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정략 결혼은 끝냈어야 했다: Chapter 21 - Chapter 30

102 Chapters

21화 황녀와 두 남자

21화지빌라는 궁으로 찾아온 대공의 마차를 타고 델보 후작성으로 향하고 있었다.“먼저 연회에 동행해 주셔서 감사해요.”그의 표정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마치 이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를 벌처럼 여기는 듯했다.지빌라는 애써 시선을 돌렸다. 그가 무엇을 짊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해도 그 무게만은 전해졌다.샤를로트의 말에 따르면, 이번 연회는 일황자를 지지하는 말라르메 후작을 따르는 신진 귀족들의 부인들이 대거 참석하는 자리였다.델보 후작성은 주로 작품 전시를 열었지만, 이번에는 특별히 신비로운 대륙의 보석들을 전시한다고 했다.축복연회가 끝난 지 오래되지 않은 시점이라, 돌아가지 않은 사신들도 대거 초대되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델보 후작성에 마차가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그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고, 지빌라는 그 손을 잡으며 생각했다.‘온기 하나 없는 사람 같잖아.’성문 앞에는 마차들이 줄지어 있었고, 귀족들은 황녀와 대공을 향해 수군거렸다.두 사람은 그런 시선이 익숙하다는 듯 담담히 성안으로 들어섰다. 화려한 불빛 아래 눈부시게 빛나는 두 사람의 등장에, 홀은 한동안 정적에 잠겼다.오늘따라 믿기 힘들 만큼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황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이들이 가득했다.귀족 부인들은 부채로 입을 가린 채, 황녀와 대공에 대한 총평을 늘어놓았다.“저 드레스는 값으로 매기기도 어려울 것 같네요. 달린 보석들이 무엇인지 아세요?”“일반 백성들은 감히 상상도 못 할 값이겠죠.”그녀들은 질투와 부러움이 뒤섞인 눈길로 황녀를 바라보았다.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하던 대공이 약혼을 하더니 보란 듯이 연회에 동반 참석하자, 귀족 남성들은 혀를 찼다.“이유가 있어서겠거니 했는데… 황녀 정도는 돼야 결혼할 마음이 생겼나 보군.”“저 정도 미모라면 누구라도 했겠지. 나라도 했을 걸세.”“결국은 입장을 바꿨군.”“허허, 입장이 바뀌었는지… 아니면 마음이 바뀐 건지 그 속은 모르는 걸세.”귀족들은 황녀와 대공을 두고 저급한 품평을 이어갔다.지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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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아르카나, 진실 한 가지

22화지빌라는 카이사르를 홀로 두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대륙에서 온 보석을 전시한다고 해서 왔는데… 혹시 함께 둘러보며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카이사르는 황녀의 말에 슬쩍 시선을 옮겨 북부 대공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닿고서야, 지빌라는 두 사람이 아직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했다.“이런 큰 실수를…… 대공, 이쪽은 카이사르 경이에요.”프레데리크는 오늘의 황녀가 어쩐지 멀게만 느껴졌다. 그 거리가 진심인지 계산된 전략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는 침묵으로 선을 그었다.그는 황녀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고개 숙인 카이사르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서열로 따지자면, 제국의 제1검인 그가 대륙 신생국의 왕보다 높았다.“부탁하지. 나도 대륙에서 값지다는 보석이 궁금하군.”지빌라는 프레데리크의 서늘한 말투에 또 한 번 실수했음을 깨달았으나, 이미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카이사르는 황녀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보석에 대해선 아는 게 없습니다. 다만 황녀 전하와 함께라면, 뭐든 빛나 보이겠지요. ―함께 걸으시겠습니까?”정중한 말씨였다. 그런데도 지빌라는, 잘 길든 맹수가 발톱을 감춘 채 다가오는 것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그때 샤를로트 델보 후작 영애가 그들에게 다가왔다.“황녀 전하, 대공 각하, 오늘 연회에 와 주셔서 감사드려요. 선객이 계셨네요.”샤를로트는 이 세 사람이 함께 움직이면 곧 입방아에 오르내릴 것을 알았다. 특히 말라르메 후작과 몇몇 귀족 부인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 미묘한 시선들을 읽어내고는 목소리를 낮췄다.“오늘, 황녀 전하께서 아르카나를 봐주시기로 약속한 부인이 와 계십니다.”“…내가 깜빡할 뻔했네. 다음 연회 때 꼭 아르카나를 시전하기로 했거든.”황녀는 지나가던 시종을 불러, 대기 중인 제 시녀에게 고대 카드를 가져오게 했다.“프레데리크―오늘은 잠시 따로 떨어져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금방 돌아올 테니… 카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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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유희로 감춘 진실

