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Chapter 131 - Chapter 140

420 Chapters

131화. 미뤄진 날짜

“결혼식 날짜를 정해야 합니다.”도현이 식탁 위에 달력을 내려놓았다.프라하에서 돌아온 첫날 밤이었다. 나는 아직 캐리어도 다 풀지 못했는데, 달력에는 이미 가능한 날짜가 표시돼 있었다.“이건 누가 정했어요?”“비서실에서 제 일정과 당신의 순환 근무 일정을 비교했습니다.”“결혼식 날짜까지 비서실이 알아요?”“후보 날짜만 정리한 겁니다.”나는 달력을 넘겨 봤다.가능한 날은 세 개뿐이었다.한 날짜는 프라하 신규 매장 개점 직전이었고, 다른 날짜는 유럽 투자 설명회와 겹쳤다. 마지막 날짜는 반년 뒤였다.“반년 뒤로 해요.”도현의 표정이 굳었다.“너무 늦습니다.”“반년이 뭐가 늦어요?”“이미 약혼한 지 오래됐습니다.”“결혼식 급하게 한다고 관계가 달라져요?”“달라지지 않습니다.”“그런데 왜 서둘러요?”도현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나는 달력을 덮었다.“또 불안한 거예요?”그의 손가락이 달력 모서리를 눌렀다.“당신이 계속 프라하와 서울을 오가고 있습니다.”“그건 일이고요.”“알고 있습니다.”“그럼요?”도현이 낮게 말했다.“결혼식 날짜가 정해져 있으면 적어도 당신이 돌아올 이유가 하나 더 생길 것 같습니다.”가슴이 묵직해졌다.강현우와 재하를 거치며 나아졌다고 생각했지만, 불안은 모양만 바뀌어 남아 있었다.“저는 결혼식 때문에 돌아오는 거 아니에요.”“압니다.”“그런데도 날짜로 묶어 두고 싶어요?”도현의 시선이 내려갔다.“그렇게 들린다면 잘못 말했습니다.”“아니요. 정확하게 말한 것 같아요.”나는 달력을 다시 펼쳤다.“도현 씨는 언제 하고 싶은데요?”“가장 빠른 날.”“그날은 프라하 매장 개점 직전이에요.”“일정을 조정할 수 있습니다.”“제 일정은요?”“그것도—”말을 멈춘 도현의 표정이 굳었다.또 내 일을 대신 조정하려 했다는 걸 스스로 깨달은 것이다.“미안합니다.”“결혼 준비 때문에 법인장 일을 줄이고 싶지는 않아요.”“알겠습니다.”“그리고 결혼식은 둘이 같이 준비하는 거예요. 도현 씨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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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화. 차가운 상견례

차명희 이사장은 약속 시간보다 십 분 먼저 도착해 있었다.호텔 한식당의 가장 안쪽 방.그녀는 흰색 정장을 입고 창가에 앉아 있었다. 도현과 닮은 눈매였지만, 표정은 그보다 훨씬 차가웠다.“앉아요.”첫인사도 없이 자리를 권했다.도현이 내 의자를 먼저 빼 주자 차명희의 시선이 짧게 움직였다.“많이 달라졌구나.”“무엇이 말입니까?”“다른 사람 의자를 직접 빼 줄 정도로.”도현의 표정이 굳었다.나는 먼저 인사했다.“처음 뵙겠습니다. 한서윤입니다.”“알고 있어요.”차명희는 내 얼굴보다 손가락의 반지를 먼저 봤다.“이미 약혼했다는 것도 들었고요.”“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건 죄송합니다.”도현이 말하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사과할 일은 아니야. 네가 언제부터 가족과 상의했다고.”식사가 시작됐지만 누구도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차명희는 내 경력과 프라하 법인 실적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독립 법인 대표 계약도 체결했죠?”“네.”“임기는 삼 년이고.”“일 년 단위 재평가 조건입니다.”“결혼 후에도 계속 프라하에 있을 생각입니까?”“순환 근무를 유지할 예정입니다.”차명희가 도현을 바라봤다.“너는 동의했고?”“서윤의 일입니다.”“결혼할 사람이 일 년의 절반을 외국에서 보내는데도?”도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그 문제는 저희가 결정합니다.”“네가 결정하지 못하니 묻는 거야.”공기가 차갑게 굳었다.나는 도현의 손등을 살짝 눌렀다.감정부터 튀어나오지 말라는 신호였다.“이사장님께서 원하시는 조건이 있습니까?”내 질문에 차명희의 시선이 돌아왔다.“결혼을 반대하지는 않아요.”그녀는 얇은 서류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다만 결혼 후 프라하 법인장직은 내려놓았으면 합니다.”도현이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만하시죠.”“앉아.”“서윤의 자리를 거래 조건으로 올리는 자리라면 더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도현 씨.”내가 부르자 그가 멈췄다.“제가 들을게요.”“들을 필요 없습니다.”“제가 받을 조건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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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화. 떠날 준비

