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Chapter 91 - Chapter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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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평가 결과

평가 결과가 나온 건 이틀 뒤였다.오전 회의를 끝내고 자리로 돌아오자 인사팀에서 메일이 와 있었다.**[유럽 사업 실무 책임자 비공개 평가 결과 안내]**나는 마우스 위에 손을 올린 채 잠시 멈췄다.생각보다 긴장됐다.프라하 석 달.돌아온 뒤의 본사 업무.내가 직접 작성했던 자기 평가까지.그 모든 게 숫자와 문장으로 정리돼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쉽게 열리지 않았다.민지가 옆에서 물었다.“뭐 왔어?”“평가 결과.”“열어 봐.”“왜 네가 더 급해?”“나 이런 거 구경하는 거 좋아하잖아.”나는 웃으며 노트북 화면을 몸 쪽으로 당겼다.“이건 비공개야.”“쳇.”민지는 순순히 돌아갔다.나는 그제야 메일을 열었다.*첫 페이지에는 종합 평가가 있었다.**성과 평가: 우수.****유럽 사업 확대 적합도: 높음.****독립적 의사결정 능력: 우수.****위기 대응 및 현지 조직 이관 능력: 우수.**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그리고 마지막.**향후 확대 직책 적합성: 조건부 적합.**나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조건부?바로 세부 의견을 열었다.강점은 예상했던 내용이었다.프라하 생산 라인 중단 당시 손실보다 품질 기준을 우선한 판단.현지 직원에게 업무를 점진적으로 이관한 점.독일 유통사 대표 교체 이후 계약과 신규 협상을 분리한 대응.본사와 현지 사이의 실무 연결 능력.문제는 보완 항목이었다.**[본인이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영역까지 관여하려는 경향이 있음.]**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역시 그거였다.다음 문장까지 읽자 조금 웃음이 났다.**[성과가 높은 만큼 업무를 본인에게 집중시키려는 경향이 나타날 수 있으므로, 향후 상위 직책 부여 전 위임 및 조직 운영 능력 추가 검증 필요.]**“차도현 닮았다더니.”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점심 직전에 윤세라에게 연락이 왔다.[결과 봤어요?][네.][기분 어때요?]나는 잠깐 고민하다 답했다.[좋은데 좀 억울해요.]바로 전화가 왔다.“뭐가 억울해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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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묶지 않는 통제

주말 아침.알람이 울리지 않았다.정확히는 내가 꺼 놓았다.오늘의 일정은 하나뿐이었다.**아무 일정 없는 날 하루 종일 집에 있기.**눈을 뜨자 도현이 이미 나를 보고 있었다.“언제 일어났어요?”“조금 전에.”“왜 안 깨웠어요?”“오늘 아무것도 안 하기로 했잖아요.”나는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여 그를 마주 봤다.“그 말 되게 마음에 드나 봐요.”“네.”“회사도 안 보고?”“안 봅니다.”“메일도?”도현의 시선이 잠깐 침대 옆 휴대전화로 향했다.나는 바로 웃었다.“봤네.”“알림만.”“차도현 씨.”“열지는 않았습니다.”나는 손을 뻗어 휴대전화를 집었다.그리고 그대로 내 쪽 침대 협탁에 내려놨다.도현이 눈썹을 올렸다.“압수입니까?”“아니요.”나는 그의 손을 잡아 다시 이불 안으로 넣었다.“오늘은 제가 가지고 있을래요.”“내 휴대전화를?”“싫어요?”잠깐 나를 보던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요.”