23화말라르메 후작 부인은 황녀에 관한 은밀한 소문을 듣고 호기심에 나선 참이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아무 말이나 내뱉을 수는 없었다.‘사생아’라는 말은 황족 앞에서는 금기나 다름없었고, 황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도 예측할 수 없었다.그녀는 다시 황녀를 바라보며, 이 자리가 정치적 계산이 아니라 단순한 유희로 마련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괜찮을 거야.’ 하고 자신을 달랬다.머뭇거리는 기색을 읽었는지, 황녀가 먼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편히 말씀하세요. 여기서 들은 이야기는 여기 두고 갈 테니.”그 한마디에 부인은 비로소 굳었던 입을 뗄 수 있었다.“남편은 야욕이 크답니다. 사생아도 있지만, 정식으로 후계자로 지목하지는 않았어요. 그저 혈통 좋은 딸을 높은 자리에 앉히고 싶어 할 뿐이에요.”지빌라는 부인의 말을 듣자마자 아르카나를 펼쳤다.황녀의 손짓이 닿자 벨벳 위의 카드들이 마치 숨을 들이쉬듯 일제히 들썩였다. 은빛 가장자리가 반짝이며 원을 그리더니, 한 장의 카드가 천천히 앞으로 밀려나왔다.아르카나를 직접 본 이들이 하나같이 놀라워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말라르메 후작 부인은 숨을 죽인 채, 신성한 빛을 띤 황녀의 손길을 바라보았다.말로만 들을 땐 믿기 어려웠으나, 막상 눈으로 보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부인은 이토록 뛰어난 능력을 지닌 황녀가 황태녀로서의 자질까지 충분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느꼈다.‘이런 신성한 능력을 가지시고 고작 대공비라니…….’황녀가 고작 유희로 아르카나를 탐닉하는 이유도 짐작할 수 있었다. 대리청정을 맡은 황후가 황녀의 아르카나를 쉬쉬하면서도 막지 않은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황후는 차기 황제로 이황자를 지지하고, 일황자와는 대립하고 있으니 황녀를 제 편에 두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억압하지 않고, 오히려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리라.‘하지만 이 힘을 탐내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아르카나는 몇몇 귀족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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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조금만 더 버티면 돼

