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Chapter 81 - Chapter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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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이 년의 조건

프라하에 도착한 첫날.공항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한국을 떠난 지 열두 시간도 넘었는데 이상하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휴대전화를 켜자 가장 먼저 도현의 메시지가 들어왔다.[도착했습니까?]나는 캐리어 손잡이를 잡은 채 답했다.[네. 방금 나왔어요.]답장은 바로 왔다.[피곤합니까?][많이요.][숙소 들어가면 연락해요.]잠시 고민하다 한 줄을 더 보냈다.[보고 싶어요.]이번에는 몇 초 동안 답장이 없었다.그러다.[나도.]나는 화면을 두 번 봤다.평소라면 ‘저도요’라고 했을 사람이었다.그 짧은 두 글자 때문에 괜히 웃음이 났다.*숙소는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더 작았다.침대 하나.작은 책상.소파.간단한 주방.캐리어 두 개를 펼쳐 놓자 바닥이 거의 꽉 찼다.나는 창문부터 열었다.멀리 오래된 건물 지붕들이 보였다.예뻤다.그리고 낯설었다.찬장에서 컵을 꺼내려다 손을 멈췄다.전부 평범한 흰색 컵이었다.집에 두고 온 분홍색 오리 머그잔이 생각났다.나는 바로 도현에게 사진을 찍어 보냈다.[여기 컵 너무 재미없어요.]잠시 뒤 전화가 걸려 왔다.“숙소 들어갔습니까?”“네.”“문은 확인했고?”“했어요.”“창문은?”“도현 씨.”“네.”“저 출장 온 거지 열두 살 아니에요.”전화기 너머에서 잠깐 침묵이 흘렀다.“알고 있습니다.”“근데 왜 이렇게 물어봐요?”“직접 확인하러 갈 수 없으니까.”그 대답에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나는 침대 끝에 앉았다.“집은 어때요?”“조용합니다.”“벌써?”“당신이 아침에 나간 뒤 그대로니까.”가슴이 조금 내려앉았다.“오리 컵 써요.”“내가요?”“네.”“당신 컵인데.”“같이 살잖아요.”도현이 잠시 말이 없었다.“내일 아침에 쓰겠습니다.”“사진 보내요.”“알겠습니다.”“그리고 제 방 들어가도 되고.”“그것도 기억합니다.”그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갑자기 피곤함이 몰려왔다.“저 좀 자야겠어요.”“자요.”“끊기 싫은데.”말하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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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거울 앞의 자세

욕실에서 나오자 도현은 정말 소파에 앉아 있었다.문 앞에서 기다리지 말라고 했던 말을 지킨 모양이었다.문제는 자세였다.등을 곧게 세우고 앉아 휴대전화를 보고 있는 모습이 너무 반듯했다.나는 머리를 닦으며 웃었다.“뭐 해요?”“기다렸습니다.”“십 분도 못 기다릴 것처럼 굴더니 잘 기다렸네요.”도현이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십칠 분이었습니다.”“셌어요?”“시계를 봤습니다.”“그게 센 거지.”내가 웃으며 지나가려는데 손목을 잡혔다.세게 잡은 건 아니었다.그저 멈춰 세울 정도.“왜요?”도현의 시선이 내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왔다.“아까 말했잖습니까.”“뭘요?”“기다린다고.”이번에는 내가 먼저 가까이 갔다.“이제 안 기다려도 돼요.”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내 허리에 닿았다.입술이 닿기 직전,나는 고개를 살짝 뒤로 뺐다.“잠깐.”도현이 바로 멈췄다.나는 그의 넥타이를 바라봤다.아직 회사에서 돌아온 그대로였다.“이거부터 풀어요.”“내가?”“네.”도현이 천천히 매듭에 손을 올렸다.