“그럼 끝.”“대신.”“뭔데요?”그가 내 허리를 끌어당겼다.“당신도 보지 마요.”“제 폰은요?”“같이 놓아 둡시다.”결국 내 휴대전화도 그 옆에 놓였다.두 대가 나란히.우리는 그보다 더 가까이 붙어 있었다.*점심은 배달이었다.요리하지 말자고 먼저 주장한 사람은 나였다.앞치마까지 선물해 놓고 왜 요리를 못 하게 하느냐는 도현의 항의는 무시했다.“오늘은 쉬는 날이잖아요.”“요리는 이제 꽤 합니다.”“알아요.”“오므라이스도.”“알아요.”“볶음밥도 이제 안 짭니다.”“그것도 알아요.”“그런데 왜.”나는 그의 입에 감자튀김 하나를 넣었다.“말 많아요.”도현이 그대로 씹었다.“이것도 통제입니까?”“감자튀김 먹인 게?”“내 의견을 막았잖습니까.”“그럼 계속 말해요.”“이미 흐름 끊겼습니다.”나는 웃음을 터뜨렸다.평소 같으면 서로 일 이야기를 한 번쯤 꺼냈을 시간이었다.그런데 오늘은 프라하도,유럽 사업도,평가 결과도 없었다.우리는 소파에 붙어 앉아 영화를 골랐다.문제는 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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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법인장의 첫 해고

프라하에서 연락이 온 건 오전 아홉 시가 조금 넘어서였다.화면에 뜬 이름을 보자 나는 바로 이어폰을 꽂았다.마르틴 노박.내가 한국으로 돌아온 뒤,마르틴은 프라하 법인의 현지 운영 책임자를 거쳐 임시 법인장으로 올라가 있었다.정식 인사 발표가 난 지 이제 겨우 열흘.그런 그가 아침부터 전화를 걸어 온 이유는 단순하지 않았다.“한 책임자님.”평소보다 목소리가 무거웠다.“무슨 일 있어요?”잠깐 침묵이 흘렀다.“직원을 해고해야 할 것 같습니다.”나는 손을 멈췄다.“누구를요?”“생산관리 담당자입니다.”마르틴이 화면을 공유했다.자료는 이미 정리돼 있었다.지난 석 달 동안 같은 절차 위반이 세 번.생산 수량 변경을 승인 없이 처리한 것 한 번.품질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 출고 일정을 확정한 것 한 번.그리고 이번에는 현지 거래처의 납기 요청을 먼저 수락한 뒤,본사와 생산팀에 뒤늦게 통보했다.다행히 출고 전 발견해서 손실은 없었다.하지만 이미 두 번의 공식 경고가 있었다.교육 기록도 있었다.“본인은 뭐래요?”“일을 빨리 처리하려고 했다고 합니다.”“고의로 회사에 손해를 주려고 한 건 아니고요?”“그건 아닙니다.”나는 자료를 천천히 넘겼다.그게 오히려 더 어려웠다.명백한 악의가 있다면 판단하기 쉬웠을 것이다.하지만 이것은 달랐다.잘하려고 했고,결과적으로 같은 기준을 계속 어겼다.마르틴이 물었다.“한 책임자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예전 같으면 자료부터 다시 확인했을 것이다.본사 기록과 대조하고,당사자 인터뷰까지 보겠다고 했을지도 몰랐다.그런데 며칠 전 받은 평가가 떠올랐다.**본인이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영역까지 관여하려는 경향.**나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마르틴.”“네.”“지금 저한테 결정해 달라는 거예요?”그가 잠시 굳었다.“…조언을 받고 싶었습니다.”“조언은 할 수 있어요.”나는 화면의 자료를 가리켰다.“그런데 해고 여부는 현지 인사 절차랑 법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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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돌아오지 못한 밤