24화샤를로트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황녀를 바라보다가 의견을 내놓았다.“전하께서 하시던 아르카나가 진실이 아니었다는 소문을 은근히 퍼뜨리겠습니다. 유희로 여겨지면 사람들의 관심도 줄어들겠지요.”“그래…….”지빌라는 말라르메 후작 부인을 통해, 어쩌면 일황자 측의 흐릿한 미래를 엿본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레나토의 전쟁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제국이 패망하는 일 또한 피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이제는 프레데리크 대공을 앞세워 일황자 측 세력을 견제할 수 있다. 그리고 이황자가 성인이 되어 황후의 대리청정을 끝내기만 하면, 지빌라가 오래도록 바랐던 그 조용한 목적도 마침내 이루어질 터였다.‘조금만 더 버티면 돼.’***지빌라가 델보 후작성 연회홀로 다시 내려왔을 때, 홀로 서 있는 어린 귀족 영애가 눈에 들어왔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그 아이가 누구인지 분명해졌다.클로리스.회귀 전, 황위를 레나토에게 빼앗기고 서부 변경백과 강제결혼을 해야 했던 시절.서부 변경백을 겸한 몸므 백작의 성, 몸므 백작성으로 쫓겨나다시피 떠난 그때, 지빌라 곁에는 조프루아 몸므의 여동생, 클로리스가 있었다.클로리스는 낯가림이 심하고 말수가 적은 아이였지만, 서부에서 겉돌던 지빌라에게 먼저 다가와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철학서와 검만 붙들고 살던 지빌라가 성안 살림에 서툴러 애를 먹을 때도, 조프루아와 냉랭해질 때도, 말없이 도와주던 아이였다.서부는 북부만큼이나 척박했지만, 자본이 턱없이 부족해 수도처럼 화려한 드레스나 사치를 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조프루아는 황실의 원조를 받기 위해 레나토가 요구하는 일을 늘 일방적으로 받아들였다.그 시절, 클로리스는 수도에 다녀온 적이 있다고 말하곤 했다. 축복연회에서 황태녀의 승계식을 본 적이 있으며, 그때의 광경이 너무 멋졌다고 했다.“저는 여황제가 될 지빌라님을 동경했어요. 이렇게 서부에 오실 줄은……. 제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힘내세요.”그때의 아이는 수줍지만 맑은 눈으로 그렇게 말했다.클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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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카이사르를 왜 경계하지

25화조프루아의 눈에 황녀의 그 생경함은, 어쩌면 생각보다 위험한 것으로 비쳤다.프레데리크는 황녀의 의도를 눈치채고 카이사르를 홀로 두지 않았다. 일황자가 축복연회 때 그를 공개적으로 모욕한 것이 우연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프레데리크가 카이사르와 함께 보석들이 전시된 공간을 한 바퀴 둘러본 뒤,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귀족들의 시선이 하나같이 황녀에게로 쏠려 있었다.“함께 오시는 걸 보니, 제 말대로 보석 감상을 하셨군요. 가장 아름다운 보석은 찾으셨나요?”지빌라의 손이 그의 손끝을 슬며시 잡았다.“……가지고 싶은 게 있습니까?”프레데리크는 그녀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당신이 주는 거라면 뭐든지요.”그 순간, 지빌라의 얼굴에 번진 미소는 보는 이 모두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마치 대공에게 푹 빠진 연인의 얼굴처럼.하지만 프레데리크는 알고 있었다. 그 미소 속에 사랑 따윈 애당초 없다는 것을.그녀는 지금 무대를 짜고 있었고, 그 무대 위에 프레데리크와 카이사르를 올려두려 하고 있었다. 다만, 그 차가운 손끝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은— 그조차도 연기였을까?프레데리크는 저도 모르게 무겁게 뛰기 시작한 심장 탓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곧 혀를 차며 스스로를 다잡았다.‘그저 관망하면 되는 일이다.’“그대를 위해, 저 보석 전부를 사들이지.”그녀는 이런 반응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다. 굳어지려던 입꼬리를 애써 되살리며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 프레데리크.”가까이에 카이사르가 있었다. 좀 더 노골적인 애정 표현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지빌라는, 다른 한 손을 대공의 단단한 가슴 위에 조심스레 얹었다. 옷감 아래로 전해지는 심장 박동이, 생각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러나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나는 대공비가 될 사람이란 걸 똑똑히 봐둬요, 카이사르.’지빌라는 카이사르가 이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길 바랐다. 정략혼일지라도 두 사람의 관계가 그 이상임을, 누구도 넘볼 수 없다는 사실을.“카이사르 경… 사냥대회의 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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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그녀의 침묵을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

