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정략 결혼은 끝냈어야 했다: Chapter 31 - Chapter 40

102 Chapters

31화 마지막 장을 장식할 사냥대회

31화대공의 집무실 밖에는 오랜만에 같은 마음을 품은 두 남자가 남았다.“대공 각하께서 어느 영애와 이토록 오래 대화를 나누신 건 처음이지 않습니까.”랑베르가 조심스레 말을 꺼내자, 피엘은 짧게 웃었다.“기대해도 좋을지 모르겠군.”두 사람은 한때 같은 길을 걷던 이들이었으나, 이제는 입장도 방식도 달랐다. 랑베르는 대공의 고독과 고집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쪽이었다.피엘은 달랐다. 그는 ‘후계’를 말했고, ‘책무’를 강조했다. 그 이름의 무게를 위해서라면 강권도 불사할 사람이었다.“결혼식이 끝나면 초야를 치르고, 곧장 북부로 떠나야 할 겁니다.”피엘이 낮고 차갑게 말했다.“당장 그렇게 결정하긴 어려울 겁니다.”랑베르가 난색을 표했지만, 피엘은 단호했다.“우리에겐 시간이 없습니다.”그 말이 허공에 묵직하게 가라앉았다.베라트 가문이 걱정하는 건 단순히 북부의 후계자 문제가 아니었다.건국 이래, 제국의 검은 언제나 그들 가문에서 나왔다. 그 명맥이 끊기는 순간, 제국의 중심이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리고 그것은 오래전 신전에서 내려온 신탁의 일부였다.“베라트의 피가 끊길 때, 제국도 함께 침몰하리라.”이제 황실조차도 그 신탁을 잊었다. 오랜 평화 속에서, 그 무거운 문장은 전설의 그림자처럼 흐려졌고, 그 의미를 기억하는 이는 오직 북부에 남은 소수뿐이었다.피엘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중얼거렸다.“우리는 아직도 그 날을 준비하고 있어야 하네. 황녀가… 어쩌면 우리 모두를 위한 마지막 불꽃일지도 모르니까.”***성 벨하임 바레노스 제국.축복연회 이후 한 달, 제국은 찬란한 축제의 열기로 물들었다. 그 마지막 장을 장식할 사냥대회의 날이 마침내 밝았다.황실이 마련한 거대한 천막이 숲 가장자리에 세워지고, 귀족 가문과 이들의 수행원들로 숲길은 활기로 가득 찼다.험한 숲 깊숙한 곳은 귀족 남성들의 무대였고, 귀족 여성들은 궁술이나 표적 맞히기 같은 오락에 참여했다.제국의 오래된 전통에 따라, 귀족 부인들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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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숲의 기류, 알 수 없는 낌새

32화예년에는 늘 황후가 폐회식을 맡았지만, 금번은 달랐다. 황후는 지금 제국과 왕국들 사이의 무역거래에 전력을 쏟고 있었다.그녀는 사적인 자금을 운용해 일황자의 세를 견제하고, 은밀한 비자금으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며 조심스럽게 권력을 다져가고 있었다.한편, 멀찌감치에서 황후와 황녀를 바라보던 말라르메 후작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전하. 카이사르는 정오쯤에 도착할 것입니다.”레나토는 예의 그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때부터 시작이군.”“예. 대공과 기사들이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 돌아오지 못할 시점입니다.”레나토는 지빌라를 향해 음험한 눈길을 보냈다. 눈웃음 너머엔 비열한 기색이 번지고 있었다.말라르메 후작이 곁눈질로 그를 살피며 말했다.“하지만… 서부 변경백은 이번 일에서 물러서겠다고 합니다.”“흥. 생각이 짧군.”“사냥대회가 끝나면 곧장 서부로 돌아가겠답니다.”“내게 줄을 대지 않겠다면… 철저히 도려내야겠지. 앞으로 모든 일에서 제외시키고, 지원금도 없던 일로 해.”궁술 대결을 위한 표적들이 하나둘씩 설치되고 있었다. 에르나와 레오노라가 황녀를 모시고 궁정 천막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때, 서부 변경백의 여동생 클로리스가 다른 영애들과 함께 다가왔다.“황녀 전하를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지빌라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클로리스… 잘 지냈니?”그녀는 영애들을 반갑게 맞으며 궁정 천막 안으로 초대했다. 밖에서는 청색과 백색 깃발 아래 귀족 자제들이 양편으로 나뉘어 궁술 대결을 준비하고 있었다.“조금 더 수도에 머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요.”클로리스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사냥대회가 끝나는 대로, 서부로 돌아가기로 했어요.”지빌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리스와 변경백을 신전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그들에게 서부에 닥칠 재난을 전했다. 그 말이 조프루아의 결정에 영향을 주었으리라.“수도에서 좋은 추억은 많이 남겼으면 좋겠구나.”"여기에 있는 영애들과 편지를 주고받기로 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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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황녀의 활과 검