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다시 말했다.“아니.”손을 뻗어 그의 손을 내렸다.“제가 할래요.”매듭을 조금씩 느슨하게 풀었다.도현은 가만히 있었다.“오늘은 당신이 정한다고 했죠.”“네.”“그럼 나는 기다리면 됩니까?”“오늘은요.”넥타이를 완전히 풀어 손에 쥐었다.“따라와요.”*침실 한쪽에는 전신거울이 있었다.평소에는 옷을 확인할 때만 쓰던 거울이었다.나는 그 앞에 섰다.도현도 뒤에서 멈췄다.“여기요?”“네.”거울 속에 우리 둘이 함께 보였다.젖은 머리의 나.셔츠 단추를 하나 풀어 놓은 도현.오른손에는 같은 반지.도현의 손목에는 은색 팔찌.지금까지 우리가 선택했던 것들이 한 화면 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나는 거울 속 도현을 보며 말했다.“뒤에 서 있어요.”도현이 한 걸음 가까워졌다.“이 정도?”“조금 더.”거리가 좁아졌다.등 뒤로 체온이 느껴질 만큼.하지만 그는 먼저 손을 대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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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공동대표 평가

프라하에 온 지 일주일째.아침부터 본사에서 화상회의 요청이 들어왔다.**[유럽 사업 중간 운영 평가.]**참석자 명단을 확인하다가 손이 멈췄다.차도현 대표.윤세라.그리고 나.회의가 시작되자 윤세라가 먼저 말했다.“오늘은 파견 평가만 하는 자리가 아닙니다.”“그럼요?”화면 한쪽에 새로운 자료가 열렸다.**[유럽 사업 의사결정 체계 시범 운영안.]**나는 천천히 내용을 읽었다.프라하 생산이 안정된 이후 유럽 사업 규모가 예상보다 빠르게 커지면서, 본사와 현지의 판단 속도 차이가 문제로 올라오고 있었다.윤세라가 설명했다.“차 대표 혼자 모든 걸 승인하는 구조를 줄이고 있는 건 알고 있죠?”“네.”“유럽 사업도 마찬가지예요.”도현이 말을 이었다.“앞으로 석 달 동안 일부 주요 안건은 나와 윤세라 후보가 함께 검토합니다.”나는 화면을 다시 봤다.“공동대표가 되는 건 아니죠?”윤세라가 바로 웃었다.“아니에요.”도현도 고개를 저었다.“대표는 여전히 나 하나입니다.”“그럼 이건?”“승계 준비 과정의 공동 평가입니다.”최종 경영권을 나누는 게 아니라,도현의 판단과 후임 후보인 윤세라의 판단을 같은 안건에 놓고 비교하는 방식이었다.나는 팔짱을 꼈다.“둘이 의견 다르면요?”“그게 오늘 확인할 부분입니다.”윤세라가 말했다.“첫 평가 대상이 프라하 라인이거든요.”하필 내가 맡은 사업이었다.*첫 번째 안건은 추가 생산량이었다.독일에서 예상보다 큰 주문이 들어왔다.현재 물량보다 18퍼센트 증산 요청.도현의 의견은 보수적이었다.“현재 안정화 기간입니다. 바로 18퍼센트까지 늘리는 건 위험합니다.”윤세라는 반대였다.“라인 불량률이 일주일 이상 1퍼센트 초반이면 대응할 수 있어요. 시장 타이밍을 놓치는 것도 손실입니다.”둘의 시선이 동시에 화면 속 나를 향했다.“한 책임자 의견은요?”나는 잠시 데이터를 확인했다.예전 같았으면 어느 쪽이 대표인지부터 의식했을지도 모른다.지금은 숫자부터 봤다.“둘 다 그대로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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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대표가 바뀐 회사

프라하에 온 지 열흘째.아침부터 분위기가 이상했다.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마르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한 책임자.”“왜요?”“독일 쪽에서 긴급 연락이 왔습니다.”나는 가방도 내려놓기 전에 노트북 화면부터 봤다.공동 브랜드의 독일 유통사.우리가 첫 계약부터 가장 오래 협의했던 회사였다.메일 제목은 짧았다.**[경영진 변경에 따른 계약 재검토 요청.]**“경영진 변경?”“대표가 바뀌었답니다.”마르틴이 다음 페이지를 열었다.