26화어둑한 마차 안, 불쑥 울린 목소리에 지빌라는 놀랐다. 방심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제가 카이사르 경을 경계했다니…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프레데리크는 황녀가 거짓말까지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그가 대륙을 도륙한 용병왕이라고 해서 무서운가?”“제국의 제1검인 당신을 약혼자로 둔 제가, 설마요.”그에게는 강한 부정이 오히려 더한 긍정으로 들렸다.“그게 아니라면, 관심이 많은 건가?”“대공…… 관심이라는 단어는 오해를 부릅니다.”그녀의 입에서 ‘대공’이라는 호칭이 나오자, 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이름을 부르라 했을 텐데.”지빌라는 둘만 있을 때면 프레데리크의 직설적인 말투에 괜한 반발심이 일었다.“그토록 강압적인 말투는… 언제쯤부터 허용되던 건가요, 대공께선?”프레데리크는 황녀를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널찍한 마차 안이었지만, 단둘뿐이라는 사실이 유독 거리를 좁게 느껴지게 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 위에 오래 머물렀다.“내게 강압적이라고 한 말, 지빌라, 제대로 책임질 수 있겠어?”그는 황녀가 지금껏 저를 얼마나 함부로 대했는지, 마음만 먹으면 줄줄이 나열할 수 있었다. 그 말을 정말 감당할 자신이 있느냐는 듯, 그의 눈빛이 어둡게 빛났다.지빌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제 말에 담긴 속뜻을 자각하고는, 순순히 물러났다.“프레데리크… 연회에서 제가 한 행동을 받아주셔서 감사해요. 우리 둘 다… 조금 날카로워져 있었던 것 같네요.”프레데리크는 이번엔 그녀의 침묵을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나는 왜 그에게 관심을 두느냐고 물었어, 지빌라.”지빌라는 잠시 시선을 피했다.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그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일까. 아니, 자신이 그에게 기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머무르다 떠날 사람은 결국 자신이기에.그녀의 침묵이 길어지자, 프레데리크가 먼저 입을 열었다.“레나토가 의도적으로 카이사르를 도발했다는 건 나 말고도 눈치챈 사람들은 많아.”그 말을 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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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신전의 깊은 지하창고

27화에르나와 레오노라가 다가와 황녀의 드레스 벗는 것을 도왔다.에르나가 조심스레 물었다.“오늘 유독 피곤해 보이세요, 황녀 전하.”“예상치 못한 일들이 연이어 있었어.”연회에 함께하지 못한 레오노라는 두 사람의 대화를 따라오지 못한 눈치였다. 시녀로서 제 몫을 못 했다는 자책이 얼굴에 어렸다.지빌라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조심스러운 거리감을 두었다. 레오노라가 제 시녀로 곁에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지빌라가 짊어진 빚이었다. 아직은 입에 올릴 수 없는, 저 혼자만 아는 빚.‘아직은, 마음의 정리가 필요하겠지.’지빌라는 북부에서 머무는 기간이 베라트 가문의 저주가 끝날 때까지일 거라 여겼다. 전쟁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대공이 그 운명을 이겨낼 희망도 있었다.하지만 만약 프레데리크가 그 저주를 피하지 못한다면, 그때 레오노라를 책임질 사람은 저뿐이라는 각오도 이미 품고 있었다.지빌라가 바라는 결말은 단 하나였다. 대공이 저주를 이기고 살아남아, 제국을 오래도록 지키는 것.그때가 되면, 대공비의 자리를 미련 없이 레오노라에게 넘겨줄 생각이었다.***황녀가 한동안 몸이 좋지 않다며 궁에서 모습을 감추자, 모두가 수상히 여겼다. 매일같이 연회에 빠지지 않던 그녀였기에, 정말 병이라도 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퍼졌다.하지만 사실 지빌라는 줄곧 비밀리에 신전에 드나들고 있었다.신전의 깊은 지하창고.고대 유물들이 잠들어 있는 곳.그녀는 제 손에 반응했던 '고대 카드'처럼, 또 다른 유물이 있을지 몰라, 회귀 후 신전과 연이 닿은 순간부터 계속해서 탐색을 이어왔다.신전의 깊숙한 통로를 추기경과 함께 걸으며, 지빌라는 목소리를 낮췄다.“결혼 후 북부로 향하게 되면, 신전에 자주 올 수 없을 거예요.”“고대 유물을 하나씩 시험하시는 일도, 여기까지겠지요.”“…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요.”젊은 추기경은 지빌라를 아무도 드나들지 않은 깊은 지하로 안내했다. 지빌라는 어둑한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물었다.“…여기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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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서부로 돌아가세요

