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Chapter 71 - Chapter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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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프라하의 책임자

프라하 신규 생산 라인이 승인된 뒤부터 내 일정은 눈에 띄게 빡빡해졌다.출근하자마자 생산팀에서 연락이 왔다.“한 대리님, 프라하 쪽에서 최종 운영 책임자를 지정해 달라고 합니다.”“현지 책임자 말인가요?”“아니요. 본사 쪽이요.”나는 자료를 받아 들었다.신규 라인이 안정될 때까지 본사에서 실무 책임자를 한 명 지정해야 했다.기간은 석 달.문제는 마지막 페이지였다.**[본사 책임자 후보: 한서윤.]**나는 곧바로 윤세라를 찾아갔다.“이거 상무님이 올리신 겁니까?”“네.”“왜 저예요?”“프라하를 선택한 사람이니까요.”윤세라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선택했으면 결과도 직접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제가 맡겠다고 한 적은 없는데요.”“그래서 아직 후보입니다.”그녀가 서류를 내 쪽으로 밀었다.“거절해도 됩니다.”나는 다시 내용을 읽었다.현지 상주는 아니었다.본사에서 품질과 납기 데이터를 관리하고, 필요할 경우 프라하 출장을 가는 방식이었다.업무량은 늘어난다.대신 제대로 해낸다면 내 이름으로 남는 프로젝트가 된다.“생각해 보겠습니다.”“오늘까지 답 주세요.”“네.”*점심 무렵 프로젝트 회의가 열렸다.도현도 참석했다.윤세라가 프라하 운영 계획을 설명한 뒤 말했다.“본사 책임자는 한서윤 대리를 추천했습니다.”도현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 대리 의견은요?”윤세라가 물었다.나는 잠시 자료를 내려다봤다.“맡겠습니다.”도현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다만 조건이 있습니다.”“말하세요.”“초기 석 달 동안 품질팀 담당자 한 명을 전담 배정해 주세요. 제가 계약과 생산 일정을 동시에 관리하면서 품질 검수까지 혼자 맡는 건 비효율적입니다.”윤세라가 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인력 추가가 꼭 필요합니까?”“필요합니다.”나는 예상 업무량을 화면에 띄웠다.“기존 업무까지 포함하면 현재 인력으로는 검수 지연 가능성이 높습니다.”도현이 자료를 확인했다.“품질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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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함께 사는 첫날

프라하 생산 라인이 최종 승인된 날.나는 퇴근하자마자 새집으로 향했다.현관문을 열자 아직 낯선 냄새가 났다.도현의 집도 아니고, 내 집도 아닌 곳.이제부터 우리가 같이 돌아올 집이었다.거실에는 아직 뜯지 않은 상자가 가득했다.도현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채 주방에 서 있었다.“오늘 늦는다고 하지 않았어요?”“회의가 일찍 끝났습니다.”“그럼 상자라도 좀 풀지 그랬어요.”도현이 거실을 돌아봤다.“당신 물건을 허락 없이 정리해도 되는지 몰랐습니다.”나는 웃음이 터졌다.“같이 살기로 했는데 그것도 물어봐요?”“같이 사는 것과 물건을 마음대로 만지는 건 다르니까.”도현다운 대답이었다.나는 가장 가까운 상자를 열었다.“그럼 같이 해요.”*주방부터 정리하기로 했다.접시와 컵을 하나씩 꺼내 찬장에 넣었다.도현이 가져온 식기는 예상대로 단순했다.흰색.검은색.회색.그리고 내 상자에서 분홍색 오리가 그려진 머그잔이 나왔다.도현의 손이 멈췄다.“왜요?”“아무것도 아닙니다.”“표정은 아닌데.”그가 머그잔을 한 바퀴 돌려봤다.“이 집과 조금 안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나는 곧바로 머그잔을 빼앗았다.그리고 찬장 가장 앞에 놓았다.“그럼 지금부터 어울리는 집으로 만들면 되죠.”