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Chapter 141 - Chapter 150

420 Chapters

141화. 결혼식 전날

결혼식 전날 밤, 집 안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거실 한쪽에는 내일 입을 드레스가 걸려 있었고, 식탁 위에는 최종 하객 명단과 일정표가 놓여 있었다.프라하에서는 윤세라와 현지 직원들이 도착했고, 루카도 뮌헨에서 넘어왔다. 재하는 도현의 부탁으로 식 진행을 확인하고 있었다.모든 준비가 끝났는데도 도현은 좀처럼 침실에 들어오지 않았다.나는 작업실에서 그를 찾았다.도현은 책상 위에 오래된 상자 하나를 올려놓고 있었다.“이게 뭐예요?”“처음 사용했던 물건들입니다.”상자 안에는 낡은 카드와 얇은 수첩이 들어 있었다.유출 사건 뒤 대부분 없앴다고 생각했는데, 이것들은 다른 곳에 보관돼 있었던 모양이었다.“왜 아직 가지고 있어요?”“버리지 못했습니다.”도현은 수첩을 펼쳤다.첫 번째 명령.두 번째 명령.그 아래로 우리가 처음 정했던 규칙과 중단 신호가 그의 글씨로 적혀 있었다.나는 마지막 장을 넘겼다.열한 번째 명령까지 기록돼 있었다.하지만 열두 번째 칸은 비어 있었다.“제목은 열두 번째 명령인데, 정작 열두 번째가 없었네요.”“의도적으로 비워 뒀습니다.”“왜요?”도현의 손가락이 빈칸 위에 머물렀다.“처음에는 당신이 열두 번째 대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그 말에 오래전 사건이 떠올랐다.누군가 만들어 놓은 숫자와 규칙.사람을 선택하고 분류하던 차가운 기록.“그런데 당신은 대상이 아니었습니다.”도현은 수첩을 덮었다.“제가 정한 명령을 따르는 사람도 아니었고요.”“많이 따르긴 했는데요.”“거절한 횟수가 더 많았습니다.”“그건 도현 씨가 자꾸 이상한 걸 시켜서죠.”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잠시 뒤 도현은 책상 서랍에서 작은 봉투를 꺼냈다.안에는 아무 문장도 적히지 않은 흰색 카드 한 장이 있었다.앞면에는 숫자만 새겨져 있었다.[12]“내일 결혼식 끝나고 열어 보십시오.”“지금 보면 안 돼요?”“안 됩니다.”“또 명령이에요?”“부탁입니다.”나는 카드를 불빛에 비춰 봤지만 안쪽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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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화. 같은 이름 아래서

결혼식은 우리가 함께 사는 집의 테라스에서 열렸다.하객은 많지 않았다.윤세라와 재하, 루카, 프라하 법인 직원 몇 명과 가까운 가족들.차명희 이사장은 가장 앞줄에 앉아 있었지만 어떤 조건도 내밀지 않았다.나는 프라하 법인장이라는 직책을 그대로 유지한 채 식장에 들어섰다.도현은 흰 꽃으로 장식된 단상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눈이 마주친 순간, 그의 굳어 있던 표정이 아주 조금 풀렸다.내가 끝까지 나타날지 정말 걱정했던 얼굴이었다.주례는 없었다.우리는 서로에게 직접 약속을 읽었다.도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한서윤 씨의 일을 존중하겠습니다.”차분한 목소리였지만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당신의 선택을 제 불안보다 먼저 듣겠습니다.”그가 잠시 숨을 골랐다.“붙잡고 싶은 마음 때문에 가두지 않겠습니다.”재하가 뒤쪽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도현은 그쪽을 보지 않았다.“하지만 떠날까 두려울 때는 숨기지 않고 말하겠습니다.”이번에는 내 차례였다.“차도현 씨가 완벽해서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하객들 사이에 작게 웃음이 번졌다.도현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불안하면 욱하고, 질투하면 표정부터 달라지고, 가끔 제 일정까지 마음대로 바꾸려 하니까요.”“서윤.”그가 낮게 불렀다.“아직 안 끝났어요.”나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래도 잘못했을 때 돌아와서 다시 배우는 사람이기 때문에 선택합니다.”도현의 시선이 부드러워졌다.“저 역시 도현 씨의 불안을 이용하지 않겠습니다. 중요한 일을 숨기지 않고, 혼자 모든 책임을 지려 하지 않겠습니다.”나는 그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그리고 도현 씨가 저를 필요로 해서가 아니라, 원해서 곁에 있다는 말을 믿겠습니다.”그는 내 손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믿기 어려울 때는 다시 말해 주십시오.”“몇 번이나요?”“믿을 때까지.”서약이 끝난 뒤 도현은 바로 입을 맞추지 않았다.내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지금 해도 됩니까?”하객들 앞인데도 끝까지 확인하는 모습에 웃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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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화. 열두 번째 명령

