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정략 결혼은 끝냈어야 했다: Chapter 41 - Chapter 50

102 Chapters

41화 어쩌면 그저 객기인지도

41화지빌라는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결혼을 앞둔 황녀가 다른 남성과 단둘이 만난다는 것은 결례였다.“네가 불편하다면 무르마.”“아니에요. 폐하께서 놀라실 정도의 거금이라면, 그 사람에게 아르카나 정도는 해줘야 그만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저에겐 대수롭지 않은 일이에요.”지빌라는 얼마 전에야, 사냥대회 날 그녀를 구한 인물이 카이사르였다는 사실이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모두가 모른 척 침묵하는 모습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다.알아본 바에 따르면, 그날 현장 조사는 심문관으로 프레데리크가 주도했고, 그가 입단속을 한 듯했다.제국은 타국의 문물이나 인물에 대해 늘 경계심이 깊었다. 하물며 대륙 출신이라면 더욱 그러했다.그런데 그런 자가, 아직도 제국 땅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은 불쾌할 정도로 이상한 일이라고 받아들일 터였다.이번 사냥대회에서 벌어진 불미스러운 사건은, 회귀 전에도 없었던 일이었다. 그녀로서 의심할 만한 인물은 단 하나뿐이었다.‘레나토…….’지빌라는 카이사르를 통해 레나토가 꾸미는 일을 엿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를 통해 미래를 보는 셈이었다.황후는 시선을 내리깔며, 안심시키려는 듯 나지막이 말했다.“내가 오늘 있을 일에 대해, 아무도 모르게 방비해 두었다.”“오히려 공개해 두심이 어떨까요…….”“잡음만 들리게 할 뿐이다. 너만 괜찮다면, 우리만 알고 있도록 하자꾸나.”황후의 뜻과는 달리, 일은 처음부터 꾸며져 있었다.일황자 레나토는 말라르메 후작에게, 용병왕 카이사르가 그런 큰 돈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었는지 물었다.“대륙의 여러 곳에서 광산을 발견했다고 하더군요. 마석과 보석이 상당량 매장되어 있다고 합니다.”“제국의 누구보다 많은 기금을 냈다더니, 이유가 있었군.”“그렇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흡족해하셔서, 그의 부탁을 들어주는 쪽으로 기우는 듯합니다.”레나토는 마치 우연히 흘리듯, 황녀가 사용하는 ‘아르카나’라는 점술의 존재를 카이사르에게 알려주었다. 그 눈빛에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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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결국, 모든 게 당신의 선택에 달렸다

42화지빌라는 혼잣말처럼 읊조리는 그를 보자, 회귀 전의 카이사르가 떠올랐다.자신을 향했던 그 집요한 시선과 감정.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그의 집착이 기시감처럼 가슴을 스쳤다.“왜 내게 말하지 않았지?”카이사르의 목소리는 낮게 잠겼다.“무엇을요? 전리품이란 사실이 달라지기라도 하나요?”지빌라의 눈빛은 차가웠고, 말투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그래도… 이런 독차를 알면서도 마셨단 말인가?”그는 믿기지 않는 듯, 그녀의 찻잔을 바라보았다.“저를 전리품으로 여긴다면, 그냥 그렇게 대하셨어야죠. 일을 참 어렵게 만드시네요.”그녀는 냉정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위험할 만큼 뜨거웠다. 그 때문에 지빌라는 늘 다른 왕비들의 시기와 질투를 샀다. 이건 지난 생의 일이었다. 그렇게 삶이 끝났으니, 다시는 그와 엮이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지빌라는 고요하게 고개를 숙이고, 손끝으로 고대 카드를 쓸어내렸다. 모든 감정을 덮어버린, 무표정한 얼굴로.“카이사르 경. 아르카나를 시전하려면, 먼저 비밀 한 가지를 알려주셔야 합니다.”잠시 시선이 맞닿았다. 그녀는 담담히 이어 말했다.“방금 하신 말로 대신 받겠습니다.”그 순간, 카드가 부드럽게 테이블 위를 미끄러지며 펼쳐졌다. 창밖으로 별빛이 스며들었고, 고요한 객실엔 오래된 예언의 숨결만이 감돌았다.첫 번째 카드.불길을 향해 걸어가는 남자의 등 뒤로, 여인이 손을 뻗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손은 끝내 닿지 않는다.‘사랑하는 이를 곁에 두기 위해, 무모한 선택을 한다.’지빌라는 카드에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읊조렸다.“이 남자, 자신의 파멸을 감수하고서라도… 손에 넣고자 하는 걸 놓치지 않네요.”두 번째 카드를 뒤집었다.두 개의 왕관이 부서진 성채 위에 나란히 놓여 있다. 그 아래로는 피로 물든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지빌라의 눈매가 슬며시 날을 세웠다. 경고였다.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손을 잡는 자는 구원이 아닌, 공멸을 부르게 될 겁니다.”그녀는 숨도 고르지 않은 채, 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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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황녀의 스캔들

