2시 17분. 그리고 그 다음 날 오후 4시 32분. 마지막은…”태경이 화면을 바라봤다.“오늘 새벽입니다.”가슴이 서늘해졌다.누군가 지금도 그 파일을 보고 있었다.“오늘 몇 시?”“한 시간 전.”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아직 늦지 않았어.”“어디 가시게요?”“수아를 만나러.”태경이 나를 막았다.“전화하지 말자고 하셨잖아요.”“전화는 안 해.”나는 외투를 집어 들었다.“직접 만나서 확인할 거야.”“위험할 수 있습니다.”“그래서 혼자 안 가.”태경이 나를 바라봤다.“저도 같이 갑니다.”나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 현관으로 향하던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번호 표시 제한.나는 받지 않았다.벨이 끊겼다.곧바로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수아를 만나지 마.]손끝이 차가워졌다.두 번째 문자가 이어졌다.[그 파일은 수아가 만든 게 아니야.]그리고 세 번째.[수아가 보관한 것도 아니야.]나는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태경이 물었다.“누구예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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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사진을 다시 확대했다.일주일 전 밤.낯선 건물 앞에 서 있는 나.그리고 내 옆에 서 있는 수아.하지만 사진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다.차량 뒤쪽에 반쯤 가려진 남자였다.나는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태경 씨.”“네.”“저 사람 얼굴 확대해.”태경이 사진을 불러와 선명도를 높였다.몇 초 뒤 얼굴 윤곽이 드러났다.나는 숨을 멈췄다.“이 사람…”낯선 얼굴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목소리가 먼저 떠올랐다.얼마 전 걸려왔던 발신번호 표시 제한 전화.낮고 차분한 목소리.‘수아를 만나지 마.’나는 사진을 가리켰다.“전화한 사람일까?”“확정할 수 없습니다.”“그럼 이 건물부터 확인해.”태경이 주소를 검색했다.화면에 건물 정보가 떴다.“회사도 아니고 병원도 아닙니다.”“뭔데?”“개인 법률사무소였던 곳입니다.”나는 눈을 좁혔다.“였던?”“현재는 폐업 상태입니다.”그때 나연에게 전화가 왔다.나는 바로 받았다.“변호사님.”“서윤아, 이제 말해야 할 것 같아.”목소리가 무거웠다.“뭘요?”“일주일 전에 네가 나한테 맡긴 서류.”심장이 내려앉았다.“무슨 서류요?”“네가 기억을 잃었다고 했을 때, 내가 절대 먼저 말하지 않기로 했던 자료야.”나는 손에 힘을 줬다.“내용이 뭔데요?”“준혁에 관한 자료가 아니야.”나는 눈을 감았다.“그럼?”나연이 낮게 말했다.“네가 누군가에게 아이들의 정보를 넘기지 않기 위해 만든 보호계약이야.”“누구한테?”“그게 문제야.”나연의 목소리가 떨렸다.“계약 상대방 이름이 공란이야.”“공란?”“네가 일부러 비워뒀어.”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일주일 전의 나는 누군가에게 아이들을 맡길 준비를 했다.하지만 그 이름조차 적지 않았다.“그리고 한 가지 더.”“뭔데요?”“계약서 마지막 페이지에 네 자필 문장이 있어.”“뭐라고 썼는데요?”나연이 천천히 읽었다.“‘내가 기억을 잃어도 이 계약은 취소하지 말 것.’”등골이 서늘해졌다.나는 분명 무언가를 준비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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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누구야. 그 새끼 누구냐고.”준혁이 다시 물었다. 바닥에는 조금 전까지 숨겨져 있던 HIV 확진 서류와 감염내과 예약 취소 기록이 흩어져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그쪽으로 가지 않았다. 서윤의 배부터 봤다.서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촬영한 서류는 이미 나연과 도현에게 전송된 뒤였다.“지금 그게 먼저 궁금해?”“대답해. 도현이야?”“모르겠어.”준혁의 손이 멈췄다.“뭐?”“누구 아이인지 나도 모른다고.”“미쳤어?”“날짜가 겹쳐. 너랑 관계한 날도 있었고, 도현 씨를 만난 날도 있었어. 계산으로는 몰라.”준혁은 한동안 서윤만 봤다. 그러더니 바닥의 진단서를 발로 밀어냈다.