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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121화

산부인과 접수창구에서 서류 한 장을 받았다.이름.생년월일.주소.보호자 연락처.익숙한 항목을 차례대로 적다가 손이 멈췄다.혼인 상태.기혼.미혼.이혼.칸은 세 개뿐이었다.나는 펜 끝을 세 번째 칸에 가져갔다.이혼.직접 써놓고 한동안 그 두 글자를 봤다.판결문을 들었을 때보다 이상하게 더 실감났다.십 년 넘게 준혁과 엮여 살았고, 결혼한 뒤에는 어디를 가든 배우자 이름이 따라붙었다.보험서류에도.병원 문진표에도.하은의 보호자 서류에도.집 계약에도.이제 그 한 칸이 바뀌었다.간호사가 서류를 받아 들었다.“보호자 연락처는 이 번호 맞으세요?”적어놓은 건 나연의 번호였다.“네.”“배우자 연락처는 따로 없고요?”“없어요.”말하고 나니 더 이상 설명할 것도 없었다.진료실에 들어가자 담당의가 태아 상태와 다음 검사 일정을 확인했다.“컨디션은 어떠세요?”“괜찮아요.”“수면은요?”잠깐 대답이 늦었다.“전보다 나아요.”완전히 괜찮다고 말하고 싶진 않았다.집 현관에서 소리가 나면 아직 한 번씩 화면부터 확인했다.준혁이 새 번호로 연락했던 흔적도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다.판결이 확정된 뒤 첫 번째로 온 건 가족사진이었다.하은이 어릴 때 찍었던 사진.나와 준혁이 양쪽에 앉아 있었고, 가운데 하은이 웃고 있었다.그 아래 한 문장.우리 이렇게 살았잖아.나는 답하지 않고 차단했다.다음 날에는 다른 번호로 음성메시지가 왔다.“서윤아. 사진 봤지?”나는 첫 문장까지만 듣고 삭제했다.며칠 뒤 또 다른 번호.이번에는 더 길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다 잃고 나니까 이제 알겠어. 회사도 없고, 집도 엉망이고, 하은이도 못 보고. 네가 원하는 대로 됐잖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면 안 돼?”나는 끝까지 듣지 않았다.그가 잃은 것에는 언제나 회사와 돈과 아이와 내가 함께 묶여 있었다.무엇을 잘못했는지보다 무엇을 빼앗겼는지가 먼저였다.차단.또 차단.어느 날은 가족사진을 다시 보내왔다.이번에는 사진 위에 직접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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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병원에 도착해서도 나는 검사실 번호부터 확인했다.오늘은 산전 진료보다 먼저 잡아둔 추적검사가 있었다.처음 음성 결과를 받았던 날 이후 몇 번이나 달력을 확인했는지 몰랐다.준혁의 확진 사실을 발견한 날짜.마지막으로 관계했던 시점.첫 검사.그리고 오늘.내 휴대전화 일정에는 병원 예약만 따로 표시돼 있었다.간호사가 이름을 불렀다.“한서윤 님.”검사실로 들어가 채혈을 마친 뒤 대기실에 앉았다.배가 많이 불러 오래 같은 자세로 있기 힘들었다. 옆으로 몸을 조금 돌리자 아이가 안에서 움직였다.나는 배 위에 손을 올렸다.“조금만 기다려.”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나도 몰랐다.아이에게인지.내 몸에게인지.처음 검사받았던 날에는 결과를 기다리는 몇 시간이 견디기 힘들었다.이번에는 조금 달랐다.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다.다만 결과가 무엇이든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은 분명했다.휴대전화가 울렸다.도현이었다.오늘 검사일 맞죠?나는 짧게 답했다.네. 기다리는 중이에요.곧 답장이 왔다.끝나면 연락 줘요.그게 전부였다.준혁은 예전 같으면 몇 번이고 전화를 했을 것이다.결과가 나왔는지.자기 때문인지.이혼에 쓸 건지.아이에게 문제가 없는지보다 자신에게 어떤 불이익이 생기는지를 먼저 물었을 것이다.이제 그 전화는 오지 않았다.정확히는 올 수 없었다.차단된 번호 목록만 여러 개 남아 있었다.한 시간이 지나고 진료실로 불렸다.의사는 모니터를 확인한 뒤 나를 봤다.“이번 추적검사도 음성입니다.”