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Chapter 171 - Chapter 180

420 Chapters

171화. 파리의 첫 출근

파리 운영센터의 첫 출근 날, 나는 한예린과 같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공동 대표라는 호칭, 아직 어색하죠?”“조금요.”“저도 그래요.”문이 열리자 직원들이 두 줄로 서 있었다. 전략·운영은 나, 재무·지배구조는 예린이 책임지는 체제였다.문제는 첫 회의부터 발생했다.르노아 측 임원이 조직도를 띄웠다.“대외적인 대표자는 한 명이어야 합니다.”화면에는 한예린의 이름만 올라가 있었다.“합의된 구조와 다릅니다.”내가 말하자 그는 차분하게 답했다.“한서윤 대표는 네 도시를 오가야 합니다. 상주하는 한 전무가 외부 대표를 맡는 편이 효율적입니다.”“상주 시간이 직급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예린도 내 편에 섰다.“공동 서명 없이는 주요 계약을 체결하지 않는 것으로 합의했습니다.”하지만 르노아 측은 이미 보도자료까지 준비해 두었다.[파리 운영센터 초대 대표 한예린.]내 이름은 운영 총괄로 내려가 있었다.회의를 중단시키고 법무팀을 불렀다.그날 오후 도현에게 상황을 알리자 첫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당장 서울 본사 명의로 항의하겠습니다.”“잠깐만요.”“합의된 직함을 일방적으로 바꿨습니다.”“제 자리예요. 제가 되찾을게요.”도현의 표정이 굳었다.“돕지 말라는 겁니까?”“필요하면 요청할게요.”“그동안 잘못된 기사가 먼저 퍼질 수 있습니다.”“그래도 도현 씨 회사 힘으로 눌렀다는 말은 듣기 싫어요.”그는 한동안 침묵했다.“알겠습니다.”말은 받아들였지만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다.“불안해요?”“화가 납니다.”“저한테요?”“당신 이름을 지운 사람들에게.”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오늘은 참아요.”“회사에서도, 집에서도?”“회사에서는요.”도현의 시선이 천천히 짙어졌다.“집에서는 감추지 않아도 됩니까?”“저를 벌하지만 않으면요.”그날 밤 도현은 커프 대신 검은 장갑만 꺼냈다.“오늘은 손대기 전에 전부 묻겠습니다.”“왜요?”“당신의 자리를 빼앗긴 분노를 당신에게 쏟고 싶지 않으니까.”장갑 낀 손이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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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화. 두 명의 대표

다음 날 나는 예정된 기자 간담회를 취소하지 않았다.오히려 한예린과 나란히 단상에 올랐다.르노아 측 홍보 책임자는 당황했다.“보도자료 수정이 아직—”“그래서 직접 설명하려고요.”첫 질문이 나왔다.“파리 운영센터의 대표는 한예린 전무입니까?”예린이 마이크를 내게 넘겼다.“공동 대표입니다.”화면에 원래 체결한 계약서를 띄웠다.전략·운영 책임자 한서윤.재무·지배구조 책임자 한예린.주요 계약은 공동 승인.“오늘 오전 배포된 자료는 합의되지 않은 문서입니다.”르노아 임원의 표정이 굳었다.기자가 물었다.“내부 갈등이 있다는 뜻입니까?”“갈등은 숨길 일이 아닙니다. 합의대로 수정하면 끝날 문제입니다.”예린도 말했다.“제 이름만 올린 보도자료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두 사람이 한 자리를 두고 다툴 거라 예상했던 분위기가 뒤집혔다.간담회가 끝나기도 전에 르노아 측은 수정 보도자료를 배포했다.[파리 합작법인 공동 대표 한서윤·한예린.]이름은 되찾았지만 새로운 질문이 붙었다.“차도현 의장과의 혼인 관계가 선임에 영향을 줬습니까?”나는 준비한 외부 심사 점수를 공개했다.“제 남편은 선임 투표에서 제외됐습니다.”“차 의장께서 프로젝트를 지원한 사실은요?”“기술 보증 책임자로 참여했습니다. 배우자가 아니라 전문가로 평가하십시오.”기자회견 뒤 도현에게 전화했다.“해결했어요.”“봤습니다.”“어때요?”“제가 개입하지 않아도 충분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목소리가 지나치게 차분했다.“서운해요?”“조금.”“왜요?”“당신이 제 도움 없이 해냈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힘든 순간에 제가 옆에 없었기 때문입니다.”“전화했잖아요.”“화면과 옆자리는 다릅니다.”그날 밤 호텔 문을 열자 도현이 서 있었다.“어떻게 왔어요?”“마지막 회의를 화상으로 바꿨습니다.”“또 일정 바꿨어요?”“당신에게 오기 위한 제 일정입니다.”그는 바로 안지 않았다.“오늘 제 도움이 필요합니까?”나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대표로서는 아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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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화. 불량률 3.7퍼센트

