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Chapter 151 - Chapter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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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화. 세 번째 도시

두 도시의 규칙을 정한 지 일주일 뒤, 프라하 법인으로 새로운 제안서가 도착했다.발신자는 폴란드 경제개발청이었다.바르샤바 외곽 산업단지에 제2공장을 설립하면 토지 임대료와 세금을 지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조건은 좋았다. 프라하 공장의 생산 한계를 해결하고 동유럽 시장까지 넓힐 수 있었다.문제는 마지막 장에 있었다.[현지 법인 설립 후 대표자가 최소 일 년간 바르샤바에 상주할 것.]나는 문장을 세 번 읽었다.프라하와 서울만으로도 도현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부족했다. 여기에 바르샤바까지 추가되면 사실상 일 년 동안 집에 거의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윤세라 대표와 화상회의를 열었다.“사업성은 확실해요.”그녀가 말했다.“하지만 한 대표가 꼭 상주해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초기 투자 조건이 현지 책임자의 직접 관리예요.”“다른 사람을 세우면요?”“그 경우 지원 규모가 절반으로 줄어듭니다.”지원금이 절반으로 줄면 제2공장 계획은 성립하지 않았다.나는 제안서를 바로 도현에게 보내지 못했다.그날 밤 영상통화에서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도현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물었다.“무슨 일이 있습니까?”“그냥 피곤해요.”“거짓말하지 않기로 했습니다.”“결정된 일이 아니에요.”“그래도 말하십시오.”나는 잠시 망설이다 제안서를 전송했다.도현은 말없이 문서를 읽었다.화면을 넘기던 손이 마지막 장에서 멈췄다.“일 년 상주.”“아직 받아들인 거 아니에요.”“받고 싶습니까?”“사업적으로는요.”도현의 표정이 천천히 굳었다.“개인적으로는?”“모르겠어요.”“서울과 프라하 순환 근무도 유지하기 어렵겠군요.”“협상해 봐야죠.”“거절하면 됩니다.”이번에도 감정이 판단보다 먼저 튀어나왔다.“도현 씨.”“당신이 일 년 동안 또 다른 도시에 가야 하는 사업을 왜 받아야 합니까?”“프라하 법인이 커질 기회니까요.”“당신이 없으면 성장할 수 없는 회사입니까?”그 말이 아프게 박혔다.“제가 없어도 된다는 뜻이에요?”“그런 뜻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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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화. 오래된 이름

한예린 전무는 공동 프로젝트 킥오프 회의에 정확히 정각에 들어왔다.검은 정장과 짧게 정리한 머리, 흔들림 없는 걸음.그녀는 나보다 먼저 도현에게 손을 내밀었다.“오랜만이네요, 차 의장님.”도현은 악수를 짧게 받았다.“한 전무.”“여전히 공식적이시네요.”그녀는 웃으며 내 쪽을 바라봤다.“한서윤 대표님, 결혼 축하드립니다.”“감사합니다.”“도현 씨가 결혼할 줄은 몰랐어요.”도현 씨.그 호칭이 귀에 걸렸다.도현은 바로 정정했다.“회사에서는 차 의장이라고 부르십시오.”“예전 습관이 남았네요.”한예린은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 앉았다.회의가 시작되자 개인적인 분위기는 사라졌다.그녀는 폴란드 정부와의 협상 경험이 있었고, 현지 금융기관과도 연결돼 있었다.“상주 조건은 대표 한 명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의사결정자를 요구한 겁니다.”예린이 말했다.“공동 책임 체계를 제안하면 한 대표의 체류 기간을 줄일 수 있습니다.”“가능성이 있습니까?”내 질문에 그녀가 화면을 넘겼다.“차 의장이 기술·투자 책임자로 분기마다 현지에 체류한다는 조건을 붙이면요.”나는 도현을 바라봤다.“도현 씨도 바르샤바에 가야 한다는 뜻이에요?”