침실에는 거울 앞 의자와 작은 상자 하나만 준비돼 있었다. 화려한 장식도, 미리 꺼내 둔 도구도 없었다. “아무것도 준비 안 했어요?” “당신이 무엇을 명령할지 몰랐으니까.” 도현은 재킷을 벗고 내 앞에 섰다. 오늘만큼은 그가 먼저 범위를 묻지 않았다. 열두 번째 명령을 내릴 사람이 나였기 때문이다. 나는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넓은 가죽 커프 두 개와 검은 리본, 모래시계가 들어 있었다. 그동안 수없이 사용했던 물건들이었지만 오늘은 의미가 달랐다. “앉아요.” 도현은 거울 앞 의자에 앉았다. “손 내밀어요.” 그가 양손을 내밀었다. 나는 커프를 채우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손바닥 위에 하나씩 올려놓았다. “왜 사용하지 않습니까?” “아직 명령 안 했어요.” 도현은 묻지 않고 기다렸다. 나는 검은 리본으로 그의 눈을 가렸다. “불편해요?” “아닙니다.” “색깔.” “초록색.” 그가 사용하던 질문을 내가 그대로 돌려줬다. “손은 무릎 위에 두고 움직이지 마요.” “알겠습니다.” 나는 도현의 주위를 천천히 걸었다. 시야가 가려진 그는 작은 소리에도 긴장했다. “지금 불안해요?” “조금.” “제가 사라질까 봐요?” “네.” 결혼식을 마친 밤인데도 그의 두려움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몇 걸음 물러났다. 도현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움직였어요.” “미안합니다.” “사과 말고 이유.” 그가 숨을 골랐다. “당신이 멀어진 것 같아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어디 있는지 말해 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말해 주십시오.” “바로 앞에 있어요.” 나는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올렸다. 그제야 굳어 있던 손가락이 풀렸다. “열두 번째 명령을 내릴게요.” 도현이 자세를 바로 세웠다. “듣겠습니다.” 나는 안대를 풀지 않은 채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앞으로 불안할 때 저를 가두지 마요.” “네.” “혼자 결론 내리고 물러나지도 말고요.” “알겠습니다.” “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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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화. 결혼 이후의 첫 명령