파리 센터가 정상 운영을 시작한 지 열흘째, 프라하에서 긴급 보고가 도착했다.신규 제품 일부에서 접착 불량이 발견됐다.불량률 3.7%.출고 허용 기준의 세 배가 넘었다.더 큰 문제는 제품 일부가 이미 파리 유통망을 통해 배송됐다는 점이었다.“즉시 판매 중단하세요.”나는 전 지점에 지시했다.한예린은 손실을 계산했다.“전량 회수하면 최소 이십억입니다.”“소비자에게 넘어가기 전에 회수해야 해요.”르노아 측은 반대했다.“안전 문제가 아니라 외관 문제입니다. 해당 생산분만 선별하면 됩니다.”“접착이 떨어지면 부품이 분리될 수 있어요.”“가능성일 뿐입니다.”나는 회수 명령에 서명했다.그날 저녁 이사회는 긴급회의를 열었다.최우진 상무가 물었다.“대표 개인 판단으로 이십억 손실을 확정한 겁니까?”“소비자 안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공인기관 시험 전이었잖습니까?”“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제품이 판매됩니다.”도현은 이사회 구성원으로 참석했지만 내 편을 들지 않았다.대신 질문했다.“생산 중단 범위는 어디까지입니까?”“같은 접착제를 사용한 전 라인입니다.”“대체 공급처는 확보했습니까?”“아직입니다.”“그 상태에서 중단하면 정상 제품까지 납품하지 못합니다.”그의 질문은 차가웠다.나는 순간 서운했지만 감정적으로 답하지 않았다.“그래서 사흘간만 전면 중단하고 원인을 확인하겠습니다.”회의는 조건부로 회수 결정을 승인했다.끝난 뒤 내가 물었다.“일부러 더 세게 물었어요?”“네.”“왜요?”“제가 쉽게 동의하면 배우자를 감싸는 결정으로 보일 테니까.”“그래도 기분 나빴어요.”도현의 표정이 흔들렸다.“미안합니다.”“틀린 질문은 아니었어요.”“하지만 당신이 혼자 공격받는 기분이 들게 했습니다.”나는 한숨을 내쉬었다.“집에 가서는 회사 이야기 하지 말아요.”“알겠습니다.”그날 밤 그는 보관함을 열지 않았다.대신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고 내 휴대전화를 꺼 두었다.“이것도 명령이에요?”“부탁입니다.”“전화 오면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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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화. 회수 명령