“회사에서는 의장님.”그가 낮게 정정했다.예린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결혼하신 뒤에도 구분이 엄격하군요.”“필요한 구분입니다.”도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회의 결과, 한예린의 제안으로 상주 조건 재협상을 진행하기로 했다.사업적으로는 최선이었다.그런데도 마음 한쪽이 불편했다.회의 후 예린이 도현에게 낡은 만년필을 건넸다.“이거 아직 기억해요?”도현의 표정이 굳었다.“어디서 찾았습니까?”“예전 사무실을 정리하다 나왔어요.”“버리십시오.”“아버님이 주신 건데요?”차명희 이사장이 아니라 도현의 돌아가신 아버지가 선물한 물건이었다.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예린은 만년필을 도현의 서류 위에 내려놓았다.“제가 가지고 있을 이유는 없으니까.”그녀가 떠난 뒤에도 도현은 만년필을 집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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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화. 둘만의 이야기

메시지를 본 순간 손끝이 차가워졌다.도현은 휴대전화를 숨기지 않았다.오히려 화면을 그대로 내게 건넸다.“답장하지 않았습니다.”“무슨 이야기래요?”“모릅니다.”“둘이 만나야만 하는 이야기인가 봐요.”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차갑게 나왔다.도현은 곧바로 한예린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말하십시오.”스피커폰이었다.예린의 목소리가 들렸다.“한 대표님도 옆에 계시나요?”“네.”“그럼 내일 공식 회의에서 이야기하죠.”“개인적으로 정리할 내용처럼 보냈습니다.”“과거 프로젝트의 투자 손실 자료예요. 당시 담당자가 우리 둘뿐이라 먼저 확인하려 했습니다.”도현은 짧게 대답했다.“앞으로 업무 내용은 공동 채널로 보내십시오.”통화가 끝났다.“됐습니까?”그가 물었다.“제가 확인해 달라고 한 건 아닌데요.”“당신이 불편해 보였습니다.”“그래서 바로 전화한 거예요?”“불안을 오래 두고 싶지 않았습니다.”나는 소파에 앉았다.도현은 내 앞에 서서 기다렸다.“화났습니까?”“한 전무님한테는 아니에요.”“그럼 저에게?”“도현 씨 과거를 저는 너무 모르는 것 같아서요.”“묻지 않았으니까 말하지 않았습니다.”“그 말은 제가 물어봐야만 말한다는 뜻이잖아요.”도현은 잠시 생각했다.“무엇이 알고 싶습니까?”“둘이 사귄 적 있어요?”“없습니다.”“좋아한 적은요?”그의 대답이 늦어졌다.가슴이 조여 왔다.“있었어요?”“사랑은 아니었습니다.”“그게 무슨 뜻이에요?”도현은 내 옆에 앉았지만 손을 잡지는 않았다.“한예린 전무와 결혼하면 회사와 집안 모두 편해질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있습니다.”“결혼을 생각했네요.”“관계를 원한 것이 아니라 조건을 계산했습니다.”“그게 더 이상해요.”그가 반박하지 못했다.“한 전무님도 알고 있었어요?”“네.”“그래서 결혼설이 났고요?”“양가에서 의도적으로 흘린 이야기였습니다.”“도현 씨는 막지 않았어요?”“그때는 막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숨이 턱 막혔다.도현은 사랑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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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화. 아내의 회사를 사는 남편