결혼식이 끝난 지 사흘째였다. 집 안에는 아직 치우지 못한 흰 꽃과 선물 상자가 남아 있었다. 현관에는 내 구두와 도현의 검은 구두가 나란히 놓여 있었고, 식탁 위에는 프라하 법인 일정표와 서울 본사 회의 자료가 겹쳐 있었다. 결혼을 했다고 달라진 것은 많지 않았다. 도현은 여전히 새벽부터 서류를 읽었고, 나는 커피를 마시며 프라하 직원들과 화상회의를 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가 이제 내 손가락의 반지를 볼 때마다 시선을 오래 머문다는 정도였다. “오늘 몇 시에 끝납니까?” 도현이 물었다. “일곱 시쯤요.” “저녁 약속은?” “프라하 투자팀이랑 화상회의요.” “남자는 몇 명입니까?” 나는 노트북에서 시선을 들었다. “뭐라고요?” 도현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뒤늦게 깨달은 듯 굳었다. “회의 참석자를 물은 겁니다.” “왜 성별부터 물어요?” “습관이 남았습니다.” 강현우와 재하 사건 이후 줄어들었던 질투가 결혼과 동시에 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남편 됐다고 더 심해진 거 아니에요?” “그럴 이유는 없습니다.” 도현은 그렇게 말하면서 내 손가락의 반지를 다시 봤다. “표정은 있는데요.” “당신이 제 아내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도 안다는 것이 아직 익숙하지 않습니다.” “좋은 거 아니에요?” “좋습니다.” 잠시 뒤 그가 덧붙였다. “그래서 더 신경 쓰입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노트북을 닫았다. “도현 씨.” “네.” “결혼했다고 제 일정 확인할 권리가 더 생긴 건 아니에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의에 남자가 몇 명인지도 안 알려 줄 거예요.” 도현의 턱이 미세하게 굳었다. “알겠습니다.” 말은 순순히 받아들였지만 기분까지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 그날 저녁 회의가 예상보다 길어졌다. 일곱 시에 끝난다고 했지만 시계는 이미 아홉 시를 넘기고 있었다. 회의를 마치고 거실로 나오자 도현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식탁 위 음식은 손도 대지 않은 채 식어 있었다. “왜 먼저 안 먹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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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화. 같은 집, 다른 대표

결혼 이후 첫 공동 출근 날.도현과 나는 같은 차를 타고 회사에 도착했다.문제는 로비에서 시작됐다.“한서윤 대표님, 프라하 쪽 긴급 화상회의가 잡혔습니다.”내 비서가 다가오자 도현의 비서도 동시에 말했다.“차도현 의장님, 투자위원회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우리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걸어야 했다.도현의 손이 내 손목을 잠깐 잡았다가 놓였다.“점심은 함께합니까?”“일정 봐야 해요.”“어제는 함께하기로 했습니다.”“긴급회의가 생겼잖아요.”도현의 표정이 굳었다.나는 주변 직원들의 시선을 의식해 목소리를 낮췄다.“회사예요.”그가 곧바로 손을 거뒀다.“알겠습니다, 한서윤 대표.”지나치게 공식적인 호칭이었다.회의는 예상보다 심각했다.프라하 공장 신규 설비가 통관에서 멈췄고, 납품 일정이 최소 일주일 밀릴 상황이었다.나는 현지 법무팀과 물류사를 연결한 뒤 점심시간까지 자료를 정리했다.휴대전화에는 도현의 메시지가 세 번 와 있었다.[점심 장소를 예약했습니다.][회의가 길어집니까?][답이 없군요.]마지막 문장은 짧았지만 기분이 그대로 드러났다.나는 바로 전화했다.“미안해요. 지금 봤어요.”“점심은 취소입니까?”“먹을 시간 없을 것 같아요.”“십 분도 없습니까?”“도현 씨.”“알겠습니다.”통화는 그대로 끝났다.오후 세 시가 넘어서야 설비 통관 문제가 해결됐다.나는 도현의 사무실로 향했다.비서는 그가 회의 중이라고 했지만 안에서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자 도현은 혼자 창가에 서 있었다.테이블 위에는 손도 대지 않은 도시락 두 개가 놓여 있었다.“회의 중이라면서요?”“혼자 생각하고 있었습니다.”“아직도 안 먹었어요?”“당신과 먹으려고 준비한 겁니다.”나는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음식은 이미 식어 있었다.“이렇게까지 기다릴 필요 없었잖아요.”“결혼한 뒤 첫 출근이었습니다.”“그래서요?”“적어도 점심은 함께할 줄 알았습니다.”목소리에는 화보다 서운함이 컸다.“긴급한 일이었어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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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화. 남편의 자리