33화프레데리크의 허리에 찬 검이 묵직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금속이 울리는 소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어딘가 불길한 파장이었다.그가 손잡이에 손을 얹자, 검은 곧바로 잠잠해졌다. 감각이 날카롭게 곤두섰다.그때였다. 서부 변경백 조프루아가 빠른 걸음으로 그를 찾아왔다.이번 일에는 관여하지 않으려 했던 조프루아였지만, 숲을 둘러본 뒤 스멀스멀 스며드는 불쾌한 기척을 외면할 수 없었다.“서부 변경백, 대공 각하께…”“인사는 됐다. 본론부터 말하지.”새벽녘의 서늘함은 가셨지만, 습한 기운이 낮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왔다. 조프루아는 잠시 숨을 고른 뒤 곧바로 말을 이었다.“아무래도… 숲이 심상치 않습니다.”프레데리크는 짧게 눈썹을 치켜올렸다.“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지?”조프루아는 군더더기 없이 답했다.“짐승들의 수가 예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습니다. 더구나, 발견된 발자국이 대부분… 숲 아래, 저지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순간, 프레데리크의 손 안에서 검이 다시 미세하게 떨렸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황녀의 손이었다.무거운 것을 들 일 없던, 창백하고 가녀린 손.그 손이 석검을 들었을 때, 그는 처음으로 알았다. 그가 모르는 무게를 그녀는 오래전부터 감당해왔다는 것을.짐승 떼가 숲의 저지대로 몰려든 것이라면— 위험했다. 그곳에는 황실 기사단이 있긴 했으나, 대부분 제대로 무기를 쥐어본 적도 없는 어린 귀족 자제들이었다.조프루아는 제 여동생을 생각하며 조급히 입을 열었다.“검이나 활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기사가 많지 않습니다. 만약―”“충분히 무슨 뜻인지 알았다.”프레데리크는 조프루아의 말을 끊고, 제 기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다른 가문에도 전해라. 사냥대회는 여기서 끝이다. 모두 숲 아래로 집결하라고.”곧바로 말머리를 돌려 숲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조프루아와 베라트의 기사들이 그 뒤를 이었다.***정오.해는 높았고, 숲 아래는 평온해야 했다.그러나 다음 순간……“까아악!”귀를 찢는 울음소리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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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카이사르의 욕망

34화에르나와 레오노라는 달려오는 짐승들을 보며 뒷걸음질치다 급히 숲 밖으로 내달렸다. 그럼에도 돌아보며 황녀를 걱정했다.레오노라는 잠시 저도 황녀와 함께 싸울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지만, 결단코 활을 쏘고 검을 휘두를 용기는 없었다. 황녀에 대한 의문을 가득 안고, 그녀는 두려움에 앞에 도망치는 것만 바빴다.귀족 자제들이 서로를 밀치며 도망치는 사이, 그녀들은 합류했지만 결국 서로를 놓치고 말았다. 레오노라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큰일 났다는 생각만 들었다.“뒤돌아가야 하나… 어쩌지…….”그때,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이런…… 황녀는 어쩌고, 여기서 뭘 하고 있지?”일황자 레나토는 숲의 입구 근처, 아수라장이 된 곳에서 떨어진 자리에서 관망하던 참이었다.말라르메 후작은 이 사태를 벌인 주범이었다.레나토는 그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을 뿐.“레오노라 클레브. 황자 전하께 인사드립니다…….”그는 황녀의 시녀, 레오노라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대공을 짝사랑한 여인이자, 자신의 누이가 직접 시녀로 들인 백작 영애였다.“황녀는 어쩌고 뭘 하느냐고 물었어?”“그건… 전하께서 먼저 피하라고 하셔서…….”“피하라 했다? 허, 웃기는군. 황녀가 그 자리에서 죽어 나자빠지면, 네 목숨은 온전할 수 있을까?”일황자는 황녀 지빌라가 당연히 위험한 상황에 놓일 것은 알았다. 만약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다면 그것 또한 운명이라 여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부리는 자가 제 할 일 다 하지 않는 것은 용서키 어려웠다.“용… 용서해 주세요!”레오노라가 바닥에 주저앉아 사죄했다.“이 죄를 기필코 물을 것이다, 레오노라 클레브.”레나토는 지켜보기만 하려던 마음을 접고 돌아서려던 참이었다. 그때, 말라르메 후작이 찾아와 그에게 귓속말을 했다.“카이사르가 도착했습니다.”그 말에 레나토의 입가에 천천히 비틀린 웃음이 번졌다.***한편, 카이사르는 초대장을 보내준 이의 의도가 궁금해 순순히 따라주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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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피투성이 황녀의 운명