회의 화면에 뜬 문서를 확인한 순간, 나는 말을 잃었다.[프라하 독립 법인 지분 51% 본사 인수.]인수가 완료되면 프라하 법인은 다시 서울 본사의 자회사가 된다.내 대표직은 유지되지만 최종 의사결정권은 본사 이사회로 넘어간다.한예린이 차분하게 설명했다.“바르샤바 제2공장 투자비를 본사가 부담하는 대신 경영권을 확보하는 구조입니다.”“저와 협의된 적 없습니다.”내가 말하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오늘 처음 제안하는 겁니다.”나는 도현을 바라봤다.그도 자료를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한 전무.”도현의 목소리가 차갑게 내려앉았다.“이 인수안을 누가 승인했습니까?”“투자위원회 예비 검토만 받았습니다.”“저를 제외하고요?”“차 의장님은 이해관계자입니다.”한예린은 내 쪽을 바라봤다.“배우자가 운영하는 회사를 인수하는 안건에 직접 참여하면 문제가 됩니다.”논리적으로는 맞았다.하지만 도현의 표정은 빠르게 굳었다.“이해관계를 피한다며 당사자인 한 대표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까?”“사전 유출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나는 인수 조건을 넘겨 봤다.본사는 부채 전액을 인수하고 신규 공장 자금을 지원한다.직원 고용도 보장된다.기업 입장에서는 좋은 조건이었다.대신 내가 지키려 했던 독립성이 사라진다.“한 대표님.”예린이 말했다.“현재 구조로 바르샤바까지 확장하면 재무 위험이 너무 큽니다.”“그래서 회사를 넘기라는 겁니까?”“넘기는 게 아니라 안정적인 자본 아래 두자는 겁니다.”“결국 제 남편 회사의 자회사가 되는 거잖아요.”도현이 즉시 말했다.“제 회사가 아닙니다. 주주의 회사입니다.”“그래도 세상은 그렇게 안 봐요.”내가 인수에 동의하면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결혼으로 경영권을 넘겼다고.도현의 지원을 받아 대표 자리를 유지했다고.회의가 끝난 뒤 그는 나를 따라왔지만 내가 먼저 멈췄다.“이 안건 몰랐어요?”“몰랐습니다.”“정말요?”도현의 눈빛이 흔들렸다.“저를 의심합니까?”“한 전무님이 도현 씨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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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화. 사라진 의장

도현은 약속대로 인수 관련 회의에서 완전히 빠졌다.메시지도 보내지 않았다.내가 먼저 연락하기 전까지 바르샤바 프로젝트에 관한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처음에는 편할 줄 알았다.하지만 사흘째가 되자 이상할 만큼 불안해졌다.그는 같은 집에 있으면서도 아침 일찍 출근했고, 내가 돌아오면 이미 서재에 들어가 있었다.“왜 피하는 거예요?”결국 내가 문을 열고 물었다.“피하는 것이 아닙니다.”“식사도 따로 하잖아요.”“당신이 생각할 공간을 주고 있습니다.”“같은 집에서 사라지는 게 공간을 주는 거예요?”도현은 서류를 덮었다.“제가 옆에 있으면 결정에 영향을 준다고 했습니다.”“화나서 그러는 거죠?”“화도 납니다.”그는 부정하지 않았다.“당신이 저를 의심한 것에.”“미안해요.”“사과를 받으려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그럼 뭘 원하는데요?”도현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당신이 제 도움이 필요 없다고 말할까 봐 먼저 물러났습니다.”강현우와 재하 때는 사람들을 밀어냈다.이번에는 자신을 밀어내고 있었다.“저는 도움이 필요 없다고 안 했어요.”“제 영향이 싫다고 했습니다.”“회사를 통제하는 영향이 싫다는 거였어요.”“구분하기 어렵습니다.”그의 솔직한 말에 목이 막혔다.도현은 나를 돕고 싶어 하지만, 그 도움은 너무 커서 언제든 내 자리를 덮어 버릴 수 있었다.“인수안을 어떻게 생각해요?”“제가 말해도 됩니까?”“물어보잖아요.”“재무적으로는 합리적입니다.”“그리고요?”“당신에게는 최악의 선택일 수 있습니다.”예상하지 못한 답이었다.“왜요?”“당신이 독립 법인을 만든 이유를 잃게 되니까.”“그럼 거절해야 해요?”“그것도 제가 결정할 수 없습니다.”“의견을 말해요.”도현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51%는 안 됩니다.”“대안은요?”“본사 지분을 30% 이하로 제한하고, 의결권 없는 우선주로 투자받으십시오.”“한 전무님이 받아들일까요?”“받아들이게 만들어야 합니다.”그는 책상 서랍에서 자료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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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화. 조건부 인수