프라하 법인과 서울 본사의 공동 프로젝트 첫 현장 점검 날.도현은 기술 총괄로 참석했고, 나는 현지 운영 책임자로 회의를 이끌었다.회의 중 독일 투자사 측 대표가 내게 질문했다.“한 대표님이 최종 의사결정권자입니까?”“프라하 운영에 관한 최종 결정은 제가 합니다.”그가 도현을 바라봤다.“차 의장님의 승인이 없어도요?”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나도 굳이 그에게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이 프로젝트는 공동 사업이지만 법인은 독립적으로 운영됩니다.”투자사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회의가 끝난 뒤 도현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왜 그래요?”“아무것도 아닙니다.”“그 표정으로요?”“당신이 제 승인 없이 결정할 수 있다고 말한 부분이 조금…”“틀렸어요?”“아닙니다.”“그런데요?”도현은 복도 끝에서 멈췄다.“남편으로서 기분이 이상했습니다.”“회사에서 남편 자리가 왜 나와요?”“그래서 말하지 않으려 했습니다.”그는 솔직하게 인정했다.“당신이 제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우면서도 불안합니다.”“왜 불안해요?”“저 없이도 너무 잘하니까.”말이 의외였다.“제가 못해야 좋아요?”“그런 뜻은 아닙니다.”“그럼?”도현은 잠시 망설였다.“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나는 그를 바라봤다.차도현은 늘 누군가를 지키고 결정하고 책임지는 사람으로 살아왔다.그런데 나는 이제 그가 없어도 계약하고, 직원을 이끌고, 회사를 운영할 수 있었다.“도현 씨는 제 상사로 필요하지 않아요.”그의 표정이 굳었다.나는 바로 말을 이었다.“남편으로 필요해요.”“어떤 방식으로?”“제가 혼자 해결할 수 있어도, 끝나고 제일 먼저 말하고 싶은 사람.”도현의 눈빛이 조금 풀렸다.그날 밤 호텔로 돌아오자 그는 테이블 위에 작은 검은 상자를 올려놓았다.안에는 얇은 가죽 목걸이와 자물쇠가 있었다.“이건 뭐예요?”“사용하지 않아도 됩니다.”“목에 하는 거예요?”“네.”예전의 초커와 달리 장식처럼 얇고 단정했다.안쪽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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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화. 잠기지 않은 문

호텔에서 돌아온 뒤, 도현은 목걸이 열쇠를 내게 건넸다.“제가 가지고 있어요?”“네.”“도현 씨가 잠갔잖아요.”“풀 권리는 당신에게 있어야 합니다.”나는 열쇠를 침대 옆 서랍에 넣었다.며칠 뒤 문제가 생겼다.새벽 한 시, 프라하 공장에서 긴급 연락이 왔다.설비 점검 중 직원 한 명이 다쳤다는 보고였다.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현장 책임자로서 직접 상황을 확인해야 했다.나는 옷을 갈아입었다.도현이 침대에서 일어났다.“어디 갑니까?”“공장에요.”“지금 혼자?”“기사 불렀어요.”“저도 갑니다.”“내일 아침 이사회 있잖아요.”“취소하겠습니다.”“도현 씨가 갈 필요 없어요.”그의 표정이 굳었다.“필요 여부를 당신 혼자 정하지 마십시오.”“프라하 법인 일이에요.”“당신이 새벽에 사고 현장으로 갑니다.”“그래서요?”“남편이 같이 가겠다는 겁니다.”목소리가 높아졌다.나는 재킷 단추를 잠그며 말했다.“남편이라도 제 업무에 따라다닐 필요 없어요.”“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그럼 뭔데요?”도현은 대답하지 못했다.불안이 또 감정보다 먼저 튀어나온 상태였다.“제가 다칠까 봐 무서워요?”“네.”“그럼 그렇게 말하면 되잖아요.”그의 호흡이 잠시 멈췄다.“당신이 사고 현장에 가는 것이 두렵습니다.”“그래도 저는 가야 해요.”“압니다.”“도현 씨는 여기 있어요.”그는 턱을 굳혔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도착하면 연락하십시오.”“네.”공장에 도착하자 부상자는 이미 병원으로 이동한 뒤였다.현장 점검과 직원 면담까지 마치니 새벽 네 시가 넘었다.호텔로 돌아오자 도현은 거실 불을 켜 둔 채 기다리고 있었다.“왜 안 잤어요?”“잠들 수 없었습니다.”“연락했잖아요.”“네.”그는 내 얼굴과 손을 천천히 확인했다.“다친 곳은 없습니까?”“없어요.”그제야 도현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나는 침실로 들어가 목걸이를 풀려고 서랍을 열었다.열쇠가 없었다.“열쇠 어디 있어요?”도현의 표정이 굳었다.“제가 옮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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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화. 아내의 조건