“그럼 내 애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거잖아.”서윤이 헛웃음을 흘렸다.“그래.”“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왜. 당신은 말이 되는 짓만 했어?”“내 얘기랑 이게 같아?”준혁이 책상 위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가족사진 액자가 넘어졌고, 뒷면에 적힌 ‘서윤에게 절대 말하지 말 것’이라는 글씨가 다시 드러났다.서윤은 그 문장을 손가락으로 짚었다.“당신은 열 명이 넘는 여자랑 잤고, 검사하라는 말도 피해 다녔어. 확진 받고도 숨겼고. 심지어 나한테 음성이라고 거짓말한 뒤 관계까지 요구했지.”“그래서? 너도 바람났잖아.”“응. 나도 다른 남자 만났어.”준혁은 그 대답이 너무 빨라서 오히려 말을 잇지 못했다.“숨길 생각 없어. 내가 한 선택이고, 내 책임도 내가 져. 그런데 당신이 수십 번 한 건 남자가 그럴 수도 있는 일이고, 내가 한 번 다른 사람을 사랑한 건 세상이 뒤집힐 배신이야?”“사랑?”준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그 새끼 사랑한다고?”“그래.”“나랑 아직 결혼한 상태인데?”“당신은 결혼한 상태에서 몇 명이었는데?”“그건 달라. 난 가정을 버리려고 만난 게 아니야.”서윤이 준혁을 봤다.“집에 다섯 명 불러놓고?”“그 여자들이랑 애를 만든 건 아니잖아!”준혁의 말이 방 안을 갈랐다.“결국 그거네.”“뭐가.”“당신이 누구랑 자든, 몇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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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네 병보다 이 아이 아빠가 더 궁금해?”서윤이 묻자 준혁은 대답하지 못했다.바닥에 흩어진 검사 결과지보다 초음파 사진이 든 봉투만 보고 있었다.“둘 다 중요한 거야.”“아까는 병은 치료하면 된다며.”“요즘 HIV가 죽는 병은 아니잖아. 약 먹고 관리하면 된다니까.”서윤은 책상 위의 진료 기록을 한 장씩 넘겼다.확진 결과.면역 상태를 확인한 검사 기록.감염내과 예약 취소 내역.날짜가 차례대로 이어졌다.“그래. 치료할 수 있어.”준혁이 고개를 들었다.“그러니까 내가 병원 가면 되잖아.”“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니야.”“그럼 뭐.”“왜 숨겼어?”준혁의 입이 닫혔다.“왜 나한테 말 안 했냐고.”“확실하지 않아서.”서윤이 결과지를 들어 보였다.“확인됐잖아.”“한 번 더 검사하려고 했어.”“예약 취소했네.”준혁은 서류를 빼앗으려다 멈췄다.“회사 일이 꼬여 있었어.”“그래서 병원 갈 시간이 없었어?”“그때 정신이 없었다니까.”“다른 여자 만날 시간은 있었고?”“또 그 얘기야?”“당신 병이 어디서 왔는지 따지자는 얘기 아니야.”서윤은 결과지를 내려놨다.“당신은 알았어. 알고도 나한테 말 안 했고, 나랑 관계했어.”“콘돔 썼잖아.”“항상?”준혁이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서윤은 그 얼굴만 봤다.“항상 썼냐고.”“기억 안 나.”“나는 기억나.”그제야 준혁이 시선을 피했다.“그때는 내가 확진인 줄 몰랐을 수도 있잖아.”“날짜 볼까?”서윤이 결과지 귀퉁이를 손가락으로 눌렀다.“여기 확진일. 그리고 그다음 주에 당신이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기억해?”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부부인데 왜 피하냐고 했어.”“서윤아.”“내가 피곤하다고 하니까 밖에서는 잘하면서 남편한텐 유세 떠냐고 했지.”“그만해.”“왜? 기억나니까 듣기 싫어?”준혁이 소파에 앉았다.한동안 머리를 쓸어넘기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말하면 네가 바로 이혼하자고 할 것 같았어.”서윤의 손이 멈췄다.처음 나온 대답이었다.“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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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현재 검사에서는 음성입니다.”의사의 말을 듣고도 서윤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책상 위 검사지를 내려다봤다.HIV 음성.그 두 글자를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몰랐다.