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정략 결혼은 끝냈어야 했다: Chapter 11 - Chapter 20

102 Chapters

11화 오래 알고 지낸 사람입니다

11화지빌라가 신전에 들어선 모습은, 신화 속에서 걸어 나온 듯했다. 황금처럼 찬란한 머리카락은 자연스럽게 흘러내렸고, 정교한 은세공의 신성문양 왕관핀이 옆머리를 단정히 고정하고 있었다.목에는 진주처럼 부드럽게 빛나는 백금의 초커를 둘렀고, 중앙에는 작고 날렵한 사파이어 한 점이 박혀 있었다. 그 사파이어는 황녀의 눈과 꼭 같은 푸른색이었고, 누구도 그 보석과 그녀의 시선을 구별할 수 없었다.오늘은 신전에서 황실의 일원들과 대공이 처음으로 정식 인사를 나누는 날이었다. 교황에게 축복을 받은 황녀와 대공은 황후와 일황자, 이황자를 차례로 마주하며 인사를 올렸다.병환으로 누워만 있는 황제를 대신해 황후가 대공에게 덕담을 했다.“대공에게 선친이 안 계시다는 점이, 지금에 와선 새삼 마음에 걸립니다. 그러니 내 아들처럼, 곁에 두고자 합니다.”프레데리크가 그 말을 받아 답했다.“결혼식을 당겼으면 합니다.”황후는 축복연회가 여름 초입이니 결혼식은 일러야 가을 끝자락이 될 거라고 말했다.“아무리 속히 진행한다고 해도 그 이상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수도에 있을 동안 황녀와 오붓한 시간을 가지셔야 합니다. 모두가 기대하는 바가 큽니다.”약혼식 후에는 물밀듯이 귀족 연회 초대장이 들어올 터였다. 대공이 황실의 일원으로서 약혼녀인 황녀와 함께 대외적으로 얼굴을 자주 비추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황후와 이황자의 입지가 견고히 다져질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일황자는 고개만 까딱하고는 신전을 빠져나갔고, 이황자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일황자의 뒤를 이었다.“다음 축복연회에서, 정식으로 맞아들이겠습니다. 그 자리야말로, 모두가 지켜볼 대답이 될 테지요.”황후도 다음을 기약하며 떠났다.황녀 또한 대공과 더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인사를 하고 뒤돌아섰다.“황녀, 할 말이 있습니다.”프레데리크의 저음의 목소리가 신전의 대리석 바닥에 낮게 깔렸다. 그녀의 발걸음을 붙들 만큼, 결코 가벼이 들리지 않는 부름이었다.지빌라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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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축복 연회, 용병왕 카이사르

12화낮고 묵직한 목소리.지빌라가 다시 돌아보았다. 프레데리크는 말을 잇지 못 했다. 단정한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가, 이내 다시 굳어졌다.“……아닙니다. 축복연회에서 뵙겠습니다.”고개를 숙인 그는 더는 머뭇거리지 않고, 뒤돌아 신전의 기둥 너머로 사라졌다. 지빌라는 잠시 그 자리에 머물렀다가,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그답지 않네. 레오노라 때문일까?’지빌라는 대공이 무슨 말을 더 이으려했을지 곰곰이 생각해보려다가 관두었다. 그의 입장에서 지빌라가 하려는 모든 일이 예상밖의 일일 테니 난처할 뿐이란 걸 모르지 않았으므로.한편, 돌아선 프레데리크는 황녀를 보면 볼수록 소문의 한가운데 있던 사치스럽고 사랑에 쉽게 빠지는 가벼운 여인으로만 보이지 않았다.사람을 보면 으레 한눈에 그 사람을 파악했던 저로서도 황녀의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표정도, 행동도, 옷맵시도… 전부 연극처럼…. 그런데도 눈을 뗄 수 없다는 게, 그로서는 더 낯설었다.‘그 눈은…… 왜 사람을 헷갈리게 하지?’그가 전하려던 말은, 가까이 있는 사람을 조심하라는 조언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자칫 제 사람을 가리키는 것처럼 들릴까 싶어, 그는 말문을 닫았다. 그 순간 그가 그녀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거슬렸다.***초여름 제국 황궁 대연회장.둥근 유리 천장을 통과해,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연회홀 상단에는 왕국 사신들이 보낸 선물들과 꽃 장식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궁정악단의 선율이 낮게 깔리고, 대리석 기둥 사이로 황금 커튼이 출렁였다.황후가 가장 먼저 만인의 앞에 우뚝 섰다. 황제 대신 황후가 주관하는 세 번째 축복연회였다. 그리고 황후로서 온전한 자리매김을 할 수 있는 정치적 무대이기도 했다.다음으로 지빌라가 1년간 공을 들인 빛나는 드레스를 입고 천천히 입장했다. 긴 드레스 자락이 황실의 권위만큼 따라 들어왔다. 오늘, 그녀는 제국 그 자체였다. 수많은 시선이 그녀에게 꽂혀 들어왔다.그리고 조금 늦게 나타난 대공이 그녀의 뒤에서 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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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황녀 지빌라의 본 모습