28화지빌라 곁으로 다가가 해맑게 웃는 클로리스를 바라보며, 조프루아는 괜스레 마음이 무거워졌다.아직도 어리게만 보이는 여동생을 이 복잡한 수도로 데려온 것이 잘한 일인지, 다시금 후회가 밀려왔다.부모님이 일찍 세상을 떠난 뒤, 그는 어린 여동생을 자식처럼 돌봐야 했다. 하지만 서부 변경백으로서의 책임은 그마저도 벅찼다.서부는 황실의 지원 없이는 재정난을 벗어나기 어려운 처지였다. 그래서 그는 늘 제 가치를 증명해야 했다.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귀족의회에서 황후의 반감을 산 이후, 그는 자연스레 일황자 편에 섰다. 서부가 재정만 넉넉했다면, 북부처럼 중립을 선언하는 것이 최선이었을 터였다.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그 점이 무엇보다 뼈아팠다.오늘 아침만 해도, 일황자의 계략을 생각하느라 머리가 지끈거렸다.그때, 클로리스가 다가와 말했다.“신전을 한 번 가보고 싶어요.”“신전?”조프루아는 수도까지 동생을 데려왔으면서도, 제대로 구경조차 시켜 주지 못 한 것이 미안했다.늦은 오후의 신전은 제법 조용했다. 한 바퀴 돌고 나오는 길, 뜻밖에도 황녀와 마주쳤다.그는 미처 건네지 못 했던 말을 꺼냈다.“약혼을 축하드립니다. 황녀 전하.”“몸므 경…… 고마워요. 그런데… 클로리스를 또 궁으로 초대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델보 후작성에서 클로리스와 어린 영애들을 황녀의 궁으로 초대했던 날 이후, 정원에서 차를 마신 뒤로 클로리스는 수도의 영애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가까워졌다.수도에 온 이후로 소극적이던 여동생이 황녀 앞에서만큼은 환히 웃었다. 조프루아는 그 모습에 고마우면서도, 황녀가 이렇게 다시 초대하겠다고 나서는 데 다른 뜻이 숨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제가 일황자 측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이런 권유가 결코 가벼운 뜻이 아님을 알 것이었다. 제가 맡은 일까지 알고 있다면, 황녀는 그를 멀리해야 옳았다.조프루아의 표정이 어둑해지는 것을 보자, 지빌라는 그의 근심이 깊어지는 것을 느꼈다. 분위기를 돌려야겠다 싶어 그녀가 말했다.“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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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선물로 가져왔어요