검사 결과는 다음 날 나왔다.접착제 제조 과정에서 경화제가 잘못 배합됐다.온도가 낮아지면 부품이 분리될 가능성이 있었다.전량 회수 판단은 옳았다.하지만 안도할 시간은 없었다.불량 제품을 받은 소비자 한 명이 이미 영상을 올렸다.[결혼과 해외 진출에만 정신 팔린 대표의 제품.]영상은 빠르게 퍼졌다.댓글은 제품 문제가 아니라 내 사생활과 결혼까지 끌어들였다.한예린은 공식 사과문을 준비했다.“원인과 보상만 설명하세요. 개인 비난에는 대응하지 말고요.”도현은 다른 의견이었다.“허위 사실을 쓴 계정은 법적으로 조치해야 합니다.”“도현 씨.”“제품 비판과 사생활 모욕은 다릅니다.”“지금 고소부터 하면 입막음처럼 보여요.”“당신이 계속 공격받고 있습니다.”또 감정이 먼저 나가고 있었다.“지금은 소비자부터 봐요.”“저도 회사 입장으로 말하고 있습니다.”“아니요. 남편 얼굴이에요.”도현의 턱이 굳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반박하지 않았다.“맞습니다.”그는 회의실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그럼 법적 대응은 당신이 결정하십시오.”나는 직접 사과 영상을 촬영했다.불량 원인.회수 범위.환불과 추가 보상.생산 재개 기준.변명하지 않고 전부 공개했다.“최종 책임은 대표인 제게 있습니다.”촬영이 끝난 뒤 도현이 말했다.“그 문장은 삭제했으면 합니다.”“왜요?”“잘못은 공급업체가 했습니다.”“관리 책임은 제게 있어요.”“당신은 왜 책임질 수 있는 모든 것을 혼자 가져갑니까?”“대표니까요.”“대표도 혼자 운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도현은 영상에서 문장을 지우라고 강요하지 않았다.대신 공급업체와 품질관리팀의 책임 범위를 정리한 후속 자료를 붙였다.영상 공개 이틀 뒤 여론은 바뀌었다.빠른 회수와 투명한 공개를 긍정적으로 보는 반응이 늘었다.저녁에 집으로 돌아오자 도현이 테이블 위에 회수된 제품 하나를 올려놓았다.“왜 가져왔어요?”“기억하려고.”“뭘요?”“당신이 옳은 판단을 했어도 혼자 책임지려 했다는 것.”그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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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화. 멈춘 생산선

회수는 성공했지만 생산선은 엿새째 멈춰 있었다.대체 접착제 공급업체가 갑자기 가격을 두 배로 올렸다.“우리가 급한 걸 알고 있습니다.”프라하 구매팀장이 말했다.“받아들이지 않으면 최소 한 달 지연됩니다.”나는 계약서를 읽었다.가격보다 더 위험한 조항이 있었다.향후 삼 년간 독점 구매.한 번 서명하면 다른 업체로 바꾸기 어려웠다.“거절하세요.”“납품을 못 맞춥니다.”“단기 문제를 해결하려고 삼 년을 묶을 수는 없어요.”바르샤바 공장까지 연쇄 지연될 상황이었다.도현은 기술팀과 대체 배합을 찾겠다고 했다.“얼마나 걸려요?”“최소 열흘.”“그동안 매출이 멈춰요.”“독점계약보다 낫습니다.”나도 알았다.그러나 직원 급여와 회수 보상금이 동시에 빠져나가고 있었다.그날 밤 나는 몰래 공급업체와 다시 협상하려 했다.도현이 영상회의 화면을 보고 문 앞에 멈췄다.“무엇을 하고 있습니까?”“조건만 다시 볼 거예요.”“혼자서?”“도현 씨는 기술 대안 찾고 있잖아요.”“독점계약은 안 된다고 합의했습니다.”“가격을 더 낮추면—”“문제는 가격이 아닙니다.”목소리가 높아졌다.“급해질 때마다 미래를 담보로 내놓지 마십시오.”“회사를 멈춰 둘 수 없어요.”“그래서 제가 대체 기술을 찾고 있습니다.”“열흘이나 걸린다며요.”“저를 믿지 못합니까?”그 질문에 숨이 막혔다.“그런 뜻 아니에요.”“그런데 왜 제가 맡은 일을 기다리지 못합니까?”도현의 분노에는 질투가 아니라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나는 회의를 취소했다.“미안해요.”“사과보다 약속이 필요합니다.”“뭔데요?”“열흘을 주십시오.”“실패하면요?”“그때 함께 다른 선택을 찾습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도현은 정확히 아홉째 날 대체 배합을 완성했다.원가는 기존보다 6% 낮았고 내구성은 더 높았다.생산선이 다시 움직이는 순간 직원들이 박수를 쳤다.나는 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성공했어요.”“알고 있습니다.”“기분 안 좋아요?”“당신이 제게 가장 먼저 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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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화. 열흘의 보상