어제까지 머릿속에서 가장 많이 떠올렸던 건 하은이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 속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지, 앞으로 병원을 얼마나 다녀야 하는지.정작 자기 자신이 무서웠다는 생각은 나중에야 들었다.“그럼 저는 괜찮은 건가요?”의사는 단정하지 않았다.“현재 결과는 음성입니다. 다만 마지막 노출 시점과 시행한 검사 종류에 따라 추적검사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필요한 건 다 할게요.”“일정을 잡아드리겠습니다.”“제일 빠른 날짜로 잡아주세요.”간호사가 예약 가능한 날짜를 확인하는 동안 서윤은 휴대전화를 꺼냈다.준혁에게서 온 메시지가 스무 개를 넘었다.전화 받아.결과 나왔어?나도 병원 갈 거야.우리 얘기부터 하자.서윤은 화면을 껐다.잠시 뒤 간호사가 종이를 건넸다.“다음 검사 일정입니다. 변동 생기면 연락드릴게요.”“네.”서윤은 종이를 가방 안쪽에 넣었다.다시 잃어버리지 않도록 사진도 찍었다.준혁이 자신의 결과를 서랍 이중 바닥에 숨긴 것과 달리, 서윤은 모든 기록을 남겼다.진료실에서 나오자 나연에게 전화가 왔다.“어떻게 됐어?”“현재는 음성이야.”전화기 너머에서 잠시 말이 없었다.“다행이다.”“응.”“괜찮아?”서윤은 병원 복도 끝 창문 앞에 멈췄다.“아직 모르겠어.”“추적검사는?”“해야 해.”“전부 예약했어?”“응.”나연은 더 묻지 않았다.서윤이 먼저 말했다.“준혁한테는 아직 말 안 했어.”“말할 의무는 없어. 네 의료정보니까.”“아마 알아내려고 할 거야.”“병원에서 네 동의 없이 넘길 수 있는 정보는 아니야.”서윤은 유리창 너머 주차장을 내려다봤다.“내가 음성이면 자기가 한 일이 없어지는 줄 알까?”나연이 짧게 대답했다.“그 인간이면 그럴 수도 있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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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음성이면 이혼할 이유도 없잖아.”서윤은 준혁이 보낸 문자를 캡처했다.그리고 그대로 나연에게 전송했다.십 분 뒤, 서윤은 나연의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나연은 휴대전화 화면부터 봤다.“이걸 진짜 보냈네.”“응.”“자기가 뭘 했는지 아직도 모르는 거야.”서윤은 가방에서 검사 결과와 예약 확인서를 꺼냈다.“현재는 음성이야. 추적검사 남았고.”나연은 서류를 받아 날짜부터 확인했다.“병원 기록은 전부 보관해. 문자도 삭제하지 말고.”“준혁은 치료하면 끝나는 일이라고 생각해.”“치료는 치료고, 이혼은 이혼이지.”서윤이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다.“법적으로도 돼?”나연은 책상 위에 놓인 파일을 열었다.“하나씩 보자.”첫 번째 묶음에는 준혁의 외도 기록이 있었다.호텔 결제 내역.여자들에게 보낸 메시지.일정표.법인카드 사용 내역.집 안에서 다섯 여자를 불러들였던 당시 사진까지.나연이 손가락으로 파일을 두드렸다.“반복적인 부정행위. 이것만으로도 재판상 이혼 사유를 주장할 수 있어.”다음 파일을 펼쳤다.이번에는 옥자와 미선이었다.서윤의 몸을 조롱한 녹음.생활비를 끊겠다는 말.하은 앞에서 벌어진 폭행 장면.미선이 서윤을 밀치고 손을 올렸던 영상.나연이 말했다.“배우자 본인뿐 아니라 시가에서 받은 대우도 같이 볼 수 있어. 지속적인 모욕과 폭행, 그걸 준혁이 방치하거나 네 탓으로 돌린 정황까지.”서윤은 화면 속 자기 얼굴을 오래 보지 않았다.“그때는 이게 이렇게까지 쌓일 줄 몰랐어.”“그래서 기록이 필요한 거야.”나연이 마지막 봉투를 열었다.HIV 확진서 사본이 나왔다.예약 취소 기록도 함께였다.“그리고 이거.”서윤의 눈이 서류 위에 멈췄다.“감염 사실을 알고도 배우자에게 숨겼다는 정황. 의료적으로 어떤 위험이 실제 발생했는지와 별개로, 네 안전과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칠 사실을 숨긴 건 혼인관계 파탄을 주장할 때 중요한 사정이 될 수 있어.”“준혁은 내가 안 옮았으니까 끝났대.”“결과가 음성이라는 것과 숨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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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사진 속 나는 호텔 로비에 서 있었다.도현은 반걸음 뒤에서 나를 보고 있었고, 사진 아래에는 날짜와 시간이 찍혀 있었다.나연이 두 번째 사진을 꺼냈다.이번에는 엘리베이터 앞이었다.“몇 장이야?”“지금 받은 것만 열세 장.”“준혁이 찍은 건 아니지?”“사설업체를 쓴 흔적이 있어. 정확한 건 확인해야 하고.”