29화황녀를 따라 신전에 온 레오노라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서신도 없이 바로… 대공 각하께 가시려는 건가요?”지빌라는 잔잔히 웃었다.“그가 날 문전박대하진 않을 거야.”지빌라는 결혼식 후 북부로 떠나기 전, 서부를 거쳐 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레데리크를 보았을 때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지빌라. 당신은 이제 대공비가 될 사람이라는 것을 잊었나? 북부가 당신 한 사람 지키지 못할 리 없고. ……내게 의지해서 나쁠 건 없어. 그 정도는 수용할 생각이었으니까.’선을 긋듯 거절했지만, 그 말이 묘하게 위안이 된 것도 사실이었다. 지빌라가 프레데리크를 떠올리며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레오노라는 복잡한 마음으로 그 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예전에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남녀가 함께하다 보면 없던 감정도 생겨난다고… 황녀와 프레데리크 사이에도 제가 모르는 일이 필시 많을 거라 생각하니, 까닭 모를 씁쓸함이 번졌다.그 시각, 프레데리크는 궁에서 황녀가 없다는 소식을 듣고 타운하우스로 발길을 돌렸다.“궁에 황녀가 없던데… 또 신전에 간 건가?”“네, 새벽에 마차를 타고 신전으로 향하셨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요즘 왜 그렇게 신전으로 자주 가는 거지?”“그건… 신전 내부 파악이 어려워서…….”랑베르의 보고를 들은 그는 황녀와 신전 사이의 연관성을 다시 떠올렸다. 황제의 첫 번째 황후, 지빌라의 어머니의 정체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황실 내궁을 끊임없이 감시해온 북부의 정보망은 일찍이 ‘황후는 신전의 의지로 만들어진 인물’이라는 설에 무게를 실었다.그렇다면, 그 첫 번째 딸인 황녀가 신전을 찾는 이유 역시 단순한 종교적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똑똑, 똑.랑베르는 잠시 나갔다가 시종의 보고를 듣고 돌아왔다.“지금 황녀께서 직접 찾아오셨습니다.”예상치 못한 방문이었지만, 프레데리크는 문득 알 수 없는 기대감이 가슴 깊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황녀에게 의지하라 한 것도 이유라면 이유였다.지난번엔 ‘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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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이 검을 쥐고 살아남아요

30화지빌라는 무심하게 말했다.“아니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이 검은 당신 손에 있어야만 비로소 그 쓰임을 다할 거예요. 그러니… 당신의 검이에요.”지빌라는 신전 지하에서 이 검을 처음 쥐었을 때부터, 알 수 있었다. 이건 베라트의 검이라고. 사라진 가문의 가보가 어쩌다 신전에 잠들어 있었는지는 몰라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검의 껍질이 벗겨지는 순간, 그 안에 봉인돼 있던 시간의 파편이 지빌라의 목걸이에 깃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지빌라는 알 수 있었다.이 검이야말로, 그녀에게 다시 한 번 시간을 되돌릴 기회를 쥐어 줬다는 것을.그녀의 목 중앙에 걸린 ‘신의 눈물’ 에테르 진주가 박힌 목걸이가 다시 영롱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영혼의 파편으로 만들어진 어머니의 유품이었다.그녀의 회귀 후, 텅 비어 있던 목걸이.이제는 그 안에, 이 검의 영혼이 깃들어 있었다.절체절명의 순간―단 한 번 시간을 거슬러 회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지빌라는 목걸이를 조용히 쓰다듬었다. 그리고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는 듯, 천천히 그러나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프레데리크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억눌렀다. 그것은 경외심 또는 두려움이었으며, 어쩌면 책임감이기도 했다.이 검은 분명 자신의 손에서 진정한 역할을 다할 운명임을 그는 직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황녀에게서 이 검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이 검은 받을 수 없어.”지빌라는 검을 받지 않겠다는 프레데리크를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회귀 전을 떠올리면, 만에 하나 전쟁이 일어나 그가 이 검을 쥐고 있다면 결코 허망하게 죽는 일은 없으리라는 생각도 스쳤다.황태녀였던 자신이 그의 목숨조차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지금도 지빌라의 가슴 깊은 곳에 남아 있었다.그를 위한 검을 마침내 찾았다는 사실에 잠시 기뻤지만, 그 기쁨은 그의 단호한 거절 한 마디에 차갑게 식어버렸다.그녀는 잠시 고민한 끝에 말했다.“그럼― 잠시 맡겨 둘게요.”“…하, 그렇게라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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