8혼전계약서의 내용은 생각보다 합리적이었다.결혼 전 각자 소유한 재산은 개인 재산으로 유지한다.회사 지분은 상대 배우자에게 자동 이전되지 않는다.이혼 시 경영권과 관련한 청구를 하지 않는다.나는 대부분의 조항에 동의했다.문제는 도현이었다.“서명할 필요 없습니다.”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가 계약서를 덮었다.“왜요?”“당신이 제 재산을 노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저도 안 노려요.”“그럼 더 필요 없습니다.”“필요할 수 있어요.”도현의 표정이 굳었다.“왜 필요합니까?”“결혼과 회사는 분리하는 게 맞으니까요.”“당신도 언젠가 이혼할 가능성을 생각합니까?”말이 너무 빠르게 튀어나왔다.나는 펜을 내려놓았다.“혼전계약서가 이혼 준비는 아니잖아요.”“저에게는 그렇게 보입니다.”“또 불안해진 거예요?”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나는 계약서를 넘겼다.“이 조항은 저한테도 필요해요. 프라하 법인 지분이 생겨도 도현 씨 회사랑 섞이지 않게.”“저는 당신 회사에 손댈 생각이 없습니다.”“그러니까 문서로 남기면 되죠.”“왜 문서가 필요합니까?”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제가 말한 것으로 부족합니까?”“신뢰랑 제도는 다른 문제예요.”“저와 결혼하면서 빠져나갈 길부터 정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목이 막혔다.합리적인 대화를 하려 했는데, 도현의 불안은 이미 다른 결론에 도착해 있었다.“도현 씨.”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제가 떠날 준비를 하는 게 아니라, 서로의 일을 지키는 준비를 하는 거예요.”“떠날 생각이 없다면 왜 이혼 조항까지—”“모든 혼전계약서에 들어가는 내용이에요.”“저는 원하지 않습니다.”“하지만 저는 원해요.”거실이 조용해졌다.도현의 손이 계약서 위에서 굳었다.“당신이 원한다면 서명하겠습니다.”말은 받아들였지만 표정은 전혀 아니었다.“억지로 하지 마요.”“억지가 아닙니다.”“지금 저 잃을까 봐 그러는 거잖아요.”도현은 눈을 감았다.“네.”너무 솔직한 대답에 더 말하기 어려워졌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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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화. 열려 있던 서랍