본사 투자위원회와의 재협상이 시작됐다.나는 51% 인수안을 거절하고 새로운 조건을 제시했다.본사 지분 25%.의결권 없는 우선주.직원 지분 참여 10%.나머지는 유럽 지역 투자기관과 프라하 법인이 유지한다.한예린은 자료를 읽고 바로 고개를 저었다.“본사가 위험을 부담하면서 의결권을 포기할 이유가 없습니다.”“배당 우선권과 상환 우선권을 드리겠습니다.”“경영에 개입하지 못한다면 바르샤바 공장 실패를 막을 수 없습니다.”“실패 책임은 제가 집니다.”“개인적인 각오로 투자 결정을 할 수는 없습니다.”협상은 막혔다.한예린은 숫자로 말했고, 나도 숫자로 대응했다.도현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그런데 마지막 순간 예린이 새로운 조건을 내놓았다.“차도현 의장이 기술 보증 책임자로 참여한다면 25%를 검토할 수 있습니다.”또 도현이었다.“왜 차 의장님이 필요하죠?”“바르샤바 공장의 핵심 설비 특허가 본사 소유니까요.”“기술 사용 계약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사고나 생산 중단 시 최종 책임자는 필요합니다.”예린은 서류를 덮었다.“부부라서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야에서 차 의장을 대체할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회의가 끝난 뒤 나는 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한 전무님이 기술 보증을 맡아 달래요.”“조건은?”“본사 지분 25%.”“받아들이겠습니다.”너무 빠른 대답이었다.“검토도 안 하고요?”“당신이 원한 조건 아닙니까?”“도현 씨 책임이 커져요.”“그래서 필요하다고 한 것일 겁니다.”“바르샤바까지 계속 와야 하고요.”“괜찮습니다.”“저 때문에요?”도현이 잠시 침묵했다.“그 말은 하지 마십시오.”“왜요?”“제가 당신 때문에 희생하는 사람처럼 들립니다.”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저도 이 프로젝트를 원합니다.”“정말요?”“당신이 세 번째 도시까지 가는 것은 여전히 싫습니다.”“그런데요?”“그곳에 제가 갈 이유도 생기니까.”숨이 조금 풀렸다.최종 협상은 통과됐다.본사는 의결권 없는 우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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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화. 한예린의 선택

바르샤바 협상이 마무리된 뒤에도 한예린은 서울에 남았다.투자위원회는 그녀를 공동 프로젝트의 재무감독으로 정식 선임하려 했다.도현은 이해관계를 이유로 찬반 투표에서 빠졌다.나는 그녀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선임에 동의했다.문제는 다음 날 발생했다.경제지에 기사가 실렸다.[차도현 의장, 과거 혼담 상대와 신사업 재결합.]기사에는 도현과 한예린이 회의실에서 마주 보는 사진이 첨부돼 있었다.내 이름은 마지막 문단에만 등장했다.‘현재 차 의장의 배우자인 한서윤 대표 역시 프로젝트에 참여한다.’기사 속에서 나는 주요 책임자가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 낀 현재 배우자처럼 묘사돼 있었다.도현에게 연락하기 전에 한예린이 먼저 내 사무실로 왔다.“기사 봤습니다.”“한 전무님이 흘린 건 아니죠?”“아닙니다.”“확실해요?”내 질문에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저를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습니까?”“과거 결혼설을 막지 않았다고 들었어요.”“그건 십 년 전입니다.”“이번에도 기사에 도움이 되는 건 한 전무님이잖아요.”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봤다.“질투하시는군요.”“업무 문제예요.”“차 의장님과 같은 말을 하시네요.”그 말에 기분이 더 상했다.“무슨 뜻이죠?”“감정을 인정하기 전에 논리부터 꺼내는 점이요.”