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Chapter 121 - Chapter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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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화. 믿었던 사람

서울 본사와 프라하 법인의 공동 프로젝트 첫 회의 날.도현은 평소보다 일찍 회의실에 도착해 있었다.그의 옆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짙은 남색 정장에 느슨하게 맨 넥타이, 웃을 때 한쪽 입꼬리가 먼저 올라가는 사람이었다.“소개하겠습니다.”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프로젝트 외부 자문을 맡은 이재하 대표입니다.”남자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처음 뵙겠습니다, 한서윤 대표님.”“잘 부탁드립니다.”악수를 마치려는데 재하가 내 손가락의 반지를 발견했다.“이게 그 유명한 반지군요.”나는 손을 거두며 도현을 바라봤다.“유명해요?”“도현이가 자랑했습니다.”도현의 표정이 굳었다.“그런 말을 한 적 없습니다.”“사진을 세 번이나 보여 준 건 자랑 아니냐?”재하는 도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그가 도현을 이렇게 편하게 대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두 분 오래된 친구예요?”“대학교 때부터 봤습니다.”도현이 짧게 대답했다.재하가 웃으며 덧붙였다.“차도현이 사람을 친구라고 인정하기까지 십 년쯤 걸리죠. 저는 겨우 통과했습니다.”회의가 시작되자 재하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그는 유럽 시장 자료를 정확히 분석했고, 프라하 법인의 약점을 숨기지 않았다.“제품 반응은 좋지만 브랜드 인지도가 법인장 개인에게 지나치게 집중돼 있습니다.”그가 화면에 내 인터뷰 자료를 띄웠다.“한서윤 대표가 빠지면 매출이 흔들릴 가능성이 큽니다.”“그래서 직원 중심 캠페인을 진행 중입니다.”내가 설명하자 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좋은 선택입니다. 다만 대표님이 직접 나오는 콘텐츠를 완전히 없앨 필요는 없습니다.”“이전 유통사에서 저를 홍보에 이용하려 했어요.”“강현우 이야기군요.”도현의 손이 자료 위에서 멈췄다.“그 이름을 왜 압니까?”재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업계에서 소문이 났으니까. 한 대표에게 접근했다가 계약 담당에서 빠졌다던데.”회의실 공기가 미세하게 굳었다.“업무와 관련 없는 이야기입니다.”도현의 목소리가 차가워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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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먼저 튀어나온 말

이재하에게서 다음 회의 자료가 도착한 것은 밤 열한 시가 넘어서였다.[한 대표님, 소비자 조사 결과 중 수정할 부분이 있습니다. 지금 통화 가능하십니까?]나는 노트북을 켜며 도현을 바라봤다.그는 소파에서 서류를 읽고 있었다.“재하 씨한테 전화 왔어요. 잠깐 업무 통화할게요.”도현의 시선이 휴대전화 화면에 멈췄다.“이 시간에 꼭 해야 합니까?”“내일 아침 회의 자료래요.”“메일로 보내면 됩니다.”“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있나 보죠.”나는 대수롭지 않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재하는 자료 오류를 설명했고, 우리는 화면을 공유하며 수정 지점을 확인했다. 십 분 정도면 끝날 줄 알았지만 새로운 문제가 발견돼 통화가 길어졌다.“한 대표님, 세 번째 페이지 보이십니까?”“잠깐만요. 파일이 안 열려요.”“제가 원격 링크 다시 보내겠습니다.”재하가 웃으며 말했다.“도현이 옆에 있으면 컴퓨터부터 뺏어 가겠네요. 저 친구 이런 거 못 기다리는데.”