나는 바로 말을 하지 못했다.첫 검사 때도 들었던 말이었다.그런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목 안쪽이 먼저 아팠다.“음성이요?”“네.”확인하고 또 확인했다.“이번에도요?”“네.”나는 고개를 숙였다.울지는 않았다.그냥 손에 힘이 풀렸다.가방 끈을 쥐고 있던 손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다행이네요.”내 입에서 나온 말인데도 남의 말처럼 들렸다.의사는 남아 있는 추적 일정도 함께 확인했다.“예정된 일정은 여기까지 확인하시고, 이후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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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간격이 짧아졌어요.”간호사가 시간을 확인했다.나는 침대 난간을 잡았다.조금 전까지 손에 들고 있던 HIV 추적검사 결과지는 가방 안에 들어가 있었다.음성.그 단어를 확인한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다른 숫자들이 눈앞에 있었다.진통 간격.태아 심박수.출산 예정 시각.배가 다시 조여왔다.이번에는 말할 여유도 없었다.눈을 감고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간호사가 옆에서 말했다.“호흡 천천히 하세요.”통증이 풀리자 나는 가장 먼저 물었다.“아이는 괜찮아요?”“네. 지금은 잘 버티고 있어요.”그 말 하나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휴대전화가 울렸다.도현이었다.간호사가 화면을 확인해 내게 보여줬다.“받으실래요?”고개를 저었다.“문자만 보내주세요. 분만 들어간다고.”잠시 뒤 화면에 답장이 왔다.알겠습니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아이만 봐요.그 뒤로 연락은 오지 않았다.그게 고마웠다.준혁이었다면 몇 번째 병실인지, 누가 옆에 있는지, 아이가 자기 아이인지부터 확인하려 했을 것이다.도현은 기다렸다.진통이 다시 시작됐다.나는 이불을 움켜쥐었다.이번 임신 내내 아이는 한 번도 온전히 아이로만 존재하지 못했다.처음에는 누구 아이인지가 문제였다.준혁은 친자부터 확인하려 했고, 나는 검사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그다음에는 HIV였다.내 몸이 괜찮은지.아이에게 위험은 없는지.추적검사 날짜가 올 때마다 임신보다 검사표를 먼저 봤다.오늘에서야 그 공포 하나를 내려놓았다.그리고 아이가 나오려 하고 있었다.“한서윤 산모님, 분만 준비하겠습니다.”의료진이 움직였다.나는 천장을 봤다.이상하게 준혁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누구 아이인지도 그 순간에는 중요하지 않았다.지금 필요한 건 아이가 안전하게 태어나는 것뿐이었다.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통증이 오고 지나가기를 반복했고, 몸은 내 의지보다 먼저 움직였다.“조금만 더 하시면 됩니다.”누군가 내 손을 잡아줬다.나는 그 손이 누구 것인지 확인하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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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친자검사를 미루지 않았다.출산 뒤 몸이 조금 회복되자 필요한 절차부터 확인했다.아이와 도현의 검체를 정식으로 채취했고, 도현도 아무 말 없이 동의했다.검사받던 날에도 그는 묻지 않았다.“내 아이일 것 같아요?”대신 서류에 서명한 뒤 내게 말했다.“결과는 서윤 씨가 먼저 봐요.”“같이 안 봐도 돼요?”“먼저 혼자 보고 싶다면서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결과가 누구에게 유리한지 확인하는 자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준혁의 아이면 준혁이 이긴 것도 아니었고, 도현의 아이면 도현이 이긴 것도 아니었다.