13화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황녀에게 쏠렸다.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고 카이사르에게 다가갔다.“대륙의 용병왕 카이사르 경. 당신의 명성은 여기까지 자자합니다. 오늘, 그 이름이 이 축복연회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연회의 격이 높아졌지요.”카이사르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는 황녀를 꿰뚫어보듯 바라봤다.지빌라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이 손을 잡아주시겠어요? 제국과 왕국의 우정의 의미로… 그리고 오늘 밤 평화를 약속하기 위해서…….”순간, 연회장은 숨소리조차 사라진 듯 고요해졌다.카이사르는 끓던 분노가 스르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몇 초간 더 그녀를 바라봤다. 혹시 다른 의도가 숨겨져 있는지 가늠해 보았다.그러나 지빌라의 눈빛은 맑고 투명했다. 설령 그것이 연기일지라도, 이 모욕적인 자리에서 그를 배려해주는 단 한 사람이었다.그는 조용히 숨을 고르고, 거대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감쌌다. 이윽고 한쪽 무릎을 꿇고, 손등에 경건한 입맞춤을 올렸다.지빌라는 조용히 다짐했다.‘카이사르. 회귀 전에는 무기력하게 당신 앞에 무너졌었지.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거야. 내가 아는 모든 미래를 꺾어낼 거야. 전쟁도, 패망도— 절대 반복되지 않도록.’황녀가 자리로 돌아가는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며, 카이사르는 생각했다. 제국의 축복연회에 초대된 것 자체가 의문투성이었다. 이곳은 그의 성향과도 맞지 않았다. 우월감으로 하늘을 찌르는 자들이 모인 자리, 그는 처음부터 이 연회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참석한 것에 의의를 두고 조용히 떠나려 했다. 그러나 황녀의 약혼을 목격한 이상, 축하의 인사 정도는 전해야 할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섰던 것이다. 그것이 문제의 시작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어쩌면 그는 오늘, 제국을 향한 굴욕감을 안고 돌아갔을 것이다. 지워지지 않을 쓰디쓴 기억만을 남긴 채. 하지만 내심, 낯선 무언가가 스쳤다.제법 탐나는 여인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이름 붙일 수 없는 열망을 느꼈다.한편, 프레데리크는 일련의 상황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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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프레데리크라 불러