집에 도착했을 때 거실 조명은 낮게 켜져 있었다.도현은 테이블 위에 검은 장갑과 얇은 천 한 장만 준비해 두었다.“커프는 없네요.”“묶지 않겠다고 했습니다.”“천은요?”“손 위에 올릴 겁니다.”나는 재킷을 벗었다.“왜 손 위에요?”“움직이지 말라는 지시를 도구 없이 지킬 수 있는지 확인하려고.”도현은 내 앞에 섰지만 손대지 않았다.“오늘 원합니까?”“네.”“회사를 구해 준 보답으로 허락하는 겁니까?”“아니요.”“확실합니까?”“열흘 동안 도현 씨 기다린 게 미안해서도 아니에요.”나는 한 걸음 가까이 갔다.“제가 맡기고 싶어서요.”그제야 도현이 의자를 가리켰다.“앉으십시오.”양손을 무릎 위에 올리자 얇은 천이 손등을 덮었다.무게는 거의 없었다.조금만 움직이면 떨어질 정도였다.“이 천이 떨어지면 중단합니까?”“아닙니다.”“그럼요?”“왜 움직였는지 묻겠습니다.”그가 뒤로 물러났다.발소리가 사라지자 긴장이 더 선명해졌다.“눈을 감으십시오.”“안대는 안 쓴다면서요.”“스스로 감는 겁니다.”나는 눈을 감았다.도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기다림만 이어졌다.손가락을 움직이고 싶었지만 천이 떨어질까 참았다.그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열흘 동안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회사 돈이 빠져나가는 걸 볼 때.”“왜 저를 기다리지 못했습니까?”“실패하면 도현 씨한테 미안할 것 같아서.”“저에게?”“믿어 달라고 했는데 못 해낼까 봐.”장갑 낀 손이 턱을 들어 올렸다.“눈을 뜨십시오.”도현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제가 실패하면 당신이 책임져야 합니까?”“아니요.”“그럼 앞으로 제 실패 가능성까지 빼앗지 마십시오.”말이 가슴 깊이 박혔다.그는 성공할 때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실패해도 함께 결정할 사람이고 싶었던 것이다.“알겠어요.”“색깔.”“초록색.”“천을 떨어뜨리지 말고 일어나십시오.”천을 올린 채 천천히 일어났다.도현은 손을 잡아 주지 않았다.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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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화. 한예린의 사임서

생산이 정상화된 직후 한예린이 사임서를 제출했다.파리 공동 대표직과 서울 본사 전무직을 모두 내려놓겠다는 내용이었다.“이유가 뭐예요?”내가 묻자 그녀는 준비한 답처럼 말했다.“독립 투자회사를 만들 생각입니다.”“갑자기요?”“오래전부터 준비했습니다.”하지만 제출 날짜가 이상했다.불량 제품 회수로 회사가 흔들린 바로 다음 날 작성돼 있었다.“이번 일 때문이에요?”예린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회수 비용을 줄이자고 주장한 사람이 저였습니다.”“의견을 낸 것뿐이잖아요.”“만약 제 의견대로 했다면 피해가 커졌을 겁니다.”“결과를 몰랐으니까요.”“재무만 보고 안전 가능성을 가볍게 판단했습니다.”그녀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도현에게 알리자 그는 짧게 말했다.“붙잡지 마십시오.”“왜요?”“한 전무의 선택입니다.”“진짜 그렇게 생각해요?”“아닙니다.”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떠나게 두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면 과거 관계 때문에 압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그럼 제가 말할게요.”나는 예린을 다시 불렀다.“사임은 수리하지 않겠습니다.”“한 대표님.”“한 달 휴직하세요.”“제 판단이 틀렸습니다.”“대표인 저도 틀린 판단 많이 했어요.”“결과적으로 사고를 막았잖아요.”“도현 씨가 질문하지 않았다면 정상 제품까지 전부 폐기했을 수도 있어요.”예린은 말이 없었다.“우리가 필요한 건 틀리지 않는 사람이 아니에요.”나는 사임서를 돌려줬다.“틀린 뒤에 숨지 않는 사람이에요.”그녀는 결국 한 달 휴직을 받아들였다.집으로 돌아온 뒤 도현이 물었다.“한 전무가 남아서 좋습니까?”“네.”“저도 좋습니다.”“질투 안 해요?”“조금 합니다.”“어떤 걸요?”“당신이 한 전무에게 제가 해 줬으면 했던 말을 해 준 것.”뜻밖이었다.“도현 씨한테도 해 줄게요.”“무엇을?”“틀렸다고 사라지지 말기.”도현의 눈빛이 흔들렸다.그가 가장 자주 하던 일이었다.통제했다고 느끼면 물러나고, 잘못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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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화. 비어 있는 자리