나도 별생각 없이 웃었다.“맞아요. 벌써 표정 안 좋아요.”그 순간 도현이 서류를 덮었다.탁.거실에 짧고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통화 끝내십시오.”나는 놀라 그를 바라봤다.“왜요?”“내일 회사에서 하라고 하십시오.”명령조였다.재하도 들었는지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도현아, 업무 중이야.”“알고 있으니까 끊어.”도현의 목소리가 더 차가워졌다.“지금 내 집에서,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밤늦게 연락하지 마.”거실이 얼어붙었다.나는 즉시 통화를 종료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늦은 시간입니다.”“업무 전화였어요.”“업무라면서 왜 당신을 웃게 만듭니까?”말이 튀어나온 뒤 도현도 자신이 무엇을 말했는지 깨달은 듯 굳었다.“웃는 것도 안 돼요?”“그런 뜻이 아닙니다.”“방금 그렇게 말했잖아요.”나는 노트북을 닫았다.“강현우 씨가 접근했을 때랑 재하 씨가 업무 연락한 건 완전히 달라요.”“압니다.”“아는데 왜 재하 씨한테 그렇게 말해요?”도현은 대답하지 못했다.손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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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친구의 경고

다음 날 재하는 도현을 따로 불렀다.나는 두 사람이 카페 안쪽 테이블에 마주 앉는 모습을 보고 먼저 회의실로 올라갔다.한 시간이 지나서야 도현이 돌아왔다.표정은 차분했지만 넥타이가 평소보다 느슨했다.“무슨 이야기 했어요?”“제가 선을 넘었다고 했습니다.”“재하 씨가요?”“네.”도현은 숨기지 않았다.재하는 오래전 도현이 회사를 지키겠다는 이유로 모든 사람을 통제하려 했던 시절을 알고 있었다.“그때의 너로 돌아가고 있다고 했습니다.”“도현 씨는 뭐라고 했어요?”“부정하지 못했습니다.”회의는 정상적으로 진행됐다.재하는 나와 필요한 말만 나눴고, 일부러 거리까지 유지했다.그런 모습이 오히려 더 불편했다.“재하 대표님.”회의가 끝난 뒤 내가 그를 불렀다.“저 때문에 불편하게 일하지 않으셔도 돼요.”“한 대표님 때문이 아닙니다.”재하는 도현을 바라봤다.“친구가 진정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서요.”도현의 턱이 굳었다.“내가 부탁한 적은 없어.”“네가 부탁하지 않아도 분위기는 알 수 있지.”“재하 씨.”내가 끼어들었다.“업무에서는 전처럼 해 주세요. 제가 필요한 선은 직접 말할게요.”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그가 떠난 뒤 도현은 한동안 침묵했다.“기분 나빠요?”“네.”“제가 재하 씨한테 직접 말해서요?”“당신이 저보다 재하에게 더 편하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또 감정이 먼저 튀어나왔다.도현도 곧바로 눈을 감았다.“방금 말은 취소하겠습니다.”“말은 취소해도 감정은 남아 있잖아요.”“네.”그는 솔직하게 인정했다.“재하가 당신을 이해하는 것처럼 행동할 때마다 불편합니다.”“도현 씨 친구니까 저한테 잘해 주는 거예요.”“알고 있습니다.”“그런데도요?”“그런데도 싫습니다.”그날 저녁 도현은 내 귀가 시간보다 한 시간 먼저 집에 도착했다.식탁에는 저녁이 준비돼 있었고 현관 불까지 켜져 있었다.“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기다렸습니다.”“연락하면 되잖아요.”“재하와 같이 올까 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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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취소된 저녁