퇴근 직전이었다.프라하에서 온 메일 하나를 확인하고 노트북을 닫으려는데, 팀장님이 급하게 나를 불렀다.“한 책임자, 잠깐만.”“네.”“독일 쪽 추가 물량 계약서 수정본 왔어. 오늘 안에 검토 가능해?”시계를 봤다.오후 여섯 시 십 분.오늘 도현과 약속이 있었다.정확히는 약속이라기보다, 어제 내가 먼저 한 말이었다.**오늘은 일 얘기 그만.**그 말을 해 놓고 오늘까지 야근하고 싶지는 않았다.하지만 계약서를 열어 본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수정된 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나는 휴대전화를 들었다.[오늘 늦어요.]도현의 답장은 바로 왔다.[얼마나요?][모르겠어요.]잠시 후.[저녁은?][아직.][알겠습니다.]끝이었다.오라고도 하지 않았고,기다리겠다고도 하지 않았다.그런데 마지막 문장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나는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먼저 자도 돼요.]이번에는 답장이 조금 늦었다.[그건 내가 정하겠습니다.]나도 모르게 웃었다.[네. 그럼 알아서 하세요.]*밤 열 시가 넘어서야 수정본 검토가 끝났다.하지만 마지막으로 법무팀 확인까지 기다리다 보니 열한 시 반.회사를 나왔을 때는 자정이 가까웠다.택시를 잡으려던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도현이었다.“네.”— 끝났어요?“지금 나왔어요.”— 어디입니까?“회사 앞.”짧은 침묵.— 기다려요.“왜요?”— 근처입니다.“설마 아직 회사예요?”— 아닙니다.“그럼 어디인데요?”전화가 끊겼다.그리고 오 분도 지나지 않아 검은 차 한 대가 건물 앞에 멈췄다.도현이 직접 운전석에서 내렸다.나는 황당해서 그를 바라봤다.“왜 왔어요?”“데리러.”“집에 있으라니까.”“그런 말 안 했습니다.”“먼저 자도 된다고 했잖아요.”“그래서 내가 정한다고 했고.”도현은 내 가방을 받아 들었다.“결정했습니다.”“뭘요?”“안 자고 기다리는 걸로.”그 말에 더는 뭐라고 할 수 없었다.*차 안은 조용했다.신호에 걸리자 도현이 내 쪽을 봤다.“많이 피곤합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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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돌아온 사람의 규칙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들린 건 빗소리였다.어젯밤보다 훨씬 약해져 있었다.나는 호텔 침대 위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옆에는 도현이 누워 있었다.평소 집에서 보는 모습과 별다를 건 없는데,이상하게 낯설었다.아마 장소 때문일 것이다.우리 집도 아니고,출장지도 아닌 곳.그저 돌아가지 못해서 잠시 머문 방.나는 몸을 조금 움직였다.도현이 바로 눈을 떴다.“깼어요?”“네.”“몇 시예요?”그가 협탁의 시계를 확인했다.“일곱 시 십이 분.”“일찍 일어났네.”“평소랑 비슷합니다.”나는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저는 더 잘래요.”“자요.”“도현 씨는?”“같이 있을게요.”눈을 감으려다 다시 떴다.“같이 자겠다는 건 아니고?”“그것도 가능합니다.”나는 웃었다.결국 그가 다시 눕자 자연스럽게 그의 쪽으로 몸을 붙였다.팔이 허리를 감쌌다.어젯밤처럼.이번에는 긴장보다 익숙함이 먼저였다.*두 시간 뒤.우리는 호텔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있었다.창밖은 흐렸지만 비는 거의 그쳤다.나는 토스트를 뜯다가 말했다.“집 가면 제일 먼저 뭐 할 거예요?”도현이 커피잔을 내려놨다.“샤워.”“그다음은?”“당신 짐 정리.”“제 짐을 왜 도현 씨가 정리해요?”그가 잠깐 멈췄다.“같이 정리.”“말 바꾸는 속도 빠르네.”“배웠습니다.”나는 웃으며 잼을 발랐다.“저는 세탁기부터.”“호텔에서 하루 잤는데 빨래가 그렇게 많습니까?”“어제 입은 옷 있잖아요.”“그건 세탁 맡겨도 됩니다.”“집에 세탁기 있는데요.”“그렇군요.”“도현 씨.”“네.”“가끔 진짜 생활감 없어요.”“같이 산 지 얼마 안 됐으니까.”“이제 좀 됐거든요?”도현이 내 손가락의 반지를 보며 말했다.“그래도 아직 배우는 중입니다.”그 말이 조금 마음에 들었다.나는 토스트를 한입 먹었다.“그럼 오늘 하나 더 배워요.”“뭘?”“집에 돌아온 사람의 규칙.”도현의 눈썹이 움직였다.“규칙?”“진짜 규칙 말고.”“그럼?”나는 잠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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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돌아온 뒤의 시험