35화지빌라는 이대로는 모두 전멸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미 쓰러진 병사들은 되살릴 수 없었다. 그녀의 명령으로 싸운 기사단이 하나둘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있었다.‘더는 안 돼. 퇴각해야 해!’그러나 입을 떼기도 전에, 울창한 숲 너머에서 또 다른 짐승 떼가 밀려들었다. 그 수는 이전보다 두 배— 아니,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지빌라는 활시위를 내려놓고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하지만 그 순간, 시야 한가운데에서 거대한 붉은 곰이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저건!’돌처럼 단단한 발 구르는 소리, 땅을 울리는 파열음. 그녀는 곧바로 자세를 낮추고 칼을 휘둘렀지만, 그 두꺼운 가죽은 칼끝조차 깊이 파고들지 못했다. 반격은커녕, 충격에 검이 튕겨나갈 뻔했다.곰의 앞발이 휘둘러 오는 것을 간신히 피했지만, 균형을 잃은 그녀는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때……퍼억!곰의 앞발이 그녀의 두 발목을 세차게 내리쳤다.“아악!”터질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다리에 감각이 무너졌다. 그 순간, 머릿속을 번갯불처럼 스쳐간 생각—‘이대로라면 회귀하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또 죽는다.’ 였다.절망이 그녀의 시야를 어둡게 덮쳤다. 싸움도, 제국도, 지키고자 했던 모든 것이 눈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바로 그 순간, 끔찍한 신음과 함께 고꾸라졌다. 거대한 짐승이 옆으로 쓰러지며 땅을 울리자, 지빌라는 본능적으로 몸을 피하려 움찔했지만, 두 다리가 상해 그 자리에 꼼짝 없이 쓰러져 있을 뿐이었다.시선이 닿는 끝자리, 역광 속에 카이사르가 서 있었다. 피를 뒤집어쓴 채 검을 든 실루엣은 짐승보다 위협적이면서도, 어딘가 지옥의 사신을 닮아 있었다.“카이사르……?”그녀가 힘겹게 이름을 부르자, 그는 한걸음에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거리가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준 그녀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았다.“내 이름을 불러 주어서 고맙군.”“……여기는 어떻게…….”그녀는 카이사르가 사냥대회에 나타나지 않아서 안도했었다. 그런데 역시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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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대공에게 품은 마음

36화카이사르는 눈을 감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약혼자인 그에게 계속 버틴다면… 이 자리에서 결투신청을 받아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이기리란 보장은…….’용병왕이라 불리는 자신도, 이 남자 앞에선 단지 이름뿐인가… 그런 생각이 스쳤다.그는 마침내, 천천히 황녀를 프레데리크에게 넘겼다.프레데리크는 카이사르를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본능이 먼저 경계를 세웠다.아름다웠던 황녀의 자태는 흔적조차 없었다. 드레스는 갈기갈기 찢겨 있었고, 손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두 발목은 꺾인 채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불과 반나절 되기 전, 그녀는 조심스럽게 수놓은 손수건을 건네며 그의 무운을 빌어주었다. 그 따뜻한 손길과 미소가, 지금은 핏빛으로 물든 채 그의 품 안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품 안의 무게가 이토록 낯설고, 이토록 절박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누군가의 계략이라면…….’그는 결코 가볍게 넘기지 않으리라 다짐했다.그때 레나토가 다가왔다. 프레데리크는 본능적으로 품을 더욱 단단히 조여 안았다.“쯧. 내 누이가 어쩌다…….”레나토의 보좌관 중 한 명을 불렀다.“궁에 신관을 불러다 놔라!”“네.”프레데리크는 그와 더는 말이 필요 없다는 듯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기려 했다.“시녀가 저 살겠다고 도망치더군. 그 죄를 물으려 한다. 대공의 생각은 어떤가?”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레나토가 말한 시녀가 황녀의 곁에 있던 자, 곧 레오노라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조사 후, 합당한 처벌은 필요할 것입니다.”그때, 레나토의 뒤편에서 작고 수척한 인영이 앞으로 나섰다. 프레데리크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그의 눈에 두 장면이 겹쳐졌다. 죽을힘을 다해 버틴 황녀의 처참한 몰골. 그리고 도망쳤다는 시녀의 단정한 모습.‘…….’피가 차갑게 식었다. 검을 제대로 잡아본 적도 없는 그녀가 짐승의 발톱 앞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었다. 하지만—그녀의 직분이란, 시녀로서 황녀 곁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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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그들은 의무를 저버렸어