태어난 아이에게는 애초부터 승패가 없었다.며칠 뒤 검사기관에서 연락이 왔다.결과가 나왔다는 말에 나는 회사로 보내지 말고 직접 수령하겠다고 했다.봉투를 받은 건 오후였다.차 안에 혼자 앉아 한참 뜯지 못했다.하은이 태어났을 때는 이런 봉투가 필요 없었다.아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의심할 이유도 없었고, 그것을 증명해야 할 일도 없었다.이번에는 달랐다.내 선택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변명하고 싶지 않았다.봉투 가장자리를 뜯었다.종이를 꺼냈다.이름부터 확인했다.내 아이.그리고 서도현.아래로 내려가자 숫자와 검사 항목이 이어졌다.나는 마지막 판정 부분에서 손을 멈췄다.한 번 읽었다.다시 읽었다.도현과 아이 사이의 친자관계가 확인됐다는 내용이었다.나는 종이를 내려놓았다.기쁘다는 말부터 나오지 않았다.다행이라는 생각도 조금 늦게 들었다.가장 먼저 든 건 이제 끝났다는 생각이었다.누구 아이냐는 질문.준혁이 내 배를 보며 자기 핏줄부터 따졌던 순간.병보다 아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먼저 물었던 얼굴.도현이 자기 아이인지 확인되기 전에는 어떤 자리도 요구하지 않겠다고 했던 말.그 모든 것이 종이 한 장에 멈췄다.나는 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그가 바로 받았다.“결과 나왔어요?”“네.”잠깐 침묵이 생겼다.“말해줘도 돼요?”내가 물었다.“서윤 씨가 말하고 싶으면요.”나는 검사지를 다시 봤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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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도현은 친자검사 결과를 들은 다음 날에도 반지를 가져오지 않았다.꽃도 없었고, 결혼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대신 양손에 장바구니를 들고 우리 집으로 왔다.“이건 뭐예요?”“하은이 딸기 먹고 싶다고 했잖아요.”“그걸 기억했어요?”“어제 세 번 말했는데요.”현관 안쪽에서 하은이 뛰어나왔다.“도현 아저씨!”도현은 아이에게 손부터 흔들었다.“딸기 사 왔어.”“진짜?”하은의 관심은 곧바로 장바구니로 옮겨갔다.나는 그 모습을 보다 도현 손에 들린 다른 봉투를 봤다.기저귀였다.“그건 왜 샀어요?”“필요하다면서요.”“내가요?”“어제 전화할 때 그랬어요. 마지막 한 팩이라고.”나는 기억나지 않았다.출산 뒤 잠이 부족해진 탓인지 말한 것조차 자주 잊었다.도현은 아이를 보러 방으로 들어가지 않았다.소파에 앉아 기다렸다.“안 보고 싶어요?”“보고 싶죠.”“그런데요?”“자고 있다면서요.”그는 냉장고에 딸기를 넣은 뒤에도 내 허락 없이 집 안을 돌아다니지 않았다.이 사람은 자기 아이가 있다는 걸 확인한 다음에도 갑자기 집의 주인처럼 행동하지 않았다.그게 오히려 낯설었다.하은이 딸기를 씻겠다고 주방으로 가자 내가 먼저 말했다.“결과 보고 무슨 생각 했어요?”도현은 잠깐 나를 봤다.“많이 했죠.”“뭐요?”“내가 뭘 해야 하나.”“그래서 답 나왔어요?”“서두르지 말자.”나는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라 그를 바라봤다.도현이 웃었다.“청혼이라도 할 줄 알았어요?”“조금은.”“싫어요?”“지금은.”“그럼 안 하면 되죠.”대답이 너무 쉬웠다.나는 소파 맞은편에 앉았다.“아이 도현 씨 아이예요.”“알아요.”“그러면 보통은 책임진다고 결혼 얘기부터 하지 않아요?”“책임이 꼭 결혼식부터 해야 생기는 건 아니니까.”“그럼 뭘 할 건데요?”“필요한 거.”도현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지 않았다. 거창한 계획을 늘어놓지도 않았다.“병원 가야 하면 같이 갈 수 있고, 아이 보러 오라고 하면 오고, 돈 필요한 부분은 책임질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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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준혁은 예약 시간보다 삼십 분 일찍 병원에 도착했다.