일요일 오후.나는 작업실 문 앞에서 도현을 막아 세웠다.“오늘 시험 하나 볼 거예요.”도현의 표정이 바로 경계로 바뀌었다.“무슨 시험입니까?”“간단해요.”나는 작업실 안을 가리켰다.“저 여기 들어갈 거예요.”“네.”“두 시간 동안 혼자 있을 거고.”“네.”“도현 씨는 안 들어오는 거예요.”잠깐 정적.예상대로 표정이 미묘해졌다.“두 시간?”“네.”“집에 같이 있는데?”“그래서 시험이에요.”“무슨 시험인지부터 설명해 주세요.”나는 웃음을 참았다.“제가 프라하에서 돌아온 뒤에도 진짜 혼자 있을 수 있는지.”도현은 내 뒤의 작업실을 한번 봤다.85화에서 함께 골랐던 의자와 책장, 작은 소파가 있는 방.내가 혼자 있을 수 있도록 만든 공간이었다.“내가 들어오지 않는 게 시험입니까?”“정확히는.”나는 검지를 세웠다.“궁금해도 안 들여다보기.”두 번째.“제가 뭐 하는지 묻지 않기.”세 번째.“두 시간 안에 메시지도 보내지 않기.”도현이 황당한 얼굴을 했다.“같은 집에서 메시지를 왜 보내겠습니까?”“도현 씨면 할 수도 있잖아요.”“…반박하기 어렵군요.”“그리고.”나는 휴대전화를 들어 보였다.“제가 먼저 나오기 전까지 기다리기.”도현이 한숨처럼 웃었다.“평가 결과 때문에 이럽니까?”“저만 위임 연습할 수는 없잖아요.”“이건 위임이 아닌 것 같은데.”“비슷해요.”나는 문고리를 잡았다.“할 거예요?”도현이 잠시 나를 바라봤다.“당신이 정말 혼자 있고 싶은 겁니까?”이번에는 장난 없이 물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럼 시험 아니어도 됩니다.”뜻밖의 대답이었다.“뭐가요?”“그냥 있어요.”도현이 한 걸음 물러났다.“두 시간이든 세 시간이든.”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웃었다.“그래도 두 시간만.”“알겠습니다.”문을 닫기 직전 도현이 불렀다.“서윤 씨.”나는 고개를 내밀었다.“왜요?”“끝나면 불러요.”“벌써 보고 싶어요?”그는 아주 잠깐 침묵했다.“네.”대답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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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붉은 카드

다음 날 아침, 침대 옆 탁자에 작은 붉은 카드가 놓여 있었다. 앞면에는 숫자 하나가 적혀 있었다. [1] “이건 뭐예요?” 도현은 커피를 마시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새로운 방식입니다.” “무슨 방식이요?” “당신이 서울에 머무는 한 달 동안 사용할 선택 카드.” 카드를 뒤집자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오늘의 주도권을 상대에게 넘긴다.] “이걸 쓰면 무조건 주인님 차례예요?” “아닙니다. 카드를 건넨 사람이 상대에게 주도권을 요청하는 겁니다.” “몇 장 있어요?” 도현이 서랍을 열었다. 붉은 카드 다섯 장과 검은 카드 다섯 장이 들어 있었다. 붉은 카드는 도현에게 주도권을 요청하는 카드. 검은 카드는 내가 주도권을 갖겠다는 카드였다. “한 달에 다 써야 해요?” “원할 때만 사용합니다.” “안 쓰면요?” “평범하게 지냅니다.” 나는 붉은 카드 한 장을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오늘 바로 써도 돼요?” 도현의 시선이 카드로 내려갔다. “출근 전입니다.” “퇴근 후 예약.” “카드에는 예약 기능이 없습니다.” “그럼 지금 줄게요.” 나는 카드를 그의 셔츠 주머니에 넣었다. 