도현이 오리 머그잔을 바라봤다.“제 검은 컵보다 앞입니까?”“네.”“왜?”“귀여우니까.”“납득하기 어렵군요.”“우리 집에서는 제가 납득하면 돼요.”도현이 나를 바라봤다.“우리 집?”나는 멈칫했다.또 자연스럽게 그 말이 나왔다.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네. 우리 집.”도현의 입가가 천천히 올라갔다.“그럼 앞에 두십시오.”*저녁은 배달 음식으로 해결했다.아직 식탁 위에도 상자가 올라가 있어서 우리는 거실 바닥에 마주 앉았다.내가 먼저 물었다.“같이 살면 뭐부터 정해야 해요?”도현의 표정이 순간 진지해졌다.“규칙을 만들자는 겁니까?”“또 계약서 쓸 생각 하지 마요.”“안 합니다.”“진짜?”“종이는 사용하지 않겠습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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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멈춘 생산 라인

프라하 생산 라인의 첫 테스트 결과가 도착한 오전.사무실은 평소보다 조용했다.모니터 속 숫자를 다시 확인했다.**초도 샘플 불량률 4.8%.**계약 기준은 2% 이하.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품질팀 회의실 잡아 주세요.”잠시 뒤 담당자들이 하나둘 모였다.화면에는 프라하에서 전송된 검사 결과와 제품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포장 문제가 아니었다.제품 본체 연결 부위가 일정하게 어긋나 있었다.“불량 유형은요?”품질팀장이 자료를 넘겼다.“결합 오차, 표면 미세 균열, 조립 압력 불균형입니다.”“같은 시간대 생산품입니까?”“확인 중입니다.”나는 잠시 화면을 바라봤다.“출고 전량 보류해 주세요.”회의실 안이 조용해졌다.“전량입니까?”“네.”“아직 원인이 확정되지 않았습니다.”“그래서 멈추는 겁니다.”나는 검사표를 가리켰다.“정상과 불량을 완전히 구분할 수 없는 상태에서 출고할 수는 없어요.”품질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곧바로 프라하에도 통보가 들어갔다.**[본사 요청. 출고 중단 및 생산 일시 보류.]**몇 분 뒤 현지 공장장의 답장이 도착했다.[생산 전체를 멈추라는 뜻입니까?]나는 바로 답했다.[네. 원인 확인 전까지 중단해 주세요.]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프라하를 선택한 건 나였다.그러니 문제가 생겼을 때 멈출 책임도 내게 있었다.*오후 두 시.프라하와 본사 화상회의가 연결됐다.현지 공장장과 생산 책임자, 품질 엔지니어가 화면에 나타났다.“한서윤 책임자.”공장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생산을 멈추면 납기 일정이 최소 이틀은 늦어집니다.”“알고 있습니다.”“현재 정상 제품도 생산되고 있습니다.”“그 정상 제품을 지금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잠시 침묵이 흘렀다.현지 품질 엔지니어가 대답했다.“아직은 어렵습니다.”“그럼 계속 생산할 수 없습니다.”나는 생산 기록을 화면에 띄웠다.“우선 시간대별 불량률을 다시 나눠 주세요.”회의가 끝난 뒤 품질팀과 생산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확인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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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질투를 인정하는 법