감염내과 대기실 의자에 앉은 뒤에도 휴대전화를 내려놓지 못했다.서윤의 번호.차단.하은에게 직접 연락할 수 있는 통로도 막혀 있었고, 부모에게 보낸 메시지는 읽음조차 뜨지 않았다.마지막으로 문세라의 이름을 눌렀다가 화면을 껐다.그 여자 역시 오래전에 자신을 차단했다.“강준혁 님.”간호사가 이름을 불렀다.준혁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진료실로 들어갔다.의사는 검사 결과와 이전 진료기록을 확인하고 있었다.“약은 정해진 대로 복용하고 계십니까?”“네.”“빠뜨린 날은 없으세요?”준혁은 잠시 생각했다.“한 번 있습니다.”“앞으로는 임의로 거르지 마세요. 꾸준히 치료받는 게 중요합니다.”준혁은 의자 깊숙이 앉았다.“계속 약 먹으면 되는 겁니까?”“현재 상태에 맞춰 치료를 이어가고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으셔야 합니다.”“그러면 정상적으로 살 수 있어요?”의사는 쉽게 단정하지 않았다.“치료를 지속하면서 건강 상태를 관리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진료를 미루지 말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준혁은 한동안 책상 위만 봤다.처음 확진 결과를 받았을 때는 병원에 다시 오기 싫었다.결과가 잘못됐다고 생각했고 싶었고, 다른 병원에서 검사하면 달라질 수도 있다고 믿었다.예약을 취소했다.서윤에게는 말하지 않았다.그때는 그게 가장 쉬웠다.자기가 입을 다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았다.“선생님.”“네.”“제가 처음부터 치료받았으면 달라졌습니까?”의사가 준혁을 봤다.“어떤 부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그냥 다요.”준혁은 말을 고르다가 결국 웃었다.“와이프도 안 떠났을까요?”“그건 제가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준혁의 웃음이 사라졌다.“병 때문에 이혼했습니다.”의사는 기록에서 눈을 떼었다.“이혼 과정은 제가 알 수 없습니다.”“확진 숨겼다고 그 난리를 친 겁니다.”말하고 나서도 준혁은 자기가 왜 설명하고 있는지 몰랐다.“전 무서워서 말 못 한 것뿐이에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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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병원비를 결제하지 못한 준혁은 결국 지갑 속 현금으로 일부를 냈다.영수증을 받아 들고 나오자 휴대전화에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은행이었다.다시 걸자 담당자가 곧바로 본인 확인부터 했다.“강준혁 고객님, 담보대출 관련해서 안내드릴 사항이 있습니다.”준혁은 병원 건물 앞에 멈췄다.“무슨 안내요.”“담보로 설정된 주식 관련 추가 조치가 예정돼 있습니다.”“내 주식 마음대로 건드리지 마세요.”“계약상 조건에 따라 진행되는 부분입니다.”“그거 팔면 갚으면 되잖아요.”상대는 숫자를 차례대로 설명했다.남은 원금.이자.담보 가치.처분 후에도 남을 수 있는 채무.준혁은 중간부터 듣지 않았다.“그래서 내 손에 얼마 남는데요.”전화기 너머에서 잠깐 침묵이 흘렀다.“현재로서는 잔여금이 발생한다고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준혁이 웃었다.“말을 왜 그렇게 복잡하게 해.”“추가 채무가 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준혁의 웃음이 멎었다.“내가 강림 주주였어요.”“현재 담보 설정된 지분을 기준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통화를 끊자 다른 알림이 들어왔다.퇴직금 관련 계좌였다.회사 손해배상 청구와 채권 절차 때문에 가용 금액이 제한됐다는 안내였다.