한예린은 휴대전화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언론사 기자와 주고받은 메시지였다.그녀는 기사 내용을 사전에 알지 못했고, 사진은 공개 회의 영상에서 캡처된 것이었다.“정정 요청은 이미 했습니다.”“미안해요.”“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의심했잖아요.”예린은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저도 한서윤 대표님을 질투한 적 있습니다.”예상하지 못한 고백이었다.“왜요?”“차도현이 선택이라는 말을 쓰게 만든 사람이니까.”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예전의 그는 가장 합리적인 조건을 고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도 예외가 아니었고요.”“한 전무님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했어요.”“알고 있습니다.”“그런데도 결혼하려 했고요?”“저도 동의했습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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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화. 첫 삽

바르샤바 제2공장 착공식 날.프라하 직원들과 서울 본사 임원, 폴란드 정부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나는 독립 법인 대표로 첫 삽을 들었다.도현은 기술 보증 책임자로 내 오른쪽에 섰고, 한예린은 투자기관 대표들과 함께 뒤쪽에 자리했다.행사가 시작되기 직전 현지 노동조합 대표가 현수막을 들고 나타났다.[외국 기업의 저임금 공장을 반대한다.]기자들이 즉시 몰려들었다.노조는 우리가 제출한 고용계약서의 임금이 현지 평균보다 낮다고 주장했다.“자료가 잘못됐습니다.”나는 계약서를 확인했다.공식 제출본에는 우리가 승인한 금액보다 18% 낮은 임금이 적혀 있었다.폴란드 채용대행사가 수수료를 늘리기 위해 직원 임금을 낮춘 것이었다.착공식은 중단됐다.정부 관계자는 조사가 끝날 때까지 지원 승인을 보류하겠다고 통보했다.모든 시선이 나를 향했다.“대표님이 계약서를 확인하지 않았습니까?”기자의 질문이 날아왔다.“최종 승인본과 제출본이 다릅니다.”“관리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제게 있습니다.”도현이 앞으로 나오려 했지만 나는 손으로 막았다.이번에는 내가 직접 감당해야 했다.“잘못된 계약은 즉시 철회하겠습니다. 노동조합과 직접 재협상하겠습니다.”“착공은 언제 재개됩니까?”“합의하기 전에는 시작하지 않겠습니다.”행사장은 혼란스러웠지만, 노동조합 대표는 대화를 받아들였다.문제는 자금이었다.착공이 한 달만 늦어져도 위약금이 발생한다.한예린이 회의실에서 말했다.“대행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해도 돈을 받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예비비를 사용하면요?”“두 달 이상 지연되면 부족합니다.”도현이 자료를 보며 말했다.“기술 발주를 단계별로 나누면 초기 비용을 줄일 수 있습니다.”“본사 승인이 필요하죠?”“제가 책임지겠습니다.”나는 그를 바라봤다.“또 혼자요?”“기술 보증 책임자의 업무입니다.”“저를 구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요?”도현은 잠시 침묵하다 솔직하게 말했다.“그 마음도 있습니다.”“그럼 구분해서 말해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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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화. 명령 없는 방