43화지빌라는 카이사르를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아르카나를 시전한 흔적을 서둘러 정리한 뒤, 시녀 둘과 함께 창밖을 바라보는 척했다.그때 카이사르는 정중히 인사만 건네고는 조용히 자리를 비켜준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만으로도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오늘 황실에서 자숙하겠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내기로 했어.”“아니, 황후 폐하의 부탁으로 만난 자리라면서… 왜 전하께서 모든 책임을 지셔야 하는 건가요!”지빌라는 이미 답을 알고 묻는 샤를로트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알면서 왜 묻는 거니?”“속상하잖아요. 말이라도 해야 풀리죠!”지빌라는 연회 다음 날, 황실과 귀족들의 사생활을 다루는 일간지를 여러 부 사 오게 해 꼼꼼히 훑었다.예상대로 1면부터 「황녀, 용병왕과의 충격적 밀회… 대공의 침묵, 무슨 뜻인가?」같은 자극적인 제목으로 도배되어 있었다.심지어 ‘목격자 인터뷰’라는 이름 아래, 날조에 가까운 증언들까지 실려 있었다.하룻밤 사이, 황녀는 ‘대공의 약혼녀’가 아닌 ‘품행이 수상한 여인’으로 바뀌어 있었다.“그냥 스캔들로 끝나지 않게 생겼어요.”샤를로트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이젠 대공에게 파혼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까지 나왔어요.”***한편, 귀족의회에는 말라르메 후작을 필두로 한 신진 귀족들이 연합해 다음과 같은 안건을 상정했다.의 건이 소식이 전해지자 황후와 황자들을 비롯한 고위 귀족들이 하나둘 궁으로 모여들었다.일황자 측의 반격이 본격화된 것이다.“폐하, 이번 서부 재난 관련 기부자 명단과 기금 운용 내역의 투명한 공개를 요청드립니다.”말라르메 후작의 발언에 회의장은 묘한 긴장감에 휩싸였다.황후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이미 모든 내역은 지난 회의에서 공개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굳이 다시 상정한 이유가 있습니까, 말라르메 후작?”“공개된 문서에서 다수의 누락이 확인되었습니다. 본 회의는 그 점을 짚고자 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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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스트라톤과 혼인 동맹?