프로젝트 계약이 최종 단계에 들어가면서 재하와 단둘이 외부 투자자를 만나야 하는 일정이 생겼다.도현에게는 굳이 보고하지 않으려 했다.우리가 정한 규칙상 의무가 없었기 때문이다.그런데 회의 직전, 재하가 도현이 포함된 단체방에 장소를 공유했다.[한 대표님과 투자사 미팅 후 결과 보고드리겠습니다.]십 분도 지나지 않아 도현에게 전화가 왔다.“오늘 재하와 단둘이 만납니까?”“투자사 대표도 있어요.”“미팅 이후에는요?”“저녁 먹으면서 정리할 수도 있고요.”“취소하십시오.”숨도 쉬기 전에 나온 말이었다.“뭐라고요?”도현도 잠시 멈췄다.하지만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았다.“재하가 아니라 다른 담당자를 보내십시오.”“이유는요?”“제가 싫습니다.”“그게 업무를 취소할 이유예요?”“다른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저와 재하 씨가 준비한 프로젝트예요.”통화 너머로 그의 숨이 거칠어졌다.“한서윤.”회사 밖에서만 부르던 이름이었다.“그 사람과 저녁까지 먹지 마십시오.”가슴이 차갑게 내려앉았다.“지금 저한테 명령하는 거예요?”“네.”도현은 대답한 직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는 낮게 말했다.“그 명령은 안 들어요.”통화를 끊고 예정대로 미팅에 참석했다.회의는 성공적이었다.투자사는 공동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했고, 저녁 식사도 업무 이야기만으로 끝났다.하지만 마음은 무거웠다.집에 돌아오자 도현이 거실에 서 있었다.“왜 제 말을 무시했습니까?”처음부터 날이 서 있었다.“도현 씨가 제 업무를 멋대로 취소하라고 했으니까요.”“다른 담당자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제가 가야 했어요.”“재하와 저녁을 먹는 일까지요?”“또 그 이야기예요?”“제가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도현 씨가 제 상사예요?”그의 표정이 굳었다.“아닙니다.”“주인님은요? 회사 일정까지 명령할 권한 있어요?”“없습니다.”“그런데 왜 그랬어요?”도현은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당신이 그 사람과 나란히 앉아 있는 장면을 생각하자 견딜 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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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비어 있는 서랍

도현은 약속대로 재하에게 사과했다.그리고 일주일 동안 나에게 업무 일정을 묻지 않았다.처음에는 나아진 것처럼 보였다.하지만 집 안에서 그의 불안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났다.내 휴대전화가 울리면 시선이 따라왔다.퇴근이 늦으면 거실을 계속 걸었다.내가 샤워하는 동안에도 현관문 잠금 상태를 몇 번씩 확인했다.“도현 씨.”어느 날 내가 물었다.“요즘 잠 못 자죠?”“괜찮습니다.”“거짓말.”그의 눈 아래에는 옅은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었다.“약을 먹을 정도는 아닙니다.”“제가 어디 있는지 안 물어보려고 혼자 참고 있어요?”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침실 서랍을 열자 원래 가득하던 커프와 리본, 카드가 모두 사라져 있었다.“이것들 어디 갔어요?”“잠시 치웠습니다.”“왜요?”“제가 도구를 당신을 붙잡기 위한 핑계로 사용할까 봐.”검은 보관함 열쇠는 도현이 가지고 있었다.그는 자신의 욕망을 통째로 잠가 버린 상태였다.“그렇게 다 없애면 괜찮아져요?”“적어도 실수하지는 않습니다.”“도현 씨가 원하는 것까지 없애라는 뜻은 아니었어요.”“지금은 구분이 어렵습니다.”그날 저녁 재하가 집으로 찾아왔다.프로젝트 서류에 긴급 서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현관에서 받고 갈게.”재하가 말했지만 나는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커피라도 마시고 가세요.”도현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재하는 서류를 설명했고, 나와 같은 소파에 앉지 않으려고 일부러 맞은편 의자를 골랐다.그 배려가 더 어색했다.“둘 다 나 때문에 불편해졌네.”재하가 웃으며 말했다.“그런 거 아니에요.”