기존 대표가 건강 문제로 갑자기 사임했고, 오늘부로 새로운 대표가 취임했다.문제는 그다음이었다.신임 대표가 기존 해외 브랜드 계약을 전부 다시 검토하겠다고 통보한 것이다.우리 계약도 포함돼 있었다.나는 한숨을 내쉬었다.“첫날부터요?”“그런 것 같습니다.”“계약 중단 통보는 아니죠?”“아직은 아닙니다.”그나마 다행이었다.나는 의자에 앉았다.“그럼 먼저 확인해야겠네요.”“뭘요?”“대표가 바뀌었다고 이미 체결된 계약까지 흔들 수 있는지.”*법무팀과 연결하는 데 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결론은 명확했다.현재 계약에는 경영진 교체만으로 일방 해지가 가능한 조항이 없었다.다만 다음 분기 추가 물량은 별도 협의가 필요했다.즉,기존 주문은 유지될 가능성이 높지만 앞으로가 문제였다.마르틴이 물었다.“본사에 먼저 보고할까요?”“네.”나는 잠시 생각하다 덧붙였다.“그런데 해결책까지 같이 보내죠.”도현이나 윤세라에게 상황만 던지고 답을 기다리고 싶지는 않았다.자료를 정리했다.기존 계약의 법적 효력.현재 생산 일정.향후 추가 발주 규모.그리고 신임 대표 취임 이후 예상되는 재협상 항목.마지막에는 내 의견을 넣었다.**[기존 계약 이행은 유지하되, 추가 물량은 신임 대표와 직접 재협상하는 것이 타당함.]**보고를 올린 지 삼십 분 만에 화상회의가 잡혔다.*화면에는 도현과 윤세라가 함께 들어왔다.도현이 먼저 물었다.“현재 생산분은?”“문제없어요. 계약상 그대로 진행 가능합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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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열네 번째 선택

돌아온 다음 날.나는 알람 없이 눈을 떴다.한동안 천장만 보다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도현이 있었다.프라하에서 석 달 동안 가장 많이 상상했던 장면인데, 막상 다시 보니 이상하게 낯설었다.아니.낯선 게 아니라 반가운 게 너무 익숙해서 이상한 거였다.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잡았다.은색 팔찌가 손끝에 닿았다.붙잡아 달라고 말할 수 있도록.도현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언제 일어났습니까?”“방금.”“왜 보고 있었어요?”“그냥.”“석 달 만에 봐서?”나는 웃었다.“어제도 봤거든요.”도현이 내 손을 잡아당겼다.“그런데도?”“네.”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오늘도 보고 싶어서.”그의 팔이 허리를 감쌌다.“휴가 내길 잘했군요.”“벌써 그렇게 생각해요?”“아침부터.”나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밖에 나갈 일정도 없었다.회사도 없고.회의도 없고.비행기도 없었다.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였다.늦은 아침을 먹고 나서 우리는 거실 바닥에 캐리어를 펼쳤다.“오늘 안에 정리해야겠어요.”내가 말하자 도현이 옷을 하나 집었다.“내가 할게요.”“같이 해요.”“당신 어제 비행기 오래 탔잖습니까.”“도현 씨.”“네.”“제 짐이에요.”그가 옷을 든 채 멈췄다.“같이.”“…알겠습니다.”나는 웃었다.“이제 잘 알아듣네요.”“오래 배웠으니까.”프라하에서 사 온 옷과 서류, 작은 기념품들이 하나씩 나왔다.그러다 캐리어 안쪽에서 작은 상자가 떨어졌다.도현이 먼저 주웠다.“이건?”“아.”나는 상자를 받아 들었다.“도현 씨 거예요.”“내 거?”“네.”상자를 열자 심플한 검은색 펜이 들어 있었다.특별히 비싼 것도 아니었다.프라하의 작은 문구점에서 산 것이었다.도현이 펜을 들어 살펴봤다.“왜 펜입니까?”“회의할 때 맨날 비슷한 것만 쓰잖아요.”“그걸 봤습니까?”“같이 일했는데 그것도 모르겠어요?”그가 펜을 손가락 사이에서 천천히 돌렸다.“마음에 듭니다.”“진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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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돌아온 집