결혼 준비 업체에서 온 직원은 서유진 실장이었다.차명희 이사장이 오랫동안 이용해 온 업체라고 했다.“식은 소규모로 진행하신다고 들었습니다.”“네. 촬영도 최소화하고 싶어요.”“하객 명단과 장소 보안은 저희가 따로 관리하겠습니다.”유진은 집 안을 둘러보며 신부 대기 공간과 촬영 동선을 확인했다.결혼식을 호텔이 아닌 우리가 사는 집의 테라스에서 진행하는 안도 검토 중이었기 때문이다.“침실 쪽도 확인해야 합니까?”도현의 목소리가 차갑게 변했다.“입장 준비 공간으로 사용할 가능성이 있어서요.”“다른 방을 사용하십시오.”“알겠습니다.”유진은 바로 물러났다.문제는 내가 작업실에서 하객 명단을 찾는 동안 생겼다.도현이 잠시 전화를 받으러 나갔고, 유진이 거실 치수를 재다가 열린 서랍 앞에 멈춰 있었다.그 서랍에는 우리가 사용하던 카드와 합의 메모 일부가 들어 있었다.“뭘 보고 계세요?”내가 묻자 그녀가 놀라 서랍을 닫았다.“죄송합니다. 줄자가 걸려서—”“서랍을 열었습니까?”“원래 조금 열려 있었습니다.”나는 안쪽을 확인했다.붉은 카드와 검은 카드, 색깔 신호가 적힌 메모는 그대로였다.하지만 은색 카드 한 장이 보이지 않았다.[선택받았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여기 있던 카드 보셨어요?”“아니요.”유진의 대답이 너무 빨랐다.도현이 돌아오자 상황을 설명했다.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가방을 확인하겠습니다.”유진이 당황했다.“제 가방을요?”“이 집에서 물건이 사라졌습니다.”“도현 씨.”나는 그의 팔을 잡았다.“보안팀 부르지 마요.”“확인해야 합니다.”“증거도 없이 가방부터 보겠다고 하면 안 돼요.”도현은 나를 바라봤다.불안과 분노가 먼저 튀어나오려는 얼굴이었다.그러나 그는 가까스로 멈췄다.“실장님.”내가 말했다.“오늘 일정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카드가 잘못 들어갔다면 지금 돌려주세요.”“정말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유진은 가방을 직접 열어 안을 보여 줬다.카드는 없었다.그녀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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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유출된 문장

익명 게시글은 몇 시간 만에 기사로 번졌다.처음에는 이름이 없었다.하지만 ‘유명 기업 의장’, ‘해외 독립 법인장’, ‘결혼 준비 중’이라는 단서만으로 사람들은 우리를 특정했다.기사에는 흐릿한 카드 사진과 함께 문장 하나가 적혀 있었다.[명령이 아닌 선택.]손목의 팔찌 안쪽에 새긴 문장이었다.나는 화면을 보자마자 숨이 멎었다.“이 문장은 카드에 없었어요.”도현이 내 손목을 바라봤다.“팔찌를 촬영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언제요?”“서유진 실장이 집에 왔을 때.”“그분은 제 손목 가까이 온 적 없어요.”“그럼 이전에 들어온 사람입니다.”도현은 보안팀에 집 출입 기록 전체를 요청했다.결혼 업체뿐 아니라 청소 직원, 수리 기사, 배송 기사까지 조사 대상에 넣었다.“잠깐만요.”내가 막았다.“그 사람들을 전부 의심할 거예요?”“외부인이 알 수 없는 문장입니다.”“우리 사진에 팔찌가 찍혔을 수도 있어요.”“각인까지 보일 정도의 사진은 없습니다.”도현의 말이 맞았다.기사 내용은 더 자극적으로 변했다.[차도현 의장, 약혼녀와 사적 지배 계약 의혹.][해외 법인장 인사 과정에 강압적 관계가 영향 미쳤나.]내가 강제로 통제당하고 있다는 추측까지 나왔다.회사 이사회는 긴급 해명을 요구했다.윤세라 대표에게서 전화가 왔다.“프라하 법인 이사회도 설명을 원합니다.”“사생활입니다.”“알고 있어요. 하지만 강압 관계라는 의혹이 붙었습니다.”“제가 직접 말하겠습니다.”도현이 내 휴대전화를 가져가려 했다.“제가 책임지겠습니다.”“무슨 책임이요?”“모든 관계가 제 요구로 시작됐다고 밝히겠습니다.”나는 휴대전화를 그의 손에서 빼앗았다.“그렇게 말하면 기사가 사실이 되잖아요.”“당신이 피해자로 몰리는 것보다 낫습니다.”“제 선택을 도현 씨 잘못으로 만들지 마요.”도현의 표정이 굳었다.“당신의 자리까지 위험합니다.”“그래서 제가 말해야 해요.”“세상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그러니까 숨기자고요?”“당신을 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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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화. 공개된 취향