프라하 생산 라인은 이틀째 멈춰 있었다.원인은 확인됐다.외부 유지보수 업체의 임의 압력 조정.그리고 조정 이후 검증 절차 누락.이제 남은 건 재가동 조건을 정하는 일이었다.나는 품질팀과 다시 회의실에 앉았다.“바로 재가동하면 안 됩니다.”품질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압력값 원복 후 시험 생산부터 해야 합니다.”“수량은요?”“최소 오백 개.”나는 잠시 생각했다.“천 개로 하죠.”“천 개요?”“한 번 멈춘 라인이니까 더 봐야 해요.”프라하 현지에서도 반대는 없었다.대신 한 가지 요청이 들어왔다.[본사 책임자가 첫 시험 생산을 직접 확인해 줄 수 있습니까?]결국 짧은 출장이 잡혔다.삼 일.나는 일정을 확인한 뒤 가장 먼저 도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프라하 가요.]답장은 금방 왔다.[언제요?][내일 밤.]잠시 뒤.[며칠입니까?][삼 일.]이번에는 답장이 조금 늦었다.[알겠습니다.]나는 화면을 바라봤다.딱 봐도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의 답장이었다.*오후에는 윤세라와 출장 일정을 조정했다.“현지 품질팀뿐 아니라 설비 업체도 직접 만나세요.”“네.”“이번에는 재가동 승인까지 한 대리가 내려도 됩니다.”나는 조금 놀랐다.“제가요?”“책임자잖아요.”윤세라가 담담하게 덧붙였다.“대신 조건에 안 맞으면 일정이 얼마나 밀리든 다시 멈추세요.”“알겠습니다.”“그리고.”그녀가 내 표정을 살폈다.“차 대표 반응은 어때요?”“그걸 왜 물어보세요?”“출장 간다고 하면 표정 관리 못 할 것 같아서.”나는 피식 웃었다.“생각보다 잘해요.”“예전에는 출장 하루만 잡혀도 일정표부터 뒤졌는데.”내 손이 멈췄다.“예전이요?”윤세라도 순간 말을 멈췄다.아주 잠깐이었다.“같이 일할 때 말입니다.”“두 분 정말 오래 알았네요.”“오래 알았죠.”아무렇지 않은 대답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그날 이후 회의가 끝날 때까지 윤세라가 하는 말이 평소보다 조금 더 귀에 들어왔다.도현이 좋아하는 업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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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해외지사 제안

프라하 생산 라인은 재가동 조건을 모두 통과했다.천 개의 시험 생산.불량률 1.3퍼센트.압력 조정 절차도 새로 정리됐고, 외부 유지보수 업체는 본사 승인 없이는 설비값을 변경할 수 없게 됐다.마지막 점검을 마친 뒤에야 나는 생산 재개 승인서에 서명했다.“이제 돌려도 됩니다.”현지 공장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번에는 오래 멈췄네요.”“다음에는 멈출 일 없게 해야죠.”“한서윤 책임자는 원래 이렇게 단호합니까?”옆에 있던 루카가 웃으며 물었다.나는 태블릿을 닫았다.“문제 생기면요.”“차도현이 힘들겠군요.”“왜요?”“집에서도 이럴 것 같아서.”나는 피식 웃었다.“집에서는 좀 다릅니다.”“그건 다행이네요.”모든 일정을 끝낸 줄 알았을 때였다.현지 법인장이 나를 붙잡았다.“한 책임자, 잠깐 시간 괜찮습니까?”“네.”회의실에는 윤세라도 화상으로 연결돼 있었다.조금 의외였다.“무슨 일인가요?”윤세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프라하 라인 안정화 이후 계획 때문입니다.”“이후 계획이요?”“유럽 사업 규모를 조금 더 키우려고 합니다.”현지 법인장이 자료를 띄웠다.신규 생산 라인.공동 브랜드 확장.독일과 체코, 오스트리아 추가 유통.예상보다 규모가 컸다.“그래서 유럽 쪽에 본사와 현지를 연결할 실무 책임자가 필요합니다.”나는 바로 이해했다.“사람을 새로 뽑는다는 뜻인가요?”윤세라가 고개를 저었다.“내부 후보를 먼저 보고 있습니다.”잠시 정적이 흘렀다.그리고 화면에 이름 하나가 나타났다.**한서윤.**나는 말없이 화면을 바라봤다.“저요?”“네.”“무슨 자리인데요?”“해외지사 실무 총괄.”윤세라가 담담하게 설명했다.“정확히는 유럽 공동 브랜드와 신규 생산 라인을 맡는 파견 책임자입니다.”“기간은요?”“일단 1년.”나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1년.출장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프라하에 상주해야 합니까?”“기본 근무지는 프라하입니다. 독일 출장이 자주 있을 거고요.”현지 법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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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떠나기 전의 일주일