도현은 며칠 동안 목걸이에 손을 대지 않았다.나 역시 다시 착용하지 않았다.서로 사과는 끝냈지만, 작은 불편함은 남아 있었다.그때 차명희 이사장에게서 저녁 초대가 왔다.“결혼 후 첫 공식 가족 식사입니다.”도현이 초대장을 보며 말했다.“안 가도 됩니다.”“왜요?”“어머니가 또 조건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이번에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저도 함께 갑니다.”“당연하죠. 가족 식사잖아요.”차명희의 저택에는 낯선 손님들이 먼저 와 있었다.재단 이사와 계열사 임원들.가족 식사가 아니라 사실상 공식 소개 자리였다.“도현의 아내이자 프라하 법인 대표인 한서윤 씨입니다.”차명희가 나를 소개했다.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쏠렸다.한 임원이 웃으며 말했다.“이제 차씨 집안 사람이니 프라하 법인도 본사와 더 가까워지겠군요.”나는 잔을 내려놓았다.“법인은 기존대로 독립 운영됩니다.”“부부끼리 굳이 선을 나눌 필요가 있습니까?”도현이 입을 열기 전에 내가 먼저 대답했다.“그래야 서로의 회사를 지킬 수 있습니다.”다른 사람이 물었다.“결혼 후에도 한 대표라는 호칭을 계속 사용합니까?”“네.”“공식 석상에서는 차 의장 부인으로 소개하는 편이 자연스럽지 않을까요?”도현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제 아내는 직함이 있습니다.”목소리가 낮게 울렸다.“그 직함을 지우고 소개하지 마십시오.”차명희가 그를 바라봤다.“도현아.”“결혼했다고 서윤의 이름이 제 뒤로 가는 일은 없습니다.”식탁이 조용해졌다.이번에는 그의 욱한 감정이 틀린 방향은 아니었다.하지만 나는 테이블 아래에서 그의 손을 잡았다.더 나가지 말라는 신호였다.식사가 끝난 뒤 차명희가 나를 따로 불렀다.“도현을 잘 다루는군요.”“다루는 게 아닙니다.”“저 아이가 멈추는 건 당신 말뿐이던데요.”“멈출 이유를 이해하면 멈추는 거예요.”차명희는 잠시 나를 바라봤다.“결혼 후에도 법인장직을 유지하겠다는 생각은 변함없습니까?”“네.”“아이 계획이 생겨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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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화. 남편의 질투