44화말라르메는 황태자 책봉과 황녀의 파혼이라는 두 가지 화두를 동시에 꺼내며 정면 승부를 걸고 있었다.황후는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녀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도, 소문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도 알았다.그러나 이 자리에서 그녀가 개입해 변명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황녀에 관한 논의는 오늘은 이쯤에서 접겠습니다. 다음 귀족의회에서 정식으로 다루도록 하지요.”황후의 입술은 굳게 다물렸고, 회의장은 더 깊은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한 달 넘게 같은 안건으로 이어진 귀족의회는 황실 내 불안과 피로를 깊게 뿌리내리게 했다.자숙 중인 지빌라는 오랜만에 이황자 유리안을 정원으로 불러 차를 마시고 있었다.초가을의 햇살 아래, 낙엽이 드문드문 떨어지고 있었다.“유리안, 너… 안색이 단단해졌구나.”“누이께서 그렇게 봐주시니, 그간의 고생도 보람 있겠네요. 그나저나… 답답하진 않으십니까? 궁 안에만 계셔서.”“자숙 중인데 어쩌겠니. 불필요한 말이 오가는 것보단 나아.”“의회에서도 그런 얘기들이 오갑니다. 오해였단 걸 아는 이들도 점점 늘고 있어요.”“그래, 듣고 있어. 너까지 걱정할 일은 아니야.”말은 그렇게 했지만, 지빌라는 그의 방문이 반가웠다. 황후의 뜻에 충실히 따르면서도 조용히 균형을 지켜온 이황자. 그 모순된 외줄을 타는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지빌라 자신이었다.유리안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어머니께서 마음을 바꾸실 수도 있습니다.”“…왜 그런 생각을 했지?”“레나토 형님이 어머니의 가문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황태자 자리는 고사하고, 진행 중인 사업에도 차질이 생길 것입니다.”지빌라의 손끝이 순간 멈췄다. 멈춘 것은 손끝뿐이었다. 머릿속은 이미 몇 수 앞을 달리고 있었다.“집권을 유지하려면, 널 황태자로서 승계시키는 것이 우선이야. 대공의 지지는 필수지. 그러니 내 파혼을 강행하진 못하실 거야.”“그렇죠. 그렇지만 반대로, 어머니께서 시간을 벌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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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혼돈 속, 홀로 예식 준비

45화황후는 손에 쥔 수정반지를 천천히 돌렸다. 카이사르가 보내온, 대륙에서도 보기 드문 희귀한 보석이었다. 그 반짝임 속에는 단순한 호의 이상의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오래된 지지대를 쉽게 내려놓기는 어려웠지만, 그녀는 새로운 균형 위에 제 권력을 세운 모습을 떠올리며 썩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며칠 뒤, 말라르메 후작은 일황자의 거처에서 그와 단둘이 술잔을 기울였다.“내 어머니지만, 정말 대단하지 않나.”레나토는 피식 웃으며 잔을 들었다.“불리한 국면이 되자, 황태자 승계 안건으로 나를 달래려 들지.”그는 잔을 내려놓으며 한마디 덧붙였다.“황녀를 마치 시장에 내놓은 물건처럼 다루다니, 참… 어머니다운 방식이지.”말라르메는 인상을 찌푸렸다.“그보다 더 불쾌한 건, 카이사르가 직접 황후 폐하와 손을 잡았다는 점입니다. 예전 같았으면 폐하께서 그렇게 무리한 수는 두지 않으셨을 텐데…….”“겉으로는 달래는 척하지만, 결국 어머니는 시간을 벌고 계신 것 뿐이야. 누구의 힘을 빌려 이황자를 밀어붙일지 저울질하고 계시겠지.”레나토의 말에 말라르메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결혼식 전에 대공이 도착할 거란 서신이 왔습니다.”“대륙에 스트라톤만 있는 건 아니지. 다른 용병국을 동원해 서부 변경을 공격하게 해.”말라르메는 고개를 숙였다.“명 받들겠습니다.”“그리고… 한 가지 더.”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레나토는 더는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한 번에 쓸어버리면 그만이야.’어머니가 방향을 튼 이상, 이번 의회에서는 물러나는 척 관망하다가 결정적인 순간 뒤통수를 칠 작정이었다.황태자 자리가 코앞인 지금,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은 대공과 황녀의 파혼이었다. 혹은 핏줄의 절반뿐인 누이라도, 황녀를 제거하는 방법도 있었다.용병왕을 끌어들이려 한 건 맞지만, 어머니와 손을 잡을 줄은 그조차도 알지 못했다.‘당신이 약점을 찾으실지 몰라도, 이미 내 손에 걸리셨으니 물러날 쪽은 어머니 차례일 겁니다.’한편, 서부 경계는 레나토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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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파혼의 문 앞