해외지사 제안의 답변 기한은 일주일이었다.그 사실을 알고 나니 평소와 같은 하루도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아침에 눈을 뜨면 도현이 옆에 있었고,주방 찬장을 열면 내 오리 머그잔이 가장 앞에 놓여 있었다.출근할 때는 현관에서 같이 신발을 신었고,퇴근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별것 아닌 일들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마치 떠나게 될 가능성을 알고 있어서 더 선명해진 것처럼.*첫째 날.도현은 정말 약속대로 말했다.아침을 먹다가 갑자기.“안 갔으면 좋겠습니다.”나는 숟가락을 멈췄다.“벌써요?”“말해도 된다고 했잖습니까.”“매일 하겠다는 것도 진짜였어요?”“네.”나는 웃으며 밥을 먹었다.“알겠어요.”“그리고.”“또 있어요?”“가더라도 당신 결정이라면 존중하겠습니다.”“그 말까지 세트예요?”“그래야 오해가 없으니까.”“한 문장으로 줄여 봐요.”도현이 잠시 생각했다.“가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선택은 당신이 하십시오.”“너무 대표님 같은데.”“어렵군요.”그날 아침부터 웃음이 났다.*둘째 날에는 윤세라와 면담이 있었다.“생각해 봤습니까?”“네.”“결론은요?”“아직요.”윤세라는 재촉하지 않았다.대신 파견 조건을 다시 보여 줬다.1년.유럽 공동 브랜드와 생산 라인 총괄.현지 지사와 본사 사이의 실무 조정.성과에 따라 귀국 후 직급 조정 가능.좋은 조건이었다.“이 자리는 한 대리가 프라하를 선택해서 주는 보상이 아닙니다.”윤세라가 말했다.“지금까지 한 일을 보고 제안하는 겁니다.”나는 자료를 내려다봤다.“제가 거절해도 프로젝트에서 빠지나요?”“아니요.”고개를 들었다.“그럼 한국에 남아도 계속 맡을 수 있어요?”“본사 책임자로는요.”그 말에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프라하에 가지 않으면 기회를 전부 잃는 건 아니었다.다만 해외지사를 직접 맡는 경험을 포기하는 것이었다.윤세라가 물었다.“차 대표 때문에 고민합니까?”나는 숨기지 않았다.“그 이유도 있어요.”“그게 나쁜 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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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혼자 사는 방

내가 선택한 건 완전한 거절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었다.윤세라에게 보낸 답변은 간단했다.**[해외지사 파견을 수락하되, 1년 상주가 아닌 3개월 단위 순환 파견을 제안드립니다.]**프라하 현지 안정화가 필요한 초기 세 달은 내가 직접 머문다.이후에는 한국 본사와 프라하를 오가며 운영 상황을 점검한다.현지에 별도 실무 부책임자를 두고, 내가 모든 업무를 혼자 쥐지 않는 구조.처음부터 생각했던 답은 아니었다.하지만 일주일 동안 고민하고 나니 알게 됐다.나는 프라하에서도 일하고 싶었고,이 집에서도 살고 싶었다.둘 중 하나를 완전히 버리고 싶지 않았다.*도현과 통화한 건 메일을 보낸 직후였다.“어떻게 했습니까?”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조건부로 수락했어요.”잠깐 정적이 흘렀다.“조건부?”“1년 상주는 안 하고요. 처음 세 달만 프라하에 있으려고요.”“세 달.”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그 뒤에는 한국에서 본사 책임자로 일하면서 필요할 때 출장 가는 방식으로 제안했어요.”도현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왜 말이 없어요?”“계산 중입니다.”“뭘요?”“세 달이 며칠인지.”웃음이 터졌다.“그걸 왜 계산해요?”“길잖습니까.”“1년보다는 짧잖아요.”“그건 맞습니다.”도현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그래도 가는군요.”“네.”