“도현아, 넌 괜찮냐?”도현은 한참 뒤 대답했다.“안 괜찮아.”재하의 표정이 진지해졌다.“어떤 부분이?”“네가 이 집 안에 있는 것.”너무 솔직한 말에 나까지 놀랐다.하지만 도현은 이어 말했다.“그래도 나가라고 하지는 않을 거야. 서윤이 초대했으니까.”재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그 정도면 진전이네.”업무가 끝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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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친구의 손

공동 프로젝트 촬영 날, 예상하지 못한 사고가 발생했다.조명 장비 하나가 넘어지며 내 쪽으로 떨어졌다.재하가 먼저 발견하고 내 팔을 잡아당겼다.장비는 바닥에 부딪혀 깨졌고, 나는 재하의 품 안에 가까이 붙은 상태로 멈췄다.“다친 데 없습니까?”“괜찮아요.”그가 내 어깨와 팔을 확인하는 순간 도현이 촬영장 안으로 들어왔다.그의 시선이 재하의 손에 꽂혔다.“손 놔.”낮고 날카로운 목소리였다.재하는 곧바로 손을 놓았다.“장비가 떨어졌어.”“봤어.”“한 대표가 다칠 뻔해서—”“봤다고 했어.”도현은 내 앞에 서서 몸을 확인했다.“다친 곳은요?”“없어요.”“병원에 갑니다.”“안 다쳤다니까요.”“검사를 받아야 합니다.”“도현 씨.”내가 팔을 붙잡자 그가 순간적으로 뿌리쳤다.강한 움직임은 아니었지만 모두가 보는 앞이었다.촬영장이 조용해졌다.도현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미안합니다.”그는 즉시 한 걸음 물러났다.“지금은 제가 가까이 있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도현은 촬영장을 나갔다.재하가 따라가려 했지만 내가 막았다.“제가 갈게요.”건물 뒤편에서 도현을 찾았다.그는 벽에 손을 짚고 거칠게 숨을 쉬고 있었다.“도현 씨.”“가까이 오지 마십시오.”“왜요?”“또 잘못할까 봐.”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 멈췄다.“재하 씨가 저 구해 준 거 봤잖아요.”“네.”“그런데 왜 화가 났어요?”“그의 손이 당신 몸에 닿아 있는 것만 보였습니다.”“제가 다칠 뻔한 건요?”도현은 대답하지 못했다.그 사실이 그를 더 괴롭게 하는 듯했다.“당신이 괜찮은지보다 재하의 손을 먼저 봤습니다.”그가 주먹을 쥐었다.“강현우 때와 똑같았습니다.”“그래도 이번에는 저 안 끌고 나갔잖아요.”“대신 당신 손을 뿌리쳤습니다.”“놀랐지만 안 다쳤어요.”“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도현이 나를 바라봤다.“제 불안 때문에 당신이 닿는 것까지 거부했습니다.”나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지금은 잡아도 돼요?”그가 망설이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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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사라진 연락

다음 주, 나는 프라하 출장 중 갑작스러운 통신 장애를 겪었다.휴대전화도 호텔 인터넷도 모두 끊겼다.현지 전체가 정전된 탓이었다.복구까지 걸린 시간은 세 시간.내게는 짧았지만 도현에게는 달랐다.연락이 복구되자 부재중 전화가 스물세 통 찍혀 있었다.도현에게 전화하자 바로 연결됐다.“어디입니까?”목소리가 거칠었다.“호텔이에요. 정전됐어요.”“왜 프런트 전화도 받지 않았습니까?”“호텔 전체가 끊겼다니까요.”“재하에게는 연락했습니까?”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왜 재하 씨가 나와요?”“그 사람은 현지 파트너와 연락이 됐다고 했습니다.”“회사 비상망으로 확인했겠죠.”“당신은 그 사람에게 먼저 연락했습니까?”또 불안이 질문을 집어삼키고 있었다.“도현 씨.”“대답하십시오.”“안 했어요.”“확실합니까?”숨이 막혔다.“지금 저 의심해요?”통화가 조용해졌다.도현도 그제야 멈췄다.“아닙니다.”“방금 확실하냐고 했잖아요.”“당신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그래서 재하 씨랑 연락했는지부터 물어요?”