14화지빌라가 고개를 들었다. 존대만 하던 그가, 둘만의 거리가 되자 말을 낮추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그의 눈빛은 변함없이 차가웠다.“이제 와 대공이라니.”짧은 숨을 토하듯, 덧붙였다.“불편해.”지빌라는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마음에 두고 계셨다면―.”프레데리크는 말없이 시선을 내렸다. 그녀의 손을 가볍게 쥐며, 단호하게.“프레데리크라 불러.”연회 중앙홀에서 춤추는 두 사람의 모습은, 살아 있는 한 폭의 명화 같았다. 제국의 모든 귀족들과 사신들이 술렁이며 이들에 대해 평가하기가 바빴다.귀족들은 대공이 황실의 압박에 이토록 쉽게 넘어간 이면에 베라트 가문의 저주가 있음을 짐작하고, 안타깝게 여겼다.연로해 보이는 고위 귀족들이 모여서 한마디씩 던졌다.“어릴 때부터 약혼을 미루더니, 대공도 결국 황실의 압박을 견디지 못했군.”“베라트 가문은 제국의 제1검입니다. 그 검을 잃을 수는 없죠. 후계자가 시급하니. 이번에 황후를 다시 보았습니다.”“황후가 대리청정을 이어갈 발판으로 삼을 거요.”“황녀가 후계자를 하루빨리 생산하여야 가능하리라 봅니다.”또 다른 귀족부인들도 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다.“…생각보다 잘 어울리는군요. 대공이 황녀를 저리 부드럽게 이끌다니 보고도 믿을 수가 없네요.”“야생마처럼 날뛰는 황녀를 대공이 완전히 사로잡은 것만 같아요. 황녀 전하의 기품이 전과 달리 완벽해진 모습이에요.”“대공도 사람 같아 보이네요….”“그래도 둘 사이에 진심이 있을까 싶네요.”다른 부인이 비웃듯 덧붙였다.“함께하다보면 마음이 달라지지 않겠어요?”“베라트 가문의 저주를 모르시나요?”부인은 손부채로 입을 가린 채 속삭였다.“여기엔 사랑도, 희망도 없어요. 황녀라도 피하실 수 없으시죠.”낙담이 큰 귀족 부인들에 비해 젊은 영애들은 대공과 황녀의 모습에 흠뻑 빠져들기도 했다.“황녀 전하가 이미 대공께 푹 빠지셨다는 것도 이해가 돼.”“대공께서 평생 춤이라고는 처음이실 텐데… 황녀 전하의 손을 지그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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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한 여인으로서

15화레나토는 제 궁, 서쪽 정원의 폐쇄된 작은 별궁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서부 변경백 조프루아와 말라르메 후작이 기다리고 있었다.말라르메 후작은 신진 귀족 세력을 등에 업은 야심가였다. 대륙의 불안한 정세를 기회로 삼으려는데 주저함이 없었다.“황자 전하. 전쟁은 명분을 만들고, 명분은 왕좌를 만들어냅니다. 황후 폐하의 입지를 흔들어야 할 때입니다.”레나토는 얼굴을 굳혔다.“봐서 알겠지만, 오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후작은 가볍게 웃었다.“아직 낙담하기는 이릅니다.”그는 연회장의 광경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용병왕이 황녀께 흥미를 숨기지 못했습니다.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의 병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황녀를 미끼로 삼는 것도 방법입니다.”레나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연회장에서 황녀를 바라보던 카이사르의 눈빛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러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신생국의 수장인 그는 쉽게 제국의 함정에 빠질 인물도 아니었다.“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하지. 병력을 끌어들일 만한… 그런 감정인지.”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확인할 방안이 있습니다. 축복연회 후 열릴 사냥 대회. 거기에 초대장을 익명으로 보냈습니다. …황녀 전하께 약간의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면, 용병왕이 움직일지 모릅니다.”레나토는 가늘게 웃었다.“카이사르가 나선다면, 황녀에게 마음이 있다는 증거가 되겠지.”후작은 조심스레 덧붙였다.“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남자의 탐욕은 끝이 없으니. 특히 대륙을 뒤흔든 영웅이라면, 그 정복욕은 더 클 것입니다.”레나토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해 볼 만했다. 아쉬울 것도 없었다.“좋다. 추진해라.”그는 천천히 덧붙였다.“전쟁은 언제나 느닷없이 시작되지. 황후는 대공을 앞세워 막으려 들겠지만 그때 대공이 죽는다면—.”레나토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누이를 북부로 보내는 시일을 늦춰야겠다. 멀리 보낼 이유가 없으니.”곁에 선 조프루아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는 내내 말이 없었다. 그저, 아무 표정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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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나와 함께해, 레오노라