준혁은 바로 강림 재무팀에 전화했다.받지 않았다.인사팀.연결되지 않았다.예전에 한마디면 회의실을 비우고 기다리던 사람들이 이제는 전화 한 통 받지 않았다.그는 태문에게 걸었다.한 번.두 번.세 번째에 통화가 연결되는가 싶더니 곧 끊겼다.잠시 후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회사 관련 연락은 법무팀을 통해라.준혁이 바로 답장했다.아버지, 나 지금 돈이 없습니다.읽음 표시가 떴다.답은 오지 않았다.대출만 좀 막아주세요.다시 읽음.없었다.준혁은 그대로 전화를 걸었다.이번에는 연결되지 않았다.“씨발.”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지만 계기판을 보다가 손이 멈췄다.이 차도 곧 가져가기로 돼 있었다.리스 정산과 미납 비용 때문에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준혁은 핸들을 잡은 채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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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준혁은 가족사진을 지갑에 넣다가 손을 멈췄다.서윤에게 연락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정확히는 할 수 없었다.전화번호를 바꿔가며 연락해도 차단됐고, 변호사를 통해 사적인 연락을 중단하라는 통보까지 받은 뒤였다.하은에게도 마음대로 연락할 수 없었다.부모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미선은 돈 얘기로 다시 전화하면 받지 않겠다고 했다.남은 이름은 하나였다.문세라.준혁은 휴대전화에서 세라의 대화창을 열었다.마지막 대화가 몇 달 전이었다.다시는 연락하지 마.그 아래 자신이 보낸 메시지가 여러 개 남아 있었다.잠깐만 만나자.설명할 게 있어.전화 한 번만 받아.전부 답이 없었다.준혁은 해외에 있는 세라의 현재 번호를 알고 있었다.예전에 비서에게 알아보라고 했고, 연락처를 삭제하지 않은 채 따로 저장해뒀다.새 메시지를 썼다.세라야. 나야.한참 기다렸다.전송 표시가 바뀌지 않았다.다시 보냈다.나 진짜 마지막으로 부탁할 게 있어.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준혁은 전화 버튼을 눌렀다.연결되지 않았다.다른 메신저를 열었다.검색창에 세라 이름을 넣자 프로필은 떴지만 메시지를 보낼 수 없었다.“씨발.”휴대전화를 내려놨다가 다시 집었다.메일 주소가 떠올랐다.누아벨 대표 메일.개인 메일.해외 법인에서 사용한다던 주소까지.준혁은 세 곳에 같은 내용을 보냈다.나 지금 상황이 안 좋아.큰돈 바라는 거 아니야.잠깐만 도와줘.나중에 반드시 갚을게.보내고 나니 자존심이 상했다.몇 년 전만 해도 세라에게 돈을 썼다.호텔비를 내고, 선물을 사고, 회사 인맥을 연결해줬다.세라가 갖고 싶다고 한 게 있으면 가격부터 묻지 않았다.이제는 자신이 돈을 부탁하고 있었다.준혁은 마지막 문장을 하나 더 붙였다.내가 너한테 해준 것도 있잖아.전송.십 분.삼십 분.한 시간이 지나도 답이 없었다.그는 세라의 SNS를 열었다.해외 호텔 테라스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사진 한쪽에는 남자의 손이 보였다.한태경이었다.준혁은 화면을 확대했다.손목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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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새 본사 출입문에는 아직 보호필름이 붙어 있었다.나는 한쪽 끝을 잡아 천천히 떼었다.유리문 가운데 새 로고가 드러났다.RIBBON BABY.뒤에서 직원들이 박수를 쳤다.“대표님, 축하드립니다.”나는 웃으며 문을 열었다.“들어가요. 오늘부터 여기서 일하는 거예요.”하은이 가장 먼저 뛰어 들어갔다.“엄마 회사 진짜 커졌다.”“뛰지 마.”“나 안 뛰었는데?”이미 복도 끝까지 가놓고 하는 말이었다.직원들이 웃었다.나는 품에 안고 있던 둘째를 조금 고쳐 안았다.