46화황후는 지빌라의 눈빛을 가만히 읽었다.“신전에서 정한 날짜는 일 년에 한 번뿐이니, 네 판단을 존중하마. 하지만… 의회에서 대공에게 파혼 여부를 공식적으로 묻겠다고 결정했단다.”“……네?”찻잔을 들던 지빌라의 손이 멈췄다.황후는 책임을 느끼는 표정을 덧씌운 채 말했다.“면목이 없다. 카이사르에게 받은 후원금이며, 가문의 사업이 이렇게 크게 번질 줄은 몰랐다. 네게 돌아올 화살이 이리 클 줄이야…….”한편 황후는, 그녀가 직접 나설 필요조차 없었다. 알아서 파혼이 정리되면 그 수순을 밟으면 그만이었다.‘황태자 승계를 최대한 시간을 끌고, 지빌라를 통해 스트라톤과 혼인 동맹을 치러야 해.’지빌라는 황후의 계산이 읽혔다. 다만, 대공이 파혼을 선택하리란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그 ‘프레데리크’가, 이 상황에서 자신을 위해 달려올까. 제때 도착할 수 있을까.지빌라는 혼돈 속에 있었다.황후는 지빌라의 흔들림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 채, 담담히 말했다.“만약을 준비해 두는 게 좋겠구나. 대공이 파혼을 원한다면, 레나토는 곧 황태자로 승계될 것이다. 그 순간… 우리 모두 온전치 못할 게다.”지빌라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의미를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레나토가 이런 방식으로 황태자가 된들, 그가 달라질 수 있을까? 회귀 전의 그 끔찍했던 날들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그때와는 다르리라 믿었는데.새벽녘, 신전으로 향하는 황녀의 행렬은 고요했다.지빌라는 시녀 몇 명만을 대동한 채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결혼식 날이었지만, 대공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대신 그녀는 신의 축복 앞에 홀로 서기로 했다. 앞에 선 교황이 그녀를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교황께서 함께해 주시니 마음이 든든합니다.”지빌라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신께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황녀.”“그가… 올까요?”“신께서 인도하실 겁니다.”지빌라는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기쁨인지 체념인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신전 가장 높은 제단 앞에 선 그녀는 말없이 하늘빛 스테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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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서약의 밤, 맹세의 입맞춤

47화“프레데리크…….”지빌라가 머뭇거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신부를 오래 기다리게 했군.”그의 목소리는 잠긴 듯, 낮게 울렸다.“아니에요. 제 시간에 오셨어요. 그리고… 결혼에 동의해 주셔서 감사해요.”지빌라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안도와 고마움, 그리고 어디선가 피어나는 기쁨이 섞인 미소였다.“그대는 내게 살아남으라 했으니…….”프레데리크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책임을 져.”“네……?”지빌라가 눈을 깜빡였다.그 순간, 신전 상단에서 교황의 가벼운 헛기침이 울렸다.“…이로써 결혼 서약을 마치며, 증인들 앞에서 거짓 없는 맹세의 입맞춤을 하시길 바랍니다.”프레데리크는 천천히 그녀의 베일을 걷어 올렸다. 달빛이 스며든 그 아래, 그의 눈동자는 짙고 어두웠다.“내 얼굴이… 더러워 미안하지만…….”그는 낮게 속삭이며, 아주 잠깐 숨을 고르듯 멈췄다.“실례하지.”지빌라가 숨을 삼키기도 전에, 그가 다가왔다. 피비린내와 불타는 쇠의 냄새, 그리고 그 사이에 묻어 있던 익숙한 향.그의 입술이 격식 없는 방식으로, 거칠고 무겁게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피와 흙먼지 냄새 사이로, 그의 숨결만은 뜨거웠다. 단지 형식일 줄 알았다. 하지만 그 키스는 명백한 의지였다. 지킬 것을 지키겠다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무게는 결코 짧지 않았다지빌라는 회귀 전 두 번의 결혼식을 겪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붉게 달아올랐다. 입술에 남은 그의 체온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다. 형식이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속으로 잘라냈다.결혼식이 끝나고, 신전의 조명이 하나둘 꺼져갈 무렵.랑베르가 조심스레 프레데리크에게 다가와, 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황후께서 알현을 청하셨습니다. 또한 의회가 자정 회의를 소집했습니다.”프레데리크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돌아보고는 입을 열었다.“황후 폐하를 먼저 뵙고 오지.”“함께 가겠어요.”지빌라가 나서려 했다.그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부드러운 말투로 제지했다.“지금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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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오늘 밤은 부디...