프라하에서의 석 달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다.처음 한 달은 정신이 없었다.생산 라인.독일 유통사 재협상.오스트리아 신규 계약.마르틴의 업무 이관.두 번째 달부터는 내가 없어도 돌아가는 일이 조금씩 늘었다.마지막 달에는 일부러 한 걸음 물러섰다.내가 모든 메일에 답하지 않았고,모든 회의에 들어가지도 않았다.내가 한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돌아가야 하는 조직이었으니까.그리고 마지막 출근 날.마르틴이 내게 최종 보고서를 건넸다.“이제 가는군요.”“왜 그렇게 슬픈 얼굴이에요?”“한 책임자가 없으면 좀 불안합니다.”“그 말 취소해요.”“왜요?”“제가 석 달 동안 잘못 가르친 것 같잖아요.”마르틴이 웃었다.“농담입니다.”그가 손을 내밀었다.“다음에는 출장으로 오세요.”나는 그 손을 잡았다.“그러려고요.”이제 이곳은 내가 반드시 상주해야 돌아가는 곳이 아니었다.그게 이번 파견에서 얻은 가장 큰 결과였다.*한국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 도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출발해요.]답장은 바로 왔다.[도착 시간 다시 확인했습니다.][공항 오지 마요.]한참 답이 없었다.그러다.[이유를 물어봐도 됩니까?]나는 웃으며 답했다.[집에서 기다려요.][왜요?][제가 돌아가 보고 싶어요.]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걸렸다.[알겠습니다.]아마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그래도 이번만큼은 그러고 싶었다.누군가가 데리러 와서 함께 들어가는 게 아니라,내가 직접 돌아가고 싶었다.우리가 같이 살기로 했던 집으로.*한국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이었다.짐을 찾고,택시를 타고,익숙한 동네로 들어섰다.프라하에 있을 때 수없이 화면으로 봤던 길이었다.도현과 영상통화를 할 때마다 뒤로 보이던 거실.내가 비워 둔 작업실.분홍색 오리 머그잔.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이 이상하게 떨렸다.삐빅.문이 열렸다.“왔어요.”말이 먼저 나왔다.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정말 있었다.셔츠 소매를 걷은 채,그대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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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반지 뒤의 명령

작업실 가구가 들어온 건 사흘 뒤였다.책장.작은 소파.그리고 내가 끝까지 고집해서 산 푹신한 의자.배송 기사들이 돌아가고 나자 나는 방 한가운데 서서 천천히 둘러봤다.“좋다.”문밖에 서 있던 도현이 물었다.“의자는 정말 괜찮습니까?”나는 바로 돌아봤다.“아직도 의자예요?”“오래 앉을 거니까.”“도현 씨.”“네.”“제 방이에요.”그제야 그가 웃었다.“알겠습니다.”나는 의자에 앉아 한 바퀴 돌았다.“완벽해요.”“그러면 다행이고.”도현은 여전히 문턱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나는 손을 내밀었다.“오늘은 들어와도 돼요.”“허락받았습니다.”“매번 그렇게 확인할 거예요?”“당분간은.”도현이 안으로 들어와 소파에 앉았다.이제야 정말 내 공간 같았다.프라하에서 돌아온 뒤 처음으로,혼자 있을 수 있는 방이 완성됐다.그런데 이상하게 첫날부터 혼자 있고 싶지는 않았다.*주말 오후.우리는 별다른 목적 없이 밖으로 나갔다.도현이 운전했고,나는 조수석에서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어디 가요?”“당신이 걷고 싶다면서요.”“그래서?”“근처 쇼핑몰.”