16화레오노라는 오늘 연회에 참석한 듯 드레스 차림 그대로였다. 지빌라 역시 오늘 연회 때 입은 차림 그대로이긴 했지만.여유가 없기는, 두 사람 다 매한가지였다. 그녀는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아 그녀를 맞았다.“생각보다 빨리 찾아왔군요. 레오노라.”“네…… 생각보다 정리가 빨리 되었습니다.”“그렇군요. 서 있지 말고 이리 와 앉아요.”“아닙니다. 이제부터 제가 모실― 황녀 전하… 아니 대공비 전하가 되실 텐데요. 전하께서도 저를… 시녀로서 편히 대해주시길 바라요.”레오노라는 서 있던 자리에서 한쪽 다리를 굽혀 고개를 숙였다.“고마워요. 내 부탁을 들어주어서… 앞으로 잘 부탁해. 레오노라.”“네… 황녀 전하.”지빌라는 레오노라를 유심히 살피며 짧아진 말로 그녀를 시험했다.“내게 궁금한 점이 많을 텐데… 묻고 싶은 게 있다면 이 자리에서 물어. 허락할 테니.”고개를 든 레오노라의 눈동자가, 여지없이 흔들렸다. 그녀가 바란 것은, 프레데리크 가까이에 머무는 것 단 하나뿐이었다.축복연회에 참석한 후 황녀와 대공의 약혼식을 담담히 지켜보았다. 잘 어울리는 한 쌍으로만 보였다는 것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그녀는 제국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핏줄은 말할 것도 없이 고귀했다.그런 여인이 대공비가 된다고 하니 제가 감히 그런 자리를 넘볼 수조차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뜬소문과 달리 황녀가 투기로 자신을 시녀로 들인 게 아니라는 건 직감했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그렇다면 황녀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북부까지 데려가려는 것인지.“제가 황녀 전하께 도움이 될까요?”“프레데리크에 대해 레오노라보다 더 잘 아는 여인이 있을까?”“제가 싫지 않으세요?”지빌라는 잠시 시선을 내리고, 다시 마주 보며 말했다.“레오노라 입장에서는 내가 미울 거야. 그런데 시녀가 되어 달라 했으니, 당혹스러웠을 테고.”“……솔직히 그랬어요.”지빌라는 안쓰럽고 미안한 얼굴을 해 보였다.“말 그대로 정략혼이야. 애초에 사랑 같은 건 기대하지 않았어. 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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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오해 살 일은 없습니다

17화레오노라에게 황녀는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황족이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격식만 따지며, 스스로 하늘 위에 있다 여기는 자들인 줄 알았는데, 황녀는 달랐다.“차를 내어 드릴까요?”“마시던 차로 부탁해.”지빌라는 샤를로트가 보낸 초대장 속에 은밀히 숨겨 놓은 편지를 보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신진 귀족세력인 베노 말라르메 후작을 따르는 이들의 부인들이 대거 초대되었다는 내용이었다.그들의 관심사는 제국에서 얼마나 더 많은 이득을 취하느냐에 있었다. 수단이 불법이라도 상관없이.회귀 전 황태녀였던 그녀는 억울한 백성 하나 없는 나라를 꿈꿨다. 귀족의 권세를 누르고자 혁명가들을 끌어들이고 그들을 우대했다.하지만 귀족은 더 영리했고, 혁명가들은 시간이 지나자 이상을 잃은 채 귀족들과 결탁해 이익을 챙겼다. 결과적으로 백성은 지키지도 못했고, 귀족들로부터 지지받지 못해 황권은 흔들렸다.지빌라는 손끝으로 초대장의 금박을 천천히 따라 그으며 중얼거렸다.“프레데리크와 나, 처음으로 나란히 서는 자리야. 그러니 가장 사치스럽고, 가장 눈에 띄는 드레스를 입어야겠지…….”레오노라는 순간 눈을 깜빡였다. 그녀가 아는 황녀는 대공의 뜻을 거스르지 않겠다는 것을 내비쳤었다. 그런데 어째서 아직도 황실의 눈치를 보는지 알 수 없었다.지빌라는 다정하게 웃어 보이면서 말했다.“황실이 그런 날 원하지. 황위엔 관심 없고, 대공에게 푹 빠져 있길 바라거든. 그 기대엔 부응해야지.”레오노라는 의문이 들어 물었다.“그러시다가 대공 각하께서 오해하시면요? 괜찮으신가요?”“이건 북부에 가서도 바뀌지 않을 거야. 황실은 나를 끊임없이 주시할 테니까. 프레데리크가 오해한다면… 그땐 레오노라가 도와줘.”***귀족의회가 끝나자 프레데리크는 곧장 황후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별도의 면담을 청했다는 보고를 받은 황후는 상석에 앉아 조용히 그 이유를 헤아리고 있었다.잠시 후, 프레데리크가 도착해 예를 갖추고 앉자, 황후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넘겼다.“대공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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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황녀의 정원 앞에