프라하 신규 매장 오픈식에는 현지 언론과 투자자들이 대거 참석했다.행사 진행을 맡은 남자는 체코 유명 방송인 마렉이었다.그는 리허설부터 지나치게 친근했다.“한 대표님, 카메라가 들어오면 제 팔을 잡고 이동하시면 됩니다.”“혼자 걸어도 됩니다.”“연출상 자연스럽게 보이려는 겁니다.”그 순간 뒤에서 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필요 없습니다.”마렉이 돌아봤다.“차 의장님, 행사 동선에 관한 문제입니다.”“한 대표가 거절했습니다.”도현은 내 옆으로 왔지만 몸을 끼워 넣지는 않았다.예전과 달리 내 대답을 대신하지도 않았다.마렉은 어깨를 으쓱하며 물러났다.“알겠습니다.”행사는 순조롭게 진행됐다.하지만 마렉은 무대에서 나를 소개하며 농담을 던졌다.“프라하가 사랑하게 된 대표입니다. 남편분이 긴장하실 만하죠.”관객들이 웃었다.카메라가 도현을 비췄다.그는 웃지 않았다.행사 후 대기실 문이 닫히자마자 도현이 말했다.“저 사람을 다음 행사에서 제외하십시오.”“또 시작이에요?”“공식 석상에서 사적인 농담을 했습니다.”“저도 싫었어요.”“그런데 왜 웃었습니까?”“카메라가 있었잖아요.”도현의 표정이 굳었다.“그 사람을 향해 웃었습니다.”“도현 씨.”또 감정이 먼저 나갔다.그도 바로 깨달았지만 이번에는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그가 당신 팔을 잡으려 했고, 무대에서는 사랑받는 여자라고 말했습니다.”“진행 멘트였어요.”“저는 싫었습니다.”“그건 말할 수 있어요.”“그리고 다음 행사에서 보지 않았으면 합니다.”“그건 제가 결정해요.”도현의 턱이 굳었다.“남편으로 부탁해도 안 됩니까?”“부탁은 할 수 있어요. 결정은 제가 하고.”“그 차이가 지금 중요합니까?”“중요해요.”잠시 팽팽한 침묵이 흘렀다.도현이 먼저 시선을 내렸다.“알겠습니다.”행사 계약서를 확인해 보니 마렉의 발언은 사전 합의에 없는 내용이었다.나는 다음 일정에서 그를 제외하기로 했다.도현에게 말하자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풀렸다.“제 부탁 때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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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화. 두 도시의 규칙

공동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생활은 더 복잡해졌다.도현은 한 달 중 보름을 프라하에서 보내고, 나머지는 서울에서 근무했다.나는 두 달 프라하, 한 달 서울이라는 기존 순환 일정을 유지했다.결혼했지만 함께 있는 날보다 떨어져 있는 날이 더 많았다.첫 달은 괜찮았다.두 번째 달부터 문제가 생겼다.영상 통화 중 도현이 물었다.“오늘 저녁은 누구와 먹습니까?”“직원들이랑요.”“몇 시에 끝납니까?”“모르겠어요.”“끝나면 연락하십시오.”“네.”처음에는 자연스러웠다.하지만 질문은 점점 늘었다.회의 장소.참석자.호텔 도착 시간.다음 날 일정.도현도 자신이 다시 확인하려는 습관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런데 멈추지는 못했다.결정적인 일은 내가 연락을 잊은 밤에 벌어졌다.직원 송별회가 길어졌고 휴대전화 배터리가 꺼졌다.호텔에 도착해 충전기를 꽂자 부재중 전화가 열여덟 통이었다.도현에게 전화하자 곧바로 연결됐다.“어디입니까?”목소리가 차갑게 얼어 있었다.“호텔이에요.”“왜 연락하지 않았습니까?”“배터리가 꺼졌어요.”“직원 휴대전화라도 빌릴 수 있었습니다.”“정신이 없었어요.”“제가 얼마나—”그는 말을 멈췄다.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제가 화를 내기 전에 통화를 끊는 것이 좋겠습니다.”“도현 씨.”“지금은 당신이 무사하다는 것보다 연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 화가 납니다.”그의 솔직함에 오히려 숨이 멎었다.“그래서요?”“그 감정을 당신에게 쏟고 싶지 않습니다.”“끊고 혼자 참으려고요?”“다른 방법을 모르겠습니다.”나는 잠시 생각했다.“우리 규칙 다시 정해요.”“어떤 규칙입니까?”“연락 의무 말고, 연락이 없을 때 행동하는 규칙.”다음 날 서울로 돌아온 뒤 우리는 식탁에 마주 앉았다.이번에는 카드도 수첩도 사용하지 않았다.첫째, 예정된 연락이 없으면 한 시간까지 기다린다.둘째, 이후에는 비서나 호텔에 안전 여부만 확인한다.셋째, 상대가 돌아오면 추궁보다 상태를 먼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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