“산책을 왜 쇼핑몰에서 해요?”“춥잖습니까.”논리는 맞았다.결국 말없이 따라갔다.한참 걷다가 액세서리 매장 앞에서 내가 먼저 멈췄다.도현도 두 걸음 지나쳤다가 돌아왔다.“왜요?”“그냥.”진열대 한쪽에 심플한 반지들이 놓여 있었다.나는 별생각 없이 구경했다.얇은 은색 링.장식도 거의 없는 디자인.그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이거 예쁘다.”도현이 가격표보다 반지를 먼저 봤다.“해 볼래요?”“구경만 하는 건데.”“해 보는 건 괜찮잖습니까.”직원이 사이즈를 가져왔다.왼손 약지에 끼워 보는 순간,나도 모르게 멈칫했다.너무 자연스럽게 맞았다.도현의 시선도 손가락에 머물렀다.“왜 그렇게 봐요?”“잘 어울려서.”“말투가 좀 위험한데.”“왜?”나는 약지의 반지를 한번 돌렸다.“여기에 끼우니까.”그제야 도현이 내 말뜻을 알아들은 듯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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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기다림의 끝

반지를 맞춘 뒤 일주일이 지났다.나는 다시 회사 생활에 완전히 적응하고 있었다.프라하와의 시차를 확인하는 습관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이제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숙소 천장이 아니라 도현이었다.그리고 그날도 마찬가지였다.“안 일어나요?”내가 묻자 도현이 눈을 뜨지 않은 채 대답했다.“일어났습니다.”“눈 감았는데?”“듣고 있잖아요.”나는 이불을 걷었다.“전 먼저 씻어요.”그제야 도현이 내 손목을 잡았다.오른손 약지의 반지가 서로 부딪혔다.작게.딱.나는 그 소리에 웃었다.“왜요?”“확인했습니다.”“뭘?”도현이 눈을 떴다.“아직 있네요.”“반지가 하루 만에 없어질까 봐요?”“그건 아니고.”그의 엄지가 내 손가락의 반지를 한번 쓸었다.“그냥 보고 싶었습니다.”나는 손을 빼지 않았다.“맨날 보면서.”“그래도.”도현은 그런 말을 이제 꽤 자연스럽게 했다.예전 같으면 원하는 걸 숨겼을 사람이었다.지금은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했고,잡고 싶으면 잡아도 되냐고 물었다.그 변화가 아직도 가끔 신기했다.*회사에서는 프라하 파견 최종 평가가 예정돼 있었다.회의실에 들어가자 윤세라가 먼저 와 있었다.“오랜만이네요.”“며칠 전에 봤잖아요.”“파견 평가 자리에서는 처음이니까.”도현도 곧 들어왔다.회사에서는 평소대로였다.차도현 대표.윤세라 후보.한서윤 책임자.화면에는 석 달 동안의 실적이 정리돼 있었다.프라하 생산라인 평균 불량률 1.2퍼센트.독일 재계약 유지.오스트리아 신규 계약 체결.현지 이중 확인 절차 정착.본사 개입 비율 감소.마르틴 단독 업무 처리 비율 증가.윤세라가 말했다.“결론부터 말하면 파견 성과는 좋습니다.”“다행이네요.”“예상보다요.”나는 웃었다.“그건 칭찬 맞죠?”“맞아요.”다음 장이 넘어갔다.**[유럽 사업 장기 운영 인력 검토.]**순간 조금 긴장했다.2년.프라하에 있을 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윤세라가 설명했다.“전에 말했던 2년 육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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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세 가지 상자