18화황후궁을 나서던 프레데리크의 시야에 멀찍이 서 있던 일황자 레나토가 들어왔다.귀족의회 내내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그가,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한 눈빛으로 프레데리크를 바라보고 있었다.두 사람은 말 대신 눈빛으로 짧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잠시, 팽팽한 침묵이 흐른 뒤 레나토가 먼저 입을 열었다.“중립을 지키겠다더니…… 정작 대공이 이 지경이라니. 이쯤 되면 누가 누구를 이용하는 건지, 나도 궁금해지는군.”“…….”황후와의 날선 신경전을 치른 직후, 또다시 이런 도발을 마주하자니 인내심도 한계에 달했다.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누르려 애썼다.“베라트 가문의 이름을 걸고, 중립을 지킬 것입니다.”“그 말을 어떻게 믿지? 황후께서 하라는 대로 움직이는 대공의 모습이란. 보고 있자니 속이 터져서 말이야.”레나토는 일부러 속을 긁는 듯한 말투로 덧붙였다.“제국의 제1검답게, 목숨을 걸고 이 땅이나 지켜. 언젠가 그대가 죽더라도— 황녀이자 내 누이는, 내가 책임지지.”프레데리크의 미간이 미묘하게 구겨졌다. 그는 레나토가 어떤 인물인지 익히 알고 있었다. 황권에 대한 야망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자.그가 황위에 오른다면, 그것은 곧 또 다른 재앙을 불러올 터였다.황제가 병환에 들기 전이었다면, 그 역시 바르게 자란 황녀에게 기대를 걸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상황은 급변했고, 황녀와 약혼에 이른 지금 그 또한 이 결혼을 이용하고 있다 봐도 무방했다.북부가 황후의 편에 선 듯한 인상을 준 것이, 일황자 측의 불신을 낳았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었다.‘중립을 지킨다’는 말은 쉽지만, 그것이 늘 검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제국의 제1검으로서 그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아야 했지만, 나라에 해악을 끼칠 자를 두고 볼 수만도 없었다.“제 목숨은 언제나 제국을 위해 바쳐질 것입니다.”그는 더는 말하지 않고, 레나토 곁을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귀족의회를 마친 프레데리크는 이튿날 정오 무렵 황후의 지시대로 황녀의 궁에 도착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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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미로정원의 깊은 그늘 아래