37화황녀는 시녀들을 먼저 피신시키고, 끝내 그녀는 쓰러졌다. 처참한 몰골이었으나,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처럼 느껴졌다.조프루아는 서부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알았지만, 가슴 한구석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는 황궁으로 향하려는 대공에게 다가가 낮게 말했다.“이곳 피해 상황은 제가 정리해 보고드리겠습니다.”“부탁하지.”대공은 황녀의 몸을 망토로 꼼꼼히 감싼 뒤 말 안장 위에 함께 올랐다. 그들과 함께 북부 기사들이 하나둘 말을 몰고 떠나갔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조프루아는, 이번 사태가 결코 우연일 리 없다고 느꼈다.“오라버니!”“클로리스… 무사해서 다행이다.”“네… 너무 무서웠어요. 그런데 황녀 전하는…….”클로리스의 시선이 멀어져 가는 말 위 황녀의 모습에 닿자,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조프루아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황궁에 신관을 불렀으니… 괜찮으실 거다.”그래도 그는 믿고 싶었다. 황녀를 치유할 만큼의 기적은, 아직 남아 있으리라.***지빌라는 달리는 말의 진동에 눈을 떴다. 순간, 부러진 발목에서 송곳 같은 통증이 밀려와 숨이 턱 막혔다. 미간을 일그러뜨린 채, 본능적으로 제 몸을 감싸는 품 안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카이…사르…….”“……약혼자의 품에서 다른 남자의 이름을 부르다니. 어이가 없군.”익숙한 음성이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지빌라는 눈을 비비듯 감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프레…데리크…? 언…제… 윽!”“얘긴 나중에 하지. 금방 황궁에 닿아. 신관 불러놨으니까… 조금만 버텨.”프레데리크는 품에 안긴 그녀가 흔들리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며, 말의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했다. 그의 손끝은 섬세했고, 움직임은 계산된 듯 매끄러웠다. 다만 품 안의 무게를 놓치지 않으려 죄어 오는 팔의 힘만은, 그 자신도 다스리지 못했다.지빌라는 잠시 머릿속이 아득했지만, 카이사르가 아닌 프레데리크의 품이라는 사실에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차디찬 고통과 긴장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지빌라는 조용히 눈을 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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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차가운 배려와 심문

38화지빌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레오노라도 있었어요. 당신도 알잖아요. 그녀만큼은… 데려와요.”“예외란 있을 수 없어.”그녀가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서려 했다.프레데리크가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절름발이라도 되고 싶나?”지빌라는 굳은 채 앉아 있었다.그는 매서운 눈으로 물었다.“그 지경이 되도록 시녀들을 지키려는 이유가 뭐지? 당신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면, 그들도 결코 목숨을 부지하긴 힘들었어. 그걸 몰랐다고는 하지 않겠지?”지빌라는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나는… 검과 활을 사용할 줄 알아요. 내 목숨 정도는 지키리라 생각했어요. 그들이 있으면 방해만 될 테니까, 도망치라고 했을 뿐이에요.”프레데리크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느닷없이 그녀가 카이사르에게 안겼던 순간이 떠올랐다. 다시는 그런 일을 보고 싶지 않았다.“처음부터 무모한 짓이었군. 자신의 실력을 과신했던지. 앞으로 이번 같은 일은 두 번 다시는 묵과하지 않을 거야.”그는 이런 묘한 감정이 낯설었다.“다른 남자의 품에 안기는 일도.”말을 뱉고 나서야, 그는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챘다. 이상한 일이었다. 목 안쪽이 뻐근하게 조여 왔다. 당연히 불쾌해야 할 이유가 없는데, 정작 이유를 찾을수록 속만 더 타들어 갔다.지빌라는 당황했다. 레오노라를 생각해서라도 그가 상황을 수습해 줄 거라 믿었는데.그녀는 두 손을 꼭 움켜쥐었다. 말끝을 매만지듯 입술을 달싹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내가 말이 서툴렀어요. 프레데리크… 내 시녀들만큼은. 제발, 상처 하나 없이 돌려보내 주세요.”잠시, 그가 지빌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지만, 긴 숨을 한 번 내쉬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심문하고 이상 없으면, 돌려보낼 테니, 쉬어.”그의 시선은 그녀의 드레스 아래로 보이는 부러졌던 발목으로 향했다. 지금은 멀쩡해졌지만, 그 피와 고통의 흔적은 아직도 그의 기억을 떠나지 않았다.“프레데리크…….”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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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대공과 함께 서부로 향하고 싶습니다