토요일 아침.나는 거실 바닥에 앉아 택배 상자를 뜯고 있었다.프라하에서 돌아온 뒤 주문해 둔 생활용품들이 한꺼번에 도착한 날이었다.도현은 주방에서 커피를 내리다가 상자들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왜 이렇게 많이 샀습니까?”“필요한 거요.”“세 상자인데.”“그러니까요.”“무슨 뜻입니까?”나는 커터칼을 흔들었다.“하나는 제 거.”두 번째 상자를 가리켰다.“하나는 도현 씨 거.”그리고 마지막.가장 작은 상자를 톡 두드렸다.“이건 우리 거.”도현의 시선이 그 상자에 멈췄다.“우리 거?”“네.”“뭔데요?”“기다려요.”그는 분명 궁금해하면서도 더 묻지 않았다.대신 내 옆에 앉았다.“그럼 첫 번째부터 봅시다.”*내 상자 안에는 대부분 작업실에서 쓸 물건이 들어 있었다.담요.책꽂이.작은 스탠드.그리고 분홍색 오리 모양의 쿠션.도현이 쿠션을 들어 올렸다.“이건 꼭 필요했습니까?”“네.”“어디에?”“소파에.”“기능은?”나는 그를 빤히 바라봤다.“귀여움.”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왜요?”“기능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생각 중입니다.”나는 쿠션을 빼앗았다.“제 방이니까 신경 꺼요.”“그건 인정합니다.”도현은 이제 내 작업실에 관해서는 정말 간섭하지 않았다.들어올 때도 먼저 묻고,내 물건을 옮기지도 않았다.프라하에 가기 전보다 이 집은 훨씬 더 함께 사는 집이 됐는데,이상하게 각자의 공간은 오히려 더 분명해졌다.그게 좋았다.*두 번째는 도현의 상자였다.그가 직접 주문한 게 아니라 내가 산 물건이었다.“왜 내 상자도 당신이 샀습니까?”“선물이니까.”“또?”“싫어요?”“아니요.”상자를 열자 짙은 회색 앞치마가 나왔다.도현이 그대로 굳었다.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표정 왜 그래요?”“이게 왜 내 겁니까?”“요리 연습해야죠.”“나는 이제 오므라이스도 합니다.”“볶음밥은 좀 짰고.”“그건 한 번입니다.”“파스타도 처음엔 엄청 짰고.”도현이 앞치마를 펼쳐 봤다.가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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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비밀 평가

세 개의 상자를 만든 뒤 며칠이 지났다.처음에는 장난처럼 시작한 일이었는데, 생각보다 자주 눈에 들어왔다.출근할 때도.퇴근해서 가방을 내려놓을 때도.거실과 작업실 사이 선반에 놓인 세 개의 작은 상자.**말할 것.****같이 할 것.****혼자 할 것.**그날 아침에도 나는 지나가다 상자 앞에서 멈췄다.‘말할 것’ 안에 종이가 하나 더 들어 있었다.어제는 없던 것이었다.도현이 넣은 모양이었다.궁금했다.아주 많이.하지만 꺼내지는 않았다.우리가 정한 건 ‘하고 싶을 때 꺼내서 말하기’였지, 상대가 넣자마자 확인하는 게 아니었다.나는 그대로 출근했다.*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윤세라에게 연락이 왔다.[오전 열한 시, 17층 회의실.][무슨 회의예요?]답은 짧았다.[평가.]나는 화면을 보다가 미간을 좁혔다.[무슨 평가요?]이번에는 답장이 없었다.열한 시가 되어 회의실에 들어갔을 때도 윤세라는 이미 노트북을 펼쳐 놓고 있었다.도현은 없었다.“대표님은요?”“오늘은 안 옵니다.”“왜요?”윤세라가 내 앞에 서류 한 장을 밀었다.**[유럽 사업 실무 책임자 비공개 평가.]**나는 제목을 읽고 다시 그녀를 봤다.“비공개요?”“네.”“누구한테?”“차 대표한테.”“네?”내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윤세라는 별일 아니라는 듯 설명했다.“정확히는 차 대표가 평가 대상에서 빠집니다.”“그게 무슨 뜻이에요?”“한 책임자의 유럽 사업 평가에 차 대표 의견을 받지 않는다는 뜻.”나는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왜요?”“관계 때문입니다.”돌려 말하지 않았다.“회사에서는 이미 이해충돌 방지 조치가 있잖아요.”“그래서 이것도 하는 겁니다.”윤세라가 화면을 돌렸다.평가 항목은 단순했다.프라하 파견 성과.본사 복귀 후 프로젝트 운영.현지 독립성 확보.계약 유지율.의사결정 과정.팀 운영.그리고 향후 유럽 사업 총괄 적합성.“차 대표가 평가하면 안 됩니까?”“법적으로 무조건 안 된다는 얘기는 아니에요.”윤세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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