“그 사람은 당신 상황을 알고 있었고, 저는 몰랐으니까.”질투와 공포가 완전히 뒤섞여 있었다.“저 지금 너무 화나요.”“알겠습니다.”“오늘은 연락하지 마요.”“서윤.”“도현 씨가 진정하려면 저한테 계속 확인받는 것부터 멈춰야 해요.”나는 통화를 끊었다.곧바로 다시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한 시간 뒤 메시지가 도착했다.[더 연락하지 않겠습니다. 안전하다는 것만 알려 줘서 고맙습니다.]그다음에는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그 침묵이 오히려 마음을 무겁게 했다.다음 날 서울로 돌아오자 도현은 공항에 나오지 않았다.집에도 없었다.식탁 위에 짧은 메모만 놓여 있었다.[당신이 편히 들어올 수 있도록 오늘은 호텔에 있겠습니다.]나는 바로 도현에게 전화했다.“어디 호텔이에요?”“말하지 않겠습니다.”“왜요?”“당신에게 공간이 필요하다고 했으니까.”“집에서 나가라는 말은 안 했어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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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다시 열린 보관함

며칠 뒤 내가 먼저 보관함 열쇠를 꺼냈다.도현은 열쇠를 보자 표정이 굳었다.“아직 이릅니다.”“왜요?”“제가 완전히 괜찮아진 것이 아닙니다.”“저도 알아요.”“그런데 왜 열려고 합니까?”“도현 씨가 통제하고 싶은 마음을 무서워해서 아예 없애려 하니까요.”나는 열쇠를 그의 손에 쥐여 줬다.“오늘은 제가 먼저 선택할게요.”“무엇을 원합니까?”“묶는 건 안 해요.”“그럼?”“거울, 검은 장갑, 자세 통제만.”도현은 한참 나를 바라봤다.“질투와 관련된 질문은 하지 않겠습니다.”“한 번은 해도 돼요.”“왜 허락합니까?”“참는 척하다가 나중에 터지는 것보다 나으니까.”우리는 함께 보관함을 열었다.도현은 검은 장갑만 꺼냈다.커프와 리본은 그대로 남겨 뒀다.거울 앞에 선 뒤 내가 먼저 손을 등 뒤로 모았다.“제가 아직 명령하지 않았습니다.”“제가 선택한 자세예요.”그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좋습니다.”장갑 낀 손이 내 어깨를 바로 세웠다.“시선은 거울로.”나는 거울 속 도현을 바라봤다.“오늘 재하와 연락했습니까?”첫 번째이자 마지막 질문이었다.“네. 업무 자료 받았어요.”도현의 턱이 굳었다.“개인적인 말은요?”“도현 씨가 괜찮냐고 물었어요.”손길이 멈췄다.“뭐라고 대답했습니까?”“도현 씨가 노력 중이라고 했어요.”“그 사람이 저를 걱정합니까?”“친구니까요.”도현은 더 묻지 않았다.약속을 지키며 손을 내렸다.“질문 끝났어요?”“네.”“불안은요?”“남아 있습니다.”“그럼 말해요.”“재하가 당신과 제 관계를 저보다 더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싫습니다.”“왜요?”“당신이 힘들 때 그 사람에게 제 이야기를 하게 될까 봐.”나는 몸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저는 이미 재하 씨한테 도현 씨 이야기 했어요.”도현의 눈빛이 차갑게 굳었다.“무엇을 말했습니까?”“도현 씨가 불안해서 욱한다고요.”“왜 그 사람에게—”목소리가 높아지려는 순간 그가 스스로 멈췄다.장갑 낀 손이 주먹으로 굳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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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친구를 잃을 각오