이번에는 나도 피하지 않았다.“가고 싶어요.”“알겠습니다.”“서운해요?”“많이.”“그래도?”“그래도 잘한 결정 같습니다.”나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왜요?”“당신답잖습니까.”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좋았다.*다음 날 윤세라에게 답이 왔다.조건은 대부분 받아들여졌다.초기 석 달 프라하 상주.이후 분기별 현지 점검.현지 부책임자 신규 지정.본사 복귀 후에도 유럽 사업 총괄 업무 유지.윤세라는 마지막으로 물었다.“확실히 이 조건으로 하겠습니까?”“네.”“차 대표하고 상의했어요?”“결정하고 나서 말했습니다.”그녀가 웃었다.“그게 더 한서윤 대리답네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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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첫 번째 실패

프라하로 떠나기 전 마지막 출근 주간.나는 오전부터 해외지사 인수인계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현지 연락망.생산 일정.품질 대응 절차.본사 보고 체계.빠진 게 없는지 세 번이나 확인했는데도 마음이 쉽게 놓이지 않았다.석 달.막상 날짜가 가까워지니 짧지 않았다.그때 메일 알림이 떴다.[프라하 2차 생산분 품질 보고.]나는 바로 파일을 열었다.불량률 1.4퍼센트.문제없었다.납기 일정도 정상.안도의 한숨을 쉬려던 순간, 마지막 첨부파일이 눈에 들어왔다.[현지 부책임자 업무 이관 결과.]프라하 상주 기간 이후 내 역할을 나눠 맡을 사람이었다.윤세라가 추천한 현지 직원.마르틴 노박.첫 번째 단독 대응 결과가 함께 첨부돼 있었다.그리고 결과는 좋지 않았다.납품처 요청 변경을 잘못 해석해 생산 수량을 수정했고, 이미 포장된 제품 일부를 다시 뜯어야 했다.손실은 크지 않았다.일정도 하루면 회복 가능했다.하지만 첫 단독 판단부터 실수가 난 셈이었다.나는 바로 화상회의를 잡았다.마르틴은 화면 너머에서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제가 요청서를 잘못 읽었습니다.”통역 없이도 영어로 충분히 대화할 수 있었다.나는 수정된 요청서를 화면에 띄웠다.“여기서 수량 변경이라고 판단한 이유가 뭔가요?”“‘adjust quantity’라는 표현 때문입니다.”“뒤 문장은요?”그가 입을 다물었다.뒤에는 명확하게 적혀 있었다.차기 생산분부터 적용.이번 생산분을 수정하라는 뜻이 아니었다.“확인하지 않았어요?”“빨리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익숙한 말이었다.빨리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확인을 생략했다.며칠 전 생산 라인을 멈추게 했던 유지보수 업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마르틴.”“네.”“이번 손실은 크지 않아요.”그가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다음에도 같은 방식으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죄송합니다.”“사과보다 필요한 게 있어요.”나는 화면에 새로운 항목을 띄웠다.[변경 요청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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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예고 없는 방문