서울 본사 이사회와 프라하 법인 이사회가 동시에 열렸다.화면 한쪽에는 윤세라 대표와 본사 임원들이, 다른 쪽에는 프라하 이사들이 앉아 있었다.도현은 내 옆에 자리했지만 발언권을 요청하지 않았다.먼저 질문한 사람은 최우진 상무였다.“기사에 언급된 사적 계약이 실제로 존재합니까?”“성인 간의 합의 내용을 기록한 문서는 있었습니다.”회의실이 술렁였다.“그 문서가 차도현 의장의 지시로 작성됐습니까?”“둘이 함께 작성했습니다.”“업무상 관계가 있던 시기에도 유지됐습니까?”“네.”질문이 날카로워졌다.“대표와 직원이라는 권력관계가 있었는데도 자발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도현이 몸을 움직였다.나는 테이블 아래에서 그의 손등을 눌렀다.직접 대답하겠다는 신호였다.“그래서 업무 평가권을 분리했고 독립 위원회 검토도 받았습니다.”“사적 관계가 인사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증거가 있습니까?”“제 승진과 법인장 선임 과정은 외부 평가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한 이사가 말했다.“문제는 성과가 아닙니다. 회사 임원으로서 품위 유지 의무입니다.”“성인 간 합의된 사생활이 품위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대중이 불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대중에게 보여 주려고 한 일이 아닙니다.”내 목소리가 단단해졌다.“유출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유출된 내용이 불쾌하니 책임지라고 하는 건 순서가 잘못됐습니다.”도현의 시선이 내게 머물렀다.최우진이 다시 물었다.“강압은 전혀 없었습니까?”“없었습니다.”“차 의장이 강한 주도권을 행사한 적도 없고요?”“주도권을 행사한 적은 있습니다.”회의실이 다시 조용해졌다.“제가 원했고, 범위와 중단 신호를 정했으며, 언제든 멈출 수 있었습니다.”“그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할 수 있습니까?”“아니요.”“증명하지 못한다면—”“증명할 의무가 없습니다.”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제 동의를 증명하기 위해 사생활을 더 공개하라는 요구에는 응하지 않겠습니다.”도현이 처음으로 발언권을 요청했다.“한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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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화. 한서윤의 대답

기자회견장은 예상보다 컸다.백 개가 넘는 카메라가 단상을 향해 있었다.도현은 내 오른쪽에 앉았지만 마이크를 잡지 않았다.첫 질문부터 날카로웠다.“기사에 언급된 지배·복종 관계를 인정하십니까?”나는 숨을 고른 뒤 대답했다.“구체적인 사생활은 설명하지 않겠습니다.”“그럼 부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까?”“성인 두 사람이 합의한 관계를 제3자가 이름 붙이고 심판할 권리는 없습니다.”다른 기자가 물었다.“회사 내 권력 차이가 있었는데 진정한 동의가 가능했습니까?”“그 문제를 인식했기 때문에 평가권 분리와 외부 심사를 받았습니다.”“차 의장의 요구를 거절한 적도 있습니까?”“여러 번 있습니다.”회의실 곳곳에서 키보드 소리가 빨라졌다.“거절했을 때 불이익은 없었습니까?”“없었습니다.”“증거가 있습니까?”“제가 현재 차 의장과 다른 의견으로 프라하 법인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이 증거 중 하나입니다.”한 기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한서윤 대표께서 피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질문에 분노가 올라왔다.하지만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제 선택을 존중한다면서 제 말을 믿지 않는다면, 결국 제가 어떤 답을 해도 피해자로만 보겠다는 뜻입니까?”기자가 입을 다물었다.“강압이 있었다면 보호와 조사가 필요합니다.”나는 말을 이었다.“하지만 제가 합의했다고 분명히 말하는데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보호가 아니라 또 다른 통제입니다.”도현의 손이 테이블 아래에서 미세하게 움직였다.내 손을 잡고 싶지만 참는 듯했다.마지막 질문이 나왔다.“유출된 문서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공개할 의향이 있습니까?”“없습니다.”“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제 사생활을 전부 공개해야만 결백해지는 구조를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기자회견은 한 시간 만에 끝났다.반응은 갈렸다.당당하다는 의견과 회사 임원으로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동시에 쏟아졌다.그러나 강압 피해자라는 일방적인 보도는 줄어들기 시작했다.차에 타자 도현이 내 손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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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화. 사라진 원본