도현의 눈빛이 미세하게 달라졌다. “한서윤.” “회사 늦겠어요.” 나는 웃으며 먼저 현관을 나섰다. 회사에서는 프라하 법인의 신규 투자 계약 발표가 예정돼 있었다. 서울 본사 임원들 앞에서 투자 구조와 수익 계획을 설명해야 했다. 발표 직전 윤세라 대표가 자료를 넘기며 말했다. “오늘 투자자 중 한 명이 조건 변경을 요구할 겁니다.” “어떤 조건이요?” “현지 법인 의결권 일부를 본사로 돌리는 안입니다.” 그 조건을 받아들이면 내 법인장 권한은 크게 줄어든다. 예상대로 투자자는 발표가 끝난 뒤 요구했다. “투자 규모를 유지하려면 주요 의사 결정권을 서울 본사에 두어야 합니다.” 나는 곧바로 거절하지 않았다. “어느 범위까지입니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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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검은 카드의 반격

붉은 카드를 사용한 다음 날, 도현은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다. 나는 그의 셔츠 주머니에 검은 카드 한 장을 넣었다. [2] 뒷면에는 내가 직접 쓴 문장이 있었다. [오늘은 제 말을 따르세요.] 도현이 카드를 읽고 나를 바라봤다. “원래 카드에는 없는 문장입니다.” “제가 주도권을 가지는 날이니까 규칙도 제가 정해요.” “합의된 범위 안에서만.” “알아요.” 나는 그의 넥타이를 골라 직접 매어 줬다. 평소보다 조금 느슨하게. “오늘 퇴근하고 바로 집으로 와요.” “이사회 일정이 있습니다.” “몇 시에 끝나요?” “일곱 시 예상입니다.” “일곱 시 삼십 분까지.” 도현의 눈썹이 올라갔다. “늦으면요?” “카드 효력은 사라져요.” “그것이 벌입니까?” “네. 오늘 주도권을 못 얻는 벌.” 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잔인하군요.” 도현은 정확히 일곱 시 이십오 분에 집에 도착했다. 재킷을 벗기도 전에 내가 손을 내밀었다. “휴대전화.” “긴급 연락이 올 수 있습니다.” “진동으로 두고 테이블 위에.” 그는 순순히 따랐다. 나는 준비해 둔 회색 천을 꺼냈다. “안대입니까?” “아니요.” 천은 그의 양손을 앞으로 모아 감을 만큼 길었다. “오늘은 주인님이 묶이는 날이에요.” 도현의 눈빛이 깊어졌다. “확실합니까?” “싫어요?” “아닙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손을 내밀었다. 나는 손목에 천을 두 번 감은 뒤 매듭을 만들었다. 지나치게 조이지 않도록 손가락으로 여유를 확인했다. “불편하면 말해요.” “네.” “호칭은요?” 도현은 잠시 침묵했다. “한서윤 씨.” “그건 회사 호칭인데요.” “원하는 호칭을 말하십시오.” 나는 그의 턱을 손끝으로 들어 올렸다. “오늘은 그냥 서윤이라고 불러요.” 도현의 시선이 흔들렸다. “서윤.” 평소보다 낮고 느린 목소리였다. 그 한마디만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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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가면 무도회

프라하 법인의 신규 투자 계약을 축하하는 행사가 호텔에서 열렸다.행사 콘셉트는 가면 무도회였다.참석자는 이름표 대신 회사와 직책만 표시된 가면을 착용해야 했다.윤세라 대표는 이것이 투자자들의 취향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차도현 의장도 참석합니까?”“전략 파트너 자격으로 옵니다.”나는 검은 드레스와 은색 가면을 골랐다.행사장에 들어서자 수십 명의 사람들이 가면을 쓴 채 섞여 있었다.도현을 찾으려 했지만 모두 비슷한 검은 정장이었다.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누구를 찾습니까?”검은 가면을 쓴 남자가 가까이 서 있었다.