48화지빌라는 가슴이 조여드는 듯했다. 그녀 자신도, 앞으로의 길이 평탄치 않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베라트 가문의 저주가 풀린다면… 그때 나는 내 자리로 돌아갈 거야.”“돌아간다니요?”“말 그대로야. 저주 같은 게 없었다면, 그가 네게 청혼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을 거야.”레오노라는 숨을 들이켰다. 황녀는 오해하고 있었다. 그녀의 감정은 이미 크게 상처받은 참이었다—그와의 감정이 혼자만의 일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하지만, 지금에 와서 굳이 바로잡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어쩌면 그 오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대공께서는 책임감 있는 분이세요. 황녀 전하, 아니 대공비 전하께 충실하실 겁니다. 그리고 저는… 괜찮아요.”레오노라는 단정히 말을 마치고는 제 일을 해 나갔다. 밖에서 기다리던 에르나를 불러 대공비의 드레스를 마저 정리하게 하고, 하녀들에게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전했다.오늘 밤, 지빌라에겐 또 다른 ‘의무’가 기다리고 있었다.그건 아무도 입에 담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었다.***귀족 의회실 안.일황자 레나토는 대공과 황녀가 신전에서 무사히 결혼식을 올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분노를 터뜨렸다.“대공은 애초에 이 결혼을 원치 않았어. 그런데도 그냥 진행했다고?”말라르메 후작이 이를 악물며 고개를 숙였다.“전하, 망설이실 때가 아닙니다. 지금 당장 황태자 승계안을 강행하시지요. 물러서선 안 됩니다.”이미 분위기는 기울었다. 시작도 하기 전에 주도권을 빼앗긴 듯. 상황은 손쓸 도리 없이 전복될 것이라는 불안이 의회 안을 짓눌렀다.그때 의회실 문이 묵직하게 열렸다. 황후와 대공이 나란히 걸어 들어섰다.“늦은 밤, 모두 수고가 많습니다.”황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단단한 힘이 서려 있었다.“방금 전, 신전에서 대공과 황녀의 결혼식이 무사히 끝났습니다. 그리고― 다급한 안건이라고 해서 초야를 치러야 할 신랑이 이 자리까지 발걸음했다는 점, 부디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그녀의 말에 의회 안 공기가 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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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49화황족의 초야는 단순한 첫날밤이 아니었다. 제국의 피를 잇는 자로서, 가장 신성하고도 공적인 임무였다.“혹여… 대공께서 전하를 아끼는 마음에 망설이시거든, 전하께서 용기를 내시어 인연의 증표를 남겨주셔야 합니다.”지빌라는 회귀 전, 잊을 수 없는 장면을 떠올렸다.서부 변경백 조프루아는 순결의 증거를 위해 제 팔뚝을 그었다.“지금… 무슨 짓을……!”지빌라가 외쳤다.“황녀 전하께 예의를 지키고 싶을 따름입니다.”조프루아는 담담하게 답했다.레나토의 강압적인 혼인이었지만, 조프루아는 황태녀였던 자신을 끝내 존중해 주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지빌라를 안지 않았다.그 후, 전리품처럼 스트라톤 용병국으로 보내졌을 때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보기 좋은 꽃에 불과했고, 황태녀로서도,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도 삶을 완성하지 못 한 채 머물러 있었다.그러나 지금, 지빌라는 알고 있었다. 베라트 가문이 황실에 고개를 숙여 온 이유를. 그들이 간절히 기다리는 것은 바로 그들의 피를 이은 ‘혈통’이었다.프레데리크와의 첫날밤은 단순한 정사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그 피를 남길 생각이 없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이 밤을… 어떻게 맞아야 할까…….’***새벽녘의 초승달은 아직도 창백한 빛으로 하늘에 머물러 있었다. 하얀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눈꺼풀을 간질였다.지빌라는 천천히 눈을 떴다. 온몸이 낯선 무게에 짓눌린 듯했고, 사소한 움직임에도 근육이 예민하게 반응했다.‘…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프레데리크는 동이 트기 전에 떠난 듯했다. 이불자락엔 그의 체온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고, 방 안은 말할 수 없는 침묵으로 가득했다.똑, 똑.조심스러운 노크와 함께, 황실 예법을 담당하는 예법관이 문을 열었다. 그녀는 시녀 둘을 거느리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전하, 욕실로 모시겠습니다.”지빌라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어딘가 멍한 얼굴로 욕실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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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대공의 아내로서