39화프레데리크는 조용히 시선을 들어, 레오노라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다시 묻지. 황녀를 두고 떠난 시각은 언제지?”“……정오가 막 지난 무렵이었어요. 짐승들이 떼로 몰려들었고, 황실 기사단이 앞을 막고 있었어요.”“계속 말해. 떠오르는 대로.”“사람들이 흩어지고 아수라장이 되었어요. 숲을 벗어나려는 길이었는데… 무심코 다른 길로 빠졌죠, 그곳에 일황자 전하께서 계셨어요.”프레데리크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조용히 정황을 맞춰 나갔다. 그 역시 일황자를 가장 의심스러운 인물로 보고 있었다. 레오노라가 그와 함께 숲으로 돌아온 시각, 그 전후의 흐름을 하나하나 이어붙이고 있었다.일황자가 레오노라를 데리고 다시 숲으로 들어와 그들을 만난 시점을, 프레데리크는 머릿속에서 시간으로 재고 있었다.그는 아무 말 없이 문서만 바라보았다. 그 침묵이 레오노라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의 생각이 어디까지 미쳤는지, 무엇을 의심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레오노라는 입술을 꼭 깨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일황자 전하께서도… 황녀 전하의 시녀로서 제 책임을 묻겠다고 하셨어요. 죄가 있다면, 벌을 내리셔도… 달게 받겠습니다.”말이 끝나자, 조용히 눌러 담았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그녀는 스스로도 눈물이 흐른 줄 몰랐다.그는 처연한 얼굴로 앉아 있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물었다.“황녀가… 궁술과 검을 다뤘다는 목격자가 있었다.”“예. 활을 쏘아 짐승의 머리를 정확히 맞히셨어요.”프레데리크는 방금 전, 황실 기사단 몇 명의 보고를 들은 직후였다. 그들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황녀가 활과 검을 들고, 짐승들을 거침없이 베어냈다고.그는 문득 그녀가 석검을 들어 올리던 순간을 떠올렸다. 가녀린 손끝에서 번졌던 힘은, 설명할 수 없는 신성한 것에 가까웠다.그러나 문제는, 공식 보고서에도, 그녀가 무기를 익혔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이었다. 황실은 비밀을 오래 간직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만약 이 정도의 기량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면, 그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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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기다리고 있을 게요, 프레데리크

40화황후는 당황했지만, 표정을 숨기고 부드럽게 타일렀다.“결혼식을 아직 치르지 않은 걸 잊은 건 아니겠지?”“잊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일이라도 바로 치를 수 있다면 좋겠어요. 기꺼이 서부에서 제가 감당할 몫이 있다면 돕고 싶습니다.”황후는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리며, 한층 더 나직하게 타일렀다.“네 마음은 이해한다, 지빌라. 하지만 지금 너의 방문은 서부에 또 다른 부담이 될 수 있다. 형식적이든 아니든, 황녀의 행차는 단순한 방문이 아니니까.”그때, 일황자 레나토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이렇게나 앞서 나가다니, 누이께서 대공을 얼마나 마음에 두고 계신지 새삼 느껴지는군요. 기다리지 않아도, 곧 대공비 자리에 오르실 텐데 말입니다.”황후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잘랐다.“그만두거라, 레나토. 지금은 모두가 머리를 모아야 할 때다.”지빌라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눈동자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로.자신이 바라는 대로 쉽게 이루어지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프레데리크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이는 오직 그뿐이었기에.프레데리크는 황녀의 시선만으로도 그녀가 원하는 바를 알았다. 시급히 황실을 떠나려는 그녀의 뜻을, 그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그는 의도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먼저 불렀다.“지빌라…, 속히 일을 완비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예정된 결혼식에는 문제가 없도록.”그는 사냥대회에서 있었던 황녀의 활약에 대해 일절 함구하라는 명을 내렸다. 황실 안에 그 소문이 퍼진다면, 지빌라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었다.지빌라 또한 그가 무모한 결단 대신 신중함을 택했음을 알았다. 당장은 그 믿음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기다리고 있을 게요, 대공 프레데리크.”***대공이 기사단을 이끌고 서부로 향했다.결혼식이 예정된 가을 끝자락까지 채 두 달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재난복구에 이어 군사 정비까지 마치고 돌아오려면, 남은 시간은 숨 돌릴 틈조차 없이 빠듯했다.지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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