재하는 결국 도현에게 직접 말했다.“이 프로젝트에서 빠지겠다.”도현의 표정이 굳었다.“이유는?”“한 대표와 일할 때마다 네 눈치를 보는 게 지쳤어.”“내가 업무에서 빠지라고 한 적은 없어.”“말로는 안 했지.”재하는 쓴웃음을 지었다.“하지만 내가 한 대표 옆에 서기만 해도 네 표정이 바뀐다.”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다.도현이 직접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네가 빠지는 건 받아들일 수 없어.”“친구라서?”“프로젝트에 네가 필요하니까.”재하는 고개를 저었다.“그 말만으로는 부족해.”긴 침묵 끝에 도현이 말했다.“네가 서윤과 가까워지는 것이 싫다.”재하의 표정이 굳었다.“역시 그렇군.”“하지만 그 감정 때문에 네 일을 막는 것도 잘못됐어.”“그걸 알면서 왜 계속 이래?”도현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강현우 이후로 누군가 서윤에게 관심을 보이면, 결국 데려갈 거라는 생각부터 든다.”“난 네 친구야.”“그래서 더 두렵다.”“왜?”“나보다 편하고, 나보다 오래 웃게 해 줄 수 있으니까.”재하는 한동안 도현을 바라봤다.“너 정말 심각하구나.”“알고 있어.”“한 대표가 널 불쌍해서 곁에 있는 것 같아?”도현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그 말은 하지 마.”“봐. 또 감정부터 나가잖아.”재하는 물러서지 않았다.“네가 계속 이러면 한 대표보다 먼저 나를 잃을 거다.”도현은 주먹을 쥐었다.나는 그가 또 욱할까 긴장했다.하지만 도현은 천천히 손을 폈다.“그래도 네가 프로젝트에서 빠지는 것은 싫다.”“질투하면서도?”“네가 필요하다는 것과 질투하는 건 동시에 존재할 수 있으니까.”재하의 얼굴에서 조금씩 날이 풀렸다.“그럼 조건이 있어.”“말해.”“한 대표와 내가 업무 이야기할 때 끼어들지 마. 연락 시간을 통제하지도 말고.”“알겠다.”“또 욱하면?”도현은 나를 잠시 바라봤다.“사과하고, 회의에서 빠지겠다.”재하는 마침내 사퇴 의사를 거뒀다.회의가 끝난 뒤 도현은 내게 말했다.“친구까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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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화. 소유하지 않는 명령

프로젝트 최종 발표 날, 재하와 나는 무대에 함께 올랐다.도현은 객석 맨 앞줄에 앉아 있었다.발표가 끝나자 재하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고생했습니다, 한 대표님.”나는 자연스럽게 악수했다.도현의 시선이 우리 손에 머물렀다.예전이었다면 표정부터 차갑게 변했을 것이다.하지만 이번에는 박수를 멈추지 않았다.행사 후 기자가 세 사람을 함께 촬영하자고 요청했다.재하가 내 옆에 섰고, 도현은 반대편에 자리했다.“조금만 가까이 서 주세요.”사진사의 요청에 재하가 한 걸음 다가왔다.도현의 턱이 순간 굳었다.나는 그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건드렸다.괜찮다는 신호였다.도현은 내 허리를 끌어당기지 않았다.대신 낮게 숨을 내쉰 뒤 그대로 자리를 지켰다.촬영이 끝나자 재하가 웃었다.“이번에는 참았네.”“참은 게 아니라 선택한 거야.”도현이 대답했다.“무슨 선택?”“내 불안보다 서윤의 일을 먼저 보는 것.”재하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그 말이면 됐다.”집으로 돌아온 뒤 도현은 보관함 앞에 섰다.“오늘 열어도 됩니까?”“왜 열고 싶어요?”“당신을 통제하고 싶어서가 아닙니다.”그가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오늘 제가 선택한 것을 당신과 확인하고 싶습니다.”나는 열쇠를 건넸다.이번에 도현이 꺼낸 것은 두 개의 넓은 가죽 커프와 짧은 연결 고리였다.“범위는요?”“양손 고정과 자세 통제.”“질투 질문은?”“하지 않습니다.”“강도는요?”“당신이 정하십시오.”나는 초록색 버튼을 눌렀다.“평소보다 조금 강하게.”도현의 눈빛이 깊어졌지만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확실합니까?”“네, 주인님.”커프가 손목을 감쌌다.도현은 양손을 머리 위로 올리지 않고 가슴 앞에서 연결했다.내가 언제든 버튼을 누를 수 있는 위치였다.그는 나를 거울 앞에 세웠다.“오늘 재하의 손을 잡았을 때 질투했습니다.”“알아요.”“당신 옆에 가까이 서는 것도 싫었습니다.”“네.”“하지만 그 감정은 당신이 책임질 일이 아닙니다.”그의 손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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