한예린이 휴직하자 파리 센터의 재무 결재가 모두 내게 몰렸다.아침 일곱 시부터 밤 열한 시까지 회의가 이어졌다.도현과 같은 호텔에 머물면서도 얼굴을 보는 시간은 하루 십 분이 채 되지 않았다.넷째 날 밤, 방에 들어오자 도현의 짐이 없었다.테이블 위에 메모가 놓여 있었다.[당신이 쉴 수 있도록 옆방으로 옮겼습니다.]화가 치밀었다.나는 바로 옆방 문을 두드렸다.도현이 문을 열었다.“왜 또 사라져요?”“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옆입니다.”“말도 없이 방을 옮겼잖아요.”“새벽에도 전화가 오고, 제가 있으면 신경 쓸 것 같아서.”“저한테 물었어요?”그는 대답하지 못했다.“공간을 주는 척하면서 또 혼자 결정했어요.”“당신이 지쳐 보였습니다.”“그럼 쉬라고 말하면 되잖아요.”“제가 말하면 명령처럼 들릴까 봐.”“이렇게 없어지는 게 더 싫어요.”도현의 표정이 굳었다.“미안합니다.”나는 그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짐 다시 가져와요.”“오늘도 새벽 회의가 있지 않습니까?”“있어요.”“제가 잠들지 못할 수 있습니다.”“그건 도현 씨가 결정해요.”그는 한참 나를 바라봤다.“같이 있고 싶습니다.”“그럼 오면 되잖아요.”우리는 짐을 다시 옮겼다.새벽 한 시, 예상대로 전화가 왔다.나는 침대 옆에서 통화를 시작했다.도현은 불을 켜지 않고 누워 있었다.회의가 삼십 분을 넘기자 그가 내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통화를 끊으라는 뜻은 아니었다.그저 자신이 여기 있다는 신호였다.회의가 끝난 뒤 내가 물었다.“잠 못 잤죠?”“네.”“후회해요?”“아닙니다.”“왜요?”“비어 있는 방보다 당신 목소리를 듣는 편이 낫습니다.”나는 그의 가슴에 기대었다.“다음부터 사라지기 전에 말해요.”“사라지고 싶다고요?”“네.”“그러면 붙잡아 줄 겁니까?”“상황 봐서요.”도현의 팔에 힘이 조금 들어갔다.“매우 불안한 대답입니다.”“그래도 솔직하잖아요.”“그렇군요.”그날 밤 우리는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하지만 누구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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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화. 돌아온 사람의 조건