목소리만으로 도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차도현 의장님을요.”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그의 손이 허리 가까이 다가왔다가 멈췄다.“이곳에서는 직책이 표시되지 않습니다.”“그럼 누구세요?”“당신이 선택해야 합니다.”도현은 손을 내밀었다.춤을 청하는 동작이었다.나는 잠시 망설이다 손을 올렸다.음악이 시작되자 그가 나를 사람들 사이로 이끌었다.“오늘은 회사 행사예요.”“알고 있습니다.”“너무 가까워요.”“가면을 썼습니다.”“가면만 쓰면 아무거나 해도 돼요?”도현의 손이 허리를 조금 더 당겼다.“당신이 허락한 것만.”춤이 끝나자 그는 내 손바닥에 작은 검은 토큰을 쥐여 줬다.[ROOM 12]“이게 뭐예요?”“행사 주최 측이 준비한 개인 라운지입니다.”“왜 12번이에요?”“제가 골랐습니다.”“가도 되는 곳 맞아요?”“직원들이 휴식하는 일반 라운지입니다.”하지만 도현의 표정은 전혀 일반적이지 않았다.나는 토큰을 가방에 넣었다.“행사 끝나고 생각할게요.”그날 중요한 순서는 해외 투자자의 발표였다.투자자는 프라하 법인의 지분을 추가로 확보하고 싶다고 공개 제안했다.조건은 예상보다 좋았다.하지만 발표 자료 안에는 현지 법인장을 본사 파견 임원으로 교체한다는 조항이 숨어 있었다.나는 행사장 뒤편에서 곧바로 윤세라에게 알렸다.“이 조건이면 저는 법인장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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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열두 번째 방

12번 라운지는 넓지 않았다.소파와 긴 테이블, 벽면 전체를 채운 거울이 전부였다.도현은 문 옆에 서서 붉은 카드를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정말 두 카드를 동시에 사용합니까?”“네.”“중간에 주도권이 바뀌어도 받아들이겠다는 뜻입니다.”“알아요.”나는 먼저 그의 가면을 벗겼다.검은 리본을 풀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뒤 넥타이를 천천히 잡아당겼다.“앉아요.”도현은 소파에 앉았다.나는 그의 손목을 리본으로 묶지 않았다.대신 양손을 무릎 위에 올리게 했다.“제가 허락하기 전까지 움직이지 마요.”“알겠습니다.”“이제 회사에서 있었던 일은 묻지 않기.”“그건 어렵군요.”“카드 효력 끝낼까요?”도현이 입을 다물었다.나는 가면을 그의 눈 위에 다시 씌웠다.시야가 제한되자 평소의 차분한 표정에 미세한 긴장이 생겼다.“지금 누구 말 듣고 있어요?”“서윤.”“잘했어요.”나는 그의 주위를 천천히 걸었다.어깨에 손을 얹었다가 바로 떼고, 귓가에 가까이 다가갔다가 말을 하지 않았다.도현이 낮게 숨을 내쉬었다.“일부러 기다리게 하는 겁니까?”“주인님한테 배웠어요.”“카드를 받은 것을 후회하는군요.”“아직은요?”그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조금 움직였다.“움직였어요.”“인정합니다.”“그럼 제 차례는 여기까지.”나는 그의 가면을 벗기고 붉은 카드를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도현의 눈빛이 즉시 달라졌다.“확실합니까?”“네.”“일어나십시오.”이번에는 그의 목소리가 공간을 장악했다.나는 소파 앞에 섰다.도현은 내가 사용했던 검은 리본을 들어 손목에 감았다.“방금 저에게 내렸던 명령을 기억합니까?”“움직이지 말라고 했어요.”“지금부터 당신도 따릅니다.”양손이 앞쪽으로 모였다.도현은 매듭을 묶기 전 내 손가락 사이의 온도와 혈색을 확인했다.“불편하면 즉시 말하십시오.”“네.”“거울 앞으로.”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걸었다.가면은 쓰지 않았다.거울 속에 붉은 얼굴과 묶인 손, 뒤에 선 도현이 모두 보였다.“오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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