프라하로 떠나기 사흘 전.회사에서는 인수인계가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마르틴과의 화상회의도 한 번 더 잡았다.“지난번 수정한 절차 확인했어요?”[네. 생산량, 납기, 품질 기준 변경은 현지에서 두 명이 확인한 뒤 처리하도록 했습니다.]“좋아요.”[이번에는 실수 안 하겠습니다.]나는 고개를 저었다.“실수하지 않는 게 목표는 아니에요.”마르틴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확인하지 않고 혼자 결정하지 않는 게 목표죠.”[알겠습니다.]그가 웃었다.[한 책임자는 프라하 오면 더 무서울 것 같습니다.]“가 보면 알아요.”회의를 끝내고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가까웠다.그때 민지가 내 자리로 다가왔다.“서윤아.”“응?”“손님 왔는데?”“나한테?”“응. 근데 예약도 안 했대.”나는 미간을 좁혔다.“누군데?”민지가 목소리를 낮췄다.“차 대표님 만나러 온 사람인 줄 알았는데 너 찾는다던데.”누구지.로비로 내려가자 금방 상대를 찾을 수 있었다.윤서진이었다.나는 걸음을 멈췄다.그녀 역시 나를 발견했다.“한서윤 씨.”“무슨 일이에요?”“미리 연락했어야 했는데.”윤서진이 작은 종이가방을 들어 보였다.“잠깐이면 돼요.”*우리는 회사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윤서진이 종이가방을 내 쪽으로 밀었다.“이거 주려고 왔어요.”안에는 작은 상자가 들어 있었다.열어 보니 휴대용 멀티 어댑터와 보조 배터리였다.나는 눈을 깜빡였다.“이걸 왜 저한테?”“프라하 간다고 들었어요.”순간 표정이 굳었다.“누구한테요?”윤서진이 바로 알아챘다.“차도현한테 들은 거 아니에요.”“그럼요?”“유럽 사업 쪽에서 일하는 예전 지인이 있어요. 한서윤 책임자가 석 달 파견 간다는 얘기가 나왔다고 해서.”“아.”나는 천천히 긴장을 풀었다.윤서진은 씁쓸하게 웃었다.“이제 누가 뭘 안다고 하면 먼저 경계하게 되죠?”“조금은요.”“그럴 만해요.”그녀는 변명하지 않았다.“그래서 오늘도 회사까지 찾아오면 싫어할 수 있다는 건 알았어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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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돌아가야 하는 사람

출국 전날.나는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알람은 아직 울리지 않았다.옆을 보니 도현은 자고 있었다.평소 같으면 먼저 일어나 있을 사람이었다.나는 잠시 그대로 누워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내일이면 이 침대에서 혼자 자는 사람은 도현이 된다.그리고 나는 프라하의 작은 원룸에서 눈을 뜨게 된다.이상했다.떠나는 건 나인데,남는 사람의 빈자리까지 먼저 생각하게 됐다.*아침 식탁에는 말이 많지 않았다.도현은 커피를 내렸고, 나는 토스트를 먹었다.“오늘 회사 늦게 가도 되지 않아요?”내가 묻자 그가 시계를 확인했다.“가능합니다.”“대표가 그래도 돼요?”“출근 시간을 조금 늦추는 게 회사에 치명적인 문제는 아닙니다.”“드디어 알았네요.”도현이 내 접시에 계란을 하나 더 올렸다.“많이 먹어요.”“왜 갑자기 반말이에요?”그의 손이 잠시 멈췄다.“이상합니까?”“아니요.”나는 웃었다.“좋아요.”도현은 다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커피를 마셨다.하지만 귀가 조금 붉어져 있었다.*회사에서는 마지막 인수인계가 이어졌다.프라하 상주 기간 동안 한국 본사에서 내 업무 일부를 맡을 담당자도 정해졌다.마르틴에게서는 메시지가 왔다.[내일 도착하면 공항으로 마중 나가겠습니다.]나는 바로 답했다.[괜찮아요. 숙소까지 직접 갈게요.]잠시 뒤 다시 메시지가 왔다.[첫날인데 혼자 이동해도 괜찮습니까?][네. 현지에서 같이 일하는 건 다음 날부터 시작하죠.]이번에는 답장이 조금 늦었다.[알겠습니다. 그럼 사무실에서 기다리겠습니다.]그 문장을 보고 나니 정말 가는구나 싶었다.말로만 준비하던 일이 현실이 됐다.*오후에는 윤세라가 나를 불렀다.“준비는 다 끝났습니까?”“거의요.”“긴장돼요?”“많이요.”“좋은데요.”나는 눈썹을 올렸다.“긴장하는 게요?”“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보다.”윤세라는 자료를 정리하며 말했다.“프라하에 가서는 한 가지만 기억하세요.”“뭔데요?”“한서윤 대리는 본사에서 파견된 사람이지만 현지 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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