한 달 뒤 한예린이 복귀했다.그녀는 이전과 조금 달라져 있었다.회의에서 자신의 판단을 단정적으로 밀어붙이기보다 반대 의견부터 물었다.“회수 비용을 줄이는 안입니다. 다만 안전팀 검토 전에는 실행하지 않겠습니다.”직원들도 다시 그녀를 받아들였다.문제는 복귀 첫날 저녁에 생겼다.예린이 도현에게 따로 면담을 요청했다.“회사 복귀 전에 정리할 이야기가 있습니다.”도현은 즉시 내게 말했다.“한 전무와 단둘이 만날 예정입니다.”“말 안 해도 되는데.”“조건이었습니다.”과거 이야기가 생기면 먼저 알리기로 한 약속.“다녀와요.”“불편하지 않습니까?”“조금.”“같이 갈까요?”“아니요.”내가 웃었다.“질투한다고 업무 면담에 따라가면 도현 씨랑 똑같아지잖아요.”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저는 그렇게 심했습니까?”“많이요.”면담은 한 시간 만에 끝났다.도현은 돌아오자마자 내용을 설명했다.예린은 과거 결혼설과 관련된 자료를 모두 정리했고, 양가가 주고받았던 문서도 폐기하겠다고 했다.“도현 씨는 뭐라고 했어요?”“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아쉽지는 않았고요?”그의 눈썹이 올라갔다.“질문이 이상합니다.”“조금 질투 나니까요.”도현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더 말해 보십시오.”“싫어요. 즐기고 있잖아요.”“당신이 질투하는 경우가 드물어서 그렇습니다.”그는 내 앞에 앉았다.“무엇이 가장 불편했습니까?”“둘이 저보다 오래 알고 있다는 거.”“시간은 바꿀 수 없습니다.”“알아요.”“대신 앞으로의 시간은 당신과 보낼 겁니다.”“그 말 너무 뻔해요.”“그럼 구체적으로 말하겠습니다.”도현은 일정표를 꺼냈다.다음 달 파리 출장 중 하루를 비워 두었다.“이날은 회의 없습니다.”“왜요?”“당신과 보내려고.”“어디 가게요?”“원하는 곳을 정하십시오.”“도현 씨가 정해요.”그가 잠시 생각했다.“아무도 우리를 모르는 곳.”“또 휴대전화 끄려고요?”“네.”“회사 전화 오면?”“받지 않겠습니다.”나는 그 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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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화. 전화가 꺼진 날

우리는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작은 교외 마을로 갔다.비서도, 경호도 따라오지 않았다.도현의 휴대전화는 출발 전에 완전히 꺼졌다.“불안하지 않아요?”“매우.”“그런데 왜 껐어요?”“당신과 있기로 했으니까.”마을에는 관광객도 많지 않았다.우리는 작은 시장을 걷고, 이름 없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도현은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낯설어했다.“왜 자꾸 주변 봐요?”“누가 접근하는지 확인하는 습관입니다.”“오늘은 아무도 몰라요.”“그래도 봅니다.”시장 상인이 내게 꽃 한 송이를 건넸다.“신혼부부 같네요.”도현은 바로 말했다.“맞습니다.”상인이 웃었다.“아내를 아주 좋아하나 봐요.”“네.”대답이 너무 단호해서 내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강가에 도착했을 때 도현이 물었다.“오늘 행복합니까?”“갑자기요?”“확인하고 싶습니다.”“네.”“회사 없이도?”“당연하죠.”그는 물가를 바라봤다.“저는 회사가 없으면 제가 무엇인지 오래 몰랐습니다.”“지금은요?”도현이 내 손을 잡았다.“당신 남편.”“주인님은요?”그의 시선이 천천히 짙어졌다.“오늘도 원합니까?”“조금.”우리가 묵은 작은 숙소에는 준비된 도구가 없었다.도현은 자신의 넥타이를 풀었다.“이것만 사용해도 됩니까?”“어디에요?”“손목은 아닙니다.”그는 넥타이를 내 손바닥 위에 길게 놓았다.“이걸 잡고 놓지 마십시오.”“왜요?”“제가 질문할 때마다 원하는 대답이 아니라 진짜 대답을 하십시오. 불편하면 놓으면 됩니다.”나는 넥타이 끝을 잡았다.“시작해요.”“회사 없이도 저를 선택합니까?”“네.”“명령하지 않아도?”“네.”“제가 질투하고 욱해도?”나는 잠시 멈췄다.도현의 눈빛이 긴장했다.“잘못한 뒤 돌아오면요.”“조건부군요.”“당연하죠.”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좋습니다.”“왜 좋아요?”“거짓말하지 않았으니까.”나는 넥타이를 놓지 않은 채 그를 끌어당겼다.전화가 꺼진 하루 동안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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