박미라는 처음에는 모든 사실을 부인했다.“저는 서랍을 열어 본 적도 없습니다.”보안팀이 중고 거래 기록과 접속 위치를 제시하자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수첩은 버려진 물건인 줄 알았습니다.”“잠긴 보관함 안에 있었습니다.”도현의 목소리가 차갑게 내려앉았다.“청소할 때 문이 열려 있었어요.”“거짓말하지 마십시오.”그가 테이블 위에 손을 짚었다.박미라가 움찔했다.나는 도현의 팔을 붙잡았다.“제가 물을게요.”그는 바로 물러났지만 눈빛은 그대로였다.“왜 사진과 수첩을 팔았어요?”박미라는 한참 버티다 결국 입을 열었다.결혼 업체 직원 서유진이 열린 서랍 속 카드를 우연히 찍었다.그 사진을 지인 단체방에 올렸고, 박미라가 내용을 알아봤다.박미라는 청소 중 보관함 열쇠가 놓인 위치를 기억하고 있었다.우리가 집을 비운 날 수첩을 꺼내 온라인 제보자에게 팔았다.“돈이 필요했습니다.”“그래서 타인의 사생활을 판 겁니까?”“내용이 그렇게 심각한 건지 몰랐어요.”도현이 앞으로 나섰다.“심각하지 않으면 훔쳐도 됩니까?”“도현 씨.”내가 다시 부르자 그가 멈췄다.보안팀은 경찰 신고와 손해배상 절차를 진행하기로 했다.서유진 역시 사진을 무단 촬영하고 공유한 책임으로 업체에서 해고됐다.사건의 구조는 생각보다 단순했다.호기심으로 찍은 사진.돈 때문에 훔친 수첩.조회수를 원한 제보자.거대한 음모는 없었다.그 단순함이 오히려 더 허무했다.집으로 돌아오자 도현은 보관함을 열었다.남아 있는 카드와 합의 문서를 모두 꺼냈다.“이것들을 외부 금고로 옮기겠습니다.”“아니요.”“집에 두는 것은 위험합니다.”“증거로 쓰려고요?”“다시는 유출되지 않게 보관하려는 겁니다.”나는 카드와 문서를 한데 모았다.“없애고 싶어요.”도현의 표정이 굳었다.“무엇을 없앤다는 겁니까?”“이 종이들.”“왜요?”“우리 관계를 증명하려고 계속 문서를 붙잡고 있는 게 싫어요.”그의 얼굴에서 불안이 빠르게 번졌다.“관계 자체도 끝내려는 겁니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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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선택의 주인