아이는 사람들이 많아도 잘 잤다.하은은 다시 돌아와 동생 얼굴을 들여다봤다.“얘도 여기 직원이야?”“아니.”“그럼 나도 아니지?”“너도 아니야.”“그럼 왜 데려왔어?”나는 사무실 안을 둘러봤다.처음 리본베이비를 시작했을 때는 직원도 없었다.하은을 재우고 식탁에 앉아 주문서를 뽑았고, 포장 박스가 거실을 차지했다.준혁은 그걸 보면서 언제까지 애 엄마들 물건 팔 거냐고 했다.이제 그 물건을 파는 회사에 수십 명이 출근하고 있었다.“엄마가 어디서 일하는지 보여주려고.”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나 알아. 엄마 사장님이잖아.”옆에 있던 직원이 말했다.“대표님보다 따님이 더 잘 아시네요.”“그러게요.”새 사무실을 한 바퀴 도는 동안 직원들은 하은에게 자기 자리와 맡은 일을 설명해줬다.하은은 디자인팀 모니터 앞에서 가장 오래 멈췄다.“이거 아기들 쓰는 거예요?”“응. 새로 나올 제품이야.”“엄마도 봤어?”“대표님이 제일 먼저 보시지.”하은이 나를 돌아봤다.“엄마 진짜 사장 맞네.”“이제 믿어?”“조금.”그때 비서가 다가왔다.“대표님.”그녀의 시선이 로비 쪽으로 갔다.대형 화환 하나가 들어오고 있었다.나는 리본에 적힌 이름부터 봤다.강준혁 모친 박옥자.걸음을 멈췄다.비서가 물었다.“어떻게 할까요?”리본 아래 문구는 더 길었다.새 출발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하은 할머니가.나는 한참 보지 않았다.“돌려보내세요.”“보낸 쪽에서 다시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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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화

준혁은 한강변을 오래 걸었다.어디로 갈 생각은 없었다.주머니에는 현금 몇 장이 있었고, 손에는 병원에서 받은 약 봉투가 들려 있었다.약은 아직 남아 있었다.진료실에서 들었던 말도 기억났다.꾸준히 치료받으면 건강을 관리할 수 있다고 했다.그러니 병이 준혁을 여기까지 데려온 건 아니었다.준혁은 벤치에 앉았다.구겨진 서류를 꺼냈다.이혼 판결문이었다.원고와 피고는 이혼한다.몇 번을 읽어도 문장은 변하지 않았다.서윤은 이제 자신의 아내가 아니었다.옆 주머니에서는 반으로 찢어진 종이가 나왔다.문세라의 청첩장이었다.언제부터 가지고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세라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고, 해외로 나갔으며, 마지막 연락까지 법무팀을 통해 막았다.준혁은 청첩장을 다시 접으려 했다.이미 찢어진 종이는 맞물리지 않았다.휴대전화를 켰다.아버지.연결되지 않았다.어머니.받지 않았다.미선.차단.세라.차단.채린.유진.라희.지아.어느 이름을 눌러도 결과는 비슷했다.한때는 연락처가 너무 많아 여자 이름을 헷갈린다고 웃었다.열 명이 넘어서 다섯 명으로 줄였다고 자랑하기도 했다.그때는 누군가가 자신을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돈을 주면 남았고.선물을 사주면 다시 연락했고.화를 내다가도 호텔을 잡으면 왔다.서윤은 더 쉬웠다.십 년을 만났으니까.결혼했으니까.아이까지 있었으니까.무슨 짓을 해도 결국 집에 있을 사람이라고 믿었다.준혁은 연락처 맨 아래까지 내려갔다.한서윤.번호는 이미 여러 차례 차단돼 있었다.그래도 전화를 눌렀다.연결되지 않았다.다른 번호를 만들 수도 있었다.또 메시지를 보낼 수도 있었다.하지만 그마저도 이제 법적 문제가 될 수 있었다.준혁은 통화 화면을 닫았다.뉴스 알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리본베이비.해외 계약.상장 추진.대표 한서윤.사진 속 서윤은 자신이 알던 얼굴과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준혁은 기사를 끝까지 읽지 못했다.“나 없는데도 잘 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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