50화그날 밤 프레데리크가 그녀를 안을 줄은, 지빌라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에게도 사고였다.“레오노라, 안색이 좋지 않아. 오늘은 들어가서 쉬어도 괜찮아.”“괜찮습니다. 전하께서 며칠이나 일어나시지 못했는걸요. 제가 더 잘 모셔야죠.”“……고마워.”분위기를 조금 누그러뜨릴 겸, 지빌라는 말을 돌렸다.“레오노라, 북부엔 가본 적 있겠지?”“네, 어릴 때 몇 번요. 프레데리크… 아니, 베라트 가문에서 아버지와 저를 초대해 주셨어요. 봄이면 늘 군사 재정비가 있었는데, 어린 대공 각하를 도우러 간 적도 있답니다. 전 뭐… 따라가 놀기만 하고, 아이처럼 신났었어요.”조금은 웃으며 말하는 레오노라를 바라보며, 지빌라는 마음 한구석이 저릿하게 아팠다.“북부 사람들은 어때? 나는 아는 게 거의 없어서.”“충성심이 강한 분들이에요. 한 번 마음을 열면 다정하고 순박한 사람들이에요. 저에게도 무척 친절했어요.”“레오노라가 그렇게 말해주니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아. 앞으로도… 나를 도와줘.”“……네, 전하.”하지만 레오노라의 표정은 이내 다시 어두워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지빌라의 가슴에는 알 수 없는 불안이 조용히 내려앉았다.***황실에서의 마지막 만찬을 위해, 지빌라는 그 어느 때보다 사치스럽게 차려입었다.프레데리크와 나란히 선 그녀의 모습은, 절제된 검은 예복의 그와 극적인 대비를 이루었다.그의 팔에 조심스레 팔짱을 낀 채 복도를 걸으면서도, 지빌라는 단 한 번도 그의 눈을 마주치지 못 했다. 이토록 눈을 피하고 싶은 남자였던가. 그녀는 새삼 깨달았다.그날 밤도―새벽이 다 되어 초야방으로 들어선 그는, 씻은 뒤 특유의 차가운 향과 짙은 체향을 풍기며 다가왔다.지빌라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그를 맞았다.프레데리크는 대충 걸친 가운이 느슨하게 흘러내린 채였다. 넓은 어깨와 단단한 흉곽이 드러났지만, 그는 그것을 개의치 않은 채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늦었군.”낯설고 숨 막히는 공기에 지빌라는 어색하게 손끝을 쥐었다. 머릿속이 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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