이사회는 유출 사건의 수사 결과를 확인한 뒤 최종 결론을 내렸다.프라하 법인장직 유지.도현의 전략 의장직도 유지.사생활 유출이 경영 적격성을 침해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판단했다.회사 차원의 징계는 없었다.대신 외부인의 주거지 출입과 개인 문서 보관 절차를 개선하라는 권고가 내려졌다.기자들은 박미라와 서유진의 범행 기록이 공개되자 관심을 빠르게 거뒀다.도현과 나를 향하던 비난도 조금씩 줄었다.답답했던 상황은 풀렸지만, 집 안의 갈등은 남아 있었다.“그 원본은 어디 있습니까?”도현이 다시 물었다.나는 작업실 서랍에서 봉투를 꺼냈다.안에는 최초로 작성한 합의서 한 장이 들어 있었다.서로의 선택을 존중하고 중단 신호를 따른다는 내용.“왜 숨겼어요?”“경찰이나 이사회에 넘어가면 복사될 수도 있으니까.”“제가 제출하자고 하면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그때 도현 씨는 모든 책임을 혼자 지려고 했어요.”그는 반박하지 못했다.“그래서 제가 먼저 지켰어요.”“하지만 저에게도 이 문서에 대한 권리가 있습니다.”“맞아요.”나는 봉투를 그에게 건넸다.“그래서 지금 같이 결정하려고요.”도현은 합의서를 펼쳤다.처음 만났을 때 작성한 문장들이 남아 있었다.[명령은 합의된 범위 안에서만 유효하다.][거절은 관계의 거절이 아니다.][중단 신호 이후에는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는다.]도현의 손가락이 마지막 문장에서 멈췄다.“이 문서는 우리를 보호했습니다.”“알아요.”“없애면 불안합니다.”“왜요?”“제가 또 선을 넘었을 때, 당신이 보여 줄 증거가 사라지니까.”뜻밖의 대답이었다.그는 자신을 믿지 못해서 문서를 붙잡고 있었다.“도현 씨.”나는 그의 앞에 앉았다.“제가 문서를 없애고 싶은 건 도현 씨를 무조건 믿어서가 아니에요.”“그럼?”“문서가 있어도 제가 말하지 못하면 소용없으니까.”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이제는 종이보다 제가 말하는 걸 먼저 들어요.”도현은 한동안 합의서를 바라봤다.“완전히 없애지 않고 봉인하는 것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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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화. 문서 없는 밤

카드와 메모를 없앤 첫날 밤.도현은 보관함 앞에 서 있었지만 문을 열지 않았다.“왜 가만히 있어요?”“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생각하고 있습니다.”“예전에는 잘만 했잖아요.”“예전에는 정해진 범위가 있었습니다.”“오늘은 직접 물어봐요.”도현이 나를 바라봤다.“제가 주도권을 가져도 됩니까?”“네.”“손목 고정은요?”“괜찮아요.”“시야 제한은?”나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오늘은 보고 싶어요.”“자세 통제는?”“네.”“강도는요?”“평소보다 조금 강하게.”“중단 신호는 기존 색깔을 사용합니까?”“그건 그대로 해요.”도현은 그제야 보관함을 열었다.넓은 가죽 커프와 검은 장갑, 짧은 연결 고리만 꺼냈다.“반지는?”“그대로 둘래요.”“팔찌도?”“네.”도현은 내 손목을 잡기 전 다시 물었다.“지금 시작해도 됩니까?”“네, 주인님.”커프가 손목을 감쌌다.도현은 혈색과 여유를 확인한 뒤 두 손을 앞쪽으로 연결했다.예전과 같은 도구인데도 느낌은 달랐다.종이에 적힌 허락이 아니라 방금 내가 말한 선택만 남아 있었다.“거울 앞으로 가십시오.”나는 천천히 걸었다.도현은 뒤에서 허리를 잡아 자세를 바로 세웠다.“불편합니까?”“아니요.”“색깔.”“초록색.”검은 장갑을 낀 손이 턱을 들어 올렸다.“오늘 기사와 이사회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왜요?”“이 시간을 위로의 대가로 사용하고 싶지 않으니까.”“그럼 뭘 확인할 건데요?”도현의 시선이 거울 속 내 눈에 고정됐다.“문서가 없어도 당신이 남아 있는지.”나는 연결된 손을 조금 움직였다.“저 지금 묶여 있는데요.”“풀어 드릴까요?”“아니요.”“왜입니까?”“제가 선택했으니까.”그의 눈빛이 깊어졌다.도현은 연결 고리를 잡았지만 당기지 않았다.“한 걸음 가까이 오십시오.”나는 스스로 뒤로 물러나 그의 가슴에 등을 기댔다.“잘했습니다.”입술이 목덜미 가까이 닿았다.내 몸이 긴장하자 그는 즉시 멈췄다.“노란색입니까?”“아니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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