나는 사진을 한 장씩 넘겼다.도현의 차에서 내리는 모습.호텔로 들어가는 모습.다음 날 같은 옷을 입고 나오는 모습까지 있었다.숨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이 정도면 부정행위 증거로 쓸 수 있어?”나연이 곧바로 답했다.“준혁 쪽에서는 그렇게 주장할 거야.”“나도 인정할게.”“서윤아.”“했잖아.”나는 사진을 다시 봉투 안에 넣었다.“도현 씨 만났고, 같이 잤어. 없던 일처럼 만들 생각 없어.”나연이 의자에 등을 붙였다.“그 말 법정에서도 할 수 있어?”“응.”“위자료 청구 들어와도?”“내 책임이면 받아야지.”나연은 잠시 나를 봤다.“그래서 더 정확하게 정리해야 해.”그녀가 노트북을 돌렸다.화면에는 날짜별로 정리된 표가 떠 있었다.준혁의 첫 외도 확인 시점.호텔 결제 기록.문세라와의 연락.집 안에 여자 다섯을 불러들였던 날.미선에게 맞았던 날짜.생활비 카드 한도가 끊긴 날.준혁의 HIV 확진일.그리고 내가 도현을 처음 만난 날짜.“네가 도현 씨와 관계를 시작한 건 여기.”나연이 화면을 짚었다.“그 전에 이미 준혁의 장기 외도 기록이 있고, 별거에 가까운 생활이 시작됐고, 폭행과 경제적 통제도 있었어.”“응.”“이 순서가 중요해.”“내가 먼저 바람난 것처럼 만들겠지?”“이미 그러고 있어.”나연은 상대 측에서 보낸 문서를 내 쪽으로 밀었다.맨 첫 줄부터 눈에 들어왔다.배우자의 부정행위 및 혼인관계 파탄 유발.헛웃음이 나왔다.“혼인관계 파탄을 내가 유발했대?”“저쪽 주장이야.”“집에 다섯 명 불러놓고?”“그래서 증거를 시간순으로 맞추는 거야.”나연이 다른 파일을 열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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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옥자가 먼저 연락해온 건 그날 저녁이었다.잠깐 보자. 준혁이 없이.나는 답하지 않았다.십 분 뒤 다시 문자가 왔다.하은이 문제야. 너도 엄마면 무슨 말인지 알겠지.하은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휴대전화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약속 장소는 호텔 라운지였다.옥자는 이미 와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차 두 잔과 두꺼운 서류봉투가 놓여 있었다.“앉아.”나는 가방을 옆자리에 두고 맞은편에 앉았다.“하은이 얘기라면서요.”“성질 좀 죽여. 나도 싸우자고 부른 거 아니니까.”옥자는 봉투를 내 쪽으로 밀었다.“열어봐.”안에는 부동산 등기 관련 서류와 계좌 내역이 들어 있었다. 처음 보는 아파트 주소도 있었다.“이게 뭔데요.”“네가 원하는 거.”“제가 뭘 원한다고 했어요?”“이혼한다며.”옥자는 찻잔을 들었다.“그러면 받을 건 받고 나가야지.”나는 서류를 다시 봉투에 넣었다.“얼마예요?”옥자의 눈썹이 움직였다.“역시 돈 얘기하니까 빠르네.”“어머니가 돈으로 얘기하러 왔으니까 묻는 거예요.”“아파트 하나 넘겨줄게. 현금도 따로 챙겨주고.”“그리고요?”“하은이도 네가 키워.”그 말에서 손이 멈췄다.옥자가 내 얼굴을 살폈다.“준혁이 설득은 내가 해. 친권이니 양육권이니 물고 늘어지지 못하게 할 테니까.”“대신 뭘 원하는데요.”“진단서.”예상했던 말인데도 속이 서늘해졌다.“무슨 진단서요?”“알면서 뭘 물어.”옥자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준혁이 병 말이야.”나는 가방 안에 손을 넣었다.“그걸 어떻게 하라고요.”“밖으로 안 나가게 해.”“이미 변호사한테 갔어요.”“그 여자 입도 막으면 되잖아.”“나연이요?”“변호사면 돈 받고 일하는 사람이잖아.”나는 옥자를 한동안 쳐다봤다.“어머니는 지금 뭘 제안하는지 알아요?”“내 아들 인생 살리자는 거야.”“아들 인생만요?”“너도 나쁠 거 없어. 하은이 데리고 나가서 편하게 살고, 회사 키우고. 서로 조용히 끝내면 얼마나 좋아.”나는 가방 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테이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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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새집 현관 벨이 세 번째 울렸을 때 나는 화면부터 확인했다.준혁이었다.한 손에는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고, 다른 손으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서윤아. 열어.”나는 대답하지 않았다.잠시 뒤 주먹으로 문을 쳤다.