19화대공의 뒤를 말없이 따르던 지빌라는 뜻밖의 방문이 내심 반가웠다. 마침 그에게 샤를로트의 초대장을 전할 구실을 찾고 있었으니까.그런데 오히려 그가 먼저 찾아왔다. 이토록 무심한 얼굴로, 이상하리만치 때맞춰.‘왜… 다시 존대하는 거람?’지빌라는 그를 알 수 없었다.미로정원 위로 꿀벌 한 마리가 유유히 날아다녔다. 가장 향기롭고 달콤한 꽃을 찾아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맴돌았다. 꽃과 향기가 넘쳐나는 이 정원에서, 무엇을 택해야 할지 망설이는 듯했다.“공무가 바쁘실 텐데…….”그는 앞만 본 채 느릿하게 걸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지빌라는 이 방문이 그의 뜻이 아님을 곧 알아챘다. 분명 황후의 입김이 작용했을 터였다. 그녀 역시 황후를 핑계 삼아 초대장을 전하려 했지만, 이미 선수를 빼앗긴 셈이었다.“결혼식 준비는 착실히 진행 중이에요. 황실 관례를 따라야 하는 게 많아서… 최대한 절차를 줄이고 있고요.”그가 황후에게 결혼 일정을 앞당기길 원한다고 말했을 것쯤은 알고 있었다. 황실 곳곳에 정보통 하나쯤 심어둔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으니까.그가 아무 대꾸 없이 듣고만 있다는 걸 알면서도, 지빌라는 애써 말을 이었다.“좋은 차를 들여왔는데… 한잔하고 가시겠어요?”그는 말없이 걸음을 멈추더니, 잠시 후 고개를 돌려 지빌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가 묻고 싶은 말이 있는 건가 싶었다.“혹시… 요청하실 일이 있으신가요?”“요청할 일이라… 그럴 리가.”프레데리크의 말은 황실에 기대하는 바 없이 여기에 있다는 뜻이었지만, 그저 무심하게 뱉은 한마디가 유독 쓸쓸하게 울렸다.지빌라도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다.“저는… 그, 그러니까…… 앗!”쏴아―악!하늘이 무겁게 내려앉더니, 순식간에 소낙비가 쏟아졌다. 미로정원의 깊은 그늘 아래를 걷고 있던 터라, 두 사람은 하늘이 어두워진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어버린 두 사람은 서로를 얼떨떨하게 바라보았다. 그때, 다가선 그의 그림자가 지빌라의 머리 위로 드리웠다.그는 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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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어떤 모습이 진짜지

20화젖은 옷보다 머릿속이 더 엉망이었다. 아직도 귓가에 그의 낮은 목소리가 맴도는 듯했다.“연회 얘기는 꺼내 보지도 못 했네…….”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프레데리크는 타운하우스로 돌아오자,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초대장을 보고 보좌관에게 말했다.“초대장 알아서 회신해.”그러자 랑베르가 곤란한 표정으로 답했다.“대부분 황녀 전하와 함께 참석해 달라는 초대장입니다. 황녀 전하께도 이미 전달되었을 것이고, 각하께서 동행하지 않으시면 황녀 전하께서 혼자 참석하신다는 사실이 공공연히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프레데리크는 대답을 미룬 채, 젖은 옷부터 갈아입겠다며 침실로 들어섰다. 시종에게 옷을 건네고는 맨몸으로 욕실로 들어갔다.찬물로 몸을 씻어낸 그는, 미로정원에서 황녀가 무언가 말하려다 끝내 삼켰던 순간을 떠올렸다.집무실로 돌아온 프레데리크는 랑베르에게 지시했다.“황녀에게 어떤 초대에 응할 건지 물어.”랑베르가 잠시 머뭇거렸다.“동행하신다고 전해도 되겠습니까?”프레데리크는 고개를 잠시 숙였다. 그것이 단순한 의무감 때문인지, 아니면 무언가 놓치기 싫어서인지, 그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그렇게 전해.”문득, 정원에서 생각이 많은 듯 같은 자리를 맴돌던 황녀의 모습이 떠올랐다.‘어떤 모습이 진짜지?’정원에서의 고요한 눈빛, 연회장에서의 단호한 어조, 꿀벌 앞에서 당황하던 얼굴까지.황녀는 가면을 쓰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 모든 모습이 다 진짜일까. 가면을 쓰기엔, 지나치게 솔직했다.사치와 화려함에만 탐닉한다던 황녀치고는 정치를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았다. 황실 내 정보에도 밝고, 매사에 생각이 깊어 보였다.꼭 황태녀라도 된 듯이.꿀벌에 놀라던, 조금은 귀엽다 싶은 표정도 머릿속을 스쳤다. 프레데리크는 애써 그 기억을 떨쳐냈다.“각하.”눈앞에는 또 다른 보좌관 피엘 디비나가 보고를 기다리고 있었다.“무슨 일이지?”“북부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프레데리크는 잠시 미간을 좁혔다. 북부라면 그가 태어난 곳이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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