바르샤바 호텔에는 우리 둘만 사용하는 작은 스위트룸이 준비돼 있었다.착공이 재개된 날 밤, 도현은 보관함 대신 빈 테이블 앞에 서 있었다.“오늘은 아무것도 없네요.”“도구를 가져오지 않았습니다.”“왜요?”“당신이 사흘 동안 제대로 자지 못했습니다.”“그래도 괜찮은데.”“제가 괜찮지 않습니다.”도현은 내 재킷을 받아 걸었다.“오늘은 주도권도 필요 없습니다.”“주인님 쉬는 날이에요?”“그렇게 말하면 이상합니다.”나는 소파에 앉으며 웃었다.긴장이 풀리자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도현은 신발을 벗겨 주고 따뜻한 물을 가져왔다.“이렇게만 있으니까 어색해요.”“왜?”“보통 큰일 해결되면 뭔가 준비했잖아요.”“보상이나 벌처럼 느껴졌습니까?”“가끔은요.”그의 표정이 굳었다.“그렇다면 잘못했습니다.”“항상 그런 건 아니에요.”“그래도 오늘은 확인하고 싶습니다.”도현은 내 앞에 앉았다.“당신은 제가 주도하지 않는 밤에도 저와 있고 싶습니까?”질문 속 불안이 너무 선명했다.“당연하죠.”“그 역할이 없으면 제가 필요하지 않을까 봐 생각했습니다.”“도현 씨.”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주인님이라서 결혼한 거 아니에요.”“알고 있습니다.”“표정은 모르는데요.”그는 한참 내 손을 바라봤다.“처음에는 명령을 내릴 때만 당신이 제게 집중했습니다.”“그때는 그랬죠.”“그래서 제가 통제하지 않으면 당신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갈 것 같았습니다.”강현우 이후 심해진 집착도, 재하에게 향했던 질투도 결국 같은 곳에서 시작됐다.자신이 필요하지 않을까 봐.나는 그의 손을 내 목 가까이 올렸다.“오늘은 목걸이도 없어요.”“네.”“커프도 없고요.”“네.”“그래도 지금 누구 보고 있어요?”도현의 시선이 내 눈에 고정됐다.“저를 보고 있습니다.”“저도 도현 씨 보고 있어요.”그의 손가락이 목을 감싸지 않고 턱선만 천천히 쓸었다.“키스해도 됩니까?”“그건 매번 물을 거예요?”“문서 없는 밤부터 약속했습니다.”“그럼 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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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화. 새로운 번호

바르샤바 착공이 안정된 뒤 우리는 서울로 돌아왔다.프라하와 바르샤바, 서울.이제 우리의 일정표에는 세 도시가 적혔다.식탁에 세 장의 항공권을 올려놓자 도현이 한숨을 쉬었다.“결혼 전보다 더 자주 떨어져 있게 됐습니다.”“대신 도현 씨도 같이 움직이잖아요.”“항상은 아닙니다.”“또 불안해요?”“네.”그는 이제 숨기지 않았다.나는 결혼식 전날 받았던 흰색 카드 상자를 꺼냈다.열두 번째 명령이 적혀 있던 카드.그 뒤로는 새로운 숫자를 만들지 않았다.“이거 왜 꺼냅니까?”“결혼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잖아요.”“새 명령을 만들고 싶습니까?”“아니요.”나는 카드 뒷면에 작은 선을 하나 그었다.숫자 12 옆에 이어지는 선이었다.“번호 없이 가요.”“무슨 뜻입니까?”“몇 번째인지 세지 말고, 필요할 때마다 새로 시작하는 거예요.”도현은 카드를 오래 바라봤다.“기록하지 않으면 잊을 수도 있습니다.”“그러면 다시 말해요.”“당신이 지치면?”“그때는 멈추고요.”나는 카드를 다시 상자에 넣었다.도현은 거실 한쪽에 작은 가죽 상자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오늘은 뭐예요?”“세 도시를 오가기 전에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상자 안에는 세 개의 얇은 가죽 끈이 들어 있었다.검은색에는 서울.갈색에는 프라하.회색에는 바르샤바의 좌표가 안쪽에 새겨져 있었다.“팔찌예요?”“네.”“세 개 다 하라고요?”“아닙니다.”도현은 끈을 테이블 위에 나란히 놓았다.“오늘 머물고 싶은 곳을 선택하십시오.”나는 세 개를 바라봤다.도시를 선택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른 질문이었다.일과 집.독립과 결혼.떠나는 것과 돌아오는 것.나는 아무 끈도 집지 않았다.대신 도현의 손목을 잡았다.“오늘은 여기요.”“제 손목입니까?”“도현 씨 옆.”그의 눈빛이 깊어졌다.“그것은 도시가 아닙니다.”“그래서 더 좋아요.”도현은 세 개의 끈을 다시 상자에 넣었다.“그럼 오늘은 아무 표시도 하지 않겠습니다.”“커프도요?”“원합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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