“안에 있는 거 알아. 문 열어.”하은은 방에서 자고 있었다.나는 바로 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준혁이 집 앞이야.”“문 열지 마. 관리실에 연락하고, 계속 그러면 경찰 불러.”현관 밖에서 준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도현이 여기 있어?”나는 인터폰 녹화를 켰다.“가.”“그 새끼 여기 있냐고.”“없어.”“거짓말하지 마.”문손잡이가 몇 번 흔들렸다.“한서윤, 나 미치게 하지 마. 도현 어디 있어.”나는 대답 대신 관리실에 전화했다.잠시 뒤 경비 직원 둘이 올라왔고, 준혁을 현관에서 떼어냈다.엘리베이터 쪽으로 끌려가면서도 준혁은 계속 소리쳤다.“걔 만나지 마!”문이 닫힌 뒤 휴대전화가 바로 울렸다.받지 않자 문자가 이어졌다.도현이랑 끝내.내가 가만 안 둬.그 새끼 죽여버릴 거야.나는 마지막 문장을 캡처했다.다음 날 아침, 나연은 그 메시지를 보자마자 서류를 꺼냈다.“이건 그냥 부부싸움으로 넘길 일이 아니야.”“접근금지 가능해?”“지속적인 방문, 연락, 위협 정황까지 묶어서 임시 조치를 신청해볼 수 있어. 판단은 법원이 하지만 지금 자료는 최대한 전부 내자.”어제 인터폰 영상.관리실 통화 기록.준혁이 보낸 문자.반복된 전화 목록까지 넘겼다.나연이 파일을 저장했다.“새집 주소를 어떻게 알았는지도 확인해야 해.”“회사 사람 통해 알아냈을 수도 있어.”“회사에도 보안 요청 넣어.”나는 바로 비서실에 연락했다.준혁이 오면 대표실로 올리지 말 것.사전 약속 없는 방문은 막을 것.소란이 생기면 경호팀과 바로 연결할 것.그 지시를 내린 지 세 시간도 지나지 않아 연락이 왔다.대표님, 강준혁 씨 1층입니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올려 보내지 마세요.”비서가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기 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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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감염내과 대기실에서 준혁의 이름이 세 번째로 불렸다.“강준혁 님, 진료실 앞에서 기다려주세요.”준혁은 휴대전화만 내려다봤다.서윤에게 건 전화가 또 끊겼다.연결할 수 없습니다.다시 걸었다.같은 안내가 나왔다.“씨발.”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쳐다보자 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 끝으로 갔다.이번에는 문세라를 눌렀다.한 번.두 번.곧 통화가 끊겼다.메시지를 보냈다.나 병원 왔어.전송되지 않았다.차단이었다.“이년까지.”윤채린.차단.오유진.차단.최라희.차단.배지아까지 연락이 되지 않았다.한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자기 먼저 찾던 여자들이었다. 호텔 방을 잡아달라던 여자, 명품을 사달라던 여자, 보고 싶다며 회사 앞으로 오던 여자도 있었다.지금은 다섯 명 모두 전화 한 번 받지 않았다.준혁은 연락처를 내리다가 어머니 이름을 눌렀다.신호가 오래 갔다.받지 않았다.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곧 문자 하나가 들어왔다.옥자였다.병원 치료나 받아. 당분간 집에 오지 마.준혁이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옥자가 받자마자 말했다.“왜.”“엄마까지 이럴 거야?”“네가 서윤 회사 찾아가서 난리 쳤다며.”“걔가 먼저 사람 미치게 만들었잖아.”“도현인지 뭔지 그 남자 죽인다는 소리까지 했다며.”“말이 그렇다는 거지.”“이제 네 말 한마디가 다 증거야.”준혁의 얼굴이 굳었다.“엄마도 서윤 편이야?”“누구 편이고 자시고 너 때문에 집안까지 엮이게 생겼어.”“엄마가 걔 만나서 얘기했다며.”전화기 너머가 잠깐 조용해졌다.“그건 네가 알 거 없어.”“돈 준다고 했어?”“치료나 받아!”옥자가 전화를 끊었다.준혁은 다시 걸었지만 이번에는 받지 않았다.대기실 직원이 가까이 왔다.“강준혁 님?”“네.”“진료 들어가셔야 합니다.”준혁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그때 병원 안내데스크 쪽에서 한 남자가 다가왔다.“강준혁 씨 맞으십니까?”준혁이 걸음을 멈췄다.“누구세요?”남자가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강준혁 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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